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귀환무사 6화>
“곧 있으면 영웅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게 된다네. 모두가 경축할 대사(大事)에 앞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야 쓰겠나. 허니 이쯤에서 그만들 하는 것이 좋겠지.”
그가 이렇게 말을 하면 그만해야 한다. 적어도 정도맹에 소속된 무사들이라면 당연히 그의 말을 따라야 한다.
검수들은 내심 상황이 이렇게 끝나게 되었음을 기뻐했다. 진청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영호민은 그렇지 못했다.
‘아쉽군. 쩝!’
혁련천후의 무공을 보고 싶었던 그는 내심 무척이나 아쉬웠다. 적용세가 나섰으니 상황은 이것으로 끝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사과해라, 당문성.”
적용세의 음성과 대조되는 차가운 음성이 혁련천후에게서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헉! 이 양반이 미쳤나.’
진청을 비롯한 검수들이 혁련천후를 보며 급히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은 오직 당문성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당문성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어이가 없어 넋을 놓을 지경이었다. 적용세의 가는 눈이 이채를 발했다.
기분이 상할 법도 했지만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호기심이 충만해 있었다.
‘누구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적용세는 재빨리 혁련천후의 전신을 쓸어보았다.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저 나이에 기운을 갈무리할 수준이란 말인가?’
고작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그와 같은 경지를 밟은 인물은 역사를 통틀어 몇 되지 않는다. 이내 고개를 저은 적용세는 흥미로운 빛으로 혁련천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중재를 무시한 것에 대한 노여움 같은 것은 전혀 볼 수 없는 그런 눈빛이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문성은 역시 당문성이었다. 적용세의 개입이 내심 못마땅했던 그는 혁련천후의 도발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쯤 되면 화산 제자들을 혼구멍을 내줄 만한 명분이 되고도 남았다.
“사과하지 못하겠다면?”
“죗값을 받아야지.”
“그럴 재주가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아라.”
당문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혁련천후가 손을 뻗는다 싶더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당문성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모두가 아연실색하며 혁련천후와 당문성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혁련천후는 적용세에게 가볍게 표권을 취해 보이고는 유유히 객잔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영호민과 진청등이 따랐다.
진청은 객잔을 빠져나가면서 당문성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객잔의 가장 후미진 곳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청년이 혁련천후를 향해 흥미로운 빛을 보였다.
거대한 체구에 엄청나게 넓은 대도를 탁자에 올려놓은 청년은 고대 초제국의 패왕 항우를 연상시켰다.
그는 연신 술잔을 기울이면서 혁련천후의 얼굴을 뚫어져라 직시했는데 어느 순간 호랑이의 그것처럼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섬광을 발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객잔의 구석까지 날아가 꼬꾸라지는 것이 보였다.
와당탕탕!
바닥에 패대기쳐진 채 꿈틀거리는 당문성과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사람들, 천하의 적용세조차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거한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오른다.
‘우흐흐! 탁철이 이제야 제대로 된 사내를 보는군.’
술잔을 치우고 병째 들이마신 사내는 객잔을 나서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직시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꼴사납게 자빠진 당문성은 연신 피를 게워 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의 옆에서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청년들과 소녀들은 오대세가의 후예들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혁련천후와 화산의 제자들이 나서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적용세조차도 가만히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신분을 감안하면 마땅히 혁련천후를 혼내 주는 것이 옳다고 봐야 했지만 방관하는 그의 속내를 누가 알랴.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거한을 별 뜻 없이 힐끔거린 적용세는 쓰러져 있는 당문성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너의 그 오만한 성정이 차후 당가에 크나큰 화를 가져다주겠구나.’
적용세는 평소에도 당문성의 오만방자함이 싫었던 것이다. 그가 방관의 자세를 보였던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진청은 저만치 앞에서 걷고 있는 혁련천후을 연신 힐끗거렸다.
그로 인해 수치를 당할 수도 있었던 위기를 벗어났지만 고마움보다는 그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이 더 컸다.
적용세의 중재를 무시하고서 당문성을 피를 쏟게 만들어 버린 그나, 그것을 보고서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적용세의 태도나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적용 장로가 누군지 몰랐겠지.’
알았다면 천하에 누가 그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대체 뭐 하던 작자지? 보아하니 사문과 관련이 있는 것도 같은데…….’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아 혁련천후는 분명 자신의 사문과 관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문의 어른?’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자신이 모르는 사문의 어른은 없다. 더욱이 저렇게 젊은 어른이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윽! 속이야!’
머리가 혼란스러워지자 진청은 심호흡을 하고서는 주변을 돌아봤다.
여인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영호민은 혁련천후의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연신 조잘대기 바쁜 모습이고 자신의 사질들은 상기된 기색으로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들어 보니 혁련천후가 대화의 주된 화제였다.
“봤냐? 그놈이 개구리처럼 뻗어 버리는 거.”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더라. 게다가 오대세가의 후예들이 움찔하던 모습 봤지? 특히 그 오만하던 팽소철이 찍 소리도 못하고서 저분의 시선을 피하더라니까.”
“그런데 장로님께서 왜 가만히 계셨을까? 솔직히 그분이 진노하실까 무척 두려웠거든. 저분이 ‘사과해라, 당문성’ 하며 나설 때 솔직히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더라니까.”
청명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자 다른 검수, 청진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그때는 큰일 났다 싶었다. 장로님 때문에 당문성이 그냥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왜 나서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
“어쨌든 그 악귀 같은 놈이 피 떡이 되는 것을 보니 춤이라도 추고 싶다. 하하하!”
진청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앞서 걸어가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길게 늘어뜨린 흑발과 그닥 깨끗해 보이지 않는 장포, 거기에 한 자루 장검을 쥔 모습은 영락없는 낭인이다.
진청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저렇게 강해지고 싶다.’
모용단승은 모용세가의 미래를 끌어 갈 후계자였다. 위로는 누나가 하나 있었고 아래로는 남동생이 있었지만 언제나 세가의 어른들은 자신만을 바라보았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천하에 가문의 영광을 떨쳐야 하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며 성장한 그는 나이가 들면서 문의 실체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가 하늘처럼 여겼던 가문은 더 이상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처지가 아님을 알았고 숙명처럼 여겼던 가문의 영광 또한 꿈일 뿐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무공!
무가(武家)가 성공하려면 필수 요건인 강한 무공이 모용세가엔 없었다. 수백 년을 이어 오던 가문의 비전절예는 대부분 소실되어 없었고 정점에 올라야 겨우 절정을 바라볼 만한 무공만이 가주의 독문무공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절망했다.
어지간한 문파의 장로급만 되어도 절정을 밟은, 그야말로 절정의 경지를 이룬 고수들이 넘쳐 나는 시대가 당금 무림이었다.
야망이 컸던 단승은 그때부터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천당가의 장로라는 자가 세가를 찾아왔다. 지역에서 최고 미인으로 불리던 누나 모용혜와 당가의 인물의 혼사를 주선하러 온 것이다. 말이 주선이지 거의 일방적인 요구에 가까웠음을 알게 된 단승은 당가의 장로에게 덤벼들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갈비뼈가 몇 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그에 분노한 자신의 아버지 또한 중상을 입고 만 것이다. 더욱 비참한 것은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인물이 당가의 장로가 아닌 당치성이라는 아주 젊은 청년이라는 점이었다.
“고작 이따위로 오대세가의 반열에 올랐다니 내가 다 창피하구나.”
피를 흘리던 자신을 보며 비웃음을 보이던 당치성을 단승은 잊지 못했다.
[세상을 나가서 무공을 배워 강해지면 그때 돌아오겠습니다.]
단승은 어느 날 그 말만을 쪽지에 적어 놓고 세가를 나왔다.
그리고 삼 년 동안 천하 곳곳을 돌며 강한 자를 찾아다녔다. 그와 겨루기 위해서가 아닌 무공을 배우기 위해, 한마디로 무공을 구걸하고 다닌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차서 근골이 굳어 버린 그를 받아 줄 고수는 아무도 없었다. 한 번은 개방의 고수 하나를 우연찮게 노숙을 하던 중에 만날 수 있었다. 단승은 그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울며 간곡히 청했지만 개방의 고수는 단승을 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근골이 평범하여 어떤 무공이든 대성을 이루기란 불가능하니 그만 세가로 돌아가라.’
그 말에 단승은 분노하여 대들다가 한 달 동안을 산속에서 시름을 앓아야 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한 달하고도 보름 전의 일이었다.
산속의 동굴 안에서 몸을 회복한 단승은 십지신검 독고무가 마음이 어질고 관대하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무공을 얻고자 호북성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우연찮게 들른 객잔에서 당가의 대공자를 한 방에 쓰러뜨리는 사내를 보았다.
‘저 사람이다!’
그를 보았을 때,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끈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착각마저 느꼈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사내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당문성으로 인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일행들은 사냥을 해서 배를 채울 요량으로 산속의 적당한 곳에 불을 피우고 자리를 잡았다.
청진과 청명이 제법 큰 산돼지를 잡아 불에 굽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각기 편한 자세를 취하고서 휴식을 취했다.
진청은 팔베개를 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나무들 틈새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은 화산에서 보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화산의 하늘은 푸르지 못했다.
희망이 없는 자신의 처지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하늘은 빠져들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푸르다.
저 하늘을 보고 있자니 쇠락한 사문의 처지가 새삼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뭔가가 자꾸 치밀어 오른다.
‘젠장!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사문을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생겨나는 자포자기라는 감정에 진청은 그만 짜증이 일어 홱 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대사형 진유자의 명성 하나만으로 간신히 버텨 가는 사문에는 미래가 없었다. 만약 그가 죽기라도 하는 날엔 그날로 지역의 군소 방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 옛날 화려했던 사문의 영광은 십 년 전부터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유는 그도 몰랐다. 그리고 아무도 말해 주는 사람 또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