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귀환무사 21화>
스르릉!
마지막 손길까지 끝낸 진호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일어섰다.
진호는 혁련천후를 떠올렸다.
‘누구지?’
사문의 장문인을 만나러 간다는 그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자부했던 자신이 혁련천후의 기세에 눌렸다고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복잡한 심정을 정리한 진호는 일행들이 기다릴 객잔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명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혁련천후를 조심스레 쳐다봤다.
“관군이 담을 넘어 고을 쪽으로 갔다고 했느냐?”
“예, 그 숫자가 서른에 가까웠습니다.”
“전부 관군이었단 말이지?”
“아닙니다. 몇은 무복을 걸친 무림인들로 보였습니다.”
혁련천후는 왠지 가슴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뒤이어 알 수 없는 불안감마저 밀려왔다. 그러나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일어섰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청명이 앞서 걸었다.
이른 시각인 까닭에 객잔의 식당은 혁련천후와 화산의 일행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손님들은 보이질 않았다.
크지 않은 식당의 일부를 차지한 일행들은 따뜻한 국물과 간단한 요리를 먹으며 속을 채웠다.
대부분이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다.
곧 있으면 있을 싸움 때문에 식욕이 뚝 떨어진 모양이었다.
다만 혁련천후와 청명, 청진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비운 후에야 찻잔을 들었다.
차를 한 모금 입으로 가져간 혁련천후는 눈을 지그시 감고서 향을 음미했다.
그 모습에 진명의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긴장한 자신들과는 달리 지나치게 여유를 보이자 괜히 심경이 거슬렸다.
그때였다.
“호흡을 멈춘 상태에서 매화검보의 육 초식을 한 번에 전개할 수 없는 자들은 싸움에 뛰어들지 마라.”
“……!”
저잣거리를 응시하던 진호의 고개가 벼락같이 돌아갔다. 그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매화검보를 아시오?”
매화검보는 화산의 인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화산의 독문검법이다.
그것을 혁련천후가 거론하니 모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대세가의 애송이들이라면 모를까, 당가는 결코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니다.”
“화산도 결코 약하지 않소. 매화검보를 알고 있다면 그것도 아실 것 아니오?”
자존심이 상했을까? 진호가 목소리에 힘을 담아 대답했다.
“당가에서 나온 자들은 그대들보다 강하다. 그래도 싸울 생각인가?”
“화산은 싸움을 앞두고 물러나는 것을 모르오. 두려우면 당신이나 빠지시오.”
혁련천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진명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혁련천후의 가라앉은 눈이 자신을 향하자 진명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시선을 피했다.
혁련천후는 눈앞의 진명과 진청을 비교했다. 둘은 성격부터가 흡사했다.
‘제대로 발전을 하기도 전에 칼을 맞고 죽을 수도 있겠군.’
급한 성격과 지나친 오기는 무사들에게는 금기시되는 사항이다.
자칫 더 강한 상대를 몰라보고 덤벼들다가 죽기 십상이다.
“매화검보는 어떻게 아셨소?”
진호가 넌지시 물었다.
“차차 알게 될 테니 신경 끄고 닥쳐올 싸움 준비나 하도록 해.”
“…….”
혁련천후는 다시 객실로 올라갔다.
청명이 재빨리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냥 확 까 버립시다.”
“사문의 존장을 뵈러 가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말이냐!”
“하는 짓이 건방져서 그냥 한번 해 본 말입니다.”
괜히 성질을 드러냈다가 호되게 질책을 당한 진명은 애꿎은 젓가락에 화풀이를 했다.
뚝! 뚝!
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에 혁련천후가 다시 내려왔다.
“지금 가시겠답니다.”
청명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어디를?”
“어디긴요? 당가 놈들이 머물고 있는 객잔이지요.”
철컥!
모두가 쇳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겁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진명마저도 낯빛이 무겁게 굳어졌다.
다가올 싸움 때문이었다.
* * *
당가의 인물들이 머물렀던 객잔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관병들은 구경꾼들을 일정거리 밖으로 밀어내고는 접근을 불허했다. 그리고 관복이 아닌 무복을 입은 몇 명이 객잔을 들락거리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관병들의 출현에 대해서는 청명에게 들은바 있는 진호의 얼굴색이 신중한 빛을 보였다.
“네가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예!”
청명이 부리나케 객잔 쪽으로 달려갔다. 일행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 진호는 힐끗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그리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그가 눈에 들어오자 눈살을 찌푸리고 돌아섰다.
청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가, 각주님!”
“무슨 일이더냐?”
“그, 그게 말입니다. 당가의 인물들이 모조리, 아니 한 명 빼고 전부 죽어 버렸답니다.”
“뭣이!”
모두가 크게 놀랄 때, 혁련천후의 눈빛도 살짝 변했다.
“자세히 말해 봐라. 그들이 왜 죽었다더냐?”
“관병들 때문에 자세한 것은 듣지를 못했습니다만, 암습으로 살해를 당한 것이라 수군거리는 것은 들었습니다.”
“암습?”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다만 한 명만이 목숨이 붙어 있어 인근 의원에 보내졌다고 합니다.”
청명의 말을 들은 진명이 심각한 어조로 진호에게 물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찌푸린 얼굴로 객잔 쪽을 보고 있던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혁련천후를 다시 돌아봤다.
“돌아간다.”
혁련천후는 기다렸다는 듯 짤막하게 말을 하고는 돌아섰다.
진명이 성난 얼굴로 외친다.
“오대세가의 애송이 놈들은 어쩌고 돌아간단 말이오!”
“곧 있으면 인근의 정파고수들이 몰려올 것이다. 괜히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고 싶은 것이냐!”
“…….”
진호가 진명을 달래고는 검수 하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곳에 남았다가 자세한 내용을 알아본 다음에 뒤를 쫓아오너라.”
“예. 각주님!”
검수 하나만 남겨 두고 모두는 북쪽으로 길을 돌렸다.
제9장 쫓고 쫓기다
휘이익!
일단의 무림인들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문칠기의 암습 사건이 벌어진 고을의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선두에서 날아가던 인물들 중 하나가 손을 들자 뒤를 따르던 무사들도 걸음을 멈추었다.
“저자들은 화산의 인물들이 아니냐?”
잘 벼른 칼날처럼 생긴 장한이 시선을 앞쪽으로 주며 말하자 옆의 인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장을 보니 맞는 것 같소.”
“제때 잘 왔군. 조금만 늦었더라면 꽤나 번거롭게 될 뻔했구나.”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소. 쇠락한 화산이 기세등등한 당가를 왜 공격한단 말이오.”
“죽은 자의 몸에 난 상처가 화산파의 검법에 의한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으니 당연히 잡아서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아니냐!”
장한의 말에 다른 자들이 그제야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장한은 고을을 빠져나오는 혁련천후 일행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저항을 한다면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다.”
“설마 화산이 그러기야 하겠소.”
“당문칠기가 죽었다. 사태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니냐!”
“알겠소.”
이들은 정도맹 소속의 고수들이다.
간밤에 긴급 전서를 통해 당문칠기의 죽음을 접하고는 밤을 새워 이곳까지 달려왔다.
한편 고을을 나서다가 정도맹의 무사들을 발견한 청명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정도맹의 무사들입니다.”
혁련천후가 고개를 들었다.
정도맹의 무사들이 빠르게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당가의 일 때문에 왔다면 집법당의 고수들인가? 그나저나 사건이 터지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빨리도 오네.”
“그런데 어째 날아오는 방향이 저희들을 향한 것 같습니다.”
그랬다.
고을로 가려면 옆길을 이용해야 하는데 정도맹의 무사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화산의 무사들은 걸음을 멈추시오.”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일행들의 앞으로 정도맹 고수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이 자신들의 진로를 막아서자 진호가 앞으로 나섰다.
“화산의 질풍각을 맡고 있는 진호라 합니다만, 무슨 연유로 그러십니까?”
진호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정도맹 고수들이 약간은 놀란 듯 보였다.
진호 개인에 놀란 것이 아니라 질풍각의 각주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지금은 비록 그 명성이 쇠락해 버렸지만 예전의 질풍각주는 천하에 무시할 자가 몇 없는 대단한 자리였다.
날카로운 눈으로 진호를 쳐다본 장한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본인은 정도맹의 집법당주 탁승이오. 간밤에 일어난 살인 사건 때문에 그러니 잠시 우리와 함께 가 주셔야겠소.”
“혹 당가의 사람들이 죽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오?”
“그렇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조사를 하는 것이 맹의 철칙이니 이해해 주시오.”
“그들이 죽은 것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진명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언성을 높였다. 탁승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사인이 화산의 검식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소. 또한 당신들은 사건 현장에서 나오는 길이니 함께 가야 할 이유로 충분한 것 같소만…….”
“뭣이!”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때 청명이 소리를 지르며 나섰다.
“이보시오! 조금 전에 관병들이 조사를 시작했는데 뒤늦게 온 당신들이 어떻게 사인까지 알고 있는 것이오!”
모두들 놀라고 있을 때 청명이 따지듯 물었다.
탁승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한눈에 보아도 최하급 무사로 보이는 청명의 태도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사대제자 따위가 나설 곳이 아니다!”
탁승의 살벌한 눈빛을 받은 청명은 황급히 혁련천후의 뒤로 숨어 버렸다. 청명을 쫓아 움직이던 탁승의 두 눈이 혁련천후의 시선과 딱 마주쳤다.
지나치게 무심한 눈빛에 놀랄 때, 혁련천후의 입을 통해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그런 보고를 했소?”
“그것까지 대답을 해 줘야 하오? 그 전에 귀하의 신분부터 밝혀 주었으면 하오만.”
“내가 먼저 물었소.”
“…….”
탁승을 비롯한 정도맹의 고수들이 대번에 낯빛이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혁련천후의 태도는 지나치게 오만하고 싸늘했다. 진호를 비롯한 화산의 검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혁련천후의 태도는 지나쳤다.
혁련천후가 그렇게 나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사건은 간밤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누군가 사건 현장을 발견하고 정도맹으로 전서를 날렸다는 것인데, 미리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오기란 불가능한 거리와 시간이었다.
“조사에 불응하면 화산만 곤란하게 될 것이오. 마지막으로 묻겠소. 우리를 따라가시겠소?”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말에 진호와 진명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탁승이 재차 물었다.
“맹으로 가겠느냐?”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 어찌 가겠습니까. 하물며 자초지종조차 듣지 않은 상태에서 절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상부의 명을 받아 용의자를 잡아 갈 뿐 다른 것은 모른다. 그대들이 사건 현장에 있었으니 당연히 맹의 조사를 받아야 하는 것은 맞지 않느냐? 한데 어찌 거부하는 것인가!”
탁승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