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귀환무사 22화>
진호가 발끈하며 나섰다.
“뭔가 수상하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명을 해 주시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한데 어찌 닦달만 하십니까!”
“수상하다니, 그럼 맹이 조작이라도 했단 말인가?”
탁승의 얼굴이 화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한 문파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당연히 납득할 만한 증거나 정황을 내세워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맹으로 가서 그대들이 직접 해명하면 될 것이 아닌가! 긴말할 것 없다. 일단 이들을 제압해 맹으로 압송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집법당의 고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채채채챙!
“싸우면 곤란해지는 것은 화산, 순순히 맹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탁승의 으름장에 혁련천후가 나섰다.
“싸우면 너희들이 곤란해질 것이다.”
“진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들이로구나! 감히 맹의 명령을 거부하다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증거를 갖고 화산으로 찾아와. 그리고 한 번만 더 이놈 저놈 하면 죽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라.”
“뭣이라!”
탁승은 일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입을 벌렸다. 자신이 신분을 밝혔는데도 이렇게 나오니 그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때 그의 뒤에 섰던 고수 하나가 욕설을 퍼부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낭인 새끼가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는 게냐?”
그때였다.
한줄기 바람이 일더니 혁련천후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던 자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꼬꾸라졌다.
퍽!
“컥!”
“정도맹이라서 살려 주는 거다. 한 번만 다시 헛소리를 지껄이면 그다음은 목이다, 애송이.”
모두는 혁련천후가 뭘 어떻게 했는지 보지 못했다. 코앞에 섰던 탁승조차도 그저 바람이 이는 것만 느꼈을 뿐이었다.
탁승은 놀라서 가만히 있을 정도로 허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감히 무력을 쓰다니!”
휘익!
탁승이 내지른 일 권이 혁련천후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혁련천후는 왼발을 슬쩍 옆으로 내딛으며 가볍게 공격을 피하고는 팔꿈치로 탁승의 겨드랑이를 후려쳤다.
퍽!
“웃!”
신음과 함께 탁승이 뒤쪽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경악할 만한 광경이었다.
탁승은 절정 고수다.
그런 탁승이 일격에 밀리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놈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탁승이 검파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싸늘한 전음이 귓속을 후벼 파며 흘러들었다.
[그 검을 뽑으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탁승.]
“……!”
탁승은 송곳으로 귀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한차례 크게 휘청거렸다.
[우린 그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니 이대로 순순히 물러가라. 그게 너희들이 살길이다.]
탁승의 두 눈이 붉어졌다.
귓속으로 파고든 목소리가 속을 뒤집어 놓더니 내공의 흐름이 거꾸로 바뀌면서 피가 역류한 것이었다.
‘으, 음공.’
음공(音功)은 말 그대로 소리를 가지고 적을 살상하는 무공이다.
최소한 절정 이상의 수준이 아니면 시전은 꿈도 꾸지 못한다.
혁련천후는 놀란 탁승을 향해 특유의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우리는 그만 가 보겠소.”
혁련천후는 검수들을 지나쳐 북쪽으로 걸음을 놓았다.
진명과 진호는 길길이 날뛰던 탁승이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혁련천후의 뒤를 쫓아 걸었다.
“멈춰라!”
집법당의 고수 하나가 앞으로 나서려 탁승이 그를 저지했다.
“당주님!”
“물러서지 못할까!”
탁승은 멀어져 가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고수다. 나와 이놈들 가지고는 무리다. 당문칠기의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해도 결코 가만히 둘 수 없다.’
탁승의 입술 언저리에 핏줄기가 언뜻 비쳤다.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 * *
중원으로 돌아온 혁련천후는 짧은 시간에 꽤 많은 사건에 휩쓸렸다.
대부분이 남의 사건에 개입을 했다면 탁승의 건은 성격이 달랐다. 다른 곳도 아닌 정도맹의 집법당주와 시비가 붙었으니 이대로 끝날 리가 없다고 여겼다.
‘눈빛을 보니 이대로 물러설 자가 아니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뒤를 쫓아올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을 그랬나.’
누가 알면 기절초풍할 만한 말을 내심 중얼거리며 북쪽을 향해 걸었다.
그런 그를 쳐다보는 청명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반면 뒤를 따르고 있는 진호와 진명, 그리고 질풍각의 검수들은 꽤나 심각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상대는 다른 곳도 아닌 정도맹이다. 자칫 잘못되면 화산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진명이 전음으로 물었다.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탁 당주는 마도의 마인들만큼 잔혹하기로 소문이 난 인물이지 않습니까?]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 별일이야 있겠느냐. 괜한 걱정은 심력을 소모하게 만드니 그만 신경 끄거라.]
[그게 말처럼 안 되니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그나저나 저 양반은 대체 누굴까요?]
[글쎄다.]
진명은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물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사문의 높은 사람이 아닐까요? 말하는 투나 분위기로 봐서 사문과 꽤나 밀접한 관계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싫습니다.]
[왜?]
[그냥…….]
진명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진호는 피식 웃고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사실 그도 진명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싶더니 대뜸 혁련천후의 뒤에다 대고 물었다.
“화산으로 곧장 가십니까?”
전과는 다른 말투였다.
“먼저 화산으로 가거라. 나는 일행들과 함께 뒤를 따르겠다.”
진호는 뒤늦게 진청을 깜박했음을 깨달았다.
“진청을 데리고 가야지 않습니까?”
“깜박했다.”
결국 모두는 함께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혁련천후와 화산의 검수들이 진청이 있는 약가촌으로 바삐 이동을 할 때쯤, 진청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까지 회복이 되었다.
“빌어먹을!”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진청의 얼굴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길게 베어진 상처만큼이나 자존심도 큰 상처를 입었다.
녹림도에 이어 벌써 두 번째 깨졌으니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성질 죽이시오. 그러다 덧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신경 끄시오!”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하고는 돌아서는 진청. 그 앞을 탁철이 막아섰다.
“성질 죽이라니까.”
진청은 탁철을 노려보고는 의방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검수 하나가 약그릇을 들고 나섰다.
“약 드실 시간입니다. 그리고 천도 깨끗한 것으로 교체해야겠습니다.”
진청이 안으로 들어가자 영호민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딜 갔어?”
모용단승이 보이질 않았다. 검수 하나가 밖을 가리켰다.
“밖에 서 있었소.”
“아, 예.”
고개를 끄덕인 영호민이 밖으로 나서자 탁철이 뒤를 따라 일어섰다.
“그나저나, 이 양반이 제법 늦네. 혹시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거 아냐?”
영호민이 먼 곳을 보며 중얼거리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들어 고을의 입구 쪽을 쳐다봤다.
탁철이 히죽 웃는다.
“양반 되기는 글렀군. 흐흐흐.”
고을의 입구에 혁련천후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를 보니 멀리에서도 차가운 기운이 이곳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때마침 밖으로 나서던 진청이 혁련천후의 뒤를 따르는 검수들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시끄럽게 생겼군.’
진호와 진명은 평소부터 자신과는 사이가 좋지를 않았다.
항렬이야 같았지만 서열은 자신이 한참 아래였다. 진청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혁련천후와 일행들은 어느새 의원의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모용단승이 고개를 숙이자 가볍게 인사를 받아 준 혁련천후는 진청에게 물었다.
“멀쩡한 모양이군.”
“견딜 만합니다.”
어색하게 답을 한 진청은 진호와 진명에게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사형들.”
“다친 몸은 괜찮은 것이냐?”
“성치도 않은 몸으로 어찌 찬 바람을 쐬는 것이냐. 냉큼 들어가거라.”
“…….”
진청은 이 상황이 어색했다.
이렇게 친근하게 자신을 대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저 인자한 미소와 따뜻한 말은 웬 걸까.
혁련천후가 물었다.
“이동을 할 수 있겠느냐?”
“견딜 만하다니까요.”
“무리하면 너만 손해다.”
“거참! 괜찮다니까요!”
발끈 소리를 지른 진청이 이내 옆구리를 꺾으며 괴로워했다.
하나도 괜찮지가 않았다. 검상이 어디 하루 이틀에 낫는 것인가.
진명이 나섰다.
“화산의 무사라면 그 정도는 참아 내야 하는 법이다. 시간이 없으니 냉큼 떠날 준비를 해라.”
혁련천후는 하루만 더 쉬고 가려던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하루를 더 있는다 해도 진청의 부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차라리 천천히 이동을 하더라도 당장에 움직이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때 영호민이 다가왔다.
“마차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
그랬다. 마차를 깜박했다.
“이동하지.”
정도맹주는 당금 무림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무공도 강하거니와 인품 역시 매우 뛰어나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정파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그에게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사천왕(四天王)!
정도맹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그들이 바로 그랬다.
둘이 합하면 신도 죽일 수 있다고 알려진 그들은 정도맹주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구파의 장문 출신과 오대세가의 전 전대 가주들이었다.
워낙 무공의 경지가 높아 일존과 오성을 최고로 쳐주는 작금의 강호 서열에서 그들은 예외로 쳐주고 있었다.
건곤검제(乾坤劍帝) 남궁기는 사천왕의 일인이자 남궁세가의 전 전대 가주를 지녔던 인물이다.
어지간해서는 강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유명한 그가 자신의 거처에서 노화를 터트리고 있었다.
“당가와 오대세가의 아이들이 해를 당했단 말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남궁기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인물은 정도맹의 수석총관 일도양단(一刀兩斷) 관승이란 위인이다.
“흉수가 화산의 검을 사용한 것 또한 사실이더냐?”
“그렇습니다.”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그들이 비록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어엿한 구파의 일원이거늘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은 아니냐!”
“세 번에 걸쳐 확인을 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어허, 이런 변고가 있나.”
남궁기는 탄식을 늘어놓았다.
평소 이쪽저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함을 우선으로 하는 그였기에 화산파가 연루되었다는 말을 좀처럼 믿지 않았다.
“용의자로 의심되는 화산의 인물들을 발견했다 합니다. 일차적으로 그들을 인도하러 갔던 맹의 무사들이 그자들에게 해를 입었다고 하니 곧 대대적인 추적이 시작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