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특이생물관리3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올 때 토마토 주스]
문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의아하게 보는 시선이 느껴진 그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미 다들 누가 보낸 문자인지 눈치챈 듯 웃고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디스플레이의 숫자가 11로 바뀌고 문이 열리자 그는 실장과 과장이 먼저 나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당연한 일인 듯 먼저 내린 두 남자는 그가 따라 내리지 않는 걸 보고서야 눈썹을 추켜세웠다.
“먼저 들어가시죠. 저는 차에 놓고 온 게 있어 다시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차는 지하에 있는데 그가 누른 버튼은 1층이었다.
“내 결재판 어디 갔지?”
아무래도 결재판을 신청해서 받는 족족 훔쳐 가는 요정이 사무실에 있는 모양이라며 투덜대던 여자가 포기한 듯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옆자리의 파트너에게 물었다.
“선배, 복사할 거 있어요? 나 지금 회의 자료 복사하러 갈 건데.”
“아뇨. 복사 내가 할까요?”
“뭐래⋯. 됐어요.”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폴더 하나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아기는 따로 있는데 저를 아기 취급하는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주무관급 이하 단체 채팅방에 다시 불이 붙었다. 물론, 그 방의 인원은 평소보다 하나가 줄어 있었다.
[박병훈: 난 아직도 충격이 가시질 않아]
[이으뜸: ㅎㅎㅎ]
[차현우: 팀장님이 홍 주임 예뻐하는 거 모르는 사람 없었잖아요.]
[박병훈: 아니, 그래도 그게 흑심인 줄은 상상도 못 했지. 구미호도 돌 보듯 하시는 분인데.]
[차현우: 구미호는 돌 보듯 하는 게 현명한 거죠. 양기만 훔쳐 갈 텐데.]
[박병훈: -_- 그래도 엄청나다던데 양기를 기꺼이 바칠 만하다며]
[정아름: 아 뭐예요 이런 소린 남자들끼리나 하세요 -_-+]
[박병훈: 아, 아름 씨;;; 미안;;;]
[이으뜸: ㅎㅎㅎㅎ;; 그나저나 홍 주임님 곧 연구소로 가셔야 한다니 아쉽네요.]
[박병훈: 차현우 낙동강 오리알 됐네]
[차현우: -_-;;;]
[박병훈: 근데 홍 주임도 진짜 충격이야.]
[이으뜸: 자세히 보면 두 분 잘 어울리시지 않습니까? 느낌이 비슷한 것도 같고요.]
[박병훈: 그래 둘 다 아주 한랭 건조하니까]
[정아름: ㅋㅋㅋㅋ 근데 팀장님이야 그래도 초원 주임님이 그렇게 쌀쌀맞지는 않은데]
[박병훈: 그건 아름 씨가 여자라 그래-_- 남자들한테는 얼마나 까칠한데]
[정아름: 그래도 팀장님만 한가요;;; 으으 저승사자랑 어떻게 한집에서 살아요;; 생각만 해도 불편해]
[차현우: 집에서는 자상하시겠죠.]
[박병훈: 난 상상이 안 된다. 자상한 조승준 팀장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되게 몹쓸 짓 하는 기분이야;;;]
[차현우: ㅎㅎㅎ;]
[박병훈: 앞치마를 두르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팀장이라든가 이불 빨래하는 팀장이라든가 마누라 다리 주물러 주는 팀장이라든가]
[정아름: 으으-_- 그만하세요 기분 나빠]
[이으뜸: 좀 많이 안 어울리시긴 하네요.]
병훈의 자세하고도 제법 그럴듯한 예시에 현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언젠가 팀장이 초원의 다리를 주물러 주겠다는 소릴 하는 걸 제 귀로 직접 들은 바 있으니 작두를 타야 하는 사람은 초원이 아니라 병훈인 건지도 몰랐다.
초원이 복사한 자료를 들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앉고, 잠시 조용했던 채팅방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박병훈: 난 홍 주임이 차 주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차현우: 아닌데요;]
[박병훈: 아니, 차 주임 병원에 있을 때 홍 주임이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데. 난 딱 보고 캬아, 이런 게 사랑이지! 이랬단 말이지.]
[차현우: ㅎㅎ;; 그냥 홍 주임이 의리가 있잖아요.]
[박병훈: 하긴 그렇긴 하지. 근데 그때 팀장이 속 좀 탔겠어. 자기 여친이 딴 남자 구하겠다고 바락바락 대들었으니. 그러고 보면 팀장님도 참 대인배네.]
그때는 분명 초원이 누구의 여친도 아니었지만 현우는 모르는 척 넘겼다. 이미 말 많은 이곳에서 온갖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초원이었다. 물론, 현우도 못지않게 시달리고 있었지만. 초원과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데에다 실체 없는 염문의 주인공이었던지라 현우에게 질문의 포화가 쏟아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척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현우가 초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었다.
[이으뜸: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그때 팀장님이 전화로 홍 주임님 멀미한다고 신경 써 달라고 하셨네요. ㅎㅎㅎ]
[박병훈: 오, 맞아! 그랬네. 완전 티 나는데 왜 그걸 몰랐지? 그 강도 잡았을 때도 하늘 같으신 팀장님이 황금 같은 주말에 무슨 주임 땜빵인가 했더니 이제 보니 그냥 여친 챙기러 가신 거였구만]
[정아름: 맞다! 여친이 의사라고도 하셨잖아요.]
[박병훈: 와⋯, 지금 보니 완전 팀장이 이마에 ‘나 홍 주임이랑 사귐’이라고 써 놓고 다녔네. 이야, 내가 왜 그걸 놓쳤지?]
[차현우: 감 떨어지셨네요.]
[박병훈: 차 주임이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지. 어째 파트너면서도 몰랐냐? 완전 눈뜬장님일세]
[차현우: 그러게요 ^^;]
[박병훈: 헐, 차 주임. 팀장 앞에서 홍 주임이 차 주임네 집에서 잤다고 했잖아 0_0]
[차현우: 아 그 얘긴 좀 하지 말죠]
[박병훈: 차 주임 왜 목이 아직 달려 있냐?]
[차현우: 팀장님 앞에서 홍 주임이랑 저랑 식장 잡으라 하셨던 분 목은 왜 아직 달려 있어요?]
[정아름: 팀장님 오세요]
도합 네 개의 클릭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외근을 나갔던 팀장이 벌써 돌아왔다.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됐는데 말이다. 채팅창을 내리고 급히 일하던 척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늘 그렇듯 대충 인사를 받아 준 팀장이 팀장실이 아닌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의아하던 시선들이 그의 손에 들린 빨간 생과일주스 컵을 발견하는 순간 멋쩍은 시선으로 변했다.
[정아름: 와, 너무하시다 팀장님 ㅠ_ㅠ 초원 주임님 것만 딱 사 오시고 ㅠ_ㅠ]
[박병훈: 아름 씨가 팀장님 애 가졌어?]
[정아름: 으으-_-+ 왜 그런 소릴 하세요?]
[박병훈: 와, 씨. 금방 본 사람?]
[박병훈: 아 고개 들지 마 이 사람들아!]
[차현우: 왜요? 뭔데요?]
[박병훈: 저승사자가 웃었어. 어우 오싹해라]
[이으뜸: ㅎㅎㅎㅎ]
[차현우: ^^;;]
[박병훈: 얼씨구 홍 주임이 저렇게 빵긋빵긋 웃는 것도 오싹하다]
이제야 살 것 같다는 얼굴로 토마토 주스를 쪽쪽 빨아 마시는 팀원의 머리를 상사가 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병훈은 몰래 곁눈질하던 중인 것도 잊고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몸을 돌린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고, 이놈의 악관절이⋯.”
턱이 아파 입을 쩍 벌리고 있었던 척,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팀장이 서 있는 쪽에서 피식 소리가 나더니 이내 발소리가 팀장실로 이어졌다. 철컥,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다시 바쁘게 타자 치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박병훈: 진짜 충격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남의 집 안방 엿본 기분이야]
[정아름: 근데 사무실에서 애정 행각 너무 당당히 하시는 거 아니에요?;;;]
[박병훈: 뭐, 위에서 알아서 묵인해 주는데 눈치 볼 것 없겠지. 팀장은 운도 좋지. 규정 어기고 직속 부하 직원이랑 사고를 쳤는데도 위에서 앞장서서 다 덮어 주고. 운도 능력인가?]
팀장이 부하 직원과 비밀 연애에 속도위반까지 저지른 건 제4격리소의 잘못으로 살인마가 탈출하는 바람에 그가 죽을 뻔한 것에 비하면 죄도 아니었다. 그러니 위에서 오히려 팀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거다.
[박병훈: 근데 우리 용감무쌍하신 안 사무관님은 무덤 파다 파다 지쳤나? 요즘은 잠잠하네]
[차현우: 그러게요. 드디어 팀장님 약점 잡은 것처럼 구시더니.]
병훈은 사무실 저편에 앉은 희경을 힐끔거렸다. 틈만 나면 쏘다니던 분이 요즘은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고 일만 하고 있었다.
[박병훈: 하긴, 여기서 더 파면 쫓겨나는 건데 생각이란 게 있으면 이쯤에서 몸 사려야지.]
초원의 임신을 알고 나서 ‘팀장 이제 커리어 막히겠네.’라며 입을 놀리고 다니더니 결국 팀장의 도발에 맹하게 넘어가서 자폭해 버렸다.
계기는 2주 전엔가 있었던 체육 대회였다.
팀장의 집으로 출동했던 사고수습팀을 통해 조 팀장과 홍 주임이 그렇고 그런 사이 같다는 소문이 퍼지더니 이내 간부 비서들을 통해 조 팀장과 홍 주임이 속도위반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다들 궁금해 죽는데 두 사람 다 입을 열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병훈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바로 체육대회 경품 추첨으로 소문의 진위를 가리는 것. 인사과 사람들은 좋다구나 하고 병훈의 아이디어를 실천으로 옮겼다.
그저 운이 좋아 경품에 당첨된 줄 알았을 팀장이 선물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잔꾀가 들킨 모양이지만 그는 별말 않고 파란색과 분홍색 유아용 킥보드 중에서 분홍색을 골라 받아 갔다. 곧 애 아빠가 될 게 아니라면 왜 그걸 받아 가겠는가. 그게 병훈의 아이디어였고, 그 김에 아기의 성별까지 캐낼 수 있었으니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었다.
그런데 그게 희경이 무덤의 첫 삽을 뜬 계기가 되었을 줄이야. 희경의 자리를 노리는 병훈으로서는 결국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눈엣가시도 잡는 전개가 된 것이었다.
‘그거 여기 이 주임님 드리면 되겠네.’
뿌듯한 얼굴로 킥보드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초원에게 희경이 한 말이었다. 아기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킥보드를 몇 년씩이나 썩혀 둘 거냐며, 이미 유치원생인 딸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주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줄 생각 없었던 초원은 물론, 역시나 받아 갈 생각 없었던 물체팀 이 주임도 난감해하는 그때, 병훈의 옆에 서 있던 팀장이 툭 내뱉었다.
‘상반기 평정 때가 다 됐네.’
그리고 희경은 그게 함정인 줄 모르고 황소처럼 돌진했다.
작년 하반기 평정 때 불량 등급을 받은 게 다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팀원이 공사 구분 못 하는 팀장에게 부당한 입김을 넣은 탓이라며 인사과에 찌른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근거 없음’. 그 조승준 팀장이 바보도 아니고 근태 기록이며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을 리가 있겠나. 그렇게 팀장이 친히 파 준 무덤에 좋다고 뛰어든 희경은 요즘 다른 곳으로 가라는 압박을 팀장에게 받는 중이었다.
[박병훈: 저 인간 사라지면 나 진급 노려봐도 되는 건가? 사모님과 따님께 소갈비라도 사서 바쳐 볼까나? 후후후]
[차현우: ^^;;;]
[정아름: 근데요. 팀장님 결혼 생각 없는 거 아니었어요?? 전에 시큰둥하게 그랬잖아요. 결혼 굳이 해야 하는 거냐고. 그럼 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시는 건가?;;]
[박병훈: 내가 들은 소문은 다른데?]
빠르게 타자 치는 소리가 이어지고, ‘헉!’ 소리가 아름의 책상에서 터져 나왔다.
[정아름: 어떡해 초원 주임님 불쌍해 ㅠ_ㅠ]
그 순간, 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잡담은 그만하고 일들 합시다.”
놀라 굳어 버린 직원들을 뒤로 한 채 팀장은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랭 건조한 북극 한파가 지나간 듯한 정적을 가르고 빨대를 쪼오옥 빠는 소리가 얄밉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