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28)

이번은 해피엔딩?

참으로 궁상맞은 한 달이었다.

시리도록 싸늘해진 그의 눈빛과 태도를 마주하며 낮에는 잘됐다고 자신을 타이르곤 밤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였다. 물론, 헤어진 걸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헤어진 게 아플 뿐.

어느 날은 침대 밑에서 그의 머리카락이 나와서 울었고 또 어느 날은 안 나와서 울었다.

그러다 어떤 날은 그의 애프터셰이브 향이 미칠 듯이 맡고 싶어 늦은 밤 열려 있는 드럭스토어를 찾아 헤매기까지 했다.

‘내가 봐도 이렇게 꼴사나운데 남 눈에 안 보여서 다행이지.’

비밀 연애라 다행이었다. 여기저기 헤어졌다고 광고하고 다닐 필요 없으니.

애초에 회사에서 잘 웃고 다니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다. 그랬더라면 단번에 티가 났을 테니까.

회의실에 앉은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모를 거다. 현우만 빼면. 한 번씩 괜찮냐고 물어 오는 게 거슬렸지만 초원이 귀찮아하면 며칠은 입을 다물었다.

“⋯상반기도 두 달밖에 안 남았⋯.”

초원은 승준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멍한 시선을 노트에 고정했다.

버틸 만해진 거였다. 그렇지만 역시 고문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기억을 지우면 아무렇지 않아질까?

‘헉, 설마 예전에도 이래서 같이 기억 억제한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공식 사건도 아닌 개인의 연애사에 사건 보고서가 있을 리가.

상사와 사귀는 건 정말이지 미련한 짓이었다. 저 남자도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후회하고 있길 바랐다.

그날 후로 초원이 주었던 은빛 시계는 자취를 감췄다. 이젠 전보 신청서를 들고 찾아가도 흔쾌히 서명해 주겠지.

“헉⋯.”

옆에서 팔꿈치를 툭 치는 느낌에 번쩍 눈을 떴다.

‘헐, 나 존 거야?’

곁눈질을 하자 현우가 긴장한 얼굴로 눈치를 줬다. 조마조마한 시선을 들어 맞은편에 앉은 얼굴들을 살폈다. 희경의 매서운 눈빛에 초원은 죽을죄를 지은 표정으로 승준이 앉은 쪽을 살폈다. 다행인 건지 그는 늘 그렇듯 굳은 얼굴일 뿐, 이쪽은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아, 진짜 요즘 왜 이래?’

시도 때도 모르고 찾아오는 졸음 때문에 뜬금없는 약 먹은 병아리 신세였다.

‘약 먹은 병아리는 할 일이라도 없지.’

회의 중에 뻔뻔하게 자버린 초원은 민망함에 어깨를 움츠렸다.

승준은 고민 중이었다. 심령관리1팀에서 의뢰한 사건이 마음에 걸렸다. 심령1팀에서 받은 서류철을 연 그는 고 팀장이 친히 남긴 메모를 재차 읽으며 미간을 좁혔다.

[조 팀장님, 지원 요청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저희 팀에 있었던 홍초원 주임을 배정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영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심령팀 사람들, 죄다 이 정도 능력은 있으면서 굳이 왜?’

보직 이동 요청도 아니고 그냥 일손만 잠시 빌려 달라는데 못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그 일이 물귀신 씐 석촌호수 오리를 잡는 일이었다는 것. 승준이 걱정하는 건 물귀신도 오리도 아니고 호수였다.

‘물 무서울 텐데⋯.’

고개를 들어 회의 테이블 저편으로 스치듯 시선을 던졌다. 초원은 입술을 깨문 채로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숙인 승준은 고 팀장의 메모를 떼어 내곤 서류철을 왼쪽으로 내밀었다.

“이으뜸 씨.”

“네, 팀장님.”

“해병대 출신이랬죠? 심령1팀 지원 부탁합니다.”

“제정신이야?”

“죄송합니다.”

희경의 책상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초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생트집도 아니고 잘못은 맞으니 억울할 건 없었지만, 이게 이렇게 팀원들 앞에서 공개 처형하듯 잡을 일인가 싶기는 했다.

‘빌미를 준 내가 잘못이지.’

“간이 배 밖에 나와도 정도가 있지. 어디 회의 중에, 그것도 팀장님 앞에서 졸아?”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주임도 달았겠다 이제 몇 년 차 되니까 회사 생활이 아주⋯.”

별안간 희경의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안희경입니다. 네, 팀장님. 네, 알겠습니다.”

전화 통화가 이어지는 동안 초원은 어색함을 참으며 손가락만 비틀어댔다. 탁, 희경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뭐하고 서 있어? 가서 일이나 해. 혈세 아깝게.”

앙칼지게 면박을 준 희경은 서류와 스케줄러를 챙기더니 그대로 일어서 팀장실로 향했다.

“후우⋯.”

늦게 태어난 게 죄다. 늦게 태어나서 늦게 입사하는 바람에 저런 인간을 상사로 모시고 있으니.

초원은 속으로 투덜대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신경 쓰지 마요.”

현우가 칸막이 너머로 빼꼼 눈을 내밀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 저 인간 저 지랄하는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대각선에 앉은 병훈도 거들고 나서고 머쓱함이 덜 해진 초원은 쓰던 보고서를 마저 쓰기 시작했다.

“근데 어젯밤에 드라마라도 몰아 봤어?”

“아뇨, 완전 잘 잤는데요. 10시부터 잤는데.”

“피곤에 전 얼굴인데? 춘곤증인가?”

그 말에 초원은 서랍에서 거울을 꺼내 들었다. 눈은 병훈의 말대로 피로에 전 동태눈인데 우습게도 뺨은 아주 보름달 뜬 듯 빵빵하고 생기가 넘쳤다.

그러고 보니 요즘 살도 쪘다. 배도 자꾸 나오는 게 이러다 맞는 바지도, 치마도 없을 것 같았다. 허구한 날 먹고 자기만 했으니 그럴 법도 했지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피곤한 건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뿐인가? 곧 오리라 생각했던 생리도 3개월째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 갑상선 저하증?’

초원은 거울로 목을 비추어 보았다. 눈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혹시나 싶어 손으로 꾹꾹 눌러 보았지만 딱히 혹이 만져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모르니까 병원에 가 봐야겠네.’

‘뭐야? 벌써 폐경인가?’

불임인 것도 억울한데 나이 서른에 조기 폐경일 수도 있다니 암담했다.

갑상선 호르몬 수치는 정상이었다. 산부인과에 한 번 가 보라는 내과 의사의 말에 오후 반차까지 내고 병원에 온 초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기실에는 초원의 나이 또래가 몇몇 앉아 있었다. 부른 배를 쓰다듬는 여자들을 마주하고 우두커니 앉아 조기 폐경을 걱정하고 있자니 착잡했다.

지지리 복도 없지. 참 지뢰밭 같은 인생이다.

“어?”

신세 한탄을 하던 중, 갑자기 어깨를 무언가가 콕 찌르자 초원은 고개를 휙 돌렸다.

“아, 머리카락 묻어 있어서요.”

옆자리에 앉은 50대로 보이는 여자가 웃으며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쥐고 있었다.

“아, 네.”

결벽증이 심한 여자인가. 요즘도 생판 남의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사람이 있나 보다.

“아가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아⋯, 서른이요.”

이런 데서 모르는 사람과 말 섞는 건 싫었지만 살갑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예의 없이 굴기도 그랬다.

“어머, 훨씬 어리게 생겼는데.”

“감사합니다.”

“남자 친구는 있고?”

“네? 아뇨.”

하여간에 생판 남한테 이런 호구조사는 왜 하는 걸까? 초원은 마음이 불편해져 몸을 살짝 반대편으로 틀었다.

“참, 나도 주책맞지? 이렇게 생판 모르는 아가씨한테⋯. 우리 딸이 나보고 이러지 좀 말랬는데 내가 좀 심심해서.”

“아, 괜찮습니다.”

괜스레 미안해진 초원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딸이 아가씨보다 두 살 어리거든. 저 서울역 앞에서 제약 회사 다니는데.”

“아, 그러세요?”

설마 딸이 특관청에 다니는 건가 싶었지만 서울역 앞에는 실제로 제약 회사가 몇 군데 있었다.

“아가씨는 어디 다녀?”

“저도 제약 회사요.”

“그래? 같은 덴가?”

“⋯⋯.”

“근데 아가씬 말수가 별로 없나 봐?”

“아, 네. 하하⋯.”

보통 이 나이대 아주머니들은 자식 자랑이며 재산 자랑이며, 이야기를 하는 걸 듣는 것보다 더 좋아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초원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들어 주는 건 못 할 거 없는데⋯.’

위아래를 뚫어져라 훑어보는 시선이 불편했다.

“등산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초원은 아주머니의 발치에 놓인 등산 가방을 보고 물었다.

“어, 아니. 그냥 내가 짐이 좀 많아서.”

“홍초원 님.”

간호사가 이름을 부르자 초원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머니에게 눈인사를 했다

‘어후, 살았네.’

그렇게 들어가기 싫었던 진료실로 초원은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안 좋아서 오셨어요?”

마주 앉은 여의사가 안경을 고쳐 올리며 물었다.

“3개월째 생리가 없어서요.”

“임신 가능성은 없고요?”

“아뇨.”

“피임약 쓰시는 거 있으세요? 약 때문일 수도 있거든요.”

“아뇨, 제가 사실 불임이거든요. 배란이 안 돼서⋯.”

“아⋯.”

의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얼굴에 딱하다는 기색은 없어 진료실 공기가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생리는 규칙적이셨어요?”

“네, 가끔 스트레스 심하게 받으면 한 달 정도 늦은 적은 있는데 어쩌다 한 번이었거든요.”

“그럼 옷 갈아입으시고 초음파 한 번 보죠.”

의사가 굴욕 의자 뒤 커튼을 가리키자 초원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울상이 됐다.

다리 사이로 쑤욱 들어오는 프로브는 차갑고 끈적했다. 그 불쾌한 느낌에 초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뜨겁고 끈적한 물건이라면 익숙한데⋯.’

머릿속 음란마귀가 눈치 없이 튀어나왔다.

‘시끄러워. 낄 때 안 낄 때를 모르네. 자꾸 그러면 굿해서 쫓아낼 거야.’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는 의사와 눈이 마주치자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불편하세요?”

“아, 아뇨. 하하⋯.”

“금방 끝날 테니 잠시만 참으시면 돼요.”

아무리 여의사라도 이렇게 다리를 쩍 벌리고 있는 채로 눈을 마주치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초원은 창피함을 숨기려 고개를 돌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 저게 뭐지?’

그냥 회색빛이어야 할 자궁 한가운데에 검은 공간이 있었다. 그것뿐인가? 그 아래쪽에는 아무리 봐도 조랭이떡같이 생긴 무언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왜 저런 게 저기 있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렇게 생긴 걸 본 적이 있었다. 의대 시절 수업 시간에, 그리고 언니가 조카를 가졌을 때 보여 줬던 초음파 사진에서.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머릿속이 멍해졌다.

‘꿈인 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지만 아기는 엄마에게 ‘나 살아 있어요.’라고 외치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선생님, 설마⋯.”

초원은 차오르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의사의 얼굴에는 이미 축하의 뜻을 담은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임신이시네요. 14주 정도 된 것 같은데.”

“아니, 저 불임인데⋯.”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초원을 향해 의사는 모니터를 돌리고 패널 위의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세찬 심장 소리가 귓가를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꼼지락꼼지락 팔다리를 움직이는 아기에게 홀려 눈을 떼지 못하는 초원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불임은 병원에서 진단받으신 거예요?”

“네.”

“드물지만 검사가 잘못됐을 수도 있고 기적적으로 난소가 회복됐을 수도 있고요.”

“네, 진짜 기적이네요.”

병원은 물론, 삼신할매도 안 된다던 기적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적은 신이 만드는 것 아니던가. 그 신도 못 한다던 일이 일어난 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기는 다 건강하니까 걱정 마시고 태교 열심히 하시고 4주 후에 뵐게요.”

“네, 감사합니다.”

태교라니. 평생 자신과는 상관없을 줄 알았던 말을 들으며 진료실 밖으로 나오는 기분이 얼떨떨했다. 바닥을 밟는 것이 마치 구름이라도 밟는 것 같아 걸음 하나하나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왜? 어째서? 어떻게?’

소중하디 소중한 보물을 품은 초원은 접수대 앞 빈 소파에 조심스레 앉았다. 멍하니 초음파 사진만 두 손에 쥐고 내려다보던 그녀의 옆에 누군가가 털썩 앉았다.

“아이구, 아가씨 임신했어?”

좀 전의 그 아주머니였다.

“네? 아, 네.”

입으로는 인정했는데 머리로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름이 불리자 초원은 계산을 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화창한 5월의 오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분주하게 걸어가는 사람들과 어딘가로 빠르게 달려가는 차들을 초원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았다. 설마 병원 대기실에 앉아 졸면서 꾸는 꿈인 건 아닐까? 아니면 잔인하기 그지없는 몰래카메라라도 되는 걸까? 누가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 ‘몰래카메라였습니다!’하고 외치길 기다리며 초원은 길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피식 웃었다. 엉뚱한 상상에도 정도가 있지.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답을 몸속에 품고도 이러는 자신이 우스웠다.

지하철역을 향해 멍하니 발걸음을 옮기던 초원은 역 앞에 있는 대형 의류 매장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1층 쇼윈도에 전시된 자그마한 마네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초원은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구경만 하려고 들어갔는데, 어느새 하늘색 구름무늬 바디 슈트와 토끼 귀가 달린 분홍색 우주복을 들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아기 성별은⋯.’

‘그건 사실 말씀드리면 안 되는데⋯.’

‘아, 그쵸.’

‘⋯옷은 분홍색 사시면 되겠네요.’

딸이라니. 기적적으로 생긴 것도 고마운데 딸이라니. 아직 손바닥 크기도 안 되는 아이를 두고 벌써 예쁜 옷만 입히고 머리도 예쁘게 땋아 줄 생각을 하는 초원의 입꼬리가 좀처럼 내려갈 줄 몰랐다.

‘에잇, 하늘색이어도 예쁘면 그만이지 뭐.’

둘 다 집어 쇼핑백에 넣었다.

‘으앙, 진짜 보드랍다. 진짜 쬐끄맣고⋯. 세상에, 이건 인형 신발 같네.’

이것저것 예뻐 보이는 건 다 집어 이리저리 돌려보고 만져보았다. 항상 언니 옷만 물려 입었던 어린 시절의 한이라도 풀듯 초원은 카드값 생각하지 않고 쇼핑백을 마구마구 채웠다.

‘아, 신난다.’

제 옷 사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즐거웠다. 손에 커다란 종이 백을 든 초원은 다른 손에 든 핫도그를 한입 크게 베어 물으며 지하철 승강장 벤치에 앉았다.

아직도 꿈만 같았다. 기분 내키는 대로 아기 옷을 잔뜩 사긴 했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초원은 핸드백 안주머니에 넣어 둔 초음파 사진을 꺼내 들었다.

‘진짜 임신 맞아?’

꿈이 아니라는 증거를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의사가 맞댔잖아.’

‘근데 의사가 틀렸으면?’

‘그게 말이 돼?’

‘아니, 그럼 이건 말이 되고?’

간절히 빌어도 안 된다던 일이 어쩌다 일어난 건지 아직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헐, 진짜 임신 맞잖아.”

초원은 임신 테스트기에 떡하니 뜬 새빨간 두 줄을 보고 외쳤다.

집에 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온 집 안을 뒤졌다. 승준이 예전에 사다 줬던 임신 테스트기를 찾아 손에 쥔 초원은 곧바로 욕실로 향했더랬다.

병원에서 초음파도 실컷 봐 놓고 임신 테스트기를 쓰고 앉았으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와, 진짜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항암 때문이라고, 난자가 망가져 성숙이 안 된다고 들었다.

‘그 뇌종양 때문에⋯.’

초원은 습관처럼 왼손을 들어 왼쪽 귀 위를 더듬었다. 원래는 이 자리에 수술 흉터가 있었다. 그랬던 걸 그 아이가⋯.

‘다 고쳤어요.’

“아!”

이제야 깨달았다. 아이가 말하던 ‘다’에 불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걸.

“세상에, 나 왜 그 생각은 못 했지?”

이렇게 큰 선물을 아낌없이 주고 간 아이를 떠올리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마워, 시온아. 진짜 진짜 고마워.”

고맙단 말만으로 다 갚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한테 제사 또 지내 달라고 해야지.’

눈가를 훔치던 초원은 느닷없이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아아, 나 진짜 바보 아냐.”

그걸 모르고 혼자 울고불고 생쇼를 했다. 할 필요 없었던 고민을 하며 승준을 힘들게 한 건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다. 입에 담기도 힘든 상처를 주면서 아이 아빠를 억지로 밀어냈는데 그때도 배 속에 이 아이가 있었다니.

‘헐, 설마 얘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초원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승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얘, 힌트 좀 주지 그랬니?”

사실 아기는 힌트를 드럼통째 퍼붓다시피 했는데 임신은 생각도 못 했던 초원이 눈뜬장님이었다.

‘어떻게 얘기하지?’

그 난리를 쳐 놓고 임신했으니 돌아오라고 하는 건 뻔뻔스러운 짓이었다. 요즘의 그 차가운 태도를 보면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걸지도 몰랐다.

‘사과부터 해야지. 근데 안 받아 주면 어떡하지?’

설마 이젠 초원도 아이도 필요 없다고 하는 건 아닐까? 그럴 법도 했다. 정을 떼버리겠다며 심장에 비수를 꽂아 버렸으니 말이다.

이젠 그 꿈처럼 승준을 닮은 딸을 그의 품에 안겨 줄 수 있다.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초원의 마음에 턱턱 걸리던 고민 없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제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젠 더는 사랑하지 않을지도.

화창한 봄날이던 머릿속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먹구름은 초원이 불러온 것이었다.

고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일은 어떡해?’

아이를 키우며 현장 요원 일을 계속하는 건 무리였다. 야근도 많을뿐더러 잘못하다간 이렇게 어렵게 얻은 아이가 엄마 없이 커야 할 수도 있었다.

‘그냥 관두고 전문의 따야 하나?’

승준과 결혼하면 신병은 걱정할 것 없었다. 그러니 초원이 그렇게 원하던 의사의 길을 이젠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얘는?’

문제는 아이를 키우며 인턴부터 시작해 레지던트 생활을 하는 것도 무리란 사실이었다. 어떻게 얻은 아이인데, 아이가 잘 때 나가 잘 때 들어오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 연구직!’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산 연구소의 연구직으로 옮기면 제법 안전하고 칼퇴근도 가능하니 딱이지 않은가.

‘내일 부탁해 봐야지.’

승준에게 할 말을 고민하며 멍하니 아랫배를 쓰다듬던 초원은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향했다.

‘배가 얼마나 나왔나?’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블라우스 자락을 위로 들어 올렸다. 아랫배가 살짝 둥그렇게 나와 있었다. 손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만져 보았다. 뱃살처럼 말랑하지도 않고 딴딴했다.

‘그래, 이게 어딜 봐서 뱃살이야.’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걸 보고 똥배라고, 살쪘다고 생각했다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헤실헤실 웃으며 배를 어루만지던 초원은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안녕, 아가야? 엄마야, 흑⋯.”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야, 내가 엄마라고⋯.”

***

물은 기분 나쁘게 따뜻했다.

‘기분 나쁘게 핏빛이고⋯.’

몽롱한 정신을 붙들며 승준은 아래로 미끄러지는 몸을 끌어 올렸다. 욕조 속의 물이 출렁였다. 어째서인지 물속에 잠긴 왼팔이 불에 덴 듯 쓰라렸다. 그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왼팔을 들어 올렸다.

‘이거 뭐야?’

치미는 메스꺼움을 참으며 오른손으로 왼팔을 붙들었다. 병원에 가야 했다. 아니, 119를 불러야지. 몸을 일으키려던 승준은 힘이 빠져 다시 욕조 속으로 미끄러졌다.

핸드폰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야에 그녀가 들어왔다.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 염원을 이루기라도 한 듯 후련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기괴한 미소에 승준은 숨이 턱 막혔다.

“초원 씨, 나 죽고 싶지 않아.”

눈앞의 여자가 기쁜 듯 활짝 웃었다. 무어라 말하는 듯 입술이 움직였지만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서서히 눈앞도 깜깜해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미웠어?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

아니지. 이건 그의 잠재의식이었다.

‘나 이 정도로 그 여자가 미운 건가?’

잠에서 깬 그의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며 관자놀이에 긴 눈물 자국을 남겼다.

가로등 불 아래에 선 승준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3층 오른쪽 집 창문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굳어 버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초원의 자취방 창문을 바라보던 그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수면제의 약발도 거기까지인지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런 섬뜩한 꿈을 꾸고도 그 여자가 보고 싶어 이 새벽에 여기까지 찾아왔다. 문은 두드리지도 못할 거면서.

피곤했다.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 초원을 끌어안고, 그 보드라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 달큰한 살 내음을 맡으며 잠들고 싶었다. 매일 밤 같이 자는 걸 내기의 소원으로 건 이유를 그녀는 평생 모를 거다. 승준의 낮은 피곤한 일, 끔찍한 일, 더러운 일투성이였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밤에는 초원의 곁으로 돌아가 그 평온한 숨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큰 걸 바란 것도 아니고⋯.’

저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문득 떠올린 승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승준의 품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 역겨운 짓을 그녀도 좋아서 한 건 아닐 거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치욕스러울 짓을 할 정도로 그가 떠나 주길 바란다면 어쩔 수 없었다.

‘하⋯, 무심한 여자. 툭하면 상처 주고⋯.’

피식, 실소가 입가로 터져 나왔다.

‘예전엔 내 역할 아니었던가?’

이렇게 되돌려 받는구나 싶었다. 승준은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골목길 끝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아침에 눈 뜨자마자 입이 근질근질해 출근하는 대로 팀장실로 직행하려 했더니, 운 없게도 오늘은 일산 연구소로 바로 출근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어젯밤 격리된 개체를 면담하고 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연구소 근처 중국집으로 들어가 앉은 초원은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현우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말해야겠지?’

말도 없이 보직 이동 신청을 해 버리면 섭섭해할 게 분명했다.

‘병 주기 전에 약부터 줘야 하나?’

“왜요?”

시선을 눈치챈 현우가 메뉴판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선배, 오늘은 내가 살게요.”

“왜? 오늘 무슨 날이에요?”

현우의 멋모르는 물음에 초원은 멋쩍게 웃었다.

“뭔데요? 다 먹으면 말한댔잖아요.”

마지막 남은 탕수육을 집어 초원의 볶음밥 접시 위에 올려 준 현우가 궁금해 못 참겠다는 듯 재촉했다.

“아, 그게⋯.”

딱히 현우가 반길 이야기는 아니라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 초원은 머뭇거리며 짬뽕 국물을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궁금하게. 좋은 소식이에요, 나쁜 소식이에요?”

“음, 나한텐 좋은 소식인데 선배한테는 나쁜 소식일지도 몰라요.”

“설마 경기지청으로 가려고요?”

“아⋯, 정답은 아닌데 비슷하네요.”

현우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일산 연구소요. 연구직으로 옮기려고요.”

“결정 난 거예요?”

“아뇨, 이따가 팀장님한테 말해 보려고요.”

그 말에 현우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이, 그럼 못 가는 거네. 팀장님이 안 보내 주실걸?”

“하하, 당장 보내 주실걸요?”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그게 사실은⋯.”

초원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임신했거든요.”

“아!”

단무지를 씹던 현우는 생각도 못 한 충격적인 소식에 놀라 혀를 깨물었다.

“헐, 괜찮아요?”

“으⋯, 아파 죽겠네.”

“그게 혀까지 깨물 일이에요?”

초원이 키득대며 놀리기 시작했다. 아린 혀를 달래려 찬물을 들이켜던 현우는 컵을 내려놓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팀장님이랑 결혼하는 거네요.”

“그렇겠죠.”

초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우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팀장님도 아세요?”

“사실 아직 말 못 했어요.”

“근데 그럴 이유가 있어서 헤어진 거 아니었어요?”

“이유는 나한테 있었죠. 팀장님이 아니라⋯.”

‘있다’가 아닌 ‘있었다.’ 과거형이 주는 그 후련함에 기분 좋게 웃은 초원은 탕수육을 집어 입에 넣었다. 현우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곰곰이 하는 건지 말이 없었다.

“나도 연구소로 옮길까요?”

“네?”

“초원 씨도 없고 팀장님은 나 싫어하고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데.”

“법대 나와서 연구직 못하잖아요.”

“격리팀으로 가면 되니까.”

“선배는 갑갑해서 못 할걸요? 돌아다니고 쫓아다니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무슨.”

역시 그를 너무 잘 아는 초원이었다. 현우의 얼굴 위로 번진 미소에 아쉬움이 더욱 짙어졌다.

“이러니까 내가 초원 씨랑 못 떨어지는 거예요.”

“홀로서기 해야죠. 선배의 오피스 마미는 이미 딴 애가 채갔어요.”

배를 어루만지는 초원의 얼굴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아, 까먹을 뻔했네.”

사무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 현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네?”

“축하해요.”

“고마워요.”

자신의 차로 향하던 승준은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한 채 웃는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의 앞에서는 땅만 보는 여자가 현우의 앞에서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미소를 짓다니. 피가 거꾸로 솟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저런 미소, 그에게 한 번도 지어 준 적 없었다. 아무리 활짝 웃어도 언제나 옅은 그늘이 져 있던 얼굴이었다.

‘결국 그런 건가?’

그를 위한다는 건 그저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했을 뿐. 마음이 떠난 것을 눈치 없이 매달렸나 보다.

“어, 팀장님 안녕하세요.”

현우의 인사에 승준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차 운전석 쪽으로 걸었다.

‘헐, 말해야 하는데 어디 가는 거야?’

승준을 따라가려던 초원은 뒤따라오던 병훈의 외침에 멈춰 섰다.

“둘이 알콩달콩 보기 좋네.”

헛소리 그만하라는 듯 초원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병훈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식장 언제 잡아?”

“당장 잡으려고요.”

“오오, 홍 주임 적극적인데?”

“선배 장례식장요.”

병훈의 옆에 있던 으뜸은 물론, 머쓱하게 서 있던 현우까지 웃음을 터트렸지만, 승준은 이쪽을 보지도 않고 운전석 문을 열어젖혔다.

“아, 팀장님!”

초원은 잽싸게 다가가 차에 타려는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저기, 외근 가시는 거예요?”

“네.”

그 사무적인 투에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바로 퇴근하실 거예요?”

“아뇨. 무슨 할 말 있습니까?”

“네.”

여느 때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와 복숭앗빛으로 물든 얼굴에 승준은 하려던 것도 잊고 눈만 깜빡였다.

“나중에 봅시다.”

겨우 눈을 뗀 그는 운전석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초원은 오후 내내 사무실 입구만 힐끔거렸다. 그러다 퇴근 시간을 겨우 10분 남겨 두고 승준이 돌아오자 미리 작성해 둔 보직 이동 신청서를 냉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간 초원은 승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서류 가방에 든 걸 꺼내느라 바쁜지 딱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뭐부터 얘기하지? 사과부터 해야겠지? 아, 입 간질간질해 죽겠네.’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키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승준 씨, 나 임신했어요. 승준 씨가 그렇게 바라던 아기예요. 늦가을이 오면 꿈에서처럼 승준 씨 닮은 딸을 안아 볼 수 있을 거예요. 날 닮았을지도 모르지만, 원래 첫 딸은 아빠 닮는다잖아요.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아프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 다시는 아프게 안 할 테니 용서⋯.

“그건 뭡니까?”

골똘히 할 말을 생각하던 초원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놀라 움찔했다. 승준은 손에 든 종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 이건⋯.”

머뭇거리는 초원에게 그는 얼른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찢으면 또 쓰지, 뭐.’

초원이 내민 신청서를 받아 든 승준은 별말이 없었다. 화를 내지도, 찢어 버리지도 않고 종이만 그저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사실은⋯.”

“알았으니까 나가 보세요.”

“네?”

승준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신청서를 서류함에 던져 넣더니 사무실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화났나?’

또 떠나려는 줄 오해하고 화가 나서 말도 섞기 싫은 건가 싶었다.

“그런 게 아니라⋯.”

“사유는 밝힐 필요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을 끊은 승준은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 얼음장처럼 싸늘한 태도에 울컥한 초원은 눈물을 꾹 참으며 밖으로 나왔다.

“썩을 놈, 흑⋯. 뭐? 사유는 밝힐 필요 없습니다? 재수 없어.”

침대 위에 앉아 엉엉 울던 초원은 끄윽끄윽 숨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울게 만든 남자를 욕하는 걸 잊지 않았다. 다리 사이에 낀 파인트 사이즈의 아이스크림 통은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삼대가, 아, 아니지. 내 새끼 저주할 뻔했네.”

눈물을 닦은 그녀는 아이스크림 통에 꽂힌 밥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한 숟갈이 입속으로 사라졌다.

“드럽고 치사해서 진짜. 내가 혼자 키운다.”

어찌나 찬바람이 쌩쌩 불던지 애도 낳기 전인데 뼈가 시릴 정도였다.

“나중에 애 한 번만 안아 보자고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허락해 주나 봐라.”

이를 갈며 북받치는 설움을 눌렀다. 텅텅 빈 아이스크림 통 바닥을 숟가락으로 박박 긁던 초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 그냥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정말로 정이 이 아이스크림처럼 똑 떨어져 버린 걸까?

“흑, 그럼 어떡해?”

그새 또 울음이 터졌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던 초원은 난데없는 꼬르륵 소리에 윗배를 문질렀다. 혼자 파인트 한 통을 다 먹었는데 돌아서니 또 배가 고팠다.

‘하긴, 아이스크림은 녹으면 물이지.’

이젠 매콤하고 새콤한 게 땡겼다.

‘그 망할 남자 집 앞에 있는 족발집 막국수 먹고 싶다.’

한번 먹고 싶다고 생각하니 입에 침이 마구 고이면서 참을 수가 없어졌다. 초원은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못 먹으면 미칠 것 같던 막국수와 족발을 손에 든 초원은 승준의 아파트 입구 앞에 섰다.

‘이거 갖고 가서 같이 먹자고 해 볼까?’

‘아냐, 먹는 거는 나한테나 통하지.’

‘아우 씨, 그냥 문자로 확 초음파 영상 보내 버릴까?’

속으로 떠들던 그녀는 꺼림칙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뭐야, 저 여잔?’

마스크로 얼굴을 덮고 후드까지 푹 눌러쓴 젊은 여자가 입구 옆 벤치에 앉아 초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매서운 눈빛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여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의 발치에 놓인 등산 가방이 낯익었다.

‘뭐지? 어제 병원에서 마주친 여자랑 다른 사람인데⋯.’

노려보는 듯한 여자의 시선이 불편해진 초원은 입술을 깨물며 불 켜진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승준은 바닥을 드러낸 잔에 소주를 채웠다. 이 싸구려 같은 기분은 이 싸구려 같은 술로 잊어 줘야 했다. 내일 아침이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를 느끼며 또 해가 떴다는 아픔을 잊을 수 있을 터였다.

‘독하다, 독해.’

소주 따위는 비교도 안 되게 독한 여자였다. 그것도 그렇게 발그레하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이동 신청서를 내밀다니⋯.

그저 옆에만 있어 주길 바랐는데 끝내 떠나고야 말 심산인 모양이었다. 일부러 부담 느끼지 않게 거리를 두어 줬는데도 마주치는 것조차 그렇게 불편했던 걸까?

‘밉다, 진짜.’

쓰디쓴 소주를 입속으로 털어 넣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탁 놓았다.

‘설마 그놈이랑 아무 거리낌 없이 사귀려고 떠나는 건⋯.’

무릎 위에 팔꿈치를 짚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미 지난 짝사랑인데 자신을 못 믿냐던 초원의 말을 믿고 싶었지만 이미 끝난 사이에 그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소주병을 들어 올리던 그는 난데없는 벨 소리에 손을 멈췄다.

‘허? 뭐지?’

인터폰 화면을 본 승준의 마음속에서 또 미련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있었다. 회사도 아니고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사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팀장님⋯.”

역시 기대는 접는 게 좋은 걸까. 여기까지 와서도 초원은 그를 팀장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회사에서 얘기하면 안 되는 일입니까?”

사무적인 말투에 초원은 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을 휘며 웃었다.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다리 아파서⋯.”

승준은 마지못한 척 한숨을 쉬며 문을 열어젖혔다.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초원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헤어진 지 고작 한 달 남짓. 벽을 허무는 데에는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더니, 그 벽은 내버려 둔 지 한 달 만에 잡초처럼 솟았나 보다.

“내일 출근해야 하지 않나?”

승준의 만류에도 초원은 어렴풋이 눈웃음만 지을 뿐, 와인 병을 기울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와인 잔으로 검붉은 와인이 쏟아져 내렸다. 바닥을 보이는 다른 잔에도 와인을 따른 그녀는 테이블에 병을 내려놓았다.

“앗!”

서툴게 내뻗은 손끝에 밀려 초원의 와인 잔이 넘어졌다. 승준이 재빠르게 낚아챈 덕에 잔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쏟아진 와인에 테이블이며 카펫이 엉망이 되었다.

“죄송해요.”

“괜찮아.”

“닦을 거라도⋯.”

승준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대체 뭘 하려고 온 거야?’

찾아온 걸 보고 설렜던 것도 잠시, 초원의 말투와 행동에서 지독한 거리감과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고 싶다던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와인 잔만 기울이고 있는 것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취해야만 할 수 있는 말인 건가.’

붙잡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독하게 내쳤으면서 여긴 왜 왔냐고. 좋은 이야기라면 사람 피 말리지 말고 당장 말하라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냥 가 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충동을 꾹꾹 억누르며 키친타월을 집어 거실로 돌아갔다.

그새를 못 참은 건지 초원의 손에는 승준의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레드 와인이 위태롭게 찰랑이는 모습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또 쏟으려고⋯.”

초원이 피식 웃더니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쏟아진 와인을 대충 닦아 낸 승준은 소파에 털썩 앉았지만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초원이 또 와인 병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됐어요. 내가 해 줄게요.”

승준은 병을 빼앗아 빈 잔을 채워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초원이 씩 입꼬리를 올리더니 잔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짠 해요.”

승준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쨍그랑 유리잔이 부딪치고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그는 그 씁쓸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네.”

“흠, 축하할 일이 있긴 있죠.”

“뭔데?”

“나중에, 이거 다 마시면 말할게요.”

초원이 승준의 잔을 얼른 비우라는 듯 밀었다.

“왜? 지금 말하면 안 되는 건가?”

승준의 고집에 그녀의 입에서 못마땅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거 다 마시고 침대로 가요.”

침대로 가자는 말에 그는 눈만 깜빡였다. 그때 주방에서 승준의 핸드폰이 짤막하게 울렸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왜? 이번에는 어떤 놈 이름을 부르려고?”

뭐가 우스운 걸까? 초원은 온몸을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혔다. 굳어 가는 승준의 표정을 뒤늦게 눈치챈 듯, 그녀는 옆으로 다가와 살갑게 팔짱을 꼈다.

“아니, 사과하려고 온 건데 좀 받아 주면 안 돼요?”

“제멋대로도 정도가 있지.”

“제발, 응?”

초원은 여전히 손에 들려만 있는 와인 잔을 입가로 밀어 올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승준이 잔을 단숨에 비우자 그녀는 팔짱을 풀고 벌떡 일어섰다.

“같이 씻을래요?”

뭐가 그리 좋은지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먼저 올라가 있어요.”

승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앞의 이 난장판부터 치워야 했다. 초원이 2층으로 사라지고 그는 와인 잔과 병을 집어 주방으로 향했다.

싸늘한 적막을 긴 한숨이 가로질렀다. 기뻐야 할 것 같은데 기쁘지가 않았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왜 저러지? 한 잔밖에 안 마셨는데 벌써 취했나?’

이러다 내일 돌변하면 승준만 비참한 신세가 될 터였다.

붉게 물든 키친타월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고 계단으로 향했다. 내딛는 걸음이 어색했다. 어지러워진 그는 난간을 붙잡았다.

‘나도 벌써 취했나?’

2층으로 올라가자 드레스 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승준은 한 발짝 안으로 내디디다 말고 얼어붙었다. 목 뒤의 솜털이 하나씩 곤두서고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진짜 왜 이렇게 다 꼬였나 몰라.”

초원은 식탁 앞에 앉아 막국수를 뒤적이며 투덜거렸다.

“쉬운 게 없네.”

그냥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나 임신했어요.”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못할 줄 알았던 임신도 했겠다 다 잘 풀릴 줄 알았더니⋯.”

한숨을 푹푹 쉬던 초원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배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아냐, 괜찮아. 우리 조랭이는 걱정 말고 족발 맛있게 먹고 쑥쑥 크기나 해.”

조랭이. 어젯밤 잠자리에 누워 한참을 고심하다 지은 태명이었다. 처음 보자마자 떠올린 게 조랭이떡이었고 마침 성도 조 씨이니 이보다 딱인 태명도 없지 않은가.

족발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초원은 식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열었다.

“우리 예쁜 조랭이나 봐야지.”

이미 수십 번도 반복한 손가락 놀림으로 초음파 영상을 틀었다. 이게 비디오테이프였다면 테이프가 너덜너덜 늘어지고도 남았을 거다.

손가락을 빠는 장면은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너무 예쁘다. 벌써 예쁘네.”

이렇게 아기를 보고 있으면 모든 게 잘될 것만 같으면서도 이 작은 아이를 무사히 키울 수 있을지 두려워졌다. 그래도 아이 아빠와 함께라면 두려울 것 없다고 초원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같이 보면 좋을 텐데⋯.’

화면 위로 손가락을 들고 잠시 망설이던 초원은 채팅 앱을 열어 승준의 이름을 눌렀다.

“에잇, 모르겠다.”

냅다 영상 보내기 버튼을 눌러 버렸다. 전송된 메시지를 바라보는 가슴이 마구 콩닥거렸다. 1이 언제쯤 없어질까 기다리는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정말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벌써 자나?’

한숨을 푹 쉬고 먹다 남은 음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은 걸 냉장고에 넣으려 일어서던 초원은 얼어붙은 듯 멈췄다.

“승아 씨?”

승아가 초원의 자취방으로 찾아온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여긴 무슨 일로⋯.”

방을 가로질러 코앞까지 다가오는 승아에게서 절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이 초원에게까지 전해지자 그 섬뜩함에 몸이 떨렸다. 승아가 승준의 아파트를 벗어났던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승준의 목숨이 위험했을 때.

“안 돼!”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살짝 열린 욕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노란 불빛만이 아니었다.

쏴아아.

물소리. 그 세찬 물소리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땀 한 줄기가 그의 뒷덜미를 타고 내려가 셔츠를 적셨다.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죽이며 승준은 조심스레 욕실로 다가갔다.

문을 조용히 열어젖혔다. 욕조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물에 손을 담그고 있던 여자가 돌아보는 순간, 승준은 참았던 숨을 뱉어 내며 몸을 돌렸다.

뛰었다. 아니, 뛰어야 했다. 하지만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권총, 권총 어딨어?’

권총을 신발장 구두 상자에 넣어 뒀다는 게 생각 난 그는 구르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온몸이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뒤따라 계단을 내려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소름 끼쳤다. 주방을 지나치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전화나 잡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주인의 의지와는 달리 긴장이 풀려 가는 몸을 이끌고 겨우 신발장에 다다랐다. 등 뒤로 발소리가 타다닥,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망할, 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다급한 손짓으로 신발장 안을 뒤지는 움직임이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에 뚝, 멈췄다.

“팀장님, 뭐 하세요?”

승준을 향하는 그 미소가 역한 피비린내를 풍겼다.

“초원 씨는 어쨌어?”

신발장 밖으로 불쑥 나온 손에 권총이 쥐여 있었다.

“팀장님, 왜 그러세요?”

초원의 모습을 한 침입자의 등 뒤로 벨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울리고 있었다. 누가 경고라도 해 주려는 걸까? 그런 거면 이미 늦었다.

“너 초원 씨 아니야.”

승준은 흐릿해지는 눈을 애써 깜빡이며 놈에게 총구를 겨눴다.

‘약 탔구나.’

놈이 흔들고 있던 와인 잔이 생각났다. 와인을 쏟은 것도 다 그의 주의를 돌리려 일부러 꾸민 짓이었을 거다.

“정체가 뭐야?”

“이야, 섭섭하네. 우리가 어떤 사인데,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너는 알아채야지.”

이 말투, 설령 초원의 목소리라도 이 잊을 수 없는 말투는 그놈이었다.

“너 어떻게 탈출했어?”

“하하, 내가 탈출한 것도 몰랐냐? 씨발, 공무원 새끼들 빠져서⋯. 나라 꼴 잘 돌아간다.”

“초원 씨 어쨌어? 무슨 짓을 한 거야?”

놈은 죄책감도 양심 따위도 없는, 쾌감만을 위해 살인하는 괴물이었다. 그런 놈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초원으로 변신해 왔다. 해코지라도 한 건 아닐까. 그 끔찍한 생각에 총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 씨발⋯. 네 놈이랑 그년을 두 달이나 쫓아다니면서 준비한 건데⋯.”

승준의 절박한 물음에도 놈은 머리만 긁적이며 제 생각에 바빴다.

“뭐?”

두 달이나 쫓아다녔다니. 그동안 제4격리소는 뭘 했으며 그는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어떻게 알았냐?”

놈이 아쉽다는 듯 입을 쩝쩝거렸다.

욕조. 물 공포증이 있는 초원은 생일날 밤 후로 단 한 번도 욕조를 쓴 적이 없었다. 샤워하며 눈 감는 것조차 불안해하던 여자가 욕조에 물을 받을 리가.

“초원 씨는 어쨌냐고!”

놈은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말을 돌리고 있었다. 미칠 듯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자 승준은 점점 이성의 끈을 놓아 가고 있었다.

“대답해!”

성큼 다가간 그는 놈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댔다. 사랑하는 여자의 것과 꼭 닮은 눈동자에 공포심이 스치자 승준은 움찔했다.

‘아냐, 이건 초원 씨가 아냐.’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그 꽃 같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틀린 미소에 승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임산부를 죽일 정도의 쓰레기는 아니거든?”

“뭐?”

휙, 놈이 오른손을 옆으로 냅다 쳤다. 현관 쪽으로 날아간 총이 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승준의 턱에 주먹이 꽂혔다.

“어이쿠, 스포일러를 해 버렸네!”

상대는 승준보다 작고 약한 여자의 몸이었다. 문제는 그 몸이 특수훈련을 받은 몸이고 승준은 약에 취했다는 사실이었다. 약 기운에 휘청거리다 주저앉은 그의 옆구리에 강한 킥이 꽂혔다. 어느새 비릿한 피 맛이 나는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임신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얼이 빠진 얼굴로 공격을 막던 승준은 놈이 현관 쪽으로 향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놈이 상체를 구부리며 총으로 손을 내뻗는 순간, 비틀거리며 몸을 던졌다. 쿵, 놈의 몸이 현관문을 강타하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승준은 그 틈에 얼얼한 어깨를 부여잡고 총을 집으려 했지만 그의 목을 단단한 무언가가 가격했다.

“컥⋯.”

그 숨 막히는 고통에 휘청하던 승준은 불길한 철컥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너 끝내러 온다고 약속한 거 안 잊었지?”

그의 머리를 겨누는 검은 총구, 그리고 그 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초원의 싸늘한 얼굴. 그 낯설지 않은 장면에 가쁜 숨을 몰아쉬던 승준의 입가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미친 새끼, 죽은 목숨인데⋯.”

숨을 헉헉대며 외치는 놈의 등 뒤에서 철컥 소리가 난 듯한 건 착각일까?

“⋯웃음이⋯.”

탕탕, 고막을 찢을 듯한 두 번의 총성이 좁은 현관을 울렸다. 몸뚱이가 그대로 풀썩 쓰러지며 흰 대리석 바닥 위로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힘이 빠져 벽에 등을 대고 늘어진 승준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현관문을 지나 다가오는 초원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승준 씨, 괜찮아요?”

그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자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 끌어안을 만반의 준비를 갖췄건만, 훈련을 너무 잘 받은 탓인지 초원은 오다 말고 개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승준의 총을 집어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놈의 목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맥박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초원 씨⋯.”

무거운 손을 들어 올려 내밀었다.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아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몰랐다.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저놈이 해코지라도 하지 않았는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아는지, 그리고 임신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흠, 죽었네.”

능력을 잃은 몸뚱이가 서서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무심한 여자인 초원은 승준의 손을 잡아 주기는커녕 정해진 대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사고수습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규정 좀 지키래도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이럴 때만 철저하네.’

승준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벽을 짚으며 한 걸음 다가서자 그제야 초원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103동 2101호요. 개체는 이미 사망했고⋯.”

승준은 덮치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무게에 초원의 몸이 휘청거렸다.

“15분 안에 온대요.”

그는 저보다 작고 가녀린 몸에 기대다시피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덴요? 구급차도 불러요?”

“아니, 그냥 몇 대 맞았어. 초원 씨 운동 그만해도 되겠더라.”

무거운 가슴팍을 두 손으로 밀며 지탱하던 초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초원이 밀수록 승준은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근데 왜 내 문자 확인 안 했어요?”

“미안, 살인마랑 싸우느라 좀 바빠서.”

웃느라 들썩이며 스쳐 오는 아랫배의 느낌이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임신, 진짜인가?’

승준은 벽을 짚어 가며 무릎을 꿇었다. 얇은 티셔츠를 걷어 올린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 옛날처럼 아랫배가 눈에 띌 정도로 동그랗게 부풀어 있었다. 그곳을 가만히 쓰다듬던 그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승준 씨, 그게⋯.”

배꼽 아래로 뜨거운 입술이 와 닿고 또 와 닿자 초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아빠의 온기를 아기도 느끼고 있길 바라며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를 손가락으로 애틋하게 어루만질 뿐이었다.

아기에게 열렬히 애정을 쏟아붓던 승준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씨익 웃었다.

“홍초원 주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실까요?”

“사유는 밝힐 필요 없다면서요?”

“아, 진짜 뒤끝 하곤⋯.”

몸을 일으킨 그는 주저 없이 초원에게 입술을 포갰다. 살벌한 배경을 뒤로한 달콤한 키스였다. 그간 억눌렸던 애정을 모두 쏟아부으며 서로를 머금던 두 사람은 입술을 떼고 눈을 마주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의 얼굴에 따사로운 봄날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서로의 눈동자에 각자가 그토록 원하던 세상이 다 담겨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초원과 승준은 온 세상을 품에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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