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귀환무사 16화>
지켜보던 혁련천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놈의 검법은 수준 이상이었다. 다만 급하고 거친 성격 때문에 초식이 매끄럽지 못하고 무뎌지는 바람에 위력이 절감되었다. 그 점만 보완한다면 스스로 놀랄 만큼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객잔에서의 결투에서 진청의 잠재력을 보았다. 더불어 단점 또한 한눈에 꿰뚫었다. 가장 큰 약점은 진청의 성격에 있었다. 그 성격 때문에 초식이 무뎌지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처럼 필요 이상의 부상을 입는 결과를 낳았다.
‘쇠락한 사문이 놈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화산의 각주가 되어가지고 고작 이 정도였다니.’
잠재력과는 별개로 진청의 수준은 도저히 각주라는 자리가 무색할 정도로 허약했다. 적어도 혁련천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혁련천후은 시선을 돌려 진청의 곁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청명과 청진을 응시했다.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죽지 않는다는 혁련천후의 말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사형제 간의 애틋함이 전해지자 혁련천후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탁철과 모용단승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혁련천후의 지시로 마차를 구하러 간 것인데 모용단승은 상처가 그리 크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청명이 혁련천후에게로 다가왔다.
“저, 이거라도 좀 드십시오.”
육포와 물주머니를 내밀자 혁련천후가 고개를 들어 청명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혁련천후의 눈빛과 마주친 청명은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사내는 울지 않는 법이다.”
청명은 고개를 조아리고선 아무 대답을 못했다. 어느새 청진 또한 청명의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섰다.
“화산의 검수들은 더더욱 울어선 안 된다.”
“예…….”
청명이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갔다.
혁련천후는 그런 청명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가 육포를 입에 넣고 씹었다.
“아! 하늘 한번 맑구나.”
크게 기지개를 켠 영호민은 팔베개를 하곤 뒤로 누웠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온갖 모양의 구름이 마치 바다를 누비는 함선처럼 이리저리 흘러 다닌다.
그때 새파란 하늘 위로 얼음처럼 생겨먹은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혁련천후였다.
‘……뭐야.’
스스로 화들짝 놀라 황급히 얼굴을 지워 버렸지만 여인처럼 고운 얼굴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낯빛이 제색을 되찾고서야 그는 고개만 옆으로 돌려서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청진과 청명은 진청의 옆에 앉아 상처를 동여맨 천을 갈고 있었다. 혁련천후는 그 옆에 자신과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흡!’
때마침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가슴이 쿵쾅거리자 손으로 지그시 눌러 진정시켰다.
“돈 있으면 술 좀 사 오지.”
얼굴만큼이나 정나미 떨어지는 목소리에 영호민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무슨 물줍니까? 돈 없습니다!”
빽 소리를 지른 영호민은 투덜거리며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청의 피 묻은 천을 갈아 주던 청진은 좀 전의 목소리가 여인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가 어째 좀 이상한데?”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남자 중에서도 가는 목소리를 지닌 사람은 꽤 많다고.”
“아무리 그래도 방금 그 목소리는 좀…….”
숲 속으로 들어가는 영호민을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청진. 그때 의식을 잃었던 진청이 미약한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놀란 청명이 재빨리 진청의 어깨를 눌렀다.
“각주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크윽.”
가슴을 찔러 오는 고통에 진청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무리해서 일어나려다 상처가 도로 터진 것이다.
“고집을 부리면 다시는 검을 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애송이.”
혁련천후의 무심한 말에 진청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런 진청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극심한 통증 탓이다.
혁련천후가 진청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청은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성질머리하고는.’
여전한 진청의 태도에 혁련천후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진청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뼈와 신경을 건들지는 않았으나 제법 깊게 베어진 검상은 적어도 한 달 가까이 치료를 요할 만한 중상이었다. 혹시라도 뛰어난 명의가 있다거나, 희대의 금창약이 있다면 좀 더 일찍 치료가 가능하겠지만 산중에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기조식이 가능하겠느냐.”
“가능합니다.”
진청이 오기를 부려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이내 오만상을 찡그리며 도로 주저앉았다.
어쩌면 죽어서도 저럴 거라는 생각에 혁련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젠장!”
진청은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단리소와의 싸움을 생각하니 열불이 치밀어 좀처럼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환약을 먹고 더 강해진 상태임에도 비참하게 깨진 것이다.
항상 자신을 감싸 주었던 대사형 진유를 떠올렸다. 차라리 혹독하게 채찍질을 해서라도 강하게 키워 주었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애꿎은 대사형을 원망했다.
“으윽!”
통증이 더욱 심해지자 진청의 낯빛이 해쓱하게 변하더니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청진과 청명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각주님,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열이 오르며 큰일 납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음에 만나면 그때 박살을 내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하니 그만 화를 푸십시오, 각주님.”
평소 진청의 자존심과 승부욕을 잘 알고 있는 둘이다. 지금 진청의 속내가 어떤지 능히 짐작하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화를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던 혁련천후가 무심한 눈으로 셋을 응시했다.
사문의 형제들은 저리해야 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함께하는 그런 동반자가 되어야만 진정한 사문의 형제라 할 수 있는데, 셋은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나는…….’
자신은 그런 사문의 형제가 없었다.
자신에겐 배신의 칼을 쑤셔 온 그런 사문만이 존재할 뿐이다. 자신에게 배신의 칼을 들이댄 그들과 이들은 같은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자신도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을 목숨처럼 여긴 때가 있었다.
‘화산이여…….’
깊숙이 묻어 두었던 분노가 올라오자 혁련천후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향했다.
그곳에 분노를 풀어야 할 대상들이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그들, 힘들고 나태해질 때면 그들을 떠올려 각오를 되새기곤 했었다. 만약 그들이 눈앞의 저 허약한 제자들처럼 자신을 대해 주었더라면.
강호의 역사는 새롭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강호는 몰라도 최소한 화산파가 지금처럼 쇠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상념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것을 누구보다 절실히 경험하고 깨달았던 혁련천후이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념에 젖어 갔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으로.
주름이 가득한 사부의 손을 잡은 아이는 까마득히 솟아오른 산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했다.
“우와! 산이 구름 속에 가렸네? 너무 멋있어요!”
“허허허. 녀석하고는. 그렇게 좋으냐?”
“구름을 타고 날아다닐 수도 있겠네. 사부, 그러면 우리는 신선이 되는 거야?”
“우리 석수가 신선이 되고 싶은 모양이구나.”
“응! 신선이 되어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고 싶어! 그때 사부도 태워 줄게. 헤헤헤!”
늙은 사부는 어린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고 천진난만한 제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산의 곳곳을 구경하기 바쁘다.
“힘들지 않느냐?”
“응! 다리가 많이 아파.”
“허면 등에 업히겠느냐?”
“와아!”
늙은 사부는 어린 제자를 등에 업었다. 그러고는 가파른 산을 나는 듯 오르기 시작했다. 어린 제자는 신이나 마구 소리를 질렀다.
“와아! 늑대보다 더 빨리 달리네?”
“꼭 잡거라. 이놈아.”
한참을 달린 늙은 사부는 등에 업힌 어린 제자에게 물었다.
“석수야, 저곳이 오늘부터 네가 살아갈 곳이란다. 보이느냐?”
둘이 오르는 산의 능선. 그곳에 대대로 검의 달인들을 배출해온 구대 문파의 한 곳, 화산파가 있었다.
늙은 사부가 평생을 살아온 그곳은 이제부터 자신의 제자가 살아야 할 곳이다. 자신을 대신하여 화산을 지켜야 할 어린 제자의 앞날을 생각한 늙은 사부는 등에 업힌 어린 제자에게 다시 물었다.
“구름이 코앞에서 보이니 좋지 않느냐?”
대답이 없었다.
늙은 사부는 등이 따뜻해짐을 느끼고선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 어린 제자는 잠이 들어 있었다. 늙은 사부는 잠이 깰세라 느린 걸음으로 화산의 산문을 넘어 들어갔다.
따그닥! 따그닥!
말발굽 울리는 소리에 혁련천후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 깨어났네?”
영호민이 마차 위에서 환하게 웃었다. 투덜대더니 결국 술을 사러 갔던 그는 돌아오는 길에 마차를 구해서 돌아오던 탁철과 모용단승을 만나 함께 오는 중이었다.
“성질이 더러워서 염라대제가 받아 주기나 하겠냐?”
탁철이 육중한 몸을 비호같이 날아서 진청의 옆으로 내려섰다. 그런 그의 손에는 작은 도자기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이거 발라라. 금방 낫는다고 하더라.”
“금창약이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청명이 환한 얼굴로 도자기를 받았다.
청명은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선 재빨리 진청의 상처를 덮고 있는 천을 끌어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아프니까 천천히 발라!”
“에이. 조금만 참으십시오.”
“망할 놈!”
모용단승이 혁련천후에게로 걸어가 공손히 말했다.
“저잣거리에 방이 붙었습니다.”
“방?”
“예, 우리를 찾는 방이었는데 사천당 가주의 직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영호민이 심드렁하게 거들고 나섰다.
“자식이 그 꼴을 당했으니 당연히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 들지 않겠습니까? 그나저나 어쩌죠? 독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당가가 방까지 붙였다면 곧 대대적인 추격을 벌여 올 텐데 말입니다.”
혁련천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모용단승을 쳐다보며 물었다.
“당가의 인물들을 보았나?”
“고을에선 보지 못했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혁련천후는 진청을 돌아보았다.
탁철이 준 도자기는 하얀 분말로 만들어진 금창약이었다. 제법 효력이 있었는지 어느새 지혈이 되어 있었다.
잠시 무심한 눈으로 진청을 응시하던 혁련천후는 영호민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영호민은 눈을 휘둥그레 치뜨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봅니까?”
“관도를 따라 한 시진을 이동하면 약가촌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려라.”
“……같이 안 갑니까?”
“곧 따라가겠다.”
말을 마친 혁련천후는 곧장 몸을 돌렸다. 탁철의 전음이 흘러들었다.
[설마 당가를 상대하려고 그러는 거라면 혼자서는 무리일 텐데.]
자신도 가겠다는 말로 들렸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저놈들을 부탁한다.]
탁철은 더 나서지 못했다. 말해 봤자 소용이 없음을 짐작한
그는 모두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자! 약가촌이라는 곳으로 가 보자고!”
청명과 청진이 진청을 마찬 안에 태웠다. 탁철과 모용단승은 마부석에 올랐다. 가장 늦게 마차에 오른 영호민은 혁련천후가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쳇! 신비한 척하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