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귀환무사 30화>
그 옛날 백만의 조조군을 장판파에서 홀로 맞섰던 천하맹장 장비의 현신인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때였다.
“머리를 조아리지 못할까!”
나지막한 호통이 장수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런…….’
나웅은 순간 난감했다.
장수의 말처럼 자신은 그에게 허리를 굽혀야 한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의 기재요, 나백의 손자라도 국가의 장수에겐 그저 평범한 백성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자신의 조부인 정도맹주 나백이라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귀찮군.’
나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이해하시오. 남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오.”
나백은 그냥 무시하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경공을 펼쳐 도망가면 대완마도 따라잡지 못한다.
팟!
나웅의 육신이 잔영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순간 장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이어 한 줄기 섬광이 장수의 몸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나웅을 향해 날아갔다.
꽝!
강력한 폭발음이 터져 나오며 주변의 숲 전체가 흔들렸다.
그러나 나웅은 사라지고 없었다.
장수는 나웅이 사라져 간 방향을 잠시 동안 주시하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길을 물어보려 했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린 장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여전하시겠지.”
그는 지금 황제가 아닌 진정한 주인을 찾아나서는 길이었다.
철갑이 부딪히는 소리를 울리며 전마는 서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고 방향은 섬서의 객잔을 향하고 있었다.
두두두!
장수가 사라진 직후, 풀숲에서 나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경악을 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거대한 강기, 놀랍게도 그것은 장수의 청룡언월도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전마의 허리에 걸려 있던 것을 언제 뽑아 들고 강기를 펼친 것인지 나웅의 눈으로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지간한 고수들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자신의 경공을 한눈에 파악하고 정확하게 강기를 날린 장수, 날아드는 강기를 검을 뽑아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 낼 수는 있었는데 손목부터 어깨까지 뻐근함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군부에 저만한 고수가 있었다니, 믿을 수 없군.”
나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부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 온 말이 새삼 떠올랐다.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으니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라.
“그 천하에 군부의 장수도 끼워 줘야겠군.”
씁쓸히 웃은 나웅은 장수가 사라져 간 방향을 잠시 쳐다본 뒤 다시 경공을 펼쳤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또다시 경공을 중단해야 했다.
흑색 장포에 흑발을 늘어뜨린 낭인이 나웅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아니 막아선 것이 아니라 나웅이 질주하는 방향에 그가 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사내는 나웅이 가까이 왔음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제법 긴 검 한 자루와 술병 하나가 낭인의 옆에 뒹굴고 있었다.
흠칫!
나웅은 그 자리에 섰다.
낭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조금 전의 장수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그때 낭인이 눈을 떴다.
공교롭게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나웅은 순간 칼 한 자루가 동공 속으로 박혀 드는 느낌을 받았다.
“거슬리게 서 있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라.”
지극히 무심한 목소리가 낭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감기는 눈.
나웅의 눈썹이 올라갔다.
구파의 장문들도 자신에게 하대를 하지 못한다. 하물며 낭인 따위는 자신의 눈조차 마주 보지 못한다.
‘뭐야 저놈은!’
손이 저절로 검파로 향한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순 없지. 그리고 당장은 맹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나백은 결국 참았다.
그는 낭인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그대로 경공을 펼쳐 낭인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낭인이 감았던 눈을 뜬 것은 나백이 숲 너머로 사라진 직후였다.
“나백의 일족인가?”
정도맹주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들먹인 낭인은 검을 챙겨 들고 몸을 일으켰다. 허무가 짙게 배어 있는 낭인의 눈동자가 섬서의 하늘을 향했다.
“이러다 내가 제일 늦겠군.”
휘이잉!
낭인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혁련천후와 일행들이 머무는 객잔에 정도맹의 고수들이 찾아왔다.
왕전이 그들을 맞았다. 이미 혁련천후는 그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려 둔 상태였다.
혁련천후를 제외한 모두가 일 층 객잔에서 식사를 할 쯤 들이닥친 정도맹의 고수들은 보고서에 없던 왕전이 자신들을 맞자 살짝 당황해했다.
왕전의 기세가 소위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말이 오고간 후 왕전이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고.”
“……!”
“어쩔 거냐고 묻잖아!”
왕전의 태도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정도맹의 고수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경을 치기 전에 냉큼 머리를 조아리지 못할까!”
한 노인이 호통을 치며 나섰다.
무당의 장로라는 신분을 지닌 인물로 구천각주 명보의 명령을 받고 혁련천후를 잡으러 온 자였다.
일 층 객잔에 모였던 모두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모두는 이 층 객실을 살폈다. 혁련천후가 빨리 나와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어찌 된 일인지 오늘따라 혁련천후의 기상 시간이 너무 늦었다. 그리고 화산의 태홍자 또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듯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쓸데없이 끼어들면 네놈도 일행으로 간주하고 체포할 것이니 썩 물러서라!”
다시 한 번 날아든 호통에 왕전의 눈썹이 역팔 자로 휘어졌다.
“네놈?”
왕전이 성큼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정도맹의 고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챙!
“한 발만 더 나서면 목을 벨 것이다! 이놈!”
정도맹의 고수들이 일제히 왕전의 목을 겨눈다.
왕전은 아랑곳 않고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런 그의 귓속으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난 치지 말고 빨리 돌려보내라.]
“흐흐흐.”
왕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살벌한지 정도맹의 고수들이 일순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였다.
왕전이 손으로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딸랑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봐, 말코 도사. 이게 뭔지 알아보겠지?]
맨 앞에 섰던 무당의 장로는 그제야 왕전의 귀에 걸려 있는 귀걸이를 보았다.
순간 그가 전신을 벼락 맞은 것처럼 떨었다.
“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가서 네놈의 대가리에게 전해. 이들은 나의 일행이니 쓸데없는 모함 따윈 집어치우라고 말이야. 아! 그리고 또다시 사람을 보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도 잊지 말고 전해야 할 것이다.]
무당의 장로가 손으로 귀를 막으며 휘청거렸다.
왕전의 목소리에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너희 무당…… 솔직히 마음에 안 들거든? 한 번만 더 설치면 그땐 어떻게 될지 늙은 도사, 너의 판단에 맡기마. 흐흐흐.]
“……!”
왕전이 돌아섰다.
무당의 장로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객잔으로 들어가는 왕전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장로님! 어찌 가만히 계십니까! 명령을 내려주시면 놈들을 체포하겠습니다!”
“멈추시게!”
무당의 장로는 나서려는 고수들을 말렸다.
“장로님!”
“맹으로 돌아간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놈들을 코앞에 두고 그냥 돌아가다니요!”
“가면서 말해 주겠네. 하니 지금은 내 말을 따르시게.”
무당의 장로는 황당해하는 고수들을 지나쳐 저잣거리의 남쪽을 향해 걸었다.
가면서 그는 치를 떨었다.
[전왕, 분명 전왕이었다.]
지금 그는 저승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다.
* * *
혁련천후는 탁자에 앉아 영호민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왕전과 일행들이 들어섰다.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해 놨습니다.”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민이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소? 보아하니 그냥 눈싸움만 하던 것 같던데?”
“그냥 그렇거니 해라, 꼬마.”
“뭐요? 꼬마?”
“그런 다르게 불러 주랴?”
“……!”
영호민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왕전의 눈빛을 보니 괜히 속이 오싹했다.
‘설마 나를 알아본 걸까?’
그에게는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었다. 들키면 큰일이 날 건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지켜야 할 비밀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왕전의 물음에 혁련천후는 일행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내려가서 먼저 식사들 하고 있어.”
“다 먹었습니다.”
“…….”
왕전이 도끼눈을 하고서 부라렸다.
“눈치하고는. 냉큼 내려가지 못해!”
비로소 모두는 혁련천후가 왕전과 둘이 대화를 나누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갔다.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혁련천후에게 왕전이 다시 물었다.
“이곳에 정착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럴까 생각 중이다.”
“하필이면 화산과 가까운 이곳에…….”
말을 하던 왕전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혁련천후가 화산을 거론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깜박했다.
“강호에서 섬서는 천하의 중심과 같은 곳이다. 기왕에 할 거면 이곳이 좋지 않겠느냐.”
“저야 그저 주공께서 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혁련천후는 남은 차를 마저 다 마시고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늦는군.”
“워낙 먼 곳에 있었던 놈들이니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그건 그렇고 놈들을 한꺼번에 다 부른 연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왕전의 물음에 혁련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휘이잉!
창을 열자 찬 바람이 쌩 하니 들이친다.
왕전은 그 자리에 앉아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내 복수의 끝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거야 강호를 그냥 아작을 내 버리는 게 아닙니까.”
“아니다.”
“……예?”
왕전이 눈을 동그랗게 말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혁련천후의 입에서 천하의 왕전을 놀라게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군림.”
“군…… 림이라시면?”
“내 복수의 끝은 천하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 * *
정도맹의 모든 대소사를 결정하는 대전.
그곳엔 호피로 감싼 태사의에 몸을 깊숙이 묻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팔 척 장신에 가슴까지 늘어진 백염은 신선의 그것을 보는 듯했고 심오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세상을 초월한 현자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검제(劍帝), 나백(羅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