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귀환무사 31화>
마교의 교주와 더불어 현존하는 고수들 중 최강자에 가장 근접한 그가 평소와는 달리 매우 심각한 표정을 하고서 맞은편에 앉은 중년인을 응시했다.
“그자가 확실한 것이오?”
“석 장로의 말로는 그가 확실한 듯합니다. 또한 징표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공손히 대답을 하는 인물은 무림맹의 비영전주 육승이란 위인이다. 맹내 서열 오위의 인사로서 정보와 첩보들을 도맡은 비영전의 수장이다.
그는 지금 아주 놀라운 보고를 나백에게 하고 있었다.
나백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생겼다.
“왜 그자가 그곳에 있는 것이오?”
“워낙에 뜻밖이라 저도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굳이 추측을 해 보자면 그 낭인이라는 자와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당가의 인물들이 참살을 당한 것에 그도 연관이 되어 있소?”
“그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 사건 이후에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 낭인과 화산의 제자들이 당가참살의 범인들이라면 그도 의심해 봐야 할 것입니다.”
나백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육 전주도 그들이 범인이라 생각하오?”
“확신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무당에서 내놓은 증거가 충분한지라…….”
“단순히 죽은 자들의 몸에 난 무공의 흔적만으로 그들을 범인으로 몰 수는 없지 않겠소? 그 정도야 약간의 머리와 힘이 있는 자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조작을 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말이오. 그러한 사안이 왜 지금에서야 내게 보고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소. 육 전주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백의 낯빛에 불쾌함이 역력했다.
육승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무당파를 위시한 강경파들의 득세야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건…….”
나백은 말을 하려다가 끝을 흐렸다.
육승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이 화산에 사감을 갖고 있음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대놓고 뭔가를 꾸미고 있으니 솔직히 더 이상은 봐줄 수가 없을 듯합니다. 차제에 더 큰 불상사가 벌어지기 전에 단호한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승의 단호한 어조에 고개를 끄덕인 나백이 다시 물었다.
“그분들은 뭐라고 하시오?”
나백은 실질적인 정도맹의 수장으로 볼 수 있는 네 명의 절대 고수 사천왕을 거론했다.
육승의 안색이 보다 무거워진다.
“두 분은 강경파를 오랫동안 지지했던 터라 맹주님께서 직접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어쩔 수가 없을 듯합니다. 다만 다른 두 분만은 좀 더 관망하고자 하는 뜻을 보이고 계십니다.”
탁!
나백이 탁자를 가볍게 치고는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화산을 구파에서 몰아내는 것이 전부는 아닐 텐데. 어찌 그러지 못해 이 난리들인지…….”
“쉽게 물러날 화산이 아닙니다. 비록 쇠락의 길을 걷고는 있다지만 그래도 전통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들도 화산을 쉽게 보다간 자칫 낭패를 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맹에 어떠한 화를 가져다줄지도 말입니다.”
육승의 어조는 강경파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나백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육승에게 타이르듯 말을 건넨다.
“육 전주도 너무 드러나게 행동하지 마시오. 자칫 그들의 눈 밖에 나면 일을 함에 있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것이 화가 납니다. 사사건건 모든 일에 반대만 해 대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맹을 떠나 천하를 주유하는 낭인이라도 되고 싶은 심정입니다.”
“허허허! 당신이 가 버리면 이 늙은이는 어찌하라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그만 화를 다스리시구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괜찮소. 육 전주의 그러한 점은 노부가 항상 부러워하는 것이니 미안해할 것 없소이다.”
육승이 자책으로 얼굴을 붉히자 나백이 듣기 좋은 말로 육승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잠시 속내를 다스린 육승이 말을 이었다.
“일단 그들이 전왕의 개입으로 당분간은 화산에서 손을 뗄 것이 분명하니 이참에 맹의 인사를 단행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흠! 육 전주의 말처럼 그들이 이번 사건에서 물러난다면야 그렇게 해도 나쁠 것이 없겠소만 과연 그들이 물러날지가 의문이오. 비록 전왕의 존재가 무당 하나만큼이나 대단하기는 하오만 화산에 대한 그들의 사감은 그것을 무시할 정도로 크지 않겠소?”
“나중에 어떻게 할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은 손을 뗄 것이 분명합니다. 전왕과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다면 중원에서 무당의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무사들에겐 아직까지 전왕은 전설과 흠모의 대상입니다. 그들도 그것을 무시할 순 없을 것입니다.”
나백은 수긍하는 빛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육승의 말대로 전왕은 그야말로 오 년 전까지는 이념을 초월하여 젊은 무사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일단은 영웅 대회를 무사히 마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다음에 각 단의 단주급과 대주급들을 대회의 성적을 바탕으로 교체하면 그들도 다른 말을 내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출전해야 하는데 그들에 비해 젊은 고수들이 많이 부족한지라, 그 점이 걱정입니다.”
“허허! 승패야 겨루기 전엔 알 수 없는 법, 출전하는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어 보는 수밖에.”
“우승이야 당연히 나백 공자가 할 테지만, 최후 여덟 명 안에 몇이 드느냐가 문제입니다. 적어도 넷 이상이 들어야 그들을 견제할 수 있습니다.”
육승이 나웅을 거론하자 나백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린다.
그 역시도 당대 영웅 대회의 우승은 자신의 손자가 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일단은 섬서에 있는 화산의 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을 철회하고 당문참살의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맹이 직접 주관할 것이라 공표하시오. 사천당문은 노부가 직접 설득하겠소.”
“알겠습니다.”
육승이 자리를 뜨자 나백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대체 그자의 정체가 무엇인데 천하의 전왕이 함께한단 말인가.”
제3장 선택
모두가 각자의 방에서 잠이 든 시각, 혁련천후는 홀로 회상에 잠겼다.
눈을 감은 그의 머릿속으로 십 년 전의 처절했던 기억들이 안개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훅!”
거친 숨이 절로 새어 나온다.
전신은 종류를 알 수 없는 각종 병기로 인한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곳에선 붉은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지혈을 했으나 워낙에 상처가 깊어 소용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니 산의 능선을 타고 날아오는 수많은 고수들이 보였다.
모두가 자신을 노리고 오는 자들이다.
한 달 동안 이어진 싸움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혁련천후는 자신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삶에 대한 욕망은 힘이 떨어질수록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죽기 싫은 것이 아니라 살고 싶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여인이 떠오른다. 그녀 때문이라도 살아야 한다.
풀어진 다리가 의지 하나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툭!
흘러내린 선혈이 바닥을 적시며 긴 꼬리를 남긴다. 그것은 추격자들에게 궤적을 알려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울 여력이 없었다.
“훅!”
팟!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혁련천후는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일각의 시간이 지나자 아홉의 인물들이 사내가 있었던 곳에 떨어져 내렸다.
붉은색 복면을 한 그들은 주변을 살펴보며 안광을 빛냈다.
“저쪽으로 갔군.”
“지독한 놈. 그 몸을 하고서 여기까지 오다니.”
선두에 있는 자의 입에서 질린 듯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동자에는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벌써 오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놈에게 당했소. 이제 남은 것은 우리들뿐, 놈이 금역(禁域)으로 들어서기 전에 어서 쫓읍시다.”
팟!
모두가 사내의 흔적을 쫓아 몸을 날렸다. 하나같이 놀랄 만한 경공술을 보여 주는 것이 일견하기에도 대단한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욱!”
복면인들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서 솟아나듯 모습을 드러낸 혁련천후는 시커멓게 죽어 버린 응혈을 한 사발이나 토해 내고는 휘청거렸다.
마지막 남은 내공을 은신술에 사용하는 바람에 더 이상 걷기조차 힘들었다.
투투툭!
떨어지는 선혈의 양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래도 걸어야 했다.
자신을 살려 줄 그곳을 향하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보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날 때까지 혁련천후는 죽지 않았다.
폭설로 인해 바닥을 길 수조차 없었지만 살아야 한다는 열망 하나로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하루를 더 걸었을 때, 저만치 앞에 희미하게 솟아난 산이 보였다.
‘저곳이다.’
산 자의 걸음을 허락하지 않는 죽음의 금역, 천 년을 이어 온 전설의 금역이다. 드디어 그곳이 나타나자 없던 힘이 솟아났다.
그에게 금역 안의 기연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로지 그곳에서 삶을 이어 가면 그뿐이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스스로 부활하면 되는 것이다.
휘이잉!
거친 눈보라도 그의 삶에 대한 열망을 막지 못했다. 산의 초입에 들어선 혁련천후는 저만치 앞에 보이는 낭떠러지를 볼 수 있었다.
그곳이 그가 가고자 했던 금역의 입구였다.
그때였다.
“저기다!”
뒤쪽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혁련천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전진했다.
퍽! 퍽!
뒤를 쫓는 자들이 날린 암기들이 어깨에 박혀 들었지만 결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오 장!
쐐액!
강력한 기운이 날아들었다.
“으아아!”
한 줌 남아 있던 선천지기를 다리에 실은 혁련천후는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허리에서 피가 튀었다.
떨어지는 혁련천후의 눈에 적발적염의 장대한 체구에 얼굴만 천으로 가린 자가 보였다.
그는 상대를 향해 웃어 주었다.
“이 승부는 너희들이 졌다.”
텅! 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혁련천후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밑을 내려다보니 검을 찬 무사들이 객잔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정도맹의 명을 받으시오.”
정도맹의 무사들이었다.
‘왕전이 있음을 알고도 또 왔단 말인가?’
혁련천후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계속해서 피를 보면 화산파에 해가 끼칠까 염려되어 일부러 왕전의 정체를 알려 줬건만 정도맹은 또다시 무사들을 보냈다.
눌러 두었던 화가 서서히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진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