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얼음공주와 도둑
끼익, 문이 열리더니 둔탁한 구두 굽 소리가 타일 바닥을 울렸다.
“이제 티 나더라.”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남자 둘이 칸을 여러 개 띄운 채로 소변기 앞에 섰다.
“응? 뭐가?”
“아까 홍 주임 못 봤어?”
“아⋯, 난 잘 모르겠던데?”
“얼핏 듣기론 벌써 4개월이라던데? 폴더로 배 가리고 다니더니만 그런다고 티가 안 나나.”
“참나, 그 얼음공주랑 저승사자가 사고 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잖아.”
“근데 둘 중에 누가 얌전한 고양이야?”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와하하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남자 화장실 벽을 울렸다.
“전에 회계과 오 사무관은 결혼 생각 없다고 찼다며?”
“사무관 나부랭이는 급이 안 맞아서 결혼 생각이 안 든다는 거겠지.”
“근데 좀 불쌍하긴 하네.”
“응?”
“홍 주임이 보기보다 순진한가 봐. 저보다 나이 많은 남자한테 그렇게 홀랑 먹히고.”
“조 팀장, 그 더러운 도둑놈한테 된통 걸린 거지. 그 소문 들었냐?”
“응?”
“저보다 어린 여자한테 장가 한 번 가 보겠다고 삼신할매까지 끌어들여서 임신시켰다잖아.”
화장실 저편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칸막이가 벌컥 열렸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두 남자는 등 뒤로 울리는 굵은 목소리에 놀라 지퍼를 올리다 말았다.
“아⋯, 팀장님 그게⋯.”
“⋯죄송합니다.”
남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이 됐다. 뒷담화의 당사자가 화장실 칸에 숨어 모조리 들어 버리는 뻔한 전개를 직접 겪을 줄이야. 하필 그 불같고도 얼음장 같은 성깔로 유명한 사람을 상대로. 이제 직속 상사한테 깨지고 인사과에 불려 가는 건가? 남자들은 고개를 숙이며 승준의 눈치를 초조히 살폈지만, 승준은 태연하게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기 시작했다.
“뭐, 됐습니다.”
저 성깔에 됐다는 말을 액면가 그대로 했을 리가 없다고 의심한 직원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쭈뼛댔다.
“다들 배 아픈 건 나도 이해하니까, 뭐.”
승준은 종이 타월을 턱턱 뽑더니 손의 물기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우리 청의 절세미인이 품절녀가 됐으니 얼마나 속이 쓰리겠어. 난 욕 먹어도 싸지.”
승준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거울에 비친 직원들을 향해 웃었다.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눈빛은 ‘앞에선 말도 못하면서 뒤에서 혀나 놀리는 가소로운 새끼들’이라고 비웃고 있었다.
남자들의 얼굴에서 슬슬 핏기가 사라지는 걸 보며 승준은 피식 웃었다.
“이거 어때요?”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붉은 실크 넥타이 매듭을 괜스레 고치기 시작했다.
“오늘 내 생일이거든.”
“아, 축하드립니다.”
느닷없는 생일 이야기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축하 인사를 하는 직원들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맨날 넥타이 다 죽은 톤이라고 잔소리하더니 아침에 생일 선물이라고 이걸 매어 주더라고. 근데 나는 이렇게 튀는 색은 안 매 봐서 영 어색하네.”
그제야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본 남자들이 아부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아주 잘 어울립니다, 팀장님.”
“역시 사모님 센스가 대단하시네요.”
아직 청첩장도 못 돌렸는데 사모님 소리라니. 아부가 과하다는 듯 피식 웃긴 했지만 내심 듣기 좋았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던 승준은 예의 바르게 두 손을 모으고 선 두 사람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럼 고생들 하세요.”
또 한 번 그 가소롭다는 눈빛을 던지며 어깨를 툭툭 치던 승준이 밖으로 사라지자 참았던 숨을 터트리는 소리가 화장실 벽을 울렸다.
똑똑똑.
“네.”
승준은 서류에 파묻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오늘 인천까지 늦지 않게 가려면 칼퇴를 해야 했고 그러려면 한눈팔 시간이 없었다.
철컥,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리고도 ‘팀장님, 바쁘십니까?’ 같은 팀원들 고정 멘트가 들리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슬며시 들었던 그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예비 ‘조 팀장 사모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 승준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초원의 손에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이젠 이 여자가 이렇게 종이 한 장 딸랑 들고 팀장실로 찾아올 때마다 간이 조마조마한 그였다.
이번에는 또 뭘 들이밀며 사인해 달라고 하려나 조바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는데 초원은 책상 앞에 서서 수줍게 웃더니 두 손으로 종이를 공손히 내밀었다.
“팀장님, 결혼 부탁드립니다.”
결재를 부탁하는 말투로 혼인 신고서를 내민 초원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승준의 반응을 살폈다. 종이를 받아 든 그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이거는 아빠 생일이라고 아기가 주는 선물이에요.”
초원이 절반을 써 둔 혼인 신고서에서 그제야 눈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는 승준의 두 눈이 젖어 있었다. 부드럽게 올라가던 그의 입꼬리가 불현듯 멈췄다. 울먹임을 참느라 굳게 다물려진 입술이 달싹였다.
승준이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짓길 기대했던 초원은 만감이 교차하는 그 얼굴을 보자 충격을 받았다. 이게 이 남자에겐 눈물이 날 정도로 큰 의미인 걸, 제 두려움에 눈이 멀어 외면했던 시간을 떠올리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 정말 이기적이었구나.’
혼인 신고서의 나머지 반쪽을 채우려 펜을 들던 승준은 느닷없이 훌쩍이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울고 그래요, 응?”
초원의 발치에 쪼그려 앉아 푹 숙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요. 내 생각만 하고 이기적으로 굴어서.”
“아냐, 나 사랑해서 그런 거잖아.”
초원은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하더니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승준은 흐느낌에 들썩이는 작은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뚝. 울면서 나가면 사람들이 내가 혼낸 줄 알잖아. 안 그래도 얼음공주와 도둑놈 소리 듣고 있는데⋯.”
초원이 울다 웃기 시작하자 승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곧바로 고개를 내린 그는 헐렁한 원피스를 입어도 제법 티가 나기 시작한 배에 입을 맞췄다.
“한나야, 아빠 생일 선물 고마워.”
훌쩍이던 초원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랭이라니까요?”
“무슨 여자애 태명이 그래? 성의 없게.”
“그럼 한나는 뭐예요? 누가 태명을 진짜 이름처럼 붙여요?”
배를 애틋하게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승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던 초원은 뭔가 미심쩍었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첫사랑 이름이 한나예요?”
“무슨 소리야? 그냥 예쁘잖아. 전부터 딸 낳으면 한나라고 해야지 한 것뿐이라니까⋯.”
핑계가 안 먹히나 보다. 승준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모른 체하며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지금이 이럴 땐가? 점심시간 다 됐는데 이거 얼른 써서 구청 가야지.”
승준은 씨익 웃으며 펜을 들었다.
수많은 칸을 다 메우는 데 걸린 시간에 비해 혼인신고 자체는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나란히 손을 잡고 구청 밖으로 나오는 길, 승준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얼떨떨하면서도 속이 시원하고, 또 한편으론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다음번에는 홍초원과 조승준으로 결혼하자던 약속을 마침내 지켰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의 초점 없던 눈동자가 눈앞에 어른거리자 그는 고개를 돌려 초원을 바라보았다. 승준을 올려다보는 두 눈에 반짝반짝 생기가 넘쳤다.
청명한 유월의 하늘 위로 솜사탕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눈을 감고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는 초원에게 승준은 포장을 벗긴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두 사람은 구청 옆 공원 벤치에 앉아 짧은 점심시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유부녀 되고 첫 끼가 너무 소박한 거 아닌가?”
“이따 저녁때 엄마가 맛있는 거 잔뜩 해 준다고 했는데요, 뭐. 원랜 굶고 가야 하는데 조랭이가 샌드위치 먹고 싶대요.”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문 초원은 ‘아, 이 맛이야!’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이 못 참을 정도로 귀여워 승준은 빵빵한 볼을 검지로 꼭꼭 눌러댔다.
“아, 그리고 나 아직은 유부녀 아니거든요?”
혼인 신고서는 접수만 되었을 뿐, 구청에서 처리되어 법적으로 부부 관계가 성립되기까진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처리 딱 되는 날 기념으로 우리⋯ 아, 장어 먹으러 갈래요?”
“장어? 흠, 무슨 뜻이지? 밤에 재우지 말란 뜻인가?”
“뭐, 겸사겸사⋯. 후식으로 30대 짐승남도 먹어 줘야 하지 않겠어요?”
미소는 새초롬한데 붉게 물드는 뺨이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후식 많이 먹어서 배가 이렇게 나와 놓고는⋯.”
둘은 대낮 서울 한복판에서 29금 토크를 하며 키득거렸다. 아직은 아기가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얼마나 다행인지.
승준은 샌드위치의 마지막 한 조각을 오물거리고 있는 초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행복하다.
그 시절의 금기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직도 그 습관이 남은 걸까? 근거 없는 두려움에 입술만 달싹이던 승준은 결심한 듯 초원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초원 씨.”
“네?”
“행복해요?”
“당연히 행복하죠.”
거침없이 대답한 초원은 고개를 뒤로 물리더니 그늘 한 점 없는 해맑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승준 씨도 행복해요?”
“응, 나도 행복해요.”
은은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귀를 기울였다.
산들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 지나가는 사람의 발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아스팔트를 거칠게 스치는 타이어 무리의 마찰음뿐.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다.
마음이 놓인 그는 기분 좋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초원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토끼 같은 자식과 트롤보다 무서운 마누라를 되찾은 남자의 얼굴에 유월의 햇살 같은 미소가 번졌다.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온도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