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귀환무사 19화>
화산의 매화각주 진명의 왼손이 청진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졸지에 쥐새끼처럼 잡혀 버린 둘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지금 자신들의 목을 잡고 있는 인물은 사문의 군기반장이었다. 진청의 까칠함을 훨씬 뛰어넘는 극강의 폭력신공을 지닌 진명은 화산의 제자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와!”
청명과 청진의 목을 놓아준 진명이 객잔의 구석진 곳으로 갔다.
그곳엔 화산의 복장을 한 무사 다섯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풀죽은 모습으로 진명의 뒤를 따르던 청진은 그 와중에도 점원에게 음식을 저쪽으로 갖다 달라는 시늉을 했다.
탁자엔 어느새 갖다 놓았는지 빈 의자 두 개가 있었고, 그곳에 둘은 머리를 조아리며 앉았다.
“십지문주의 일이 끝났으면 냉큼 돌아올 것이지, 사고나 치고 다니고, 네놈들이 정녕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진명의 호통에 청명과 청진의 머리가 자라처럼 쏙 들어갔다.
말대꾸를 하면 더욱 당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었다.
진명의 옆에 앉아 있는 인물들 중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저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잘못이 있다면 진청, 그놈이 잘못이지.”
삼십 대의 나이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인물은 바로 화산의 질풍각주를 맡고 있는 진호라는 인물이었다.
당초 질풍각의 고수들 몇 명만 오려 했으나 진호 본인이 극구 오겠다고 해서 같이 온 것이다.
같은 진 자 돌림의 배분이었지만 진명보다 훨씬 선배였기에 진명도 그를 공손히 대했다.
“아닙니다. 이놈들도 혼을 내야 합니다.”
“가, 각주님!”
“시끄럽다! 이놈들아!”
진호가 빙그레 웃으며 청진에게 물었다.
“진청은 어디 있느냐?”
진명의 말에 청명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부상을 입고 누워 계십니다.”
“부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 그것이.”
“당문과 시비가 붙었다더니, 혹시 그놈들에게 당한 것이냐?”
진명이 재차 물었다.
“아, 아닙니다. 단리세가의 단리소 공자와 결투를 벌이시다가 그만.”
“뭣이라? 단리소!”
진호를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급변했다.
청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 그자들이 사문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그자들? 그럼 다른 자들도 있었단 말이냐?”
진명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는 지금 당가와의 일 때문에 진청을 데리러 온 것이다. 혹시 모를 당가의 손속으로부터 진청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자들과 시비가 붙어 부상을 입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더구나 상대가 평소 화산을 괄시하는 오대세가의 인물들이라고 하니 화마저 치밀었다.
“예. 남해검문의 전진 공자와 팽가의 팽무철 공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놈들도 진청에게 손을 썼더냐?”
“아,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분들과…….”
이번에 청진이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다른 분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저희와 함께 이동하는 일행들이 계십니다. 그분들 중 한 분이 각주님과 함께 그자들과 싸웠습니다.”
청진과 청명은 지금껏 벌어졌던 일에 대하여 상세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둘의 말이 다 끝났을 때, 대부분이 분노했다.
“진청은 얼마만큼 다친 것이냐?”
“뼈와 신경은 다행히 건들진 않았습니다만, 보름 이상은 요양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쾅!
“바보 같은 놈!”
진호가 탁자를 내리치자 청명과 청진은 파고들듯 머리를 움츠렸다. 왠지 사건이 커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 있느냐?”
“약가촌의 의방에 누워 계십니다.”
“아니, 그놈들 말이다. 오대세가의 놈들.”
진호의 싸늘한 태도를 본 청명과 청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큰일이다.’
만약 그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면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지게 된다.
둘은 뒤늦게 후회했다.
‘그냥 대충 말씀을 드릴 것을…….’
잠시 후, 모두는 객잔을 나섰다.
진호는 검수 두 명에게 진청을 찾아가라 하고는 모두를 이끌고 단리소 등을 찾아 떠났다.
제8장 누명
모용세가주 모용천은 무림인 같지 않은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자신의 대에 이르러 오대세가의 반열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린 가세 때문에 하루하루를 근심과 한숨 속에 살아가는 그였지만 세가의 인물들에게는 조금도 그런 내색을 않았다.
그런 모용천에게도 감출 수 없는 걱정거리가 있었다. 바로 하나뿐인 아들, 모용단승이었다.
최근 들어 몰라보게 살이 빠진 모용천은 자신의 거처에서 찻잔을 앞에 두고, 동생 모용조와 대화를 위해 마주 앉았다.
“그 아이의 소식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찾아내지를 못했습니다.”
둘의 낯빛이 어둡다 못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모든 것이 나의 불찰이구나. 못난 아비 때문에 애꿎은 아이들이 고생을 하다니…….”
수심이 가득한 모용천의 얼굴은 한때 절정을 넘어섰던 고수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모용조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모용천을 바라보았다.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똑똑한 아이이니 무사히 잘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게 귀찮아지는구나. 욕망도 꿈도, 모든 것이 부질없어졌어.”
“형님!”
모용천의 말에 모용조의 얼굴이 비통함으로 물들었다. 그런 모용조의 손을 모용천이 잡아 갔다. 혈육을 쳐다보는 눈빛은 따뜻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도 묻어나고 있었다.
“미아에게 모든 것을 넘겨야겠다. 나날이 쇄약해지는 몸 때문에라도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구나.”
“형님!”
모용조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한때는 천하를 호령할 듯 패기가 넘쳤던 자신의 형이 지금은 한없이 나약한 노인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모용조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모용천의 눈이 회한으로 물들어 갔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자신의 불찰이었다.
요녕성의 패주로만 안주했던 자신의 소심함이 결국은 세가를 이 꼴로 만들어 놓았다.
성세를 구가할 때보다 큰 꿈을 가지고 중원으로 진출했더라면 지금처럼 쇠락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허허. 죽어 선조들의 낯을 어찌 뵐꼬.”
탄식을 쏟아 내는 모용천의 눈가에도 눈물이 흘렀다.
모용조가 울먹이며 말했다.
“미아를 믿으십시오. 비록 여자의 몸이나 그 어떤 사내들보다 강건한 아이이니 반드시 본가를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모용천은 딸 모용미를 떠올렸다.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지만 자신의 딸은 세가의 잃어버린 영광을 반드시 찾아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세상에 비록 그 이름을 알리고 있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딸이 가지고 있는 역량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며칠 후.
모용미는 모용세가의 가주로 추대되었다.
눈물 속에서 조용히 이루어진 그것은 무림 역사상 여인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 * *
혁련천후는 느릿한 걸음으로 관도 위를 걸었다.
약가촌에 있는 일행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왠지 가라앉는 기분 때문에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생각을 다잡는 중이었다.
‘마음이 약해지는 것인가?’
요즘 들어 마음이 약해진다는 기분이 들곤 했다.
중원으로 귀환을 할 때 머금었던 복수심. 그리고 사문을 향한 증오심.
그것들이 점차 퇴색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아이들 때문인가?’
진청과 화산의 검수들. 변화는 그들과 만난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아니면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일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십 년 전, 죽음의 추격전을 치르면서 영혼을 팔아서라도 얻고자 했던 초월의 경지를 자신은 이루어 냈다.
천하의 그 누구도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해 스스로를 나태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의심마저 든다.
탁!
혁련천후는 길가의 풀잎을 하나 떼어서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랗게 높은 하늘은 복잡한 자신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마치, 이렇게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
자신은 세상에서 지워진 존재였다.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든 아니든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간 지금 자신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신을 품고 있었던 화산마저도 어쩌면 자신을 지워 버렸을 수도 있었다.
‘바보 같은 자들.’
배신의 아픔을 안겨 준 사문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과거의 화산은 호랑이처럼 강했다. 그러나 지금의 화산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그때 물었던 풀이 떨어졌다.
떨어진 풀잎이 바람에 날려 저만치로 날아가 버렸다.
풀잎을 다시 잡으려 손을 뻗던 혁련천후는 얼굴을 들어 앞을 보았다.
먼 곳에서 여러 개의 기운이 느껴졌다.
허리를 펴고 일어선 그의 눈가에 가는 주름이 잡혔다.
여러 개의 기운들 중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 * *
청명과 청진은 걱정스러운 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다른 일행들이 곧 돌아온다면 괜찮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수발을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검수 두 명이 갔지만 그들은 평소에도 진청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처럼 정성을 다해 수발을 들어 줄 리가 없다.
진명에게 한 명이라도 보내 달라는 말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화산의 무사는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말과 함께 뒤통수만 맞아 버렸다.
“잠깐!”
뒤에서 걷던 진호가 일행들을 멈춰 세웠다.
그런 진호의 시선은 전방을 향해 있었다.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을 향했다.
“아무도 없는데요?”
청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진호가 보고 있는 관도 위엔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이내 청명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
곡선으로 휘어진 관도 위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흑색 장포에 검을 들고 있는 낭인의 모습을 발견한 진호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낭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검병에 손을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
진명과 다른 질풍각의 무사들 또한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나타난 낭인을 직시하고 있었다.
검병에 손을 가져가던 진호가 흠칫했다.
청명과 청진이 낭인에게로 몸을 날리는 것을 본 것이다.
“이런! 멈춰!”
둘의 난데없는 행동에 진호가 몸을 날렸다.
“바보 같은 놈들! 뒤로 물러서.”
모두는 낭인이 진청의 사건과 관련이 있는 자로 짐작했다. 그래서 청명과 청진이 대뜸 공격을 하려 드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낭인의 앞에 내려선 청명과 청진이 넙죽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이제 오십니까?”
“무사하셨군요, 대협!”
혁련천후는 진호등을 슬쩍 쳐다보고는 물었다.
“놈은 어떻게 되었느냐?”
“의방에서 치료를 받고 누워 계십니다. 보름 정도면 낫는다고 하니 걱정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