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귀환무사 25화>
“신경 끄고 쉬시오.”
심드렁한 대꾸에 모용단승은 피식 웃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설마 혼자 도망친 건 아니겠지. 그랬다만 봐. 나중에 걸리면 그냥…….”
혼자 중얼거리는 영호민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매우 가늘었다.
그때 청진이 올라왔다.
“그 양반,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시오?”
가늘었던 목소리가 이내 굵어졌다.
“저도 모릅니다. 지금 그분 때문에 다들 비상이 걸렸습니다.”
“설마 도망을 갔을까 봐 비상이 걸렸다는 건 아니겠지요?”
“…….”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영호민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이 양반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도망을 칠 거였으면 미쳤다고 지금까지 당신들을 지켜 줬겠소!”
“저도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시끄러워요!”
빽 소리를 지르는 영호민. 청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영호민은 때마침 방을 나서던 검수들을 노려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흥!”
쾅!
청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소리를 지를 땐 꼭 여자 목소리 같잖아?”
* * *
왕전은 초당현에서 가장 소를 잘 잡는 백정이다.
오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온 그는 오 년 만에 초당현 제일의 백정이 되었다.
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돌자 거의 모든 객잔들이 소를 잡을 때면 왕전을 불렀다.
몸값도 상당히 비쌌다.
그가 잡은 소와 그렇지 않은 소의 육질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기에 다른 백정들보다 세 배는 더 많은 돈을 받았다.
신분은 천한 백정이지만 인근에서 꽤나 유명 인사가 된 왕전은 오늘도 초당객잔에서 부탁한 소를 잡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허허, 요놈아 조금만 기다려라. 이 몸이 고통 없이 한 방에 보내 주마.”
칼을 갈고 있는 왕전의 앞에는 커다란 황소 한 마리가 자신의 처지도 모른 채 여물을 먹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 소 잡는 칼을 숫돌에 갈고 있는 왕전은 제법 큰 키에 장대한 체격을 하고 있었다.
우람한 팔뚝이 어지간한 여인네의 허벅지보다 굵었다.
“오늘도 쇠고기에다 술 한잔 거나하게 할 수 있겠구나. 흐흐흐.”
소를 잡으면 자신에겐 돈과 고기가 주어진다.
물론 가장 맛있는 부위는 자신이 몰래 챙겨 놓는다. 고기를 구워 술과 곁들이면 그 맛이 천하제일인지라 왕전은 벌써부터 침이 고였다.
그때였다.
콧노래를 불러 가며 칼을 갈고 있는 왕전의 뒤쪽으로 누군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거의 동시에 칼을 갈던 왕전이 움직임을 중단했다. 더불어 번뜩이는 안광.
그것은 결코 백정이 보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턱!
한 발 내딛는 소리에 왕전이 눌러 놓았던 용수철처럼 뒤쪽으로 회전하며 튕겨 나갔다.
동시에 칼이 허공을 횡으로 갈랐다.
번쩍!
벼락같은 뇌전이 일어나며 여물을 먹던 소의 머리가 뎅강 잘려 떨어졌다.
뒤쪽을 향해 휘두른 칼에서 발출된 강기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칼을 잡아 가는 손이 있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의 머리를 잘라 버렸던 칼이 손잡이만 남긴 채 가루로 화해 흩날렸다.
“수련을 게을리한 모양이군.”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늘이 워낙에 심하게 진 곳이어서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왕전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인사를 해야지.”
쿵!
왕전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얼마나 강하게 찧었는지 실내가 다 들썩거렸다.
“주공을 뵙습니다!”
오체투지는 아무한테나 하는 게 아니다.
황제가 아니면 그런 예를 받을 수 있는 존재는 부처님밖에 없다.
그늘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두 발이 나오고 그다음에 배와 가슴,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 드러났다.
혁련천후였다.
“나와 함께 가 줘야겠다.”
* * *
마교의 흑영대주 관산악은 대도(大刀) 하나로 마교의 서열 십 위권을 넘나드는 초극강의 고수이다.
나이 서른에 최강의 무력 부대 흑영대의 대주를 맡은 그는 오 년 전 홀연히 마교에 입성한 인물이었다.
강자존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마교에서 수많은 강자들을 꺾고 그 자리에 올라선 그를 두고 마교의 무사들은 천마의 재림이라 떠받들곤 했다.
흑영대전(黑影大殿).
이곳은 흑영대의 거처임과 동시에 마교최강의 전귀(戰鬼), 관산악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곳이다.
짧은 머리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어른의 몸통만 한 커다란 대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고도 남았으며 눈을 깜박일 때면 쏟아져 나오는 안광은 사자의 그것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붉은색 비단을 쥐고 있는 인물은 바로 전귀 관산악이었다.
웃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관산악의 얼굴에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수하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좋은 일이라도 생기신 것입니까?”
관산악을 호위하는 부대주 악승이란 인물이다.
관산악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 좋은 일이지.”
묵직한 음성이 관산악에게서 흘러나온다.
악승이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서 다시 물어 왔다.
“대주께서 웃으시는 걸 처음 봅니다. 속하도 알고 싶습니다. 대주님을 웃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를…….”
“하늘이다. 하늘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진한 미소를 지은 관산악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악승도 일어섰다.
“악승!”
“예! 대주님!”
“이제부터 네가 흑영대의 대주를 맡는다.”
“……예?”
난데없는 말이 악승은 휘둥그레 치뜬 눈으로 관산악을 응시한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관산악은 악승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며 말한다.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흑영대다. 그 전통을 네가 이어 주길 바란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대주님.”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난다. 내가 스스로 하늘이라 여기고 모셨던 그분을 찾아서…….”
악승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모든 것을 바쳐 충성했던 자신의 주인이 떠나려 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함께해서 즐거웠다, 악승.”
“대주님…….”
관산악이 떠났다.
털썩!
악승은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런 악승의 뇌리에 언젠가 관산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늘이 부르면 나는 언제든지 이곳을 나갈 것이다.’
관산악은 그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난 것이리라.
“대주님!”
악승의 어깨가 떨리며 그의 두 눈이 기어코 뜨거운 눈물을 쏟는다.
거센 눈보라가 세상을 쓸어버릴 듯 거세다.
눈보라를 헤치며 걸음을 옮기는 사내는 날씨와는 전혀 다른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인한 인상에 단단한 체구를 지닌 사내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인물들이 나타나자 걸음을 세웠다.
휘이잉!
눈보라 속에서 나타난 자들은 사내를 보며 웃었다.
살기가 깃든 그런 미소였다.
“감히 막주님의 품을 벗어나려고 하다니! 은혜를 모르는 승냥이 같은 놈일 줄은 몰랐구나.”
막아선 자들 중 하나의 입에서 눈보라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은혜라고 했느냐?”
“오 년 동안 네놈에게 쏟아부은 그분의 정성이 어떠했는지는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지를 않느냐?”
“큭큭! 받은 만큼 너희들이 원하던 것을 해 주었지. 그것이면 서로에게 빚은 없을 텐데?”
“닥쳐라!”
챙!
막아선 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주변을 얼리는 차가운 살기가 눈보라와 뒤섞여 사내를 압박했다. 그러나 사내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여전했다.
“비켜라.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
“네놈이 얼마나 잘났는지 평소 궁금했었지. 오늘 그 대답을 찾겠다.”
살기로 무장을 한 자들이 일제히 사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내의 눈이 섬광을 발하며 날아드는 자들의 가운데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찰나, 모두 다섯의 시체가 눈보라 위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털썩!
사내의 가라앉은 시선이 죽은 자들을 향했다.
철컥!
검이 집을 찾아 들며 상쾌한 소리를 울려 냈다.
다섯의 목숨을 지워 버린 사내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를 품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뿐, 미안하군. 내가 미처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어.”
사내가 몸을 돌렸다.
뽀드득!
멈추었던 걸음이 다시 옮겨졌다. 그리고 이내 사내의 모습은 거친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흑야(黑夜)는 당금 무림에 있어 공포의 대명사로 알려진 살인청부업자이자 천하 최강의 살수(殺手)다.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서 고금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그를 세상 사람들은 살왕(殺王)이라 불렀다.
지금껏 그에게 죽어 간 자들의 면면은 하나같이 대단했다.
마교의 전주와 사련의 호법, 그리고 정도맹의 장로 등이 그의 청부 대상에 올랐다가 소리 소문 없이 죽었다.
그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이와 용모, 심지어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가 죽였는지 알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청부를 맡으면 어김없이 예고를 하고 찾아갔기 때문이었다.
청부 조건만 맞으면 황제라도 목을 따 준다고 알려진 흑야는 오 년 전, 마교장로 구지신마의 목을 베는 것을 마지막으로 홀연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평화.
타인에게 원한을 산 자들의 평화가 그의 실종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흑발에 흑색 장포, 그리고 어깨에 아무렇게 걸친 커다란 검 한 자루. 사내는 그런 모습으로 섬서의 작은 객잔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덮어 버린 사내는 야수의 그것처럼 일렁거리는 눈으로 손에 쥐어진 붉은색 비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움직이셨군.’
벌컥! 벌컥!
독한 화주를 들이켠 사내는 천천히 일어섰다.
객잔을 진동시키는 독한 술 냄새는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는 열 개가 넘어가는 술병이 쌓여 있었다.
사내가 몸을 일으키자 객잔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인상을 찌푸렸다. 대부분이 귀한 집 자세들이거나 명문의 무사들인 그들은 사내의 몸에서 풍기는 싸구려 주향이 거슬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사내에게 말이나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검!
그렇다. 사내의 기세는 날카로운 검을 보듯 했다.
손이라도 대면 그대로 잘려 버릴 것 같은 기세는 독한 주향만큼이나 강하게 객잔을 진동시켰다.
휘잉!
사내가 객잔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객잔 안을 들이쳤다.
사내의 기세에 눌려 음식 값을 요구하지 못했던 점원은 짜증을 내며 돌아섰다.
그러나 이내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내가 앉았던 탁자 위에 은자 한 냥이 놓여 있었다.
“횡재다!”
휘이잉!
밖으로 나선 사내는 남쪽을 응시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마치 뭔가를 보듯 눈빛이 일렁거렸다.
“평화는 오늘로써 끝이다.”
죄를 짓고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선포가 사내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휘이잉!
바람이 저잣거리를 쓸고 지나갈 때 사내도 저잣거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