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귀환무사 29화>
“시간이 지나면 척이도 마음을 바꿀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오, 형님!”
맞은편에 앉은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 상관명의 동생인 상관초가 위로하고 나섰다.
“시간이 지나서 될 것이 따로 있지. 그놈이 지금 앓고 있는 병이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질 병이더냐?”
“솔직히 화가 나서 미치겠습니다. 제아무리 검후라고는 하지만 나이가 서른을 넘은, 한물이 간 계집이 뭐 그리 잘났다고 본 문의 혼사를 거절한답니까.”
혼사를 거절한 독고무가 못마땅했던 상관초가 불만을 토로하자 상관명이 나무란다.
“혼사가 한쪽의 일방적인 행사로 가능한 것이더냐? 쓸데없는 말일랑 함부로 하지 마라.”
“제아무리 당대 최고의 미녀라고 해도 그 정도 나이면 어지간한 명문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척이가 누굽니까? 천하가 인정하는 기재 중의 기재가 아닙니까? 솔직히 누가 봐도 척이가 밑지는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상관초가 얼굴까지 붉히며 열을 낸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상관명의 마음을 착잡하게 하고 있었다.
“정도맹주 나백의 손주와 금옥장의 신임장주 또한 그녀에게 눈독을 들인다고 들었다. 그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거물들이 아니냐? 괜히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하루빨리 척이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탁!
“고약한!”
상관명의 말에 상관초는 탁자를 내리치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거론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천하를 떨쳐 울리는 존재들이다.
나백의 손자 나웅은 정도 역사상 최초로 서른 이전에 초절정을 밟은 천고기재이고 금옥장의 신임 장주 역시 최초로 서른 이전에 중원 최고의 갑부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둘 다 조카 상관척보다 한 수 위의 거물이라 볼 수 있었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아는 법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거물이라고는 하나 쉽사리 물러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독고혜, 그 아이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느냐가 중요하지요.”
“시끄럽다! 어떻게 세운 대정문인데 그깟 계집 하나 때문에 험한 꼴을 감수한단 말이냐? 행여 척이에게 그따위 말일랑은 하지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알았느냐?”
“형님!”
“어허! 그만하래도!”
상관명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상관초를 입을 다물었다.
* * *
당금 무림엔 세 명의 천하절색의 여인들이 존재한다. 동시대에 태어난 것을 본인들보다 세상 사람들이 더 안타까워할 정도로 그녀들의 미모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검후(劍后) 독고혜.
강남제일미(江南第一美) 백선녀(白仙女) 영호수란.
천중일미(天中一美) 도후(刀后) 적용유리.
천중삼화(天中三花).
세인들은 그녀들을 일컬어 천중삼화라고 칭송했다.
셋 중 십지문의 독고혜는 서른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그 미모와 재주가 워낙 뛰어난 덕에 으뜸으로 쳐 주었고 영호수란과 적용유리는 서로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미모나 재지에서 비슷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각각의 배후가 되는 가문 또한 그 위세가 당금천하를 떨어 울리다 보니 그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명문세가들의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으며 오늘도 중원의 수많은 매파들이 그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보고자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당대 최고의 미녀이자 최강의 여고수이기도 한 검후 독고혜가 살아가는 십지문의 하늘에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올랐다.
십지문주 독고무의 거처에 금옥장의 총관이 찾아든 지 이미 반 시진째였다.
그동안 다섯 차례가 넘게 독고무를 찾았던 총관은 오늘도 자신의 주인을 대신하여 독고무를 설득 중이었다.
하지만 독고무의 대답은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총관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렸다. 천하에 주인이 둘 있다면 하나는 황제요, 하나는 바로 자신의 주인이다.
대륙 상권의 절반 이상을 움켜쥔 자신의 주인은 황제마저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엄청난 존재. 하지만 일개 여인이 그러한 자신의 주인을 거부하고 있었다.
“휴! 어쩔 수 없군요. 본인의 마음이 그렇다고 하니, 하지만 본인은 다시 올 것이오. 검후께서 배필을 만나 혼인을 하기 전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문주!”
“괜한 수고 마시고 그만 포기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서로에게 할 짓이 아닌 것 같소만.”
“허어. 내 마음이 문주와 같소만 주인께서 저리도 성화를 내시니 낸들 어쩌겠소. 어쨌든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소이다, 문주.”
독고무가 정중히 배웅을 했다.
“먼 길 조심해서 가시오.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귀장의 주인께서 좋은 배필을 만났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대하고 있겠소.”
“그거야 제 맘이 더 간절합지요. 허허허!”
둘은 절친한 친구처럼 서로에게 웃어 보이고선 헤어졌다.
멀어져 가는 총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독고무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선 자신의 거처로 몸을 돌리려는데 독고혜가 그의 뒤에 나와 있었다.
“죄송해요.”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지 않느냐? 그만 들어가자.”
“드릴 말씀이 있어요.”
독고무가 흠칫한다. 독고혜의 표정을 보니 뭔가 단단히 작정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강호로 나가겠어요. 다시 검을 잡고 전처럼 검후로서 살아갈 생각이에요. 지금껏 너무 허송세월만 보낸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니 허락해 주세요.”
말을 하는 독고혜의 얼굴에서 굳은 의지를 읽은 독고무는 말문을 닫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게 네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좋다. 말리지 않으마. 대신 이 오라비도 함께 가자꾸나.”
“오라버니!”
“내가 말리지 않듯 너 또한 이 오라비의 뜻을 받아 줘야지 않겠느냐.”
“…….”
독고무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독고혜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쉬도록 하여라.”
“쉬세요.”
탁!
독고혜는 정원으로 나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느덧 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사내의 얼굴이 채워져 있었다.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내를 기다렸다. 그동안에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모두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 믿고 또 믿었다.
‘돌이켜 보면 너무 바보처럼 살았어. 진즉에 내 스스로 그 사람을 찾아 움직였어야 했는데…….’
오래전부터 그러고자 했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돌아왔을 때 어긋날까 두려워 그러지 못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호로 나서려는 것이었다.
* * *
짙게 뻗은 눈썹과 강렬하게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은 사내의 강인함을 물씬 풍겼다.
거기에 떡 벌어진 어깨는 가히 태산을 올려놓아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철벽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사내…….
당대 최강의 후기지수와 천하제일의 쾌남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사내의 이름은 나웅(羅雄).
정도맹주 나백의 손자이며 강호의 모든 여인들의 가슴에 연정의 불을 지핀 그가 자신의 가슴에 담아 둔 여인을 떠올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 년이 지났군.’
오 년 전 십지문 개파식에서 본 독고혜의 아름다운 자태는 나웅의 심장을 흔들어 버렸다.
천하제일인의 성좌를 목표로 성장해 가던 나웅은 그 전까지는 여인에겐 철저하게 무관심한 철혈의 무사였다.
오로지 무공만이 그의 전부였고 사내로 태어나 천하를 굽어 볼 원대한 야망만이 그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가슴속은 오로지 독고혜의 아름다운 영상만이 채워져 있을 뿐이다. 그녀만이 그의 전부였고 그녀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절대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독한 화주가 배 속을 태우듯 자극하자 나웅은 한 잔을 더 마시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무를 끝내면 십지문으로 가 봐야겠다. 가서 되는지 안 되는지, 내가 직접 그녀에게 청혼을 하리라!”
지금 그는 섬서의 한 객잔으로 가는 길이다.
당문칠기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낭인이 그곳에 있는데 그를 사로잡아 정도맹으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받고 길을 나섰다.
집법당주 탁승마저 꺾어 버린 고수이건만 나백은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무공에 자신이 있어서였다.
“날씨 한번 좋구나.”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눈을 찔러 온다. 그리고 서서히 나타나는 아름다운 영상…….
“기다리시오. 천하에 그대를 차지할 수 있는 사내는 오직 본인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오, 독고 소저!”
객잔을 빠져나온 나웅은 인적이 드문 길을 찾았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경공을 펼쳐 빠르게 이동을 할 심산이었다.
가는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길의 양쪽으로 늘어져 좌판을 펼치고 각종 생필품을 파는 사람들, 그의 눈에는 하찮아 보이는 물건들도 비싸다고 깎아 달라며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 한눈에도 불결해 보이는 길 위의 만두를 사달라며 조르는 아이들…….
모든 것이 그에겐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다.
‘이게 민초들의 삶인가?’
나웅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기억이 희미해진 어린 날까지 더듬어 본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민초들의 삶은 자신에겐 그저 흥미로운 구경거리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나의 삶은, 최고가 될 것이다.’
최고의 삶 속에 함께할 동반자를 다시 떠올린다.
‘반드시 내 여자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반드시!’
새삼 각오를 다진 나웅은 저만치 걸음을 빨리했다. 조금을 더 걸어가니 좁은 길이 나타났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경공을 펼치기에 딱 좋은 길이었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나웅이 돌연 이채를 발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응?”
사람 하나가 겨우 걸어갈 만한 좁은 길, 그 위에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대완마가 서 있었다.
나웅의 시선은 대완마의 안장에 앉아 있는 인물을 응시했다.
나라의 장수일까? 말 위의 인물은 황금색 갑주를 걸치고 투구를 쓰고 있었다.
찌르르.
나웅은 마치 생사대적을 만났을 때와 같은 전율을 맛보았다.
그때 전마의 옆을 가로로 장식한 청룡언월도가 나웅의 눈을 찔러 왔다. 순간 나웅의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과민한 반응을 하다니. 독고소저 때문에 심력이 약해진 모양이군.’
무림에 청룡언월도를 쓰는 고수는 없다.
너무 크고 무거운 데다 공격을 할 때 변화를 줄 수가 없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 군대의 장수라면 모를까.
‘괜히 놀랐군.’
나웅은 장수가 단순한 군부의 인물이라 생각이 들자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어졌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나웅이 이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장수가 자신을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떨어지기 시작한 석양빛에 장수의 어깨에 가로로 교차한 검병이 빛 반사를 일으키며 나웅의 시야를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