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28)

다디단 꿈도 이룰 수 없다면 악몽이다

초원은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회사에서부터 자취방에 온 지금까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조용해서 자는가 싶다가도 이따금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면 승준은 머리맡에 놓아둔 티슈를 뽑아 손에 쥐여 주었다.

몇 시간 째 이렇게 초원의 옆에 누워 등을 토닥여 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릴 들었는지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배 안 고파요?”

벌써 저녁 시간은 훌쩍 넘겼는데 초원은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먹는 거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가 배가 안 고프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아⋯, 그 여자가 무슨 소릴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 말 신경 쓸 것 없어요.”

맛있는 냄새라도 풍기면 식욕이 돌지도 몰랐다. 승준은 저녁을 준비하려고 몸을 일으키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멈췄다.

“그 여자⋯, 예지 능력자죠?”

“아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듯한 한숨이 초원의 작은 입술 사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럼요?”

“사람들이 뭘 두려워하는지를 읽을 수 있대요.”

“아⋯.”

“그걸로 보험을 팔고 다니는 건 기발한 생각인데, 실적은 안 좋대요. 고소도 많이 당하고.”

승준은 티슈 뭉치를 꼭 쥐고 있는 작은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긴 느닷없이 누가 와서 ‘선생님, 이거 이거 무서우시죠?’하고 아픈 데를 찌르면 누가 기분 좋게 보험을 들어주겠어.”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는 초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저녁 차리면 먹을 거죠?”

초원은 가스레인지 앞에 선 남자의 너른 등을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와 고소한 계란말이 냄새가 그의 품만큼이나 포근해서 치열하게 하던 고민도 잠시 잊을 정도였다.

요리를 하는 그는 언제나 조금 들떠 있었다. 왜 그런지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초원도 늘 그랬으니까.

서로의 허기를 채우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의 사랑법이었다.

처음 이 자취방에 데려와 라면을 끓여 줬을 때도 그랬다. 잘 먹는 걸 보니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때는 그게 사랑인지 미처 몰랐다.

승준이 늦게 집에 오는 날, 손에 뭐라도 들고 오면 초원은 너무나 행복했다. 뭘 들고 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남자가 그 피로에 찌든 일과의 끝에서 그녀를 떠올렸다는 것. 그 사랑받는 느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지금의 행복이 평생 갈 것 같죠?’

무섭다. 언젠가 이 남자가 지친 하루의 끝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와도 더는 반겨 줄 사람이 없는 날이 올까 봐.

그의 뒷모습이 흐릿해졌다. 질끈 감은 눈가로 후회 가득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피곤했던 듯 저녁을 먹자마자 곤히 잠든 초원을 바라보다 그도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흐느끼는 소리에 잠이 깬 승준은 번쩍 눈을 떴다.

“왜 그래요?”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벽에 등을 기대고 웅크려 앉은 초원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요?”

“아뇨, 흑⋯. 정말⋯.”

승준은 숨넘어갈 듯 들썩이는 몸을 품으로 깊이 끌어당겼다.

“⋯정말 행복한 꿈, 이었어요.”

“그런데 왜 울어요?”

“이룰 수가 없어서요.”

그 말을 끝으로 초원은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대체 무슨 꿈이었길래 이렇게 슬퍼하는 걸까?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영문 모르는 승준의 눈시울도 덩달아 붉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꿈이길래 그래요? 응? 말 좀 해 봐요.”

지친 듯, 울음은 흐느낌으로 잦아들었고 초원은 눈물 젖은 얼굴을 승준의 가슴팍에 기대고 있었다.

“우리한테⋯.”

“응.”

“⋯아이가 있었어요.”

승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설마 억제된 기억을 찾아가는 걸까?

“어떤 애들?”

초원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초원은 ‘아이’라고만 했을 뿐인데 꿈 내용을 전혀 모를 승준이 ‘애들’이라고 되물은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으니.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랑 갓난아기처럼 보이는 여자아이요.”

“어떻게 생겼는데?”

“남자애는 날 많이 닮았고 여자애는 아빠를, 승준 씨를 닮은 것 같았어요.”

“예뻤겠네, 그렇죠?”

물어보는 목소리에 어느새 물기가 어려 있었다.

“네, 진짜⋯. 너무 예뻤, 흑⋯.”

다시 울음을 터트리는 초원을 끌어안고 달래는 승준의 뺨에도 눈물 자국이 길게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우린 뭐 하고 있었어요?”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추워서 벽난로 앞에 있었어요.”

그땐 그게 일상이었다. 온종일 햇볕 한 번 쬘 수 없었던 지독한 안개와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해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그때. 문득 그리운 나날이 떠오른 승준은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난 소파에 앉아서 아기한테 젖을 먹이고 있었는데⋯.”

아기의 보드라운 살결이며 달짝지근한 젖 냄새며 초원은 그 모든 게 꿈에서 깬 지금도 생생했다.

“⋯아기가 힘이 없어서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약하게 태어난 것도 모자라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앓았던 딸이었다. 승준은 다신 안아줄 수 없는 딸 대신 초원을 끌어안고 아이를 어르듯 몸을 흔들었다.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서.”

“아냐, 초원 씨 잘못 아니야.”

안쓰러워 가슴이 미어졌다. 기억을 억제당하고 꿈인 줄 아는 지금조차도 그 죄책감만은 가슴 깊은 곳에서 상처가 되어 남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남자애는 뭘 하고 있었는데?”

“남자애는 승준 씨랑 벽난로 앞에서 팽이를 가지고 놀고 있었어요.”

언제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를 되짚어 보는 그의 얼굴에 애틋한 미소가 번졌다.

“애가 잘 안 돌아간다고 짜증 내니까 승준 씨가 팽이 촉을 쇠로 바꿔 준다고 그랬는데 내가 위험하니까 안 된다고 했어요.”

꿈에서 본 장면을 설명하는 초원의 목소리가 제법 밝아졌다. 가만히 듣던 승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에는 “귀찮으니까 팀장님 마음대로 하세요.”를 입에 달고 살던 여자가 아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순식간에 잔소리 대마왕으로 변했었다.

“좋을 때였네.”

좋을 때라 생이별을 하게 됐다. 삶에는 모순이 넘쳤지만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잔인한 모순은 여태껏 없었다. 정해진 해피엔딩을 이뤄 냈다는 죄 아닌 죄로 두 사람은 처절한 새드엔딩을 맞이해야 했다.

“그냥, 너무 평화로웠어요.”

그 말대로였다. 길고 긴 몸부림 끝에 얻은 짧디짧은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이렇게 초원의 목소리로 되살아보다니, 홀로 기억하는 쓸쓸함이 조금이나마 옅어졌다. 그래도 그는 초원이 기억을 되찾지 않길, 신기하고도 좋은 꿈이었다고만 철석같이 믿어 주길 바랐다.

“아직도 생생해요. 아기의 감촉이랑 남자애가 까르르 웃던 소리랑⋯.”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초원에게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승준은 아무도 불러 주지 않을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남자애가 나보고 엄마라고 불렀어요.”

평생 못 들을 줄 알았던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면서도 어째서인지 미어졌다.

“승준 씨가 아빠라고 불리는 것도 좋았어요.”

이런 벅찬 행복을 제 몸으론 이뤄줄 수 없다 생각하니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승준 씨는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거예요.”

“초원 씨도 좋은 엄마가 될 거야.”

이미 좋은 엄마였던 그녀였다. 승준의 미소에 어째선지 초원은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다시 꿈속으로 가서 안 나오고 싶어요.”

“왜? 여기서, 현실에서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가 앗아간 행복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제가 앗아간 것을 현실에서 꼭 되돌려 주고 싶었다.

초원이 눈물을 닦아 낸 차가운 손으로 승준의 두 뺨을 붙들었다.

“승준 씨도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죠? 집에 오면 애들이 반겨 주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두 눈에서 간절한 열망을 본 초원은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근데, 난 그렇게⋯ 해 줄 수가 없어요.”

단어 사이사이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온 힘을 다해 억눌렀다. 이번엔 꼭 말해야 했다.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혀끝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던 말을 내쉬는 숨에 쏟아 냈다.

“나 아기 못 만들어요.”

승준의 두 눈에 당혹감이 어리기 시작하자 초원은 눈을 꼬옥 감았다.

“뭐? 그런⋯.”

그런 소리, 전에는 안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던 승준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함께 긴 시간 산전수전을 겪으며 아이까지 낳은 사이였다. 이 여자라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왜 여태껏 말하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나 자신을 못 믿었던 것인가 싶어 섭섭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난임 정도가 아니에요. 병원에서도 안 된다 그러고 삼신할매도 안 된다고 그랬어요.”

“삼신할머니는 그런 말 안 했어.”

“나한테는 그랬다고요.”

대체 뭐가 맞는 걸까? 분명 그에게는 아이를 점지해 주겠다고 흔쾌히 약속했었다. 승준은 혼란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해요,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사과하지 마. 그게 초원 씨 의무도 아니고. 당연하게 생각한 내가 미안하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움츠러드는 작은 어깨를 보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그래도 미리 알았으면 이렇게까지⋯.”

“미리 알았어도 바뀔 건 없어.”

승준은 두 팔로 그 힘없는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럼 이것 때문에 결혼 안 하겠다고 했던 거예요?”

그의 가슴팍에 파묻힌 머리가 작게 두어 번 끄덕거렸다.

“고작 이게 뭐라고 혼자 앓고⋯.”

그때, 조승준과 홍초원으로 다시 결혼하자고 했을 때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제 와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초원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억을 잃으면서 그에 대한 믿음도 잃은 그녀이니 시간이 더 필요한 건 줄 알았는데 이런 이유였다니. 알고 나니 승준은 아이를 못 가지는 게 아쉽기는커녕 묵은 체증이 풀린 듯 속이 후련했다.

“난 초원 씨만 있으면 돼. 그럼 이젠 나랑 결혼해 줄 거죠?”

드디어 원하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곧바로 무참히 깨졌다. 초원은 고개를 들더니 단호하게 저었다.

“못 해요.”

“대체 왜? 난 초원 씨만 있으면 된다니까?”

이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도 왜 아직도 고집을 꺾지 않는 걸까? 승준은 막막해졌다.

초원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승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그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매끈한 뺨부터 그새 수염이 자라 거친 턱, 그리고 그 따뜻하고 다정한 입술까지.

입술 위에서 손길이 떨어지질 않자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던 승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불쑥 다가왔다. 초원은 그 입술을 손으로 가로막았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무언가를 예감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는 승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초원 씨도 알지?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는 초원이 신기루가 되어 사라지기라도 할 듯 두 팔을 꼭 붙들고 물었다. 이내 젖은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를 띤 채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승준은 안도해 손을 풀었다.

“그러니까 우리⋯ 헤어져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모두 빠져나간 듯 눈앞이 아찔해졌다.

“뭐?”

“여기까지만 해요.”

“사랑한다며 어떻게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에요.”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것. 오늘이 오기 전까진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 닥칠 난관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는 걸 감추는 이기적이고 비겁한 변명일 뿐이라고 비웃었다.

‘하긴, 비겁한 변명 맞지. 나도 겁쟁이니까.’

초원은 승준이 자신을 위해 서슴없이 커다란 행복을 포기해 버리는 걸 편히 지켜볼 만큼 강한 사람이 못 되었다.

“나도 승준 씨랑 결혼해서 애 낳고 알콩달콩 살고 싶다고요. 근데 난 그럴 능력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애는 됐고 나랑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면 될 거 아냐.”

“승준 씨라도 아빠 돼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단 말이에요.”

“초원 씨만 있으면 된다고 내가 그랬잖아.”

승준은 초원의 두 손을 꼭 감싸 쥐었지만 그녀는 손을 비틀어 빼려 안간힘을 썼다. 그 말을 믿어 주고 싶어도 초원은 믿을 수 없었다.

“애를 그렇게 원해 놓고는!”

그렇게 아빠가 되고 싶어 해 놓고 이젠 그녀만 있으면 된다고 말을 바꾸다니. 초원의 눈에 비치는 승준은 말과 행동이 달랐다.

“초원 씨랑 내 아이니까!”

불가능할 줄 알면서도 그가 원한 건 사라져 버린 ‘그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갖고 싶었던 거지 누가 아무 여자랑 애 낳고 살고 싶대?”

눈물로 얼룩진 초원의 얼굴 앞에서 승준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가 멋모르고 아이 소리를 하며 간섭하고 압박을 줄 때마다 벼랑 끝에 홀로 선 기분을 느꼈을 그녀였다. 매사 철두철미, 실수를 모르는 그였지만 어째서인지 이 여자 앞에서는 실수, 그것도 항상 엄청난 실수만 저질렀다. 그 죄책감에 쓰라린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미안해. 몰라서 그랬어. 그게 초원 씨 아픈 덴 줄 알았으면 절대 안 건드렸을 거야.”

이 남자, 바보였다. 왜 숨겼냐고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미안하다고 매달리고, 제 뺨을 적시는 눈물 따위 한 번 닦지도 않으면서 초원의 눈가에 맺히는 물기는 훔쳐내는 남자가 마음이 아릴 정도로 바보 같았다.

“제발 내 생각은 그만하고 본인 생각부터 해요.”

초원은 모진 말을 내뱉으면서도 아픈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의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냈다.

“자식도, 손주도 보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내 행복은 여기 있는데 무슨 소리야?”

끌어안으려 가까이 다가오는 가슴팍을 초원은 단호하게 밀어냈다.

“이렇게 나랑 살다가 내가 일찍 죽어 버리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그렇게 끔찍한 소릴 왜 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밀어닥칠 수 있다는 것, 초원은 이미 수도 없이 경험한 바였다.

“난 승준 씨가 나 때문에 혼자 쓸쓸하게 살다 죽는 꼴 못 봐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벌써 죄책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헛소리 좀 하지 마. 자식 있는 사람들은 안 그럴 것 같아?”

“아닐 수도 있잖아요.”

“하, 아직 살날 많은데 왜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혼자 결론을 내리는 거야?”

“제발 승준 씨도 거기까지 생각해 봐요. 너무 늦어서 후회만 남기 전에.”

“나 후회 안 한다니까.”

“내가 후회해요! 벌써 후회한다고요.”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모자랄 것 하나 없어 아깝디아까운 남자가 그녀에게 한눈팔지 않게 차갑게 밀어냈어야 했다.

“그래, 그럼 내가 초원 씨랑 헤어지고 딴 여자랑 애 낳고 산다고 쳐.”

이렇게 말만 들어도 속이 아리는 걸 초원은 애써 모른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체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게 왜 의미가⋯.”

“초원 씨가 없으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데.”

초원의 입가가 떨리더니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까 초원 씨 생각 그만하고 내 생각이나 하라고 했지?”

승준은 초원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들어 올렸다. 그의 완고한 눈빛이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에 여과 없이 맺혔다.

“나 내 생각밖에 안 하는 놈이야. 더럽게 이기적이어서 초원 씨가 밀어내도 마음 열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린 거라고.”

그렇게 어렵게 되찾은 여자이니 쉽게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단어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미안한데 난 여전히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라 오늘 초원 씨가 한 말 못 들은 거로 할게.”

“승준 씨, 제발⋯.”

승준은 애원하는 그녀를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빈틈없이 덮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더는 딴소리 말라는 듯 매서운 눈을 한 사람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원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에 뜨거운 입술이 와 닿고 팔 하나가 그녀의 몸을 단단히 휘감았다.

“늦었으니까 자요. 내일 회사에서 졸고 있으면 내 마음대로 사직 처리할 거니까.”

하지만 억지로 눕혀진 여자도, 억지로 눕힌 남자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에 초원은 알람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여느 아침과 다를 바 없는 가벼운 입맞춤에 잠이 깬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마지못해 들어 올렸다.

“잘 잤어요?”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하는 남자의 퀭한 얼굴에는 잘 못 잔 기색이 역력했다.

“먼저 씻어요. 밥은 내가 차릴 테니까.”

그 말에 습관처럼 몸을 일으키던 초원은 다시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느닷없이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러니까 일찍 잤어야지.”

게으름을 피우려는 줄 알고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는 승준을 밀어내고 초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어지러워요.”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이내 승준의 얼굴에 걱정이 번지고,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평소보다 열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추워⋯.”

초원이 몸을 웅크리더니 오들오들 떨기 시작하자 승준은 걷었던 이불을 다시 꼼꼼히 덮어 주었다.

“감긴가?”

꽃샘추위가 한창인데 방심한 모양이었다.

“회사 가지 말고 푹 쉬어요.”

코밑까지 이불을 바짝 끌어 올려준 그는 출근 준비를 위해 일어섰다.

책상 위에 놓아둔 시계를 집어 들어 손목에 차는 남자의 뒷모습을 초원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재킷을 걸쳐 입은 그가 다가오더니 입술을 내밀었다.

“감기 옮아요.”

입술을 이불 아래로 숨기자 그의 뜨거운 입술이 이마에 길게 와 닿았다.

“이따가 감기약 사다 줄게요.”

“됐어요. 감기약 별 도움도 안 되는데.”

몸살은 그저 한숨 푹 자면 나을 수준이었다.

“사과는 먹고 자요.”

초원은 현관에서 구두를 신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하고.”

또 고개를 끄덕이자 승준은 손을 살짝 흔들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다시 베개에 고개를 묻은 초원은 서랍 위를 멍하니 응시했다. 예쁘게 깎여 한입 크기로 잘려 있는 사과 옆에는 유자차가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멍한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베개 위로 떨어졌다.

[지금은 어때요?]

[괜찮아요. 이제 살 만해요.]

한숨 자고 나니 몸은 괜찮았다. 마음은 딱히 살 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누워서 쉬어요. 죽 사다 줄까?]

[저녁 남은 거로 밥 먹었어요. 승준 씨도 점심 맛있는 거 먹어요.]

[응, 이따 저녁 때 봐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초원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저녁 때 볼 일은 없을 거다.

택시가 멈춰 섰다. 기사의 도움을 받아 캐리어 두 개를 트렁크에서 내린 그녀는 승준의 아파트 건물 앞에 우두커니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알아. 나 못됐고 잔인한 거⋯.’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영영 끝나지 않을 씨름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건물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던 초원은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긴 생머리의 여자가 마침 들어가려던 길이었는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여자와 살짝 눈인사를 나눈 초원은 문이 열리자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아, 감사합니다.”

이어 초원이 캐리어를 끌고 들어가자 여자가 뒤돌아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무거워 보이는데 제가 하나 들어드릴까요?”

여자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친절하게 짐을 들어 준 건 고마웠는데 쓸데없는 질문이 너무 많았다.

“여행 다녀오시는 길이에요?”

“아뇨.”

모르는 사람과 수다를 떨 기분이 아니었던 초원은 여자가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주길 바랐지만, 여자는 승준이 사는 층 바로 아래인 20층을 눌렀다.

“저는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

“여기 산 지 오래됐어요?”

“아뇨, 저 여기 안 살아요.”

“그럼 놀러 온 거예요?”

“그건 아니고 그냥 짐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

“여기 아는 사람 살아요?”

불편한 기색을 보여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엘리베이터가 마침내 20층에 도착하고 여자가 내리자 초원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존재를 향해 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승아 씨.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오빠를 위하는 길이에요.”

초원은 승준의 물건을 제자리에 놓고 자신의 짐을 다시 캐리어에 채워 넣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승아는 그러는 내내 뒤를 따라다녔다. 그런다 한들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초원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욕실에서 잊은 것이 없는지 둘러보던 초원의 손이 컵에 나란히 꽂힌 칫솔로 향했다.

‘또 버리면 안 사 줄 거니까 그땐 손가락으로 양치해요.’

여기서 처음 주말을 보냈을 때 초원이 칫솔을 버리고 간 게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왔을 때 새 칫솔을 사 주면서 따끔하게 잔소리를 하던 그였다. 그 말이 생각나 피식 웃던 초원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뜨거우면서 늘 찬 바람 부는 쌀쌀맞은 말투로 그걸 감추던 남자였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칫솔을 주머니에 넣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침대 옆 협탁에 덩그러니 놓인 민트색 상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벌써 허전했다. 처음에는 없던 것이 생겨 어색하더니 이제는 있던 것이 없어져서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의 어색함도 늘 그랬듯 잊혀질 거다. 목걸이도, 남자도.

***

“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네, 잘 들어가세요.”

6시를 조금 넘긴 시각. 팀원들이 하나둘씩 사무실을 빠져나가며 인사를 해 오고, 승준도 집에 갈 채비를 하며 코트를 집어 들었다. 긴 하루였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핸드폰이 울리자 그는 은근한 미소를 띠며 책상 위에 놓인 폰을 집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원이었다.

‘먹고 싶은 거 생겼나?’

웃으며 채팅앱을 열던 승준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미안해요. 나도 이기적인 인간이라 더는 못 하겠어요. 승준 씨 집으로 가요. 다신 여기 오지 말고.]

“하아⋯. 이 여자, 진짜.”

어젯밤 다 이야기하고 끝난 일인 줄 알았다. 그걸 하루 종일 조용하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이렇게 갑자기 꺼내다니,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 멍했다. 승준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삐 소리 후 음성⋯.]

‘하긴 받을 리가 없지.’

코트를 걸친 그는 밖으로 나가 팀장실 문을 거칠게 닫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3층까지 올라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빅.

도어락이 오류 음을 냈다.

“하아⋯.”

다시 비밀번호를 눌러보았지만 똑같은 소리만 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행동력 한번 끝내주네.”

그새 비밀번호를 바꿨든지 안에서 잠갔든지 둘 중 하나였다. 역시나 문을 두드려도 대답은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뻔히 나는데도 받질 않았다.

“문 열어요. 셋 셀 동안 안 열면 119 부를 거니까. 하나.”

문에 귀를 대고 안쪽에서 나는 소음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둘. 나 한다면 하는 거 알죠? 내일이면 온 동네 사람은 물론이고 회사 사람들까지 초원 씨가 자살 기도 했다고 수군댈 거니까 각오해요.”

“셋.”

잠시 뜸을 들인 그는 그래도 반응이 없자 조용히 목을 가다듬었다.

“네, 소방서죠? 여기 한강로 1가⋯.”

“집에 가요.”

명연기가 통했는지 문 너머에서 드디어 초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왔는데 문을 안 열어 주잖아.”

“그만해요. 우리 끝났어요.”

“누구 맘대로 끝내?”

“제발 나 힘들게 하지 마요.”

힘들게 하지 말라는 말에 승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힘들게 하는 거야? 초원 씨 그 지독한 고집이 힘들게 하는 거지.”

듣고는 있는 건지, 초원은 대답이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얼른 열어요.”

승준은 열리지 않을 문고리를 돌리며 다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어서 열라니까?”

“어, 저기⋯.”

등 뒤에서 느닷없이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승준은 고개를 돌렸다. 초원의 앞집에 사는 남자가 문틈으로 눈만 빼꼼히 내밀고 내다보고 있었다.

“너무 시끄러운데⋯.”

“죄송합니다.”

이 방음 안 되고 좁은 곳에서 이러고 있는 건 변명의 여지없는 민폐였다. 승준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골목길에서 창문을 올려다보며 전화를 걸고 또 걸었지만 그 고집 센 여자는 받을 리가 없었다.

‘혼자 있을 시간을 주지, 뭐.’

마음이 힘들어 저러는 것이니 저번처럼 며칠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면 그에게 돌아올 것이다. 며칠도 그에게는 긴 시간이지만.

수면 부족도 모자라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린 터라 계속 이러고 있을 기력이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는 회와 소주가 든 봉투를 든 채로 승준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한숨을 쉬며 숫자가 바뀌는 모습만 바라보는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날씨에 안 맞는 차림을 한 젊은 여자가 들어오며 인사를 하고, 승준은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숫자 20이 써진 버튼을 누른 여자는 그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쳤지만 말 섞을 기분이 아니었던 그는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여기 오래 사셨어요?”

타인에게 쓸데없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런 걸까? 승준은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 디스플레이를 응시했다. 계속해서 얼굴에 꽂히는 시선이 불편해진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저는 새로 이사 왔는데.”

“⋯⋯.”

“혼자 사세요?”

“아뇨.”

“몇 명이서 사세요? 21층은 펜트하우스 아니에요? 되게 클 텐데.”

“네.”

“저 펜트하우스는 한 번도 못 봐서⋯.”

여자는 승준을 향해 몸을 돌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가 실실 흘리는 눈웃음에 그는 머리카락 달린 벌레라도 본 듯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구경 한 번 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별 정신 나간 여자가 다 있구나 싶었다. 집을 보고 싶으면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 봐도 사진 수두룩하게 나올 것을, 요즘 같은 세상에 생판 모르는 남자한테 집을 구경시켜 달라니.

드디어 20층에서 문이 열리고, 여자는 밖으로 나가서도 요염하게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었다. 승준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닫힘 버튼을 거칠게 눌렀다.

문이 다시 닫히는 순간 여자가 낮게 속삭였다.

“하, 씨발. 저 새끼 호모인가?”

여자의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번뜩였다.

승준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소파 위로 던지고 그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피곤하다, 피곤해.’

손에 든 봉투를 커피 테이블에 놓은 그는 TV를 켜 볼륨을 견딜 수 있는 최대치까지 올렸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소매도 걷어 올렸지만 여전히 갑갑했다. 갑갑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으니.

포장해 온 회를 대충 꺼내 펼치고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뭐든 통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초원에게 사진을 보낸 그는 핸드폰 화면 위로 손가락을 놀렸다.

[맛있겠죠?]

[초원 씨가 회 먹고 싶다고 그랬잖아.]

[후회하지 말고 당장 와요.]

[안 오면 나 혼자 다 먹을 거예요.]

승준은 채팅방을 화면에 띄운 채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소주잔 두 개와 접시 하나를 가지러 주방에 갔다 와서 다시 화면을 확인해 봤지만 메시지 옆에 뜬 1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 이 여자 진짜.”

핸드폰을 줄기차게 노려보고 있는다고 답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화면을 끈 승준은 회를 잔뜩 뜬 다음 접시에 올려 테이블 반대편에 놓았다.

“승아야, 거기 있지? 저녁 먹어.”

그는 소주로 잔 두 개를 채워 하나는 승아의 접시 옆에 놓고 다른 하나는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열불 난 속에 알코올을 들이부으니 속이 더 끓어올랐다.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아프다길래 종일 걱정했더니 그건 다 그를 쫓아내려고 한 연기였나 싶었다.

‘내일 회사에서 가만두나 봐라.’

승준은 빈 잔 위로 다시 소주병을 기울였다.

흰 플라스틱 접시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소주병은 거의 비어 가는데도 핸드폰이 울리지도, 현관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왜 그러냐?”

승준은 죄 없는 동생을 붙잡고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뭐가 그렇게 복잡해? 좋으면 만나는 거고 아니면 헤어지는 거지.”

좋으니까 헤어지자니.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어처구니없었다.

“내가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닌데 왜 쫓겨나야 해?”

멋모르고 초원을 들들 볶은 건 잘못이었지만, 그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예전이랑 똑같았는데⋯.’

별것 아닌 일로 울고 짜증 내는 그 감정 기복 하며 부쩍 많아진 잠까지, 예전에 임신했을 때 그대로였던지라 승준은 초원이 아이를 가졌다고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이나 해 주든가⋯.”

그랬더라면 죽는 날까지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약속도 하나도 안 지키고⋯.”

정작 당사자는 여기 있지도 않은데 승준은 그간 섭섭했던 걸 다 쏟아 내려는 모양이었다.

“다 잊어도 나랑 사랑에 빠져준다 할 땐 언제고 딴 놈 꽁무니나 쫓아다니질 않나.”

술이 될 대로 된 그는 승아는 전혀 모르는 일까지 푸념하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랑 결혼해 준다고 약속해 놓고는⋯. 진짜 치사해서⋯.”

따지자면 그 약속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초원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 자신만 해도 입술을 다시 맞대기 전까진 까맣게 잊고 있었지 않은가.

정말 ‘어느 날 갑자기’였다. 전날까지만 해도 그냥 ‘부하 직원 6’에 불과했던 여자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초원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아려 왔다. 그걸 도저히 머리론 이해할 수 없어 억누르려고 몇 년을 애썼던 그였다.

“하⋯, 몸에서 사리 나오겠네.”

차라리 그곳에서 살던 때가 좋았다. 초원이 그토록 바랐던 것처럼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소주잔을 기울이던 승준은 문득 손을 멈추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기억을 찾아 줄까?’

그렇게 두 사람이 어떻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는지 떠올려 주고 싶었다. 그러면 더는 헤어지자는 잔인한 소리를 안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쓰디쓴 소주와 함께 삼켜 버렸다.

기억을 찾은 초원이 과연 그를 용서할까?

‘나 다시 돌려보내 줘요, 제발.’

좁은 관찰실에 메아리치던 그 애끓는 절규가 묻힌 기억의 틈을 비집고 나와 이젠 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다신 되살리고 싶지 않았던 그 악몽 같은 기억에 질끈 감은 그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이기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아이를 못 가진다는 지금의 그녀에게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아이들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건 악마도 울고 갈 잔인한 짓이었다. 이제야 왜 초원이 돌아오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는지 깨닫게 된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수면 부족과 사랑싸움과 소주는 피곤한 조합이었다.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은 승준은 2층으로 올라갔다. 욕실로 들어가 씻으려던 그의 발걸음이 침대 옆에서 우뚝 멈췄다.

여기 있지 말아야 할 민트색 상자가 얌전히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내키지 않는 손으로 상자를 열어 본 그는 지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예전처럼 며칠 혼자 있을 시간을 주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하아⋯.”

이렇게 잔인해야 하는 걸까? 침대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받지 않을 전화를 걸고 또 거는 그의 손에 매달린 목걸이가 초조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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