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안부 산하 특이현상관리청의 위엄
“누굴까나⋯.”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남자는 누가 들을세라 입을 막았다. 이 작은 방 안에 사람처럼 생긴 것이라곤 까까머리를 하고 있는 이 남자 하나뿐이었지만, 이곳은 말 그대로 벽에도 눈과 귀가 있는 곳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의 손이 가려운 데를 긁기라도 하는 듯 흰 상의 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KAC-C-002944가 새겨진 명찰이 들썩였다.
먹구름이 걷힌 듯 작은 창을 통해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남자는 햇빛이 방바닥에 그린 바둑판무늬를 향해 혀를 찼다. 바깥세상을 느낄 수 있는 통로라고는 저 작은 창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손바닥 하나 지나갈 정도의 창살로 가로막혀 있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어제는 운수 좋은 날이었다. 점심에 제법 먹을 만한 게 나왔다 싶었더니 선물까지 같이 딸려왔다.
남자는 밥 속에서 몰래 건져 올려 둔 긴 머리카락 하나를 옷 속에 숨긴 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누구의 머리카락일까? 당장 이걸로 변신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징계를 당한 지 이제 겨우 며칠이었다. 또 그 창문 없는 코딱지만 한 방으로 끌려가는 건 끔찍했다.
남들 없는 능력 있다고 이렇게 사람을 가둬두고 실험실 쥐 취급하며 괴롭히다니.
‘21세기 민주국가에서 이런 인권 유린이 있나.’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이건 손톱 아래에 피가 맺히도록 긁어 봤자 시원해질 수 없는 가려움이었다.
‘아니지, 남의 피가 맺히면 시원하지.’
남자는 문득 첫 경험의 희열을 떠올려 보았다.
항상 착실하고 믿음직스럽다는 소리가 따라다니던 형, 그리고 늘 ‘너는 형의 반만큼이라도 해라’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괴물 취급을 당하던 그.
그렇게 착실하고 믿음직스럽던 아들이자 오빠가 자신의 숨통을 끊는 순간 아버지와 누나의 얼굴이 참으로 볼만했다. 충격과 배신감과 절망이 영원히 박제되어 버린 얼굴들이라니.
‘영근아! 너 영근이지?’
“하⋯, 씨발.”
형의 얼굴을 한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봤던 어머니의 절규가 다시 귓전에 울리자 그는 거칠게 귀를 후볐다.
“아, 썅!”
그 바람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이 어딘가로 떨어져 사라졌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못 찾은 그가 미친놈처럼 침대 위를 손으로 훑어대는 순간, 밖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무장한 군인들이 우르르 들어와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 뒤로 흰 방호복을 입은 자들이 청소기를 들고 들어오더니 때아닌 대청소를 시작했다.
이불을 털던 사람이 긴 머리카락을 발견하곤 남자를 붙잡고 있는 군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이윽고 철저한 수색을 받으러 끌려 나가는 남자의 절규가 긴 복도에 메아리쳤다.
‘씨발, 내가 그놈만 제대로 끝냈어도⋯.’
늦은 밤, 침대에 웅크려 누운 남자는 미완으로 남은 의식을 곱씹어 보았다. 이건 놈을 향한 복수심이 아니었다. 그저 아쉬웠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가려움이 지독해졌다.
몇 달이나 공들여 준비한 의식이었는데 하필이면⋯.
셋은 계획대로 깔끔하게 끝냈다. 이제 남은 한 놈이 집에 올 때를 기다려 자살로 위장해 죽이고 죄를 뒤집어씌우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제 형에게 그랬듯이.
이번에는 매달아서? 아니면 욕조가 나으려나? 어차피 밤늦게나 돌아올 놈이었다. 방법을 고민하며 한가롭게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하필이면 그날은 그놈이 일찍 올 게 뭔가.
썩을. 그 한 번의 실수가 이 꼴로 이어질 줄이야.
남자는 운 나쁘게 잡힌 후 자신을 괴물 보듯 응시하던 놈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나쁘지 않았다. 그 머리카락만 뺏기고 말았으니 말이다.
귀를 후벼파던 남자의 손끝에 노란 털이 딸려 나왔다. 자신을 수색했던 군인의 옷자락에서 훔친 털이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은 아니고 그 군인이 고양이라도 키우는 모양이었다.
“될까나?”
남자는 창살 사이의 틈을 눈으로 가늠해 보며 씨익 웃었다.
***
시곗바늘이 6시 5분을 가리키고 초원을 제외한 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코트를 걸치던 병훈은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초원을 딱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병훈이 자주 가는 횟집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초원은 느닷없이 팀장이 회의 준비를 도와달라며 야근을 시키는 바람에 사무실에 발이 묶인 신세가 됐다.
“쩝, 팀장의 총애를 받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라니까? 나처럼 길고 가늘게, 응?”
“가늘다 못해 끊어질 것 같네요.”
초원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튼, 수고해. 팀장님한테 대신 맛있는 거 사 달라고 아양이라도 떨어 봐.”
아양이라는 말에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팀장이 맛있는 거 사 주겠다고 아양을 떨어도 모자랄 판국에⋯.’
팀원들이 다 퇴근해 버리자 기다렸다는 듯 승준이 팀장실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밥부터 먹고 할까요?”
“헐, 진짜 야근시킬 생각이에요?”
야근은 그저 초원이 회식에 못 따라가게 하려고 급조한 핑계인 줄 알았다.
“아니, 뭐 초원 씨는 놀아도 되는데⋯. 도와주면 더 고맙고.”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쩔쩔매며 멋쩍게 웃는 남자가 주임이고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낀 여자가 팀장인 줄 알았을 것이다.
“꽃등심 먹으러 갈래요?”
마법의 단어였다. 순식간에 딴 사람이 된 초원이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도 나 회 진짜 먹고 싶었는데⋯.”
초원은 지글지글 익어 가는 꽃등심을 홀린 듯 바라보다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회는 안 돼. 우리 애기한테 안 좋아.”
“무슨 있지도 않은 애기 타령이에요.”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승준을 멀뚱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초원은 이내 한숨을 쉬더니 양파절임만 뒤적이기 시작했다. 초원의 젓가락질에 마구잡이로 뒤섞이던 양파 위로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소고기 조각이 잔뜩 얹혀졌다.
“여튼, 회가 아니더라도 회식 따라가지 마요. 초원 씨 분위기에 휩쓸려서 술 마실 것 같아. 그리고 박 주임 취하면 담배도 피우는데⋯.”
부담스럽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요즘 내내 이런 소리뿐이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알아 오는 건지 초원도 잘 모르는 임신 상식을 읊으며 잔소리를 쏟아 내고 있었다. 이골이 난 그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꽃등심만 날름날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그날 올 때 지나지 않았나?”
“아뇨.”
사실 이미 지났다. 하지만 이 정도 늦는 건 스트레스가 심하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것일 게 뻔했다. 이렇게 매일 옆에서 압박을 주고 있으니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게 이상했다.
멋모르고 싱글벙글 웃으며 고기를 구워 주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소주가 절실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온 초원은 노트북을 들고 와 승준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벌써 승준이 그의 자리 옆에 의자를 가져다 두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눌렀다. 부팅이 끝나길 기다리던 초원의 눈이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야근하는 것도 낭만적이지 않나?”
“헐⋯, 낭만 다 죽었네.”
승준은 투덜대기 시작하는 초원을 두 팔로 휘감아 끌어당겼다. 귀찮은 듯 몸부림치는 그녀의 정수리와 이마에 쪽쪽 입술이 닿았다.
“상사랑 사귀면 덕 좀 볼 줄 알았더니⋯.”
이내 몸부림은 잠잠해졌지만 입은 여전히 투덜대고 있었다.
“이젠 막내도 아닌데 이런 건 막내 시켜야죠.”
“그럼 지금까지 막내라서 시킨 줄 안 건가?”
사귀기 전에도 이렇게 감사니 회의 준비니 하며 초원에게 야근을 시킬 때가 있었다. 그건 사실 단둘이 남아 시간을 보내려는 꼼수에 가까웠던 걸 그녀는 몰랐던 모양이다.
“헐, 대체 언제부터 나한테 흑심 품었던 거예요?”
“흑심이라니, 순정인데.”
초원은 슬슬 딴짓의 시동을 거는 승준을 밀어내고 노트북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승준이 검토해 달라고 보낸 스프레드시트 파일을 열어 본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거 아름 씨가 하는 거 아니에요?”
“어, 아름 씨가 한 거예요. 근데 못 믿겠어서.”
초원이 또 한숨을 내쉬더니 거칠게 마우스 휠을 내렸다. 요즘 짜증이 부쩍 많아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준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감돌았다.
‘임신한 것 같은데⋯.’
정적을 이따금 딸깍, 드르륵 하는 마우스 소리만이 흔들고 있었다. 들여다보던 모니터에서 눈을 뗀 승준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씨익 웃었다.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초원의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졸려요?”
그 말에 초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흐음, 커피라도 마셔야 할까 봐요.”
“커피 안 돼요.”
“하, 진짜! 커피도 안 돼, 술도 안 돼, 회도 안 돼! 대체 뭔데 멋대로 다 안 된다고 그래요?”
조용하다 갑자기 분통을 터트리는 그녀의 눈가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어요.”
승준은 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초원을 끌어안고 달랬다.
“그럼 내가 버블티 사다 주는 건 어때요? 아님 핫초코로 사다 줄까? 휘핑크림 잔뜩 얹어서.”
울음이 잦아들었다. 이내 초원은 코를 훌쩍이며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둘 다 사 줘요.”
승준이 나가고 훌쩍대며 티슈 갑에서 티슈를 뽑던 초원은 멍하니 그의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시선을 사로잡은 건 승준의 계정으로 로그인된 특관청 데이터베이스 화면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승준의 의자로 옮겨 앉은 그녀는 검색창에 자신의 직원 ID를 넣었다. 돋보기 모양 버튼을 누르자 예상대로 파일 하나가 나타났다.
초원의 계정으로는 열 수 없는 파일이었다. 본인의 기억 억제 보고서는 열람 금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본인도 아니고 보안 2등급인 승준의 계정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
망설였지만 이럴 시간이 없었다. 초원은 눈을 질끈 감고 마우스 버튼을 눌렀다.
[관련자 열람 불가]
“뭐?”
초원의 기억 억제 보고서인데 어째서 승준이 관련자인 걸까?
‘설마 직속 상사도 관련자인가?’
믿었던 승준의 계정으로도 열람이 안 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파일 제목에 있는 사건 번호를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에 파일이 두 개 더 나타나자 초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새로 나타난 사건 보고서도, 누군가의 기억 억제 보고서도 전부 [관련자 열람 불가] 메시지를 띄울 뿐이었다. 초원은 허무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건 누구지?’
초원은 다른 사람의 기억 억제 보고서에 적힌 직원 ID를 검색창에 쳐 넣었다. 사건 번호가 같다는 말은 그녀와 같은 사건에 휘말려 같이 기억 억제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이 사람을 찾으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엔터 키를 누르려던 손가락이 얼어붙은 듯 공중에서 멈췄다.
‘ID가 같아.’
검색창에 직접 친 ID가 그 옆에 표시된 접속자 ID와 똑같았다.
‘이게 무슨⋯.’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초원은 뒤로 가기 버튼을 미친 듯이 누르고 또 눌렀다. 잽싸게 다른 의자로 몸을 옮기는 순간, 문이 열리며 손에 음료 캐리어와 케이크 포장을 든 승준이 들어왔다.
“자, 공주님. 마음껏 골라 드시죠.”
“공주는 무슨⋯.”
초원은 버블티를 입속 가득 빨아들이며 승준을 곁눈질했다. 어느새 일에 무섭게 집중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대체 무슨 사건이었길래? 그걸 이 남자랑 겪었다고? 그것도 하필 잊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을? 혹시 이 남자, 알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어. 하, 근데 물어봤는데 모르고 있으면 어떡해? 괜히 잘 사는 사람 혼란스럽게.’
초원은 빨대를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이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
요즘 제4격리소 격리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하긴, 위험 등급 살인마가 감쪽같이 격리소에서 탈출했는데 분위기가 잔칫집이면 더 말이 안 됐다.
‘아, 씨. 이 망할 놈의 섬, 떠나고 싶다.’
이동현 주임은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회색 바위틈으로 자라고 있는 소나무의 꺾인 자태와 그 너머 넘실대는 푸른 바다가 회 한 접시와 소주를 부를 정도로 운치 있었지만, 그러면 뭐 하나? 그 앞을 떡하니 높은 담벼락과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는 흉물스러운 광경이라니.
‘내가 격리를 하는 건지 격리를 당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렇다고 확 관두고 떠나 버리기엔 지금까지 버틴 세월이 아까웠다. 반년만 더 버티면 다른 지방으로 발령이 날 테니까. 어디로 갈지는 몰라도 이 후진 곳에 비하면 천국일 게 분명했다.
사무실 문밖에서 발뒤꿈치를 질질 끄는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윗대가리들에게 불려갔다 온 팀장에게 무참히 쪼일 각오를 하며 동현은 모니터에 뜬 게임 창을 내렸다.
“오셨습니까?”
“어, 이 주임.”
썩은 감자 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10년 묵은 변비라도 해결한 듯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얘기가 잘됐나?’
못 찾으면 징계네, 본청에서 알면 쫓겨나네, 저번 주 내내 앓는 소리를 내던 양반이 처음으로 웃고 있었다.
“그놈, 그냥 사망으로 처리하세요.”
“네?”
“더 수색 안 해도 된다고.”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 소장님이 정년이 얼마 안 남으셔서⋯.”
“아⋯.”
“그 양반 가시는 길에 똥 뿌리지 말고 쉬쉬하라는 거지.”
“근데 혹시 육지로 탈출했으면⋯.”
“그럴 리가 있나. 우리 몰래 배를 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헤엄쳐서 가면 고기밥 신세지.”
“아, 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어도 섬 밖으로 나갈 땐 무조건 신분증이며 지문을 대조하게 되어 있었고, 저 거친 바다를 헤엄쳐 육지까지 간다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뭐,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동현은 브라우저 창을 띄우고 사내 시스템에 접속했다. 몇 번의 클릭과 타이핑이면 충분했다. 3분도 채 되지 않아 일을 끝낸 그는 사무실 안을 힐끔거리다 다시 게임 창을 열었다.
그렇게 2944번 개체는 격리 중 자연사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
‘진짜, 이 세상 피곤함이 아니네.’
초원은 팀장실 쪽을 곁눈질했다. 병훈과 으뜸이 미팅을 하러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으니 지금 한창 정신없을 게 분명했다.
‘이 틈에 몰래 커피 한잔해야지.’
머그잔을 들고 재빠르게 복도로 나갔다.
요즘 학생주임과 사는 기분이었다. 도끼눈을 뜨고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하는 통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제는 원룸 주차장에서 못 보던 노랑 고양이가 알짱거리며 울길래 참치 캔을 가져와 까 주려 했다가 톡소플라즈마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일장 연설을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다.
“앗!”
모퉁이를 휙 돌던 초원은 벽에 등을 기대어 서 있던 여자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갈색 숏컷 머리에 정장을 세련되게 빼입은 여자는 4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다. 노트북 가방과 핸드백을 들고 있는 거로 봐선 어디 지청에서 온 직원인가 싶었지만 목에 사원증이 걸려 있지 않았다.
‘대체 코너에는 왜 서 있는 거야?’
여자의 번지르르한 미소가 어쩐지 불편했다. 예의상 멋쩍게 웃은 초원은 다시 탕비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 향기 끝내준다.”
커피 머신이 멈추고 머그잔을 집어 든 그녀는 가까운 테이블로 가 앉았다. 여기서 다 마시고 가면 완전 범죄였다.
커피가 식기를 기다리며 고소한 향을 만끽하던 초원은 허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허리도, 배도 콕콕 쑤셨다.
‘곧 시작하겠네.’
이렇게 싸하게 배가 아프다가 오늘 밤이나 내일 터질 게 분명했다. 그런데 멋모르는 승준은 어느새 생리가 늦는 걸 눈치채곤 혼자 김칫국을 마시면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
테스트기를 받아 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이렇게라도 임신이 아닌 걸 증명하면 숨 막히는 간섭이 잦아들지도 몰랐다.
‘오늘 집에 가서 써 보고 한 줄 나오는 거 보여 줄랬는데⋯.’
그런데 생리가 터져 버리면 굳이 그럴 필요 없으니 잘된 셈이었다.
아직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며 생각에 잠겨 있던 초원은 탕비실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아니네⋯.’
학생주임일 줄 알고 긴장했던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까 복도에서 부딪힐 뻔했던 여자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들어오더니 탕비실 안을 어슬렁거렸다.
신경이 쓰였다. 탕비실에 왔으면 뭘 마시든지 먹든지 할 것이지, 왜 자꾸 초원이 앉아 있는 쪽을 힐끔거리는지 말이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아닌 척하면서도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뇨, 제가 아니라 우리 선생님이 필요한 게 많아 보여서⋯.”
“네?”
어리둥절한 초원의 맞은편에 여자는 묻지도 않고 떡하니 앉았다. 그러더니 노트북 가방에서 빳빳한 브로슈어를 여러 개 꺼내 펼치기 시작했다. 브로슈어 귀퉁이에 적힌 보험사 이름을 본 초원은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아, 뭐야? 잡상인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보안 끝내주네, 진짜.’
초원의 떨떠름한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는 건지, 여자는 묻지도 않은 보험 상품을 설명하며 영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휴, 걱정이 참 많으시죠? 마침 저한테 선생님 고민을 딱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품이 있는데 한 1분만 시간을 내주시면⋯.”
초면인 사람의 고민을 훤히 안다는 듯 구는 여자의 말이 기분 나빴다. 밖으로 나가 경비 인원을 부르려 일어서는 순간, 여자가 초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의 행복이 평생 갈 것 같죠?”
“네? 경비 부르기 전에 당장 나가세요.”
무슨 보험 영업을 이딴 식으로 하는 걸까? 초원은 화가 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남자 친구분이 불임인 거 알고 떠나는 건 아닐까⋯.”
이 이상한 여자에게서 벗어나려 한 걸음 옆으로 내디디던 초원은 우뚝 멈춰 섰다.
“⋯남자 친구분이 먼저 세상을 뜨시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건 차라리 행복한 고민일 거예요.”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이 여자, 분명 초면인데 다 안다는 듯 구는 게 아니라 정말 다 알고 있었다.
“정체가 뭐야?”
“선생님이 먼저 사망하시는 경우는 생각 못 해 보셨죠?”
초원의 매서운 시선에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끔찍한 소리를 지껄였다.
“남자 친구분은 가족도 없으시네요. 제 말이 맞죠?”
여자는 마음 아픈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웃고 있었다.
“선생님이랑 결혼해서 살다가 자식도 하나 못 보고 선생님도 먼저 가시고, 그럼 챙겨 줄 사람도 없잖아요.”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멍했다. 승준이 또다시 혼자가 될 거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돈이라도 넉넉히 드리고 가야 마음이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엉거주춤 서 있던 초원은 다리의 힘이 빠져 다시 의자 위로 주저앉았다.
“요즘 고독사 기사도 많은데 보신 적 있으실 거예요.”
숨이 막혔다. 깊은 바닷속에 잠기기라도 한 듯. 가쁜 숨을 몰아쉬는 초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그만⋯.”
“선생님 먼저 가시고 나면 남자 친구분은 살 의욕을 잃고 폐인이 되실 텐데⋯.”
눈앞에 빤히 보인다는 듯 여자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걸까? 초원의 두 눈동자 속에 짙은 두려움이 울렁대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쓸쓸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으면 마음이 참 아프시잖아요, 그렇죠?”
“그, 그렇게 될걸⋯.”
목이 메 나머지 말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어떻게 장담하느냐고 물어서 뭐 할까?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 예지 능력이 없어도 불 보듯 뻔한 일, 장밋빛 렌즈를 끼고 세상을 보느라 놓친 건 제 잘못이었다.
“흑⋯.”
초원은 무릎을 끌어 올려 얼굴을 묻었다. 여자는 앞에 앉은 사람이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든지 말든지 온갖 보험 상품을 늘어놓으며 쉴 새 없이 조잘대고 있었다. 초원은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미꾸라지도 아니고⋯. 또 그새 빠져나가선⋯.’
분명 몰래 커피를 마시고 있을 초원에게 할 잔소리를 일발 장전하고 탕비실 문을 벌컥 연 승준은 눈앞의 광경에 멈칫했다.
“⋯남자 친구분 이름으로는 연금 보험을⋯.”
“당신 뭐야?”
승준은 곧장 걸어 들어가 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 떨고 있는 초원을 감싸 안았다.
“초원 씨, 왜 그래? 이 여자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초원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흐느끼기만 할 뿐이었다.
“대체 초원 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험악한 태도에도 여자는 반가운 사람이라도 본 듯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마침 잘 오셨네요. 여자 친구분이랑 같이⋯.”
미친 여자였다. 승준은 망설임 없이 벽에 달린 빨간 버튼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곧바로 사무실 전체에 고막을 찢을 기세로 비상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텅 빈 집에 혼자 계시는 거 참 싫으시죠?”
“닥쳐!”
그 순간 초원의 흐느낌이 사이렌 소리를 가르고 들릴 정도로 거세졌다. 승준은 흔들리는 작은 몸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초원 씨, 괜찮아. 괜찮아.”
문이 벌컥 열렸다. 승준은 긴장한 얼굴로 들어오는 경비 인원들에게 외치며 여자를 가리켰다.
“우리 직원 위협했으니 당장 격리 조치하세요.”
“능력은⋯.”
경비 인원 중 하나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개체의 성격을 모르니 섣불리 대응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담당자 누구야? 누군데 관리를 이딴 식으로 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이 썩을 곳에 환멸이 난 승준은 복도에 서서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거친 분노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