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28)

독하고도 약한 여자

스르륵 마찰음을 내며 옷은 하나둘씩 차디찬 바닥으로 떨어졌다.

살 스치는 소리가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묻히기 시작하고 어느새 뜨거운 열기와 땀 내음이 서늘한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두운 방 안으로 불빛이 춤추듯 어른거리고 두 사람의 그림자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 밤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사람을 흔들어 놓고도 여전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 사무적인 말투에 초원은 울컥했다.

“저 좀 사랑해 주세요.”

제발 팀장의 가면은 집어치우고 조승준이라는 남자의 얼굴로 자신을 안아 줬으면 했다.

“그건 늘 하고 있는데.”

초원의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아직도 이런 꿈을 꾸는 거야?’

새삼 커져 버린 침대에 홀로 누워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새벽빛에 푸르게 물든 천장 벽지 무늬가 흐려지고 또 흐려졌다.

***

벌써 삼 주째였다.

승준은 회의실 테이블 저 멀리 앉은 초원에게 막막한 시선을 던졌다. 봐줄 리 없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공적으로 꼭 필요할 때가 아니고서는 그에게 눈 한 번 맞춰 주지 않는 여자였다.

‘독한 여자.’

고집이 센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독할 줄은 몰랐다.

“토마토 주스, 초원 주임님 거 맞죠?”

“네!”

테이크아웃 음료를 들고 들어온 아름이 주스를 넘겨주고, 초원은 빨대를 쭉 빨더니 살 것 같다는 미소를 지었다.

“홍 주임, 케첩을 왜 마시고 그래?”

라테 뚜껑을 열던 병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케첩이라뇨. 이게 얼마나 상큼한데.”

“홍 주임도 전에 그러지 않았어요? 케첩을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잘 마시고 있는데 병훈도 모자라 현우까지 초를 치자 초원은 눈을 흘겼다.

“근데 땡기면 먹어 줘야지 어쩌겠어요.”

새침하게 웃는 얼굴에 힘들어 보이는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신났네. 누군 지금 죽을 맛인데⋯.’

승준은 활활 타오르는 속으로 차디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부었다.

집으로 찾아가 열어 줄 때까지 문 앞에서 버티는 작전은 더는 쓸 수가 없었다. 누가 신고라도 했는지 경찰이 오는 바람에 곤란해질 뻔했다.

‘이거 앞집 놈이 그랬어, 분명.’

작전을 바꿔 칼퇴근을 한 다음 뒤늦게 집에 오는 초원을 붙잡기도 하고 오죽하면 일부러 야근도 시켜 봤다. 외로워 봐야 정신을 차릴까 싶어 한 며칠 발길을 뚝 끊고 내버려 두기도 했지만, 외로운 건 그라 결국 못 참고 다시 매달리는 꼴이 됐다. 이렇게 온갖 수를 다 써서 애걸해도 이 여자는 앵무새처럼 끝났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지루한 발표가 이어지고 승준은 가끔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고 테이블 끝에 앉은 여자를 응시했다.

목이 그대로 굳어 버리기라도 했나 보다. 이쪽으로 고개 한 번 안 돌려 주고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얄미웠다.

‘언제부터 저렇게 열심히 들었다고⋯.’

책상 위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손이 스르륵 위로 올라가더니 목 주변을 더듬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목걸이를 만지려다 민망해진 손가락이 갈 곳을 잃고 옷깃만 덧없이 매만지는 걸 승준은 놓치지 않았다.

‘거봐⋯.’

마침내 발견한 아쉬움의 흔적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똑똑.

“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승준은 팀장실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에게 대답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그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자 그는 끓어오르는 기대감을 애써 억눌렀다.

“팀장님, 바쁘세요?”

“아뇨, 들어와요.”

초원은 문을 닫고 들어와 책상 앞 의자에 앉을 때까지 내내 바닥만 보고 있었다. 야속하고 얄미웠다. 그래도 한 공간에 단둘이 있는 건 흔치 않은 기회였다.

“무슨 일로?”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고정한 채로 입술을 달싹이던 초원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승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경기지청?’

하루아침에 쫓아낸 것도 모자라 이젠 완전히 그의 곁을 떠나겠다는 신청서에 서명을 해 달라니. 이 여자 어디까지 잔인해지려는 걸까.

‘장난하나.’

승준은 신청서를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팀장님.”

그제야 초원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원망 가득한 눈빛이었다. 정작 원망해야 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던가. 울컥한 승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초원에게로 다가갔다.

“왜 이러, 읍⋯.”

두 팔을 쥐고 그대로 끌어 올려 입술을 집어삼켰다. 초원은 고개를 돌려 거부했지만 이내 목덜미를 강하게 붙든 손에 이끌려 다시 입술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가슴팍을 밀어내던 손이 주먹이 되어 그를 때리고 있었지만, 멍이 들고 뼈가 부러진다 한들 승준은 놓을 생각이 없었다.

거친 키스 끝에 초원의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휘청이는 몸을 그는 그대로 단단히 끌어안았다.

“또 이딴 짓 해 봐. 다음엔 저 문 열어 놓고 할 거니까.”

으름장을 놓은 그는 힘없이 처진 초원의 고개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현우는 마우스 커서를 아래로 내려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10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이만하고 집에 가요.”

현우의 말에 칸막이 너머의 초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초원은 30분 전부터 침대로 직행하고픈 생각이 굴뚝같았다. 물론 직행하는 길에 잠시 냉장고를 경유할 생각이었지만.

노트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핸드폰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사무실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현우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자꾸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거슬렸다.

“왜요? 할 말 있어요?”

역시나였는지 현우는 들켰다는 듯 웃었다.

“싸웠어요?”

“네?”

“팀장님이랑.”

늦게 퇴근할 땐 늘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초원이었다. 그 누구가 누군지는 안 물어도 뻔했다. 그러던 여자가 요즘은 핸드폰을 방치해 두고 있었다.

“아⋯.”

초원은 잠시 발끝을 바라보더니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헤어졌어요.”

“왜?”

진심으로 놀란 현우의 목소리가 11층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무리 남녀 관계는 모르는 일이라지만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듯했던 두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헤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냥요.”

더는 묻지 말라는 듯 초원은 팔짱을 낀 채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오늘은 왜 혼난 거예요?”

낮에 초원이 팀장실에 들어간 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한 팀장의 외침이 들리고, 이내 밖으로 나온 초원은 도망치듯 화장실로 향했다.

“뭐, 그냥⋯.”

다들 크게 혼이 나고 운 줄 알았지만 초원은 그저 속이 안 좋았던 것뿐이었다.

“경기지청으로 전보 신청했거든요.”

“아⋯, 혼날 만하네.”

현우가 어울리지 않게 승준의 편을 들자 초원은 쓴 미소를 지었다.

“와, 근데 진짜 너무하다. 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선배한테 얘기하면 뭐 해요?”

“와, 파트넌데 당연히 얘긴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따라오려고 할 거면서⋯.’

그렇게 되면 승준이 오해할 게 뻔했다.

초원이 피식 웃기만 하고 현우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쓸쓸해 보이는 얼굴을 조용히 관찰했다. 초원이 떠나겠다고 하고 팀장이 화를 냈다니 이유는 몰라도 누가 헤어지자고 한 건지는 알 것 같았다. 꽃을 피우던 사랑이 단번에 시들어 버릴 정도의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궁금해한들 누구도 말해 주지 않을 건 잘 알고 있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초원은 원룸 건물 앞에 서서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나서 자세히 보니 현우의 눈에는 그 미소가 한층 더 그늘져 보였다. 속 시원히 이야기라도 하면 나을 텐데. 초원의 일이라면 기꺼이 지갑을 털려 가며 들어줄 수 있는데 말이다.

“불금인데 요 앞에 맥주집 가서 한잔할래요?”

현우의 제안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요즘 나 속 안 좋아서 금주하는 거 알잖아요.”

“보통 실연은 술로 극복하는 거 아니었어요?”

“누가 실연을 했는데?”

느닷없이 끼어든 굵은 목소리가 늦은 밤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렸다. 골목 입구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본 초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회식이라도 끝나고 오는 듯 손에 들린 흰 비닐봉지가 흔들렸다. 승준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떡하니 팔을 휘감고, 술 냄새가 코를 찌르자 초원은 손으로 코를 막았다.

“차 주임, 우리 초원 씨 데려다준 건 고마운데 이제 가 보세요.”

“팀장님,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집에 가시죠.”

“하, 네가 뭔데? 차 주임, 자꾸 선 넘지 말고 처신 똑바로 하세요.”

“그럼 헤어진 사람 집에 술 취해서 찾아오는 건 괜찮은 겁니까?”

“누가 헤어졌다고 그래?”

점점 두 남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러다 곤란한 일이 터지겠다 싶었던 초원은 원룸 입구를 향해 승준의 가슴팍을 밀었다.

“선배,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봐요.”

“진짜 괜찮겠어요?”

승준이 그녀에게 무슨 위험인물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현우가 걱정 어린 눈으로 괜찮냐고 묻자 승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내가, 흡⋯.”

술에 취해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초원은 제발 좀 가라며 현우에게 손을 내저었다.

걱정스러운 시선을 끝까지 이쪽으로 향하던 현우가 마침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초원은 승준의 입을 막았던 손을 뗐다.

“팀장님도 집에 가세요.”

“나도 집에 가고 싶어. 좀 들여보내 줘.”

버럭버럭할 때는 언제고 어느새 불쌍함으로 모드를 바꿨나 보다. 초원은 눈을 피하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가요.”

매정하게 밀어내고 원룸 입구로 향하는 여자에게 승준은 손에 든 봉지를 흔들었다.

“배 안 고파요? 생각나서 곱창 사 왔는데.”

사실 아까부터 솔솔 풍기는 고소한 숯불 냄새에 초원의 위장이 요동치고 있던 중이었다.

“내가 회식 끝나고 이거 사 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그랬잖아요.”

눈앞에서 자꾸 저 맛있는 걸 흔들어 대니 초원은 미칠 것 같았다.

‘나 진짜 제정신 아닌가 봐.’

아무리 먹는 거 좋아해도 이렇게 환장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 저 곱창을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절박함마저 들었다.

“먹고 싶죠?”

봉지를 휙 낚아채려는 작은 손을 승준은 잽싸게 피했다.

“초원 씨 먹는 거만 보고 가게 해 주면 줄게요. 응?”

“아, 좋다.”

승준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초원을 뒤에서 감싸 안고 매달렸다. 집에 들여보내 주는 것도 좋고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 것도 좋고, 무엇보다도 이 김에 바뀐 비밀번호를 알아낸 것도 좋았다.

“무거워요.”

“언젠 무거워서 좋다며.”

“좀 떨어져요. 술 냄새나요.”

“누구 때문에 마신 건데.”

문이 열리자 그는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후로 지금처럼 기분 좋았던 적이 없었다.

식탁 위에 흰 봉지를 털썩 내려놓은 그는 냉큼 침대로 다가갔다.

“아, 살 것 같네.”

코트를 벗어 걸던 초원은 침대 삐걱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 하긴, 침대에 누워 있지.”

“아니, 내가 그걸 몰라서 물은 게 아니잖아요.”

능청스럽게 대자로 뻗어 누운 남자를 일으켜 세울 생각으로 다가간 초원은 곧바로 후회했다. 손목이 붙들렸다. 휙 끌어 당겨져 순식간에 승준의 품에 안긴 꼴이 됐다.

“놔요, 이거.”

“잠깐만,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승준은 몸부림치는 작은 몸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팔다리로 단단히 휘감았다.

“먹는 것만 보고 간다면서요.”

“곱창값은? 설마 공짠 줄 안 건 아니죠?”

“놔 줘야 돈을 주든가 하죠.”

“누가 돈으로 달래?”

쭈욱 내민 입술이 점점 다가오고 몸 사이에 낀 손을 쓸 수 없었던 초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뽀뽀 좀 해 주면 뭐 닳나? 죽기라도 하나?”

“아까 낮에 했잖아요. 그것도 억지로 해 놓고 미안하지도 않아요?”

“내가 그렇게까지 돌게 만든 건 안 미안하고?”

또다시 원망 가득한 눈빛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뒤엉켰다. 이내 눈을 피한 초원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한데 그냥⋯.”

“식기 전에 곱창부터 먹어요.”

승준은 초원의 입에서 가라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옷부터 갈아입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식탁 앞에 앉은 초원은 여전히 블라우스에 정장 치마 차림이었다.

‘내가 바본 줄 아나?’

옷을 벗기 시작하면 그대로 침대로 끌고 갈 게 뻔했다. 곱창의 유혹에 넘어가는 바보짓을 저질렀지만 그 이상의 바보짓을 할 정도로 이성이 마비된 건 아니었다.

“팀장님은 안 먹어요?”

초원이 나무젓가락을 쪼개는 모습을 승준은 맞은편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니, 난 배불러서.”

그러고 보니 선을 긋듯 또 팀장님 소리를 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거 팀장님이 아니라 초원 씨 남친이 사다 준 건데.”

“저 남친 없는데요.”

“참 나, 내가 사 주는 거 먹으면서 못된 소릴 잘도 하네.”

“됐으니까 가져가세요.”

초원은 젓가락을 놓더니 포장 용기 뚜껑을 집어 들었다.

“미안, 먹어요. 응?”

억울해도 매달리는 사람이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승준은 젓가락을 집어 초원의 손에 단단히 쥐여 주었다. 이내 젓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트롤보다 무서운 우리 마눌님⋯.”

승준이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리를 애정 어린 손길이 쓰다듬고, 초원은 치우라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얼마나 마신 거야?’

단단히 취한 모양이었다. 저 말에 제대로 된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초원은 이 남자의 마눌님이 아닐뿐더러 뜬금없이 튀어나온 트롤도 말이 안 됐다.

“술은 안 마셔요?”

“지금 팀장님 술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거든요.”

승준은 저도 모르게 쩝 소리를 내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저 철옹성 같은 고집을 술로 흐물흐물 녹여 와르르 무너뜨리고 그 속에 숨어 있는, 그를 사랑해 마지않던 여자를 되찾아 오고 싶었지만 오늘은 안 될 모양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마음껏 볼 수 있어서. 초원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턱을 괴고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승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한참 말 없던 그가 피식 웃었다. 승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주먹밥의 밥풀을 떼어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날름 받아먹은 초원은 이내 실수를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선을 그어야 하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요즘 슬슬 벚꽃 피던데.”

“⋯⋯.”

“내일 벚꽃 보러 갈까?”

초원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입은 먹을 줄만 알고 말은 못 하나 보네.”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고 흘겨보는 여자를 뒤로하고 승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려는 건가 싶었던 것도 잠시, 그는 침대로 털썩 몸을 던졌다.

“뭐 하는 거예요?”

“피곤해서⋯.”

“피곤하면 집에 가요.”

“초원 씨 아직 덜 먹었잖아.”

의미 없는 입씨름 더 해 뭐 하겠냐는 듯 한숨을 쉰 초원이 다시 젓가락을 움직이고, 승준은 턱을 괴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봐요.”

갑작스레 정적이 깨지자 초원은 줄곧 아래를 향하던 시선을 저도 모르게 들어 올렸다.

“헤어지자고 한 거 후회되죠?”

“아뇨.”

“거짓말.”

피식 새어 나오는 그의 웃음소리에 초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렸지만 이렇게라도 시선을 가린 게 그나마 마음이 편했다.

“잘 때 이불 차면 덮어 주는 사람도 없고⋯.”

홀로 자다 추워 깬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빈자리가 아프게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일이었다.

“초원 씨 참치 마요 계란말이 할 줄 모르잖아.”

안 먹으면 그만이었다. 그가 해 주던 따뜻한 밥도, 그 애정이 가득 담긴 밥 따위 안 먹으면 그만이었다. 초원은 입술을 깨물고 젓가락을 의미 없이 움직였다.

“잼 뚜껑은 누가 열어 주고⋯. 그래, 뭐 이건 딴 놈도 해 줄 수 있겠지.”

그 말에 초원의 입술 사이로 짧은 탄식이 새어 나갔다.

‘그게 아닌데⋯.’

다른 여자를 만나라고 헤어지는 거지,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헤어지는 게 아닌데. 이유를 아무리 말해 줘도 저 남자는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만큼 초원 씨 사랑해 줄 남자가 또 있을진 몰라도⋯.”

그런 남자 절대 없을 거라는 걸 이미 아는 초원의 눈가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어떤 여자도 초원 씨만큼 사랑할 수가 없는데.”

초원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랑이란 거 다 호르몬의 속임수예요. 3년도 채 못 가고 식어요. 생리 현상에 속아서 시간 낭비하지 마요.”

그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말에 승준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3년도 훌쩍 넘겨 가며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했던 여자가 저런 소리를 하다니. 그 모순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바람 잘 날 없던 그때에는 이 사랑이 시한부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모조리 잃은 후에도 이 감정만은 살아남았다. 그러니 3년도 채 못 가고 식는다는 건 그에겐 애인에게 신발을 사 주면 도망간다는 소리만큼이나 허무맹랑했다.

여전히 창밖만 응시하고 있는 초원을 가만히 바라보던 승준은 손을 들어 식탁을 가리켰다.

“그 주먹밥 식으면 버릴 거예요?”

“네?”

“그걸 왜 버려. 그쵸? 다시 데워 먹으면 되는 거지.”

뜬금없는 주먹밥 소리에 방 안으로 고개를 돌린 초원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사랑도 그런 거잖아요. 식는 건 열정이지, 사랑이 아니라.”

뜨거워도 미지근해도 차가워도 사랑은 사랑이었다.

“열정이 식었다고 그 사랑 버릴 거예요? 다시 불 지피면 되는걸. 아니, 그리고 꼭 뜨거워야 사랑인가?”

“우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문젠데?”

“이미 한 말 또 하게 하지 마요.”

초원은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대체 뭐가 문제야? 우리 아무 문제도 없잖아.”

있지도 않은 문제를 꾸역꾸역 만드는 여자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문제가 없다니⋯.”

초원으로선 그간의 괴롭고도 치열했던 고민을 가볍게 부정해 버리는 남자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초원 씨가 불임인 거, 내가 가족이 없는 거 둘 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잖아. 그럼 그렇구나 하고 인정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지 뭐 하러 무겁게 떠안고 다니면서 끙끙 앓아?”

“아니죠. 내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승준 씨가 가족이 없는 건 만들면 해결되는 일이잖아요.”

말씨름이 전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자 승준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초원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말한 건 뭐로 들은 걸까?

“초원 씨는 지금 날 위해서 그런다고 믿고 있겠지만 뭐가 날 위하는 길인지는 내가 더 잘 알아.”

더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초원은 창밖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몇 주째 매달리는 남자. 누가 누구더러 고집이 세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얼마나 모질게 굴어야 포기할 거야?’

눈앞에 보이는 한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떠나고 싶었지만 그 또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포기하고 서명해 줄 때까지 전보 신청서를 내밀어야 하는 걸까? 그냥 사직서를 내밀어 버리고 싶지만 그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친다, 진짜.’

가끔은, 아니 사실은 매일같이 포기해 버릴까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모질게 내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승준이 힘들어하는 걸 볼 때마다 끌어안고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울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자가 누려야 할 기회를 빼앗지 않으려면 더 독해져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몇 달만 버티면⋯.’

생각에 잠겨 있던 초원은 난데없는 코 고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아, 진짜 여기서 자면 어떡해⋯.’

승준은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운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젓가락을 탁, 내려놓은 초원은 한숨을 푹 쉬며 침대로 다가갔다.

분명 흔들어 깨우려고 뻗었던 손이었다. 그랬던 손이 어째선지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었다. 살결이 거칠어졌다. 뺨도 홀쭉 들어간 것 같았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건지, 술만 이렇게 마시고 다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초원의 시선이 여전히 그의 손목에 감긴 은빛 시계에 머물렀다.

‘마음 약해지게 굴지 마요, 제발.’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는 초원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아, 따가워.’

깊은 잠에서 깬 초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모기라도 있나?’

하지만 지금은 꽃피는 계절. 모기가 있을 때도 아닌데 갑자기 쇄골 위가 간지럽고 따가웠다. 여전히 잠에 몽롱하게 취한 채로 손을 뻗어 아픈 곳을 매만졌다. 어쩐 일인지 살갗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뭐지?’

목을 더듬던 손가락 끝에 얇은 체인이 걸리자 초원은 번쩍 눈을 떴다. 돌려준 목걸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잠옷 셔츠는 벌써 풀어 헤쳐져 맨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초원은 손을 들어 가슴 사이에 파묻힌 검은 머리를 밀었다.

“그만, 앗⋯.”

젖꼭지가 뜨거운 입속으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촉촉한 입술과 혀가 여리디여린 살점을 물고 핥기 시작하자 머리를 미는 손이 서서히 힘을 잃었다. 강렬한 자극에 반응해 어느새 도톰하게 솟아오른 돌기를 혀가 톡톡 건드릴 때마다 다리 사이에 숨은 돌기도 움찔움찔 떨었다.

“하아, 왜 이래요?”

금세 달아오른 목소리에 승준은 고개를 들며 씨익 웃었다. 타액에 젖은 그 입술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옷은 언제 벗어 던진 건지 이 남자는 이미 알몸이었다. 그는 두 손 가득 그녀의 말랑한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앗!”

“초원 씨 느끼고 싶어.”

매일 밤 이렇게 살을 맞대고 그 온기를 느끼고 싶었던 그에게 홀로 보냈던 3주는 잔인한 고문이었다.

“이러지 마요.”

초원은 그의 팔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손은 가슴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승준은 뜨거운 사막을 헤매다 드디어 오아시스를 찾은 것만 같은 희열감을 느끼고 있었다. 초원의 맨살을 이렇게 만지고 있으니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갈증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오늘 밤만, 제발 오늘 밤만⋯.”

두 눈동자에 새겨진 간절함을 버틸 수 없었던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위험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제 짝을 찾아 내려왔다. 입술이 닿기 직전 초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돌려 버렸다. 이내 승준의 낯빛에 서운한 기색이 짙어졌다.

“술 냄새 나요.”

정말 냄새가 난다는 듯 초원이 얼굴 위로 손을 내젓고, 승준은 웃으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가 싫은 게 아니라 술 냄새가 싫은 거라면 서운할 것 없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아래로 머리를 내렸다.

“앗⋯.”

입술이 여린 피부를 간지럽히며 서서히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 뜨거운 것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초원의 심장이 기쁜 듯 쿵쿵 날뛰었다.

‘하아, 나 진짜 뭐 하는 거야?’

머리는 밀어내야 한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몸은 조금도 말을 듣지 않았다. 애초에 이 몸의 주인은 이 남자였으니까.

어느새 입술은 배꼽 주변을 더듬고 있었다. 여린 배꼽 속으로 축축한 혀가 파고들자 초원은 깜짝 놀라 몸을 비틀었다. 밀어내는 그녀의 손짓에 어쩐 일인지 순순히 물러난다 싶더니 입술은 곧장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허리 아래가 허전해졌다. 커다란 손이 잠옷 바지와 속옷을 거침없이 벗겨 내더니 그 바람에 양말이 반쯤 벗겨져 버렸다. 승준은 그걸 놓치지 않고 꼼꼼한 손길로 다시 신겨 주었다.

초원의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발이 항상 시린 그녀를 위해 다 벗기더라도 언제나 양말만은 남겨 두는 남자였다.

이렇게 세심하고 자상한 남자이니 그를 사랑해 줄 여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녀보다 더 사랑해 주고 아껴줄 여자. 세상엔 그녀보다 예쁘고 그녀와는 달리 착하고 능력 있는 여자가 넘치니까.

말캉한 혀가 꽃잎 사이를 헤치고 들어오고 초원의 눈가로 슬픔인지 희열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오늘 밤만, 제발 오늘 밤만.’

이 남자의 따뜻한 품에 안기고 내일 아침 해가 뜰 때 다시 매정하게 뿌리치면 안 되는 걸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이제는 머리조차도 몸에 잠식당한 모양이었다.

혀 놀림에는 굶주린 티가 역력했다. 도톰한 살 속에 파묻힌 단단한 살점을 혀로 마구 훑고 쪽쪽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리도록 입술로 빨아댔다.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던 그는 꽃잎을 혀로 가르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타액과 그녀의 애액으로 은밀한 곳이 흠뻑 적셔졌다. 그토록 맡고 싶었던 초원의 젖은 내음을 승준은 폐 속 깊이 들이 삼켰다. 내쉬는 숨이 꽃잎을 간지럽히자 속살이 흥분해 오므라드는 걸 입구를 간지럽히는 혀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혀를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아, 아흑⋯.”

보드랍고 유연한 혀가 여린 속살을 거침없이 핥았다. 황홀한 절정의 전조가 온몸에 감돌기 시작했다. 파들파들 떨리는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속살을 휘젓던 승준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미처 감추지 못한 아쉬움이 초원의 얼굴을 스쳤다.

‘이것 봐. 하고 싶으면서⋯.’

몸을 일으킨 그는 그녀의 몸 위로 덮치듯 올라갔다. 촉촉이 젖은 초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걸 들여다보는 승준의 그윽한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완강한 눈빛을 견딜 수 없었던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애정 어린 손길이 초원은 반갑고도 두려웠다. 비집고 들어오는 하체에 밀려 허벅지가 한껏 벌어지고 다리 사이를 그의 분신이 찔러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려던 찰나 초원의 엉덩이가 뒤로 쑥 물러났다.

“왜?”

초원은 승준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고 몸을 비틀었다.

“이렇게 해요.”

승준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또 이런다.’

그는 돌아누우려는 초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난 얼굴 보고 하고 싶은데.”

“난 이게 더 좋아요.”

“난 안 좋아.”

그대로 어깨를 내리누른 승준은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초원의 몸속 깊이 밀고 들어갔다.

“앗⋯.”

찡그린 얼굴, 자지러지는 몸, 헐떡이는 숨소리와 착 달라붙어 조여 오는 속살까지, 이 모든 게 달콤했다. 자신의 몸에 매달려 마찰 하나하나에 격렬한 반응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여자가 주는 이 쾌감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가 느끼는 모든 감각의 끝에는 초원이, 초원이 느끼는 모든 감각의 끝에는 그가 있었다. 그의 삶에서 초원과 하나가 되는 이 순간보다 완벽한 순간은 없었다.

“아흡⋯.”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려는 손을 승준은 거칠게 떼어 냈다.

“우리 사이에 벽 만들지 마.”

커다란 손이 초원의 두 손을 머리맡으로 올리더니 그대로 깍지를 껴 틀어쥐었다.

“눈도 감지 말고.”

말을 들을 그녀가 아니었다. 고집스럽게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초원의 귓속으로 절박한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내 생각 안 났어? 난 초원 씨 없으니까 잠도 못 자겠어.”

수면제도 듣지 않는 외로움에 매일 밤이 괴로웠다.

“회사에서 매일 보는데 만질 수도 없고 안을 수도 없고 미치는 줄 알았는데⋯.”

붙들었던 손을 푼 승준은 초원을 집어삼켜 버릴 기세로 끌어안았다.

“초원 씨는 안 그랬어?”

이 남자의 리듬을 따라 속절없이 흔들리는 몸과 함께 마음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초원은 두 팔로 그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억눌렀다.

“솔직히 말해. 나 없인 못 산다고 해 줘.”

그 애처로운 목소리가 심장을 깊숙이 찔러 오고, 초원은 괴로움에 흐느꼈다.

“응? 대답 좀 해 봐.”

“흑⋯.”

“하아, 제발 눈 좀 뜨라고. 나 좀 봐줘.”

간절함이 통한 듯 슬며시 올라가는 초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제발.”

“응?”

“⋯이러지 마요.”

목소리만큼이나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 손도 힘이 없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들어야만 하는 걸까? 승준은 초원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기세로 절정을 향해 거칠게 밀어붙였다.

“아앗⋯. 그, 그만⋯.”

가슴팍을 밀어내던 작은 손이 그녀의 몸이 뒤로 휘어지는 순간 떨어져 나갔다. 그만하라는 솔직하지 못한 윗입과는 달리, 역시나 솔직한 아랫입은 멈추지 말라는 듯 그의 분신을 꽉 물어댔다.

“초원 씨 사랑해.”

“제발, 안 돼요⋯.”

초원은 몸속을 차지하고 있는 그를 밀어내려 엉덩이를 비틀어댔다. 하지만 놓아줄 리 없었다. 승준은 가는 허리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들었다. 붙들린 허리도, 그의 몸이 세차게 부딪혀오는 허벅지 안쪽도 얼얼해졌다.

“안 돼⋯.”

아픈 걸 참아 가며 모질게 밀어낸 날들을 한순간에 덧없게 만들 순 없었다. 절대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이 남자의 역린이라도 건드려야 하는 걸까? 끔찍한 결단을 내리고 질끈 감은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목숨이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해.”

승준은 달싹이기 시작하는 초원의 입술을 절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흑⋯, 현우 선배⋯.”

별안간 움직임이 멈추고 두 사람의 시간도 멈췄다. 공기 속에 서려 있던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눈을 감고 적막이 깨어지길 기다리는 이 시간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초원은 숨이 막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눈치 없이 절정의 여운에 떨던 몸속에 묻혀 있던 그가 단숨에 빠져나가고, 갑작스러운 허전함에 초원의 몸이 휘청였다.

“하, 이렇게까지 잔인해야 해?”

침대가 출렁이고 바스락거리며 옷을 입는 소리가 들리는 동안에도 초원은 질끈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잔인하지 않으면 안 떠날 거니까.’

심장을 관통하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게 꼭 깨문 입술이 아렸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가려는 흐느낌을 죽였다.

쾅, 현관문이 거세게 닫혔다. 관짝이 닫히는 소리였다. 초원이 잔인하게 죽여 버린 두 사람의 관계에 그렇게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제 손으로 끝낸 주제에 염치도 없이 초원은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몸이 차갑게 식어 가도록 한참을 죽은 듯 누워 요절해 버린 사랑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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