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귀환무사 2화>
그렇다고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는 것은 아니었다.
“과연 십지문의 후덕함은 으뜸일세그려.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한테도 이렇듯 좋은 음식을 내놓다니 말이야.”
“그러게 말일세. 역시 독고 대협은 다르구먼. 내가 몇 군데 잔칫상을 받아 봤지만 이렇듯 푸짐한 상은 처음일세그려.”
“독고 대협의 인품이야 천하가 다 인정하지 않는가. 어쨌든 십지문이 하루빨리 오대세가를 뛰어넘어 천하제일 문파가 되기를 빌어 주세나.”
“옳거니.”
후한 대접에 독고무를 칭송하느라 바쁜 장한들. 그런 그들의 뒤쪽에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흑색 일색인 사내가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한의 초입에서 화산의 검수들에게 귀머거리 취급을 받았던 바로 그 사내였다.
탁!
쪼르륵!
기계적으로 술을 따르고 비우기를 반복하는 사내. 하지만 아주 이따금씩 십지문의 본관 쪽을 응시하며 알 수 없는 눈빛을 머금곤 했다.
“오! 십지신검이시다.”
“과연 멋지시군.”
술렁거리는 소리에 사내의 시선이 십지문의 내당 쪽을 향했다.
한 자루 칼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과 총관 나태룡이 연무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미소를 머금은 독고무는 연무장의 군웅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다시 본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내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린 것은 독고무의 시선이 자신이 앉은 곳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였다.
척!
술잔을 내려놓은 손이 술병의 목을 잡더니 그대로 병째 입으로 가져간다.
벌컥!
단숨에 병을 비운 사내는 다른 술병을 잡아 갔다. 감정이라고는 없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에 분노한 것일까?
사내는 그런 식으로 세 병을 비우고서야 흔들리던 눈빛을 다잡았다.
그런 사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가 있었다.
사내의 맞은편 탁자에는 여인의 방심을 단숨에 흔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준수한 청년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크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사내의 얼굴에서 한시도 떨어질 줄을 모른다.
누군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것을 모르는지, 사내의 손은 네 번째 병을 잡아 갔다.
연무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가장 좌측 끄트머리에서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호통이 터져 나왔다.
“네 이놈!”
난데없는 소란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해 돌아갔다.
술상이 엎어지며 난장판이 되어 버린 그곳에 호리호리한 몸매에 다소 강퍅한 인상을 주는 사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 분을 삭이지 못해 어깨를 들썩거리며 서 있었다.
한때 요동의 맹주로 군림했던 모용세가(募溶世家)의 모용조(募溶早)라는 인물이었다.
그가 노려보는 이는 날카롭기 짝이 없는 인상을 지닌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사천성의 맹주인 사천당가(四川唐家)의 당소(唐素)라는 자로, 적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독과 암기술이 이미 절정의 초입을 바라본다고 알려져 있었다. 지나치게 악랄한 심성 때문에 정파에서도 달갑지 않게 보는 위인이다.
당소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모용조가 그보다 선배임을 감안하면 지극히 모욕적인 태도였다.
“축하를 해 줘도 모자랄 판에 선배께서는 어찌 남의 잔칫상을 뒤엎습니까?”
당소의 빈정거림에 노기로 얼굴이 붉어진 모용조가 씹듯이 말을 뱉어 냈다.
“감히 본 세가를 모욕하고도 그냥 넘어가리라 생각했느냐?”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그리고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여기서 생사결이라도 펼치겠다, 이 말을 하시는 겁니까?”
당소의 빈정거림은 도를 넘어섰다.
주변에 앉았던 사람들이 불쾌한 얼굴로 당소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오대세가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이라고 평가받는 당가의 위세 때문에 감히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인데, 강호인들의 습성은 범인들의 사고방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모욕을 받으면 반드시 돌려주어야 했고 때로는 죽음을 불사하기도 하는 게 강호를 살아가는 자들의 방식이다. 특히 지금의 두 사람처럼 제법 명망 있는 문파나 세가의 사람들은 자존심을 목숨 이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괜히 잘못 나섰다가는 모욕을 했다는 죄로 되레 칼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런 점이 모두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숙부님! 고정하십시오.”
그때, 모용조의 뒤쪽에서 청아한 음성과 함께 아름다운 여인이 쑥 일어섰다.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모를 지닌 그녀는 모용세가의 금지옥엽이자 사천제일미로 불리는 모용미였다.
거친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연무장에 있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운 그녀는 선홍빛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당소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당가의 무례는 청산이 변하지 않는 한 절대 잊지 않겠어요.”
“이보시오, 모용 소저! 난 그저 본가의 대공자께서 전하라는 말을 전했을 뿐이오.”
말투는 정중했지만 모용미의 몸을 훑는 눈동자는 이미 색욕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오늘의 이 빚은 언제고 반드시 갚을 날이 있을 테니 기대해도 좋아요! 가요! 숙부님!”
매섭게 당소를 노려본 모용미는 모용조의 팔을 잡으며 십지문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들이 십지문을 나가 버리자 당가의 사람들이 앉은 곳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한가운데에 상당히 준수한 용모를 지닌 청년이 보였다.
모두가 비웃음을 터트리는 가운데 그는 멀어져 가는 모용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싸늘히 미소를 머금었다.
“꼴에 자존심은 살아 있다 이건가? 후후후.”
당문성(唐文星)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는 사천당가의 대공자이자 차기 후계자이다.
“흥! 독물을 처먹고 살더니 상판이 뱀처럼 생겨먹었네. 재수 없는 인간하고는! 쳇!”
흑발 사내의 옆 탁자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미청년이 당문성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더니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의 옆자리로 걸어와 앉았다.
“그렇지 않소?”
탁!
쪼르륵!
사내는 마치 말하는 법을 잊은 듯 미청년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술잔만 기울였다. 마음이 상할 법도 하건만 미청년은 되레 활짝 웃는다.
“소생은 영호민이라고 하오. 이것도 인연인데 함께 술잔을 섞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짐짓 호탕한 태도를 보이는 미청년, 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에 무응답이었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마음이 상해 자리를 뜰 법도 하건만 미청년은 아랑곳 않고 또다시 말을 건넨다.
“복장을 보니 북쪽에서 오신 분 같은데 유람이라도 하는 중이시오?”
쪼르륵!
탁!
“소생도 유람차 세상을 나온 터이니 마침 잘됐군요. 무릇 유람은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제 맛이라고 했으니 이참에 소생과 동행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
쪼르륵!
탁!
돌아오는 대답은 술을 따르는 소리와 잔을 내려놓는 소리뿐이었다.
어지간했던 미청년, 영호민의 눈가에 슬그머니 주름이 잡혔다.
“이보시오. 혹시 말을 못하는 벙어리라도 되오? 아니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라도 되는 것이오? 사람이 말을 했으면 뭐라 한마디라도 대답해 주는 것이 사람 간의 법도가 아니오? 내 참!”
제풀에 짜증이 난 영호민은 술잔을 들어 벌컥 마셔 버리고선 사내의 앞에 놓인 술병을 집어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탁!
사내가 일어섰다.
“벌써 갑니까? 음식이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사내는 끝까지 반응하지 않고 십지문의 정문을 향해 걸었다.
“뭐야?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거야?”
영호민은 사내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연신 구시렁거리더니 이내 사내의 뒤를 쫓아 자리를 떴다.
소란스러웠던 십지문의 하루가 끝나고 어두운 밤이 찾아들었다.
사위가 어둠 속에 잠긴 십지문의 전각들 중 한 곳에 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는데 바로 십지신검 독고무의 거처였다.
한 여인이 독고무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천하절색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그녀가 바로 독고무와 더불어 십지문이 자랑하는 천하제일 미녀, 독고혜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바라보는 독고무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도 놈을 기다리는 것이냐?”
“…….”
“놈이 사라진 지 벌써 십 년이 흘렀다. 은밀히 화산파의 동정까지 살펴보았지만 그들 역시 놈의 행적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쯤 되면 놈을 포기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너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만 쉬어야겠어요.”
붉디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다. 독고무의 목소리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네 나이 이미 서른을 넘어섰다. 이젠 너도 그만 가정을 꾸리고 남들처럼 보란 듯이 살아야 하지 않느냐? 언제까지 소식조차 없는 놈을 기다릴 작정이냐?”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독고혜의 커다란 눈망울이 살짝 흔들린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쉰 독고무가 말을 이어 간다.
“금옥장에서 며칠 안에 다시 매파를 보내올 것이다. 혼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한 번쯤은 만나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오라버니께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말씀을 드려 주세요.”
“정도맹의 나 공자도 돌려 보낼 셈이냐?”
“귀찮군요. 그 사람들…….”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는 동생의 여전함에 독고무는 더 이상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아니다. 피곤할 터이니 그만 가서 쉬려무나.”
“쉬세요.”
거처를 나서는 독고혜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여워 보였는지 독고무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린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홀로 키웠던 동생이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동생만큼은 훌륭하게 키우겠다며 돈을 벌기 위해 청부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았었다.
다행히 동생은 아주 훌륭하게 자라 주었고 스물이 채 못 되었을 때부터 천하제일 미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독고무 자신도 십지신검이라는 별호를 얻으며 강호의 거물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십 년 전, 동생에게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났다. 동생 스스로 운명이라 여겼던 정인(情人)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동생의 삶은 슬픔의 나날이었다. 생사조차 불분명한 정인을 기다리며 살아오고 있었다. 그 세월이 벌써 십 년이다.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독고무의 삶도 그녀와 결코 다르지 않았다. 십지신검이니 십지문이니 하는 명성도 그에게는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동생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독고무다.
‘놈! 죽은 것이냐, 아니면 잊은 것이냐?’
독고무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탁자를 내리쳤다.
쾅!
“죽었다면 너를 죽인 자를 내 손으로 죽여 주마. 하지만 저 아이를 잊은 것이라면 네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천후!”
천후!
독고혜가 기다리는 사내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