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귀환무사 1화>
제1장 귀환
신마(神魔)의 전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주 오래전부터 신마의 위대함과 불멸의 신화를 말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신마는 위대한 전설로 각인되어 있었다. 실존했던 인물인지 아니면 가공의 인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은 칼을 들고 살아가는 무사들의 이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강자존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강호!
천하의 또 다른 세상인 그곳은 오늘도 신마의 전설을 흠모하며 무적의 길을 걷고자 꿈을 꾸는 무사들의 피와 땀으로 적셔지고 있었다.
호북성(湖北城)의 성도(城都), 무한으로 접어드는 좁은 길 위에 흑색 장포를 걸친 낭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 밑까지 내려온 흑발은 여인의 그것처럼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칼날처럼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과 강렬한 눈빛은 강인한 사내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유람이라도 나선 것일까?
사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관도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고 있었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계절 탓에 주변은 온통 화려한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그 풍경이 마치 뛰어난 화공이 심혈을 기울여 그린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변을 감상하며 걸음을 놓던 낭인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생겨났다.
두두두두!
낭인이 걸어가는 길 후방의 저만치에서 두 필의 인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눈보다 흰 무복의 소맷자락 끝에 매화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것으로 보아 화산파의 검수들인 듯 보였다. 길은 두 필의 기마가 질주하기엔 턱없이 좁았지만 화산의 검수들은 낭인을 보고서도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는 듯 거칠게 질주했다.
그러나 사내는 맹렬히 달려오는 인마에는 아랑곳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걷고 있었다.
“뭐야, 저거!”
우측을 달리던 검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히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낭인이 길을 비켜서지 않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비켜라!”
검수의 입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여느 중원의 말보다 훨씬 더 크고 육중한 대완마의 발굽에 치이면 범인들은 중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흑발 청년이 걸음을 멈출 기미가 없어 보이자 고함을 지른 검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빌어먹을!”
히히힝!
그대로 휩쓸고 지나칠 기세를 보이던 검수들이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사내와 그들과의 거리는 불과 일 장, 고삐를 당기는 시기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 불상사가 일어났으리라.
“이봐! 말이 달리면 길을 비켜 줘야 할 것 아니야!”
말에서 뛰어내리는 검수들의 기색을 보니 한바탕 주먹질이라도 할 모양이다. 그중 키가 한 뼘 정도는 더 큰 검수가 사내의 앞을 막아섰다.
걸음을 세우고 그들을 힐끗거린 흑발 청년이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자 검수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얼레? 미친놈 아냐?”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인가 본데 그냥 가자.”
키가 작은 검수가 우측의 검수를 달랬다.
“귀머거리?”
듣고 보니 그랬다.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감히 자신들을 무시하는 저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들은 화산의 제자들이다. 화산의 무복을 입었으니 제아무리 낭인이라도 몰라볼 리가 없다.
금방이라도 주먹질을 할 것같이 성을 내던 검수가 측은한 빛을 보이며 화를 누그러뜨렸다. 천성이 착한 모양인데, 그는 사내의 등에다 대고 외쳤다.
“이봐! 이곳은 기마들이 자주 이동하는 곳이니 각별히 조심해서 다니라고!”
“이런 바보. 말한다고 들리나?”
“…….”
핀잔에 머쓱해진 검수가 키 작은 검수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재주가 있으면 네가 한번 해 봐’라는 표정이다.
“쩝!”
그도 머쓱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난감해진 둘은 이대로 뒀다간 크게 다칠 낭인이 걱정되었는지 앞을 막고서는 말을 가리키며 팔을 둥글게 모았다가 손가락을 교차시키는 시늉을 했다.
“말이 많으니 조심하쇼!”
딴에는 자신의 동작이 제법 그럴싸했는지 서로를 보며 씨익 웃음을 짓는다. 흑발 청년이 말없이 자신들을 담담한 빛으로 응시하자 말에 오르려던 그들은 다시 손짓을 하며 물었다.
“무한으로 가는 것이오?”
끄덕!
흑발 청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같은 방향인데 데려다줄까?”
“늦으면 각주님이 화를 내실 텐데 괜찮을까?”
“에이! 괜찮아. 좋은 일 하다가 늦었는데 설마 뭐라 하시겠냐?”
둘은 흑발 청년을 무한까지 태워다 주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조금 전까지 성을 내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착한 성품을 지녔음에 분명하다.
담담하던 사내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묘한 빛이 순간 피어났다 사라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검수들은 사내의 변화를 보지 못했다.
“미안할 것 없으니 빨리 말에 오르시오.”
“괜찮으니 갈 길 가시오.”
사내의 입에서 지극히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두 검수가 눈을 휘둥그레 치뜨며 서로를 돌아본다.
“어! 말을 할 줄 아네?”
“그러게?”
“뭐야, 이거! 다 듣고 있으면서 쌩까고 있었잖아!”
두 검수의 얼굴이 화로 인해 일그러진다. 그럼에도 사내는 그저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말을 할 줄 알아도 못 듣는 사람들도 있어. 그러니 그냥 빨리 가자.”
동료의 말에 키가 큰 검수는 이내 순진한 표정을 짓는다. 칼 밥을 먹고 살아가는 강호의 무사들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순박하고 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다니다가 귀신도 모르게 죽을 수 있으니 뒤도 좀 보면서 다니쇼.”
두두두!
멀어지는 검수들을 응시하던 사내의 눈동자에 돌멩이가 떨어진 호수의 수면처럼 파랑이 인다.
‘화산…….’
속으로 화산을 읊조린 그는 이내 다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하의 또 다른 세상인 무림(武林).
무사들의 세상인 그곳에는 수많은 문파들이 각각의 위세를 뽐내며 천하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천하제일의 문파를 세우겠다.”
무사들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천하제일 문파를 세우는 것을 꿈꾸며 살아간다. 물론 그중에는 홀로 천하를 종횡하며 고독한 절대자의 낭만을 꿈꾸는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자에 속한다.
언제부턴가 강호에는 개인의 무력보다 문파의 위세를 더욱 중요시하는 풍토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것은 문파의 난립을 초래하며 무림의 질서를 혼잡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전통의 구파일방과 마교(魔敎)가 각각 정파와 마도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모두의 위에 군림하고는 있다지만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신흥 세력들의 기세 또한 만만찮은 것이 당금 무림의 형세였다.
역사가 짧은 신흥 세력들은 저마다 문파의 세력을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문파가 가장 빠르게 세력을 키우는 최상의 방법은 절대 고수를 배출하는 것이다.
지금껏 강호를 석권해 온 세력들 중 이름난 고수 하나 없는 곳이 없었고, 그들의 무예가 전승되며 발전해 온 만큼 문파의 무공과 세력은 강해지고 커질 수 있었다.
십지문(十地門)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곳이다.
십지문은 호북성 무한에 자리 잡은 무가(武家)로서 당금 강호가 주목하는 신흥 세력들 중 발군의 성장 속도를 보이는 곳이었다.
개파(開派)를 선언한 지 십 년이 못 되어 그들은 오대세가를 위협하는 위치에까지 올라 있었는데, 그들이 그토록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십지신검(十地神劍) 독고무라는 걸출한 고수와 천하제일미 검후(劍后) 독고혜라는 존재 덕분이었다.
십 년 전, 홀연히 강호에 등장한 독고무는 수많은 강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고 그에게 패한 고수들의 명성은 고스란히 그에게로 넘어갔다.
당대의 이름난 고수들과의 대전에서 단 한 번의 패배조차 기록하지 않은 그에게 무사들은 열광과 환호를 보냈고, 그들의 지지를 받은 독고무는 천하오객(天下五客)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기에 이르렀다.
“이십 년이 지나면 십지신검의 위명은 일존(一尊)과 오성(五星)에 버금갈 것이다.”
세인들은 독고무가 진정 그러한 경지에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각설하고, 그러한 십지문의 정문이 오늘따라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십지문의 총관 나태룡(羅太龍)이 내방객들을 맞느라 여념이 없었다.
문파의 최상위 수뇌라 할 수 있는 총관이 직접 정문에서 사람을 맞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그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십지문주 독고무의 마흔두 번째 생일이 바로 오늘인 까닭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신검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곳곳에서 축하 인사가 들려왔다.
강호의 명망 높은 인사들을 보기 위해 찾아든 사람들로 인해 십지문의 정문은 장터처럼 북적였다.
정문은 주로 지역의 군소 방파에서 온 인물들을 맞이했기에 제법 소란스러웠는데 그것을 염려한 십지문은 구파를 비롯한 주요 문파의 귀빈들은 따로 마련된 출입문을 통하게 했다.
나태룡이 담당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아! 무당의 영진도장 아니십니까?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오! 화산의 자하각주께서도 오셨구려! 고맙소이다!”
“당문의 대공자가 아니시오? 사천에서 이 먼 곳까지 와 주시니 그저 감복할 따름이외다! 허허허!”
나태룡은 연신 허리를 숙이며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등짝이 땀으로 흥건히 젖은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저 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알아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때를 즈음하여 나태룡은 비로소 허리를 펼 수 있었다.
“휴! 무공을 수련하는 것보다 더 힘들구나.”
“수고하셨습니다, 총관님!”
“그래, 너도 고생 많았으니 얼른 들어가 술이라도 한잔 하도록 하여라.”
“예. 총관님!”
함께 손님들을 맞이했던 수하의 어깨를 어루만져 준 나태룡은 쑤시는 삭신을 이리저리 비틀어 가며 빈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끌벅적!
십지문의 연무장에 마련된 잔치 자리는 이미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으며 흥청거리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주로 군소 방파의 인물들을 위해 마련한 장소였지만 개중엔 제법 유명한 구파와 오대세가의 인물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귀빈이라 할 수 있는 장로급 이상의 인물들은 빈청에 별도로 마련된 장소에서 모인 탓에 연무장의 분위기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술 좀 더 내오시오!”
“여기도 한 병 추가요!”
저잣거리의 장터를 연상시키는 그곳의 한쪽 구석에 별도의 천막이 쳐져 있었다. 시끌벅적한 다른 곳과 달리 그곳의 무사들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술과 음식을 들고 있었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의 공간.
지역의 삼류 무사들이나 지나가던 낭인들을 위해 마련된 곳임에도 음식만큼은 연무장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푸짐했으나, 분위기는 지나치리만큼 조용했다.
삼류 무사나 낭인들의 입장에선 구파 소속의 무사들과 함부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다. 힘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강호에서 그들은 철저한 약자였기에 어쩌면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펴 그러는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