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더러운 세상!]
영상이 끝나자 현우는 마우스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라방 중에 대형사고 친 블랙스톰 이안’이라는 제목 아래로 댓글이 주르륵 이어졌다.
문득 제 댓글 밑에 병훈이 단 댓글을 다시 본 현우는 닉네임이 눈에 들어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직장 동료가 볼 걸 뻔히 알면서 아이돌 팬인 티가 팍팍 나는 본 계정을 여론몰이에 쓰다니.
이따가 팀장에게 보고할 때 ‘HWC는 저고 이다봄존예세젤예가 박 주임님입니다.’라고 제 입으로 말해야 할 걸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대댓 뭐라고 달렸는지 좀 열어봐.”
옆에서 병훈이 재촉하자 현우는 ‘답글 15개 보기’라고 적힌 버튼을 클릭했다.
반응을 보니 다들 쉽게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비슷하게 손을 써둔 덕에 여론은 이제 병으로 완전히 굳어진 듯했다.
“언플은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네요.”
현우의 말에 병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에서 시선을 떼더니 뒷덜미를 잡으며 푸념했다.
“천기누설을 왜 하필 생방에서 저지르고 그래?”
덕분에 천계부터 인간계까지 여러모로 시끄러워졌고, 생물3팀은 여러모로 바빠졌다.
“미래만 보는 게 아니라 현재랑 과거도 보네. 저거 엄청난 능력인데 원래 갖고 있던 거야, 어쩌다 얻은 거야?”
“찾아서 조사해 봐야 알겠죠.”
천이안은 그 자리에서 도망쳐 사라졌다. 아무래도 예지력이 있으니 제가 특관청 관리 요원에게 잡혀 조사를 받고 격노한 옥황상제에게 끌려갈지도 모르는 처지가 됐다는 걸 미리 본 게 분명했다.
저러다 계속 천기를 누설하거나 인간계의 일을 폭로하고 다니면 사회 안정에 큰 해가 될 거다. 아니, 일단 운 나쁘게 이번 건을 맡은 생물3팀의 안정이 더 큰 문제였다.
“안 그래도 일손 달리는데 이젠 미래를 다 보는 사람이랑 숨바꼭질 놀이까지 하라니….”
병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초능력이 전혀 없는 인간더러 예지 능력자를 잡아 오라는 건 신생아더러 뛰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천계에서 이번 건을 조사할 감찰 선녀 한 명을 보내기로 하면서 혹까지 달고 뛰게 생겼다.
“선녀님 언제 오신다고?”
“어… 오실 때 됐네요.”
곧 예정된 회의 시각이었다.
“설향 선녀님 오시면 좋겠는데.”
“어… 제가 공문에서 본 이름은 다르던데요.”
“쳇.”
현우의 의자 등받이를 툭툭 치고 자리로 돌아가던 병훈이 멈칫했다.
“어? 오셨네.”
병훈이 처음 보는 선녀를 단번에 알아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현우는 팀장실 회의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선녀에게 시선을 두었다. 평범하지만 묘한 위화감이 드는 정장 차림이었다. 인간계의 유행에 관심이 많지 않은 선인이라면 현대 인간의 옷차림을 따라 해도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를 풍겼다.
선녀는 언뜻 보기에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어쩌면 표정이 없어서 몇 살 더 높게 봤는지도 모르겠다. 겉보기야 어떻든 최소 수백 살일 건 뻔하지만 말이다.
“여기 차현우 주무관이 이번 건을 맡았으니….”
팀장이 갑자기 제 이름을 입에 올리자 정신을 차린 현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했다.
“청혜 선녀님, 잘 부탁드립니다.”
선녀는 그에게 잠시 눈을 돌려 인사를 받아 주더니 다시 팀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차 주임에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이번 건, 양쪽 모두에게 중차대한 사안인 만큼 적극 협력 부탁드립니다.”
팀장은 평소처럼 사무적이고 무심하게 자료만 내려다보며 회의를 진행했다. 한편, 선녀는 유달리 팀장을 뚫어져라 보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사적인 눈빛으로.
여느 여직원들처럼 이성으로 보는 눈은 아니었다. 저쪽도 태도나 말투는 팀장만큼이나 무심했다.
“자네의 적극적인 협력도 기대하는 바이네.”
팀장의 미간이 일순 일그러졌다.
“개체가 인간이니 신병은 우리 쪽이 인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차 주임과 나가서 얘기하시죠.”
팀장은 선녀에게 합의도 구하지 않고 단호하게 통보하며 회의를 끝냈다. 달갑지 않은 기색을 현우도 똑똑히 느낄 정도였다.
그 시각, 본청이 자리한 건물 1층에서 소강당의 문이 열리고, 강당에 앉아 있던 정장 차림의 남녀가 되살아난 시체처럼 일어나 하나둘 밖으로 향했다. 지루하고 쓸모없는 시간에서 벗어났지만 눈빛에 생기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사무실이란 이름의 무덤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그나마 여기서 점심시간까지 때우다 연구소로 갈 생각인 초원의 표정은 밝은 편이었다.
“이런 걸 뭐하러 반년에 한 번씩이나 하나 몰라.”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걷던 중년의 여자가 푸념했다. 여자는 초원이 처음 특관청에 취직했을 때 몸담았던 심령관리1팀의 팀장이었다. 그러니까 전전 상사인 셈이다.
“제 말이요.”
두 사람은 특관청 직원 중 영능력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위험한 능력에 공무원의 권한까지 가졌다고 정기적으로 공무원 윤리와 스트레스 관리법 교육을 이수하라는 거였다.
“저는 더 억울한 거 아시죠? 그냥 영 좀 느끼는 게 뭐 대단한 영능력이라고 고위험 능력자 취급을 하나 모르겠어요.”
초원이 가진 능력이라고 해 봐야 귀신이 있나 없나 느끼는 게 전부였다.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할 수 있었더라면 같이 사는 시누이에게 남편의 어릴 적 이야기나 좋아하는 것을 이것저것 물어봤을 것이다. 어쩌면 대화가 잘 안 통하는 덕분에 전 여친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못하는 건 다행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난 초원 씨 덕분에 오늘은 안 졸았네.”
전전 상사는 교육 내내 초원이 옆에서 깨워 준 걸 자랑이라고 깔깔 웃으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떠들었다.
저분은 정말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조셔서 일상생활은 어떻게 하시는지.
초원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초원 씨는 굳이 일산까지 갈 것 없이 우리 팀으로 다시 오지 그랬어?”
으아, 사절입니다.
꿀보직인 심령팀에서 저승사자가 버티고 있는 생물3팀으로 소속을 옮기게 된 사연을 떠올리자 표정 관리가 어려워졌다.
“맨날 내 옷시중 드느라 지쳤구나, 초원 씨가.”
아셔서 다행이에요.
심령1팀의 고양희 팀장은 반인반수였다. ‘수’가 영험한 고양이인 덕분에 영을 볼 수 있지만, 또 고양이인 탓에 시도 때도 없이 졸다 고양이로 변신하기 일쑤였다.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 초원은 고양이 상사가 고이 벗어둔 옷을 주섬주섬 챙겨 화장실로 따라가 칸 너머로 옷을 하나씩 넘겨주는 게 일과였던 것이다. 거기다 고 팀장이 일을 허술하기 짝이 없게 해 귀신한테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저 때문에 초원이 팀을 옮긴 걸 여태 말은 안 했어도 눈치채고 있었던 고 팀장이 호호 웃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초원 씨랑 조 팀장 오작교야. 안 그래?”
“아, 네. 감사합니다. 하하….”
초원의 영혼 없는 웃음이 11층 로비를 울렸다.
“초원 씨, 들어가서 차 한잔할래?”
“아, 저는 선약이….”
심령팀 사무실 앞까지 온 고 팀장이 제안하자 초원은 새초롬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아휴, 참. 집에서 지겹게 보는 신랑을 회사에서 또 봐?”
“일 열심히 하고 있나 감시하려고요. 그동안 당한 걸 갚아 줄 기회잖아요.”
이건 다 농담이고 실은 보고 싶어 이러는 게 다른 사람의 눈에 티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하긴 신혼이야. 지겨울 때는 한참 멀었지.”
고 팀장과 헤어져 생물3팀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얼마 전만 해도 매일 오가던 이 길이 이렇게 길었나 싶었다. 지나가는 남직원들의 묘한 눈길 속에서 걷자니 더 그랬다. 예전에 소개팅을 했던 사무관과 마주쳤을 때는 더더욱.
죄지은 것도 없는데 불편해져 걸음을 재촉하던 때였다.
“어머, 초원 씨.”
친하게 지냈던 여직원과 마주쳤다. 그새 배가 많이 나왔네. 아기는 잘 크고? 여긴 어쩐 일이야? 신랑 보러 왔어? 복도에 서서 이런 질문에 답하며 초원은 후회했다.
‘괜히 왔나? 승준 씨한테 내려오라고 할 걸 그랬나?’
‘괜히 왔나’가 곧 ‘괜히 왔다’가 될 줄, 그때까진 짐작도 못 했다.
“어? 루비 님 오셨네요?”
1층 엘리베이터 앞을 기웃거리던 루비를 어느 젊은 남자가 발견하고 알은체를 했다.
“으응, 등록 갱신할 때가 됐거든.”
가늘어졌던 루비의 눈이 일순 커졌다.
아싸, 영능력자다.
어쩐지, 선글라스랑 마스크로 얼굴을 다 가렸는데도 알아본다 했다. 루비는 신이 나 남자에게 다가가 찰싹 달라붙었다.
“등록 갱신이면 금방 끝날 텐데. 하아, 그 뒤엔 뭐 하세요? 시간 괜찮으시면….”
구미호에게 삽시간에 홀린 남자가 얼이 빠진 사이 루비는 남자의 가슴팍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싸, 씨앗이다!
남자의 몸속에서 결정 같은 것이 보였다. 그걸 더 자세히 들여다본 루비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시간 안 괜찮아.”
남자의 팔을 홱 놓고 때마침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탔다. 여전히 얼이 빠진 남자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문이 닫히고 루비는 홀로 남자 이를 갈았다.
“저딴 것도 씨라고 달고 다녀?”
남자의 몸에 든 건 탁하디탁해 못 쓸 물건이었다.
“괜히 힘만 낭비했네.”
구슬이 없는지라 도력이 부족했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힘이 고갈되는 것이다.
“그 망할 도둑놈….”
11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루비는 여우 구슬을 훔쳐 간 놈에게 이를 갈았다. 훔쳐 갔으면 조용히 입 다물고 돈이나 긁어모을 것이지 쓸데없이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루비까지 위험해졌다.
‘내 구슬을 먹고 천기누설한 거 걸리면 나도 격리 감인데.’
아냐. 그게 내 거란 증거가 어딨어? 내 건 따로 있단 말이야.
이렇게 빡빡 우기려면 그 망할 놈이 잡히기 전에 얼른 새 여우 구슬을 만들어 놔야 했다. 그러려면 구슬의 씨앗이 필요했다. 영험한 능력이 있는 사람의 간에서만 찾을 수 있는 그 희귀한 결정체 말이다.
처음엔 무당을 잡으러 다닐까 했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선무당 천지였다.
그러다 떠올린 게 특관청에 분명 있고도 남을 영능력자 리스트였다. 직원을 하나 꼬여서 받아 내면 간단하지 않나 싶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또 마침 영능력이 있는 직원들이 본청에 모이는 날이라는 거 아니겠나.
그런데 여태 쓸 만한 씨앗을 가진 놈을 한 놈도 못 봤다.
11층에서 내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며 이놈 저놈 물색하던 루비는 혀를 찼다.
‘하여간에 시들시들 찌든 공무원 놈들. 싱싱한 애 없나?’
일단 담당자한테 들키면 안 된다. 입에 여우 구슬처럼 생긴 구슬을 물고 들으란 듯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모퉁이를 돌던 찰나였다.
‘뭐야, 쟤.’
정수기 앞에서 잡담을 나누는 여자들 중, 배가 나온 여자가 낯익었다. 분명 올해 초에 등록증을 갱신하러 와서 봤던 그 되바라진 여우였다.
‘쟤 임신했어?’
그때만 해도 애가 없었는데 말이다.
‘쟤 자기가 불임인 줄 착각하고 혼자 질질 짜면서 신파극 찍던 앤데….’
몹쓸 호기심이 동한 루비는 여직원을 노려보며 눈매를 좁혔다. 아까운 도력을 써서 뒷조사를 해 보자마자 혈압이 올랐다.
‘결국엔 그 비싸게 구는 놈이랑 결혼까지 했네? 아우, 열 받아. 저 빵떡같이 생긴 게 대체 뭐라고.’
뒷덜미를 잡자마자 루비는 늘 그렇듯 생각을 고쳐먹었다.
‘유부남이라고 못 먹을 것도 아니잖아. 남의 입에 든 떡을 뺏어 먹는 맛이 또 끝내주지.’
루비는 입맛을 다시며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어머, 이게 누구야?”
잡담을 하던 여자들이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초롱이 아냐?”
루비는 여자의 이름이 초원이라는 걸 알면서 일부러 개 이름 같은 걸로 바꿔 불렀다.
“어머, 빗취 님이시네요.”
여자가 루비의 본명을 힘주어 발음해 ‘Bitch’로 만들어 버리자 결국 개가 된 건 루비였다.
“초원 씨, 반가웠어. 난 곧 회의가 있어서….”
“아, 나도 전화 올 데 있는데 깜빡했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니 수다를 떨던 여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둘만 남자 루비는 잇새에 구슬을 문 채 씨익 웃었다.
“잘 지내?”
“저 이제 관리 요원 아니니까 관련 문의는 3팀으로 가서 해주세요.”
“얼음 공주 어디 안 가네. 결혼하면 사람이 좀 사근사근해질 줄 알아야지.”
그러고 보니 얘도 영능력이 있긴 있지? 루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격리까지 벌점 1점밖에 안 남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에이, 뭐야. 얘는 씨앗조차 없잖아.
짜증이 난 루비는 여자의 몸속을 들여다보던 시선을 그대로 내려 불룩하게 나온 배를 눈짓했다.
“너 그거 알아? 남자들이 제일 바람을 많이 피울 때는 바로 여자가….”
헉, 뭐야.
루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깨알만큼 작은 씨앗이다. 그렇지만 여태 본 것 중 가장 영롱하고 맑은 씨앗이 여자의 배 속에 든 아기의 몸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거, 이거 씨앗 맞는 거지?
도력을 긁어모아 묻자마자 답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까 나 어릴 때도 간에 돌 같은 게 있다고 그랬었는데 크니까 알아서 사라졌어요.”
딸에게 신기가 대물림되는 집안이구나.
루비는 웃고 싶은 걸 참으며 급히 머리를 굴렸다.
“…임신했을 때이지만! 조승준 팀장은 그럴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정말 좋은 남자랑 결혼했어. 축하해.”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어깨를 손으로 톡톡 쳤더니 여자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어깨를 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잘해줄걸. 루비는 후회하며 뒤늦게 여자의 경계를 늦추려 애썼다. 씨앗을 빼내려면 어떻게든 으슥한 데로 끌고 가야만 했다.
“알아. 저번에 내가 좀 너무했지?”
갑자기 반성하는 게 더 수상쩍었나? 여자는 도리어 얼굴을 더욱 굳히며 몸을 돌렸다.
“잠깐만!”
루비는 급한 마음에 여자의 팔을 덥석 잡았다.
“당장 놓으세요. 경비 부르기 전에.”
“아니, 그냥 잠깐 얘기, 웩!”
누가 볼을 한 손으로 콱 틀어쥐는 순간 루비의 입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고개가 절로 돌아가며 감히 겁도 없이 구미호의 몸에 손을 댄 인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루비는 흠칫했다.
인간이 아니잖아?
선녀였다.
“이러니 여태 인간도 못 되었지.”
선녀가 입 속으로 손을 넣더니 구슬을 빼앗아가자 루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짜란 걸 들키면, 그것도 유독 꽉 막히고 말 안 통하기로 유명한 청혜 선녀에게 들키면 큰일이었다.
“져! 쥬셰요! 쥬셰요!”
다 새는 발음으로 애걸하고 구슬로 손을 뻗는 찰나였다.
휙.
선녀가 구슬을 복도 끝으로 던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볼을 움켜쥔 손이 떨어져 나가자 루비는 복도 끝으로 뛰어가며 외쳤다.
“어머, 내 구슬!”
연기돌로 전향해 볼까? 루비는 가짜 따위를 주워 올려 소중한 보물인 양 먼지를 닦는 연기까지 하며 뒤를 힐끔댔다. 이게 가짜란 걸 눈치채지 못한 선녀는 복도 반대편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한 걸음 앞서 걷는 ‘씨앗 주머니’를 바라보던 루비의 입매가 갈고리처럼 비틀렸다.
‘드디어 찾았다.’
초원은 선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왜 따라오는 것만 같을까? 같은 방향으로 가는 선녀를 슬쩍 흘끔댔다. 초원을 보고 있지 않은 걸 보니 그녀에게 용건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그냥 가는 길이 겹쳤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생물3팀 사무실 입구를 기웃거렸다. 입구를 마주하고 앉은 현우와 눈인사를 하는데 선녀가 초원을 스쳐 지나가더니 팀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팀장님 잠시 자리 비우셨어요.”
현우의 말에 선녀가 손을 내리더니 한 뼘만큼 열려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팀장실 안에 서 있으니 정작 초원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쭈뼛거리며 안을 둘러보았다. 으뜸과 안 사무관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문 옆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정신없이 딸깍거리는 아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름 씨, 안녕.”
“어? 초원 주임님…이 아니지.”
“이젠 연구사죠.”
아름의 입에서 민망한 호칭이 튀어나오는 걸 막으려고 선수를 쳤는데 병훈의 입에서 튀어나와 버렸다.
“어, 팀장님 사모님 오셨네?”
“아, 쫌.”
“어쩐 일? 아기는 잘….”
“아기 잘 커요. 오늘 영능력자 대상 교육 받으러 왔다가 팀장님 감시하러 왔어요.”
병훈이 묻기도 전에 빤한 질문에 속사포처럼 대답하던 때였다.
“이런 감시는 환영이지.”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손에 텀블러를 든 승준이 한 발짝 뒤에 있었다. 머쓱해진 팀원들이 곧바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고, 승준은 초원의 허리에 팔을 감고 팀장실로 이끌었다.
“일 먼저 봐요.”
초원이 팀장실 안에 선 여자를 눈짓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승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팀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 건의 자세한 사항은 차 주임에게 물으시면 됩니다.”
무슨 용건일지 빤히 보였던 승준이 초원을 팀장실 테이블 앞에 앉히고 불청객을 내보내려 했지만 선녀는 버티고 나가지 않았다.
“내가 말한 건 잘 생각해 보았는가.”
“곤란하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자넨 통화가 곤란하다고 하지 않았나.”
통화? 선녀와 통화? 그 순간부터 초원의 촉이 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 남자, 선녀와 통화를 했던 적이 있었지. 서천꽃밭에 갈 때 선녀의 도움을 받았다고도 했었다. 거기다 선녀랑 썸 타봐야 좋을 것 없다는 말도 했었네? 규정을 어겨 가며 위험천만한 일을 도와줄 정도로 선녀랑 가까운 사이였다는 거잖아.
그때도 의심은 은근히 했다만 막 사귀기 시작했던 때라 묻어 두었다. 잊고 있었던 퍼즐이 착착 맞춰지고 초원은 빈 조각의 그림을 쉽게 추측해냈다.
그 선녀가 지금 저 선녀다.
눈앞에 있으니 있는지도 몰랐던 판도라의 상자에서 뚜껑이 확 열리는 기분이었다.
“내게 진 빚을 갚아야지.”
사적인 용건이라는 감까지 강하게 들자 초원은 승준의 손에 깍지를 끼며 선녀에게 물었다.
“저희 신랑한테 무슨 부탁이신데요?”
“아.”
선녀가 초원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제야 깨달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때 그 여인이군. 잘됐어. 축하하네.”
빈정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축하하는 투라 초원은 의아해졌다. 제 촉이 망가졌나 싶을 정도였다.
“선녀님,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시죠.”
“아니, 여기서 해요. 왜? 내가 들으면 안 돼요?”
저 망할 촉. 초원이 뭔가 눈치챈 듯이 굴자 승준은 입이 마르기 시작했다.
“별일은 아니네. 내 삼신이 되고자 하는데 원래는 옥황상제가 직접 고르나 이번부터는 자네들이 사는 세상처럼 공정하게 채용 절차를 도입하기로 했다는군. 2차 면접 때….”
‘뭐야. 공적인 용건 같은데?’라는 생각은 곧 착각으로 밝혀졌다.
“인간에게 애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네. 그 증거로 자네 부군의 추천서가 필요한 것뿐일세.”
“…그러니까 선녀님께서 인간에게 애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제 남편이 증명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초원의 떨떠름한 기색을 못 느꼈는지, 느끼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건지 선녀는 고개를 태연하게 끄덕였다. 승준은 입이 마르다 못해 피가 말랐다. 이미 10년 가까이 지난 일이었다. 선녀는 그걸 들추며 서로 잠깐 호감이 있었단 사적인 사실을 문서로 남겨 달라는 것이다. 공문서로. 그것도 유부남에게.
“써 드리세요, 팀장님.”
초원이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휘어진 눈꼬리가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팀장님이라는 호칭은 또 왜 유난히 딱딱한 건지.
“뭐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요? 그냥 여기서 써 드리세요.”
승준은 여태 임신한 초원을 무서운 햄스터라고 불렀다. 농담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진담이 되어버렸다.
“선녀님, 저는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제가 진 빚은 다른 것으로 갚겠습니다. 이만하면 거절의 의사는 충분하게 밝혔으니….”
“쓰시라니까요?”
삐딱하게 구는 초원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선녀가 말문을 열었다.
“자네, 오해하는 것 같네만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일 뿐이네. 부질없는 일에 마음을 써 무엇하나. 이 모든 것이 지나면 후회할 걸세.”
인간의 감정에 무감한 선녀가 제 딴에는 위로라고 한 소리가 도리어 기름을 끼얹었다. 승준은 선녀가 나간 후에도 흉포한 햄스터 모드인 초원의 어깨를 감싸 쥐며 물었다.
“점심 뭐 먹을래요? 고기?”
마법의 단어가 이번엔 통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초원은 고기가 아니라 그를 씹어 먹고 싶다는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고기 앞에서도 초원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 좋아하는 보쌈을 앞에 두고도 된장찌개나 깨작대며 고사를 지내는 아내를 보다 못한 승준은 피하고 싶은 화제를 스스로 꺼냈다.
“굶지 말고 그냥 속 시원하게 물어봐요.”
이미 초원의 밥공기는 절반 가까이 비었지만 승준의 눈에 저건 굶는 거였다.
“됐어요. 어떻게 얼마나 애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부질없는 일에 마음 쓰지 말라잖아요. 뭐, 조 팀장님은 내 부질없는 과거에 마음 많이 쓰시긴 한다만….”
초원은 자존심이 상해서 묻기 싫지만 알고는 싶다는 티를 팍팍 냈다. 거기다 승준이 여태 초원과 인연이 있었던 남자마다 질투심을 불태웠던 사실을 콕 짚었다. 한마디로 내로남불하지 말란 거였다.
승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백 년 묵은 쥐는 신체 일부를 먹고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거 알죠?”
초원은 왜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냐는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방역이 잘 돼서 쥐가 백 년까지 살아 요괴가 되는 일이 잘 없다. 그래서 ‘손톱 먹은 쥐’ 같은 옛날이야기로만 남았다.
“나를 죽이려던 그 변신능력자, 쥐 요괴의 후손이라는 얘기 내가 해준 적 있어요?”
“아뇨.”
“그 선녀님도 옛날에 쥐 요괴한테 가족을 잃었어요.”
“아….”
“그래서 습성 같은 걸 잘 아는 분이라 그놈 추적할 때 도움을 구하면서 알게 된 사이예요. 아마 인간에 대한 애정이란 건 내 일을 본인이 개인적으로 도와줬다는 소릴 테고.”
“그럼 그냥 내 눈치 볼 것 없이 추천서 써 줘도 되잖아요. 그나저나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고요?”
저놈의 촉. 숨겨서 일을 크게 만드느니 솔직하게 다 털어놓는 게 낫다는 건 이미 이 여자와의 첫 번째 결혼 생활에서 뼈저리게 체득한 바였다.
“그러면서 밥 몇 번 먹었어요.”
“아하, 밥만?”
“…밥 먹을 때 마신 반주는 밥으로 칩시다.”
초원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못마땅한 듯 ‘흐응-.’ 콧소리를 내더니 거기까진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넘어가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그 밥이 호텔 룸서비스였던 건 아니죠?”
“손도 한 번 안 잡아 봤어.”
“잡아 보곤 싶었고요?”
승준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미간을 손끝으로 짓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 그의 질투에 당한 일을 갚아주려는지 일부러 꼬장꼬장하게 걸고넘어지는 기미도 보였다.
“그 살인마 잡고 나서 고맙다고 내가 밥 사고, 밥 먹고 헤어질 때 데이트 약속만 한 게 다인데 억울해 죽겠네.”
심지어 초원을 알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도 초원이 저를 알기 전에 사귄 남자 친구를 두고, 심지어는 사귀지도 않은 차현우를 두고 똑같이 굴었다. 입장이 뒤바뀌어 이 짓을 고스란히 당하고 있으니 그간 초원이 얼마나 곤란했을지가 와닿는 것이다.
“데이트 약속?”
“안 지켰어요.”
“왜요?”
“각자 사는 게 바빠서. 그러다 난 초원 씨를 사랑하게 돼서 약속은 없던 일이 됐고, 그쪽은 공적인 사이로 돌아갔고. 그게 끝. 됐죠?”
그래도 초원은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제대로 들었어요? 데이트 약속, 안 지킨 거 초원 씨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머리로는 안다. 별일 아니라는 걸. 그런데도 별일처럼 느껴졌다.
별것 아닌 사이였는데도 과거에 제 남자와 스친 인연이 있는 여자를 마주하는 건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는 매일같이 회사에서 아내가 짝사랑했던 남자에, 심지어는 아내와 소개팅을 했던 사무관까지 마주쳐야 한다. 왜 자꾸만 별것 아닌 일로 날을 세웠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초원은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며 중얼거렸다.
“그 선녀님이랑은 특별한 인연이 있네…. 나는 없는데.”
“없긴 뭐가 없….”
승준은 말을 하려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사고에 휘말려 수많은 역경과 죽음의 위기를 함께 헤쳐나오고 아이까지 둘이나 낳았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이별의 후에 사랑했던 기억을 까맣게 잊고도 서로에게 다시 빠져들었다. 현실로 돌아와도 다시 결혼하자는 약속까지 지켜내고 끝내 해피엔딩을 이뤘다. 차원을 넘나드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모든 걸 잊은 여자는 제가 회사 상사와 어쩌다 원나잇을 하는 바람에 코 꿰어서 속도위반하고 결혼한 줄로만 알고 있다. 제겐 초원만큼 특별한 인연도 없다는 걸,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했다.
그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불행 중 다행이지.
예전에 선녀와 인연이 있었던 이야기는 이미 해 줬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니 기억의 봉인은 아직 건재한 듯했다.
“근데 왜 하필 선녀예요? 선녀랑 엮이면 무슨 소리 들을지 잘 알면서.”
초원은 저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남자에게 물었다. 선인들은 방중술의 달인이다. 이런 더러운 소리가 청의 남직원들 사이에서 도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선녀에게 집적대는 남자는 여직원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죽지 않는 존재니까.”
“아….”
“그런 게 아니고. 죽지 않는 존재니까….”
아?
문득 기시감이 들더니 기억을 떠올릴 때처럼 어떠한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겪은 적 없는 일이니 기억은 절대 아니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승준의 얼굴에 짙은 불빛과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녀의 몸속을 헤집는 손길은 부드럽고도 뜨거웠다. 맞닿은 나신 사이에 차오르는 열기만큼이나, 그리고….
‘벽난로?’
눈앞에서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벽난로며, 기둥이 있는 침대며, 유화까지. 방은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풍겼다.
야한 꿈? 근데 이런 꿈을 내가 꿨었나?
“그나저나 난 초원 씨가 근거 없이 질투할 때가 좋더라.”
멍해져 있던 초원은 승준이 보쌈 두 점을 김치로 돌돌 말아서 앞으로 내밀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질투심 잘 챙겨 뒀다가 오늘 밤 침대에서 불태워야 하니까 많이 먹어 둬요.”
눈을 흘기며 고기를 받아먹던 초원은 또 한 번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 질투하죠? 나중에 침대에서 써먹게 잘 챙겨 둬요.”
* * *
“안녕하세요. 특수분석1팀인데요.”
초원은 복도 건너 신경과학팀 사무실의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지만 1mL 시린지 다섯 개만 빌려 가도 될까요?”
말이 빌린다지 빌린 실험 자재를 갚는 실험실은 없다. 여자들끼리 생리대를 빌리지만 아무도 갚지 않는 것처럼.
“100만 원.”
창문 근처의 칸막이 뒤에 앉아 있던 중년의 연구원이 초원을 보지도 않고 툭 내뱉었다.
“하…하…. 다른 방은 10만 원이던데 그냥 거기 갈게요.”
사람 난감하게 만드는 부장님 개그에 ‘헐! 너무 비싸요. 깎아 주세요!’ 하고 원하는 대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초원처럼 한술 더 뜨는 사람도 있었다.
“김 연구관님도 참….”
중년의 여자 연구원이 ‘김 연구관’이라고 불린 남자에게 눈을 흘기더니 사무실 왼쪽의 문을 눈으로 가리켰다.
“저 방에 있으니까 가져가세요.”
초원은 ‘시술실 2’라고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억 억제술을 여기서 하는지 방 안에는 치과용 의자 같은 게 놓여 있었다. 1mL 주사기라고 적힌 상자를 찾아 고개를 들고 선반을 두리번거리던 초원이 멈칫했다.
“…한나야.”
왜 갑자기 배 속의 아이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왜 갑자기 화가 치밀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시술용 의자 위의 천장에 매달린 종이학 모빌을 보는 찰나 울컥 터져 나온 눈물을 멈추려 애쓰던 초원이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여기였구나.’
작업대의 선반에 놓인 상자에서 주사기 다섯 개를 꺼내 밖으로 나오자 여자 연구원이 말을 걸었다.
“찾기 어려웠어요?”
“아, 네. 하하….”
실은 주사기를 찾는 일보다 운 흔적을 열심히 지우는 데 더 긴 시간을 들였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인사를 하며 문으로 걸어가던 때였다. 아까와는 달리 그녀를 유난히 뚫어져라 바라본다 싶던 김 연구관이 말을 걸었다.
“홍초원 연구사님이죠?”
“아, 네.”
“홍 연구사님 남편분이 본청의 조승준 팀장님이라고 했었나?”
“…네.”
흔히 묻는 말이다. 그런데도 저 사람의 어투는 마음을 유독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가 뭘까. 어쩌면 초원의 배를 응시하며 중얼거린 수상한 말 때문일지도 몰랐다.
“흠… 재밌네, 이거.”
오후 내내 실험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화가 났다가도 눈물이 울컥 터져 나오려 하고 심장이 아프게 조여 왔다. 이유도 모르는 채로.
누군가가 죽을 만큼 보고 싶은데 누가 보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기껏 열심히 만든 조직 슬라이드를 깨트려 먹고서야 포기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멍하니 특관청 데이터베이스의 홈페이지를 응시하며 머릿속에서는 같은 생각만 했다.
나 저기서 기억 억제술을 받았구나.
뱀파이어 사건 때 신경과학팀 연구사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억제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되찾았던 기억의 단편이 눈앞을 맴돌았다. 새하얀 천장에 종이학 모빌이 매달려 있었다. 조금 전 본 것과 똑같았다. 그 기억 속에서도 초원은 모빌을 보자마자 지금처럼 분노하고 슬퍼했다.
억제된 기억이 그 물건과 관련이 있는 건가.
하지만 그 기억까지 되찾진 못한 건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알아낼 수 없었다.
잠깐. 설마 오늘 자꾸 든 기시감도 억제된 기억인가?
눈앞에 어른거리던 장면들은 마치 기억의 단편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혀 말이 안 된다. 초원이 중세 유럽처럼 보이는 곳에서 지금보다 훨씬 어린 외모에 백인의 얼굴을 한 승준과 쌓은 추억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건 언젠가 꾸고 잊은 꿈인 게 분명했다.
‘정말 뭐지?’
초원은 노려보던 데이터베이스 검색창에 이젠 외워버린 사건 번호를 입력했다. 엔터를 치자 늘 그렇듯 파일 세 개가 나타났다. 사건 보고서와 기억 억제 보고서 두 개, 자신과 승준이 같은 사건으로 기억 억제를 받았다는 증거 말이다.
대체 왜.
직원이 기억 억제를 받아야 하는 경우는 규정에 따르면 네 가지였다.
첫 번째, 보안 등급에 맞지 않는 기밀에 노출된 경우.
두 번째, 특이 현상에 노출되었으며 사회 복귀가 어렵거나 정상적인 기능을 어렵게 하는 정신적 해를 입었을 때, 직원의 정신 건강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경우.
세 번째, 보안 규정을 어기고 중대한 기밀을 유출하여 파면 또는 해임되는 경우.
네 번째, 퇴사 시 직원이 원하는 경우.
우린 어느 경우였을까. 아마, 두 번째일까.
초원은 사건 보고서에 시선을 두었다.
‘사건, 사건이라….’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 알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초원은 파일 옆의 생성 날짜를 보고 그즈음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4년 전이라 까마득했다. 혹시나 싶어 핸드폰으로 SNS와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을 뒤져 봤지만 4년 전 7월에 특이한 기록이나 공백은 전혀 없었다.
사진을 내리던 초원이 멈칫했다.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찍어 둔 사진을 본 순간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맞아. 연구소 가스 누출 사건.’
4년 전 7월에 일산 연구소에서 가스가 누출되는 바람에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잃었었다.
‘설마 청에서 특이 현상 사고가 터진 걸 덮으려고 가스 누출이라고 핑계 댔나?’
잠시 고민하던 초원은 현우와의 예전 채팅 기록을 뒤졌다. 전 파트너가 언젠가 일을 부탁하며 가르쳐줬던 직원 ID를 찾아 데이터베이스에 검색해 보았다. 하지만 현우의 ID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 연구소에 함께 있었지만 누구는 사건 보고서가 있고 누구는 없다. 특이 현상이 있었다는 추측에 더욱 무게를 실어 주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현상이었을까.
초원은 기억의 파편을 다시 모아 보았다. 종이학 모빌. 잊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 그런 괴로운 일을 겪은 사람을 앞에 두고 사무적이기만 한 연구사가 미웠다. 절망, 슬픔, 분노, 아픔, 두려움.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격하던 그 수많은 감정을 짧은 점심시간 사이에 느끼게 만든 현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흠… 재밌네, 이거.”
문득 조금 전 신경과학팀 연구관의 수상쩍었던 행동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사람이 기억 억제를 담당했기에 그런 말을 한 걸까.
어째서 그런 사건을 겪은 두 사람이 결혼했지?
이런 의미로 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왜 우리가 결혼한 게 이상한 일이야? 대체 어떤 일이었길래.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알았다. 그게 무엇이든, 잊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다는 것.
진실을 알게 되면, 모르고 결혼한 걸 후회하게 될까.
초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열기 두려운 판도라의 상자였다.
인연의 매듭
현우는 11층 로비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받아 한산한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모퉁이를 돌아 생물3팀 사무실의 입구가 보이던 찰나 팀장이 팀장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정장 재킷을 입은 걸로 보아 퇴근하려는 모양이었다. 결혼한 후로 전에 없이 항상 칼퇴를 하던 사람이 오늘은 어째서인지 7시를 넘겼다.
그 찰나 사무실 테이블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선녀가 고개를 휙 뒤로 돌렸다.
“조 팀장.”
“안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팀장은 단칼에 거절하더니 복도로 나왔다. 그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상사가 곧바로 사라지고, 현우는 다른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3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야근하시게 만들어 죄송하네요.”
현우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선녀의 앞에 내려놓으며 멋쩍게 웃었다.
“호텔로 돌아가 봐야 할 일도 없다네.”
사실 선녀는 야근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주 업무는 천기누설 방지에 개체의 처분 논의라 신병이 확보되기 전까진 그에게 보고만 받아도 그만인데 여기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일손도 부족한데 도와주면 고맙긴 하지만 인간계의 업무 처리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선녀가 과연 도움이 될까 싶었다.
현우는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기며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에서 메일 앱을 열었다. 오늘 오후는 천이안의 지인들을 탐문해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바빴다. 통신사에서 네 시간 전에 보내준 천이안의 핸드폰 위치 및 통화 내역을 그는 이제야 열어보았다.
위치 내역을 본 현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핸드폰을 꺼 둔 건 당연하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했었는데 말이다.
“선녀님.”
현우는 노트북 너머의 선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예지력은 없으신가요?”
그럼 추적이 한결 쉬워질 텐데 말이다. 그러나 선녀는 커피 컵을 기울이며 고개를 젓더니 중얼거렸다.
“그런 것이 있었으면 참으로 좋았겠지.”
커피만큼이나 쓰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럼 어떤 능력이 있으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늘 그렇듯 현우는 인간이 아닌 것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저런 도술을 부릴 줄 알지. 둔갑술이며 환술, 축지법, 공중 부양법까지. 그러니 그 천씨 성을 가진 남사당이….”
“아, 참고로 요즘은 아이돌이라고 하네요.”
선녀가 이상한 말이라는 듯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말을 이었다.
“여튼 그자가 있는 곳을 찾기만 하면 내 곧바로 그 자리로 가 환술로 속여 잡아 줄 수도 있네.”
“그거 잘됐네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찾는 게 먼저겠지.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내려 통화 목록을 열던 때였다.
“방중술은 모른다네.”
푸웁. 현우는 마시던 커피를 뿜어버렸다.
“적잖이 실망했나 보군.”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는 냅킨으로 입과 노트북 화면을 급히 닦으며 해명했다.
“전 그런 걸 물은 게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선녀님.”
여기서 만난 인간 사내들은 그걸 가장 궁금해하던데, 라고 홀로 중얼거린 선녀가 뜬금없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자네 팀장도 지금 자네 같은 소릴 했었지.”
마치 옛 추억이라도 되짚는 듯한 미소를 보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희 팀장님과 아는 사이신가요?”
회의 때 팀장을 보던 눈빛이 수상쩍었다. 거기다 점심때 팀장실에서 나오던 초원의 표정이 묘하게 딱딱했고 팀장은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조 팀장.”
“안 됩니다.”
이건 또 뭘까.
선녀는 어째선지 대답하지 않고 현우를 응시했다. 눈을 그렇게 깜빡깜빡하다 나온 대답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자네 어디 아픈가? 아침에 자네 팀장과 셋이서 인사하지 않았나.”
“아니, 제 말은….”
사적으로 아는 사이냐는 질문인데 말이다. 현우는 되묻지 않았다. 어쩌면 선을 넘는 질문이라 말을 돌린 걸지도 모르니 말이다. 알고 보니 착각이었지만.
“아, 이미 연이 있던 사이냐는 뜻이군.”
“곤란하시면 대답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곤란할 것까지야. 예전에 자네 팀장이 내게 신세를 진 적이 몇 번 있지.”
그 말에 의문이 풀리긴커녕 더 생겼다. 조금 전 팀장의 태도는 신세를 진 사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요즘은 별걸 다 배달하는군. 닭이나 중화요리는 알고 있었다만.”
선녀는 커피를 마시며 2년은 족히 넘고도 새것 같기만 한 구형 스마트폰 위로 손가락을 스쳤다.
“세상이 편해졌어.”
선녀가 보고 있는 건 현우가 앱스토어에서 받아 준 배달 앱이었다.
“덕분에 인간은 더욱 바보가 되어 가는군. 배달민족은 이런 뜻이 아닌 것을, 쯧쯧.”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이 바보가 되어가는 건 사실이지만 배달민족이란 건 말장난일 뿐이다. 머쓱해진 현우는 말을 돌렸다.
“오랜만에 오셨으면 관광이라도 하시면 좋을 텐데요.”
“하긴, 한 해 반 전에 비하면 서울도 꽤 변하긴 했더군.”
청혜는 쓴 커피를 마시며 한 해 반 전쯤 삼신을 모시고 왔던 날의 씁쓸한 기억을 되짚었다.
“오랜만입니다.”
그자의 낯을 거의 7년 만에 다시 마주했다.
“인계와 달리 천계의 시간은 쏜살같아 눈 깜짝할 사이에 7년이 지나버렸군.”
실은 핑계였다. 잊고 있었던 척했지만 빚을 진 사람처럼 곱씹었다. 7년을 세고 있었다는 것이 그 방증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흔한 인간 사내들처럼 불순한 목적에 일이나 복수라는 허울을 뒤집어씌워 제게 접근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사내는 오로지 가족을 죽인 자를 잡겠다는 일념뿐이었다.
400여 년 전, 둔갑한 요괴에게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복수심을 불태워 본 청혜는 알았다.
이는 모두 덧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도움을 주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복수심을 불태웠던, 어리석던 시절의 제가 생각났기에.
그러다 보니 우습게도 오랜 수행을 거쳐 어렵사리 놓았던 인간을 향한 정이 돌아왔다.
참으로 덧없었다.
이미 겪어 보지 않았는가. 인간 사내와의 인연은 길어야 수십 년을 갈 뿐이다. 하나 그 인연이 남긴 희노애락애오욕의 잔상은 수백 년간 남아 마음을 할퀴어 온다.
그것이 두려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쳐 그자의 사무실에 마주 앉게 되었다. 사내는 처음엔 당황한 듯하였으나 7년 전과 다름없이 담담하게 안부를 물어 왔다. 청혜는 그간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를 지리멸렬하게 늘어놓으며 고민했다.
그래도 사과는 해야 마땅하겠지.
“조 사무관, 아니지, 이젠 팀장이라고 하였지. 조 팀장….”
망설이다 겨우 사과의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사내가 대답하자 문이 살짝 열리더니 고개를 빼꼼히 들이민 처자가 청혜를 보곤 흠칫했다.
“아, 죄송합니다. 손님이 계신 줄 모르고….”
부하 직원인 모양이었다. 여자가 당황해 나가려는 걸, 사내가 불러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아, 그게…. 오늘 밸런타인데이라서 이걸 드리려고….”
여자가 손바닥만 한 상자를 들어 올리자 사내의 눈동자에 묘한 생기가 감돌았다. 곧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여자가 잽싸게 달려와 남자의 앞에 상자를 놓더니 제 상관과 청혜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곤 도망치듯이 나가려는 여자를 사내가 또 불러 세웠다.
“홍 주임, 5분 후에 연구소로 출발해야 하니까 잊지 마세요.”
“네, 팀장님.”
부하가 나간 후 사내가 한 행동에 청혜는 말문을 잃었다. 여자가 이곳에 있을 때만 해도 무심하게 굴더니, 상자를 집어 올리는 사내의 낯에 화색이 얼핏 돌았다. 그걸 웃옷의 안주머니에 넣자마자 사내는 기쁜 기색을 삽시간에 지우고 다시 담담한 얼굴로 돌아갔다.
청혜는 책상 한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여자가 준 것보다 큰 상자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청혜가 이 방으로 들어와 앉았을 때 사내는 상자를 가리키며 저는 단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마음껏 가져가라고 하였다.
그랬던 자가 그 아가씨가 준 작은 상자만은 제 품에 넣었다. 이건 오로지 제 것이라는 듯이.
그렇구나.
인간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한다는 소릴 듣는 청혜도 알아챌 정도로 적나라한 감정에 허탈한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가 약속을 지키라 하면 나는 무어라 해야 하나, 고민한 것이 무색해졌다. 사내의 마음은 이미 떠났으니.
하긴. 7년이라는 시간은 선인에겐 찰나이나 인간에게는 강산이 바뀌는 세월이었다.
그러다 지난가을 즈음이었다. 사내가 뜻밖의 부탁을 했다.
“서천꽃밭?”
서천꽃밭에서 혼살이꽃을 구해야 하는 자초지종을 캐물어 본 청혜는 기가 막혔다. 흠모하는 여인이 마음에 둔 사내를 살리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위험천만한 짓을 하겠다니. 보통 인간은 연적이 죽게 내버려 두지 않던가.
“겁도 없군. 자네 참으로 어리석어.”
“저도 압니다.”
그 총명하던 자가 언제 이리 아둔해졌을까. 정은 역시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더니 결국 그 여인의 마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여자가 사내의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오늘 보니 정반대가 되어 있었다.
“고작 한 해 반 만에 저리되었을 줄은….”
선녀가 나직이 웃으며 중얼거리는 순간 현우는 화면에서 시선을 뗐다.
“이보게.”
“네.”
차 주임이라고 부르면 된다고 했는데 선녀는 계속해서 그를 ‘자네’나 ‘이보게’ 같은 예스러운 투로 불렀다.
“내 요즘의 풍습은 잘 몰라서 묻네만, 사내가 결혼을 하면 추천서를 써 주는 건 곤란한 일이 되는가.”
“어… 무슨 추천서인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내 삼신이 되려 하는데 내가 인간에게 애정이 있었다는 진술이 필요하네.”
컵을 기울이던 현우는 또 한 번 커피를 뿜을 뻔했다. 이번엔 사레가 들리는 수준으로 그쳐 천만다행이었다.
팀장이 오늘 뭘 그렇게 열심히 거절했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왜 초원의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도 말이다. 인간의 감정을 잘 모르는 선녀가 하필이면 사모님 앞에서 해선 안 될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그 얘긴 딴 사람들에게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팀장과 초원은 직속 상사와 부하 간의 사내 결혼으로 아직도 직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거기다 팀장이 선녀와 과거가 있었다는 소문까지 끼얹으면 그 입방아가 아마 내년까지 힘차게 돌아가고도 남을 거다.
“아무튼 그런 추천서는 과거에도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현우가 덧붙이자 선녀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내 인간의 감정을 잊은 지 400년은 족히 되었으니….”
“그럼 400살이 넘으신 건가요?”
“천 년도 더 넘었네. 그사이 잠시 천계를 떠나 인간 세상에 살았던 적이 있었지.”
“아… 삼신이 되시기에는 젊어 보이셔서….”
지극히 인간다운 사고방식에 청혜는 실소했다.
“지금의 삼신도 본래의 얼굴은 자네보다도 어릴걸세.”
“네?”
현우는 예전에 청에서 본 삼신할매의 얼굴을 떠올렸다. 곱게 나이가 든 할머니의 얼굴이었는데 말이다.
“인자한 할머니로 둔갑한 것뿐이지.”
“대체 왜….”
“젊은 여자가 삼신이라 하면 인간들이 무시한다네. 그렇게 젊어서 애는 낳아 봤냐는 소릴 듣지.”
“아, 하긴. 그렇겠네요.”
씁쓸하게 웃으며 화면의 통화 내역을 훑어보던 현우가 멈칫했다.
잠깐. 내 전화번호가 왜 여기에….
현우는 제 핸드폰을 열어 통화 기록을 뒤졌다. 정말이었다. 일주일쯤 전 늦은 밤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 보니 천이안의 핸드폰 번호였다.
천기를 꿰고 있으니 번호를 아는 것 정도야 별일이 아니라 해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 내게 왜 걸었지?
그때 잠결에 받았다가 아무 말이 없길래 끊고 다시 잠들어 버렸다. 아쉬워하던 현우는 문득 깨달았다. 자동 통화 녹음 기능을 켜 두었단 걸.
[신고할 줄 알아, 이 구미호야!]
자동으로 녹음된 통화를 들어본 현우가 외쳤다.
“구미호!”
샌드위치를 먹던 선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나 현우는 설명할 정신이 없었다.
천이안, 아이돌이지?
하필이면 제가 맡은 구미호도 아이돌이다. 데이터베이스에서 구미호 ‘비취’의 전화번호를 찾아 천이안의 통화 내역과 메신저 기록에서 검색해 본 현우는 짝, 손뼉을 쳤다.
천이안이 그에게 전화를 걸기 불과 두 시간 전 구미호와 채팅을 한 기록이 있었다. 대화는 구미호가 데리러 가겠다고 한 게 마지막이었다.
여우 구슬이구나.
뜻밖에 전말을 깨달은 현우가 고개를 들며 씨익 웃었다.
“구미호 탓이네요.”
수배자가 있는 곳은 못 찾았지만 이번 사건의 범인은 밝혔다.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왔었잖아.”
기가 막혔다. 저 때문에 천기가 누설됐는데 자수도 하지 않고 구슬도 잃은 주제에 겁도 없이 청으로 찾아왔었다. 등록증을 갱신할 시기도 아니었는데.
대체 뭐지? 수상쩍었다. 내부 동향이라도 살피려 한 걸까.
현우가 급히 핸드폰에서 번호 하나를 찾아 누르는데 선녀가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일단 팀장님께 보고하고 격리 및 처벌 절차를 밟으려고요.”
“요망한 구미호라 잡기 쉽지 않을 것이야. 필요하다면 내 도술을 부려 주겠네.”
현우는 핸드폰을 귀에 대며 고개를 저었다.
여우 구슬도 없는 구미호인데 잡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 * *
지하주차장 빈자리에 미끄러지듯이 들어간 차가 멈춰 섰다. 곧 시동이 꺼지고, 밖으로 나온 초원은 차 문을 닫고 스마트키의 버튼을 눌렀다. 철컥, 소리가 나며 차가 잠기자 핸드백에 습관적으로 차 키를 넣던 그녀는 멈칫했다. 핸드백 속에 든 핸드폰이 파란 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연구소에서 출발할 때 핸드폰이 짧게 울렸던 것 같다. 화면을 켜 보니 역시나 그 남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나도 이제 출발. 집에서 봐요]
알림 위의 시계는 저녁 7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이 평소보다 한 시간 늦었다. 집에 갈 기분이 아니어서 계속 늑장을 부린 탓이었다.
승준은 일이 많아 초원의 퇴근이 늦어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럼 먼저 퇴근했다가 연구소까지 시간 맞춰 데리러 온다고 했지만 초원은 거절했다. 그럼 제 차는 누가 끌고 가냐는 핑계가 있기에 다행이었다.
그랬더니 그 남자도 퇴근을 늦췄나 보다. 출발할 때 연락을 달라기에 차 시동을 걸며 메시지를 보내 놓았더니 저렇게 답이 온 걸 보면.
그 전에 저녁을 먹지 않았으면 밖에서 만나서 먹고 들어가자는 말을 승준이 했지만 그것도 거절했다. 입맛이 없었다. 그냥 집에 있는 걸로 대충 때우자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미안했다.
‘나 너무 시큰둥했나?’
종일 생각이 딴 데 있었다.
난 누구에게 화가 났을까. 설마 승준 씨에게? 그 괴로운 일을 내게 한 사람이 이 사람인 건 아니겠지? 그것도 모르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가졌다면?
최고의 남편이 실은 최악의 남편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준, 그 연구관의 말과 눈빛이 머릿속을 끈덕지게 맴돌았다.
말도 안 돼. 승준 씨가 내게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어. 그렇지만 난 이 남자를 잘 모르잖아.
그렇게 온종일 모순된 생각에 시달렸다.
그 연구관한테 가서 물어볼까? 아니야, 물어보지 마. 감이 안 좋아.
열지 마. 제발 열지 마.
결국 이 상자는 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승준의 얼굴을 어떤 심정으로 봐야 할지 혼란스러워 연구실에서 늑장을 부린 것이다.
“하아….”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초원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왔다.”
여자가 차의 앞 유리 너머로 보이자 루비는 핸들을 두 손으로 틀어쥐었다.
드디어 씨앗을 수확할 기회가 왔다.
온종일 미치는 줄 알았다. 점심때까진 그놈이 저 여자 옆에 내내 붙어 있더니 오후엔 저 여자, 연구소로 들어가 여태 나오질 않았다. 인간을 사냥하기에 군인과 격리 시설이 있는 연구소는 최악의 장소였다.
그래서 머리를 좀 썼다. 저 여자의 집을 알아내곤 차를 한 대 훔쳤다. 그러곤 주차장으로 와 CCTV를 모두 고장 낸 후 여자의 주차구역이 있는 층의 엘리베이터 홀 옆에 차를 대고 기다렸다. 사냥감이 사정권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와.”
루비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꼬드기듯이 속삭였다. 저녁 시간의 아파트 주차장이라 목격자가 있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교통사고인 척하면 그만이다. 병원에 데려가는 척 뒷좌석에 태워 으슥한 산으로 내뺀 다음 씨앗을 빼내고 시체야 처리하면 끝! 완전 범죄였다.
“간만에 간 맛 좀 보겠네.”
이젠 표정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여자를 보며 구미호가 입맛을 다셨다.
“우리 조랭이, 왜?”
아이도 엄마의 마음이 어수선한 걸 아는 건가. 오늘따라 태동이 잦았다. 어쩌면 배가 고픈 걸지도. 차에서 내린 다음부터는 태동이 활발하다 못해 아플 정도인 걸 보면.
“조금만 참…, 어?”
배를 쓰다듬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던 초원은 돌연 서늘한 느낌이 들자 멈춰 섰다. 바닥에 붙어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가 낯익은 존재가 엘리베이터 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말을 걸었다.
“승아 씨? 왜 나와 있어요?”
시누이도 초원 못지않은 집순이라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여태 집 밖으로 나왔던 때라곤 이 아파트로 이사 왔을 때와….
“혹시 승준 씨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승준의 목숨이 위험했을 때뿐.
그 남자 지금 어딨어. 사색이 되어 핸드폰을 꺼내 들려는 찰나였다. 승아의 바로 뒤에 주차된 회색 SUV에서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차가 상향등까지 쏘아대며 눈을 멀게 하기 직전 초원은 보았다.
구미호.
핸들 뒤에서 오늘 낮 마주쳤던 구미호가 입술을 비틀어 웃고 있었다. 거친 엔진음이 들리는 찰나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초원은 오른쪽에 주차된 세단들 사이로 뛰었다.
끼이익.
정면으로 돌진한 차가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멈추더니 후진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초원은 이중으로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주차장의 차로를 가로질렀다.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주차장 오른쪽 끝의 계단 입구를 향해 뛰어가던 때였다.
쾅.
후진해 온 회색 SUV가 눈앞의 차 두 대를 박으며 초원의 앞을 가로막았다. 조금만 빨리 뛰었어도 저 사이에 껴 삼도천을 건넜을 것이다.
“미친.”
왜 갑자기 나를 죽이려는 거야?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살아남아야만 했다.
초원은 곧바로 뒤돌아 주차장 입구로 뛰었다.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이 실감 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차를 다시 돌리는지 등 뒤에서 엔진음과 브레이크 소리가 사나웠다. 초원은 뭉치는 배를 감싸 안고 오른쪽에 주차된 차 사이로 힘겹게 뛰며 되뇌었다.
그 외로운 남자를 두고 너랑 죽을 순 없어.
자신과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순간, 초원은 가장 먼저 승준을 걱정했다. 또다시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게 만들 순 없었다.
“구미호?”
승준은 자동차 스피커에서 나오는 현우의 보고를 듣다 되물었다.
“확실합니까.”
[네, 메시지 기록으로 구미호가 천이안 씨를 만난 건 확인했습니다. 그러고 두 시간 후에 저한테 전화가 왔고요. 구미호를 신고하겠다는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는데 보내 드릴까요?]
“그럼 그건 메신저로 보내고 온나라 시스템에서 곧바로 격리 신청서 제출해 주세요.”
승준은 주차장 경사로를 따라 핸들을 돌리며 지시를 내렸다.
“지금 집 앞이니까 올라가서 바로 결재….”
그러다 지하 2층으로 차가 들어서는 순간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뛰쳐나오는 여자가 보이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초원을 알아본 찰나, 반가웠던 것도 잠시였다. 주차장 끝에서 회색 SUV가 이쪽으로 돌진했다.
승준은 직감했다. 저 차는 초원을 노린다. 그는 초원이 왼쪽으로 뛰어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돌진하는 차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막다른 길인 걸 알면서도 기계실로 들어가 숨으려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던 때였다.
쾅.
초원은 엄청난 충돌음이 들리는 순간 뒤를 흘깃 보았다가 얼어붙었다. 구미호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던 차와 충돌했다.
“안 돼!”
회색 SUV와 주차된 흰 세단 사이에 낀 검은 외제 차를 알아본 순간 초원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운전석과 조수석 모두 막힌 탓에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운전석을 들여다본 초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 모든 피를 지금 승준이 쏟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눈을 뜨고 있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초원이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눌러 지혈하자 승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자꾸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나올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말하지 마요. 승준 씨, 어떡해…. 왜 그랬어요. 많이 다쳤잖아요.”
많이 다쳤다, 정도로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초원의 입에서는 넋이 나간 소리만 쏟아져 나왔다.
“폰, 핸드폰.”
지금 승준에게 필요한 건 의사가 아니라 이 차에서 꺼내 줄 구급대원이었다. 앞 좌석을 훑어본 초원은 울음을 터트렸다. 조수석에 초원이 좋아하는 레스토랑의 테이크아웃 백이 놓여 있었다.
“흐흑, 핸드폰…. 핸드폰 어쨌어….”
제 핸드백을 찾던 초원은 절망했다. 도망치다 어딘가에 떨어트린 걸까. 눈앞을 자꾸만 가리는 눈물을 피로 젖은 손으로 걷어 봤자 시야는 더욱 흐릿해질 뿐이었다. 손을 떨며 승준의 주머니를 뒤지려 할 때였다.
[초원 씨?]
차량 스피커에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우리 집 지하주차장 2층으로 119 좀 불러줘요!”
[무슨 일이에요?]
“흑, 차에 치여서…. 구미호가 차로….”
넋이 나간 채로 현우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찰나, 등 뒤에서 발소리와 함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런…. 네 남편, 이젠 못 먹게 생겼네.”
초원은 분노와 공포로 파들파들 떨며 제게서 고작 두 걸음 앞까지 다가온 구미호를 노려보았다.
죽여 버릴 거야.
그러나 이제 현장 요원이 아닌 초원에게는 권총이 없었다. 구미호와 맨손으로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복수는커녕 제 목숨을 걱정해야 할 때라는 이성의 외침에 좌절하는 순간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승준의 오른손이 콘솔 박스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박스가 열리는 순간 초원의 눈에서 희망이 번뜩였다. 안에 든 권총을 잽싸게 꺼낸 초원은 구미호를 겨눴다.
반쯤 닫힌 문의 뒤에서 웃던 구미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찰나….
철컥. 탕.
초원은 슬라이드와 방아쇠를 주저 없이 당겼다. 귀청을 찢는 총성이 지하주차장을 수없이 울린 후에야 멎었다. 구미호가 눈 뜨고 보기 힘든 꼴로 바닥에 널브러져 미동도 하지 않고서야 초원은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119 올 거예요. 조금만, 흡, 조금만 기다려요.”
하지만 그때, 승준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힘겹게 뜨고 있던 눈꺼풀을 닫았다.
“안 돼! 눈 떠요, 제발!”
안도의 기색이 창백한 얼굴에 스쳤으나 잠시였다.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 두고 가지 말아요!”
승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외쳤으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 * *
병실 문을 연 현우는 난처해졌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초원은 그사이 침대에서 내려와 병실 안을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그것도 맨발로.
병실 한구석에 앉아 그걸 지켜만 보고 있는 선녀와 눈이 마주쳤다. 왜 말리지 않았냐는 눈을 했더니 선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려도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초원 씨.”
현우가 부르자 환자복 차림으로 서성이던 초원이 우뚝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왜요?”
그렇지 않아도 핏기가 없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울기 직전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쁜 소식이라도 전하려는 줄 안 모양이었다. 그 상태로 수술실에 들어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소식이 있다면 나쁜 소식인 건 당연하다. 지금은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다.
“아무 일 없어요. 저녁 먹으라고요.”
현우가 봉투를 들어 올리자 초원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와서 앉아요.”
침대의 테이블에 데워 온 테이크아웃 용기를 하나씩 꺼내 놓았지만 초원은 물끄러미 쳐다만 볼 뿐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기만 했다.
“선녀님, 초원 씨 좀….”
“자네, 이러지 말고 좀 앉게.”
현우의 부탁에 선녀가 일어나 초원을 침대로 끌고 왔다. 겨우 앉히고 일회용 수저를 쥐여 주었지만 초원은 한 입도 뜨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나 이거, 흑, 못 먹겠어요.”
이건 팀장의 차에서 식어가던 저녁이었다. 다른 걸 사 와서 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나 진짜 너무 못난 거 알아요? 흡, 난 밥 먹자는데도 퉁명스럽게 거절했는데… 그런데도 그 사람은 나 맛있는 거 먹이겠다고, 근데 난 말도 안 되는 의심이나 하고, 흐흑….”
초원은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횡설수설 떠들며 오열했다.
“내가, 끅, 거절만 안 했어도, 아니, 그냥 퇴근만 일찍 했어도 이런 일 없었는데….”
“초원 씨가 아니라 구미호 탓이잖아요. 언제 퇴근했어도 위험했을 거예요.”
구미호가 대체 왜 초원을 공격하려 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였다. 그래도 구미호가 범인인 걸 조금 더 일찍 알아 격리했더라면 오늘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팀장님은 그래도 초원 씨랑 아기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팀장님 생각해서라도 한술 떠요, 네?”
하지만 초원은 결국 한 입도 먹지 못했다. 피가 말라붙은 손목시계와 지갑 따위가 든 소지품 봉투를 안고 너무나 서럽게 울어서 지켜보는 현우의 마음이 미어질 지경이었다.
“나는… 이렇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도…. 난, 흑, 당연히 오늘도, 내일도 같이 잠들고 눈 뜨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그럴 거라고, 흐흑….”
“초원 씨….”
이러다 탈진하거나 실신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운데 임산부라 신경 안정제 같은 걸 줄 수도 없었다. 선녀에게 환술이라도 써달라 할까 싶었으나 효과가 사라지면 역효과만 더 날 것 같아 현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초원을 지켜만 보았다.
“선배, 흡, 시간을 되돌리는 현상은 없어요?”
현우가 알기엔 없는 데에다 그런 건 큰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었다. 그가 고개를 젓자 초원이 이젠 선녀에게 매달렸다.
“선녀님, 오늘 제가 속 좁게 굴어 놓고 이런 부탁드려서 정말 죄송하지만, 저 사람 살릴 방법 정말 없어요?”
낭군을 잃을 위기에 처한 여인의 절박한 눈을 마주하는 순간 400여 년 전의 제가 겹쳐지자 청혜는 불에 덴 사람처럼 눈을 돌렸다. 수백 년을 잊으려 애썼던 것이 허무하게도 그 순간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자 그녀는 이곳으로 온 것을 후회했다.
그래도 저 여인은 운이 좋지 않은가. 저는 이미 다 늦은 후에야 잃은 것을 알았다. 그녀를 노린 쥐 요괴가 낭군을 몰래 죽이곤 그의 모습으로 둔갑해 집에 들어앉았다. 그러곤 욕심에 눈이 멀어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이까지 우물에 빠트렸다.
피투성이 낭군과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이를 안고 천지가 떠나가라 오열했던 날의 피처럼 붉었던 하늘이 눈앞에서 어른거리자 청혜는 눈을 질끈 감기까지 했다.
죽은 사람도 되살릴 방법 한 가지를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했다. 어차피 영원히 함께하지는 못할 인연이니 보내주자. 내세에는 나 없이 부디 평안히 천수를 누리시게. 망자를 위해 보내주는 것이라 하였지만 실은 뼈아픈 이별을 또다시 겪을 용기가 없었을 따름이었다.
천계의 법도를 깨고 인계에 한눈을 판 대가는 뼈아팠다. 다시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하며 수행에 정진했으나 속세를 누구보다도 초월한 자인 신이 되려면 인간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니 잔인한 모순이 따로 없었다.
현우는 어째서인지 괴로운 얼굴인 선녀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초원을 달랬다.
“초원 씨. 일단 의사를 믿어 봐요.”
“그렇지만…. 내가, 내가 의사잖아요….”
초원이 아무리 희망을 가져봐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태였다. 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원의 눈에 돌연 생기가 돌아왔다.
“환생꽃!”
그녀는 선녀를 붙잡고 물었다.
“저번에 승준 씨가 서천꽃밭에 갈 때 도와주신 분이잖아요, 그쵸? 선녀님, 환생꽃을 훔치는 건 제가 할 테니까 가는 법만 알려 주세요.”
혼살이꽃, 뼈살이꽃 같은 환생꽃의 다섯 종류가 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니 승준을 살리는 건 물론 사고 후유증조차 없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초원 씨, 거긴 명계잖아요.”
임신한 몸으로 저승에 가겠다니. 현우는 경악했다.
“훔친다, 라고 했나. 자네도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하는 소리잖나. 붙잡히면 명계와 인계 모두 뒤집힐 것이네. 거기에 내가 연루된 것까지 드러나면 천계까지 뒤집힐 일인 것은 당연지사이고, 자네는 큰 벌을 받을 걸세.”
“이기적이라고 하셔도 좋은데 저는 어떻게 되든 제 남편만 살리면 돼요. 그 사람만 살아 있으면 전 어떤 대가든 치를 수 있어요.”
초원은 눈물을 닦아 내고 다시 선녀에게 매달렸다.
“삼신 채용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네? 제가 추천서 써 드릴게요. 그리고 저 안 들킬 자신 있어요. 아니, 잡혀도 선녀님 이름은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청혜는 그 때문이 아니라고는 하지 못했다. 법도를 어긴 것을 들키면 삼신이 될 수 없는 거야 불 보듯 뻔했으니.
“제발요. 제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임신한 몸으로 무릎을 꿇으려는 초원을 현우가 말리고, 청혜는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런 덧없는 일에 자네의 모든 것을 걸려 하는가.”
“그게 어떻게 덧이 없어요?”
“이보게, 나도 같은 일을 겪어 보았네만 찰나의 사랑 따위 덧없단 걸 언젠간 알게 될 것이네.”
“사랑을 덧없다고 여기시면서 어떻게 삼신이 되려고 하세요? 인간에 대한 사랑 없이 새 인간을 점지하시려고요? 모든 게 덧없다고 하시면서 신이 되고는 싶으세요?”
“초원 씨….”
“그래도 자네는 아이라도 살아 있지 않은가. 귀히 여기게.”
초원은 그 말에 배를 감싸 안으며 눈물을 울컥 터트렸다. 얼마나 어렵게 가진 아이인데. 그 남자도 얼마나 기다린 아이인데. 이 아이를 얼마나 안아 보고 싶을까.
지금 수술실에 있는 사람이 초원이고 그 남자가 여기 있었더라면 당장 환생꽃을 구하러 갔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영생을 사시는 분의 눈엔 그 찰나에 절절매는 제가 한심하겠죠. 그런데 선녀님에겐 하루살이일 뿐인 제 짧은 인생이 제가 가진 전부예요. 그 덧없는 찰나에 의미를 만들어 준 사람이 그 남자고요.”
여자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청혜의 머릿속을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 의미 없는 삶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여자니까요.”
언젠가 같은 부탁을 하는 그자에게 어리석다 하였더니 저런 소리를 내어놓았다.
“자네 부부는 닮은 구석이 있군.”
비겁했던 과거를 후회하는 자신을 자극하는 면모 또한 닮았다.
느닷없이 쓸쓸하게 웃는 청혜를 바라보는 여자의 젖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청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지난번과 똑같은 말을 읊었다.
“자네 서방에게도 이미 했던 말이나 서천꽃밭까지 가는 길과 명계를 다스리는 자들을 속이는 법 외엔 알려줄 순 없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 *
왜 이런 모습으로 누워 있어요?
중환자실에서 승준을 다시 만난 순간 이런 얼빠진 소리가 초원의 입에서 나올 뻔했다. 항상 강해 보이던 남자가 온갖 생명 유지 장치를 몸에 매단 채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못 하는 게 없는 남자라고 믿었다. 어떤 난관 앞에서도 늘 방법이 있던 남자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이 아내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제 몸을 던지는 거였다니.
제가 항상 이 남자에게 너무 기댄 건 아닐까, 그러다 이 남자가 의무감에 몸까지 던지게 만든 게 아닐까, 후회될 정도였다.
제발 좀 이기적이어 봐요.
“나 내 생각밖에 안 하는 놈이야. 더럽게 이기적이어서 초원 씨가 밀어내도 마음 열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린 거라고.”
그 언젠가, 자신을 더럽게 이기적이라고 했지만 이 남자는 ‘이기적이다’의 정의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밤을 꼬박 새운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마취가 풀릴 시간이 다 지나고도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는 의식이 있는 게 더 고통스러울 테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앞으로도 고비가 있을 겁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담당 의사의 말이 떠오르자 초원은 의지를 또 한 번 다지며 산소포화도 측정기가 끼워진 손을 쥐었다. 늘 뜨겁던 손이 서늘했다. 손이 닿으면 잠결에도 맞잡아 주더니 지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축 늘어져 무겁기만 한 손을 태동이 느껴지는 자리에 올렸다. 아기가 손바닥을 톡톡 칠 때면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웃던 남자였다. 초원은 표정이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울컥 터지려는 눈물을 삼키며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승준 씨. 한나 아빠. 사랑해요. 조금만 더 버텨줘요. 얼른 갔다가 올게요.”
마지막 말은 이 남자가 알면 혼날 것 같아 들릴락 말락 속삭였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냐고 화내겠지. 이 남자에게 이토록 혼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죽은 사람에겐 혼날 수 없으니까.
소독약 냄새가 나는 승준의 거친 뺨에 입을 맞춘 초원은 침대 발치로 고개를 돌렸다. 의료진들이 멀어진 사이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승아 씨, 미안해요.”
경고해 줬는데도 이번엔 결국 이렇게 됐다. 볼 면목이 없었다.
“저 돌아올 때까지 이 사람 저승사자 따라가지 말라고 붙잡아 주세요.”
초원은 발치에 앉은 영에게 승준을 맡긴 후 병원을 떠났다.
조깅을 하러 갈 때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침실에서 나와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거실에 제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초원은 시선을 의식적으로 앞에만 고정한 채 러닝화를 신고 차 키를 챙겨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문을 닫기 전 저도 모르게 텅 빈 집 안을 바라보곤 멈칫했다. 이젠 그 남자가 왜 그날 굳이 제가 퇴근할 때까지 회사에서 기다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없는, 적막하기만 한 집에 혼자 있기 싫었던 것이다.
이젠 초원도 그 심정을 알아 버렸다.
이 집에 늘 그 남자가 있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오늘도, 내일도, 1년, 10년 후에도 당연히 이곳에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 게 절대로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아는 그 남자에게는 그 하루하루가 소중했을 것이다. 늘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던 남자의 심정을 초원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만약 결혼해선 안 될 남자와 한 거라면? 그런 의심은 대체 왜 했던 걸까. 기억이 억제된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지금의 초원은 그 남자를 제 목숨만큼이나 사랑했다.
다음번에 돌아올 땐 반드시 같이 돌아올 거야.
초원은 다짐하며 문을 닫았다.
* * *
천장의 낡은 간접등만이 희끄무레하게 발밑을 밝히는 통로에 세 사람의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지하철이 끊긴 늦은 밤의 지하상가는 현우의 눈에는 텅 비어 있었으나 초원과 청혜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입구부터 초원에겐 귀신이 한둘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계단 아래로 내려와 안내도를 살피는 사이 벌써 다섯이나 뒤를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여긴 항상 귀신이 많더라.’
용산 던전, 코엑스 던전, 부평 던전. 소위 지하 던전이라고 불리는 지하상가가 전부 명계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숨겨져 있는 곳일 줄이야.
병원과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곳이 용산이었지만 그곳은 재개발 때문에 잠정 폐쇄되었다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인천 부평역으로 왔다.
인천 토박이인 초원이 학창 시절에 자주 왔던 곳이었다. 그땐 왜 유독 이 지하도에 한 많은 귀신이 그렇게 지나다니나 궁금했었는데 저승사자한테 붙들려 저승으로 가는 중이었던 건 짐작도 못 했다.
“저쪽으로 가면 되겠군.”
안내도를 살핀 선녀가 왼쪽을 가리켰다. 저승의 입구는 인간이 실수로 접근하는 일을 막고자 외진 곳에 숨겨져 있었다. 선녀는 두 사람이 이날 이후로 또 명계에 숨어들어선 안 된다며 어디인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가 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런 현우의 생각은 곧 착각으로 판명됐다.
“와, 여긴 약도가 있어도 다신 못 찾겠다.”
심지어 위치를 아는 선녀도 헷갈려 길을 헤매자 현우는 혀를 내두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이곳은 오랜만이라….”
“괜찮아요. 여긴 인천 사람도 길을 잃는 데거든요.”
초원은 당황한 얼굴인 선녀를 위로했다. 오죽하면 학교 친구들끼리 여기 놀러 올 때마다 무조건 밖에서 만나서 들어왔을까.
“어딘지 말씀해 주시기 그러면 제일 가까운….”
현우가 천장에 달린 표지판을 보며 선녀에게 묻는 찰나 귀신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저도 모르게 벽으로 물러섰던 초원이 선녀에게 다급히 속삭였다.
“선녀님, 저 사람 저승사자랑 같이 가고 있죠?”
“그렇군.”
초원의 눈에 은신한 저승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 사람들 몰래 따라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초원의 꾀가 적중했다. 머지않아 세 사람은 허름한 화물 엘리베이터로 위장한 저승의 입구에 다다랐다. 저승사자가 오가는 곳에 수상쩍게 서 있을 순 없으니 근처의 화장실로 숨어들곤 선녀가 환술을 써 두 사람에게 환영을 입혔다.
“저승사자 맞아요?”
선녀가 현우에게 환술을 걸자 초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승사자라면 보기만 해도 벌벌 떨리는 포스가 있어야 하는데 저 순하게 생긴 얼굴에 저승사자 이미지만 덧씌워 놓으니 아이가 아빠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저는 어떻게 보여요?”
“초원 씨는 그냥 초원 씬데….”
“자네는 이제 산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조심하게.”
초원은 망자의 영으로 위장한 것이었다.
“이는 단지 다른 이들의 눈을 속이는 환영일 뿐이네. 자네들은 은신한 저승사자를 보지 못하니 각별히 몸가짐 조심하게. 명계에선 시간이 훨씬 빠르게 간다는 것 또한 잊지 말고. 돌아온 후에 전화하면 환술은 풀어주겠네.”
선녀는 그렇게 당부하더니 통로가 빈 사이 두 사람을 재빨리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자 선녀가 비밀번호라도 누르듯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마구 눌러대기 시작하고, 돌연 디스플레이가 깜빡이더니 아래로 가는 화살표가 표시됐다.
“돌아올 땐 1층으로 오면 되네.”
그렇게 저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준 선녀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손을 빼며 말했다.
“그럼 행운을 비네.”
“정말 감사합니다.”
초원이 꾸벅 고개를 숙이는 순간 문이 닫혔다. 덜커덩거리며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초조한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평범해 보이는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CCTV가 있지는 않은지 둘러본 현우가 초원에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런데 난 아직도 걱정돼요. 홑몸도 아니고….”
“몸은 괜찮아요. 원래 임신 중기에는 해외여행도 다니는걸요.”
초원의 얼굴에서는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지만 어제보다는 표정이 훨씬 밝았다. 위독한 사람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느니 뭐라도 할 게 있으면 초원에게는 나으려나 싶었지만 하필이면 이렇게 위험천만한 일이라니. 예전엔 위험한 일을 하는 그를 초원이 말리곤 했는데 이젠 입장이 바뀌었다.
“난 솔직히 아직도 초원 씨 말리고 싶어요. 붙잡히면 어쩌려고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요.”
이제 그 남자가 없으면 빽도 쥐뿔도 없는 말단 공무원이지만 말이다. 옆에서 현우가 대책이 없으니까 말리는 거 아니냐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잘못하다간 남편이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영영 돌아오지 않게 생긴 초원은 그런 걸 걱정하며 몸 사릴 형편이 아니었다.
“걱정 마요. 잡혀도 선배 얘긴 안 할게요.”
“내 걱정은 안 해요. 초원 씨가 걱정인 거지.”
“근데 선배는 반대하면서 따라왔네요.”
초원은 애초에 현우를 여기 가담시킬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초원 씨 걱정, 아니, 내 목이 걱정돼서요. 초원 씨 잘못되면 안 말린 나한테 팀장님 불똥이 튈 테니까.”
그 말에 초원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 남자에게 혼날 걸 걱정하다니. 승준이 당연히 살 거라고 가정하고 하는 말에 기운이 났다.
“아, 이미 못 말리고 따라온 시점에서 불똥 맞는 건 확정이네.”
“말려들게 해서 미안해요.”
그것만 미안한 게 아니었다. 사고가 났던 날, 초원이 넋을 놓은 사이 사고수습팀을 불러 현장을 정리하고 특수분석1팀에 초원이 한동안 출근하지 못하는 이유를 전해 주는 등, 그녀가 했어야 하는 일을 전부 현우가 나서서 처리해 주었다.
“미안할 건 없어요. 나한텐 팀장님께 진 빚을 드디어 갚을 기회죠.”
저 역시 팀장님이 혼살이꽃을 구해다 준 덕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거라며 씨익 웃은 현우가 엘리베이터 디스플레이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 엘리베이터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지?”
그가 중얼거리기 무섭게 엘리베이터가 속도를 줄이더니 덜컹 멈춰 섰다.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잠깐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다시 팽팽해졌다. 아랫입술을 깨물던 초원은 문밖의 광경이 보이는 순간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스르륵 벌렸다.
엘리베이터 밖은 들판이었다. 그 너머에는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른 강이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 안개와 구름을 휘감은 채 높이 솟은 산봉우리 사이에 달이 걸려 있는 걸 본 초원은 이 지하에 하늘이 있다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옛 산수화를 그대로 옮긴 듯한 풍경 한가운데에 콘크리트 다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건 물론 위화감이 들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눈빛만 교환한 후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부터 강가까지 포장된 길이 이어졌다. 어딘가에서 폭포수가 쏟아지는 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져 귀뚜라미 소리를 묻을 즈음 두 사람은 선녀가 미리 일러 주었던 관문을 발견했다.
강을 건너는 다리의 입구를 차단봉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옆의 초소에서 어느 노옹과 노파가 보이지 않는 사람과 실랑이를 하는 걸 보고 두 사람은 멈춰 섰다. 초원이 영을 하나 느끼긴 했지만 저승사자는 보이지 않으니 가까이 다가갔다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의심을 살 터였다.
“아, 안 돼. 못 바꿔주네.”
손을 휘휘 내저은 할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초소로 몸을 돌리다 두 사람을 발견하곤 손짓했다.
“얼른 오게. 왜 거기 멀뚱히 서 있는가.”
“신입 차사인가 보네.”
노파까지 손짓을 하자 두 사람은 천천히 다가갔다. 두 노인은 망자가 건너는 강인 삼도천에서 업의 무게를 재 망자가 갈 길을 정하는 명계 공무원이었다.
“옷.”
노파가 손을 내밀며 요구하자 초원은 일부러 명계의 절차를 하나도 모르는 척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겉옷 벗어서 주시면 됩니다.”
현우가 손발을 맞춰 둔 대로 딱딱하게 안내하자 그녀는 그제야 겉옷을 벗어 노파에게 주었다. 노파는 그걸 뒤에 선 노옹에게 건네고, 그는 옷을 초소 옆의 고목에 ‘척’하니 걸었다. 나뭇가지가 아래로 축 처지자 두 사람은 사색이 됐다.
업의 무게에 따라 삼도천을 건너는 법이 달라졌다. 업이 많은 자는 뱀이 득시글거리는 하류를, 업이 적당한 자는 물이 발목까지 오는 상류를 건너야 했다. 그리고 업이 없이 깨끗한 백지 같은 사람만이 중류, 즉, 눈앞의 다리를 발끝에 물 한 번 적시지 않고 건널 수 있었다.
“새파랗게 젊은데 벌써 업이 무겁네, 무거워.”
“네? 제가요?”
아무리 명계의 기준을 잘 몰라도 옷이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기울어졌으면 뱀이 득시글거리는 하류에 당첨이란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초원을 바라보는 노인들의 눈이 싸늘해졌다.
“사람을 죽였나 보구먼.”
“아니, 그게요.”
초원은 진땀을 뺐다.
“사람은 사람인데 둔갑술을 하는….”
여태 죽인 사람이라곤 승준을 구하느라 죽였던 변신능력자뿐이었다. 나머지는 죄다 구미호, 뱀파이어 같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전부 정당방위였다.
“아, 그래?”
초원이 그 점을 호소했더니 노인들의 표정이 누그러지긴 했으나 손은 여전히 하류를 가리켰다.
“딱하긴 하네만 요새는 살인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리고 요즘은 그 뭣이냐, 다른 망자와 비교해….”
“상대평가요?”
현우의 말에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거. 그거로 하니까 살인은 한 번만 해도 하류로 가야 해.”
“그렇지. 요샌 전쟁도 없잖나.”
“전쟁 났을 때 왔으면 이 정도는 상류로 보내주는 것을….”
“그렇지만 그건 업무상 한 일인데요?”
“뭘 업으로 삼길래? 경찰이야?”
초원은 밝힐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털어놓았다.
“특관청… 다니거든요.”
“아… 그래?”
“애기 엄마도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었구먼.”
“일하다 한 거면 어쩔 수 없지.”
노인들의 손이 마침내 방향을 바꿨지만 아쉽게도 상류를 가리켰다. 서천꽃밭이 있는 섬에 가려면 초원은 무조건 물안개에 잠긴 저 다리 가운데까지 가야 했다.
“상류에도 다리가 있나요?”
초원은 또 저승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아니, 없네만 저긴 물이 발목까지밖에 오지 않으니 그냥 걸어서 건너면 되네.”
“그렇지만 저 물 공포증이 있거든요. 발만 담가도 무서워서 한 발짝도 못 떼는데.”
거짓말이었다. 종아리 정도까진 괜찮았으니까.
“그리고 이것도 사실 업무상 재해거든요.”
초원은 노인들을 붙잡고 어쩌다 물 공포증이 생겼는지 하소연을 쏟아 놓았다. 물 공포증이라니. 초원에게 그런 게 생긴 줄은 꿈에도 몰랐던 현우는 사연을 들을수록 멍해졌다.
“아, 근데 그 망할 정부는 산재 인정도 안 해주는 거 있죠? 심지어는 몇 년 전에 연구소에서 가스 누출 사고가 나는 바람에 쓰러졌었는데 그것도 입 싹 닫고 치료만 해주고 보상은 하나도 안 해 줬다니까요?”
그저 중류로 가기 위한 꼼수가 어느새 진심 어린 회사 욕으로 번지고, 같은 공무원 입장인 노인들도 윗대가리의 욕을 추임새처럼 넣으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우린 휴가가 다 뭐냐, 휴일도 없고 매일 밤낮 없이 일하잖아.”
“헐, 세상에. 말도 안 된다. 힘들지 않으세요?”
“이 짓을 우린 수천 년을 했어.”
“진짜 너무하다. 그런데 이거 엄청 중요한 일 아니에요? 근데도 보직 안 바뀌고 수천 년이나 쭉 하셨다니 대단하시네요.”
초원의 아부에 노인들의 벽이 허물어지는 듯했다.
“아이고, 돈이나 명예는 없는데 보람돼서 하는 것이여.”
“그렇죠. 저도 현장직 해 봐서 알지만 수천 년이나 현장직을 맡으시는 게 웬만한 사명감으론 안 되는 거잖아요.”
“애기 엄마가 잘 아네.”
뜻밖의 수다 타임에 현우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서 있기만 했다. 노인들의 푸념을 한참이나 들어주던 초원은 자연스레 화제를 옮겨갔다.
“아이고, 다리야.”
나무 아래의 평상에 떡하니 앉아 아프지도 않은 다리를 주물렀다.
“죽은 사람도 몸이 무거우니까 다리가 퉁퉁 붓네요. 저승은 임산부 우대 없나요? 이승에는 임산부석도 따로 있는데.”
노인들이 고개를 젓자 초원은 배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한나, 이름도 예쁘게 지어 뒀는데…. 얼굴 한 번 못 보고 이렇게 헤어지게 생겼네….”
초원이 동정심 유발 작전을 시작하자마자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현우가 노인들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배 속에 있는 아기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죠? 아기는 아직 아무런 업이 없지 않나요?”
그렇지. 초원이 희망을 불태우자마자 노파가 찬물을 끼얹었다.
“요 아기는 아직 혼이 없는데?”
“네?”
“흠, 보자…. 삼신이 점지해 둔 혼이 아직 안 들어왔구먼. 몸만 있네.”
할아버지까지 한마디 거들자 초원은 작전도 잊고 멍해졌다.
혼이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덜컥 든 아기 걱정에 정신이 팔린 사이 노파가 삼도천 상류로 고개를 돌리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애기 엄마가 참 딱하긴 하다만, 상류 아니면 길이 없는데….”
없긴 뭐가 없나. 바로 뒤에 최단 거리로 강을 건너는 다리를 두고 말이다.
“그래도 애기 얼굴 한 번 못 보고 눈 감았다니 딱하긴 하네.”
노인이 중얼중얼하며 망이라도 보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리를 가로막은 차단봉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곤 차단봉 끝을 손으로 들어 올려 지나갈 틈을 만들며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강을 건너고 누가 물어보면 다리로 건너왔다는 소리는 하지 말게.”
“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세상에 어길 수 없는 규정은 없다.
무사히 다리로 들어선 후 두 사람은 달빛이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안개 속을 걸었다.
아직 혼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초원은 여전히 노인들이 했던 말에 정신이 팔려 걷는데 현우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같이 일할 때 생각나네요.”
“그렇네요, 하하….”
위급한 상황을 맞아 잠시 잊었던 어색함이 돌아왔다.
“초원 씨, 그나저나….”
“네?”
“그럼 나 때문에 물 공포증 생긴 거예요?”
“아…. 선배 때문은 아니고 두 번 다 일하다가 물에 빠진 거니까 업무상 재해죠.”
초원은 대충 뭉뚱그리고 다리 끝을 응시했다. 서천꽃밭이 있는 섬은 대체 언제 나오나. 안개가 옅어질 때마다 저 멀리 한강 노들섬처럼 생긴 섬이 어렴풋이 보이긴 했지만 좀처럼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팀장님은 전에 여기 혼자 오셨던 거잖아요.”
“어… 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을까요?”
“혼자서 어떻게 통과하신 거지?”
“궁금하면 나중에 돌아가서 물어봐 줄게요.”
반드시 환생꽃을 손에 넣어서 살릴 거니까.
“그런데 팀장님은 단순히 초원 씨가 좋아서 이 번거롭고 위험한 일을 하셨던 거네요.”
그것도 초원이 짝사랑했던 남자를 살리려고. 그 말까지는 현우가 하지 않았지만 초원의 귀에는 들리는 것만 같았다.
“보기보다 바보 같은 남자죠?”
초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기보다는….”
현우가 멋쩍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왜 초원 씨가 팀장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알겠어요.”
그렇지. 나만 아는 바보라서.
초원은 울적해지는 기분을 떨쳐내고 현우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선배도 연주 씨랑 잘해 봐요.”
“글쎄요. 연주는 결혼 생각이 별로 없고 나도 딱히….”
“아직도 잃음으로써 잃지 않는다는 주의예요?”
“그런가…. 난 솔직히 결혼은 포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왜요?”
“우리 엄마 겪어봐서 알잖아요.”
아, 그렇지. 하지만 남의 어머니를 같이 헐뜯을 수도 없으니 초원은 말을 돌렸다.
“난 시누랑 사는 거 알아요?”
“네?”
승준에게 초원 외에는 가족이 없는 걸 아는 현우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는 듯 되물었다. 승아의 영혼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 머물러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이 섬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결국 난간 너머에서 검은 강물이 아닌 수풀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 신기하다. 뱀파이어 건이 그렇게 된 건 줄은 몰랐네요.”
“그러고도 계속 남아서 지켜 주는 걸 보면 남매 사이가 좋았나 봐요. 흠,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요?”
물안개가 모습을 숨겨주어 다행이었다. 난간을 넘어 수풀 속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저 멀리 불이 듬성듬성 밝혀진 담장을 지켜보았다. 선녀의 말대로 경비는 없는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담장 위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여긴 현대화를 안 하나. CCTV도 없고.
경비가 허술한 덕분에 꽃을 훔치는 일이 수월해졌지만 말이다. 담벼락을 따라 걷다 보니 예상대로 입구가 나왔다. 철망으로 된 펜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지만 다행히 철조망까진 없었다.
“선배, 저 이거 넘게 발 좀 밀어 올려 줄래요?”
“그 몸으로요? 차라리 내가 넘어서 열어줄게요.”
그러더니 현우가 문을 훌쩍 타고 넘었다.
“흠….”
안에서 잠금장치를 열려던 현우가 난감하다는 소리를 내자 초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요?”
“자물쇠 잠겨 있네. 그냥 내가 훔쳐 올까요?”
“아뇨.”
제 일인데 현우가 도둑질을 하게 할 순 없었다. 거기다 현우가 못 미더운 구석이 있다는 것도 실은 한몫했다.
초원은 등 뒤에 메고 있던 배낭을 열고 볼트 커터를 꺼내 철망의 틈새로 내밀었다.
“이걸로 잘라요.”
“오… 준비 철저히 했네요.”
“그럼요.”
누구 목숨이 달린 기회인데 당연한 거 아닐까.
문이 열리고 초원은 안으로 들어가며 현우에게 당부했다.
“선배는 저기 다리 밑에서 기다려 줘요.”
신입 차사가 사람을 착각해서 잘못 데려왔다고 다시 데리고 나가는 게 탈출 시나리오라 현우의 역할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내가 혹시 한 시간 안에 안 나오거든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고요.”
한 시간 안에 못 나올 이유란 잡히는 것밖에 없었다. 그럼 현우도 같이 붙잡혀 곤란해지기 전에 도망치란 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해 뜰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러고도 안 오면 나가서 법무부 차 실장님한테 전화해 볼게요.”
아버지의 연줄을 써서 초원을 빼내 주겠다는 소리였다. 웃는 현우를 보니 미안해졌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선배는 아무 잘못 없는데 나 때문에 덤터기 쓰는 거잖아요.”
“그게 여태 초원 씨 역할이었잖아요.”
“아, 그렇네.”
둘은 잠시 숨죽여 웃다 주변을 살폈다. 사방이 고요했지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가 볼게요. 아무튼 고마워요.”
“뭘요. 조심해요.”
초원은 돌아서자마자 일단 가까운 건물로 뛰어가 벽에 바짝 붙었다. 야심한 시각이라 건물의 창은 거의 불이 꺼져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깨어 있어 창밖을 내다보더라도 벽에 딱 붙어 있는 사람은 보기 힘들 것이다.
벽을 따라 건물의 반대편으로 간 초원은 난감해졌다. 저 멀리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담장에만 불이 드문드문 켜져 있을 뿐, 영내에는 조명이 전혀 없었다. 건물과 담벼락 사이에는 암흑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는 달빛이 반사되는 것으로 보아 연못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못물로만 꽃을 키울 수 있다고 했었지.
그럼 편의상 연못 주변에 꽃밭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추론한 초원은 조심조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빛이 있어 봐야 너무도 희미해서 발밑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데 들킬까 봐 손전등을 켤 수도 없었다.
서비스 신호가 없어 터지지 않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의 희미한 불빛만으로 화단에 꽂힌 팻말을 확인하고 다녔다. 일단 연못 주변이 다 화단일 거란 추측이 적중한 건 다행이었다.
무슨 꽃이 이렇게 많아?
싸움꽃, 수레멸망악심꽃같이 이름만 봐도 살벌한 꽃들 사이를 뒤져가며 숨살이꽃, 혼살이꽃, 피살이꽃, 뼈살이꽃, 그리고 살살이꽃까지 환생꽃 다섯 가지를 겨우겨우 모아 텀블러에 넣었다.
됐다.
초원은 텀블러를 닫아 가방에 넣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 다행이었다. 이제 얼른 병원으로 가서 승준을 깨워 나란히 손을 잡고 집에 가겠다는 기대에 부푼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때였다.
어둠에 잠긴 건물 쪽에서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나오려는 건가? 걸음을 멈추고 불편한 몸으로 할 수 있는 한 몸을 낮춰 꽃 사이에 몸을 숨겼다.
크르릉.
갑자기 짐승이 이를 세우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자 초원은 얼어붙었다. 설마 경비견이 있나? 숨을 죽인 채, 듬성듬성 솟은 꽃줄기 사이로 시선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타다다닥.
네발짐승이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앗.”
일어나 도망치려던 초원은 무거운 몸 때문에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뒤집힌 거북이도 아니고. 어둠 속에서 버둥대다 간신히 일어섰을 때였다.
‘으악!’
발치에서 헥헥대는 짐승의 숨소리가 들리더니 축축한 게 발목에 닿았다. 질겁해서 뒷걸음질 친 초원은 그게 동물의 코였다는 걸 알고 안도했다.
‘아, 뭐야. 그냥 시츄잖아.’
어둠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들었을 땐 대형견인 줄 알았다. 다행히 물지는 않고 냄새만 집요하게 맡는 개를 안아 들려는 찰나였다.
“아롱아, 어딨어?”
건물 쪽에서 어린아이의 외침이 들리자마자….
“게, 누구냐!”
어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엔 시츄보다 무서운 누군가가 뛰어오기 시작했다.
* * *
삐-.
심전도 모니터는 일직선을 그린 지 오래였다.
“보호자 연락 안 됩니까?”
의사가 재차 묻자 뒤에서 무선 전화를 귀에 대고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지금 이틀째 면회도 안 오셨어요.”
그 말에 의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곤 환자의 가슴을 압박 중인 인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기까지 하죠.”
땀에 푹 젖은 인턴이 심폐소생술을 멈추고 병상 아래로 내려오자 의사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사망 선고를 내렸다.
“18시 13분, 조승준 님 사망하셨습니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굴곡이 모두 사라지고 평탄한 선만 그리던 모니터가 꺼졌다. 그렇게 굴곡 많았던 삶이 끝을 맞이했다. 그러나 안식이 아닌 미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료진들이 몸에 연결된 장비를 떼어 내고 흰 천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 모습을 발치에서 지켜보던 승준을 누군가가 불렀다.
“조 팀장님.”
뒤돌아보니 청에서 알고 지냈던 저승사자가 서 있었다. 그는 미안한 기색이 감도는 얼굴로 잔인한 말을 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그러곤 표정을 엄하게 고치더니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망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것. 영을 저승으로 끌고 가는 첫 절차였다.
“조승준 씨.”
차사가 그의 이름을 두 번째로 부르던 찰나였다.
“잠깐만요.”
누군가가 이쪽으로 뛰어왔다. 차사와 그의 사이를 막아선 사람을 알아본 승준의 입에서 오래도록 부르지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조승아?”
저승으로 가지 않고 이승을 떠도는 영이다. 끌려가지 않으려면 차사를 피해야 할 것 같은데, 승아는 차사의 앞에 당당히 서서 팔짱을 끼더니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명계 법령 제34호 혼령의 권리 및 자유에 관한 특별법 제4조 1항, 망자는 차사의 부름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차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즘 망자들은 똑똑해서 탈이란 말이야.”
이렇게 중얼거린 저승사자가 승준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되어 얼떨떨한 승준에게로 승아가 돌아서더니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이거 아는 귀신 언니한테 배운 거다? 난 처음에 이것도 모르고 1년 넘게 도망 다닌 거 알아? 동생 잘 둬서 다행인 줄 알아. 그러니까 앞으론 선배님이라고 불러라.”
너무도 살아생전 조승아 그대로인 말투에 승준은 웃어 버렸다.
* * *
“손.”
초원은 상대를 노려보기만 할 뿐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손을 모아서 이리 내라고 하였다.”
꽃감관이 밧줄을 든 채 다시 명령하자 초원은 주변을 보란 듯 눈짓했다. 비좁은 감옥에는 창문도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나갈 방법도 없는데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요?”
“손.”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자 그제야 손을 내밀었다. 꽃감관은 손목을 묶어 본 일이 없는지 초원이 두 손을 깍지 껴 내밀었다는 걸 신경조차 쓰지 않고 손목에 밧줄을 감았다.
“지난번에 꽃을 훔쳐 간 도둑놈을 아직도 못 잡았는데 혹시….”
승준의 죄까지 뒤집어쓸 처지가 되자 초원은 냅다 반박했다.
“저 아니거든요? 여기 처음이에요.”
“그나저나 어느 지옥에서 도망쳐 온 거야?”
선녀의 환술 덕에 꽃감관은 초원이 삼도천 건너 지옥에서 도망쳐 온 망자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해가 뜨는 즉시 차사를 부를 것이다. 지옥에 다시 끌려가 끓는 물에 천 년간 삶아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임산부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요.”
“도둑년 주제에.”
“도둑년이라니 말이 심하시네요.”
꽃감관은 코웃음을 치며 바닥에 떨어진 초원의 배낭을 들어 올려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텀블러를 집어 들자 초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 돼. 내 꽃….
텀블러를 열어 겨우 모은 꽃을 털어갔을 땐 눈물이 울컥 터졌다.
“저, 저기요.”
초원은 배낭을 손에 든 채 감옥 밖으로 나가려는 꽃감관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거 제가 살고 싶어서 훔친 게 아니고요. 흡, 저희 남편이 지금 사경을 헤매는데 꼭 살리고 싶어서 꽃을 구하러 온 거거든요.”
초원은 감정과 이성 모두에 호소해 가며 왜 환생꽃으로 승준을 살려야만 하는지를 털어놓았다.
“뭐라? 구미호? 쯧쯧, 그 요망한 것들이 아직도 이승에서 판을 치고 다니나 보군.”
냉정해 보이는 꽃감관도 인정이 있기는 한 건지 딱하단 눈으로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저, 그러니까 이번 딱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보답도 꼭 할게요.”
그러나 꽃감관은 돌연 인상을 구기더니 퉁명스럽게 윽박질렀다.
“보답? 바리데기가 쓴 수법은 꿈도 꾸지 말거라.”
“아니, 제가 왜 그 수법을 써요? 저는 남편도 애도 있거든요?”
기가 막혔다. 초원이 미쳤다고 무급 노예에 아기 셔틀 노릇까지 하겠냔 말이다. 애초에 바리데기가 수법을 썼다는 소리도 말이 안 됐다. 꽃감관이 수작을 부린 게 맞지.
“자네 사정은 딱하나 인간은 순리대로 살아야 하네.”
“순리대로 살라고 할 거면 순리에 어긋나는 환생꽃 같은 건 왜 키우시는….”
발끈해서 따지는 찰나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똑같은 생각을 언젠가 했던 것만 같았다. 그러곤 더욱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한번 둬 본 적도 없는 바둑 두는 법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다.
뭐지 이거?
초원은 쇠창살 밖으로 나가 감옥 문을 닫는 꽃감관에게 다급히 물었다.
“혹시 바둑 좋아하세요?”
“어떻게 알았나.”
심지어 꽃감관은 바둑을 좋아한다는, 대체 어디서 안 건지 모를 지식 또한 맞아떨어지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지금은 딴생각에나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초원은 창살 너머로 묶인 두 손을 뻗어 문을 잠그고 가려는 꽃감관의 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그럼 내기 바둑 두실래요?”
“얼씨구, 수백 년 전 수법을 쓰고 앉았네.”
꽃감관은 단호하게 손을 뿌리치더니 계단을 올라 지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쾅, 문이 닫히자 초원은 감옥 구석의 의자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심결에 배를 쓰다듬으려다가 묶인 손을 내려다보곤 이를 갈았다.
“…그 망할 강아지.”
갑자기 개에게 쫓기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저승에서 빠져나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몸이 무거우니 성인 남자보다 빨리 뛰는 건 무리였다. 어두워 발밑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그러다 넘어져 아기가 잘못되어도 큰일이니 몸을 사리다 결국 잡힌 거다.
“진짜 빡빡하고 깐깐하네.”
꽃감관이 잔뜩 겁을 주고 갔지만 처벌은 걱정도 안 됐다. 아니,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승준 씨는 지금 어쩌고 있으려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눈물이 뺨을 타고 주룩 흘렀다.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으니 그 남자가 초원이 돌아갈 때까지 못 버틴다 하더라도 괜찮다. 하지만 꽃이 없이 돌아가는 건 전혀 괜찮지 않았다. 빼앗긴 꽃을 생각하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안 돼. 절대로 포기 못 해.
초원은 이를 악물어 울컥 터지려는 울음을 참으며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발소리와 말소리가 완전히 멎자 그녀는 여태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끼고 있던 손깍지를 풀었다.
깍지를 끼면 손목 사이가 벌어진다. 이대로 묶이면 손목을 붙인 채 묶였을 때에 비해 밧줄이 헐거워졌다. 그래도 꽤나 꽉 조여진 밧줄 고리 사이로 손 하나를 비틀어 빼내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가까스로 손을 풀고 나니 손목이며 손등에 거친 밧줄에 눌리고 긁힌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초원은 밧줄을 바닥에 던지고 감옥 문으로 다가갔다. 손을 창살 밖으로 빼서 더듬어 보니 자물쇠 하나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감옥 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코앞에 초원의 배낭이 내던져져 있었다. 조금 전 꽃감관이 텀블러에서 꽃만 빼내고 초원의 물건은 저기에 던지고 갔다. 활짝 열린 배낭에서 볼트 커터의 손잡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저것만 있으면 당장 나갈 수 있는데.
하지만 여기서 저기까지는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초원은 앞머리에 찔러 둔 실핀 두 개를 뽑았다.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밖으로 손을 뻗어 실핀으로 자물쇠를 따려 했다.
아, 진짜. 왜 안 돼. 연습 좀 해 둘걸.
언젠가 너튜브에서 실핀 두 개로 자물쇠 따는 법을 봤었다. 그걸 기억해 내려 애쓰며 자물쇠 구멍을 이리저리 쑤셔 보았지만 굵은 쇠고리는 풀릴 기미가 없었다. 이승은 저승보다 시간이 훨씬 빠르게 흐르는데. 여기서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손에서 진땀까지 나며 실핀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앗, 망할.”
그러다 실핀 하나를 놓쳤다. 창살 밖에 떨어진 걸 팔을 뻗어 주우려는 찰나였다.
철컥. 끼이익.
감옥 밖의 계단 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초원은 실핀을 잽싸게 줍고 밧줄까지 챙겨 감옥 구석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아직도 묶인 척하려고 손목에 밧줄을 대충 감던 초원은 의아해졌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꽃감관이라기에는 가벼웠다.
“안녕하세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뒤돌아본 초원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는….”
작년 가을, 섬에서 구출하려 했던 치유 능력을 가진 아이였다.
“시온이 맞지?”
“네.”
“아….”
이 아이가 왜 여기 있지? 의문이 들자마자 시온이와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럴 일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아이를 다시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초원은 아이에게로 다가가 눈높이를 맞췄다.
“시온아, 이모가 너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왜요?”
“그게….”
왜 저 아이를 구하러 갔었는지가 생생하게 떠오르자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네 능력이 필요해서 너를 구하러 갔던 거였거든. 나도 널 이용하려던 어른들이랑 다를 게 없지? 정말 미안해.”
“괜찮아요. 저도 이모 이용한 건 똑같으니까.”
아이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더니 헤헤 웃었다.
“그리고 정말 고마워. 네 덕에 이모 아픈 데 다 나아서 아기도 생겼어.”
초원은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창살 너머로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시온이는 왜 여깄어?”
“아… 여기는요.”
아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충격적인 소리를 했다.
“자살한 애들만 와요.”
“자살?”
“그 파도, 사실은 제가 저승사자 아저씨한테 졸라서 부른 거예요. 나 때매 이모까지 물에 빠지게 해서 미안해요.”
그날 보트에서 멍하니 바다만 보고 있는 게 이상하다 싶었더니. 이제야 안 사실에 초원이 멍해진 사이 아이가 또 사과했다.
“그리고 아까 아롱이도 미안해요.”
“아, 걔가 아롱이야?”
조금 전 초원을 쫓았던 시츄가 바로 시온이가 보고 싶다던 할머니네 강아지였나 보다. 초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강아지도 무지개다리를 건넜구나.
얄미웠던 강아지가 안쓰러워졌다.
“이모는 근데 여기 왜 왔어요? 혹시 나 때매 그때 물에 빠져서 여기 온 거예요?”
아이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초원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이거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초원은 계단 쪽을 힐끔대어 본 후 아이를 바짝 당겨 귓속말을 했다.
“이모 아직 안 죽었어.”
“그럼 왜 여깄어요?”
남편이 많이 아파서 환생꽃이 필요해 여기까지 왔다는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더니 아이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렸다.
“그럼 내가 꺼내 줄게요.”
다시 나온 손에 들린 걸 본 초원의 입이 딱 벌어졌다.
“열쇠는 어디서 났어?”
“그 무서운 아저씨 지금 술 마시고 코 골아요.”
세상에, 다행이다. 이렇게 또 도움을 받을 줄이야. 이 아이가 고맙고 예뻐 죽겠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래도 돼? 지옥에 끌려가서 혼나는 거 아냐?”
“그냥 다시 갖다 놓으면 모를걸요? 저 아저씨 술 마시면 애들이 얼굴에 사인펜으로 그림 그려도 못 깨요.”
그러곤 해맑게 웃는데 그날 섬에서 봤을 때보다 표정이 훨씬 밝았다. 아이가 곧바로 자물쇠를 열었다. 밖으로 나온 초원은 배낭을 챙겨 매고 아이를 따라나섰다.
다들 자러 갔는지 건물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시온이의 말대로 꽃감관은 정말 술에 취해 자는지 어딘가에서 코 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롱아, 쉿.”
나가는 길에 시츄를 다시 마주쳤지만 이번엔 제 주인이 있으니 짖지 않았다.
“잠깐만요.”
건물 밖으로 초원을 데려 나온 아이가 이렇게 속삭이더니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뛰어온 아이의 손에는 환생꽃 다섯 가지가 한 송이씩 들려 있었다.
“이거 가져가세요.”
초원은 떨리는 손으로 그 꽃을 다시 받아 들었다. 꽃을 텅 빈 텀블러에 다시 넣고 품에 안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 그 남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잘 가요, 이모.”
초원은 저를 서천꽃밭의 출구까지 데려다주고 손을 흔드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니. 시온아, 정말 고마워.”
초원은 울컥 터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고맙다는 말을 거듭했다. 그런데 아이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나도 고마워요.”
“뭐가?”
초원은 잘해준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따뜻한 밥요. 고마워요. 할머니 밥 맛있어요. 포도도 맛있었어요.”
초원의 어머니가 올린 제삿밥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거야 내가 신세 진 게 있는데 당연하지.”
“아, 글고 저한테 미안하다고 해준 것도 고마워요. 엄마랑 아빠는 그런 말 한 번도 안 해줬거든요.”
고작 일곱 해 만에 스스로 생을 포기할 정도로 괴롭고 외로웠던 이 아이의 삶이 그 한마디에서 뼈저리게 느껴졌다. 초원의 마음이 찡하게 아렸다.
“다음엔 꼭 좋은 부모님 만날 거야.”
“그러고 싶어요.”
“그래, 꼭 그래야지. 행복하게 잘 지내고 또 보자, 시온아. 다음엔 저승 말고 좋은 데서 보자.”
아이와 한 번 더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던 찰나였다. 아이가 초원의 옷자락을 잡았다.
“있잖아요.”
“응?”
“나중에 또 태어나고 싶으면… 이모 집에 가도 돼요?”
아이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소곤거리더니 거절당할까 봐 조마조마한 듯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당연하지. 기다릴게. 꼭 와줘.”
초원은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당겨 안았다.
“대신에 능력은 갖고 오지 마. 삼신할매한테 잘 말해서 꼭 평범한 아이로 태어나는 거야. 약속.”
“약속.”
언젠가 엄마와 아들이 될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걸며 웃었다.
* * *
승준은 중환자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신의 시신 곁에 우두커니 걸터앉았다. 시선은 옆에 나란히 앉은 승아에게 있었다. 동생은 숨을 거뒀던 23살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이고 말하는 모습을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보자니 반가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너무나 많아 아무런 말도 선뜻 나오지 않았다. 바보같이 입을 뗐다 붙이기만 하는데 침대 주변에 둘러쳐진 커튼을 응시하던 승아가 한마디를 불쑥 내뱉었다.
“기다려.”
“뭘.”
“초원 씨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막막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의 속을 읽기라도 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초원이 온다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뭘 기다리라는 건지.
얼굴은 보고 가라는 건가.
승준은 그제야 승아에게 물었다.
“초원 씨는 잘 있고?”
“잘 있겠냐?”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약과를 꺼내 야금야금 먹던 승아가 승준을 흘겨보며 면박을 주었다.
“…그거야 그렇겠지.”
의식을 잃기 전 초원이 오열하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내 말은 다친 데나 아픈 덴 없냐는 거지.”
“없어. 몸은 쌩쌩한 것 같던데.”
“다행이네.”
그런데 어디 갔을까. 초원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연락을 못 받았다고 했던가. 그가 숨을 거둔 걸 알면 더욱더 절망할 거라고 생각하니 있지도 않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제 초원 씨랑 한나는 어쩌지.
승준은 곧바로 현실적인 걱정에 빠졌다. 아파트며 모아 둔 재산은 꽤 되지만 줄 수 있는 건 다 주고 가고 싶었다. 공무원 연금에, 생명보험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승준은 승아에게 문득 물었다.
“귀신은 다른 사람 꿈에 나타날 수 있나?”
“난 못 하는데. 보통은 못 할걸? 할 줄 알았으면 오빠 꿈에 맨날 나타나서 치킨 시키라고 했겠지.”
“아, 하긴. 그렇네.”
“왜? 초원 씨 꿈에 나타나게?”
“아니, 보험 담당자 꿈에 가서 보험금 내놓을 때까지 괴롭힐까 했지.”
이렇게 사망한 경우에는 보험금 안 줄 것 같아서, 라고 덧붙이며 웃었더니 승아가 그의 등짝을 때렸다.
“으이그! 살아날 생각을 해.”
조승아는 여전히 손이 매웠다.
“어떻게 사냐.”
나도 살고는 싶지. 초원과의 아이를 다시 안아 보고 싶어서, 이번 결혼은 행복한 결말을 내고 싶어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 끝내 이렇게 됐다.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초원과 아이를 저승으로 허무하게 보내느니 제가 가는 게 나았다.
“난 이미 죽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자 승아가 고개를 저었다.
“초원 씨 올 때까지 기다려 보라니까.”
“초원 씨 어디 갔는데?”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듯이 굴길래 물었지만 승아는 몰라, 이러고 무뚝뚝하게 대답하더니 말을 돌렸다.
“오빠도 약과 먹을래?”
“아니. 근데 그건 어디서 났냐?”
“저 밑에 장례식장.”
“하….”
승준은 기가 막혀서 웃어 버렸다. 어디 가든 굶지 않고 다니는 성격은 죽어서도 여전한 모양이었다.
“내가 약과 가지러 간 그새를 못 참고 저승사자를 따라가려고 했다니 말이야. 물가에 내놓은 애도 아니고 못 미더워, 쯧쯧….”
그럼 옆에서 못 따라가게 지키고 있었던 건가. 승아가 그를 지킨 건 오늘만이 아니었다. 왜 계속 곁을 지키고 있는지 항상 의아했다.
“그나저나 넌 왜 이승에 아직 남아 있어? 부모님은? 내가 한 짓 아닌 거 이젠 다 알지?”
궁금한 걸 하나 꺼냈더니 둑이 터지듯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알지. 엄마, 아빠도 다 알아.”
숨을 거둔 그 순간에는 몰랐지만 말이다. 승아는 오래 묵은 한이 풀려 조금은 밝아진 오빠의 얼굴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잘됐다.
오빠마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건 안된 일이지만, 그래도 제가 모든 걸 잊고 다음 생을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겨 잘됐다고.
“그럼 어머니, 아버지는?”
“가셨어. 지금쯤이면 다시 태어나셔서 다 잊고 잘 살고 계시겠지.”
승준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승아에게 물었다.
“근데 넌 왜 안 갔어?”
마지막 순간이 마음에 걸려서.
오빠가 저를 죽였다고 오해하며 눈을 감았다. 원망하면서.
그런데 나를 죽인 사람이 왜 저런 얼굴을 할까. 마지막 순간, 절망 그 자체이던 오빠의 얼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진실을 알고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오빠는 늘 그렇듯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않았지만 동생이 공포에 새파랗게 질려 숨을 거둔 건 자신 탓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그 순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승아도 그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을 오해와 원망의 시간으로 만든 것이 후회됐다. 살아생전 좋은 소리 한번 안 해주고 까칠하게 굴기만 한 것도 미안했다.
자신은 어리단 핑계로 오빠가 해주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기만 했다. 오빠는 군소리를 하면서도 결국엔 승아가 해달라는 건 다 해주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속은 물러 빠진 사람이라 걱정된 것도 떠나지 못한 데 한몫했다.
그러나 조승준 여자 버전인 조승아는 죽어서도 오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아직 제삿밥 덜 먹어서.”
진짜 조승아답다며 웃는 오빠에게 승아는 살아생전처럼 입씨름을 걸었다.
“와… 근데 진짜 인간적으로 너무하더라. 나한텐 새우튀김 해준 적 있냐?”
“뭐라는 거야. 이제 네 거도 해주면 된 거지.”
“그게 해주는 거냐? 꼽사리로 얻어먹는 거지. 이 가식덩어리야. 여친 생기니까 날 때부터 요리 만렙인 척하는 것 좀 봐라. 원랜 떡볶이가 다 뭐야. 라면도 맨날 망하던 사람이.”
승준은 할 말이 없어 그저 웃었다. 초원과 엮이기 전만 해도 승아의 말대로 요리 실력이 꽝이었다. 요리를 할 일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억제되었던 초원과의 기억을 찾은 후에야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거였다. 망한 계란말이를 손수 만회할 기회가 언젠가 있기를 바라며.
승아는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이제야 든 생각에 거듭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오빠처럼 재미없는 남자가 연애하려면 그런 노력이라도 해야지.”
여느 여동생들이 그렇듯 승아는 남자로서의 제 오빠를 하찮게 보았다.
“아, 근데 진짜!”
“아, 왜?”
승준은 또 느닷없이 등짝을 맞았다.
“이 도둑놈아. 8살이나 어린 애를. 아무리 내 혈육이라지만 이건 진짜 못 감싸준다.”
승준과 세 살 터울인 승아에게도 다섯 살이나 어린 초원은 애였다.
“난 초원 씨 어린 게 좋아서 쫓아다닌 거 아니거든?”
승준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어휴, 내가 초원 씨랑 말만 통했어도 오빠 실체를 다 불었을 텐데. 아, 답답해.”
“실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웃으며 입씨름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멀쩡히 살아 있던 옛날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남매의 짧았던 재회는 커튼이 갑자기 젖혀지는 순간 끝이 났다.
“초원 씨.”
뛰어 들어오는 초원을 보는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자마자 승준은 좌절했다. 이젠 어떠한 말을 해줄 수도, 안아 줄 수도 없는데 어떻게 보듬어 줘야 하는 걸까.
“초원 씨, 보지 마.”
초원은 당연히 그의 만류를 듣지 못하고 이미 죽어버린 몸을 가린 시트를 걷어내려 했다. 또다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될 줄이야. 욕심내지 말고 다른 남자와 행복하게 살도록 둘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며 초원에게 덧없이 손을 뻗는 찰나였다. 승아가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오빠, 내 얼굴 보는 건 이게 마지막일 거야.”
이별의 순간 또 다른 이별이라니. 승준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승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그래, 언제까지나 혼으로 떠돌 순 없으니까. 승준은 승아와 닮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시 만나자마자 이별이네. 조승아, 그동안 고마웠다. 꼭 좋은 데로 가.”
“당장 안 가. 태어나려면 아직 몇 달 남았어. 그전에 밀린 드라마 다 보고 갈 거야.”
승아가 그의 손을 잡더니 또 핀잔을 던졌다. 승준의 얼굴에 떠올랐던 실소는 곧 서글픈 미소로 변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 테니.
“다음 생에는 아프지 않고 명줄 길게, 좋은 집에서 태어나게 해달라고 삼신할머니한테 부탁해 볼게.”
“사실 어디로 갈진 이미 정해졌어.”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그의 몸속에서 이미 차갑게 식었을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뒤돌아본 승준의 미간이 구겨졌다. 시트를 걷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초원의 손에 꽃 다섯 송이가 들려 있었다. 저건 분명 환생꽃이었다.
잠깐, 이 여자 지금 어디 갔다 온 거야?
다시 살아난다는 기쁨보다 초원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찰나였다.
“아, 근데 그거 알아? 큰딸은 고모 닮는다?”
“뭐?”
경악에, 또 경악을 거듭한 승준이 뒤돌아보자 승아가 씨익 웃었다.
“어디로 가는가 했더니.”
“내가 가긴 어딜 가? 오빠 등골 끝까지 쪽쪽 빼먹어야지.”
집순이 조승아는 여전히 그의 집에 남을 것이고, 여전히 그의 가족으로 남을 것이다. 승준은 근엄한 아빠인 척 팔짱을 꼈지만 얼굴에는 참지 못한 미소가 환하게 번져 있었다.
“속 썩이지 마라. 효도하고.”
“와, 벌써 잔소리냐? 지금 그런 말 해 봤자 환생할 때 다 까먹거든?”
당연한 이야기인데 승아가 그 모든 추억을 잊게 될 거라는 말을 들은 순간 승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시들었다.
“아쉬워하지 마. 이제 새로운 추억을 쌓는 거지.”
그제야 다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승준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승준 씨, 제발 일어나요.”
초원은 승준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서서히 온기가 돌아오는 살갗 아래에서 굵은 핏줄이 손가락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맥박은 돌아왔는데, 왜….”
왜 깨어나지 않는 걸까. 여전히 감긴 눈꺼풀을 내려다보던 초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흑….”
고개를 숙여 뺨을 맞대는 찰나 숨결이 초원의 귓가를 스쳤다. 호흡도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왜 안 깨어나는 거야? 꽃이 잘못됐나?
지푸라기를 잡듯 혼살이꽃을 다시 한번 코에 대어 보는 찰나였다. 승준이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눈을 번쩍 떴다.
“승준 씨!”
그는 눈을 뜨자마자 초원을 끌어안으며 한마디 하려 했다.
“왜 이런 짓을….”
“왜 그랬어요?”
하지만 선수를 빼앗겼다. 초원은 그를 부둥켜안은 채 엉엉 울며 화를 냈다.
“누가 목숨까지 바치랬어요? 우리 아빠가 파뿌리 검은 머리 될 때까지 살랬는데 얼마 됐다고 그걸 어겨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겠지.”
“시끄러워요. 그걸 또 지적하고 있어. 살 만한가 봐요?”
“어, 살 만하네.”
웃음이 다 나올 만큼 살 만했다. 승준은 초원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며 웃었다.
하여튼 이 여자는 이길 수가 없다.
중환자실의 의료진들은 사망한 환자의 아내가 뛰쳐 들어오는 순간부터 수군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여자는 조깅을 하다 온 것 같은 차림이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는 길에 카페라도 들른 것처럼 손에 텀블러를 들고 있다니. 말이 나오지 않을 리가.
그래도 여느 유가족들처럼 커튼 너머에서 일어나라는 소리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자 분위기는 금세 숙연해졌다. 하지만 느닷없이 남자 목소리가 그 안에서 들리는 순간 공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며 발칵 뒤집힌 중환자실을 들여다보던 현우는 뒷걸음질 쳤다. 잘됐다. 잘됐는데 난리 났네. 뭐, 저건 팀장님이 알아서 입막음하시겠지.
괜히 얽혀서 혼나기 전에 가야겠다고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한 발짝 뒤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선녀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랑은 겁을 모르는 바보의 몫인가 보군.”
초원이 들으면 저더러 바보라고 했다고 발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우는 웃었다.
하지만 바보는 행복하다고 하지 않던가. 겁을 모르는 바보만이 행복한 결말을 쟁취할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해피엔딩 1/2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초원은 아기방 소파에 모로 누워 승준이 깎아 준 사과를 먹으며 중얼거렸다. 출산 휴가를 낸 지 2주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승준의 수발만 받으며 집에서 뒹군 지 2주째란 거다.
하지만 이 신선놀음도 며칠 안에 끝날 듯했다. 만삭인 배를 쓰다듬던 초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도분만 싫은데….”
입술을 삐죽 내밀자 건조기에서 꺼내어 온 아기 옷을 차곡차곡 개던 승준이 초원의 머리를 달래듯 쓰다듬었다.
“한나가 엄마를 닮았네.”
“왜요?”
“엄마 닮아 집순이라서 애가 나올 생각을 안 하잖아.”
초원이 맞는 말이라며 웃었다. 실은 엄마를 닮은 게 아니라 아빠의 말을 너무 잘 들은 착한 딸인지도 모르지만. 늦게 나오라는 말을 계속 했더니 그 말대로 40주를 다 채우고도 안 나오니 말이다. 그래서 며칠 전 병원에서 유도분만 날짜를 받아와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 딸 얼른 보고 싶어.”
초원이 배를 쓰다듬으며 딸에게 말을 걸었다. 승준도 고개를 기울여 초원의 배에 짧게 입을 맞추곤 중얼거렸다.
“아빠도 한나 얼른 보고 싶다.”
그럼 승아의 영은 사라지겠지만.
그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무도 없는데 TV는 왜 틀어 놨냐고 물을 것이다. 커피 테이블에 사과 한 접시는 왜 놓아뒀냐는 소리도. 승아가 그걸 야금야금 먹으며 드라마를 보는 중이란 건 모를 테니.
“그거 내가 다 싸둔 건데.”
옷을 다 갠 승준이 방 한구석에 세워진 캐리어를 가져와 열었다. 초원이 몇 주 전부터 싸 둔 출산 가방이었다. 그걸 열어 서랍장 위에 둔 카메라와 충전기를 넣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초원이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요.”
“뭘?”
“DSLR 카메라 산 거, 아기는 핑계고 승준 씨가 갖고 싶었던 거죠?”
“아니거든? 인화해서 한나 앨범 만들어 줘야지.”
“에이, 누가 요즘 앨범 같은 거 만들어요.”
“데이터 다 날아가서 내 머리에만 추억이 남으면 얼마나 마음 아픈데….”
“흠… 하긴….”
돌아가신 부모님과 여동생을 말하는 건가. 초원은 제 추측이 틀렸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그냥… 한나 태어나면 사진 많이 찍어서 남기고 싶었어요.”
첫 아이들에겐 그러지 못했으니.
“자주 들여다볼 수 있게….”
인공지능이 만든 가상현실 속의 아이들은 그저 0과 1로 된 데이터 조각이 되어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한나는 그토록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겠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소중한 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그의 기억 속에만 남아 풍화되어 가는 건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태어난 첫날부터 열심히 찍어 주려고 충전까지 해둔 카메라를 출산 가방에 넣고 초원이 넣어 둔 물건이 충분한지 확인하던 때였다.
“이건 뭐예요?”
승준이 손바닥만 한 상자를 가리키며 묻자 초원은 사과를 입에 넣으며 대꾸했다.
“모유촉진차.”
승준은 이런 거 없어도 잘만 나온다고 중얼거리더니 차 상자를 가방에서 뺐다.
“흠… 혹시 모르니까 있으면 좋다던데….”
초원은 핸드폰을 열고 인터넷에서 본 출산 가방 리스트를 다시 확인하다 중얼거렸다.
“유축기는 안 사도 되고…. 보건소에서 빌리면 된다니까….”
“그런 것도 없어도 돼요.”
딱 잘라 없어도 된다는 남자의 귓바퀴가 어째선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흐음….”
저처럼 경험이 없을 남자가 초원의 엄마와 언니에 빙의해 이건 필요 없다, 이건 더 필요하다, 이러며 가방을 다시 싸는 걸 초원은 의아한 눈으로 관찰하다 물었다.
“왜 이렇게 잘 알아요? 듣고 있으면 애 셋은 낳아 본 사람 같은데?”
“…무슨 소리야. 인터넷에서 본 거지.”
“혹시….”
초원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그를 바라보자 승준은 긴장했다. 기억의 봉인이 풀려 가는 여자의 앞에서 신이 나 아는 척을 너무 많이 했나 걱정되던 때였다.
“돌싱이에요?”
엉뚱한 소리에 승준은 웃어 버렸다.
“헐! 왜 웃어요? 아니라고 못 하고 웃기만 하는 것 좀 봐.”
“아닙니다.”
“내가 시켜서 한 말이잖아요! 진짜 돌싱 아냐?”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건 승준의 두 번째 결혼 생활이었으니. 물론 같은 여자와.
초원은 티셔츠를 가슴 아래까지 걷어 올리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채 눈을 감았다. 곧 달콤한 코코넛 향이 코끝을 간질이고, 오일로 미끌미끌하게 젖은 남자의 손이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엄훠나, 오늘도 돌아온 마사지플 타이밍!”
오늘도 머릿속 음란 마귀가 신이 나 외치자 초원은 인상을 팍 구겼다.
“아, 입 좀 다물어. 마사지플 같은 소리 하고 있어. 튼 살 예방하는 거잖아.”
“아, 예. 그렇죠. 튼 살 방지 오일을 왜 막판엔 저 남자 가운데 다리에도 바르는지 모르겠다만. 하긴 그렇게 순식간에 커지면 살이 틀 수도 있겠….”
“아오, 시끄러워!”
또 인상을 팍 쓰는 찰나 승준이 물었다.
“왜? 어디 불편해요?”
“아, 아뇨?! 간지러워서….”
초원은 눈을 뜨고 실없이 웃으며 속으론 음란 마귀를 욕했다.
얘는 저 남자가 오일을 발라 줄 때마다 이래.
아무래도 이 코코넛 냄새만 맡으면 몸이 달아오르는 것도 음란 마귀가 툭 튀어나오는 데 큰 몫을 하는 것 같았다. 그 탓에 남들은 한 통이면 출산까지 쓴다는 오일을 초원은 세 통째 샀다.
배 마사지에 열중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원은 제 엉덩이 아래를 흘끔대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 남자 오늘도 침대에 전신 타월을 깔았네.
배에만 바를 거면 타월은 필요 없는 거 아닐까? 불을 끄고 무드등만 은은하게 켜 놓은 것도 수상쩍다. 초원이 마른침을 삼키던 때였다.
“앗, 여긴 안 해줘도….”
승준이 티셔츠를 가슴 위로 걷어 올리려 했다. 가슴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막았더니 그가 눈매를 좁혔다. 초원이 내외하는 티를 내는 걸 싫어하는 남자는 그녀가 몸을 가릴 때마다 저렇게 못마땅한 눈으로 왜 이러냐고 물었다.
왜 이러긴. 부끄러우니까.
막달이 다가오니 원래도 큰 편인 가슴이 풍선처럼 크게 부풀었다. 초원의 눈에는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기가 들었다는 사실과 별개로 커다랗게 나온 배도 제 눈엔 보기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마사지를 받는 것도 실은 민망했다.
나름 신혼인데 벌써 신비감이 사라지는 것 같지 않나?
그런데 저 남자는 신비감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나 보다. 그는 결국 초원의 티셔츠를 걷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훌렁 다 벗겨 버리고 가슴 양쪽을 손에 넣었다.
손끝이 살을 가볍게 눌렀을 뿐인데도 말랑한 살이 눈에 띄게 푹 들어갔다. 승준의 손가락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정점을 향해 다가오는 사이 눈치는 없고 솔직하기만 한 젖꼭지가 뾰족하게 솟았다.
곧 오일이 잔뜩 묻은 손이 살덩이를 쥐고 치대기 시작했다. 손짓은 이미 건전한 목적 따위 다 버렸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초원은 제 몸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불건전한 기분이 들다가도 팍 식었다.
“흐응….”
제 가슴을 삼키듯 움켜쥔 구릿빛 손을 내려다보던 초원이 앓는 신음을 냈다. 저 큰 손에도 넘치도록 커버린 가슴이 여전히 못마땅했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시무룩한 얼굴로 올려다봤더니 승준이 픽 웃었다.
“아직도?”
초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예쁘다고 한 말은 다 빈말 같죠.”
초원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말은 못 믿어도 몸은 믿죠?”
승준의 눈짓을 따라 그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본 초원이 히죽 웃었다.
믿습니다. 믿고 말고요.
제 몸을 볼 땐 팍 식었던 성욕이 갑자기 저 남자의 그곳만큼이나 우뚝 일어섰다.
“승준 씨.”
“응?”
“막달이 다 돼도 안 나오는 아기를 엄마 배 속에서 쫓아내는 법이 하나 있는데 알아요?”
“뭔데요?”
“아빠 주사.”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승준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럼 몸으로 보여줄 시간이지. 초원은 또 히죽 웃었다.
역시나 오늘도 이런 결말이다. 머릿속에서 음란 마귀가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초원은 제 다리 사이에서 티셔츠를 벗어 던지는 남자를 감상하며 군침을 꼴깍 삼켰다.
몸매 끝내준다.
어릴 땐 근육 있는 남자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그땐 뭘 몰라도 한참 몰랐지.
크게 불거진 가슴 근육 아래, 선명하게 도드라진 복근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발끝을 가져다 댔다. 엄지발가락으로 깊이 팬 복근의 틈새를 따라 내려가다 발끝이 드로어즈의 밴드에 턱 걸렸다.
불룩하게 솟다 못해 찢어질 것만 같은 천의 가운데는 쿠퍼액으로 젖어 색이 짙어져 있었다. 그대로 밴드를 당기자마자 옷 속에 갇혀 있던 구릿빛 성기가 퉁 튕겨 올라 복근을 때렸다. 초원은 매끄러운 살기둥을 발끝으로 누르고 훑어 올렸다.
“하아, 재밌어요?”
승준은 초원이 야릇한 발장난을 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갑자기 움찔하더니 초원의 발을 쥐어 올렸다. 발끝에 뜨거운 입술이 닿자마자 떨어지고, 초원의 레깅스와 팬티가 한꺼번에 벗겨져 침대 아래로 내던져졌다. 이 남자, 인내심도 같이 내던진 게 분명했다.
“으응, 흡, 하아….”
곧 두 사람은 서로의 목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입술을 포개고 혀를 섞었다. 그사이 무거운 배 아래로 승준의 손이 미끄러졌다. 오일로 푹 젖은 손끝이 음순을 벌리자마자 엄지가 음핵을 찾아 눌렀다.
“아읏….”
음핵을 굴리는 손길은 예전보다 부드럽고 느릿했지만 초원이 느끼는 쾌감은 전보다 훨씬 강렬했다. 아찔한 느낌이 크게 치솟을 때마다 허리를 틀어 절정을 미루는 게 초원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이젠 몸이 무거워 아무리 몸을 비틀고 들썩대 봐야 손길을 피할 수가 없어 승준이 보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가 버리는 것이다.
“조금, 만… 살살….”
어깨를 쥐며 사정했더니 승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미 살살 굴리는데 어떻게 더? 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으응… 이대로 하면….”
흥분해서 실수할 것 같은데. 어제처럼.
곤란한 얼굴을 하며 앓는 소리를 냈더니 승준이 알아듣고 다리 사이를 눈짓했다. 타월이 있으니 마음껏 실수하라는 뜻이었다. 이럴 땐 정말이지 인정사정 안 봐주는 그 지독한 팀장님이랑 결혼한 게 실감이 났다.
초원이 계속 끙끙 앓으며 무거운 몸을 들썩였더니 그제야 손길이 변했다. 엄지 끝이 아닌 가운데의 도톰한 살이 음핵을 지그시 눌렀다.
훨씬 버틸 만해져서 숨을 돌리자 그는 초원이 귀엽다는 듯 뺨을 입술로 지분댔다. 얄미워서 귓불을 이로 살짝 깨물었더니 페니스가 움찔 들썩이며 아랫배를 두드렸다. 살갗을 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초원은 더더욱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몸이 무거워서 삽입은 피한 지 꽤 됐다. 저 맛있는 걸 못 먹고 굶었다는 거다.
손가락이 그동안 수고했지만 그걸로 쑤시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 남자의 손가락이 굵고 길어봤자 페니스만 할까.
“으응….”
보채는 듯한 신음에서 안달 난 마음을 느낀 건지 습관처럼 손가락 두 개가 꽉 오므라든 살을 헤집고 안으로 더듬더듬 들어왔다. 늘 그렇듯 빽빽하게 좁아 든 속살을 가위질하듯이 벌리고 초원이 잘 느끼는 감각점을 두꺼운 손끝이 능숙하게 문질러댔다.
“아흐….”
벌써 눈앞이 아찔해지더니 발끝이 곱아들었다. 좋아 죽겠다. 너무 좋은데 뭔가 모자라다. 꽉 차는 그 느낌이 너무 그리웠다.
“의사 선생님.”
손으로 음부를 틀어쥐고 속살을 손가락으로 휘젓던 승준이 느닷없는 호칭에 초원의 다리 사이에 있던 시선을 들어 눈을 맞췄다.
“주사 맞고 싶어요.”
막상 이런 말을 하고 나니 초원은 부끄러워져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슬쩍 벌린 손가락 사이로 눈만 빼꼼 내밀고 있는데도 승준의 눈에는 초원이 배시시 웃고 있는 게 똑똑히 보였다.
세상에 주사 맞고 싶다는 환자가 어딨어.
“홍초원 환자님, 침대에 누우세요.”
승준은 웃음을 참으며 초원의 역할극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몸이 무거워 등을 대고 누우면 힘들어하는 여자를 그는 옆으로 돌려 눕히곤 뒤에 몸을 나란히 포개어 누웠다.
“엉덩이 내밀어야죠. 그렇지.”
그는 초원의 엉덩이를 당겨 그의 하체에 밀착시키고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오일이 여기까지 흐르기라도 한 것처럼 미끌미끌했다.
“다리 벌리세요.”
초원의 다리 한쪽을 위로 들며 귓가에 속삭이는 순간 초원이 풋, 웃더니 새초롬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주사를 맞는데 다리는 왜 벌려야 하나요?”
“다리 사이에 맞는 주사거든요.”
승준은 초원의 허벅지 사이에 길게 걸쳐진 성기를 쥐고 그 끝을 질구에 맞췄다. 뭉툭한 끝을 살짝 밀어 넣자 오므라들어 있던 속살이 찔꺽 벌어지는 소리를 내며 그를 꿀꺽 받아먹었다.
“아흣….”
초원은 벌써 느끼는지 등허리를 바르르 떨며 아래를 조였다. 보들보들하고 촉촉한 살이 선단을 꽉 틀어쥐자 승준의 입에서도 앓는 신음이 튀어 나갔다. 끝까지 밀어 넣고 정신없이 흔들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한나야, 제발 빨리 나와.
초원의 가슴 밑으로 팔을 둘렀다. 묵직한 살덩이가 그의 팔뚝에 내려앉는 느낌이 좋았다. 그는 초원의 상체를 끌어안은 채 다른 손으로는 허벅지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고 초원의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파고들어 갔다.
“너무, 읏, 깊으면 말해요.”
“아, 흐읏….”
굵다란 페니스가 좁은 길을 느릿느릿 벌리고 들어오더니 기어코 초원의 틈을 꽉 채웠다. 위에서는 아이가 누르고 밑에서는 이 남자가 누르니 압박감이 배가 되었다. 삽입만 했을 뿐인데 벌써 타월을 흥건하게 적셔 버릴 것만 같았다.
“주삿바늘이, 흣, 너무 굵고 긴, 데요, 선생님.”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아뇨, 오래 참고 싶어요. 저 주사 맞는 거 좋아해요.”
초원을 달래듯 뺨에 입을 맞추던 남자는 결국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웃었다.
“선생님, 근데 주사기 안에 뭐 들었어요?”
“한 번 맞으면 9개월 동안 배부르게 해주는 거 들었어요.”
이번엔 초원이 웃음을 터트릴 차례였다. 한동안은 초원의 상황극에 어색해하더니 이젠 너무 잘 받아치다 못해 한술 더 뜬다.
“9개월 전에 나한테서 주사 맞은 거 기억 안 납니까.”
가슴 아래에 감겨 있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 배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배가 이렇게 불렀잖아요.”
“그 주사 너무 많이 맞아서 어느 거였는지 헷갈렸어요.”
“그나저나….”
“하읏….”
배를 어루만지던 손이 자연스레 위로 올라와 말랑한 살덩이를 감싸 쥐었다.
“홍초원 환자님, 주사는 엉덩이에 맞는데 상의는 왜 벗으셨죠?”
“으응, 선생님… 거긴 검사, 안 해주셔도, 아!”
젖꼭지를 덥석 물리고 쪽 빨렸다. 승준이 불시에 상체를 일으키며 배 속에 묻혀 있던 성기가 크게 돌아갔다. 내벽을 거칠게 긁는 쾌감에 초원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 아, 아흑….”
승준은 초원의 가슴 끝을 빠는 그 자세 그대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 남자, 재주 좋게 아기와 가까운 곳은 피해가며 내벽을 찔렀다.
반쯤 꽂혀 있던 성기가 깊숙이 박혔다가 끝까지 뽑혀 나오길 거듭할 때마다 찔걱찔걱, 다리 사이에서 젖은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이게 다 오일 탓이라고 해 봐야 아무도 속지 않을 것이다.
위로 들린 다리가 벌써 파들파들 떨렸다. 발끝이 곱아드는 건 절정의 전조였다.
“하윽, 내가….”
“응?”
“내가 오래 참고, 싶다고, 아흑, 그랬는데, 아흐흑!”
하지만 이 남자에게 박히면서 참고 싶다고 참아진 적이 있었나. 초원은 순식간에 교성을 지르며 가 버렸다.
“하아… 하아….”
숨을 할딱이는 소리만 들리던 것도 잠시였다. 다시 삐걱삐걱 침대가 울고,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침실에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출렁대던 가슴이 승준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고, 그가 흥분을 못 참고 움켜쥐는 바람에 오일로 미끌미끌 젖은 엉덩이가 그의 하체에 찰박찰박 부딪히는 소리도 못지않게 요란했다.
허벅지 안쪽을 더듬어대고, 시트 위에 널브러진 손을 짓눌러 깍지를 끼고, 뺨을 감싸 쥐곤 입술을 삼키고. 승준의 발정 난 손 탓에 초원의 몸에서 오일 범벅이 되어 번들거리는 곳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러다 ‘의사 놀이’가 끝나갈 즈음엔 또 어젯밤처럼 두 사람의 온몸이 번들번들, 미끌미끌했다. 초원을 뒤에서 끌어안은 남자가 땀에 젖은 이마를 그녀의 뺨에 맞대더니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을 귓가에 쏟아냈다. 이제 초원은 이 남자가 사정할 때마다 내는 앓는 소리만 들어도 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하아….”
승준은 숨을 잠깐 돌리기 무섭게 초원의 뺨부터 어깨까지 입술로 더듬어 내려갔다. 여전히 절정의 여운에 푹 젖은 살갗에 뜨거운 입술이 닿을 때마다 찌르르한 전율이 퍼지며 소름이 돋아 올랐다.
역시나 입술의 종착지는 초원의 가슴이었다. 보드라운 살덩이를 빨아 당기고 핥던 입이 점점 정점으로 향하더니 단단하게 뭉친 살점을 말캉한 혀가 휘감았다.
“우리 선생님, 하아, 내 가슴 이제 곧 애기한테 뺏길 텐데 섭섭하시겠다.”
승준은 젖꼭지를 부드럽게 당겨 빨다 말고 피식 웃었다.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코코넛의 단내가 나는 입술이 곧바로 포개어졌다.
초원은 키스를 나누는 내내 승준의 뺨부터 목덜미, 어깨까지 손으로 더듬어 내려가다 미소 지었다. 피부가 매끈했다.
환생꽃이 아니었더라면 이 남자, 목숨을 건졌더라도 장애나 흉터가 남았을 것이다. 다행히 몸에서 사고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진 건 물론, 심지어 원래 있던 흉터까지 없어졌다.
저도 모르게 승준의 왼쪽 어깨 뒤를 더듬던 초원이 불현듯 입술을 떼고 외쳤다.
“어? 어깨에 있던 흉터도 없어졌네요?”
그 찰나 초원의 목덜미를 지분대던 입술이 멈칫했다.
“…난 어깨에 흉터 같은 거 없었는데.”
승준은 다시 태연하게 애무를 이어가며 시치미를 뗐다.
“대체 어떤 놈이랑 착각한 거야?”
“아닌데. 화살에 맞은….”
“화살? 화살을 어디서 맞아요?”
“아, 말이 안 되네. 꿈꿨나?”
승준은 픽 웃으며 속으로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제발 꿈이라고 믿어.
* * *
곤히 잠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원은 손을 뻗었다. 침대 위에 힘없이 펼쳐져 있던 손에 제 손을 포개자 남자는 잠결에도 반사적으로 초원의 손을 쥐었다. 밤만 되면 손이 차가워져서 자다가 이 남자의 손을 쥔 적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몸에 익은 모양이었다.
만삭인 탓에 요즘 초원은 자다 깨는 일이 잦았다. 그러곤 다시 잠들 때까지 승준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는 게 어느새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남자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는 것 또한 습관이 되었다.
뜨거운 체온을 느끼고 있자니 마음이 놓였다. 고개를 가까이 숙여 같은 베개를 베자 숨결이 느껴졌다. 평온하게 감긴 눈꺼풀을 응시하던 초원은 결국 충동을 못 참고 입술을 포갰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벌어졌다. 초원이 입술을 떼자 그 사이로 나른한 한숨이 쏟아져 나오더니 승준이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깊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초원이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더니 그의 입꼬리도 위로 휘었다.
“이런 식으로 내 단잠을 방해하는 건 언제나 환영이지.”
그가 팔을 뻗어 초원의 어깨를 감았다. 배가 나온 탓에 이젠 제대로 끌어안지도 못하고 서로 목을 휘감은 채 이마만 맞대는 게 다였다. 초원의 이마에 제 이마를 비비고 코끝에 입을 맞춘 승준이 물었다.
“환자님, 주사 효과는 있습니까.”
“아뇨, 효과 전혀 없는데요. 어떻게 된 거죠? 환불해 주세요.”
“환불은 어렵고 한 번 더 놔 드릴 순 있습니다.”
그 순간 음란 마귀가 초원의 머릿속에서 질린다는 듯 “또 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술을 포개고 서로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또 제대로 달아오른 승준이 초원을 일으켜 티셔츠를 벗기던 찰나였다.
“어?”
아래에서 뭔가가 왈칵 쏟아지는 느낌이 났다.
“왜?”
잠시 화장실에 갔던 초원이 긴장한 얼굴로 돌아왔다.
“병원 가야 할 것 같아요.”
“악!”
초원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승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을 으스러트릴 듯이 쥔 탓은 아니었다. 현대에는 마취제가 있어서 좀 나을 줄 알았더니. 무통 주사도 맞는 때가 정해져 있단다.
안쓰러워 죽겠다. 승준은 아내가 진통을 참는 내내 옆에서 허리를 주물러 주었다.
“하아….”
진통이 잠시 멎자 숨을 돌린 초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붙였다.
“둘째는 승준 씨가 낳아요.”
초원을 확인하러 왔던 간호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승준은 계속해서 허리를 주물러 주며 중얼거렸다.
“안 낳는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거야 그 아이와 한 약속이 있으니까.
“아악! 왜 벌써 와!”
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또다시 밀물처럼 밀려왔다. 분명 처음 겪어 보는 아픔인데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이상하다. 진통의 주기가 짧아지고 아이가 나올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이상하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마치 이 모든 걸 이미 겪어 본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무통 주사가 천국의 문을 열어준 순간 잊어버렸던 기시감이 아이가 나오기 시작하자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단순한 기시감이 아니었다. 몸이 기억이라도 하듯이 굴었다.
“산모분, 초산 맞죠? 근데 둘째 낳는 산모들보다도 힘 잘 주시네.”
“순산 체질인가보다.”
초원은 의사가 엄지를 척 들며 칭찬을 퍼부어도 웃지 못했다. 의사의 얼굴에 자꾸만 다른 얼굴이 겹쳐지더니 환청까지 들렸다.
“공주님, 멈추시면 안 됩니다. 조금만 더 힘주세요!”
의사만 그런 게 아니었다. 분만실이 자꾸만 언젠가 꿈에서 본 중세 유럽의 침실과 겹쳐졌다.
“힘주세요. 거의 다 나왔어요. 이제 두 번만 더, 더, 더, 더.”
의사는 “하나만 더!”를 열 번 외치는 필라테스 강사만큼이나 지독했다. 초원은 딴생각을 잠시 제쳐두고 눈을 질끈 감으며 힘을 주었다. 그러다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번쩍 눈을 떴다.
“딸이네요. 아유, 예뻐라.”
간호사가 갓 태어난 아이를 초원의 품에 안겨주었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우는 아이의 얼굴에 시선이 닿는 순간이었다. 몸이 쪼개어지는 듯하던 진통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또 다른 무언가가 해일처럼 밀려 들어와 초원을 덮쳤다.
그럴 리 없는데 품에 안긴 아이의 얼굴이 익숙했다. 지금의 얼굴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 10주는 더 어리던 때의 너무 연약해 만지기조차 두렵던 얼굴부터, 초점 없는 갈색 눈을 엉뚱한 곳으로 향한 채 천사처럼 웃던 마지막 얼굴까지. 갓 태어난 딸의 얼굴에 익숙하고 그리운 아이의 얼굴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그러다 점점 이 아이와는 겪어 보지 못했으나 초원은 겪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기 이름은 언제 지을 거예요?”
“글쎄요? 급할 거 없으니까 좋은 이름 생각나면….”
“…는 어때요?”
잊었던 내 딸…. 초원은 아이를 멍하니 내려다보다 기억 속의 이름을 불렀다.
“한나야.”
조승아, 잘 가. 조한나, 반가워.
딸을 안은 채 미소 짓는 승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뽀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이는 전생의 기억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랬더라면 오빠가 제게 뽀뽀를 했다며 토했을 테니까.
웃으며 고개를 든 그는 기억을 되짚듯 딸의 얼굴을 손끝으로 덧그려 보았다.
제 언니랑 똑 닮았네.
잃어버린 한나가 돌아왔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여도 될 만큼 아이는 두고 온 딸과 이목구비가 닮아 있었다.
이 아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아이와의 앞날에는 슬픈 결말이 아닌 열린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승준은 못다 준 사랑을 아낌없이 주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한번 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다 고개를 든 그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있는 초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부터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어디 아프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젓더니 침대 발치에 앉은 그와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넋이 나간 것만 같았다.
지쳐서 그러는 건가.
“먹을 거 사 올까요? 아니면 가방에서 간식거리라도 꺼내 줄까요?”
초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한숨 잘래요?”
이번에도 고개를 저은 초원이 그를 또 물끄러미 바라보다 여태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왜 그랬어요?”
그 순간 승준은 불길한 기시감을 느꼈다.
“왜 그랬어요?”
언젠가의 악몽에서 기억을 되찾은 초원이 똑같은 말을 했었다.
“아이를 버린 남자는 아빠 자격이 없어! 그런 짓을 하고도 날 뻔뻔스럽게 속여 결혼까지 했다니, 이건 사기 결혼이야!”
그러곤 한나와 함께 그를 떠났다.
“초원 씨….”
지금 마주 앉은 초원도 악몽 속의 초원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소설에서 돌아왔던 순간의 그 슬픈 눈 말이다.
기억을 찾았구나.
그는 한나를 더욱 바짝 끌어안으며 초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쿵쿵 거칠게 뛰는 박동에 벌써 귀가 먹먹했다. 그토록 심장이 빠르게 뛰는데도 피가 멎은 기분이었다.
“미안해요.”
초원이 원치 않는데 현실로 데려온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긴 채 다시 결혼한 것. 실은 그 어느 것도 후회하지 않으나 초원에게는 배신처럼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렇게 뒤늦은 사과를 쏟아내는데 눈에 띄게 떨리는 손을 초원이 덥석 잡으며 그를 당겼다.
“아니, 난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그럼?”
“왜 말 안 했어요?”
왜 우린 잃은 추억이 있다고,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왜 그저 저를 바보처럼 지켜보기만 했냐고. 아픈 말을 초원은 눈물과 함께 쏟아냈다.
그제야 승준은 초원이 저를 떠나지 않을 걸 확신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떨림이 멎은 손으로 초원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초원 씨가 괴로울 테니까.”
“그렇다고 그 괴로운 기억을 혼자 다 떠안고 살았어요?”
“나도 뒤늦게야 기억 찾았어요.”
그가 언제 억제되었던 기억을 되찾았는지를 알게 된 초원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럼 그때 말하지!”
“어떻게 말해. 어떻게 그 기억을 찾아 줘요.”
아이 하나를 되찾고서야 기억을 찾은 지금도 저 울먹이는 얼굴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데.
“그리고 초원 씨가 기억했더라면 날 쳐다보지도 않았겠지.”
씁쓸한 목소리였다. 그가 지금 현실로 되돌아왔던 날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초원은 직감했다. 그리고 이 남자, 아직도 그날의 오해 속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 사랑해서 그런 거잖아요.”
초원은 그에게 다가가 그동안 그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있었을 어깨에 기댔다. 기억이 있었다면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란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이 남자를 위해 외면했을 것이다.
“그땐 눈앞이 깜깜해서 다 잊고 싶었어요. 승준 씨가 뭘 원하는지 뻔히 아는데, 나도 그걸 원하는데 난 그럴 능력이 없어서….”
“알아요. 나도 이젠 알아요.”
승준의 마음이 또 한 번 미어졌다. 그 순간은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솔직히 털어놓기 힘들었을 그 심정을 알게 된 지금은 그저 이 여자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뇨, 말 안 한 내가 미안하죠. 다시 결혼하겠단 약속, 지키지 않은 것도 미안해요.”
“결국엔 지켰잖아요.”
험난한 길이었으나 결국엔 그 끝에서 다시 하나가 된 걸로 충분했다. 초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왼손 약지의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똑같은 반지를 낀 두 손이 단단히 얽혔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이젠 미안하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에게 속삭여야 할 때였다. 승준의 품에 안긴 한나가 잠에서 깼는지 자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홀린 듯이 딸을 지켜보던 둘은 아이가 입을 활짝 벌리며 하품을 하는 순간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먼 길을 돌아 되찾은 행복이었다.
* * *
“아니, 예지력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잡으라는 거예요?”
반년간 이어진 ‘천이안 체포 작전’에 지칠 대로 지친 박 주임이 회식 때 분통을 터트리던 순간 승준은 문득 떠올렸다.
그럼 수배자의 그 대단한 예지력을 이용해서 잡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다음 날 그는 천이안의 신상 정보를 검토해 보다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군 미필.
그 즉시 그는 상부와 천계, 그리고 병무청까지, 유관기관과 논의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군 면제는 무리고 대체 복무 제도를 활용할 재량이 청에 있다는 걸 알아냈다. 즉, 천이안이 예지력으로 2년간 국가에 봉사하면 천기누설 건을 무마해 주는 게 승준의 아이디어였다.
천이안에게 이를 갈던 천계 쪽 간부들을 설득하는 게 병무청을 설득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던 건 뜻밖이었다. 옥황상제가 지지하던 대선 후보가 당선된 덕에 노여움이 풀려 천계에서는 앞으로 입단속만 잘해주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그렇게 군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천이안이 오늘 제 발로 본청으로 걸어 들어왔다. 박 주임은 그동안 쫓느라 낭비한 시간이 아깝다며 허무해했다.
그렇게 오늘 면담과 등록을 끝내고 천계 담당자와 통화까지 마친 후 승준은 퇴근하는 길이었다. 회사 건물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와 차를 향해 걷는데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올 때 빵]
초원의 메시지를 확인한 승준은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한나야, 아빠가 간다.
차 키를 꺼내 들려던 찰나였다. 승준의 차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선녀님?”
청혜 선녀였다. 우두커니 서 있는 선녀의 옆에는 커다란 캐리어가 세워져 있었다. 마치 집 나온 사람처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적중했다.
“…알고 보니 삼신 자리에 내정자가 있었더군.”
천계를 현대화한다더니 현대 대한민국의 병폐까지 따라 한 모양이었다. 공채는 선녀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허울일 뿐이었는데 진심으로 임하다 뒤통수를 맞은 선녀들이 환멸을 느껴 우르르 휴직했다는 것이다.
어쩐지. 요즘 천계 쪽이 일손 부족에 시달린다며 담당자랑 연락이 잘 안 된다 싶었다.
“그리하여 내 인계에 한동안 머물 생각인데 이곳에 인연이 있었던 자가 자네와 자네의 부인뿐이라….”
승준의 집에서 머물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또 한 번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선인의 한동안은 최소 몇십 년일지도 모른다.
“도와드리고 싶지만 저희 집에는 어린 아기가 있어서….”
정중하게 거절하며 갈 만한 다른 곳은 없는지 물었지만 선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일단 호텔에서 지내고 있으면 초원과 상의해서 월세라도 알아봐 드린다고 말하던 때였다.
“자네가 진 빚이 있지 않은가.”
빚이라니. 승준의 기억에 갚지 않은 빚은 없었다.
“지난여름에 도와주신 건 저희가 써 드린 추천서로 다 갚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선녀는 결국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인간에게 애정이 있었다’라는 진술이 담긴 추천서를 초원과 승준에게서 얻어 갔다. 물론 서천꽃밭에 잠입시켜줬다는 내용은 쏙 빼고 썼다.
“그 빚 말고, 자네를 서천꽃밭에 보내주었던 일 말이네.”
그 찰나 승준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자취를 감추고,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건 제가 진 빚이 아닙니다.”
“결혼 생각 없다더니….”
[그렇게 됐어 ㅎㅎ]
연주가 어색함과 멋쩍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메시지보다 먼저 보낸 건 모바일 청첩장의 링크였다. 현우는 링크를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핸드폰을 끄고 허탈하게 웃었다.
언제나 옆에 있을 것만 같았던 연주였다. 잃고도 잃은 줄 모르고 앓다가 언제나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초원을 잃었다. 그러다 결국 그는 혼자 남았다.
잃음으로써 잃지 않는다는 무슨. 잃으면 그걸로 끝인 거다.
어쨌거나 누구에게든 제대로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겁쟁이였다. 겁을 아는 겁쟁이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겁을 모르는 바보의 몫인가 보군.”
언젠가 선녀가 한 말을 떠올리던 찰나였다.
띵동.
오피스텔의 벨이 울렸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문을 열자마자 현우는 당황했다.
“자네, 빵 좋아하는가.”
나 지금 모르는 사이에 소환술이라도 쓴 건가? 생각하자마자 나타나다니.
현우는 커다란 빵 봉지를 들어 올리는 선녀를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다 물었다.
“저희 집은 어떻게 아셨어요?”
“조 팀장이 데려다줬네.”
“네?”
“빚 갚게.”
알고 보니 그의 채권자는 둘이었다.
초원은 벽난로 속에서 춤추는 불꽃을 바라보다 웃었다.
“그래, 이래야 수유할 맛이 나지.”
벽난로 앞의 폭신한 소파에 앉아 딸에게 젖을 먹인다. 그 옛날과 똑같았다.
TV 속 벽난로라는 사소한 차이는 무시하기로 했다.
“분위기만 똑같으면 되지. 그렇지, 한나야?”
초원은 TV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욕심껏 젖을 빠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머지않아 100일을 앞둔 딸은 더더욱 소설 속의 한나와 닮아 있었다.
“한나야, 엄만 다신 널 못 안아 보는 줄 알았어.”
토실토실한 볼을 손끝으로 쓰다듬자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초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가슴에 얹어 두었던 손을 뻗어 엄마의 얼굴을 더듬었다.
기쁘게 웃던 찰나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초원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할 듯 딸을 끌어안다가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급차잖아.
초원은 영문을 모른 채 엄마 젖에만 정신이 팔린 아이에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한나야, 사라지면 안 돼. 이번엔 꼭 엄마라고 불러 줘야 해. 엄마랑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가 초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나의 손가락은 너무 작아서 걸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혼자 바보같이 웃는데 허공에 들려 있던 손가락을 한나가 덥석 붙잡았다.
눈이 멀쩡하다는 뜻이었다. 초원은 애틋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약속한 거야.”
배가 부른지 먹는 게 느려졌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아빠 왔나 보다.”
현관에서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 공주님들.”
곧장 거실로 온 승준이 두 사람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젠 저더러 공주라고 해도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게 됐다. 공주님 맞으니까.
“한나 오늘 잘 놀았어?”
젖꼭지에서 입을 뗀 아기가 대답이라도 하듯 우우, 하고 옹알이를 하자 승준의 입가에 미소가 크게 걸렸다.
“아빠가 손 씻고 와서 안아 줄게.”
승준이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놓고 욕실로 사라지자 초원은 아이를 세워 앉은 채 카펫에 앉았다. 빵을 뭐 이렇게 많이 사 왔지? 아무리 내가 빵순이라지만. 그가 커피 테이블에 놓고 간 걸 뒤지던 초원이 외쳤다.
“헐, 감성돔이다!”
오늘은 승준이 초원에게 감성돔을 사 준 지 2년째 되는 날이었다. 달리 말해 밸런타인데이이자 한나의 잉태 기념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곧 저녁이 차려진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하지만 승준은 맛있는 걸 앞에 두고 딴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나, 아빠 해 봐.”
“아아-.”
“그렇지. 아빠.”
100일도 안 된 아기에게 아빠라는 말을 계속 가르치는 거였다.
“‘빠’는 근처에도 못 갔는데 그렇지는 무슨 그렇지예요.”
초원은 피식 웃으며 승준의 입에 곱게 깐 메추리알을 넣어주었다. 저렇게 좋으면서 그곳에선 애정을 억누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나가 예뻐 어쩔 줄 모르는 저 남자를 보고 있자면 그 옛날, 노아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했던 일이 너무도 미안해졌다.
그렇게 요즘 따라 부쩍 큰 한나의 예쁜 짓을 구경하며 저녁을 먹었다. 그러곤 후식으로 승준이 사 온 딸기를 먹던 초원이 중얼거렸다.
“이건 사기야.”
“응?”
“이 남자 진짜 어쩜 이렇게 가정적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결혼 2회차였네. 내 감동 물어내요.”
그의 품에서 잠든 한나의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던 승준이 픽 웃었다.
“난 초원 씨가 기억 찾으면 나 버릴 줄 알았는데.”
사실 점점 기억을 찾아가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는 말을 들은 초원은 그가 언젠가 했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내가 무슨 짓을 했든… 그리고 앞으로 무슨 짓을 하든… 초원 씨 사랑해서 그런 선택을 한 거, 잊지 말아 줘요.”
그래서 그런 말을 했었구나.
“승준 씨.”
“응?”
“노아가 독살당할 뻔했던 때 기억나요?”
아직 되찾지 못한 아이와의 가슴 아팠던 순간을 입에 올리자 승준의 눈빛이 서글퍼졌다. 지금 그가 느끼는 아픔은 초원이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승준의 옆으로 다가가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때 한 다짐이 있어요.”
승준의 사랑이 노아를 살린다면 그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하든 용서해 줄 거라고 다짐했었다.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지켜야 했으나 절망에 눈이 멀어 그러지 못했다.
“앞으론 꼭 그 다짐 지킬게요.”
“지킬 일 없게 할 거예요.”
초원의 이마에 입술이 길게 닿았다.
“아, 그런데 초원 씨한테 섭섭한 거 있어.”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밝은 목소리였다.
“뭔데요?”
“난 기억 억제 풀리는 트리거가 키스였는데, 초원 씨는 한나였잖아.”
자신은 현실에서도 애들에게 밀려 2순위라며 답지 않게 투덜대는 남자를 올려다보던 초원이 실소했다.
“마지막 트리거가 한나였던 거죠. 첫 트리거는 승준 씨거든요?”
“첫 트리거?”
초원은 중요한 말을 할 때처럼 똑바르게 앉아 승준을 마주 보았다.
“내가 어쩌다 현우 선배를 좋아하게 된 줄 알아요?”
계기는 가시를 손수 떼어 낸 장미꽃이었다. 즉, 승준과 겪었던 상황을 현우와 겪는 바람에 트리거가 잘못 발동해 승준에게 느끼는 애정을 엉뚱한 남자에게서 느끼는 걸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 고백을 들은 승준은 깨달았다. 여태 현우를 질투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자기 자신을 질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후로 이 여자에게는 자신밖에 없었던 셈이니까.
“아아, 진짜.”
어려운 고백을 마친 초원이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힌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리 빠져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내가 엉뚱한 남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걸 승준 씨가 지켜봤다는 거잖아요.”
심지어는 그 엉뚱한 남자를 살리려고 남편이랑 싸웠어! 쪽팔려!
“왜 말 안 했어요, 진짜. 딴 남자한테 자기 여자 뺏기며 흥분하는 몹쓸 취향이라도 있어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민망해서 죽겠다고 흑흑, 우는 시늉을 하는 초원을 달래던 승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 내가 승준 씨였으면 내가 정말 얄미웠을 거야.”
“흠… 가끔?”
초원이 앓는 소리를 냈다. 민망해하는 게 귀여워서 계속 놀리던 승준이 초원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실은 어쩌면 다른 남자랑 행복한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왜요?”
“새드엔딩일 게 뻔하다는 말이 걸려서….”
“아….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제가 언젠가 했던 그 말은 불임 때문에 한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녀와의 새드엔딩을 겪은 바 있는 남자는 단단히 오해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초원 씨가 엉뚱한 남자를 따라다닌 덕에 다시 이렇게 한나를 안아 볼 수 있게 됐으니까. 결과적으론 잘된 일 아닌가?”
초원이 현우를 살리겠다며 그와 싸워가며 치유 능력이 있는 아이를 구출하는 바람에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노아도, 노아도 언젠가 안아 볼 거예요.”
초원은 승준의 품에서 잠든 딸을 쓰다듬으며 아직 되찾지 못한 아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약속했던 해피엔딩은 아직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언젠가? 말 나온 김에 만들지, 뭐.”
승준이 한나를 바운서에 눕히더니 초원은 소파에 눕혔다. 한나가 태어난 지 이제 겨우 석 달. 둘째를 갖기엔 이르디이른 때이지만 두 사람은 웃으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언젠가 그 아이를 안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에필로그: 완벽하게 지루한 하루
개쓰레기 요일.
초원은 요즘 월요일을 개쓰레기 요일이라고 불렀다.
회사 가기가 귀찮긴 하지만 개쓰레기라고 부를 정도인가? 승준은 여태 공감하지 못했으나 오늘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이 툭 튀어나오려 했다.
개쓰레기 요일 아침부터 개쓰레기 회의라니.
생산성 없는 간부급 회의에 소집된 승준은 지루함을 참을 수 없었다. 발표자가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잘못 업로드하는 바람에 다시 찾는다고 버벅대는 사이 그는 자료 귀퉁이에 바람개비를 그렸다. 초원에게서 옮은 습관이었다.
그러는 사이 다른 간부들은 잡담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 김 팀장님도 해외 기관에서 전문가를 데려와 보시지 그래요? 우리는 이번에 미국 쪽에 비슷한 사례가 있어서 우리 데이터 넘겨주는 조건으로 그쪽 IT 개발자 데려왔잖아요.”
“개발자는 왜요?”
“그 뭐냐. 소설 빙의 현상 있잖습니까.”
물체팀 정 팀장이 대답하는 순간 마주 앉은 승준의 손이 멈칫했다.
“그거 코드 분석한다고요. 그게 한국말 모르는 외국인은 빙의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해외 기관에서 데려왔지.”
“그래서 뭐 좀 나왔어요?”
“어… 얼마 전에 그 뭐지. 아, 클라우드 서버 주소하고 로그인에 쓰는 ID랑 비번이 나와가지고….”
“오, 클라우드 서버요?”
“서버 확인해 보니까 이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될 때마다 데이터를 거기다 보내서 저장해 놨더라고요.”
데이터? 승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막, 무슨 언제 빙의가 시작됐고 어떻게 노출 대상 정보를 파악했고. 이런 정보가 다 들어 있더라니까요? 현상이 끝날 때까지 기록을 쭉 적어 놨는데….”
이쯤에서 승준은 잠자코 듣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럼 소설 내용도 다 쓰여 있겠네요.”
“아니, 그 정도로 자세하진 않고 그냥 왜 컴퓨터에서 쭉 기록해 놓는…. 어… 뭐라더라.”
“로그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딱 그 정도로만 써 놨더라고요. 그래도 그거라도 연구하면 뭐가 나올까 싶어서….”
그 이후로 정 팀장이 한 말에는 유용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쓸모없는 회의 내내 승준은 같은 말만 곱씹었다.
“현상이 끝날 때까지 기록을 쭉 적어 놨는데….”
모든 일이 적혀 있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프롤로그와 결말만으로도 초원의 명예가 달린 문제였다. 데이터를 말소시켜야 한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로그를 손에 넣으면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이 두 번째로 든 생각이었다.
삼신에게 둘째는 아들로 점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낳은 노아는 요즘 아장아장 걸음마를 뗐고 한나는 미운 세 살이라는 마의 시기에 들어섰다. 둘 다 소설 속 아이들과 똑 닮은 걸 보며 노아와 한나가 모두 돌아왔다고 말하지만 그건 사실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떠난 후에 소설 주인공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이들은 어떻게 됐으려나….”
얼마 전 초원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자니 서버 정보가 더욱 절실해졌다.
승준은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물체팀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그러나 물체팀이 가진 파일에 클라우드 서버 주소와 로그인 정보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핑계를 만들어 연구소까지 찾아갔다. 소설 빙의 현상의 분석이 이뤄지는 방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물체팀의 시설 신청 기록만 찾아보면 그만이었으니까.
해외에서 온 연구원은 초면임에도 승준을 반가워했다. 독방 감금 신세나 다름없어 꽤나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컴퓨터에 USB 스틱을 꽂아 둔 상태로 한국말을 아는 사람이 화면을 본다면 현상에 노출될 테니 당연히 아무도 얼씬하지 않았을 거다. 승준도 화면을 보고 빙의해 버릴까 봐 USB 스틱은 컴퓨터에서 뽑아 달라고 요청한 후에야 연구실에 들어갔다.
연구원은 한눈에 봐도 사회 초년생으로 보였다. 거기에 외국인이라 이곳 절차를 모르는 탓도 한몫했을 것이다. 승준이 꽤나 높은 사람으로 보였는지 상대는 그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Can you access the server?” (서버에 접속해 주세요.)
그 말에 연구원은 뽑아 뒀던 랜선을 노트북에 꽂았다. 서버에 접속하는 건 간단했지만 두 사람의 로그를 찾는 데는 시간이 꽤나 걸렸다. 찾고도 그 길고 긴 시스템 로그를 모두 인쇄하는 데 또 한참이 걸렸다.
이 세상에서 두 사람만이 아는 그 기나긴 시간이 담긴 기록을 드디어 손에 쥔 승준은 마지막 장을 확인하자마자 미소 지었다. 이걸 본 초원도 웃길 바랐다.
“Thanks a lot.” (고마워요.)
“No problem.” (뭘요.)
두 사람의 로그 파일을 서버에서 영구히 삭제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후에야 작별 인사를 하며 일어서던 찰나였다. 연구원이 랜선을 뽑더니 USB 스틱을 노트북에 꽂아버렸다.
그 순간 메모장이 열리며 승준의 눈에 한 줄의 문장이 들어왔다.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
젠장할. 이번엔 무협이네.
“Oops! Sorry.”
이게 쏘리로 퉁 칠 일이냐.
지친 한숨을 내쉰 승준은 연구원에게 부탁했다.
“If I die, please tell my wife that I love her across all the universes.”
(내가 죽거든 내 아내에게 그 모든 차원을 넘어 사랑한다고 전해 줘요.)
왜 하나의 차원이 아닌 ‘그 모든 차원’인지 연구원은 알 턱이 없었다.
* * *
“지금이 몇 시예요.”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트롤보다 무서운 마눌님이 중문의 턱에 팔짱을 끼고 서서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물었다. 승준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대답했다.
“9시.”
“내 말은 그 말이 아니잖아요!”
“사랑해, 초원 씨.”
그는 구두를 벗어 던지자마자 초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는 키스를 하려는 남편을 피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따져 물었다.
“왜 늦었어요?”
강호 무림을 평정하고 오느라.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쫓겨날지도 모른다.
“말도 없이! 연락도 안 되고!”
“하… 내가 이 잔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었는데.”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는 골이 잔뜩 나 자꾸만 키스를 피하는 초원에게 애걸했다.
“오랜만에 키스 좀 해 줘.”
“오랜만? 아침에 했잖아요.”
“…12시간 전이면 오랜만이지.”
초원은 승준을 올려다보다 눈매를 좁혔다. 이 남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애정이 절절 끓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게 초원을 몇 달은 못 본 사람 같았다.
“왜 이래요?”
초원이 술 냄새가 나나 맡아보려고 그의 입에 코를 가까이 대는 순간 승준은 잽싸게 입술을 훔쳤다. 한참 후에야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하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뭐야. 술도 안 마신 것 같은데 술 취한 사람 같잖아. 아니, 진짜. 왜 늦었냐고요. 딸기 주 담근 거 오늘 개봉식 하기로 나랑 약속했는데!”
초원에게 멱살을 잡혀 흔들린 찰나에야 승준은 아침에 한 약속을 기억해 냈다.
“아, 맞네.”
초원에겐 몇 시간 전이지만 승준에겐 몇 달 전 약속이라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가 지금 고픈 건 술이 아니었다.
“그 전에 우리 다른 거부터 하면 안 될까?”
“뭘요?”
“애들은 자죠?”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초원의 몸이 위로 번쩍 들렸다.
“앗!”
그는 초원을 공주님처럼 덥석 안아 들고 침실로 가더니 문을 잠갔다. 문은 자정을 훌쩍 넘길 때까지도 열리지 않았다. 침실에선 가쁜 숨소리와 신음,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 그리고….
“아… 죽겠다.”
초원이 다 죽어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활짝 벌어진 허벅지가 눈에 띌 정도로 달달 떨렸다. 그 사이를 떡하니 차지한 남자는 땀에 흠뻑 젖기만 했을 뿐 혈기가 넘쳤다.
“보고 싶고 하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그는 이런 말을 사랑한다는 말과 번갈아 가며 초원의 귓가에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그러면서 귓불을 굶주린 사람처럼 빨아 대고 다리 사이를 성 난 짐승처럼 박아댔다.
“아흣, 이게, 하윽, 무슨 일이야.”
소설 속에서 21살의 몸일 때도 이 남자,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무슨 짓 하다 왔어요? 발정제에 노출이라도 됐어요?”
승준이 또 한 번 사정하면서 잠시 틈이 생기고서야 물을 수 있었다. 그는 피식 웃기만 하더니 다 쓴 콘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협탁의 서랍에서 새 걸 꺼내 들었다.
미쳤다. 미쳤어.
초원은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가 다 후들거려 일어서지도 못하고 기어가는데 발목이 덥석 잡혔다. 그대로 주르륵 끌려갔다. 승준은 다시 초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가긴 어딜 가.”
다정한 짐승이 따로 없었다.
“아아… 살려줘.”
“아직 쌩쌩하잖아요.”
콘돔 포장을 찢는 소리가 들려 다리 사이를 내려다본 초원은 경악했다. 어떻게 또 세울 수가 있어.
“그 잠깐 사이에 군대라도 갔다 왔어요?”
“아니, 무림에.”
“무림?”
짝!
결국 승준은 자초지종을 말해주고 등짝을 희생했다.
“미친 거 아니야!”
“한 번 해 봐서 그런지 할 만하던데. 초원 씨가 없어서 좀 힘들었지만.”
그러고 오늘 낮 빙의되었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다들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 USB 스틱을 훔치느라 늦은 것이었다.
“해피엔딩….”
시스템 로그를 읽어 본 초원의 얼굴은 승준이 기대한 대로였다. 시스템 로그의 마지막 줄에는 해피엔딩 시나리오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어떠한 해피엔딩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승준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한 미소를 짓는 초원을 끌어안으며 다독였다.
“로그를 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한나가 아팠던 건 초원 씨도 어쩔 수 없던 일이었어요.”
시스템의 농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한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고마워요.”
마음의 짐을 덜어 주려고 그 위험천만한 짓을 했다니. 등짝을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초원은 승준을 끌어안고 고맙다는 말만 거듭했다.
“그런데….”
“네?”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 해 본 적 있어요?”
승준이 느닷없이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던 정장 재킷을 주워 올리더니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지퍼백에 넣은 것도 모자라 테이프까지 칭칭 감아 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초원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소설 빙의 현상을 일으키는 인공지능 모델이 저장된 USB 스틱이었다. 영원히 사는 방법이 든 것이기도 했다.
언젠가 생의 마지막이 다가올 때 나란히 손을 잡고 저것을 컴퓨터에 꽂는다. 그렇게 빙의하고 또 그 자리로 돌아오길, 이론적으론 무한히 반복할 수 있었다. 영생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설령 실수해 죽더라도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면 손해 볼 것 없는 일 아닐까.
그때가 되면, 훌륭하게 자랐을 소설 속의 노아와 한나를 다시 한번 보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둘은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무더운 여름 저녁이었다.
에어컨 빵빵한 집에서 토요일 내내 뒹굴거리던 네 식구는 해가 지고서야 강아지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왔다. 강아지 산책은 핑계였던 걸 보여주듯, 아파트 단지 앞 상가를 한 번 훑고 돌아온 넷의 손에는 먹을 게 하나씩 들려 있었다.
“엄마, 나도 핫도그 한 입.”
한나가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다 초원을 올려다보더니 매달렸다.
“나두, 나두.”
제 아이스크림을 먹던 노아도 폴짝폴짝 뛰었다. 누나가 먹으면 노아도 먹어야 했으니까.
“으이그, 이것들아! 핫도그 먹을 거냐고 물을 땐 안 먹는다더니!”
초원의 핫도그는 결국 아이들이 다 뺏어 먹었다.
“효자들이야, 아주. 엄마 다이어트를 이렇게 시켜 주네.”
초원의 푸념에 승준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피식 웃었다.
“그러게, 나처럼 애들이 싫어하는 걸 살 것이지.”
그렇게 괜한 소리를 했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초원에게 뺏겼다.
“그나저나 밤에 못 자면 어쩌려고 이 저녁에 커피예요?”
“인간 수면제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네 식구는 잡담을 나누며 아파트 놀이터로 어슬렁어슬렁 향했다. 초원이 아롱이를 안아 들고 구석의 벤치에 앉으며 두 아이에게 경고했다.
“아이스크림 다 먹고 놀아.”
지금 잠시 빈 그네를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된 두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무서운 속도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다섯 살인 한나는 요령껏 먹는데 세 살인 노아는 입가를 초코 아이스크림 범벅으로 만들었다. 승준은 초원의 옆에 앉으며 딸의 손에 들린 휴지를 눈으로 가리켰다.
“노아, 동생 휴지 좀 줘.”
“나 노아 아니야. 한나야! 한나라구!”
승준의 실수에 여러 번 당한 한나가 분통을 터트렸다. 예전엔 첫째가 노아였던지라 그는 습관대로 첫째를 자꾸 노아라고 불렀다.
“아이고, 아빠 벌써 치매 오나 보다. 어떡해!”
초원은 그가 말실수를 하는 이유를 다 알면서 옆에서 또 잔망을 떨었다.
곧 한나가 그네로 달려가고 누나보다 늦게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노아가 뒤따라갔다. 아이는 그 짧은 거리를 킥보드를 타고 가더니 그네에 앉아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노아는 요즘 킥보드 집착남이었다. 보고 있자면 밥도 자전거에 앉아서 먹던 소설 속의 노아가 자꾸만 생각났다.
아이는 정말 소설 속 노아처럼 무뚝뚝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순둥이였다. 누나가 쓰던 분홍색 킥보드를 군소리 없이 끌고 다니는 걸 보면 말이다.
“킥보드를 잡고 그네를 어떻게 타.”
고전하는 아들을 보다 못한 승준이 일어서서 다가갔다. 아이는 아빠가 와서 손을 내밀자 잘 지켜달란 말을 하며 킥보드를 넘겨주었다. 승준은 졸지에 핫핑크색 유아용 킥보드를 어깨에 걸친 채 그네를 밀었다.
열대야라고 해도 될 만큼 더운 날이라 한나는 금세 지쳐 엄마 옆으로 왔다. 그렇게 둘이서 수다를 한참 떨자니 더 더워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까지 다 씹어 먹고 이젠 더위를 달래 줄 게 없어진 초원은 노아에게로 다가갔다.
“뭐 해?”
노아는 아빠와 놀이터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뭘 하는가 했더니 먹을 걸 물고 줄지어 가는 개미 떼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초원은 개미에 정신이 팔린 노아의 옆에 쪼그려 앉아 물었다.
“이제 집에 가자.”
“시러.”
“덥잖아.”
“아니.”
“엄마가 덥다니까?”
초원이 더운 척했더니 노아가 손을 제 엄마의 얼굴 앞에 흔들었다. 손부채질을 해 줄 테니 버티란 뜻이었다.
기시감이 든 초원은 고개를 들었다. 승준도 초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엄마 집에 간다? 응? 노아는 여기서 혼자 살아.”
“잘 가.”
아이가 손을 위아래가 아닌 좌우로 흔들었다. 기억 속의 노아처럼.
매몰차게 가라는데 초원은 미소를 지었다. 촉촉이 젖어드는 눈동자를 응시하던 승준이 고개를 노아에게로 돌리고 제 몫의 대사를 말했다.
“노아,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아이가 그 말에는 흥미를 보이며 그를 힐끔 보자 이번엔 승준마저 눈가를 붉히며 웃어버렸다.
“집에 복숭아 있어.”
기대대로 노아가 벌떡 일어서더니 킥보드를 끌며 집을 향해 비장하게 걷기 시작했다. 초원과 승준은 일어서지 못하고 눈물 글썽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진을 온종일 빼놓던 아이들이 드디어 잠들었다. 잠들기 전엔 얘네만 재우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라고 야심 찬 계획을 세우지만 막상 둘만의 시간이 생기면 지쳐서 뭘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오늘도 TV 앞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골랐다. 그러곤 늘 고심해서 고른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팝콘을 먹으며 회사에서 도는 소문을 속닥거리거나 노아를 재우다 들었던 엉뚱한 소리를 말해주며 웃었다. 어깨에 팔을 감은 채 초원이 주는 팝콘을 받아먹던 승준이 오늘도 물었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너무너무 지루할 정도로 평화롭고 평범했어요.”
지루하다는 말에 승준은 벅찬 미소를 지었다. 초원이 지은 미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땐 지루할 정도로 평화롭고 평범하게 살아요.”
두 번째로 결혼을 약속했던 날의 다짐을 두 사람은 오늘도 지켰다.
버터 팝콘의 맛이 나는 입술 한 쌍이 포개어졌다 떨어지고 다시 시선은 TV로 향했다. 화면 속에서는 드래곤이 날아다니며 불을 뿜고 있었다. 그제야 문득 생각이 난 초원이 물었다.
“그래서 첫 드래곤은 어떻게 잡았어요?”
승준이 입을 떼는 찰나 초원은 손가락을 들며 엄하게 경고했다.
“또 ‘잘!’이라고 하면 이혼이에요. 두 번 결혼할 팔자이지 세 번 결혼할 팔자는 아닌 거 알죠?”
그는 들켰다는 얼굴로 웃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평범한 인간이 사막의 거대한 괴수를 잡게 된 이야기를 집중해 듣던 초원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헐, 진짜? 미쳤어!”
“이거 봐. 이래서 내가 말 안 해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서울 어딘가에선 평화롭고 평범한 하루가 또 한 번 저물었다.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온도차: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