# 33
<귀환무사 33화>
“미처 보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 이해하시오. 옷을 더럽힌 건 보상을 해 드리겠소.”
“어이! 샌님! 지금 그걸 사과라고 하는 거냐? 사과를 하려면 머리를 조아려야지!”
두견의 태도에 나웅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들과 싸울 순 없었다. 지금 자신은 저 앞에 앉아 있는 낭인을 잡아 가야 한다.
그래서 그가 모습을 보이기가 무섭게 객잔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혁련천후를 비롯한 일행들의 이목이 죄다 두견의 탁자로 쏠렸다.
두견의 말이 이어졌다.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면 네놈의 팔 하나로 끝내 주마.”
나웅은 어이가 없었다.
당장에 제압을 할 수도 있었지만 뒤늦게 그들이 금옥장의 무사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눌러 참아야 했다.
금옥장주는 정도맹의 가장 큰 후원자다.
해마다 그들에게서 지원을 받는 금액은 상당하다. 자신 때문에 금옥장과 맹이 불편한 관계로 돌아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어쩔 수 없이 신분을 밝혀야 했다.
“정도맹의 나웅이오.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리겠소.”
“나, 나웅!”
두견을 비롯한 금옥장의 무사들이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웅이 누군가? 정도맹주 나백의 손자요, 당대 최강의 후기지수가 아니던가. 제아무리 두견이 금옥장의 인물이라도 나웅은 두견이 어찌할 수 있는 범주를 뛰어넘는 존재다.
그런 나웅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떼를 써 댔으니 두견의 낯빛이 허옇게 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알아 뵙지 못하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소협!”
두견이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나웅은 불쾌했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혁련천후 등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나웅은 혁련천후를 향해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외쳤다.
“당문칠기를 죽인 자가 그대가 맞는가!”
순간 왕전은 남은 음식을 먹다가 켁 하며 재채기를 했고 혁련천후는 찻잔을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나웅의 말이 이어졌다.
“저항은 곧 죽음이니 순순히 따라 나서거라!”
나웅은 자신이 있었다.
탁응을 한 수에 물리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온 이유는 그만큼 무공에 자신이 있어서였다.
더불어 혼자 처리해서 명성을 높여 보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나웅으로 인해 객잔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금옥장 무사들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당문칠기의 죽음은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여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거 괜히 들어왔잖아.’
두견은 자칫하면 자신들이 험한 꼴을 당하지나 않을까 무척 불안했다. 슬쩍 뒤쪽으로 물러선 두견은 여차하면 도주할 작정을 하고는 상황을 주시했다.
탁!
왕전이 거칠게 젓가락을 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아침부터 별 미친 새끼를 다 보겠네.”
거칠기 짝이 없는 욕설에 나웅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왕전이 나웅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니가 나백의 손자냐?”
“……!”
천하의 나백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왕전. 화산의 검수들이 되레 더 놀랐다.
“감히 그분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왕전이 나백의 이름을 입에 담자 나웅도 크게 분노했다.
“네 할아비가 무슨 황제라도 된다더냐! 대갈통에 털도 마르지 않은 새끼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개소리를 늘어놔! 너 이 새끼 네 할아비에게 네놈의 대갈통만 뚝 떼서 보내 주랴!”
싸아아!
객잔 안에 갑자기 찬바람이 몰아쳤다.
나웅은 갑자기 밀려드는 강력한 기운에 내심 크게 놀랐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는 비로소 조금 전에 건너편 객잔에서 왕전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눈빛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물러섰지 않았던가.
그때 혁련천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
나웅의 두 눈은 저절로 혁련천후에게로 돌아갔다. 혁련천후는 나웅을 직시하며 특유의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남의 객잔을 망칠 수야 있나. 그냥 갈 거면 이대로 돌아가고 아니면 밖에서 해결해. 그리고 우리는 당가의 고수들을 해친 사람들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그따위로 지껄이면 너의 목을 잘라 네 조부에게 갖다 줄 것이다.”
“그냥 이참에 잘라서 보내 버리시지요.”
왕전이 장단을 맞추고 나왔다.
‘이자들! 허세가 아니다!’
나웅은 순간 자신이 맹수굴에 뚝 떨어진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저기를 좀 보십시오.”
객잔 밖을 내다보던 모용단승의 목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객잔 밖을 향했다. 혁련천후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은 것은 저잣거리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였다.
“독물을 잡아먹고 사는 놈들이 납시었군.”
왕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객잔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의 수는 열 명 남짓. 그중에서 대여섯은 사천당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진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가와 남해검문의 고수들입니다.”
굳어졌던 나웅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 * *
“나웅이 장로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허면 자네는 그만 뒤로 물러나게.”
당가의 장로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는 대뜸 혁련천후와 일행들을 향해 살기등등한 태도로 말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 같으니! 죽을죄를 지고도 지금껏 이곳에 머물러 있다니! 미처 도망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챙!
대뜸 검을 뽑아 들자 나웅이 황급히 말리고 나섰다.
“장로님! 생포를 해야 합니다!”
“이건 맹과는 상관없이 본가와 검문의 일이네. 하니 자네는 더 이상 나서지 말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들에 대한 철회령이 내려진 것을 몰랐는가? 당가와 검문을 욕보인 저놈들을 살려 주라고 자네의 조부가 말도 안 되는 명을 내렸단 말일세. 물론 우리는 그 명을 듣지 않을 생각이네만.”
나웅의 얼굴이 대번에 돌처럼 굳어졌다.
‘철회령? 왜 내게 그것을 전하지 않았지?’
철회령이 내렸다면 자신에게 분명 연락이 왔을 것이다. 자신의 이동 경로를 맹의 비영단이 알고 있으니 자신을 찾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뭔가 확실히 잘못되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나웅은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당가의 장로는 다시 한 번 싸늘히 외쳤다.
“화산 따위가 감히 당가를 건들다니. 오늘 네놈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피눈물을 흘려 가며 깨닫게 해 주마!”
혁련천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왕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새끼들 다 뒈졌네, 이제.’
그때였다.
[왕전.]
왕전은 난데없는 부름에 멀뚱하니 돌아보았다.
[나가서 처리해라.]
[저더러 말입니까?]
[그래. 죽여도 좋다.]
[다 죽여도 됩니까?]
[몇 놈은 살려 둬라.]
일순 왕전의 표정이 밝아졌다.
우드득!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자 뼈 부딪히는 소리가 섬뜩하니 울렸다.
까딱! 까딱!
당가의 장로는 난데없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왕전을 봐야 했다.
“이봐 영감탱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지.”
“이, 이놈이!”
당가의 장로가 얼굴을 붉힐 때 왕전은 문을 열고 저잣거리에 섰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당가의 장로는 나서기가 무섭게 왕전을 향해 달려들었다.
쐐액!
우장을 비스듬히 뒤집고서 주먹을 쥐자 파괴적인 기운이 왕전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독과 암기에 있어서 천하제일의 위치에 오른 당가의 또 다른 절학이 장로의 몸에서 펼쳐졌지만 왕전은 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고수였다.
“나를 얕봤다 이거지?”
왕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드는 주먹을 향해 마주 주먹을 뻗었다.
“……!”
흠칫!
당가의 장로는 순간 흠칫했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맞받아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터였다.
흠칫하는 순간에 주먹과 주먹이 강하게 충돌했다.
퍽!
“끄윽!”
피가 튀며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뒤이어 팔꿈치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로님!”
당가의 고수들이 크게 놀라며 달려왔다.
당가의 장로는 불신에 몸을 떨었다. 잘려 나간 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네놈의 주특기를 썼어야지. 상대를 얕보면 안 된다는 강호의 철칙조차 잊었다니. 그런 놈이 어떻게 장로가 되었을까? 흐흐흐!”
“놈을 쳐라!”
챙!
남해검문의 고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왕전를 둘러쌌다.
“개자식! 죽여 버린다!”
당가의 고수들도 품속에서 암기를 꺼냈다.
장로 혼자서 처리를 할 거라 믿고 지켜보고만 있었던 그들은 참혹한 결과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앞에 바람처럼 내려서는 이가 있었다.
“너희들은 내가 상대해 주지.”
혁련천후였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당가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누구보다 화산을 괴롭혀 온 곳이 무당파와 사천당가라는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싸움은 얼마 가지 않았다.
당가와 남해검문의 고수들이 아무리 수가 많다고 해도 상대는 천하를 호령했던 전왕과 그의 주인이다.
둘이면 두 곳 중 한 문파를 초토화시킬 수도 있는 전력이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혁련천후와 왕전이 누군지를 몰랐다.
그게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실수이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었다.
“이럴 수가…….”
나웅은 반쯤 넋을 놓았다.
저잣거리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곳곳에 피를 흘리며 꼬꾸라진 당가와 남해검문의 고수들.
그중 몇 명은 즉사를 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왕전에게 팔이 떨어지는 참패를 당했던 당가의 장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웅은 오연하게 서 있는 혁련천후와 왕전을 응시하며 떨리는 심장을 간신히 억눌렀다.
‘저 정도면 절대 고수, 그 이상이다. 대체 어디서 저런 고수들이…….’
그는 여전히 왕전을 몰라보고 있었다.
혁련천후야 세상 전체가 모르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왕전의 귀걸이를 봤으면 능히 눈치를 챌 법도 했건만 불행히도 끝까지 몰라본 것이다.
혁련천후는 살아남은 자들을 향해 싸늘히 일갈했다.
“상대가 검을 뽑으면 응당 맞서 싸우는 것이 무림의 법도. 패했다고 해서 복수를 꿈꾼다면 너희 두 문파가 처절한 응징을 당하게 될 것이다.”
혁련천후가 돌아섰다.
왕전이 살아남은 이들을 향해 히죽 웃어 보이고는 뒤따라 돌아섰다.
그때 당가의 장로가 이를 갈며 외쳤다.
“정체를 밝혀라! 이놈들!”
“어허, 저 영감탱이가 그래도.”
왕전이 나서려는 것을 말린 혁련천후가 당가의 장로를 직시하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은가?”
“말해라! 아니면 죽어서도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이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