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귀환무사 8화>
남은 녹림도들이 일제히 탁철을 에워싸며 다가들었다.
“그러니 도둑놈 소리를 듣는 거다! 망할 새끼야!”
형찬을 꺾어 버리겠다는 의중이 실패로 돌아갈 상황에 처하자 탁철은 내심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어쩔 수없이 달려드는 녹림도를 향해 대도를 틀었다.
일격에 대량 살상이 가능한 절초를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것을 성공하면 자신은 남아 있는 내공이 거의 없게 된다.
다 죽여도 결국 형찬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사부의 완전한 힘을 얻었다면 이따위 놈들은 한 방에 보내 버릴 수 있었을 것을! 빌어먹을 팔자하고는…….’
탁철은 내심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달려드는 녹림도들에게 마주 달려들었다.
“같이 지옥으로 가자! 개새끼들아!”
그때였다.
탁철은 숲을 헤치며 나서는 혁련천후를 보았다. 순간의 머뭇거림이 대도의 속도를 확 떨어뜨렸다.
지켜보고 섰던 형찬이 그것을 보고는 싸늘히 웃었다.
“사납게 설쳐 대더니 이제야 뒈지는구나.”
형찬은 자신의 뒤쪽에 혁련천후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개새끼들!”
탁철의 대도가 녹림도들을 쓸었다.
세 명의 허리를 잘라 갈 때쯤, 뒤쪽에 빠져 있던 형찬의 대부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쐐액!
지친 탁철로서는 피해 내기가 불가능한 속도와 궤적이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뒈지다니…….’
탁철은 죽음을 예상하며 마지막 남은 힘까지 대도에 담았다.
바로 그때, 혁련천후가 유령처럼 탁철과 형찬의 가운데에 나타났다. 번쩍 하는 섬광에 이어 형찬의 목이 뎅강 날아갔고, 탁철은 강대한 기움에 밀려 뒤쪽 숲으로 날아갔다.
“큭!”
나무에 부딪히며 꼬꾸라진 탁철은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며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마치 그가 탁철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맙소!”
전신에 힘이라곤 남아 있질 않았던 탁철은 간신히 고개만을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혁련천후은 이내 살아남은 녹림도들을 응시했다. 모두가 질색을 한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자신들에게는 하늘과도 같았던 형찬을 일검에 죽이는 것을 보았으니 어찌 달려들 수 있겠는가.
혁련천후는 그들을 보며 물었다.
“녹림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 들어야겠다.”
무리들이 대답을 않자 다시 물었다.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혁련천후가 검을 들어 겨누는 시늉을 하자 녹림도 하나가 재빨리 대답을 해 왔다.
“동료들을 죽이고 소환단을 빼앗은 화산파의 검수들을 쫓고 있었소!”
혁련천후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진청에게 주었던 환약은 바로 얼마 전에 진청을 구해 주었을 때, 녹림도가 흘린 것을 주은 것이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뒤를 쫓아올 줄은 몰랐다.
‘살려 두면 다시 올 것이다.’
남은 자들을 살려 보내면 무리들을 이끌고 다시 올 것이 분명했다. 녹림이란 원래 그런 곳이다.
하지만 저항을 할 의지를 잃은 자들을 베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들은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자들이다. 비록 녹림의 무리라고는 하지만 죽음을 불사하며 자신이 속한 문파를 위해 몸을 던지질 않았는가.
그때 숲이 들썩이며 영호민이 불쑥 나타났다.
“와! 많이 죽었군요.”
참혹한 광경에 얼굴을 잔뜩 찌푸린 그는 탁철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까 객잔에서 혼자 술 마시던 사람이네?”
“봤우?”
용케 구석진 곳에서 술을 마시던 그를 본 모양이다. 혁련천후는 살아남은 녹림도들을 향해 경고성을 날렸다.
“너희들을 죽이지는 않겠다. 대신 다시 쫓아온다면 그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
지옥의 문턱까지 이르렀던 녹림도들은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서로를 돌아보다가 이내 숲 속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어! 왜 그냥 놓아줍니까?”
탁철이 퉁방울만 한 눈으로 물어 왔다.
혁련천후는 이미 숲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영호민이 재빨리 뒤를 따랐다.
탁철도 이내 뒤를 따라 움직였다.
영호민이 그런 탁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왜 따라옵니까? 그냥 갈 길 가세요.”
“목숨 값은 갚아야지.”
스슥!
영호민을 지나친 탁철은 혁련천후의 앞을 막아서며 포권을 취했다.
“산동의 탁철이 목숨을 구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어쩌다가 그리 된 것이니 감사할 필요는 없소.”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소! 은인의 존성대명이라도 알려 주시오!”
혁련천후는 석탑처럼 우뚝 선 채로 자신을 막아선 탁철을 응시했다. 대게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고집이 황소고집이다.
“혁련천후요.”
“아! 혁련 대협이셨군요. 다시 한 번 불초소생의 목숨을 구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껄껄껄!”
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지켜보고 섰던 영호민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탁철을 응시했다.
혁련천후는 다시 걸음을 놓았다.
탁철이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화산으로 가신다고 들었는데 마침 저도 그곳을 가는 길이니 동행을 허락해 주시오. 강호 초출이라서 지리를 잘 몰라서 그러오!”
혁련천후는 묵묵히 걸었다.
그는 이미 객잔에서 탁철을 보았었다. 아마 그때 대화를 듣고 자신과 일행들이 화산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영호민이 나섰다.
“생긴 것하고 달리 귀는 꽤 밝은 모양이시네.”
“흐흐! 싸움도 잘한다. 가는 도중에 아까 그놈들처럼 귀찮게 하는 놈들이 있으면 말해라. 내가 해결을 해 주마.”
마치 동행이 확정된 것처럼 곰 같은 우직한 웃음을 짓는 탁철. 영호민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이 양반이 언제 봤다고 꼬박꼬박 반말이야!”
“내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니 그냥 말 놓자.”
“뭐요?”
영호민은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그때 저만치 걸어가던 혁련천후가 뒤를 돌아보며 특유의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나를 쫓아온 것이냐?”
대뜸 반말로 물었으나 탁철은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히죽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냥 첫눈에 반했소.”
“…….”
“사부가 그랬소. 남자든 여자든 첫눈에 심장을 뜨겁게 하는 사람은 평생을 함께해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영호민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평생을 함께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받아 준다면 못할 것도 없지. 흐흐흐!”
영호민은 갈수록 흥미로웠다.
‘점점 더 재밌어지는걸?’
지금의 이 상황은 어려서부터 자주 들었던 영웅담에 자주 나오는 부분이다. ‘천하유람의 길에서 주인공에 반한 무사들이 점점 늘어나고 그들이 힘을 합쳐 군림천하를 이루어 낸다.’ 뭐 이런 식이다.
‘훗! 예쁜 여주인공도 있어야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여인처럼 하얀 목덜미가 슬쩍 붉어졌다.
탁철은 혁련천후를 쳐다보고 있어서 그의 변화를 보지 못했다. 그는 혁련천후의 허락만을 기다렸다.
“화산까지 같이 가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소. 이 땅은 내 땅이 아니니까.”
“흐흐흐! 고맙소!”
허락으로 받아들인 탁철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혁련천후가 몸을 돌렸다. 탁철이 히죽 웃으며 그 뒤를 따랐고 영호민은 탁철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걸었다.
조금을 더 걸은 그들은 화산의 제자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어?”
아무도 보이질 않자 영호민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혁련천후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기감을 열어 사방을 살피자 제법 먼 곳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들려오는 고함에 진청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런…….’
팟!
일언반구 말도 없이 사라지는 혁련천후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둘은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았다.
‘뭐야, 이거…….’
검을 빼어 든 진청의 얼굴이 흥분으로 살짝 붉어졌다.
혁련천후를 찾아 숲 속으로 들어섰다가 마주친 청년, 그는 자신을 보자마자 공격을 퍼부으며 달려들었다. 제법 날카로운 공세에 순간 당황했던 그는 방어를 하기 위해 검을 뽑는 순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 발검 속도에 스스로 크게 놀랐다.
연이어 펼쳐진 청년의 날카로운 공세를 모두 막아 낸 진청은 호흡이 가쁘기는커녕 육신이 더욱 가벼워진 듯 느껴지자 다시 한 번 놀랐다.
‘이거 죽이는데?’
찬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신 그는 잘 벼른 칼처럼 뾰족하게 서 있는 청년을 보며 여유로운 어조로 물었다.
“감히 화산의 인물들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사정을 밝혀 이해가 되면 살려 주마. 그러니 어서 신분을 밝히고 내게 공격을 한 이유를 말해라!”
진청이 화산임을 밝히자 청년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진청이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고서 다시 물었다.
“그 표정은 내가 화산의 인물임을 몰랐다는 뜻인가? 웃기는 놈이군. 칼을 들고 살아가는 자들치고 화산의 무복을 몰라보는 자는 없지. 하물며 녹림의 도적놈들도 아는 것을 네놈이 몰랐다면 도적보다도 못한 놈인가?”
“닥쳐!”
진청의 빈정거리는 태도가 거슬렸던 청년은 이내 검을 직선으로 뻗으며 달려들었다.
제법 빠르고 날카로운 공세였지만 이번에도 진청은 검을 틀어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오히려 청년의 어깨를 검병으로 후려쳤다.
하지만 청년도 녹록지 않은지라 진청의 공세는 무위로 돌아갔다.
다시 이 장 거리를 두고 대치한 둘은 전혀 상반된 표정으로 서로를 직시했다.
“화산의 사람인 줄 몰랐다.”
“후후! 그럼 누군 줄 알고 무작정 칼질을 한 것이냐?”
“녹림의 무리인 줄 알았다.”
“녹림? 죽음이 두려워 지어 낸 말치고는 너무 어설프지 않나? 화산의 옷은 흰색이고 녹림의 옷이 녹색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추잡한 말장난 그만하고 차라리 사내답게 싸우다 죽는 게 어때?”
진청의 비웃음에 청년의 눈이 하얗게 돌아갔다.
“추잡한 놈이라고 했나?”
“제대로 들었네.”
“개새끼, 죽여 버린다.”
청년이 검을 들어 어깨 위로 가져갔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의 태도는 광기마저 보였는데 진청이 조금은 움찔한 표정을 보였다.
‘뭐야? 저 광기는…….’
그것도 잠시 검을 쥔 진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친놈은 몽둥이가 약이지.”
그때였다.
“그만!”
숲 뒤쪽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림과 동시에 공세를 펼치려던 청년이 신형을 휘청거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공이 담긴 목소리가 막 공격을 하려던 청년의 기혈을 방해한 것이다. 청년은 숲 속에서 걸어 나오는 혁련천후를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영호민이 진청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다짜고짜 칼질을 하는 것으로 보아 산적인 것 같소.”
“산적? 산적치고는 너무 말끔한데.”
청년의 얼굴을 본 영호민이 멀뚱한 표정을 짓자 진청이 빈정거렸다.
“우리를 녹림도로 오인했다더군. 천하에 이 표식을 모르는 자가…… 엥?”
자신의 옷소매를 들어 보이던 진청의 얼굴이 이내 황당한 빛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