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와 그 남자의 온도차 (외전)
본 외전은 <팀장님, 드래곤한테 죽어도 산재인가요?> 및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온도차>의 후일담입니다.
두 작품을 모두 감상한 후 본 외전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판도라의 상자
“아빠.”
저를 부르는 소리에 단잠에서 깨어난 승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질끈 감았다. 밤새 감고 있던 눈에는 은은한 무드등의 빛도 따갑게 느껴졌다.
“일어나세요.”
눈을 감자마자 코끝을 꼬집혔다. 실눈을 뜨자 그의 단잠을 방해한 사람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게 똑똑히 보였다. 승준은 목을 가다듬고서야 물었다.
“…왜?”
“아빠, 한나 햄버거랑 바닐라 밀크셰이크 먹고 싶어요.”
승준은 그를 아빠라고 부른 여자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픽 웃었다. 그의 딸은 이제 겨우 엄마 배 속에서 6개월을 살았을 뿐이었다.
몸을 반쯤 일으켜 누운 초원에게 팔다리를 감았다. 예전에는 이렇게 안으면 품에 쏙 들어오는 느낌이었지만 요즘은 달랐다. 그새 배가 제법 나왔다. 아이가 건강하게 하루하루 커 가는 건 기쁜 일이지만 초원을 한입에 집어삼키듯이 껴안을 수 없는 건 꽤 아쉬웠다.
“아, 뭐 해요. 조 팀장님 따님 시장하시다니까요?”
헐렁한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고 동그랗게 나온 배를 쓰다듬는데 초원이 손을 밀어내며 볼멘소리를 했다. 승준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자기가 먹고 싶은 거면서.
여우 같은 그의 아내는 요즘 원하는 게 있으면 대뜸 아이를 팔았다. 그런데 이 여자, 머리를 잘못 써도 한참 잘못 썼다. 승준의 가장 큰 약점은 아이가 아니라 저인데.
그는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는 아내를 택했던 남자였다. 기억을 모두 잃은 초원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몰라야 했다. 평생 모르기만을 승준은 바랐다.
모두를 아프게 한 선택의 죗값은 톡톡히 치렀다. 그만큼 고생했으면 신도 이젠 그를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승준은 어렵게 되찾은 사랑을 품에 안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햄버거….”
어렵게 얻은 평화를 좀 만끽하자는데 상대는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 승준은 몸을 비틀며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초원의 티셔츠 속에 다시 손을 넣으며 대꾸했다.
“한나한테 너무 늦어서 안 된다고 전해 주세요, 조 팀장 사모님.”
“배고파서 잠이 안 오는데….”
승준은 협탁에 놓인 시계를 곁눈질하곤 물었다.
“토마토에 설탕 쳐 줄 테니까 먹을래요?”
“싫은데요. 따님께서 햄버거 아니면 안 되신다는데요.”
“새벽 세 시에 햄버거는 위에 부담스럽잖아. 먹으면 잠도 깊게 못 자지, 누우면 신물 올라오지….”
잠이 덜 깨 깊게 잠긴 목소리로 먹으면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았더니 초원의 눈빛이 갈수록 뾰족해졌다. 그러다 결국엔 그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누군 차 없고 지갑 없나?”
새 아파트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곳 지리를 잘 몰라 늦은 시각에 혼자 나가는 걸 꺼리는 초원이 새벽 세 시에 혼자 나갈 것처럼 대담하게 굴더니 곧바로 꾀를 썼다.
“근데 그런 얘기 들어봤어요?”
“아니.”
“아, 진짜. 아직 뭔지 얘기도 안 했거든요?”
그래 봐야 무슨 소릴 할지 승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햄버거 사러 나갔다가 그길로 영영 사라진 아내와 배 속의 아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눈물겹게 후회하는 남자.”
“처음 듣네.”
“인터넷에서 썰 도는 거 못 봤어요?”
“나 그런 거 안 보잖아요.”
“에휴,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임산부 혼자 새벽에 내보내서는….”
쯧쯧, 혀까지 차며 능청스럽게 그에게 겁을 주는데 웃기기만 했다. 승준은 결국 백기를 들며 협탁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배달시켜요.”
“배달 30분이나 걸린대요.”
굶주린 임산부에게는 30분도 길었다.
“아, 나 진짜 배고파서 손 떨려요. 이거 봐요.”
“손 떨면서 무슨 운전이야.”
승준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새벽의 패스트푸드점은 한산했다. 키오스크에서 커피를 찾아 누르는 승준에게 초원이 몸을 기대며 주문했다.
“나는 트리플 치즈버거랑 바닐라 밀크셰이크, 한나는 스파이시 치킨버거 먹는대요.”
“두 개나? 오늘 밤새우겠네.”
곧 두 사람은 구석진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초원이 내미는 버거를 승준은 고개를 저어 마다하고 쓴 커피만 홀짝였다. 말 그대로 초원이 먹는 걸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아, 조랭이 깼다.”
초원이 버거를 먹다 말고 배를 쓰다듬었다. 승준은 커피 컵을 기울이다 눈매를 좁혔다.
저 잔망스러운 여자. 그에게서 원하는 게 있을 땐 아이를 한나라고 부르더니, 원하는 걸 얻고 나면 어김없이 조랭이라는 괴상한 태명으로 돌아갔다. 이 여자의 약은 면모와 고집이 잘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벌써 엄마 닮아서 고기 냄새만 맡아도 눈을 번쩍 뜨네.”
승준이 무심결에 중얼거리자마자 초원의 얼굴에 벅찬 미소가 번졌다. 엄마라고 불릴 때마다 초원은 티 없이 맑게 웃었다. 예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였다.
이젠 왜 초원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곳에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안다. 여기선 엄마 소리를 못 들을 줄 알았겠지. 생각할수록 심장이 콱 옥죄어 오는 것만 같았다.
“초원 씨.”
느닷없이 불렀더니 인간 햄스터가 볼이 빵빵하게 튀어나오도록 버거를 문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갸웃했다.
“행복해요?”
초원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준의 눈꼬리가 느슨히 휘어졌다.
“나도, 나도 행복해요.”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애틋한 미소를 짓는 남자를 초원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자꾸 행복하냐고 묻지?’
그 언젠가 승준에겐 행복하다는 말이 금기어였다는 걸, 그래서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려 금기어를 자꾸만 입에 올린다는 걸 초원은 알 리가 없었다.
그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초원은 운전대를 잡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너른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졸려요? 먹고 바로 자면 안 되는데.”
하여간에 눈치 없는 남자. 초원은 대꾸 없이 기어를 쥔 구릿빛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승준은 갑자기 몸을 붙여오는 여자를 의아한 눈으로 곁눈질했다. 에어컨 바람을 정면으로 맞는데도 몸이 뜨거워졌다.
“왜? 먹었으니까 운동하자고?”
예전처럼 초원은 임신하자 성욕이 강해졌다. 정말 바람직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을 때만 달라붙는 줄 알아요?”
초원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면 말고.”
초원은 시무룩한 척하는 남자를 보고 픽 웃다 다시 어깨에 기댔다.
“그냥, 돌아볼수록 헤어지자고 했던 내가 미쳤었구나 싶어서요.”
그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생각도 행동도 지나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임신 호르몬 때문이었지.”
그즈음 초원은 잠이 많아지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었다. 잘 울지 않는 여자가 커피를 못 마시게 한다고 울 정도였으니. 임신이 아닐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 여자의 임신을 두 번이나 곁에서 지켜본 그의 감이 맞았다.
“그리고 잘 생각해 봐요. 그때 안 헤어졌으면 연쇄 살인마가 초원 씨한테 무슨 짓을 했을 줄 알고.”
살인마의 손에 함께 죽었거나 놈이 초원의 행세를 하기 전에 그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제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살인마는 없다. 드래곤도, 저주도, 적도, 두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 없었다. 이젠 아무 걱정 없이 살날만 남은 거다.
둘이서 영원히 행복하게.
승준은 별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에 시선이 닿는 순간 문득 그 약속을 떠올렸다.
“초원 씨 그거 알아요? 별똥별 아래에서 입을 맞추면 그 사랑이 영원히 간대요.”
초원은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으로 승준을 바라보았다.
“그런 거 믿어요?”
숱한 도시 전설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만 그런 유치한 미신은 절대 안 믿을 것 같이 생긴 남자였다.
“응, 난 믿는데.”
“안됐네요.”
우리 사랑은 영원할 텐데 왜 안됐다는 거지? 승준은 당황한 눈으로 초원을 곁눈질했다.
“서울에서 별똥별은 평생 못 볼 텐데.”
“서울은 그렇지.”
승준이 의미심장하게 웃는 사이 초원은 차창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별똥별 떨어지길 빌어봐야겠네.”
“굳이. 우리 이미 했거든.”
“언제요?”
승준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딴 여자랑 하고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반듯하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것도 아니면 꿈꿨어요?”
“그런가….”
“뭐야. 꿈이랑 현실도 구분 못 하다니.”
“깨고 싶지 않았거든.”
“되게 좋은 꿈이었나 보다.”
“행복하고도….”
승준이 운전대를 고쳐 잡으며 뜸을 들였다. 어렴풋이 올라간 입꼬리가 어째선지 무거워 보였다.
“슬픈 꿈이었지.”
“왜요?”
차 안의 공기가 눅눅하게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어 초원은 가볍게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꿈속에서도 계속 찼어요?”
다행히 승준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한두 번? 아니, 그것보단 많았나?”
내 꿈을 얼마나 많이 꾼 거야.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초원은 불현듯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나도 승준 씨 나오는 꿈 엄청 꿨는데. 야한 꿈.”
마지막 말은 티셔츠를 끌어 올려 그 속에서 속삭였다. 하지만 귀가 밝은 남자는 다 듣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 야한 꿈?”
그러더니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걸 모르고 시간 낭비했네.”
초원은 키득대며 그의 시간 낭비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털어놓았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그때 그 인간 최음제 있잖아요. 그날 입술에 승준 씨 손 닿고, 음, 내가, 어, 그랬잖아요.”
아무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곤 해도 차마 그때 절정을 느꼈다고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러워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래도 다 알아들은 승준의 귓바퀴가 빨개졌다.
그땐 이 여자와의 기억도 없었을 때였다. 부하 직원이 제 손으로 절정을 느낀 게 당혹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게다가 하필이면 짝사랑하는 여자라 제가 몹쓸 짓이라도 한 것처럼 죄책감을 느꼈었다.
“그러고 나선 계속 꿈에 승준 씨가 나오는 거예요. 벗고.”
그런데 정작 초원은 그때부터 그를 남자로 보기 시작했다니 웃음이 나왔다.
“밤에는 살색 지분이 99%는 되는 팀장님을 보다가 아침에는 끝까지 셔츠 단추 다 채운 딱딱한 팀장님 얼굴을 보는 게 얼마나 곤란했는지 모를걸요?”
“말을 하지.”
“그걸 어떻게 말해요? 팀장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밤마다 꿈에서 팀장님이랑 부적절한 짓을 하는데요. 어젯밤엔 좀 심하게 시달리는 바람에 피곤해서요. 갑작스럽게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오늘 오전은 반차를 내도 될까요.”
“어떤 짓이죠? 말로만 들어선 모르겠는데 자세한 시범 한번 보여주세요.”
“어… 그러려면 쇠사슬이 필요한데요.”
“곤란하네요. 그건 없는데. 수갑은 안 됩니까?”
상황극을 벌이며 키득대던 초원이 손뼉을 쳤다.
“아, 한 번은 승준 씨 바로 옆에서 꿨잖아요.”
승준의 눈이 또 커다래졌다.
“여기서.”
“이 차에서?”
“그때, 울릉도 가는 길에….”
초원은 인어를 인계해 주러 울릉도로 가던 날 꿨던 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수없이 꿨던 꿈 중에서도 유난히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마치 정말 있었던 일처럼.
사막의 뜨거운 태양, 야자수로 둘러싸인 오아시스, 흔들리는 침상에서 하나씩 떨어지던 비단 쿠션. 아라비안나이트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이국적이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가슴이 터질 듯 설렜다.
“운전하는 팀장님을 옆에 두고 본인이 나오는 야한 꿈을 꿨네….”
‘초원 씨, 그건 꿈이 아니야.’
승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부끄러운 듯이 웃는 초원의 눈치를 보며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기억의 봉인이 풀리고 있었다.
* * *
담벼락을 따라 걷던 시츄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흙바닥을 코로 킁킁대기 시작했다.
“왜 그래?”
누가 닭 뼈라도 버려뒀으면 큰일이었다. 이미 죽은 강아지가 다시 죽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먹고 아플지도 모르니까. 얼른 다가가 본 소년은 멈칫했다.
“벌이네?”
흙바닥에는 꿀벌 한 마리가 떨어져 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날개를 이따금 파닥거리고 다리를 버둥댔지만 포식자가 코를 킁킁대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강 건너에서 이 섬까지 먼 길을 날아오느라 탈진한 모양이었다.
“아롱아, 안 돼.”
소년은 벌을 날름 먹으려는 강아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다른 손으로 꿀벌을 조심스레 주워들었다.
소년이 눈을 감는 찰나였다. 버둥대던 벌이 갑자기 몸을 뒤집어 일어서더니 날개를 파르르 떨며 위로 날아올랐다. 바로 옆의 화단으로 곧장 날아가 꽃에 앉는 벌을 소년은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살아서는 업을 쌓는 일처럼 느껴졌던 것이 이젠 업을 씻어줄 것이다.
“야! 송시온! 밥 먹으러 가자.”
벌써 밥때가 되었는지 화단에서 일을 하던 소년들이 삼삼오오 섬 한가운데의 건물로 향하며 손짓을 했다. 시온은 품에서 헥헥대는 아롱이를 내려놓고 함께 흙길을 달렸다. 1층 식당의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막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이건 아동 노동력 착취 아니에요?”
어느 소년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시온보다 머리 두 개는 큰 형아가 이곳을 감독하는 아저씨에게 따지고 있었다.
시온은 슬그머니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같은 식탁에 앉은 친구들도 다들 아무렇지 않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신입 동자가 올 때면 가끔 보는 광경이라 새로울 것도 없었으니까.
“죽었는데 아동이 어딨느냐. 네가 아직 모르나 본데 망자는 애와 어른의 구분이 없어.”
식탁에 앉은 꽃감관은 귀찮다는 듯 소년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럼 저도 술 마셔도 되겠네요?”
소년이 예리하게 따지고 들자 꽃감관의 인상이 구겨졌다.
“이놈 봐라. 업보를 씻으러 온 놈이 술 같은 소릴 하고 있어!”
호통을 친 꽃감관이 늘 그렇듯 뻔한 한탄을 시작했다.
“요즘 사내아이들은 어째서 이 모양이냐. 이승 꼴이 대체 어찌 돌아가는 건지, 쯧. 나 때는 말이야, 어?”
꽃감관이 말하는 ‘나 때’는 아마 천 년도 더 됐을 거라는 게 선배 동자들의 생각이었다.
“아, 씨.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죽는 건데.”
신입 동자는 결국 꾸중만 실컷 듣고 다른 아이들이 모여 앉은 식탁으로 와 투덜댔다. 그 말을 들은 어느 소년이 물을 마시다 말고 대꾸했다.
“그래도 난 학원 안 가도 되니까 여기가 나은데.”
“아, 그건 인정.”
삼도천 한가운데의 서천꽃밭에서 일하는 동자들은 모두 어릴 적에 죽은 소년들이었다. 요즘은 그중에서도 스스로 생을 포기한 아이들만 뽑는단다. 꽃을 키우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으라는 의미라고, 시온을 이곳으로 보낸 무서운 아저씨가 그랬다.
그때의 내 생명이 소중했나?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생명이 값지다는 건 그 섬의 어른들 덕분에 알았다. 그리고 축복이란 엄마의 말과는 달리 제 능력이 저주란 것도.
제가 있는 덕에 아무도 죽지 않던 그 섬에는 저승사자가 없었다. 시온은 섬을 빠져나가자마자 바닷속에 사는 저승사자 아저씨에게 빌고 또 빌었다.
아롱이한테 가고 싶어요.
섬에 갇혀 있는 사이 아롱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건 이미 감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온은 죽고 싶다는 소원을 저승사자에게 빌었다. 고작 7년 만에 사는 일에 지쳐 버려서.
꽃을 키우는 일은 어렵지만 이승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낫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언젠가 아픈 구석이 모두 나으면, 그리고 다음번에는 좋은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다면 다시 한번 태어나 볼까, 하는 생각도 가끔은 할 정도였다.
“전생의 업을 모두 씻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말도 저를 이곳으로 보낸 아저씨가 했었다. 아직 인간 세상의 시간으론 1년도 되지 않았지만 시온은 업을 꽤 많이 씻었다.
“우와!”
드디어 밥이 나오자 식탁에 모여 앉은 아이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제 앞에 놓인 식사가 아니라 시온의 몫에 놀란 것이었다.
“와, 시온이는 오늘도 맛있는 거 먹네.”
저승에서 주는 급식 식판 옆에 치즈케이크와 알이 어마어마하게 큰 청포도 한 송이가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걸 본 신입이 옆자리에 앉은 동자에게 소곤댔다.
“저거 엄청 비싼 건데. 쟤네 엄마 아빠 잘사나 보다.”
이건 시온의 부모님이 보낸 게 아니었다. 시온을 섬에서 꺼내 줬던 예쁘게 생긴 이모 집에서 온 거였다. 어쩌다 보니 그 이모를 바다에 빠트려서 미안한데 아픈 데를 고쳐줘서 고맙다고 계속 이렇게 맛있는 걸 보내주는 것이다.
꽃을 키우고 좋은 일을 하는 것만이 업을 씻는 방법은 아니었다. 이승에서 누가 명복을 빌어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예쁜 이모 덕에 시온은 업을 꽤 많이 씻었다.
원한다면 언젠가 다시 태어날 수도 있을 정도로.
* * *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애끊는 절규가 관찰실에 메아리쳤다.
“나 다시 돌려보내 줘요, 제발.”
초원이 그에게 매달리며 애걸하는 이 순간을 꿈에서 수없이 보았으면서도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은 늘 처음처럼 예리했다.
“다 잊고 싶어요.”
그래서 다 잊었잖아. 소원대로.
그러니까 제발 다시 기억하지 마.
이번엔 승준이 애걸하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제 그가 있는 곳은 연구소 지하 관찰실이 아니었다.
“왜 그랬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초원이 그를 노려보더니 품에서 한나를 빼앗아갔다.
“아이를 버린 남자는 아빠 자격이 없어! 그런 짓을 하고도 날 뻔뻔스럽게 속여 결혼까지 했다니, 이건 사기 결혼이야!”
초원이 그렇게 외치며 그를 떠나는 순간 승준은 눈을 번쩍 떴다.
“하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초원이 돌아온 후로 악몽은 한 번도 꾸지 않았는데….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원은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까지 머금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이 여자가 제 곁에 있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도 심장은 가슴을 찢고 나올 것처럼 거칠게 박동했다. 승준은 결국 불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곤히 잠든 여자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살내음을 한껏 들이마셨다. 불안감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도 모자라 티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맨살을 어루만지고 앓는 신음을 내는 입에 입술을 포개어 지분거렸다.
“으응….”
눈도 못 뜬 채로 느릿하게 키스를 받아 주던 초원이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야한 꿈 꿨어요?”
정말 이 여자다운 소리에 마음이 놓인 승준은 피식 웃어 버렸다.
“아, 진짜. 왜 그런 꿈을 꾸고 그래요. 그럼 또 내가 어쩔 수 없이….”
초원은 좋으면서 귀찮은 척 잔망을 떨더니 그의 상체를 더듬어 내려가 속옷 밴드 밑으로 손을 넣었다.
“우리 팀장님을 도와드려야지.”
“읏….”
이미 열이 오른 성기를 서늘한 손이 감싸 쥐는 순간 승준은 등허리를 잘게 떨며 신음했다. 속옷 안에 든 손이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반쯤 부풀어 있던 살덩이가 순식간에 크기를 키우더니 속옷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배꼽까지 올라붙었다. 그즈음 되자 발정이 날 대로 난 승준은 애초에 이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래서, 하아, 팀장을 손에 쥐고 흔드니까 좋습니까?”
귓가에 뜨거운 숨을 쏟아내며 상황극에 장단을 맞춰 주었더니 초원이 좋다고 키득대며 웃었다. 그때부턴 서로의 속옷 밑으로 넣은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입술을 포갠 채 가쁜 숨을 뒤섞다 결국 인내의 한계점을 넘었다.
승준은 허리 아래에 불이라도 붙은 사람처럼 급히 속옷을 벗어 던지고 초원의 티셔츠와 팬티도 순식간에 벗겼다. 은은한 무드등의 불빛 속에서 초원의 뺨이 발그레하게 익어 갔다. 임신 중의 섹스에 이젠 익숙한 승준과는 달리 임신이 처음인 줄 아는 초원은 부끄러워했다. 마음이야 어떻건 몸은 쉽게 달아오르는 게 힘든 눈치였다.
“아….”
미끌미끌 젖은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넣자 만지기 쉽게 초원이 다리를 벌려 주었다. 얼굴은 부끄러워 죽을 것처럼 붉히더니. 허리 위는 가리려고 애를 쓰면서도 허리 아래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 모순에 다리 사이가 뻐근해졌다.
“이렇게 야한 여자 옆에서 자니까 내가 야한 꿈을 꾸지.”
승준은 배와 가슴을 쓸데없이 가린 손을 떼어 내 깍지를 끼곤 침대에 가볍게 짓눌렀다. 그러곤 제 아래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신을 눈으로 더듬었다. 아이를 가지면서 초원의 몸매에선 굴곡이 한층 도드라졌다.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목울대가 크게 들썩이자 그 모습을 똑똑히 본 초원의 심장이 크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눈빛이 뜨겁다. 저 이글거리는 눈빛이 닿는 모든 곳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빛이 닿지 못하는 깊숙한 곳마저도 벌써 얼얼하리만치 불이 붙었다.
이 남자는 왜 나를 이렇게나 원하는 걸까.
결혼까지 하고도 풀지 못한 의문을 되새기는 순간 승준이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며 입술을 포개어왔다. 그가 허리에 힘을 주는 동시에 다리 사이에서 꺼덕대며 점막을 문대던 선단이 입구에 꽉 맞물렸다. 매번 손을 쓰지 않고도 정확히 질구를 찾아 넣는 건 신기할 정도였다.
승준의 허리에 힘이 더욱 들어가자 초원은 무릎을 세워 삽입하기 좋은 각도로 하체를 맞췄다. 기대감에 벌써 허벅지가 잘게 떨렸다.
“흣….”
“너무, 하아, 깊으면 말해요.”
아래에서 나는 젖은 소리만 듣자면 쑥 미끄러져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데, 이 남자의 크기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굵다란 살덩이가 빠듯하게 조여들어 있는 살을 활짝 벌리며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밀고 들어왔다.
“하아….”
질벽을 누르는 압박감이 차오르는 만큼 숨도 차올랐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절로 곱아들며 구릿빛 손등에 손톱이 살짝 파고드는 순간 승준이 삽입을 멈췄다.
“힘들어요?”
“그게 아니라, 좋은데….”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는 초원의 뺨이 한층 더 발그레하게 익었다.
“조금만 더….”
넣어 달라는 말까진 하지 못하고 초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만 아기가 있으니까 조심해야 하지 않나?
승준은 그 옛날의 습관이 남아 여전히 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미 잘 아는 그가 알아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기가 다시 파고들었다. 꾸역꾸역 기어들어 오다시피 하며 만들어 내는 그 느릿한 마찰은 혼을 빼놓을 정도로 빠른 마찰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살 주름을 하나하나 펴서 긁어주는 느낌이 들 때마다 후련한 쾌감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직도, 하아, 다 안 들어왔어요?”
굵은 살기둥에 도드라진 혈관과 힘줄이 불끈대는 게 피가 몰릴 대로 몰려 예민해진 내벽으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쯤 되니 초원은 몸이 달아서 죽을 맛이었다. 승준의 손을 움켜쥐며 얼른 흔들어 달라고 무언의 재촉을 했다.
“잠깐만.”
배 속에 든 물건이 살짝 빠져나가나 싶더니 다시 미끄러져 들어왔다. 들락날락하다 질 끝을 세게 치지 않게 조금 전과 각도를 달리한 게 느껴졌다. 승준은 삽입의 정도를 조절하려는 듯 한 손으로 초원의 등허리를 받쳐 들고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 아, 아흣.”
곧바로 온몸의 신경이 다리 사이로 바짝 쏠리고, 벌써 정신 줄을 놓은 초원의 입에서 신음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 좋아 미치겠어.
걱정되는지 예전만큼 깊이 넣어주지 않는데도 말도 못 하게 짜릿했다. 초원이 잘 느끼는 자리만 뭉툭한 성기 끝이 쉴 새 없이 문대어 대고 쿡 찍어 올리는데 쉽게 가지 않을 리 없었다.
“아, 으응, 갈 것….”
“읏, 왜 참아. 가면 되지.”
“하윽!”
성기 끝이 버튼이라도 누르듯 내벽을 툭 쳐올리는 찰나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초원을 집어삼켰다.
이 남자, 제가 어디를 좋아하는지 감쪽같이 잘 알았다. 심지어 어떻게 해 줘야 느끼는지도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그랬다.
“왜 이렇게 여자 몸을 잘 알아요?”
초원은 할딱할딱 숨을 삼키며 물었다.
“여자가 아니라 초원 씨를 잘 아는 거지.”
살이 쩍쩍 맞붙고 떨어지는 소리가 멎더니 승준이 초원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시트 갈아야겠네.”
초원도 승준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았지만 부푼 배에 가려 제 다리 사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느낌만으로 알 수 있었다. 또 흥분을 못 참고 저질렀다는 걸.
이럴 때마다 업적이라도 달성한 것처럼 입꼬리를 은근히 휘어 올리는 남자를 보고 있자면 수치심도 잊게 됐다.
승준은 여전히 아래를 끼워 맞춘 채로 가슴 애무에 몰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배 속에 박힌 물건은 여전히 힘이 넘쳤다. 초원은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계속해서 숨을 할딱이다 물었다.
“그나저나 조 팀장님 저한테 이런 짓 하셔도 되나요.”
픽, 웃음이 땀으로 젖은 가슴을 스쳤다. 승준은 젖꼭지를 유륜부터 길게 핥아 올리고서야 고개를 들더니 입매를 비스듬히 틀어 웃으며 물었다.
“안 될 건 뭐죠? 홍초원 씨 이젠 내 밑에 있는 직원도 아니잖아요.”
“그 밑은 아니지만 배 밑에는 깔고 계신데….”
초원은 선명히 쪼개어진 구릿빛 복근에 가볍게 맞닿은 제 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것도 임신한 유부녀를 덮치시다니. 이런 변태이신 줄 몰랐는데.”
승준은 입을 꾹 다물고 웃음을 참다가 상황극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덮치다니. 지금 누구를 모함하는 거죠? 남편도 있고 아이까지 가진 몸으로 예전 상사에게 다리를 벌리는 짓은 초원 씨가 먼저 한 거 아닙니까.”
“아니, 팀장님이 순수하게 잠만 자던 저를 먼저 불순하게 만지셨잖아요.”
억울한 척하던 초원이 새침하게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아기 아빠가 알면 큰일 날 텐데.”
승준은 기가 막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덮친 거야, 쌍방 불륜이야. 한쪽만 해요.”
타박을 준 그는 초원의 두 손을 머리 위로 겹쳐 모으더니 한 손으로 깍지를 껴 누르며 물었다.
“불순한 짓 한 번 더?”
초원이 마다할 리가 없었다.
“아, 으응…. 하읏!”
깊이 맞물려 있던 살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돌처럼 굵고 단단한 성기가 다시 안을 부드럽게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얄밉도록 평온한 얼굴로 초원의 반응을 관찰하던 남자가 서서히 허리 짓에 속도를 붙이고, 쉴 새 없이 치고 드는 쾌감에 속살이 절로 오므라들자 그의 표정도 점점 절박한 기색을 띠어갔다.
“흣, 멈추지, 마요.”
초원은 남자의 굵다란 허리를 두 다리로 휘감고 매달린 채로 애걸했다. 요즘 조금만 무리한다 싶으면 멈추는 게 못마땅했다. 감질나는 건 딱 질색이란 말이다.
“멈추면, 아흣, 소파로 쫓아낼 거야.”
“그럼 소파로 와서 올라타게?”
이미 전적이 있는지라 초원은 반박하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헉, 아흑!”
웃느라 방심한 사이 예고도 없이 엄지가 음순을 가르고 파고들어 와 돌기를 짓눌렀다. 초원은 예리한 쾌감에 놀라 허리를 뒤로 젖히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안에 박힌 페니스를 불시에 꽉 붙들어버리는 바람에 승준도 놀라 허리 짓을 한 박자 쉬어야만 했다. 제 수에 제가 당한 셈이었다.
다시 리듬을 찾은 그는 안에서 음핵을 찍어 올리듯이 내벽의 윗부분을 치대며 바깥의 돌기는 찍어누른 채로 흔들었다.
“아, 아앗, 흣, 여기서, 멈추면, 진짜….”
이번엔 무슨 소릴 하려나 싶었던 찰나 초원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벌어진 입에서는 헉, 숨이 넘어가는 소리만 튀어나올 뿐이었다. 성기를 틀어쥔 채 물결치는 속살의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절정이란 걸.
벅찬 쾌락을 감당하기 힘든지 맞물린 하체가 마구 비틀리고 곱아든 발끝이 시트를 긁어댔다. 그의 손등으로는 초원의 손톱이 파고들었다. 승준은 그래도 초원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임신하고 몸이 더 예민해진 탓인지 참을 수 없는 성감이 몰아칠 때마다 죄 없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길래 일부러 결박하는 거였다.
“흡, 하아….”
절정의 물결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며 가볍게 키스를 나누는데 초원이 불현듯 움찔했다.
“아, 어떡해.”
“왜?”
은근히 안을 문질러대던 허리 짓이 뚝 멎었다.
“아기 깼어요.”
태동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승준은 눈매를 가늘게 좁히곤 어렴풋이 울상이 된 초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음란 마귀 들린 말장난을 실컷 치다가도 아기가 깨는 순간에는 선비에 빙의하다니. 옛날엔 안 이랬는데.
그 시절을 문득 생각해 보면 지금은 왜 이러는지 알 만했다. 별의별 기상천외한 장소와 온갖 체위에, 플레이에, 심지어는 카마수트라까지 섭렵했는데 그걸 다 잊은 여자는 자기가 성에 보수적인 편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가 먼저 벽을 허물어 줘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승준은 다시 허리를 흔들며 태연하게 태담을 시작했다.
“한나 깼어? 아빠가 미안해.”
“미쳤나 봐. 이런 짓 하면서 애기한테 말 걸지 마요.”
“요람 흔드는 게 어째서 미친 짓이죠?”
기가 막혀. 말문도 막혀버린 초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저를 흔드는 남자를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짜 안 그렇게 생겨서 뻔뻔해.”
“그러면 이쯤 하고 관둘까요, 순수하신 한나 어머님?”
승준이 허리 짓을 뚝 멈춰 버리는 순간 초원의 표정이 돌변했다.
“…한 번만 더.”
본전도 못 찾는다는 둥 놀리며 허리를 흔드는 남자를 쏘아본 초원은 볼록하게 솟은 제 배로 시선을 내렸다.
‘흑흑, 우리 딸. 음란 마귀 씐 엄마라 미안해.’
임신하고부턴 왜 이렇게 성욕이 폭발하는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몸이 달아올라 죽을 맛이었다. 그럴 때마다 하자는 말을 사귄 지 일 년도 안 된 데에다 결혼한 지는 이제 겨우 한 달 된 남자에게 어떻게 꺼내냔 말이다. 승준이 강제 이혼시킨 기둥 서방님을 다시 몰래 모셔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하고 싶어질 때마다 이 남자가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먼저 분위기를 잡는 거였다.
‘결혼 잘했어.’
초원은 또 한 번 극한의 쾌락 속에서 뿌듯하게 웃었다.
‘이 남자랑 해서 다행이야.’
이런 걸 좋아하는 것도 모자라 잘하는 남자라 정말 다행이었다.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남편감이 어쩌다 제 앞으로 굴러들어왔는지 아직도 신기했다.
“하아, 이제 안 참아도, 될 것 같아요.”
‘한 번만 더,’를 세 번쯤 더 외친 후였다.
“아니, 빼진 말고….”
초원은 성기를 빼려는 승준의 허리를 두 다리로 휘감아 막았다. 초원이 충분히 즐겼으니 이만하고 관두거나 저는 욕실에서 혼자 해결하려는 모양이었다.
어림도 없지.
“읏….”
초원이 아래에 힘을 주는 찰나 승준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엉덩이도 흔들고 싶었지만 몸이 무거워 무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시동을 걸기엔 충분했는지 승준의 허리가 앞뒤로 유연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어쩜 저 얼굴은 일그러져도 저렇게 잘생겼을까. 진짜 어쩌다 이렇게 잘나기만 한 남자가 저를 사랑하게 됐는지. 또다시 감상에 빠진 사이 승준의 목빗근이 더욱 도드라지고 몸이 뻣뻣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곧바로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사르르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아….”
그렇게 몸에 붙었던 불이 잠시 꺼졌다.
늘 그렇듯 두 사람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나란히 마주 보고 누워서 땀에 젖은 뜨거운 몸을 서로 어루만졌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눈을 마주한 채 하는 사랑 고백도 후희의 일부였다.
그러다 승준은 문득 기억해 냈다. 자다 느닷없이 깨서 꼭두새벽부터 한바탕 침대를 흔든 이유를 말이다.
“초원 씨.”
희열과 흥분이 삽시간에 사라진 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무슨 짓을 했든….”
초원의 눈동자에 어리둥절한 기색이 비치자 승준은 급히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짓을 하든….”
이젠 그럴 일 없으니 불필요한 사족이었다.
“초원 씨 사랑해서 그런 선택을 한 거, 잊지 말아 줘요.”
기억을 혹시 되찾더라도 저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 뜻인 걸 초원은 알 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생 그 뜻을 모르기만을 바랐다.
이 여자는 제발 모르길. 아픈 건 나 혼자 하면 되니까.
승준은 아무것도 모르고 티 없이 맑기만 한 초원의 얼굴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그런 그를 멀뚱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초원이 돌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괜한 소리를 한 걸까. 예전에 기억 억제 보고서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는 걸 보면 이미 그를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승준이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키는 때였다.
“바람피우고 그런 소리 할 거 아니죠?”
“뭐?”
역시나 초원다운 엉뚱한 소리에 승준은 긴장을 풀고 웃어 버렸다.
“아내를 사랑해서 바람피우는 놈이 어딨어.”
“흠… 없나?”
뭐 그런 걸 골똘히 생각하는지.
“그런 여자가 맨날 남편 두고 바람피우는 상황극은 잘만 하네.”
“그럼 다음엔 바람피운 거 남편한테 들킨 상황극 해요.”
초원이 씨익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 여자, 거친 플레이를 원하는 게 분명했다.
“이 몸으로?”
“얼른 낳고?”
그 말에 승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소설 속의 한나가 예정일보다 훨씬 일찍 태어났었다는 게 기억난 것이다.
“얼른 아니고 때 되면.”
승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초원의 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배꼽 위에서 태동이 미약하게 느껴지자 그는 곧장 고개를 숙여 아기에게 입을 맞췄다.
“우리 한나, 엄마 배 속에서 달수 다 채우고 나와.”
제발.
“오늘 오후에 병원 가는 거 알죠?”
승준은 출근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며 물었다.
“그럼요. 피 뽑히는 날인데 내가 잊었을 리가, 흑흑.”
먼저 준비를 끝낸 초원이 오늘도 어김없이 주방에서 컵 하나를 들고 왔다. 그러다 그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른손에 끼는 거 아니라고 내가 어제도 그랬는데.”
“아….”
망할 습관. 또 실수했다. 승준은 오른손 약지에서 왼손으로 결혼반지를 옮기며 멋쩍게 웃었다.
“마셔요.”
초원이 진한 갈색 액체가 든 컵을 그에게 내밀었다. 승준의 시선은 컵이 아니라 초원의 왼손에 있었다. 정확히는 왼손 약지의 에메랄드 컷 다이아몬드에.
소설 속에서 한 약속대로 더 크고 예쁘고 잘 맞는 약혼반지를 사 주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잘 맞는 약혼반지’를 사 주는 데 그쳤다.
“오, 이거다!”
초원은 예쁘고 크고 화려하고 비싼 것들을 두고 굳이 가장 단순하게 생긴 에메랄드 컷 다이아몬드 반지를 골랐다. 하필이면 소설 속에서 그가 남의 돈으로 샀다가 남에게 줘 버려서 초원을 울게 만들었던 그 반지와 똑같이 생긴 걸로 말이다.
설마 기억하는 건가.
“왜 이걸 골랐어요?”
당황해 물었더니 초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딱 꽂혔어요. 이게 내 거다. 이런 촉이 오던데요? 우리 언니가 결혼 준비할 땐 그런 촉이 오는 게 내 거라고 그랬거든요.”
그땐 대수롭지 않았는데 이젠 모르겠다.
“아, 내 팔 떨어진다.”
초원이 한 소리 하고서야 승준은 정신을 차리고 컵을 받았다.
“잠깐만. 또 이거 찼어요? 아, 진짜…. 좋은 거 두고 왜?”
부모님이 예물로 사 준 비싼 시계를 두고 왜 굳이 제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줬던 걸 차고 나왔냐는 뜻이었다.
“평소엔 이게 편해서.”
거짓말인 건 초원도 알 거다.
“내가 뽀로로 시계를 사 줘도 그런 말을 하나 두고 봅시다.”
초원이 사탕 포장을 까며 중얼거린 소리에 승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엄마가 샤인머스캣 보내준 거 잘 먹었대요. 나한텐 말도 없이 언제 보냈대.”
컵에 든 건 한약이었다. 한약은 쓰지만 초원의 부모님이 그에게 보여주는 애정은 다디달았다. 승준은 약을 꿀물처럼 달게 마시곤 일부러 눈매를 구겼다.
“너무 쓰다.”
이건 다 수작이었다. 그걸 다 알면서도 초원은 오늘도 속는 척 제 입에 사탕을 넣었다. 그녀의 두 팔이 승준의 목덜미에 감기고 곧 입술이 포개어졌다. 사탕을 그의 입으로 넘기는 본 목적을 완수하고도 키스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왜 그런 말 있죠. 밤에 뜨겁게 보내고 나니까 그다음 날 아침 밥상 달라지는 그런 거.”
승준은 입술을 살짝 떼기만 하고 초원을 여전히 안은 채 쓰다듬으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초원 씨 지금 그런 것 같아. 매일 그러는 거지.”
“매일 밤 잘해서? 쓰읍, 이분이 지금 그 말을 듣고 싶으신가 본데….”
초원이 엉큼한 속내가 다 보인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승준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런 말이 생각날 정도로 초원 씨 애정표현이 달라졌다는 거지.”
비단 얼마 전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 소설 속에서도 초원의 애정표현은 늘 어딘가 그늘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초원의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으니.
하지만 그 모든 마음의 그늘이 걷힌 지금, 승준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봄날의 햇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밤부터 제 마음에 드리워진 그늘을 애써 외면하며 빌었다.
이 햇살이 영원히 저물지 않았으면.
* * *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자 문에 붙어 있던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삼신 공채 1차 시험장]
궁서체로 쓰인 글씨뿐이던 흰 종이에 곧 발자국이 하나둘 찍히기 시작했다. 필기시험을 마친 선녀들이 우르르 나오며 쥐 죽은 듯 조용하던 복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어렵더라.”
“그러게요. 첫 시험이니까 쉽게 낼 거라더니 난이도 조절을 잘못했나 봐요.”
“정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내가 337살 먹고 마킹 밀렸다고 새파랗게 어린 감독관을 잡고 사정해야겠어?”
“그러니까요. 정말 현대화할 거면 태블릿 같은 걸로 온라인 시험을 봐야죠.”
337살 먹은 선녀는 햇병아리 선녀에게 눈을 흘겼다. 태블릿이라니. 나 같은 할매는 떨어지란 거지.
“애초에 신 하나가 애들을 다 점지하는 것도 현대화랑은 거리가 멀지 않아요? 그걸 차라리 자동화하지.”
“쓰읍.”
고참 선녀가 신참에게 눈치를 주었다.
“자기, 그런 말 위에 가서는 하지 마.”
현대화하자며 어렵게 벌인 첫 사업이 고작 공채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이곳은 보수적이기 짝이 없었다.
[조선 시대를 벗어나자]
이승에서는 쌍팔년도에도 안 걸렸을 법한 표어 밑을 지나며 고참 선녀는 중얼거렸다.
“벗어나 봤자 헬조선이지.”
그 찰나 계단 위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선녀들이 움찔했다.
“청혜 선녀님, 나 좀 잠깐 봅시다.”
선녀들은 곧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단 위에 선 나이 지긋한 신선은 선녀들의 뒤에서 말없이 걷던 어느 선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상관은 발아래에 구름이 떠다니는 개인 사무실까지 청혜를 불러 두곤 퍼팅 연습만 했다.
“자네도 골프 칠 줄 아나?”
“아뇨, 못 칩니다.”
“현세의 취미는 가져 두는 게 좋아. 기왕이면 타인과 어울릴 수 있는 걸로.”
“조언, 새겨듣겠습니다.”
선녀의 딱딱한 대답에 신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다 본론을 꺼냈다.
“자네 1차는 합격했더군.”
시험 결과가 바로 나오는 줄은 몰랐던 청혜의 눈이 커졌다.
“난 아직도 왜 자네가 삼신이 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네.”
“그건 지원서에 제가 밝힌 바와 같이 요 몇 해 삼신을 모시고 다니면서….”
“그런 뻔한 소설 말고 자네 진심 말일세.”
잠시 말문이 막혔던 선녀가 멋쩍게 웃으며 답을 내어놓았다.
“이젠 정착할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그거 아쉬운 소리구먼.”
신선이 혀를 끌끌 찼다.
“실은 곤륜산에 파견 보낼 선녀가 필요한데 삼신 말고 그 자리는 어떤가. 고대와 현대 중국어도 유창한 데다 서왕모랑 아는 사이니 자네보다 이 자리에 더 적격인 자도 없네만.”
청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표정만으로도 거절의 의사는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다.
해외로 떠도는 삶은 이제 질렸다. 400년을 넘게 떠돌았으면 이제 방황을 끝내고 정착할 때가 되지 않았냐는 현직 삼신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신선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듯 잠시 고민하다 말문을 열었다.
“삼신이란 말이지. 가장 기본 덕목이 인간에 대한 애정일세. 이런 말 미안하네만 자네는 인간에게 지나치게 무심해. 인간에게 애정을 가져 본 적이 없지 않나, 하는 게 그간 자네를 지켜본 내 생각일세.”
상관은 그녀를 제대로 지켜보지 않은 게 분명했다. 400년도 더 전에 잠시 천계를 떠나 인간 세상에 머물렀던 일을 까맣게 모르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걸 안다면 그녀가 왜 인간에게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알았으리라.
하나 그것도 모두 지난 일이다. 속되고 사사로운 마음 또한 선인으로서 떨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한이라면 몰라도 정을 떨치지 말아야 삼신이 될 수 있다니. 실로 오랜만에 가진 꿈이 벌써 흐지부지될 참이라 청혜는 막막해졌다.
“2차 면접을 통과하는 건 무리니 너무 기대하지는 말게.”
청혜는 상관의 ‘조언’을 귓등으로 들으며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제가 한때 인간에게 애정이 있었다는 걸 증명해 줄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으나 모두 그녀의 애정이 채 사그라지기도 전에 삼도천을 건너 버렸다. 그러다 유일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떠오르는 순간 청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자네를 아껴서 넌지시 하는 말….”
“그럼 한때 제가 인간에게 애정이 있었다는 증거를 2차 면접 전에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말귀를 또 못 알아듣는군.
상급 신선은 자리를 힘차게 박차고 나가는 선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늘 그렇듯 한여름철 일산 연구소는 시베리아를 방불케 했다.
“좀 적당히 틀지.”
초원은 에어컨 바람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1층 엘리베이터 홀에 서서 중얼거렸다. 두꺼운 카디건에 실험 가운까지 걸쳤는데도 팔뚝이 으슬으슬할 정도였다.
이놈의 엘리베이터는 또 얼마나 느린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5분째 B1인 것 같던 엘리베이터 디스플레이가 이제야 1로 바뀌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타려던 초원은 내리려는 사람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어? 선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현우가 멈칫했다.
“아, 홍 주임…이 아니라 이제 홍 연구사님이지.”
현우가 직책을 고쳐 말하자 초원은 픽 웃었다.
“오전에 면담 있었어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파트너와 마주친 건 한 달 전 그녀의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보다 배가 많이 나온 게 눈에 띄었다.
“아기는 잘 크고 있어요?”
“네, 뭐 보다시피.”
“다행이네요.”
“하하, 그쵸. 어… 선배는 잘 지냈어요?”
“네. 뭐, 그럭저럭.”
대화가 뚝뚝 끊기며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째 엘리베이터 홀이 더 추워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선배, 파트너는 아직 없어요?”
개체 면담 때문에 왔다면서 혼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길래 의아해서 물었다.
“아직 없네요.”
“지원자도요?”
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왜 없냐고 물으려던 초원은 입을 다물었다. 본청으로 올라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넘치는데도 본청 생물3팀 관리 요원 자리에 지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유야 뻔했으니까.
‘그야 그 저승사자 밑이라니, 흠흠….’
이제 그 저승사자와 한배를 탄 사이니까 말을 꺼내는 순간 초원에겐 제 얼굴에 침 뱉기가 되어버리는 거다.
“그럼 박 주임님 승진도 한동안은 어렵겠네요.”
안 사무관마저 곧 다른 곳으로 옮기니 생물3팀의 사무관 자리는 공석이 된다. 분명 거기도 아무도 안 오려 할 테니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병훈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당장은 현장 요원이 부족하니 충원이 될 때까진 어려울 게 뻔했다.
“그래도 때 되면 또 누가 들어오겠죠. 그나저나 연구직은 재밌어요?”
개체 관리 요원에서 연구사로 보직을 변경한 지 이제 한 달 반을 넘겼다. 솔직히 그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전공 책과 실험 프로토콜을 뒤져가며 그동안 까먹었던 걸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전공 살리는 일이라 재밌네요. 야근이나 야간 출동도 없고.”
“잘됐네요.”
잘됐다는 말에서 이젠 같이 일하지 못해서 아쉽다는 기색이 은근히 느껴졌다. 초원은 인간의 것이 아닌 걸 보여주듯 알록달록한 혈액 검체 튜브가 꽂힌 랙을 핑계 삼아 들어 올렸다.
“그럼 저는 이거 연구실 냉장고에 넣어야 해서….”
여기가 이미 냉장고지만.
점심 맛있게 먹으라고 하려던 찰나였다. 현우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희미하게 도나 싶더니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현우가 인사를 한 쪽으로 돌아본 초원은 생각했다.
여긴 이제 시베리아가 아니다. 북극이다.
아침에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운전 조심해서 하라며 손을 흔들 땐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이 지금은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처럼 딱딱했다.
“어? 일찍 왔네요.”
초원은 승준에게 태연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잠깐 가운 벗어 놓고 가방만 가지고 나올게요.”
그사이 현우는 눈치를 보며 사라졌고, 승준은 연구실까지 같이 갈 생각인지 초원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연구실 사람들이 보면 또 나중에 놀리겠네. 중학교 축제 때 다른 학교에 다니는 남자 친구가 우리 반에 놀러 왔을 때와 비슷한 쑥스러움이 아닐까? 그래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친구들을 놀린 기억은 많았다.
혼자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서서 엘리베이터 디스플레이만 보고 있던 남자가 느닷없이 물었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초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일찍 왔네요. 이 별것 아닌 말의 꼬투리를 잡다니. 이 남자, 안 그렇게 생겼지만 알고 보면 질투심이 많고 꽁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지만 현우를 팔아 지은 죄가 있으니 초원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마주쳐서 안부를 물은 것뿐이라고 구구절절 변명하는 건 더 웃기고 이상했다. 그래서 낼 수 있는 답이라곤….
“아뇨.”
단답형뿐이었다.
“반지는 왜 안 끼고 있어요?”
그랬더니 이 남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이쯤 되니 초원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까 검체 다룬다고 라텍스 장갑 껴서요.”
다이아몬드가 너무 커서 장갑이 번번이 찢어졌다. 그래서 결혼반지만 두고 다이아몬드 반지는 빼서 목걸이에 걸어두었는데 일하다 정신이 없어서 다시 끼는 걸 까먹은 거다.
초원은 왼손을 보란 듯 승준의 눈앞으로 들었다.
“결혼반지도 꼈고, 반지가 없어도 배가 이렇게 나왔는데 내가 미혼 행세라도 하려고 했겠어요? 내 배에 든 애가 본청 저승사자 애인 걸 여기서 누가 몰라.”
승준이 2절까지 가면 초원은 4절까지 갔다.
“아이고, 남녀칠세부동석이온데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서방님.”
초원이 제 입으로 배 속에 든 아이가 그의 아이라고 말한 순간부터 이미 기분이 풀렸던 승준은 웃으며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는 초원의 허리에 팔을 감고 배를 쓰다듬으며 이 여자의 기분을 푸는 마법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우리 공주님들 오늘 점심은 뭐 먹을래요?”
“고기.”
깨도 불이 붙어야 볶을 수 있는 법.
두 사람은 언제 불꽃을 튀겼냐는 듯 산부인과 대기실 의자에 찰싹 붙어 앉아 깨를 볶았다. 조금 전 채혈을 마치고 이제 아기를 보려고 초음파실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 좀 걱정되는데….”
초원은 임신성 당뇨 검사 수치가 높게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
“어젯밤에 햄버거 두 개에 오늘 아침에 또 하나 먹고….”
어젯밤, 초원은 같이 사는 시누이에게 준다는 핑계로 햄버거 세트 하나를 포장해왔다. 그걸로 승아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면 젯밥은 당연히 초원의 입으로 들어갔다.
“점심때는 고기 먹었지.”
“그래도 단건 안 먹었으니까.”
초원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승준의 목소리에선 걱정의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병원에서도 평소처럼 먹고 오라고 했고.”
과거 두 번의 임신 모두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으나 초원은 항상 건강했다. 게다가 그 의료 불모지와는 달리 여긴 병원도, 믿을 만한 의료 기술도 있으니 승준은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우리 한나 많이 컸겠지.”
그는 그저 아이를 눈으로 볼 기대에만 부풀어 있었다.
“홍초원 님.”
드디어 초원의 차례가 다가오자 둘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기 콧대가 벌써 높네요.”
의사가 배에 프로브를 대고 이리저리 문지르며 아기를 확인하다 말을 건넸다. 초원이 보기에도 고작 6개월 된 아이의 코가 오뚝했다.
“아빠 닮았나 봐요.”
초원이 아이 아빠에게 눈웃음을 보내는 순간 가볍게 잡고 있던 손이 서로 얽혀들었다. 승준은 아기의 머리가 보이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벌써 예쁘네.”
손가락과 발가락 같은 아기의 겉모습부터 심장 같은 내부까지 꼼꼼히 살피는 내내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의사가 말이 없어지는 순간 돌변했다. 의사가 한 부위만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며 기기를 조작하고 사진을 찍는 사이 두 사람은 초조하게 화면과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혹시 이상이라도 있나요?”
의사가 초음파 사진을 뽑아 들고 두 사람을 마주 보았을 때에야 초원이 물었다.
“아직 크게 걱정하실 건 아니고요.”
의사는 사진을 승준에게 건네주며 가운데의 흰 점을 가리켰다.
“아기의 간에 결정 같은 게 보이는데, 간 석회화일지도 몰라서 일단 소아과의 소견을 들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양수 검사는 하셨나요? 임신 초기에 산모가 감염된 적은 있나요? 이런 질문들에 초원이 답하는 사이 승준은 인큐베이터를 어설프게 흉내 낸 요람 속, 너무도 자그맣고 연약하던 핏덩이를 떠올렸다.
마침 같은 병원에 있는 소아과에서 오늘 봐줄 수 있다고 해 다행이었다. 소아과 진료실 앞의 벤치에 앉아 초원은 옆에 앉은 남자를 곁눈질했다. 조금 전 산부인과 대기실에서와 달리 승준은 말이 없어졌다. 낯빛도 요즘 이렇게나 어두웠던 적은 없었다.
“괜찮을 거예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도 애써 입꼬리를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초원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괜찮을 거야.”
삼십 분 정도 지나서야 초원의 이름이 불렸다. 지정된 진료실로 들어가려던 초원은 문 옆에 붙은 담당의의 이름을 보고 멈칫했다.
[소아과 전문의: 김민혁]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 사람이 소아과로 갔단 소리를 언젠가 대학 동기에게서 들은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가 정말 사람 잡을 위기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승준은 초원의 허리를 감아 당기며 진료실 문을 열려 했다.
동명이인이겠지? 제발 그래라.
안 들어가겠다고 할 핑계도 없으니 가망 없는 기대나 품었다.
“네, 들어오….”
하지만 의사가 초원의 얼굴을 보고 당황하는 순간 기대는 와장창 박살 났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고 전 남친은 소아과에서 만난다. 그것도 옆에 질투의 화신인 남편을 끼고. 차라리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나고 싶어졌다.
“어… 하하.”
책상 뒤에 앉은 의사가 멋쩍게 웃더니 중얼거렸다.
“산모 이름 보고 설마설마했는데.”
“안녕하세요.”
초원은 민혁의 스스럼 없는 말을 무시하며 여느 의사에게 하듯이 사무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태연하게 승준을 끌고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이네.”
모른 척 좀 해! 눈빛으로 눈치를 주었는데도 못 알아들은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민혁은 초원에게 구 남친 특유의 아련한 티를 팍팍 냈다.
“아는 사이?”
옆에 앉은 승준이 물었다.
“대학 때 선배예요.”
초원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속으로 빌었다. 눈치채지 말아라.
하지만 힐끔 옆을 보자마자 알았다. 망했다는 걸.
저 눈치 빠삭한 남자의 표정이 이미 굳어 있었다. 조금 전 대기실에서도 굳은 얼굴이었지만 결이 완전히 달랐다.
“아.”
이 유난히 짧은 ‘아.’ 한마디에 많은 게 함축되어 있었다. 그 의미를 다 알아들은 초원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남편분이신가요?”
안경 너머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관찰하던 민혁이 승준에게 물었다.
“네.”
싸늘한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남자의 눈빛이 살벌하다는 걸.
오늘 진짜 무슨 날이람? 이미 현우가 이 남자의 역치 값이 낮은 질투심을 본의 아니게 슬쩍 자극해 놓았는데 거기다 전 남친이라는 어마어마한 자극을 끼얹다니.
“흠, 산부인과 선생님한테서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저희 아기가….”
초원은 두 남자가 여기 어떤 역할로 앉아 있든 말든 환자라는 제 본래의 역할에 맞게 굴며 일부러 승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기. 아기 생각해요.
막상 본론을 꺼내자 그는 아기 걱정에 다시 온 신경이 쏠리는 눈치였다. 민혁이 산부인과에서 전해 받은 초음파 사진을 모니터에 띄우고 기본적인 걸 설명하는 사이 승준은 진지하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일단 크기도 작고 위험한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라질 가능성도 있는 겁니까.”
“뭐, 출산 전에 없어질 수도 있어.”
그런데 민혁은 승준이 질문을 하면 자꾸만 초원에게 답하며 반말을 했다. 노림수가 빤한 유치한 도발을 승준이 가만히 참고 있는 게 의외였다.
“조금 전에 유전자 이상이 원인인 경우도 있다고 하셨는데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까.”
“아, 뭐…. 양수 검사로 유전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는 법도 있는데….”
“양수 검사까진….”
초원은 승준의 동의를 구하듯이 마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다른 기형 소견은 전혀 없으니까 내가 보기에도 굳이 양수 검사까지 할 건 없겠고. 없어지지 않아도 예후가 나쁜 상태는 아니니까 걱정 많이 안 해도 돼. 그래도 모르니까 출산 후에 검사는 해 보고.”
“아!”
초원은 문득 든 생각에 손뼉을 쳤다.
“승준 씨.”
초원은 의사에게 해야 할 말을 승준에게 했다.
“그러고 보니까 나 어릴 때도 간에 돌 같은 게 있다고 그랬었는데 크니까 알아서 사라졌어요. 유전인가? 아무튼 걱정할 거 없겠네요.”
어차피 낳기 전에는 ‘크게 걱정하실 건 없는데 또 모르니 나중에 검사 받아보세요.’ 같은 뻔하디뻔한 상담이 전부다. 초원이 얼른 진료를 마무리 짓고 이 가시방석에서 일어서는데 민혁이 물었다.
“첫 아이야?”
그녀는 아이 질문에 늘 그러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또 아련한 눈이었다. 이쯤 되니 초원의 뒷덜미가 당겨왔다. 전 여친의 남편 앞에서 내가 저 여자랑 과거가 있다는 티를 팍팍 내다니. 원래도 똥차였지만 저거 완전 똥차 오브 똥차 아냐.
더러운 건 피해야지. 승준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나란히 문밖으로 나가려는 찰나였다.
“김민혁 씨.”
승준이 불현듯 뒤돌아보며 똥차의 이름을 불렀다.
“토끼 밥 주는 일 좋아합니까?”
민혁에겐 실없기만 한 소리에 초원은 사색이 됐다. 승준이 말하는 토끼는 분명 일산 연구소 지하의 식인 토끼였으니까.
“가요. 가요.”
초원은 승준을 얼른 밖으로 잡아끌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초원은 핸드폰으로 열심히 논문을 검색했다.
“이거 봐요. 알아서 없어지는 경우도 많대요. 치명적인 것도 아니고.”
“그럼 다행이고….”
그러고는 한참 말없이 운전대만 잡고 있던 승준이 다시 입을 열고서야 초원은 깨달았다. 신경을 딴 곳으로 돌리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는 걸.
“저놈이 그놈인가?”
저놈, 그놈. 대명사뿐인데도 말하는 바가 아주 쏙쏙 머리에 들어왔다. 아무 대답 하지 않은 걸로 대답이 되었는지 승준이 손등에서 힘줄이 불쑥 솟도록 운전대를 강하게 쥐며 실소했다.
“초원 씨 취향이 정말 확고하네.”
“취향?”
“착하게 생긴 얼굴.”
초원은 굳이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머릿속에선 또 현우를 떠올리고 있겠지.
“그리고 아마도 그렇지 못한 인성.”
그녀는 픽 웃기만 했다. 승준이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손을 뻗더니 초원의 배를 쓰다듬었다.
“한나야, 다른 건 엄마 닮아도 남자 보는 눈은 엄마 닮지 마.”
“이런 것도 태담이라고….”
“우리 한나 엄마가 생각보다 더 눈이 낮네. 적어도 얼굴 수준은 맞춰 사귈 것이지.”
저 얼굴로 그런 소릴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옆에 계신 분을 기준으로 삼자면 누구나 오징어였다.
“취향도 극복할 정도의 매력을 가진 남자가 질투라니. 너무 안 어울리네.”
능청을 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더니 그제야 승준의 입꼬리가 위로 휘었다.
“토끼 밥.”
“쓰읍, 살인은 안 돼요.”
“살인만 아니면 되고?”
초원은 옆으로 눈을 흘겼다.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이 사람, 도덕책같이 생겨선 가끔 윤리가 어긋난 구석이 보였다.
“난 솔직히 오늘 마주쳐서 속 시원해요. 사실은….”
이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다. 초원은 태동이 느껴지는 자리를 쓰다듬으며 털어놓았다.
“불임 때문에 차였거든요.”
승준은 뜻밖의 말에 제 귀를 의심했다. 당연히 초원이 먼저 파혼했을 거라고 여태 믿고 있었다. 차면 몰라도 ‘차인다’라는 말과 정말 안 어울리는 여자니까.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땐 괜찮다더니 결혼 직전에 말을 바꾸더라고요.”
“아, 그래서….”
파혼의 내막을 알고 나자 깨달음이 이어졌다.
초원은 소설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그에게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초원의 믿음을 얻지 못했던 이유는 이미 예전에 누군가가 믿음을 처참히 깨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결혼하지 않겠다 하고, 그에게 불임인 걸 고백하자마자 헤어지자고 고집을 부렸다. 다른 남자가 준 상처를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진짜 무슨 못 쓰는 나무 취급당했는데. 아까 들어갈 때 표정 봤어요? 완전 경악하던데, 그쵸? 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네.”
배를 쓰다듬으며 의기양양하게 웃는 초원의 어깨에 승준은 팔을 두르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래, 이젠 극복해서 다행이야.
이마에 입을 맞추자 초원이 그의 어깨에 기대어 왔다.
“아무튼, 지금 보니까 그때 차여서 다행이에요.”
그렇네. 그에겐 주먹을 한 대 꽂아주고 싶은 개자식이 실은 은인인 셈이었다.
“그리고 취향이 아니면 운명이죠.”
초원이 그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한 애틋한 말에 승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상형이 아니면 운명이죠.”
뜨거웠던 오아시스의 밤, 제가 했던 말과 다르지 않았다.
“잘 자요.”
입술이 가볍게 포개어졌다가 떨어졌다. 옆으로 돌아누우려던 초원이 멈칫했다. 평소라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배를 쓰다듬다 자는 남자인데 오늘은 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안 자요?”
대답 대신 웃으며 이어버드를 끼는 승준의 손에는 초원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오늘 찍은 초음파 영상을 또 보려는 듯했다.
“닳겠다.”
승준은 이번에도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초원은 모를 거다. 왜 그가 고작 흑백에, 얼굴을 분간하기도 힘든 아이의 초음파 사진에 이토록 집착하는지.
그곳에 남겨 두고 온 아이들의 기억은 꺼내어 볼수록 마모되어 갔다. 하지만 핸드폰 속의 이미지는 닳지 않는다. 보고 싶을 때마다 마음껏 꺼내어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그 일을 겪고야 알았다.
“아빠 닮았나 봐요.”
승준은 오늘 낮 초원의 말을 문득 떠올리며 웃다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아이가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 저도 초원도 아닌 두고 온 아이를.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초원은 그새 잠들어 있었다. 그는 동그랗게 솟은 배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톡, 이 미약한 태동을 느낄 때면 만감이 교차했다. 다른 세상에서 첫 아이의 태동을 느꼈던 순간부터 늘 그랬다.
“한나, 아프지 말고 40주 다 채우고 나와.”
초원은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초음파 사진에서 보이는 흰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잠든 엄마의 배 속에서 노는 딸에게 계속해서 조용히 말을 걸던 때였다.
지잉-.
승준의 손안에 든 초원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걸려 있던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미친놈….”
저장되지 않은 이름으로 온 메시지의 알림을 누르자 메신저가 열리고, 앞부분만 보이던 메시지가 끝까지 표시되자 승준의 표정이 더욱더 굳었다.
[초원아, 나야... 민혁 오빠...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다.. 넌 참 여전히 예쁘네 ㅎㅎㅎ]
넌 아직도 쓰레기냐? 오빠라니, 돌은 새끼. 누가 누구 오빠야?
[임신 안된다고 하더니 치료 좋은 데서 받았나보네. 잘됐다 ㅎㅎ 안그래도 내가 너 걱정 많이 했어. 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편하게 얘기해]
네가 뭔데 내 마누라 걱정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것도 불순하게 보였다. 어느 의사가 새벽에 환자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냔 말이다.
환자 개인정보 유출로 신고하고 병원에 항의할까. 그렇지만 의사는 강력 범죄를 저질러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세상인데 핸드폰 번호를 사적으로 쓴 일 따위는 다들 웃어넘길 거다.
싸늘한 눈으로 화면을 내려다보던 승준의 입꼬리가 돌연 비틀렸다.
[아니 알고 보니 오진이었더라 ㅎㅎㅎ ^^;;; 한방에 생겨서 나 완전 깜놀했잖아.]
초원의 말투를 따라 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상대가 초원을 기다렸는지 1이 곧바로 없어지더니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그래? 근데 말이 안 되지 않나? 너랑 나 사이엔 안 생겼잖아]
그렇게 초원의 전 남자 친구가 판도라의 상자를 활짝 열어버리는 순간 승준의 속에서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어... ㅎㅎ 말하기 좀 조심스럽긴 한데.... 그럼 내가 문제가 아니었던 거 아닐까...?? 혹시 병원 가 봤어?]
그가 한 말이 의도대로 놈의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는지 1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 답이 왔다.
[그치만 난 아들도 있는데]
상대가 유부남에, 아이까지 있는 줄은 몰랐던 승준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처자가 있는 놈이 남의 마누라한테 새벽에 문자질을 하다니. 질이 나쁜 새끼네, 이거.
[헐... 미안 미안 내가 쓸데없는 소릴 한 것 같네. 내 말은 그냥 잊어 줘]
잊지 마, 이 새끼야.
[암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어! 잘 지내 ^^]
1은 사라졌지만 상대는 답이 없었다. 승준은 픽 웃으며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 보는 눈은 엄마 닮지 마, 한나.”
* * *
“아이고, 또?”
늦은 밤, 골목길을 따라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여자의 눈빛이 뾰족해졌다. 등산로 입구의 어둑어둑한 주차장에 세워진 차가 크게 들썩인 참이었다. 까맣게 선팅된 차의 내부는 보이지 않았지만 안 봐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뻔했다.
“저것들 확, 경찰에 신고할까 보다.”
“냅둬. 좋을 때지. 기억 안 나? 우리도 젊을 때….”
“아, 시끄러워. 이 인간이 헛소리하고 있어.”
초로의 커플이 다음 가로수를 찾아 뛰어가는 강아지에 끌려 사라지는 순간 차가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하아, 왜?”
조수석에 앉은 20대 중반의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아, 혀로 좀 더 굴려 보라고. 응? 이렇게.”
운전석에 앉은 20대 초반의 여자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요구하더니 혀를 입 밖으로 꺼내 굴리는 시늉을 했다. 핀잔에 머쓱해진 것도 잠시, 여자가 야릇한 짓을 하자 흥분한 남자는 다시 덤벼들었다.
달그락달그락.
농밀하게 키스를 주고받는 두 사람에게서 키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입술을 떼는 순간 여자의 혀 위에서 푸른 것이 가로등 빛을 받아 번뜩였다.
“하아….”
숨을 돌리는 남자의 볼이 며칠 전보다 홀쭉해 보였다.
“근데 루비는 본명이 뭐야?”
남자가 묻는 순간 여자의 색기 어린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취. 그 촌스러운 본명이 문득 떠오른 탓이었다.
“누나라고 불러.”
새파랗게 어린 게 어디서 말을 찍찍 놓고 있어? 루비는 따귀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걸 참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루만. 오늘 딱 하루만 더 먹고 버리자.
남자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다. 그것도 잘 못 나가는 아이돌 그룹 멤버. 이런 애들이 접근하기 쉽고 또 유혹에 쉽게 넘어온다. 머리는 나쁘지만 운동을 어지간히 하는 듯 몸은 좋아 보이는 게 정기만 먹고 버리기에는 딱이었다.
“우리 루비는 그런 게 취향이야?”
남자는 루비가 귀엽다는 듯이 웃더니 몸을 가까이 숙이며 운전석에 팔꿈치를 걸쳤다. 멋있는 척하려고 애쓰는 꼴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좋아, 그럼 오늘 밤은 우리 ‘누나’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대신 내일 아침엔 오빠라고 불러 주는 거야.”
오빠? 내일 아침?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어쭙잖게 끼를 부려. 네가 이것밖에 안 되니 아직 못 떴지.
루비는 속으로 남자를 헐뜯으며 겉으론 쑥스러운 척 교태를 부렸다. 또다시 혀를 섞는 내내 이어지던 달그락 소리가 갑자기 멎더니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푸르스름한 구체가 삐져나와 아래로 떨어졌다.
“앗, 내 구슬!”
다행히 남자가 잽싸게 구슬을 받아 들었다.
“그나저나 누나는 특이한 플레이를 좋아하시네요.”
남자는 파랗고 투명한 구슬을 가로등 불빛에 비춰보았다. 오래도록 제일 잘나가는 걸그룹 멤버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루비는 항상 다람쥐처럼 한쪽 볼이 볼록 튀어나와 있는 게 매력 포인트로 유명했다.
사탕을 먹는 줄 알았는데 이런 아무 맛도 안 나는 유리구슬을 입에 물고 다닐 줄이야. 정말 독특한 취향이었다.
“얼른 내놔.”
갑자기 눈이 뒤집힌 루비는 남자의 손에서 구슬을 낚아채어 입에 쏙 넣었다. 여기 든 정기가 얼만데. 도력으로 환산하면 또 얼마냔 말이다.
저번 걸 도둑맞고 구슬의 씨앗을 찾아 이만큼 키우는 데 100년이 넘게 걸렸다. 또 도둑맞는다고 생각하면 눈이 뒤집힐 수밖에. 그랬다가 이걸 훔친 인간이 영능력을 가져 버리면 그 망할 양복 입은 어린 꼰대들이 그녀를 지하 격리실에 가둬 버릴 거다.
‘특관청 따위 없을 때가 살기 좋았지.’
이젠 사람 간이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예전이었으면 한 입 거리였을 인간 사내가 저를 잡아먹을 듯이 키스를 하는 내내 루비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침대에선 이걸로 뭘 하시려나.”
멍하니 정기가 모이길 기다리는데 남자가 입 안으로 혀를 쑥 넣더니 구슬을 가져갔다. 혀로 굴리랬지 언제 가져가랬나? 다시 빼앗아 오려는 찰나였다.
삐익!
느닷없이 어디선가 자동차 도난 경보음이 울리고….
꿀꺽.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다시 벌어진 입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아, 미친! 삼켰어!”
“야, 이 미친!”
지금 욕 나오는 사람이 누군데.
루비는 입에 손가락을 넣고 웩웩대는 남자를 노려보며 몰래 손을 들었다. 손끝에서 순식간에 자라난 여우 발톱이 날카로운 끝을 번뜩였다.
늦기 전에 저 자식의 배를 갈라야겠다. 어떻게 또 100년을 모아. 거기다 요즘은 구슬 씨앗을 찾는 것도 힘들단 말이다. 간을 마음대로 파헤치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차 문을 열고 밖으로 헛구역질을 해 대는 남자의 등에 손톱을 꽂아 넣으려던 찰나였다.
“뭐야, 이거….”
남자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멍한 얼굴에 혼란과 만감이 시시각각 교차했다.
저 얼굴, 안다. 100년 전에 구슬을 삼켰던 그 건달 놈도 저런 얼굴을 했었다. 세상에 대한 지식이 갑자기 몰려오며 혼란을 겪는 것이다.
“헉, 구미호!”
물론 거기엔 루비의 진실도 들어 있었다.
“내놔, 내 구슬!”
늦은 밤 주차장에서 때아닌 추격전이 시작됐다. 저깟 인간 놈, 도술을 부려 잡으면 그만이었지만 구슬이 없으면 도력을 온전히 쓸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 몸이 가진 능력만 써서 쫓고 할퀴는데 고작 인간이 여우의 잽싼 공격을 번번이 피하는 것이었다.
“야, 너 그거 삼키고 뭐 먼저 봤어?”
화가 나 주차장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더니 루비의 손에서 얄밉게 빠져나가 어느 차 뒤에 숨어 있던 놈이 숨을 헉헉대며 대꾸했다.
“창밖.”
안 돼.
루비는 사색이 됐다.
하늘을 봤잖아.
여우 구슬을 삼키고 무엇을 가장 먼저 보았느냐에 따라 인간의 능력이 결정됐다. 사람을 보면 사람을 알고 땅을 보면 땅의 이치를 알게 된다. 하늘을 보면 하늘의 이치, 즉 천기를 알게 되는 것이다.
“아, 망했어….”
어쩐지 공격을 쉽게 피한다 싶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에 더불어 예지력까지 생긴 것이었다. 이제 꼼짝없이 지하에 격리되게 생겼다고 좌절하는 그녀를 놈이 겁대가리 없이 불러댔다.
“야, 비취!”
“저게, 씨….”
“너, 너 내가 구미호인 거 다 밝혀버린다.”
여우 구슬은 인간에게 지식은 줘도 힘은 주지 않는다. 제 몸뚱이로는 구미호를 싸워 이기지 못하는 걸 아는 놈이 덜덜 떨며 협박을 했다.
“그걸 누가 믿어? 망한 아이돌이 업계 탑급 아이돌의 루머를 퍼트리다니, 그것도 구미호? 무슨 약 했냐는 소리나 들을걸?”
놈은 뭔가를 찾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여튼, 그건 네 것이 아니니 순순히 내어놓도록.”
참다못한 루비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덮치려는 찰나 놈이 씩 웃었다.
“너 벌점 1점만 더 받으면 격리네?”
놈이 소매가 너덜너덜 찢어진 제 팔을 들어 발톱으로 할퀴어진 상처를 이쪽으로 향했다. 다른 손에 들린 핸드폰에선 전화 신호가 가고 있었다.
“날 죽이려고 했다고 특, 뭐더라? 특관청! 어, 거기에 신고할 줄 알아, 이 구미호야!”
[여보세요?]
전화 너머에서 제 관리를 맡은 젊은 남자 요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비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인적 없는 골목길을 뛰어 사라지는 도둑놈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중얼거렸다.
“옛날이 좋았어.”
망할 정부. 망할 어린 꼰대들.
* * *
식후 산책을 하기엔 무더운 날이었다. 하지만 냉동고나 다름없는 연구소에서 오전을 보낸 특수분석1팀 사람들은 온돌에 나른하게 늘어진 고양이처럼 화단 그늘의 벤치에 비스듬히 앉아 수다를 떨었다.
초원이 토마토 생과일주스를 다 비우고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던 때였다.
“초원 씨, 아기 이름은 정했어요?”
옆에 앉은 여자 연구관이 물었다.
“한나요.”
“한나?”
“조 팀장님이 그렇게 하고 싶대요. 예전부터 딸 낳으면 한나라고 하고 싶었다나 뭐라나.”
“의외다. 조 팀장님 그런 면이 다 있으시고.”
그 순간 허벅지에 올려 둔 초원의 핸드폰이 울리며 화면이 켜졌다.
[♥ㅈㅅㅈ♥: 우리 공주님들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알림을 슬쩍 본 연구관이 웃었다.
“아휴, 조 팀장님 양반은 못 되시겠네.”
“아, 점심 사진 안 보냈네.”
“좋을 때다. 나도 신혼 땐 남편이 점심때 뭐 먹었냐고 물어보고 막 그랬는데. 아니, 근데 공주님이라니 달달해서 이 썩겠어.”
민망해진 초원은 핸드폰을 보다 말고 손사래를 쳤다.
“아, 이거 제가 아니라 조 팀장님 따님 뭐 먹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사실 승준은 우리 공주님‘들’이라고 콕 집어 말했지만.
애칭 센스, 진짜. 이 나이에 무슨 공주야. 여왕이면 몰라도.
뜨거워진 볼에 손부채질을 하며 메신저 앱을 연 초원은 승준의 메시지를 누르려다 멈칫했다.
어라? 이건 뭐지?
못 보던 채팅방이 있었다. 상대방의 이름으로 ‘김민혁’이 보이는 순간 초원의 눈이 커졌다.
헐, 이건 뭐야? 이 미친놈 언제 연락했어?
[암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어! 잘 지내 ^^]
심지어 대화까지 나눈 흔적이 보이자 초원은 승준에게 점심 사진을 보내려던 것도 잊고 채팅방을 눌렀다.
헐….
전 남친과 ‘자신’ 사이에 오간 대화를 읽어 본 초원은 깨달았다. 진짜 정신 나간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걸.
[아니 이보셍뇨 조티맞ㅇ님]
[왜 그러십니까 홍 연구사님]
[아니 이런 짓을 하면 어떡해요?]
[무슨 짓?]
[남의 가정을 파탄 내려고 작정했어요?]
[아 난 또 뭐라고]
[-_- ???? 또 무슨 짓 했어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_- 수상쩍은데]
[근데 내가 별소리했나?]
[아니, 잘 살다가 괜히 이상한 의심할 거 아니에요]
[자기 아내를 믿으면 의심할 리가 없지. 안 그래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의산데 뭐. 유전자 검사만 해도 알겠지. 그리고 난 어떠한 직접적인 언급도 한 바 없어요.]
간접적인 암시는 실컷 해 놓고 이런 소릴 하다니.
[어후 약았다 진짜]
[약았다니 ㅠㅠ]
왜 갑자기 이모티콘이야. 초원은 흠칫했다.
[-_-;; 잘...했..어..요...]
[그게 다야?]
[사랑-_-해요]
[나도 사랑해 ♡]
손바닥 뒤집듯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우리 한나는 점심 맛있는 거 먹였어요?]
[돈가스 먹였어요]
초원은 사진을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
[맛있었겠다 아빠는 바빠서 김밥 먹었는데 ㅜㅜ]
그래, 이런 게 적응이 안 된다는 거다. 그 근엄한 얼굴로 지금 ‘ㅜㅜ’ 이런 걸 치고 있다니.
[저녁때 맛있는 거 해 줄게요]
[고생스럽게 뭘. 그냥 먹고 싶은 거 말하면 내가 사 갈게요]
대화는 어느덧 평소로 돌아와 있었다.
[집에서 봐요]
소소하고 평화로운 대화를 끝내고 앱을 끄자 나타난 화면의 얼굴을 초원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 도덕책 같은 얼굴, 펴면 살생부일지도.
인간 최음제를 빼돌렸던 일, 그리고 명계의 서천꽃밭에서 꽃을 훔쳐 왔던 일. 특관청의 팀장급은 할 수 없지만 그 남자는 해냈던 이런저런 일들을 되돌아보며 초원은 생각했다.
제가 알고 보면 꽤 무서운 남자랑 결혼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 * *
“자, 오늘은 게스트 분들을 모시고 마피아 게임을! 라이브로! 해 볼 텐데요.”
쨍한 조명과 카메라 앞에 선 진행자가 방송을 시작하는 사이 이안은 몸에 밴 습관대로 상큼한 미소를 지었지만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어렵게 얻은 자리야. 그러니까 망치지 마.’
스태프들 사이에 선 매니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구독자가 200만 명이 넘는 개그맨 출신 유명 너튜버의 라이브 방송에 데뷔 6년 차에도 못 뜬 아이돌 멤버를 넣기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냐며 매니저가 공치사를 했지만 이제 이안은 알았다.
‘그냥 접대 한 번 하고 쉽게 꽂아 넣은 거면서.’
여우 구슬을 삼킨 후로 이안은 인기 욕심도, 돈 욕심도 없어졌다. 이제는 미래를 볼 줄 아니 돈이야 로또부터 주식, 코인까지, 손만 까딱해도 긁어모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아이돌을 관두지 않은 건 계약 해지가 골치 아프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내년이면 계약이 만료되니 그사이 얌전히 일하는 시늉만 하다가 은퇴하면 되지 않을까.
이제 뜨나 안 뜨나 상관없으니 지금 속이 바짝 타는 이유는 방송 출연의 부담감 때문이 아니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카메라 쪽은 비운 채 원탁에 둘러앉은 다른 출연자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들의 과거와 미래가 이안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억지로 알게 되는 건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걸 알 수 있는 능력이 처음엔 좋은 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모든 걸 알게 되는 순간 세상은 무서운 곳이 되었다.
믿었던 사람들이 달라 보였다.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것의 8할은 거짓이었다.
세상 모든 걸 다 알아도 이 능력을 멈추는 법은 몰랐다. 아니, 그런 방법은 없었다. 죽는 것밖에는.
그 생각을 했던 순간에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는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에는 점점 자신이 미쳐가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럼 오늘의 게스트를 소개해 볼까요? 먼저 정말 정말 어렵게 모신….”
위태위태한 정신을 다잡으며 다른 게스트에게 박수를 쳐 주던 때였다. 이안의 눈앞에 가까운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헉, 안 돼. 안 할 거라고!’
이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머릿속에서 떨쳐지지 않는 이미지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기까지 했다.
“이안 씨?”
맞다. 이거 라이브였지?
“아, 네!”
이안은 눈을 번쩍 뜨자마자 멍해졌다. 진행자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에 충격을 받은 그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감옥에 있어야 할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이 모든 게 이안이 조금 전 본 미래대로였다.
“으악! 이 더러운 세상! 이젠 못 참아!”
결국, 운명에 진 그는 이성을 잃고 다른 연예인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지욱이 형은 모범 납세자라면서 탈세 엄청나게 했어요! 아, 선배님! 그 영화 절대 찍지 마세요. 흑역사 될 거예요. 누나, 그 남자 만나지 마요. 재벌 아니고 사기꾼이에요. 헉, 뭐야. 저 의사 쌤 약쟁이잖아. 아니, 지욱이 형도 같이 약 해요?”
난데없는 폭로를 당한 출연자들이 당황한 가운데 이안은 스태프들을 향해 뛰어가 카메라를 붙들었다.
“대통령은 양정태가 될 거예요! 하늘이 지지하는 대선 후보니까! 신선들이 양주에 땅 사 놓고 개발만 기다리고 있다고! 옥황상제도 한패야! 이 더러운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