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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무사-27화 (27/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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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무사 27화>

* * *

거대한 대전.

호피를 깔아 만든 화려한 태사의에 앉은 적발적염(赤髮赤髥)의 노인은 자신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자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주었다.

“어리석은 놈! 일 처리를 그따위로 하다니. 확실한 흔적을 만들어 놨어야지.”

“죄송합니다.”

머리를 조아린 자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정도맹은 어찌하고 있다더냐?”

“구천각의 명수진인이 나섰습니다. 그가 단독으로 일을 처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확실한 흔적을 만들었어야지. 나백이 직접 나설 만한 구실을 만들었다면 좀 더 쉬웠을 것이 아니냐! 화산이 아무리 쇠락했다 하여도 무당이 단독으로 쓸어 낼 만큼 약하지는 않다.”

“죄송합니다.”

“만약 무당 놈들이 실패하면 다음 계책은 준비되었느냐?”

“그들이 실패하면 영웅 대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웅 대회를 기다린다?”

“그렇습니다. 부흥을 꿈꾸는 화산은 분명 최고의 인재들을 내보내어 원하는 성적을 이루려 할 것입니다. 정파에 심어놓은 아이들을 놈들과 한 조가 되게끔 만들 수만 있다면 합법적으로 모조리 다 죽일 수 있습니다.”

수하의 말에 일리가 있었는지 노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에 매화무적만 없앨 수 있다면 화산은 영원히 재기가 불가능한 궤멸 단계로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흠! 매화무적, 그놈이 없으면 화산은 그야말로 종이호랑이 신세가 되겠지. 게다가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들마저 죽는다면 더 볼 것도 없이 완벽하게 끝장이 나는 거라고 봐야겠군.”

“속하에게 맡겨 주시면 완벽하게 처리를 하겠습니다.”

“매화무적 그놈은 결코 만만히 봐선 안 될 놈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존명!”

노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태사의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러다가 돌연 싸늘히 웃었다.

“천하제일 고수에 가장 근접했다던 석수, 그놈에 이어 매화무적까지 죽인다? 흐흐흐! 화산의 도사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안 봐도 훤하구나. 허기야 제 발로 밥그릇을 찬 놈들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머리를 조아리고 섰던 자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이들을 풀어 은거에 든 화산의 전대 고수들을 모조리 처치해야겠습니다.”

“밟아 버릴 때 확실하게 밟아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매화 명수진인을 몰아낸 자책감에 얼굴을 들지 못했던 놈들이니 수련도 게을리했을 것이다. 놈들을 죽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허나 확실한 것이 좋으니 강한 아이들을 보내서 깨끗하게 처리하도록 해.”

“존명!”

노인은 문득 십 년 전의 한 사내를 떠올렸다.

‘지독한 놈이었어. 그놈은…….’

천하를 상대로 검을 겨누었던 사내, 오백의 고수가 그를 사냥하기 위해 나섰으나 살아서 돌아온 자는 불과 아홉이었다.

워낙에 비밀리에 진행이 되었던 사건이라 천하의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그 사건은 지금도 노인의 심장을 떨게 만들었다.

천년금지로 떨어져 내리는 사내의 심장에 마지막으로 검을 쑤셔 박은 인물이 바로 노인이었다.

노인은 만장단애로 떨어지며 자신을 노려보던 사내의 눈길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꽈악!

‘시신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 * *

갑자기 사라졌던 혁련천후가 돌아오자 진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놈의 상태는 좀 어때?”

“의원이 상세를 살피고 있습니다만, 회복되려면 시일이 다소 걸릴 것 같습니다.”

정도맹과의 충돌에서 혁련천후가 보여 주었던 태도 때문일까? 그를 대하는 진호의 태도가 매우 깍듯했다.

“화산은?”

일전에 전서를 보낸 것을 묻는 것이다. 진호의 얼굴이 난감한 빛으로 물들었다.

“맹에서 장로 회의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지.”

“어찌 된 연유인지 장문인께서 직접 요구를 하셨음에도 맹주께 보고 자체가 올라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혁련천후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담담히 반응했다.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다.”

“맹에서 더 강한 고수들을 보내지는 않을까 모두가 걱정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옛?”

진호가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지금껏 말없이 듣고만 있던 진명이 물어 왔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럴 방법이 있으니 내려가서 술이나 가져와.”

더 묻고 싶었던 진명은 하는 수 없이 돌아섰다. 그때, 문이 열리며 왕전과 모용단승이 들어섰다.

앞으로 함께할 사람이라고 소개받은 왕전과 인사를 나눈 진명은 술을 가지러 내려갔고 진호는 모용단승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이 왜 저래?’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그의 얼굴 곳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두들겨 맞은 듯 보이자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모용단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청과 일행들을 이곳으로 데려와라.”

모용단승이 다시 방을 나섰다.

혁련천후는 왕전을 보며 물었다.

“어때?”

“개 같은 성질은 천하제일입니다. 저러다가 어디 가서 칼 맞아 안 죽으면 다행입지요. 두들겨 패서라도 물건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물건으로 만든다고?’

진호는 왕전의 말뜻이 궁금했다. 모용단승을 두고 말하는 것 같기는 했는데 당최 이해가 되질 않자 혁련천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

선문답과도 같은 그의 대답에 진호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내 그 뜻을 알아챈 듯 눈빛을 내며 왕전을 돌아봤다.

‘이 사람이 그 얼음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뭐야! 그 눈빛은!”

왕전의 험악한 시선을 받은 진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이내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가 혁련천후와 일행이기에 감히 나설 순 없어서 참아야 했다.

왕전이 혁련천후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화산의 아이들이 아닙니까? 허면 지금껏 이놈들하고 함께하셨습니까?]

[그렇게 되었다.]

왕전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이 변하기라도 하신 건가?’

화산에 대한 그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왕전의 의문 가득한 시선을 받은 혁련천후가 얼굴을 실룩거렸다.

“쓸데없는 상상은 몸에 해롭다.”

“……예.”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말하자 왕전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혁련천후가 말을 이었다.

“영웅 대회 전까지 최대한 강하게 만들어 봐.”

“놈이 대회에 출전합니까?”

“그래 볼까 생각중이다. 네가 하는 거 봐서.”

“알겠습니다.”

지켜보고 섰던 진호는 둘의 관계가 문득 궁금해졌다.

진호는 왕전에게서 혁련천후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강렬함과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고수일 터.

‘저런 수하가 있었다면 왜 이제야 데려왔을까?’

왕전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진호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에 반짝 빛을 발했다.

‘저건…….’

상아를 깎아서 만든 귀고리, 마치 늑대의 송곳니를 연상시키는 그 귀고리는 왕전의 오른쪽 귀에 쌍으로 달려 있었다.

파르르…….

진호의 두 눈이 급격히 흔들린다.

진호는 그 귀고리의 임자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세상에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린 존재, 하지만 오 년 전까지는 칼 밥을 먹고 살아가는 강호의 무사들에게 무사의 혼을 불사르게 만들었던 무적의 승부사, 전왕(戰王) 단리극! 그의 상징이었던 그것이 왕전의 귀에 달려 있었다.

‘서, 설마 전왕!’

진호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비명을 간신히 참아 냈다.

진호는 시선을 혁련천후에게로 돌렸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한 그는 눈앞의 왕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가 말할 때마다 왕전은 최대한의 공경스러운 태도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주종 간의 모습으로밖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아니야. 세상에 전왕을 수하로 부릴 사람은 없어. 빌어먹을 산적이 감히 누구 흉내를 내고 다니는 거야?’

진호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왕전을 가짜라고 생각한 진호는 눈매를 가늘게 하고서 왕전을 노려봤다. 마침 진호를 쳐다보던 왕전의 눈썹이 올라갔다.

“너 지금 뭐 하냐?”

움찔!

“아, 아닙니다. 이놈은 술을 만들어서 오나? 제가 빨리 가서 술을 가져오겠습니다.”

놀란 진호는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나가면서 왕전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흥! 가짜 주제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진호, 그런 그의 귓속으로 왕전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도 제가 맡으면 안 될까요?”

진호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 *

진청을 데리고 객잔으로 돌아오던 영호민은 객잔의 뒤쪽에 자리한 산으로 올라가는 진호와 진명 그리고 처음 보는 왕전을 보고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는 거지?”

“저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앞에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왕전의 정체가 궁금했던 청명이 눈을 동그랗게 했다.

“뭐 해? 빨리 올라가지 않고.”

여전히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진청이 짜증을 내자 청진은 부리나케 그를 부축하고서 이 층으로 올라갔다.

맨 뒤에서 걷던 모용단승은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디 당신들도 한번 당해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마침 그를 돌아보던 영호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저 사람에 대해 알고 있소?”

“뭐 같은 인간이오.”

“뭐 같은 인간?”

모용단승은 의아해하는 영호민을 지나쳐 이 층으로 올라갔다.

“뭐야? 혼자 실실 웃기나 하고.”

영호민이 모용단승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자 청명이 머리를 긁적인다.

“그만 들어가시죠.”

영호민도 이내 그들을 따라 올라갔다.

잠시 후, 얼굴이 시뻘게진 진호와 진명이 왕전과 함께 들어섰다.

왕전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일제히 의아한 시선으로 들어서는 셋을 응시했다.

모용단승은 진명과 진호의 상태를 보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입 언저리가 연신 실룩거렸다. 웃음을 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나같이 약골들뿐입니다.”

털썩!

심드렁하게 말하며 혁련천후의 옆에 털썩 앉는 왕전. 그때 탁철이 왕전을 응시하다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비슷한 기질의 두 사람이라 대번에 눈싸움이 벌어졌다. 왕전이 인상을 그리자 탁철도 덩달아 인상을 그렸다.

잠시,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지만 왕전은 탁철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하는 탁철, 왕전이 비로소 시선을 거두었다.

혁련천후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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