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15화 (15/425)

# 15

<귀환무사 15화>

‘빌어먹을, 너무 강해.’

투지로 일렁거리던 두 눈이 서서히 흔들렸다.

전진은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전진이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흥! 무공을 구걸하고 다니던 거지새끼가 제법이구나. 어디서 하나 주워들었나 본데, 그 정도론 어림도 없다.”

구걸이라는 단어에 모용단승의 두 눈이 차갑게 식어 갔다. 뒤이어 살기가 동공을 채우며 떠올랐다.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바로 구걸이었다. 어쩌면 스스로 그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생긴 일종의 피해 의식일 수도 있었다.

“무공을 구걸한 게 아니다.”

차갑게 중얼거린 모용단승은 오른발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그러고선 검을 사선으로 늘어뜨렸다. 전진이 덮쳐 오면 가장 빠른 궤적으로 반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밖으로 나오던 혁련천후가 모용단승의 자세를 보고서 이채를 발했다.

‘좋은 정신이군.’

지금 모용단승이 취한 자세는 수비를 도외시하고 상대가 공격을 들어오면 오로지 베어 버리겠다는 일념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도 전진의 공세를 온몸으로 받아야만 한다. 한마디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다. 혁련천후는 모용단승의 그러한 투지가 마음에 들었다.

“난, 무공을 산 것이다. 물론 대가는 내 영혼을 판 것이고, 그러니 너 같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새끼한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여유롭게 다가서던 전진이 흠칫했다.

모용단승의 자세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모용단승의 자세는 제 목숨보다는 자신의 팔 하나라도 베어 버리겠다는 자세였다. 장밋빛 앞날이 보장되어 있는 전진에겐 모용단승의 목숨보다는 자신의 팔 하나가 더욱 소중했다.

“지독한 새끼.”

“후후, 왜? 병신이라도 될까 봐 겁나는 것이냐?”

모용단승은 전진이 걸음을 멈추고선 아무런 공세를 취하지 않자 전진을 도발했다. 자신이 먼저 달려들어 이길 확률은 전무했다. 어떻게든 전진이 선공을 펼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검이 전진을 베어 버릴 확률이 조금은 올라간다. 어차피 벌어진 승부라면 어떻게든 놈을 꺾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놈의 팔 하나 정도는 잘라버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전진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미친 새끼! 정 그렇게 나온다면 네놈을 죽여 주지!”

전진이 검을 돌려 잡았다. 지금껏 펼치지 않았던 절기로 단번에 승부를 낼 심산이었다. 모용단승의 차가운 얼굴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전진이 날아들면 차후, 어떻게 될지는 자신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은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가슴이 아려 왔다. 세가를 나온 후, 자신을 찾아다닌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며칠씩 괴로움에 빠져 술을 마셔야만 했다.

‘절대 죽지 않는다. 강해져서 세상을 뒤집어 놓기 전엔 절대 그럴 수 없어.’

꽉!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흐르자 모용단승의 정신은 더욱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욱!”

진청이 휘청거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수세에 몰리더니 기어코 일격을 당한 것이다. 상세는 제법 심했다. 어깨에서 허리까지 베어진 상처에서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고, 흔들린 내부는 진기의 유통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리소를 노려보는 눈빛만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죽여 버리겠다.’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단리소에게까지 전해졌다.

“패배를 시인하고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죽이지는 않겠다, 애송이.”

“화산이 단리세가에게 무릎을 꿇는다? 지나가는 개에게 지껄여 봐! 뭐라고 하는지!”

“뭐?”

진청의 강렬한 시선에 단리소의 눈빛이 하얗게 가라앉았다. 죽이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뒷일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화산은 한물간 세력이다. 그들의 후환 따위는 결코 두렵지가 않았다.

단리소는 십 성의 공력을 검에 실어 한발 앞으로 나섰다.

“죽어 저승에 가면 열심히 수련해서 고수가 되어라. 물론 허접한 화산이 아닌 다른 문파의 제자로 태어나야 가능하겠지?”

지극히 치욕적인 말에 진청의 얼굴이 화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단리소가 검을 들어 정면으로 진청을 겨누었다. 검 끝에 불꽃같은 것이 일어났다.

순간 진청의 두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강기!’

자신보다 한 수 위의 경지인 단리소의 검강 때문이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아직 검기를 끌어 올리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후회, 그리고 자신을 고수로 만들어 주지 못한 사문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함께 죽자. 개자식아!”

진청은 서서히 이성을 잃어 갔다.

문득 대사형 진유자의 얼굴이 스치듯 떠오른다. 그리고 혁련천후의 차가운 얼굴이 진유자의 얼굴을 지워 버리며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혁련천후의 얼굴이 왜 떠오르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이다, 애송이.”

단리소의 눈빛이 악독하게 변하며 바닥을 차려는 순간이었다.

“됐어. 그만!”

감정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억!”

진청을 향해 날아오르려던 단리소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자신의 명치를 부여잡은 그는 얼굴을 극심한 통증에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들어 기혈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서, 설마 음공?’

원인이 혁련천후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더불어 등골을 타고 한줄기 소름이 올라왔다.

“크윽!”

전진 또한 단리소와 똑같은 현상에 휘청거리고 있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진청과 모용단승이 혁련천후를 돌아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랐지만 둘은 혁련천후가 뭘 어떻게 했음을 짐작했다.

혁련천후가 둘을 향해 무심히 말했다.

“가자.”

혁련천후가 몸을 돌렸다.

진청과 모용단승은 다시 시선을 돌려 단리소와 전진을 향했다. 겨우 기혈을 다스린 단리소와 전진은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그들의 안색은 밀랍보다 더 창백했다.

‘죽여 버릴 수 있다!’

진청이 검을 다잡아 갈 때 혁련천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결투는 거기까지다.”

‘빌어먹을!’

진청은 단리소의 목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모용단승도 전진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진청의 뒤를 따라 돌아섰다.

탁철이 지나가며 단리소를 향해 씨익 웃었다.

“다음에 걸리면 골통을 쪼개 준다. 애송이 새끼들!”

둘은 그의 도발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오직 혁련천후의 등짝에 시선을 고정시킨 둘은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내공을 모아 격발을 시키려는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고 알 수 없는 뭔가가 자신들의 명치를 가볍게 두들긴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이미 자신들의 내공은 흩어지며 기혈이 끓어올랐다.

단리소의 두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엄청난 고수다!’

그때 그의 귓속으로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어설픈 복수 따위는 꿈도 꾸지 마라. 애송이들.]

“……!”

모용단승과 진청은 혁련천후의 뒤를 따랐다.

둘 다 풀이 죽은 기색이다. 청진과 청명이 황급히 달려와 진청의 상세를 살폈다.

“괜찮습니까? 각주님!”

“괜찮아.”

“서둘러 치료해야 합니다. 상처가 깊습니다.”

“쪽팔리게 할 거냐? 알았으니깐 저리 비켜!”

청명을 밀친 진청은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단리소에게 패했다는 것에 화가 치미는 것은 둘째 치고 얼굴을 들 수가 없을 만큼 창피했다.

소환단을 먹고 강해진 내공을 믿었던 터라 패배의 충격은 두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옆을 걷고 있는 모용단승의 얼굴은 조금 달랐다.

자신이 아는 전진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한 고수다. 몇 년 전 우연히 그가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던 모용단승은 싸우기 전에 자신이 몇 수 버티지 못할 것으로 여겼었는데 생각보다 선전을 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정체를 밝혀라!”

전진이 혁련천후의 등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모르는 것이 오래 사는 길이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답하는 혁련천후, 단리소와 전진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자실 쳐다본다.

남궁소미와 황보수란이 혁련천후의 탁자로 가 버리는 바람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팽무철이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크게 놀랐다.

‘믿을 수 없군.’

단리소와 전진이라면 충분히 이겨 줄 줄 알았건만 어떻게 된 것이 싸움조차 일어나지 않고 끝이 나 버렸다. 상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둘의 상태를 보니 대충은 짐작이 갔다.

접점을 이루지 않고서 상대를 제압하는 경지, 그것은 책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흔들리는 시선을 혁련천후의 등판에 꽂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화산파에 매화무적 말고 저런 고수가 또 있었다니. 이게 알려지면 제법 큰 파장이 일겠는걸?’

“괜찮으세요?”

남궁소미가 단리소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존심 때문에 간신히 두 다리로 지탱하고 섰던 단리소는 그녀가 다가오자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남궁소미가 앵두 같은 입술을 놀렸다.

“단리 공자님, 소녀는 이만 헤어져야겠어요. 세가의 식구들과 서안에서 만나야 하거든요. 그럼.”

“남궁소저…….”

단리소가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남궁소미는 이미 혁련천후와 일행들이 걸어간 방향으로 몸을 날린 후였다.

“괜찮습니까?”

팽무철이 둘에게 다가가며 근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부들거리며 떨고 있던 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기어코 선혈을 게워 낸다.

“우웩!”

그 모습에 팽무철과 황보수란이 크게 놀라며 다가섰다.

“어머! 내상이 심한가 봐요!”

털썩!

선혈을 토해 낸 단리소와 전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황보수란이 있거나 말거나 볼썽사납게 주저앉은 그들은 끊어지려는 정신줄을 안간힘을 다해 잡으려 애썼다.

그러자 다시 선혈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우웩!”

또다시 선혈을 게워 낸 둘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서 진기의 흐름이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들을 보며 묘한 눈빛을 발하던 황보수란은 먼저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선 객잔으로 들어갔다.

만두의 맛에 취했던 그녀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는 정도맹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흠모하는 여인들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던 단리소와 전진의 치기 어린 행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 * *

영호민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새카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혁련천후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혁련천후는 자신의 앞에 누워 있는 진청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단리소와의 결투 때 입은 상처 때문에 진청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내상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오기로 버티다가 기어코 혼절을 한 것인데, 혁련천후가 응급조치를 취하고 위기는 넘겼지만 상태는 생각보다 엄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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