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귀환무사 9화>
자신의 옷은 흙과 풀잎에서 배어 나온 진액으로 엉망이었고 매화 문양이 그려져 있어야 할 옷깃은 아예 삭둑 잘려 나가고 없었다. 자신을 화산 문도로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젠장!’
옷깃은 녹림의 무리들과 싸울 때 잘려 나간 것이고 녹색으로 물든 옷은 환약을 먹은 이후 극심한 통증 때문에 떼굴떼굴 구를 때 그렇게 된 것이 분명했다.
혁련천후는 청년을 응시했다.
‘눈빛이 살아 있군.’
청년의 눈빛이 자신과 닮아 있음을 느꼈다.
산 자의 걸음을 허용하지 않았던 천년금역에서 살아나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던 때의 절박함과 광기가 청년에게서 느껴졌다.
“왜 이들을 공격했느냐?”
“대협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
혁련천후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따르고 있었다니. 오늘따라 자신을 쫓아오는 이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이유는?”
“드릴 부탁이 있어서…….”
“내게 말인가?”
혁련천후가 의외라는 빛으로 물었다. 잠시 머뭇거린 청년은 입술을 악 다물더니 느닷없이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모용세가의 모용단승이라고 합니다! 대협께 저를 거두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자 뒤를 쫓아왔습니다! 제발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돌연한 상황에 모두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언제나 감정의 변화가 없었던 혁련천후조차도 이 같은 상황에 조금은 난감한 표정이다.
난데없이 거두어 달라는 것도 그렇지만 모용세가의 사람이라는 것이 더 난감했다. 그래도 한때는 오대세가의 한곳이었던 모용세가가 아닌가.
아무리 쇠락을 했다고는 하나 이런 식으로 무공 구걸을 할 곳은 아니다.
‘뭐가 점점 꼬여 가는군.’
그럼에도 혁련천후는 단호히 거부하지 못했다. 왠지 모용단승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왜 내가 너를 거두어야 하지?”
“강해지고 싶습니다.”
“강해지고 싶다? 내가 너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본 것인가?”
“객잔에서 당가의 대공자를 한 방에 꺼꾸러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거부하시면 저는 이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쿵!
이마로 땅을 강하게 찧는 청년.
혁련천후의 입가에 씁쓸함이 어렸다.
눈앞의 청년은 확실히 과거의 자신과 너무 닮아 있었다. 잃어버린 십 년의 세월 동안 자신도 청년처럼 간절하고 절박했다.
수많은 세월을 함께했던 자들도 이익을 쫓아 배신하고 갈라질 수 있는 것이 인간사임을 혹독하게 깨달았던 세월이 아니었던가.
혁련천후는 모용단승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저런 눈빛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 배신을 하지 않는다.
“일어서라.”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합니다.”
“일단 화산까지 함께하기로 하지. 그 후의 일은 너의 판단에 맡긴다. 나와 함께 있든, 너의 길을 가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그제야 모용단승이 몸을 세웠다.
“뭐야? 또 새로운 사람이 엮였잖아?”
영호민이 투덜거렸다.
자신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얻어 낸 동행길이다. 탁철과 모용단승이 너무 쉽게 일행으로 엮이자 그것이 조금은 불만이었다.
‘나도 그냥 첫눈에 반했다고 할걸.’
내심 투덜거린 그는 혁련천후를 힐끔거리며 입을 샐쭉거렸다. 다소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혁련천후가 걸음을 놓음으로써 정리되었다.
길지 않은 시간에 제법 많은 인연들이 엮였다. 십 년 만에 돌아온 사내와 엮인 사람들은 지금의 동행이 가져다줄 결과가 어떠할지를 모른 채, 모두는 화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4장 이어지는 사건들
녹림대제(綠林大帝) 맹덕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전서를 읽고서 크게 분노했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몇몇의 수하들은 그의 분노에 감히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형찬이 죽었단 말이지. 소환단까지 빼앗기고 말이야.”
맹덕의 목소리는 의외로 나지막했다.
그러나 수하들은 더욱 긴장했다. 그가 진정 분노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저랬다.
전서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 맹덕이 수하들에게 물었다.
“형찬은 구파의 장문인들도 쉽게 이길 수 없는 놈이다. 하물며 화산의 비렁뱅이 새끼들이 그를 죽였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느냐!”
머리를 조아린 자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제시여,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당금 화산에 매화무적 말고는 형찬을 당해 낼 자는 없습니다. 필시 이것은 본채를 이끌어 내려는 정도맹의 도발로 여겨집니다.”
“정도맹의 도발?”
“그렇습니다. 놈들이 본채를 호시탐탐 노려 온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세를 불려 온 놈들이 섬서를 기점으로 본채의 거점들을 하나씩 습격해 온 것을 감안하면 이번의 일도 놈들의 짓이 분명합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자는 녹림의 머리라고 불리는 호뇌(狐腦) 중권이라는 위인이다. 녹림의 모든 대소사가 그의 머리와 입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계략과 술수에 능한 자이며 맹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녹림의 이인자이기도 했다.
중권을 바라보는 맹덕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형찬의 죽음에 분노했던 그도 막상 정도맹이라는 거물의 이름이 거론되자 제법 신중하게 가라앉았다.
“어찌해야 되겠느냐?”
맹덕이 물었다.
“일단은 날랜 아이들을 보내어 놈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인 듯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섬서에 국한된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다만 만약 본채의 전체를 노리고 있다면 이는 실로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정도맹이라도 본채와 전면전을 벌이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본채의 힘이 역사상 최강임을 그들도 모르지는 않을 터! 양패구상이 뻔한 일을 놈들이 과연 벌일 수 있겠느냐? 네가 사안을 너무 크게 보는구나.”
맹덕이 호기를 보였다.
그러나 절대 그것이 자만은 아님을 모두는 알고 있다. 당대의 녹림은 그야말로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이 어수선할 때 녹림은 반대로 호황을 누린다.
여타의 문파들과는 달리 스스로 세력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는 녹림의 특성상 황권을 놓고 전쟁이 잦은 지금이 그들로서는 세력을 불리기에 가장 좋은 때이다. 가만히 있어도 삶에 지친 무리들이 하루에도 수백씩 녹림을 찾고 있었으니 오히려 사람을 가려 뽑을 정도였다.
또한 당금의 녹림엔 천하를 떨어 울릴 강한 고수들이 득실거렸다.
당장에 죽어 버린 형찬만 하더라도 구파의 장문과 엇비슷한 수위를 지녔던 고수였다. 그런 그가 녹림의 서열에서는 십 위권을 맴돌았으니 적어도 그보다 강한 고수가 열은 더 있다는 말이다.
당연히 맹덕의 말은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비록 정도맹과 전면전을 벌여 이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그들에게 충분한 타격을 줄 정도는 되었다.
중권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대제시여! 일단은 녹랑단(綠狼團)의 아이들을 섬서로 보내어 사안을 살핀 후 대처하심이 좋을 듯 여겨집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녹랑단이라면 맹덕이 직접 훈련시킨 녹림의 최정예 무력 부대다. 무공만큼이나 추종술(追從術)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맹덕이 잠시 생각을 하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녹랑단을 보내는 것으로 하자. 단, 소환단은 반드시 찾아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있어야 맹철의 진전이 극에 이를 수 있다. 알겠느냐?”
“존명!”
중권이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자 다른 자들도 일제히 밖으로 물러갔다. 호피를 깔아 놓은 의자에 몸을 묻은 맹덕이 이를 갈았다.
“감히 본채를 노려? 본채가 사련과 손을 잡으면 지들이 곤란해지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가소로운 정파 놈들 같으니!”
맹덕은 정도맹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여차하면 사련과 손을 잡으면 된다. 그렇게 되면 천하를 삼분하고 있는 정도맹과 마교, 사련의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된다.
자신들의 주가가 치소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나저나 소환단이 문제로군. 병신 같은 놈들! 그것 하나 제대로 가져오질 못하고 뒈지다니!”
천금을 주고 산 소환단은 자신의 아들에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것을 복용해야만 아들의 무공이 빠르게 정점에 오를 수 있었다. 헌데 그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으니.
“소환단을 알아보고 복용을 해 버렸다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젓을 담그고야 말 것이다!”
으드득!
* * *
혁련천후와 일행들의 화산을 향한 여정은 계속되었다.
진청은 앞서 걸어가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힐끗거리기 바빴다.
‘부담되네. 젠장!’
귀한 것을 공짜로 받았으니 부담이 될 법도 했다. 하지만 진청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복용한 환약은 녹림의 무리들과 부딪혔을 때 혁련천후가 주운 것이다.
약에 대해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던 혁련천후가 냄새만으로 환약의 성분이 내상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그에게 건네준 것이다.
물론 그도 진청이 복용한 환약이 이 정도로 대단한 효능을 지녔다는 것은 탁철을 구해 주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다.
가장 뒤쪽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용단승은 혁련천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자신도 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까? 혁련천후만큼이나 차갑던 얼굴이 조금은 풀어져 있었다.
다른 일행들과의 서먹서먹함이 가시지 않은 탓에 말없이 걷고만 있던 그에게 탁철이 말을 걸어왔다.
“이봐! 자네 누이의 미모가 그토록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사실인가?”
“모르겠소.”
상당히 퉁명스러운 대답이다. 탁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이가 올해 어떻게 되지?”
“스물둘이오.”
“스물둘? 크흐! 좋을 때구나.”
옆을 걸어가던 영호민이 슬쩍 물어 왔다.
“그러는 댁은 몇 살이시오?”
“몰라.”
탁철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영호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것을 본 탁철이 눈에 힘을 주었으나 영호민은 독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꾸 반말을 할 거면 나이부터 밝히셔야지!”
“크흠! 서른이다.”
“진짜요?”
“진짜다.”
영호민이 한마디 더 쏘아붙인다.
“나중에 아니기만 하면 나하고 한판 붙어야 할 거요. 알겠소?”
“그럴 일 없다. 서른 살이 맞으니까.”
휘이잉!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고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숲 때문에 이동을 하기가 여간 불편할 수 없었다.
“잠깐.”
혁련천후가 일행들을 세웠다.
모두가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는 그를 응시했다. 묵묵히 서서 전방을 응시하는 혁련천후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영호민이 재빨리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혁련천후는 대답 없이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열 명 남짓한 인물들이 앞쪽에서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흉흉한 기색에다 각종 무기를 든 것이 일견하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자들로 보였다.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자들일까요?”
“그렇게 보이는군.”
“또?”
영호민이 짜증스러운 반응을 비쳤다.
며칠 내내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혁련천후, 어느새 일행들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나타난 무리들을 보며 눈빛을 발했다. 탁철이 무리들을 보며 히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