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3화 (3/425)

# 3

<귀환무사 3화>

* * *

무한의 늦가을 날씨는 꽤나 화창했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를 쓸고 지나가자 온갖 색깔의 나뭇잎들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

사내는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맞으며 관도 위를 걸었다.

‘십 년 만이군.’

그는 이 길을 걸어 본 적이 있었다.

그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손을 잡고 걸었었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걸었던 이 길이 지금은 무척이나 생경스럽고 어색했다.

십 년.

잃어버린 세월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십 년이란 세월은 행복한 미래에 대한 장밋빛 꿈 대신 증오와 복수심을 주었으며 스스로를 복수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은 네게 갈 수가 없구나.’

돌아온 중원. 당장에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것을 끝내기 전에는 그녀를 보지 않겠노라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다짐했던 것이기에 결코 꺾을 수가 없었다.

뾰르릉!

이름조차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사내의 귓전을 울린다.

상념으로 인해 그늘이 드리운 사내의 얼굴은 눈부신 햇살에도, 부드러운 바람에도 결코 펴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사내의 잿빛 눈동자에 걸려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산파의 복장을 한 세 명의 검수들이었다. 그중 두 명은 며칠 전에 보았던 이들이다.

그들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진청은 화산의 신설 무력 부대인 자하각의 각주이다. 천하오객(天下五客)의 일인인 매화무적 진유의 사제로서 그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 온 그는 그것 때문에 조금은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자하각의 각주가 될 수 있었다.

갑자기 일이 생긴 진유를 대신하여 십지신검의 생신을 축하하는 화산의 사절로 십지문을 다녀가던 그가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했다.

산적!

어이없게도 산길을 걷던 도중 산적을 만난 것이다. 천하에 어떤 산적이 화산의 자하각주를 털 생각을 할 수 있겠냐마는 산적도 산적 나름이다.

지금 진청을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가는 산적들은 쇠락한 화산파쯤은 우습게 여기는 녹림채의 무리들이었다.

“각주님! 놈들이 주변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수가 너무 많습니다!”

진청의 좌우에 선 두 명의 검수들은 이미 곳곳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진청 역시 무복이 단풍처럼 물들어 있었다.

“빌어먹을!”

주변을 돌아봐도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하늘로 솟아오르는 수밖에 없어 보이자 진청은 당혹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엄청난 체격에 어른의 머리통만 한 대부(大斧)를 든 녹림도가 진청을 향해 비아냥거린다.

“화산의 검이 천하에서 으뜸이라고 하던데, 순순히 내어주면 고통 없이 죽여 주겠다. 애송이. 흐흐흐!”

“개소리 집어 치우고 빼앗을 자신이 있으면 냉큼 덤비기나 해! 개자식아!”

진청은 위기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녹림도들을 겨눈 검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을 번뜩였지만 누구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대갈통이 없는 귀신으로 만들어 줄 수밖에. 흐흐흐!”

붕붕!

녹림도가 머리 위로 도끼를 휘두르자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린다. 흉맹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두 검수들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해 갔다.

진청은 두 손으로 검을 비스듬히 눕혔다. 그러고는 전음을 날렸다.

[내가 놈을 향해 달려들 때를 노렸다가 무조건 사문을 향해 뛰어라.]

두 검수가 뭐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진청은 바닥을 차고 몸을 날렸다.

“목을 내놔! 개자식아!”

“그 실력으로 가능하겠냐? 크허허!”

장한이 도끼를 휘둘러 달려드는 진청의 육신을 노렸다.

허공을 찢으며 날아드는 도끼에는 상당한 힘이 실려 있었다. 놀랍게도 도끼의 궤적은 진청의 공격을 저절로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놀란 진청이 다급히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도끼를 막아 냈다.

깡!

‘웃!’

진청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참았다.

찌르르…….

검을 든 두 팔이 강력한 반탄력으로 인해 뼛속까지 울렸다. 하마터면 검을 손에서 놓을 뻔한 진청은 서서히 절망감에 휩싸여 갔다.

‘이렇게 개죽음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꽈악!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진청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수들이 무사히 빠져나갔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 순간 진청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런…….”

두 검수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녹림도 여럿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한눈을 팔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애송이!”

쐐액!

도끼가 다시 날아들었다.

진청은 황급히 허리를 젖혀 도끼를 피했다. 간발의 차이로 도끼는 진청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진청의 반격이 이어졌다. 화산의 검수들이라면 누구나 다 익힌다는 태청팔검이 눈부신 변화를 일으키며 녹림도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갔다.

까가강!

녹림도의 도끼는 진청의 검보다 빠르고 강력했다. 도끼에 튕긴 진청의 검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쇳소리를 울린다.

“크흐흐! 고작 그 정도였더냐? 화산의 각주는 개나 소나 다 하는가 보군.”

퍽!

진청의 복부에 녹림도의 발길질이 작렬했다. 정통으로 얻어맞은 진청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저만치 날아가 나뒹굴었다.

그런 진청의 머리 위로 다른 녹림도가 휘두른 칼이 날아들었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던 진청은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사형!’

매화무적 진유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신 때문에 사문에서조차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했던 그가 지금 이 순간 무척이나 보고 싶다.

‘죄송합니다, 대사형…….’

삶을 포기한 진청의 얼굴이 한순간 평온하게 가라앉는다.

그때였다.

깡!

“우억!”

거친 쇳소리와 함께 뭔가 휙 하고 날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진청이 감았던 눈을 떴다.

“어!”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을 죽였어야 할 녹림도가 저만치 앞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앞에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서 있었다.

뒤이어 곳곳에 쓰러진 녹림도들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두 검수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자들이었다.

‘저 사람이 우리를…….’

진청은 눈앞의 사내가 자신들을 구해 줬음을 깨달았다. 아니라면 이런 광경이 펼쳐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검수 하나가 놀라서 외친다.

“당신은 그 귀머거리!”

‘뭐? 귀머거리라고?’

그때 사내가 진청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순간 진청은 크게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속에 어려 있는 광포함의 한 자락을 보니 척추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기분이었다.

“적을 앞에 두고 눈을 감다니 화산의 옷을 입을 자격이 없는 놈이군.”

얼음장보다 차가운 음성이 사내의 입술을 뚫고 흘러나왔다.

“큭!”

무형의 기운이 진청의 목을 조였다. 진청의 얼굴은 이미 밀랍보다 더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만하시오!”

두 검수가 다급히 외쳤다.

동시에 진청의 목을 조였던 무형의 기운이 사라졌다. 숨통이 트인 진청은 허리를 꺾은 채 연신 숨을 들이켰다.

“헉! 헉! 헉!”

검수들이 황급히 뛰어와 진청을 부축했다. 진청은 한동안 숨을 헐떡인 뒤에야 간신히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사내는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화산으로 가는 길이냐?”

사내가 진청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자존심이 강한 진청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초면에 반말이라니. 평소의 진청이었더라면 당장에 칼을 뽑아 달려들었을 것이다.

대답은 다른 검수가 대신했다.

“그렇습니다.”

“앞장서라.”

“……예?”

“나도 화산으로 가는 길이다.”

제2장 동행

협을 중시하는 정파여서일까?

진청과 두 검수는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녹림도들을 묻어 주고서야 떠날 준비를 했다.

졸지에 일행이 되어 버린 사내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뭐야, 저 인간.’

사내를 바라보는 진청의 시선이 곱지 않다.

목숨은 살려 주었지만 초면에 대해도 너무 막 대한다. 비록 쇠락했다고는 하나 자신은 구대 문파의 한 곳인 화산파의 각주다. 신분조차 모르는 낭인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정체를 물어볼까?’

진청은 때 아닌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도저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사내가 물었다.

“진유가 네게 사형이 되느냐?”

“이봐! 당신! 말을 좀 조심하지? 그분이 어떤 분인데 감히 평대로 입에 올리는 거야!”

누구보다 존경하는 대사형을 함부로 말해서일까? 진청의 입에서 대뜸 거친 대답이 터져 나왔다. 화가 난 진청은 이미 사내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라는 것쯤은 까맣게 잊었다.

그만큼 진청은 단순한 사내였다.

“그런 성깔을 지녔으면서 좀 전에는 왜 눈을 감고 미리 포기했지?”

“젠장! 포기는 누가 뭘 포기했다는 거야!”

“저기 저 두 친구의 목숨을 포기한 것으로 보이던데, 아닌가?”

진청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 난 최선을 다했다고!”

“각주님! 그만 참으십시오! 이러다가 큰일 나겠습니다!”

두 검수가 황급히 말렸지만 이미 불이 붙어 버린 진청을 말릴 순 없었다.

“내가 있었어도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이 죽여 버린 그자는 나보다 훨씬 강했으니까. 씨팔! 이렇게 따지면서 생색을 낼 거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구했어!”

진청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낱 녹림도 따위에게 죽을 뻔했던 자신이 수치스러워서였다.

사내가 천천히 일어섰다.

“죽는 순간까지 칼을 들고 싸웠어야 했다. 그것이 윗사람의 도리이며 대의(大義)다.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인 집단은 대의가 없으면 도적 떼와 다를 바 없다. 특히 잘난 너희 화산 같은 곳은 더더욱 그래야 한다.”

“뭐? 잘난 화산?”

진청의 눈이 기어코 돌아 버렸다.

“닥쳐! 새끼야!”

진청이 검을 뽑아 청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내는 피할 생각이 없는 듯 그 자리에서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퍽!

진청이 피를 토해 내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헉! 각주님!”

검수들이 크게 놀라 진청을 향해 뛰어갔다. 진청이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지? 네가 뭔데 화산을 아는 척하는 거냐고! 개새끼야!”

분노가 극에 달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던가. 지금 진청이 그랬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선혈과 섞여 진청의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더 이상 각주님께 무례를 범한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당신과 싸울 것이오!”

두 검수가 검파에 손을 가져가며 사내를 향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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