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4화 (4/425)

# 4

<귀환무사 4화>

사내의 눈빛이 흔들린다.

선혈로 더럽혀진 진청의 무복이 비수처럼 눈을 찌르고 들어온다. 매화 가지가 멋들어지게 수놓아진 그것은 한때 자신이 목숨처럼 여겼던 것이다.

십 년 전 자신도 저 옷에 자신의 피를 흘렸었다. 자신을 쫓던 존재들 중 자신과 같은 옷을 입었던 자가 있었고 그는 죽어 가는 자신을 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화산을 원망하지 마라. 화산을 위해 죽는 것이라 생각해라. 네가 죽어야만 화산이 살 수 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죽으면 화산이 더욱 강해질 것이란 그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어이없는 누명을 쓰고 죽음의 도주를 할 때에도, 피와 죽음의 혈로(血路)를 걸으며 복수를 뼈에 새길 때에도 결코 화산을 원망하지 않았었다.

왜냐고?

그땐 정말 화산을 사랑했으니까. 자신의 목숨보다 더욱더 화산을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화산은 전혀 강해지지 못했다. 아니 구대 문파에서 제외가 될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쇠락하고 말았다.

중원에 돌아와서 그 소문을 들었을 때,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복수마저 미루고 화산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아야 했기에.

털썩!

진청이 쓰러졌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흥분을 한 것이 기혈의 흐름을 막아 버린 것이었다. 상념에 흔들리던 사내의 눈빛이 어느새 본연의 차가움을 되찾았다.

“놈을 업고 따라오너라.”

“…….”

검수들은 숲으로 들어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너희들의 적이 아니다. 놈을 살리고 싶으면 어서 따라오너라.”

두 검수는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키 큰 검수가 따라가자는 눈짓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그들이 진청을 업었다.

그때였다.

“하하하! 여기서 뵙는군요.”

난데없이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환하게 웃으며 숲을 헤치고 걸어오는 미청년, 십지문에서 보았던 영호민이라는 청년이었다.

사내는 영호민을 돌아보지도 않고 숲으로 들어갔다. 영호민이 그 뒤를 쪼르르 쫓으며 너스레를 떨어 댄다.

“이 넓은 세상천지에서 며칠 사이에 두 번을 보다니, 아무래도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 보통이 아닌 듯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하!”

영호민의 너스레에도 사내는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여인처럼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인 영호민이 눈빛을 발했다. 대답을 할 때까지, 누가 이기는지 해 보겠다는 표정이다.

휘리릭!

몸을 날려 사내의 앞을 막아서는 영호민. 신법이 보통이 아니었다.

“거, 통성명이라도 좀 합시다. 자꾸 이러면 괜히 제가 무안해지지 않습니까! 내 이름이야 전에 말을 해 주었으니 당연히 아실 테고……. 존성대명이 어찌됩니까? 하하하!”

활짝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가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깨끗하다.

“혁련천후!”

무심하고도 건조한 목소리에도 영호민의 얼굴이 활짝 핀다.

“와우! 이름이 참으로 멋집니다.”

“그만 비켜 주지?”

“……아! 이런!”

영호민은 그제야 자신이 이 사내, 혁련천후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음을 깨닫고 머리를 긁적였다.

“부상을 입은 분이 계신 듯 보이는데 어디 가까운 의원이라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곳 지리를 좀 아는데…….”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것이 촉새가 따로 없었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사람도 짜증이 날 법하건만 혁련천후는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검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무심결에 등에 업힌 진청을 응시하던 영호민이 반짝 눈빛을 발했다.

‘화산의 자하각주!’

그는 진청을 알고 있었다. 작년쯤 정도맹을 찾았을 때 그곳에서 영웅단 소속의 진청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여기 눕혀라.”

혁련천후의 말에 검수들은 진청을 풀밭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혁련천후는 진청을 비스듬히 일으켜 세우고는 명문혈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잠시 후, 혁련천후의 손바닥에서 아지랑이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지켜보던 영호민이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놀라워했다.

‘오호! 대단한데. 단순히 내공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잖아?’

내상을 입은 무림인들을 치료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심후한 내공을 지닌 고수가 자신의 내공을 부상자의 몸에 주입시켜 부상자 스스로 혈맥과 기혈의 움직임을 트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혁련천후는 그것을 넘어서 자신이 진청의 내상을 직접 치료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면 장난이 아니잖아.’

십지문에서의 첫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호기심에 뒤를 쫓아왔던 영호민이다.

우연을 가장하여 그에게 접근을 하려고 기회를 엿보던 중에 때마침 진청과 검수들을 위기에서 구해 주는 것을 보고는 나섰던 것이다.

“컥!”

가래가 끓는 소리와 함께 진청이 피를 게워 내고는 눈을 떴다.

“각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각주님!”

진청이 깨어나자 혁련천후는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 아래로 걸어가 그곳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가 품속에서 술병을 꺼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는 쪼르르 달려가 옆에 앉는 영호민.

“화산으로 가는 길입니까?”

“…….”

“화산, 좋지요. 천하가 인정하는 오악 중의 하나 아닙니까? 쩝! 아쉽다면 화산파의 몰락이 화산의 명성을 조금은 퇴색시켰다는 점이지만 그래도 지금쯤이면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일 겁니다. 게다가 얼마 안 있어 섬서의 정도맹에서 영웅 대회까지 열리게 되었으니 조금 지나면 아마 발 디딜 틈조차 없을 겁니다.”

말이 매끄럽게 잘도 나온다. 천하제일의 수다쟁이를 붙여 놔도 이보다는 못할 듯싶다.

“저 양반도 어느 정도 회복을 한 것 같으니 그만 출발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동행을 하게 된 기념으로 소생이 한잔 사지요.”

혁련천후는 술병을 내려놓고 영호민을 돌아보았다. 워낙에 무표정한 얼굴이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동행이라니. 누가 언제 동행을 허락했단 말인가.

그의 눈빛을 읽은 영호민이 계집처럼 배시시 웃는다.

“화산을 간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사실 저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라서…….”

“낯짝에 한철을 깔았군.”

“에헤헤! 제가 그런 소리를 좀 듣는 편입니다. 워낙에 사람을 좋아해서 말이지요.”

혁련천후는 이쯤 되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영호민의 입이 또 터진다.

“늦가을 화산의 풍경이 천하제일이라고 하기에 어른들 몰래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뭐 겸사겸사 영웅 대회도 구경하고 말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일행까지 생겼으니 이번 유람은 참으로 뜻이 깊은 유람이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신이 나서 떠들어 대던 영호민이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다.

혁련천후가 다가오자 진청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무슨 말을 할 거라 예상했던 진청은 혁련천후가 그냥 스쳐 지나가자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객잔에서 하루 쉬고 가겠다.”

“예!”

혁련천후의 말에 두 검수가 대답했다.

진청 때문에 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둘이 서로를 돌아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진청의 미간에 내천(川)이 생겨났다.

‘지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해.’

섬서성은 중원의 여타 성들에 비해 발전이 상당히 빠른 곳이다. 대개의 성들은 성곽 중심으로 주요 시설들이 밀집된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섬서성만큼은 외곽 지역부터 이미 상당한 규모의 도시들이 자리하고 있다.

건문제가 머무는 연경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인구수를 자랑하는 곳이 섬서성인데, 인구수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였기에 섬서성의 발전은 여타 다른 성들과는 궤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섬서성의 남쪽 지방에 송고객잔(松膏客棧)이라는 곳이 있다.

숙수의 뛰어난 음식 솜씨 때문에 인근에서도 알아주는 곳인데, 그 송고객잔의 주인 왕삼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객잔을 찾는 손님들을 살피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뭔 놈의 무림인들이 이렇게 많이 오는 거야.’

손님이 많으면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데, 인상을 찡그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칼을 찬 무림인들이 많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물 쓰듯 하는 무림인들이라 잘 만하면 몇 달 치 매상을 하루에 올릴 수도 있지만 한 번 실수하면 끝장나 버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양날의 검과 같은 자들이 바로 무림인이다.

무림인들끼리 시비가 붙어 싸우는 일이 벌어져도 그 피해는 온전히 객잔의 몫이 된다. 파손된 기물 값을 물어준 무림인은 지금껏 없었다.

“무조건 예, 예, 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점원들에게 각별히 유의할 것을 당부한 왕삼은 방금 들어온 무림인들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창가의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다섯의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비범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잘생긴 세 명의 청년들과 천하절색의 여인 두 명이 송고객잔에서 가장 비싼 요리를 시켜 놓고선 식사를 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지간한 평일의 매출과 맞먹는 값비싼 요리를 시켜 준 그들을 왕삼이 불안에 떨며 주시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신분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저 인간들이 이곳에 오다니.’

왕삼은 친구의 불행을 떠올리며 불안에 몸을 떨었다.

몇 달 전 왕삼의 친구 전칠이 운영하던 포달객잔의 점원이 실수로 음식을 흘려 고객의 옷을 더럽히는 사건이 있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실수였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했다.

옷이 더럽혀진 청년 고수가 점원의 팔을 자른 것도 모자라 객잔을 무참히 부숴 버린 것이다.

그만하라고 사정사정했던 전칠도 팔과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당시 객잔 안에는 다른 무림인들이 제법 많았지만 아무도 그를 말려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청년의 신분이 녹록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사천의 맹주이자 오대세가의 한 축을 이루는 사천당가의 대공자였기 때문인데, 그 무지막지한 인간이 지금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젠장! 제발 빨리 먹고 나가 주라.’

왕삼은 돈도 싫었다. 그저 그들이 얼른 나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으면 싶을 뿐이었다.

그때 왕삼의 뒤쪽 문이 열리며 다섯의 손님들이 들어섰다. 혁련천후와 영호민 일행이었다.

당가의 대공자에게 정신을 빼앗긴 왕삼은 미처 그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지 못했다.

“험!”

헛기침 소리에 그제야 왕삼의 고개가 돌아갔다.

안절부절못하던 안색은 돌아서는 순간 이미 장사꾼의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단한 직업 정신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무사님들!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오시는 걸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섯의 모습을 확인한 왕삼은 연신 허리를 굽혔다.

하나같이 칼을 찬 것이, 그들 또한 무림인들이 틀림이 없었다.

제때 대접을 하지 못한 정도로도 자신의 팔 하나쯤은 쉽게 자를 수 있는 자들이 무림인들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왕삼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내보이며 그들을 맞았다.

“안내하게.”

“이리 오십시오.”

왕삼이 안내한 곳은 당문성 일행이 자리한 곳과는 반대쪽이었다. 혹시라도 시비가 붙을 것을 염려해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간단한 음식과 술을 주문한 일행들은 객잔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싱글거리며 객잔을 둘러보던 영호민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