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귀환무사 11화>
이들의 근심을 불러일으킨 존재는 다름 아닌 영호무의 딸 영호수란이었다.
그녀가 말도 없이 쪽지 하나만 달랑 남겨 두고 세가를 나가 버린 것이다.
- 유람 좀 하고 올 테니 찾지 마세요.
그것이 그녀가 남긴 유일한 문구였다.
평소 그녀를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하던 영호도성이기에 영호무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영호도성이 다른 것을 물었다.
“영웅 대회가 얼마나 남았느냐?”
“한 달 남짓 남았습니다.”
“진이가 출전한다고 들었는데,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는 게냐?”
“경험을 쌓을 목적이니 굳이 무리를 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 가문의 사람들과 사귀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영호수란의 오빠이자 영호세가의 차기 후계자인 영호진을 거론하고 있었다. 그는 곧 있을 영웅 대회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영호도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아비가 진이를 데리고 가겠다.”
“아버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수란이 놈도 찾을 겸해서 겸사겸사 가는 것이니 너는 나중에 섬서에서 보자꾸나.”
“허면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영호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영호도성이 손사래를 쳤다.
“마차는 무슨, 쉬엄쉬엄 유람을 하면서 갈 요량이니 그저 진이에게 준비하라고만 이르거라.”
“길이 너무 멉니다, 아버님.”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네는 영호무. 그러나 영호도성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허어, 되었대도 그러네.”
영호무는 더 나서지 못했다.
영호무가 물러나자 영호도성은 탐스러운 백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고약한 놈. 갈 거면 이 할아비와 함께 갈 것이지.”
말년에 얻은 손녀의 재롱을 보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아 온 그다.
“허허허! 그놈 때문에 모처럼 세상 유람을 하게 생겼군. 그나저나 이번 길에서는 마땅한 배필을 찾아야 할 텐데……. 흠!”
느릿하게 거처를 나서는 그의 뒷모습은 절대 고수의 위엄과는 판이한 평범한 노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영호세가의 정문을 넘어 북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십전무제 영호도성과 그의 손자인 영호진이었다.
* * *
사천당가의 가주 당효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손에는 무림맹의 섬서지부에서 보내온 서찰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런 당효의 맞은편에는 그의 동생이자 사천당가의 총관을 맡고 있는 당무봉이 마주하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화산의 놈에게 당했단 말이냐?”
“문성이가 방심을 했을 테지요. 아무렴 정상적인 상태에서 화산 놈들에게 당하기야 했겠습니까?”
“아무리 방심을 했기로서니 몇 달을 누워 있어야 할 만큼 중상을 입다니, 게다가 적용 장로가 있었다 하지 않았느냐.”
“그, 그게 자세한 것은 직접 들어 봐야 알겠습니다만, 일단 화산에 항의 서한을 띄우고 사람들을 섬서로 보내야겠습니다.”
당효가 이를 갈며 분개했다.
“적용 장로는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이냐? 당가의 후계자가 그 꼴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니, 망할 영감 같으니!”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아무래도 맹에 대한 지원금을 줄여야겠습니다. 생각할수록 괘씸하지 않습니까? 적용 장로가 본 세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야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이참에 지원금을 확 줄여서 그 늙은이의 입지를 줄여 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천당가는 무림맹에 막대한 지원금을 해마다 보내고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정파에서의 입지가 나날이 올라가고 있었다. 일각에서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할 당효가 아니었다.
당효가 말을 이었다.
“평소부터 그 늙은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말대로 이번 기회에 그 늙은이의 입지를 확실시 줄여 놓아야겠어!”
“옳으신 결정입니다!”
“맹과 화산에는 내가 직접 서한을 적어 보내겠다. 너는 지금 즉시 맹에 파견 나가 있는 당문칠기에게 놈들을 잡으라고 전서를 보내라.”
“알겠습니다. 당장 그리하겠습니다.”
당무봉이 서둘러 거처를 나서자 당효는 눈빛을 매섭게 발하며 중얼거렸다.
“감히 화산 따위가 내 아들을 건들다니. 차제에 다시는 재기를 할 수 없도록 처절하게 짓밟아 주마.”
당효의 자식 사랑은 천하가 알고 있다.
특히 당문 최초로 검과 독으로 절정을 넘보던 당문성이다 보니 그에 대한 당효의 기대는 실로 대단했다.
그런 그가 삼류 문파로 쇠락을 거듭하는 화산의 인물에게 두들겨 맞았으니 그로서는 이보다 더 창피하고 분통 터질 일이 없었다.
“수틀리면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이 기회에 화산을 지워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당금의 사천당가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해 놓은 상태다.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당효는 자신들만으로도 쇠락한 화산 정도는 쉽게 쓸어버리고도 남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물론 당효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누구나 그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만큼 당가는 강성했고 화산은 쇠락한 상태였다.
당가의 하늘을 흰색 전서구 한 마리가 다리에 천을 두르고 날아올랐다.
당문칠기를 향한 그것은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와의 악연을 알리는 전조였다.
* * *
중원의 오대 명산으로 꼽히는 화산(華山)은 구대 문파의 한 곳인 화산파가 둥지를 튼 곳이다.
그런 화산의 밤을 찌르는 노기(怒氣)가 있었으니 바로 매화무적 진유자의 거처였다.
화산 제일의 고수이자 천하오객의 일인인 그는 자신의 거처에서 돌처럼 굳어진 얼굴로 서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히, 당가 따위가…….”
팍!
손에 쥐어졌던 종이가 재로 변해 흩날렸다.
서찰은 당가주 당효가 보낸 것이었다. 서찰의 내용은 유한 성격의 진유를 화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진청, 이 바보 같은 놈!”
진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십지문주 독고무의 생일 축하 사절로 보냈던 진청이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그것도 화산과 가장 사이가 나쁜 당가를 상대로 말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유난히 따랐던 진청을 각별히 아끼고 보살폈던 그는 자신이 장문의 자리에 오르면 지근거리에 두고 그를 키워 보고자 마음을 먹었었다. 해서 강호의 다른 문파들과 교류도 쌓고 새로운 사람들과 친분이라도 만들라는 요량으로 십지문에 보냈던 것인데 이렇듯 골치 아픈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어쩌자고 당가 놈들과 시비를 일으켰단 말인가?”
이마를 손으로 짚은 진유는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진명은 게 있느냐?”
“예! 대사형.”
이십 대 중반의 청년 무사가 거처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불끈 솟은 태양혈과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인 청년은 진명이라는 이름을 지닌 진유의 사제였다.
“진청, 그놈을 당장 사문으로 끌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질풍각의 아이들을 몇 데리고 가거라. 당가와 마주칠 수 있으니…….”
문밖을 나서려던 진명이 눈빛을 냈다.
질풍각의 고수들은 어지간하면 속세에 나오지 않는 인물들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하나같이 강한 고수들로서 화산의 미래로 불리는 재원들이었다. 해서 완벽하게 성장을 하기 전에는 위험한 일에 절대 투입을 하지 않는다.
“진청이 사고를 쳤습니까?”
“나중에 말해 줄 테니 냉큼 서두르거라.”
“예! 허면 다녀오겠습니다.”
진명이 머리를 조아리고 돌아갔다.
진유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험난해지겠군.’
화산을 싫어하는 문파들은 상당히 많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 꺼린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특히 당가와 무당은 사사건건 화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유는 진유 자신도 몰랐다.
언제부턴가 그들이 화산을 보는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으로 화산을 비방하고 폄하했다.
그들이 그렇게 나오자 다른 문파들도 조금씩 바뀌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오대세가였다. 당가와 연합 세력을 이룬 그들인지라 그런 태도는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었지만 진유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것이 쇠락한 사문의 탓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랴. 허어…….’
쇠락한 사문에 대한 비통으로 진유는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제5장 사건을 몰고 다니는 사람
섬서에 들어선 혁련천후 일행은 시장을 찾아 나섰다.
옷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노숙을 한 탓에 대부분의 일행들이 개방방도를 연상시킬 만큼 꾀죄죄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특히 모용단승과 진청이 심했다.
그동안의 여정에서 번번이 사냥을 해야 했던 진청은 개방방주가 초청하고 싶은 맘이 들 정도로 지저분했고, 모용단승 또한 진청과 막상막하의 지저분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와! 오랜만에 사람 구경을 하네.”
영호민이 탄성을 질렀다.
시장은 꽤 크고 넓었다. 그리고 다니는 사람들 또한 상당히 많았다. 혁련천후 일행은 옷을 만들어 파는 상점을 찾아 시장 곳곳을 찾아다녔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간신히 찾아낸 그들은 각자 한 벌씩 사기로 결정하고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색깔을 골라 입었다.
진청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은 사문의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는 것이 껄끄러웠지만 워낙 옷이 더러웠기에 어쩔 수 없이 백색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오호, 제법 멋있습니다. 대형!”
영호민이 혁련천후를 향해 엄지를 추켜 세웠다.
어느새 호칭은 대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동안 몇 번에 걸친 녹림의 습격을 함께하면서 제법 돈독한 정을 쌓은 그들은 나름대로의 서열을 정한 것이다.
물론 진청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탁철의 험악함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흘흘! 나도 멋있냐?”
“흘흘! 아니거든요.”
탁철이 물어 오자 영호민이 그의 흉내를 내며 말을 받았다.
그들의 뒤에 서 있는 모용단승은 흑색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원래 흰색을 좋아하지만 혁련천후가 흑색 장포를 입자 자신도 따라서 흑색을 입은 것이다.
덕분에 차가운 인상이 옷으로 인해 더욱 차가워 보였다.
“대형! 술이나 마시러 갑시다.”
영호민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탁철과 진청의 얼굴이 반색이다.
사실 지금까지 산에서 사냥으로 끼니를 해결하다 보니 제대로 된 음식에 대한 욕망이 컸는데 특히 영호민이 더욱 그랬다.
저잣거리에는 무사들이 넘쳐 났다.
정도맹과 화산파, 그리고 수많은 군소 방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섬서인 까닭에 평소에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 달 남짓 남아 있는 영웅 대회 때문에 천하 곳곳에서 몰려들고 있다 보니 더욱더 북적거렸다.
“뭔 놈의 인간들이 이렇게 많아?”
걸음을 옮기기가 불편할 정도가 되자 탁철이 인상을 썼다.
그의 험악한 인상을 본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서는 바람에 이동하기가 조금은 수월했다. 인상도 인상이지만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엄청난 대도가 한몫 단단히 했다.
초겨울에 접어든 날씨 탓에 뜨거운 김을 피워 올리는 식당들이 사람들의 식욕을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