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두 번 할 팔자
“그려, 우리 총각은 뭐시 궁금해 오셨을꼬?”
명옥 보살은 작은 상 하나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젊은 남자 손님에게 물었다. 지난 50년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입이 닳도록 물은 말이었다.
“뭐⋯.”
뜸을 들이며 자신을 훑어보는 남자의 기운이 좋지 않았다. 명옥은 얇은 한복 아래로 소름이 돋아 오르는 걸 애써 모른 척했다. 이날 이때까지 자식들 반듯하게 키워 시집 장가 잘 보낸 건 다 온갖 요상한 인간들을 받아 가며 하루도 쉬지 않고 점집을 열었던 덕이었다.
“제가 요즘 하는 일이 있는데 요게 제법 잘되고 있어서 말이죠.”
남자는 듣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잘못하면 나랏밥 먹을 일이구나.”
명옥의 말에 남자는 웃는 것도 화난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나랏밥이라는 게⋯.”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거시 아니고 관재수가 있다고. 아이고야, 잘못하면 콩밥 먹는 일일세.”
“허어, 그렇구나.”
콩밥을 먹는다는데도 남자는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그럼 보살님이 나랏밥을 안 먹고 계속할 방법을 좀 알려 주세요.”
“쯧, 육신 멀쩡허게 생긴 총각이⋯. 그냥 얼른 손 털고 떳떳한 일을 혀.”
오늘은 첫 개시 손님도 별로더니 마지막도 이럴 모양이었다. 명옥은 손님이 가고 나면 굵은 소금을 팍팍 뿌려야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근데 혼자 일하시나 봐요?”
“이 쪼깬한 점집에 사람 써서 뭐가 남겄어.”
“그래도 차는 좋은 거 모시던데?”
남자의 비틀린 미소에 명옥의 등줄기를 따라 섬뜩한 기운이 타고 흘렀다. 허둥지둥 상 아래의 돈 통을 끌어안고 일어서서 도망치려던 명옥은 머리를 잡아당기는 날카로운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초, 총각, 왜 이려?”
불빛 아래로 서슬 퍼런 칼날이 번뜩였다.
“할매, 점쟁이잖아. 이 정도는 미리 봤어야지.”
“아이구, 총각. 제발 나 좀 살려 줘.”
초원은 외근 경비 영수증을 정리하며 칸막이 너머의 실랑이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고, 보살님. 그게 저희도 딱히 방법이 없어요.”
“아니, 청에서 방법이 읎으면 어떡혀?”
출근 전부터 11층 로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병훈을 기다리던 아주머니는 이제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릴 기세였다.
“내가 오죽헜으면 가게도 안 열고 아침 댓바람부터 여기로 쫓아왔겄어?”
주기적으로 예지몽을 꾼다는 이 아주머니는 병훈이 담당하는 예지 능력자였다.
“차라리 며칠 장사를 접으시지 그래요? 그럼 강도당할 일도 없으실 텐데.”
“하이구, 말이 되는 소리를 혀. 우리 손녀가 지금 캐나다에 있는데 돈이 을매나 많이 드는지 알어? 아주 돈 먹는 하마가 따로 없구먼.”
“에이, 그래도 목숨보다 중요한 게 있나요.”
“그러니께 와서 나 좀 지켜 달라는 거 아녀.”
“아니, 근데 저희가 경찰도 아니고⋯. 강도는 일반인이잖아요. 저흰 일반인은 관리 안 하는데⋯.”
“그렇다고 경찰서 가서 내가 ‘아이고, 경찰 아저씨! 내가 꿈에서 어떤 놈이 날 죽이는 걸 봤으니 그놈 좀 잡아 주소.’ 하면 미친 할맨줄 알 거 아녀.”
“보살님, 그럼요⋯.”
“응.”
“로또 번호라도 알려 주시면⋯.”
“내 참말로⋯. 그걸 내가 알 수 있으믄 이 나이 먹도록 이 짓을 하고 있겄어?”
아쉬운 듯 병훈이 입을 쩝쩝대는 소리를 칸막이 너머로 들으며 초원은 숨죽여 웃었다.
“그러지 말고 총각, 내가 참한 아가씨 하나 중매 서 주는 건 어뗘?”
“헐, 이거 뭐예요?”
오후 내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일정을 조율하던 병훈이 종이 한 장을 불쑥 초원에게 내밀었다.
“뭐긴 뭐야. 그 명옥 보살님 신변 보호 일정이지.”
“근데 내 이름은 여기 왜 있는 거예요?”
“왜 있냐니⋯. 나랑 으뜸 씨 둘이서 매일 보초 설 순 없잖아?”
“아니, 그래도 일정을 짤 거면 물어보고 짜야죠.”
떡하니 이번 일요일에 초원과 현우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물어봤자 둘 다 솔로면서.”
초원의 매서운 눈빛을 병훈은 모른 체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팀장님이 평일은 격리부대에 맡기고 우리는 주말 맡으라고 하셔서. 뭐,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칫, 일요일에 같이 누워서 뒹굴뒹굴하려 했더니⋯.’
속으로 팀장이 남친이어서 덕 보는 거 하나 없다고 투덜대는 순간 팀장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승준이 손에 빳빳한 종이 몇 장을 들고나왔다.
“작년 하반기 근무평정 결과 나왔습니다.”
‘헉,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승준이 먼저 아름의 책상 쪽으로 다가가 종이 한 장을 내밀고, 모두들 수능 성적표를 나눠 주는 담임 선생님을 보는 눈으로 그를 좇았다. 평정 등급에 따라 통장에 성과급이 얼마나 꽂힐지가 정해지다 보니 다들 목을 빼고 이것만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번엔 탁월 등급 있으려나?’
등급은 탁월, 우수, 보통, 미흡, 불량 이렇게 총 다섯 등급이었다. 팀 인원이 적어 등급에 정해진 비율은 없는 절대 평가였지만 다만, 탁월 등급만은 1명이라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승준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주었다.
“홍 주임.”
드디어 초원의 차례였다.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며 올려다보았지만 승준은 눈을 피하더니 평정서만 넘겨주고 도망치듯 희경의 자리로 가 버렸다.
‘뭐야? 등급 깎기라도 한 거야?’
승준이 뒤집어서 준 평정서를 급하게 돌려보았다.
‘흠⋯, 똑같잖아.’
작년 상반기와 다를 바 없이 ‘우수’ 등급이었다.
‘칫, 진짜 냉정하네.’
그렇게 최고 등급 염불을 외웠는데. 아무리 내기에 졌더라도 선심 써서 주면 초원의 통장도 배부르고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쏠 테니 승준도 배부를 텐데. 칼같이 우수 등급을 준 저 남자가 야속했다.
‘근데 그간의 하극상을 생각하면 안 깎은 게 어디야.’
나쁘지 않다고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등급 아래의 의견란을 읽기 시작하던 초원의 낯빛이 확 변했다.
의견은 칭찬 일색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자신의 이익과 안녕보다는 파트너를 먼저 생각하는 희생정신과 동료애가 매우 강함.]
‘이거 비꼬는 건가?’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기도 전에 솔선수범 먼저 나서는 자기 주도적이며 적극적인 면모가 아주 인상적임.]
‘비꼬는 거 맞네.’
[대쪽 같은 성격으로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관철시키고야 마는 뚝심과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열정적으로 피력하는 담대함이 돋보임.]
‘이거 지금 나보고 고집불통에 위아래를 모른다는 거지?’
[상관의 조언과 지시를 잘 새겨듣는 것 같아 보이나 실제로 그것을 따르는 모습은 보기 힘들므로 이 부분을 개선한다면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함.]
‘와, 오늘 방바닥에서 자라고 해야지. 보일러도 안 틀어 줄 거야.’
“홍 주임, 뭐 받았어?”
“아, 전 저번이랑 똑같아요.”
초원은 평정서를 엎어 서랍에 집어넣었다.
“우수? 우리랑 똑같네? 크으, 우리 둘 다 우수 받았잖아.”
으뜸과 칸막이 너머로 하이파이브를 하던 병훈은 사무실 저편에 앉은 희경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했다. 병훈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박병훈: 안 모 씨 표정 왜 저래? 아, 홍차는 돌아보지 마!]
[홍초원: 왜요? 그러니까 더 돌아보고 싶네.]
[박병훈: 그, 절에 가면 천왕문 안에 사천왕 있지? 그중에 얼굴 시뻘겋고 험상궂은 왕이랑 닮았어.]
[차현우: 등급 떨어졌나 보네요.]
[박병훈: 아, 졸 궁금하다. 누구 총대 메고 가 볼 사람?]
뒤에서 휙,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리자 초원은 황급히 메신저 창을 내렸다.
비장한 기세로 걸어가는 희경을 팀원들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좇았다. 팀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희경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나저나 차 주임은 뭐 받았어?”
“저요? 우수요.”
초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반기에는 보통을 줘 놓고 이번에는 우수라니. 그러고 보니 여기 모여 앉은 넷은 작년 하반기에 승준이 바쁘게 뒷수습하고 다니고 윗선에서 깨지게 만든 장본인들인데 전부 우수 등급이었다.
‘뭐지? 이 남자 알 수가 없네.’
3팀 사람들은 숨죽여 팀장실의 동태를 살폈다. 한 5분쯤 되었을까 조용하던 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씩씩거리며 걸어 나오는 희경의 눈가가 벌겋게 익어 있었다. 팀원들이 숨죽이고 눈치를 보는 사이, 희경은 손에 든 종이를 아름의 옆에 있는 파쇄기에 밀어 넣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들 얼음처럼 굳어 서로 눈치만 보는 와중에 병훈이 벌떡 일어서더니 한참 돌아가던 파쇄기를 껐다.
“앗, 박 주임님 뭐 하시는 거예요?”
아름이 곤란하다는 듯 속삭여도 소용없었다. 병훈은 뚜껑을 열어 들고 파쇄기에 갈리다 만 평정서를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허⋯.”
입을 쩍 벌리고 놀라는 반응에 다들 사무실 입구 쪽을 흘깃거리며 병훈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불량]
[팀장 부재 시 팀장을 대신해 팀을 이끌어야 하는 상급자로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음.]
“헐⋯.”
“누가 가서 위로 좀 해 줘 봐.”
병훈이 초원과 아름에게 번갈아 눈짓을 했다.
“이런 일은 애교 많고 사근사근한 아름 씨가 제격이죠.”
초원은 아름의 등을 불여시 굴로 떠밀었다.
탕비실에서 홀로 커피를 뽑으며 간식을 챙기던 초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팀장이랑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네.’
최악의 등급을 받은 희경이 안 됐다 싶으면서도 그간 한 짓을 생각하면 솔직히 고소하기 그지없었다.
탕비실 문이 열리자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탕비실로 갈 때마다 따라오는 스토커가 또 나타났다.
“우리 귀염둥이 뭐 해요?”
“한번 먹고 싶은 건 끝까지 먹고야 마는 뚝심으로 간식 먹으려고요.”
평가를 비꼬며 삐진 티를 팍팍 내는 초원이 귀여워 피식 웃던 승준은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흠, 홍 주임. 회사에 티를 입고 오면 어떡합니까?”
“네?”
눈이 어떻게 됐냐는 듯 초원은 입고 있는 흰 블라우스 옷깃을 흔들었다.
“프리티.”
“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썩은 표정으로 간식과 머그잔을 챙겨 나가려는 초원을 승준은 급하게 붙잡았다.
“잠깐, 얼굴에 풀 묻었는데?”
“네?”
아침에 영수증을 붙이다 묻히기라도 한 걸까? 초원은 그 말에 뺨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뷰티풀.”
소름 돋는 아재 개그를 던져 놓고 저 혼자 뿌듯하게 웃으며 볼을 꼬집어 대는 남자를 초원은 변태 상사라도 보듯 싸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재미없나?”
“팀장님, 개그는 벌써 부장님 급이시네요.”
비꼬려고 한 말인데 승준은 재미있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다고 내가 기분 풀 것 같아요? 오늘 방바닥에서 자요.”
“그럼 허리 아픈데.”
“내 알 바예요?”
“내가 허리 못 쓰면 아쉬운 게 누군데.”
“아쉽긴요. 우리 서방님이 계신데.”
초원은 서랍 속 깊은 곳에 숨겨 뒀다 얼마 전 들켜 버린 핑크빛 기둥서방 이야기를 꺼내며 얄밉게 입꼬리를 올렸다.
“서방님 같은 소리 하네. 한 뼘도 안 되는 놈.”
“일곱 가지 색다른 재주가 있으시단 말이에요.”
“일곱, 아니 수백 가지면 뭐 하나? 부르르 떨기밖에 못 하는데.”
승준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오늘 밤에 누가 진짜 서방인지 보여 줘야겠네.”
언제든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는 것도 잊고 초원의 허리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엉덩이를 휙 빼며 가볍게 피한 그녀는 하지 말라는 듯 눈을 흘겼다.
“흥. 오늘 밤에 각오하세요, 조 팀장님. 끝나고 평가 있을 예정이니까.”
“굳이. 난 항상 평가자가 그만 됐다고 외칠 때까지 만족시켜 주는 탁월 등급인데.”
반박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초원은 입술만 비죽 내밀며 탕비실 문을 휙 열고 사라졌다.
온몸으로 막고 있던 절정의 물결이 그를 무너뜨리고 덮쳐오는 순간, 승준은 밭은 숨을 뱉어 내는 초원의 열에 달뜬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절정에 이를 때 눈을 맞추는 걸 좋아하는 그였다.
인간의 가장 사적이고도 나약한 순간, 서로의 영혼을 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된 걸 느낄 수 있었다.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고 두 사람은 땀에 미끈하게 젖은 몸을 부둥켜안았다.
“또 해 줘요.”
승준의 간절한 눈빛에 초원은 부끄러운 듯 볼을 붉혔다.
“한 지 1분도 안 됐잖아요.”
“난 초원 씨 얼굴 볼 때마다 하고 싶은데. 섭섭하네⋯.”
초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그의 입술을 살짝 머금다 눈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요란스러운 알람이 울리자 초원은 부루퉁한 얼굴로 마지못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힝, 일요일인데 진짜⋯. 우리 팀장님 짜증 나.”
그녀의 맨 어깨에 입술을 맞추던 승준이 피식 웃고, 초원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몸을 비틀며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반찬 뭐 해 줘요?”
초원의 자취방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는 알몸으로 욕실을 향해 걷는 여자에게 물었다.
“계란말이요.”
캔 참치에 마요네즈와 다진 양파를 넣고 섞자 고소한 냄새가 폴폴 풍기기 시작했다.
끓어오르는 된장국 냄비의 불을 낮춘 승준은 적당히 달궈진 팬에 계란 물을 얇게 부어 넣었다.
계란이 반쯤 익자 잘 섞어 둔 참치를 잔뜩 얹고 계란을 말기 시작했다. 계란 물을 조금 부어가며 말기를 반복하다 이제 한 번만 더 말면 되겠다 싶었을 때, 초원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침대로 다가가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승준은 아무렇지 않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차 주임. 무슨 일이죠?”
다시 가스레인지 앞에 선 그는 남은 계란 물을 팬에 붓고 된장국의 가스 불을 껐다.
“초원 씨 지금 씻는 중인데.”
승준은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더니 조심스레 계란말이를 뒤집었다.
“아, 차 주임도 차 실장님도 상심이 크겠네요. 어디 안 좋으셨습니까?”
안타까운 소식에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아⋯, 할머님 좋은 곳으로 가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빈소는? 정해지면 꼭 알려 주세요.”
가스 불을 끈 그는 계란말이를 들어 올려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헐, 그거 내 폰이잖아요. 받으면 어떡해요!”
전화를 끊는 순간 욕실에서 타월 차림으로 나오던 초원이 놀라 소리쳤다.
“차 주임인데?”
“아⋯, 왜요?”
초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평온을 되찾았다.
“차 주임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네. 그래서 오늘 일하러 못 갈 것 같다고.”
“어떡해. 마음 아프겠다.”
초원은 승준이 쥐고 있던 핸드폰을 뺏어 들더니 현우에게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옷이나 좀 입고 해요. 발가벗고⋯.”
“타월 안 보여요? 그리고 문자 치는 데 무슨 정장 차려입고 무릎 꿇고 해야 하나.”
승준은 더 말해 뭐하겠냐는 듯 한숨을 쉬며 아침상을 차렸다.
“오, 참치 마요 계란말이!”
대충 옷을 입고와 식탁 앞에 앉은 초원이 신난 듯 외쳤다.
“이건 아무리 봐도 사랑인데.”
“당연한 소릴⋯.”
승준은 피식 웃으며 국그릇을 식탁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근데 그럼 보살님한테는 나 혼자 가야 하나⋯. 박 주임님한테라도 전화해 볼까요?”
“그럴 거 있나? 초원 씨가 짜증 난다던 팀장님이 같이 가 준다는데.”
승준은 잘됐다는 듯 씨익 웃었다.
상가 건물로 들어서던 그는 두꺼운 패딩 아래로 허리춤에 찬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연구소에서 그 사건이 있은 후 혹시 몰라 지급받았는데, 또 이렇게 현장에 나올 일이 있는 걸 보니 역시 받아 두길 잘한 모양이었다.
계단을 올라 점집 이름이 궁서체로 쓰여 있는 문 옆의 초인종을 눌렀다. 옆에 선 초원은 4층까지 올라오느라 숨이 찼는지 헉헉대고 있었다.
“운동 좀 해야겠어, 응?”
“아침부터 운동이 과해서 이런 거거든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피식 웃는 순간, 철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고, 들어와요. 난 또 안 오는 줄 알았어.”
“저희가 좀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승준은 사과를 하며 초원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니, 근디 팀장님 아녀? 아이고, 팀장님까지 이 늙은 할매를 지키러 이렇게 와 주시고⋯.”
말단 요원이 아닌 팀장이 이곳까지 행차하게 된 진상을 모르는 명옥 보살은 감동한 듯 승준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내가 진짜 고마워서 워쪄⋯.”
“아, 아닙니다.”
연신 고마움을 표하는 명옥에게 붙들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승준의 모습에 초원은 볼을 부풀리며 웃음을 참았다.
“여 보일러 따듯하게 틀어 놨으니께 이불 깔고⋯.”
명옥은 법당 옆의 작은 방으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방구석에 쌓아 둔 두꺼운 요를 들어 올리려 하자 승준이 냉큼 다가와 요를 받아 들었다.
“아니, 거기 말고. 여기가 따셔. 응, 그려. 거따가.”
아무리 무서운 팀장이라도 70대 할머니의 눈에는 새파란 애였다. 초원은 명옥 보살이 시키는 대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있는 승준을 재미있다는 듯 구경했다.
“아이구, 근데 심심해서 어쩐댜.”
“아, 괜찮습⋯.”
승준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명옥은 홀로 중얼거리며 밖으로 훌쩍 나가 버렸다. 그 쩔쩔매는 모습이 웃겼던 초원은 방구석에 서서 키득키득 웃었다.
“입이라도 덜 심심해야지.”
명옥이 들고 들어온 쟁반에는 사과와 배 두 개, 과일칼과 오렌지 주스 병이 담겨 있었다. 그걸 승준이 받아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이고, 손님 왔네. 졸지들 말고 내가 소리 지르면 퍼뜩 나와야 혀.”
“얼굴 기억하지 않으세요? 범인 문 열고 들어올 때 미리 말씀해 주시지.”
초원의 말에 명옥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꿈이라 가물가물혀. 그래도 보믄 알긋제.”
명옥이 틈을 조금 남긴 채로 문을 닫고 나가자 두 사람은 겉옷을 벗고 이불 위에 앉았다.
처음에는 남의 영업장 뒷방에 들어앉아 있는 게 어색해 우두커니 앉아 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던 게 점점 몸이 늘어지더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지금은 제집인 양 한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운 자세였다. 눈앞의 쟁반 위에는 깎아 먹고 남은 과일의 잔해가 뒹굴고 있었다.
“⋯바람기가 많은 놈이여. 이놈은 안 디야.”
“정말요? 근데⋯.”
“비싼 돈 내고 점쟁이 말 안 새겨들을라믄 뭣을 할라고 여게 온 거시여?”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대화를 엿듣던 승준이 피식 웃었다. 초원은 관심이 없는지 방구석에 있던 쌀과자를 가져와 와작와작 씹으며 핸드폰으로 소설을 읽고 있었다.
“누가 남주예요?”
“네? 이거 보고 있었어요?”
공주며 기사 따위가 나오는 서양풍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던 초원은 어쩐지 부끄러워져 핸드폰 화면을 가렸다.
“그냥 뭔가 싶어서.”
“당연히 공작이 남주죠.”
“왜 공작이 공주한테 반말해요? 혈육도 아니고⋯.”
유치하다 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승준은 소설을 다큐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중세 유럽에 바닐라랑 초콜릿이 있어? 이거 완전 엉망이네⋯.”
“아, 이거 판타지잖아요. 무슨 역사 소설도 아니고 고증을 따지고 있어요?”
한창 재밌게 보던 소설에 승준이 딴지를 걸며 초를 치자 짜증이 난 초원은 몸부림을 쳤지만 그는 오히려 허리를 휘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나저나 생각할 시간이 대체 얼마나 필요한 거예요?”
“흐음⋯.”
“생각은 하고 있는 거 맞아요? 은근슬쩍 시간 끌다 넘어갈 생각 마요.”
“너무 이르잖아요. 몇 달 됐다고⋯.”
“안 지가 몇 년인데.”
“그 몇 년 동안 내가 본 조승준 팀장님은 맨날 버럭하거나 쌀쌀맞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요?”
“허,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게요?”
“초원 씨가 원하는 건 다 해 줬지. 응? 기분 안 좋을 땐 감성돔도 사 주고.”
“헐, 그때도 나한테 마음 있었어요?”
“하, 진짜 몰랐나 보네. 내가 그렇게 비싼 밥까지 사 주면서 어필을 했는데 딴 놈이랑 홀랑 소개팅이나 하고⋯.”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을까? 그걸 깨닫고 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초원은 몸을 돌려 승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웃었다.
“후⋯, 진짜 그때 술 엄청 마시고 다녔는데⋯.”
“저녁때 됐는디 시장들 안⋯. 아이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던 명옥은 젊은 남녀가 한 이불 속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 문을 닫아 버렸다.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여?”
“네?”
저녁을 시켜 먹고 승준이 빈 그릇을 밖에 내놓으러 간 사이, 명옥은 아까부터 묻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던 질문을 내뱉었다.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표현이 매우 거슬렸지만, 원래 말이 센 사람인 것 같아 초원은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아이구, 멀쩡한 아가씨가 시상에 사내들 천진디 유부남을 만나고 그랴. 그러다 천벌 받어.”
이제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표현이 이해가 된 초원의 입가로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갔다.
“네? 팀장님 총각인데요.”
“그려? 암만 해도 처자가 있는 기운이라 난 또 조강지처 놔두고 젊은 여자랑 바람피우는 줄 알았네.”
처자가 있는 기운은 대체 무슨 기운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승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팀장님, 여 앉아 봐요.”
승준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초원의 옆에 앉고 명옥은 상 위에 놓여 있던 공책과 펜을 집어 들었다.
“저녁도 잘 얻어먹었으니께⋯.”
“아, 아닙니다.”
어차피 저녁은 경비로 처리할 생각이라 승준이 산 것도 아니었다.
“내가 두 사람 궁합 간단히 봐줄 겨. 생년월일이 으찌 되는고?”
종이에 알 수 없는 한자를 갈겨쓰며 홀로 중얼거리던 명옥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아가씨는 칼 드는 직업을 해야 허는디.”
승준은 그것 보라는 듯 웃으며 초원에게 눈짓을 했다.
“물이 많은 사주라 걱정이 많구나. 안전한 돌다리도 두들기고 또 두들기다 건너질 못 허네.”
명옥은 타령이라도 하듯 몸을 흔들며 초원의 사주 풀이를 읊었다.
“이래 가지고 연애도 결혼도 고집스럽게 잘 안 하는 성격이여.”
“진짜 용하시네요.”
이런 거 잘 안 믿을 것처럼 생긴 남자가 진심으로 감탄을 내뱉자 초원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배받는 거 음청시리 싫어하는 성격이라 팀장님처럼 지배하는 거 좋아하는 남자랑 잘 안 맞는디?”
“들었죠? 적당히 해요.”
초원은 잘 새겨들으란 듯 승준의 팔뚝을 콕콕 찔렀다.
“둘 다 손 좀 펴 봐요.”
둘 다 군말 없이 손바닥을 내밀고 명옥은 안경을 들어 올리더니 손금을 유심히 읽기 시작했다.
“둘 다 결혼 두 번 할 팔자네.”
설마설마했는데 이 아주머니 아까부터 기분 나쁜 소리뿐이었다. 기분이 상한 초원의 입꼬리가 처지기 시작했다.
“같은 사람이랑요?”
생각도 못 한 승준의 기발하고도 해맑은 대답에 초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고거는 나야 모르제.”
승준은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초원을 향해 싱글벙글 웃었다.
“둘 다 자식 복은 있어. 쉽게 생기는 사주여.”
‘용하긴 개뿔⋯.’
초원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올해가 또 둘 다 자식 복이 강하네. 올해 가져.”
승준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 시작하고, 난처해진 초원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게, 저희 엄마도 무속인이신데 저는 자식 자리에 공망이 있어서 자식연이 약하다던데요.”
“고거는 젊을 때나 고렇고 평생 연이 약한 사주는 아녀. 요런 건 많이 빌고 남한테 베풀면 다 풀리게 되어 있어.”
빌고 베풀라니 곧 부적 사고 굿하라는 말이 술술 흘러나오겠구나 싶어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보니께 둘이 결혼하믄 성격이 강해서 티격태격하믄서도 두 사람 다 의리가 있어서 잘 살겄네. 아구구, 점은 여기까지여.”
더는 묻지 말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는 명옥을 따라 승준도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아유, 내가 감사허지. 쉬어야 허는디 여기꺼정 와서. 고마우니께 복채는 따로 안 받을 겨.”
“아닙니다. 꼭 받으셔야죠.”
승준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빳빳한 지폐를 명옥의 손에 쥐여 주었다. 실랑이를 하다 마지못한 척 명옥이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그걸 보던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만 나쁜 엉터리 점괘가 뭐가 그리 좋은 건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남자가 안타까웠다.
후끈후끈한 방바닥과 두꺼운 이불, 그리고 딱 적당한 포만감은 치명적인 조합이었다. 저도 모르게 어느새 쿨쿨 자고 있던 초원은 찰칵 소리가 거슬려 손을 내저었다.
“흐음, 사진 찍지 마요.”
“밥 먹고 자다가 소 되기 전에 찍어 놔야지.”
“연구소에 해독제 있잖아요.”
끼익 소리에 초원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 꼭 닫는 명옥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왔어. 저놈이여.”
명옥의 속삭임에 승준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방바닥에 놓아둔 홀스터에서 권총을 빼 들었다.
“가셔서 자연스럽게 행동하세요. 제가 문틈으로 보고 있다가 여차하면 뛰어나갈 테니 안심하시고요.”
잠시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하던 명옥이 밖으로 나가고, 문 옆에 서서 좁은 틈으로 법당 안을 살피는 승준을 초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112를 눌렀다.
“승준 씨 참 대단한 남자야.”
서류 뭉치를 아름에게 넘겨주던 승준은 코를 찌르는 지독한 장미 향에 미간을 찡그렸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요즘 예능이며 광고며 안 나오는 데가 없는 그 색기 어린 얼굴을 승준을 향해 들이밀었다.
“얼마 전에 연쇄 강도 살인범 잡은 시민 조 모 씨가 승준 씨 맞지? 응? 그렇잖아?”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나 몰라? 구미혼 거? 마음만 먹으면 천 리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도 알 수 있는 거?”
사탕이라도 먹는지 구미호의 입속에서 달그락달그락 무언가를 굴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그치만 우리 그렇게 먼 사이 아니잖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튀어나오더니 이미 번들번들 젖은 입술을 야릇하게 훑었다. 하얀 이 사이로 여우 구슬이 반짝이자 승준은 기분 나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비취 님, 등록증 갱신하러 오셨습니까?”
“아잉, 루비라니까? 나 이름 바꾼 지가 언젠데. 나 TV에서 못 봤어?”
눈앞에서 구미호가 상사에게 교태를 떨자 보기 민망했던 아름은 승준이 넘겨준 서류 더미를 들고 일어나 밖으로 사라졌다.
“담당자 누구죠?”
승준이 묻자 일은 안 하고 줄곧 구미호의 뒤태만 뚫어져라 훑어보고 있던 병훈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대답했다.
“차 주임인데⋯.”
다시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 주임 지금 상 중이라 없잖아요.”
“그래서 홍 주임이 대신⋯.”
병훈이 또 말을 하다 말고 구미호에 홀리자 승준은 긴 한숨을 쉬었다.
“자기야, 오늘 퇴근하고 시간 돼?”
“아뇨. 그리고 제가 왜 비취 님 자깁니까?”
아름의 책상에서 자신에게 온 우편물을 찾아 챙기던 승준에게 구미호가 자꾸 몸을 밀착시켜오고, 그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한 걸음 비켜섰다.
“아잉, 승준 씨 그러지 말고오⋯.”
등록증을 만들어 사무실로 들어오던 초원은 이를 악물었다.
‘뭐? 승준 씨? 내 허락 없이 누구 맘대로 불러대는 거야?!’
저렇게 간드러지는 콧소리를 내며 저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 초원 하나뿐이었다.
“아, 홍 주임 왔네. 빨리 등록증 드리세요.”
구미호를 피하다 피하다 코너에 몰린 채로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던 승준은 초원을 보는 순간 구세주라도 만난 듯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초원은 늙은 여우 앞으로 다가가 등록증을 내밀었다.
“빗취 씨, 등록증 여깄으니 이제 가 보셔도 됩니다.”
일부러 구미호가 그렇게 싫어하는 본명을 일부러 이를 악물어 세게 발음했다. 분명 이름을 불렸는데 상스러운 욕을 들어먹은 기분이었던 구미호는 말하는 벌레라도 보듯 초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등록증을 휙 낚아챘다.
두 여자가 눈싸움을 하는 사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빠져나가려던 승준의 팔뚝을 구미호가 확 붙잡았다.
“지금 10년째야. 승준 씨 나랑 언제 술 마셔 줄 거야?”
“저 여자 친구 있습니다.”
승준은 먼지 털듯 구미호의 손을 털어냈다.
“그래도 구미호만 한가?”
모르는 일이 없는 구미호다웠다. 이 요망한 여우는 그 여자 친구가 누군지 이미 다 안다는 듯 초원에게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구미호 못지않은 불여시라서요.”
승준은 뒤도 안 돌아보고 팀장실을 향해 걸으며 외쳤다.
“간 필요하시면 박 주임 간이 부어서 크고 좋습니다.”
쾅, 팀장실 문이 닫히더니 철컥하고 잠겼다.
“아, 저는 알코올 중독이라 지방간이 심해서⋯.”
시종일관 구미호에 홀려 눈을 못 떼던 병훈이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듯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야, 너 나 좀 봐.”
화장실로 가려고 복도를 걷던 초원의 등으로 앙칼진 목소리가 꽂혔다.
“네? 무슨 일이시죠?”
“야, 너 아까 나 뭐라고 불렀어?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년이⋯.”
구미호는 당장이라도 초원을 잡아먹을 듯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었다.
“참 나, 그 나이 먹도록 승천은커녕 인간도 못 된 게 자랑이라고.”
초원은 아까의 그 가소롭다는 미소를 되돌려 주며 등을 돌렸다. 한 걸음 내딛자마자 어깨를 구미호가 휙 잡아채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야, 내가 모르는 줄 알아?”
“격리부대 부르기 전에 이거 놓으시죠.”
“내가 너 비밀 여기서 다 불어 버린다?”
“하얀 방 좋아하세요? 전망은 별론데, 창문이 없어서.”
협박엔 협박이라며 초원은 구미호에게 지하 격리실에 가두겠다고 위협했다.
“하핫, 너 지금 내가 너 남자 관계 얘기하는 줄 알지? 쟤 아직 모르잖아, 그치?”
초원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며 구미호의 손을 어깨로 쳐냈다.
“근데 어째? 쟤는 지금 애 아빠가 너무너무너무 되고 싶은데⋯. 힝, 참 안 됐다아.”
초원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구미호는 물론이고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에게 자존심 상하게 애처럼 우는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어 계속 눈을 깜빡여 눈물을 삼켰다.
“이런 건 인간적으로 사귀기 전에 얘기했어야 하는 거 아냐? 승준이 불쌍하게스리.”
초원은 교활한 구미호의 말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맞는 말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아, 알아. 얘기하기 참 힘들어, 응? 그럼 내가 대신 해 줄까?”
다리가 후들거렸다. 초원은 이를 꼭 악물곤 몸을 휙 뒤로 돌리더니 쪼그려 앉으며 복도 저 끝을 향해 두 손을 벌렸다.
“어, 멍멍이다! 우쭈쭈, 이리 와!”
“꺄악!”
구미호가 혼비백산해 반대편으로 뛰쳐나갔다. 여기 올 때마다 격리부대의 군견이 무섭다며 쫑알대는 걸 기억해 둔 보람이 있었다.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초원은 팀장실 문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밖으로 나온 승준은 그녀를 힐끔 보더니 손에 머그잔을 든 채로 복도로 나가 버렸다.
‘헐, 이럴 때가 아니지!’
한 번 등록증 갱신하러 올 때마다 종일 사무실을 쏘다니며 남직원들을 홀리고 다니는 구미호였다. 그러고 다니다 승준과 마주치면 저 악랄한 여우는 초원의 비밀을 홀랑 말해 버릴 게 분명했다.
초원은 머그잔에 남은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따라나섰다.
차 티백 포장을 벗기던 승준은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직원을 보고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탕비실에는 다른 직원도 있었다. 초원은 커피 머신 차례를 기다리는 척하며 괜히 간식 코너를 기웃거렸다.
티백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머그잔에 넣은 승준이 곧바로 탕비실 밖으로 나가 버리고 초원도 빈 머그잔을 들고 따라나섰다.
“홍 주임, 잠깐 나 좀 보죠.”
사무실 앞까지 온 승준이 갑자기 휙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잔뜩 깔며 팀장실을 가리켰다.
“이과의 본성 좀 발휘해 봐요.”
“네?”
무릎 위에 앉히길래 여느 때와 같은 두근두근 연애질 타임인 줄 알았더니 진짜 일을 시킬 생각이었나 보다.
“또 물체1팀 정 팀장, 병이 도져서.”
“아⋯.”
특이물체관리1팀의 정 팀장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접수 건을 다른 팀에 떠맡기려 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승준은 오늘도 그런 이메일을 정 팀장에게서 막 받은 차였다.
“이거 좀 봐요. 스마트폰 바이러스인데 바이러스라고 생물팀보고 맡으라네.”
“네? 아, 문과가 또⋯.”
“문과 망신이야, 정말.”
“근데 뭐 하는 바이러스길래 특관청에서 맡아요?”
정 팀장의 이메일을 읽던 초원이 현상 이름을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흑역사 제조기, 하하.”
하지만 사례를 읽어 내려갈수록 초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새벽 2시에 전 남친에게 ‘자니?’, ‘보고 싶어.’ 같은 문자 보내기. 전 남친의 현 여친 SNS에 좋아요 누르기. 새벽 감성 넘치거나 술 냄새 나는 글을 SNS에 올리기 등, 읽을수록 등골이 서늘해지는 사례뿐이었다.
“다 읽었죠?”
승준이 수화기를 들더니 정 팀장의 번호를 눌렀다.
“정 팀장님, 접니다. 네, 메일 보내 주신 거 잘 봤습니다. 그런데 이거 우리 쪽에 보내실 게 아닌데요.”
수화기 너머로 빠르게 웅얼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승준은 초원을 향해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 만하다 싶었던 초원은 웃으며 그의 뺨을 달래듯 쓰다듬었다.
“하하, 근데 그게 그 바이러스가 아니잖습니까? 우리 팀 홍 주임이 전문가니까 얘길 들어 보시죠.”
승준이 통화를 스피커폰 모드로 돌리고,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껏 해 봐야 임상 경험 없는 일반의일 뿐인데 전문가라는 말은 지나치지 않나.
“어, 안녕하세요, 정 팀장님.”
[예, 홍 주임.]
“그게 컴퓨터 바이러스가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건 생물학에서 말하는 바이러스에서 이름을 따 온 것뿐입니다. 감기 바이러스가 인체에 감염을 일으키듯이 코드가 컴퓨터를 감염시키니까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거죠.”
[그럼 살아 있는 생물처럼 막 여기저기 옮겨 가며 감염을 시킨다는 거 아닙니까? 그럼 생물팀에서 맡는 게 맞지 않나?]
이젠 승준뿐이 아니라 초원도 ‘이 양반 진짜 말 안 통한다.’라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애초에 생물학에서 말하는 바이러스도 생물이 아닌데요.”
[응?]
“바이러스는 그냥 분자의 조합일 뿐이고 세포도 없고 자가생식도 못 하고 에너지도 못 만들어내기 때문에 생물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리고 컴퓨터 바이러스는 그냥 코드와 연산으로 이뤄진 컴퓨터 프로그램인데 그걸 생물 취급하진 않습니다만.”
“정 팀장님, 비슷한 사례도 있지 않습니까?”
과학적 근거에 따른 반박은 이쯤 하면 충분하다 싶었던 승준이 끼어들었다. 기존에 접수된 건을 사례로 들려 했던 그는 머뭇거리며 초원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 소설 빙의 바이러스는 현상팀에서 맡았었고 맞춤 성인 동영상 USB 메모리는 정 팀장님 쪽에서 맡으신 거 아닙니까?”
초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걸 보니 묻고 싶은 게 있는 얼굴이었다. 승준은 모르는 척 눈을 피했다.
[⋯쩝, 그럼 현상1팀에 연락해 봐야겠네. 하여간에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승준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는 무슨 감사⋯.”
“뭐예요?”
“응?”
승준은 의문을 잔뜩 품은 눈빛 앞에서 태연하려 애썼다. 직원도 기억 억제 기록이 남느냐고 초원이 물은 그날부터 혹시 억제가 풀려 가는 건 아닌가, 무언가 기억해 낸 건 아닌가 초조하던 차였다. 그런데 괜히 트리거가 될 법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맞춤 성인 동영상?”
승준은 참았던 숨을 웃음을 가장해 터트렸다. 그쪽이었다니 천만다행이었다.
“구해서 볼 생각 마요. 그걸로 직원 여럿 폐인 됐으니까.”
무슨 소리냐며 눈살을 찌푸리는 초원을 끌어안고 승준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우리 홍 주임 너무 멋있어. 남자들이 자꾸 반할까 봐 걱정이네?”
초원은 승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로 가볍게 웃기만 했다.
“근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지?”
그 말에 초원은 울컥했다. 티 안 내려고 일부러 웃고 있었는데 이 남자의 눈에는 다 보이는 모양이었다.
‘진짜 이 남자 너무 따뜻해.’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왜 울어요? 아까 구미호 때문에 그래요?”
눈가로 배어 나오는 물기를 손으로 닦아 주는 승준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었다.
“아니에요.”
성질 같아서는 이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승준이 구미호에게 한마디라도 하러 간다면 큰일이었다. 그 영악한 여우는 신이 나서 비밀을 나불댈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아니긴⋯. 그 망할 할망구가 또 무슨 사악한 소릴 했길래?”
남자들이라면 홀려 정신을 못 차리는 본업 구미호, 현업 아이돌을 승준이 할망구라고 부르자 초원은 속이 시원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가서 따지면 안 돼요.”
“알았으니까 말해 봐요.”
초원은 코를 훌쩍이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보고 새파랗게 어린년이라고 부르면서 어깨 막 이렇게 세게 비틀어 잡고 우리 비밀 여기서 다 털어놓는다고 협박했어요.”
마지막은 ‘우리 비밀’이 아니라 ‘내 비밀’이었지만 초원은 그 정도의 ‘단어 선정’은 스스로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다.
초원의 3단 고자질을 듣는 승준의 얼굴이 3단으로 굳어져 갔다.
“어디? 여기?”
승준이 오른쪽 어깨를 가리키자 초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 하지 마요.”
말려도 소용없었다. 승준은 블라우스 단추를 몇 개 풀더니 옷자락을 어깨 아래로 끌어 내렸다.
“자국은 안 남았네.”
초원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사무실 쪽을 살피며 드러난 속살을 손으로 가리는 동안, 승준은 어깨를 어루만지다 보드라운 피부에 다정하게 입술을 맞췄다.
“근데 가서 따지고 그러지 마요.”
“걱정 마요. 대신에 다음엔 1점만 받아도 바로 격리소 가게 벌점 채워 둘게요.”
그렇다는 건 최소 90일 격리였다. 초원은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옷깃을 어깨 위로 올렸다.
“아, 오늘 삼신할머니 오신다고 그랬는데.”
비밀을 아는 또 다른 존재가 온다는 소리에 흠칫 놀란 초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고, 승준이 대신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구미호가 꼼짝을 못 하거든. 내가 할머니 오시면 혼쭐을 내 달라고 할게요.”
‘아, 좀 얌전히 팀장실에 붙어 있을 것이지.’
초원은 어깨 뒤를 힐끔거리며 투덜댔다.
남자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던 승준은 문 근처 복사기 앞에 서 있는 초원을 보고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3팀 사무실 바로 옆에 복사기가 있는데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홍 주임,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종일 팀장 스토킹이네?”
“복사기 고장 나서⋯.”
“고장은 무슨, 아까 아름 씨가 잘 쓰고 있던데.”
그때 저 멀리서 들리는 교태 넘치는 웃음소리에 초원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렇게 불안하면 날 얼른 품절시켜 주든가.”
“쳇, 그런다고 구미호가 안 꼬여요?”
“하, 진짜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우리 이모가 그러는데 사계절은 만나 보고 결정하는 거래요.”
복도를 지나가는 직원에게 아무렇지 않게 눈인사를 한 승준은 직원이 지나가자마자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하, 내년까지 기다리면 애는 언제 가지려고? 그 보살님 말 기억 안 나요? 올해 가지랬는데?”
초원은 대꾸도 하지 않고 갓 찍어 낸 따끈따끈한 이면지를 트레이에서 꺼내 들었다.
“돌다리 안전한데 왜 자꾸 두드리고 있어?”
여전히 대꾸 없이 초원은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꾸 그러면 나도 방법이 있어요.”
이번엔 제법 목소리가 컸지만 그녀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모퉁이를 지나 사라졌다.
삼삼오오 복도를 지나가며 잡담을 하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3팀 사무실까지 새어 들어오자 초원은 고개를 들어 사무실 입구를 기웃거렸다.
같은 회의에 들어간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나왔는데 승준만 아직 무소식이었다. 그 불여우는 아직도 사무실 안을 쏘다니고 있으니 방심할 수 없었다. 초원은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해 주실 수 있는지⋯.”
회의실로 이어지는 모퉁이를 돌려는 차에 익숙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혹시 그 여우 년이랑?’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본 초원은 안도했다.
‘아, 삼신할매잖아. 헐, 잠깐!’
안도할 때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말하면 안 되는데⋯.’
초원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모퉁이 뒤에 숨어 승준과 삼신할매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마, 그기야 내가 못 들어줄 것도 읍제. 이랬으믄 좋겠다 카고 바라는 기라도 있나?”
‘아, 구미호 혼낸다더니 그 얘긴가?’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건강하고 저희 곁 안 떠나기만 하면⋯.”
“그래, 그기 중요한 기라. 참말로 잘 생각했데이. 내가 우리 팀장님은 특별히 신경 써 주꾸마.”
“감사합니다.”
잠자코 듣던 초원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어? 너 여기서 뭐 해?”
초원은 앙칼진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구미호가 코앞에서 깔보듯 입속의 구슬을 굴리고 있었다.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쏙 내밀던 구미호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잘 봐.”
사고가 멈춰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초원의 귓가에 여우가 속삭였다.
“어머, 자기야! 여깄었구나?”
모퉁이를 돌아 폴짝폴짝 뛰어가던 구미호는 승준의 앞에 서 있던 노인이 뒤돌아보자 교태 넘치게 뛰던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옴마나⋯.”
순간, 초원의 눈앞으로 무언가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지나가더니 복도 저 끝으로 사라졌다.
“야야, 여시야 일로 온나. 니 내랑 이바구 좀 하자.”
삼신할매가 구미호를 쫓아 가 버리고,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승준은 복도에 기대어 서 있는 초원을 발견하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꾸욱 눌러 내렸다.
“홍 주임, 또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자꾸 이러면 신고할 겁니다, 혼인신고.”
머릿속이 시끄러웠던 초원은 눈만 살짝 흘기고 사무실을 향해 멍하니 발을 옮겼다.
‘할머니는 왜 점지 못 한다는 말 안 하신 거지? 나한텐 능력 밖이라고 하셨잖아. 나 말하는 줄 몰랐나? 아님 알면서도 예의상 모른 척해 준 건가?’
***
띠링, 누군가의 핸드폰이 짧게 울리고 단잠에서 깬 초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웅크렸다.
‘발 시려⋯.’
어젯밤 자취방 침대에 누워 TV를 보다 저도 모르게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양말을 신고 자는 걸 깜빡했다.
그래도 이번 겨울은 난로를 장만해 둬서 다행이었다. 초원은 발을 슬며시 ‘난로’의 다리 사이로 끼워 넣었다. 수족냉증이 심해 다 껴입고 자는 초원과는 달리, 열이 많아 팬티 한 장만 입고 자는 승준은 딴 계절을 사는 사람 같았다. 얼음장 같은 발이 닿자 잠이 깨어 버렸는지 승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양말은⋯?”
“까먹어서⋯.”
승준은 손을 뻗어 차가운 발을 문지르며 서랍으로는 다른 손을 뻗었다. 그 따스한 온기에 초원은 기분이 좋아져 단단한 품으로 파고들었다.
한참 서랍 속을 더듬던 그는 빨간 수면 양말을 찾아 손수 신겨 주었다. 338개월짜리 아기가 된 기분이 이럴까? 초원은 그 다정한 손길을 만끽하며 넓은 가슴에 팔을 휘감았다.
서랍을 닫으려던 승준의 손이 멈칫하더니 다시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온 손에는 네이비색 남자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또 근거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히려나 싶어 초원은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거 누구 건지 나도 몰라요.”
승준은 잠시 초원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손에 쥔 손수건을 응시했다. 질투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할 수 없는, 먹구름이 짙게 낀 얼굴이었다.
“그, 연구소 가스 누출 사고 때 집에 왔더니 주머니에 있었어요.”
“나는 누구 건지 아는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깊이 잠겨 있었다. 초원의 의아한 눈빛에 승준의 서글픈 눈빛이 겹쳐졌다.
“⋯내 거거든.”
어쩌다 그의 손수건이 축축이 젖은 채로 자신의 주머니에서 발견됐는지 물으려던 초원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의 서글픈 눈빛에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초원 씨⋯.”
“네?”
“우리, 아기 만들까?”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안 될 거예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초원의 몸 위로 승준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올라왔다.
“그냥 해서 생기면 낳는 거예요. 알았죠?”
초원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의 손수건이 왜 자신에게 있었는지, 승준은 왜 손수건을 보고 이렇게 슬퍼하는 건지, 그리고 왜 저걸 보고 갑자기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하지만 지금껏 본 적 없는 짙은 슬픔에 젖은 눈빛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사랑해.”
초원의 이마에 뜨거운 입술이 와 닿고, 승준의 코끝이 초원의 콧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내려갔다.
“응?”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에 초원은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게 첫 마디를 뱉어 냈다.
“아기가 안 생기면⋯.”
그 쓰디쓴 말에 입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안 생겨도, 그래도 나 사랑할 거예요?”
초원은 눈을 깜빡이며 차오르려는 눈물을 꾸역꾸역 뒤로 삼켰다. 승준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당연하지. 초원 씨 사랑하니까 아이를 갖고 싶은 거지, 아이가 갖고 싶어서 초원 씨 사랑하는 거 아니잖아.”
애써 억누르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가리려 올라오던 초원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뺨을 감싸더니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왜 이렇게 날 못 믿지? 혹시 내가 불안하게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할 것이 없는 지금이었다. 초원이 자꾸만 그의 사랑을 의심하고 무너지길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두드려 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시절 그림자처럼 두 사람을 따라다니던 불안이 습관이 되어 잠재의식 속에 새겨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내가⋯ 흑.”
서러움과 미안함, 고마움이 한데 뒤섞인 흐느낌이 터져 나오며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초원을 끌어안고 아이를 어르듯 토닥이던 승준은 눈을 감았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얼굴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우리 애들도 사랑하지만⋯.’
“난 언제나 초원 씨가 제일 중요해. 내 인생의 파트너잖아. 초원 씨한테는 안 그래요?”
묻자마자 초원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 울먹이는 얼굴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던 승준은 흐뭇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녀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췄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초원 씨 안 떠나니까 걱정 마요.”
모든 걸 까맣게 잊고 살던 때에도 그의 마음이 초원을 떠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모든 걸 기억하는 지금, 모든 걸 잊은 여자의 마음을 되찾아 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던 그가 초원을 떠날 리가.
들썩이던 몸이 다정한 토닥임에 점점 잠잠해지고 있었다. 승준은 연약한 아이처럼 품에 안겨 훌쩍이는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나 사랑해요, 안 해요?”
“사랑해요.”
촉촉이 젖은 얼굴 위로 화사한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승준은 더는 참지 못하고 붉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집어삼켰다.
초원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지만 이번에는 울음 탓이 아니었다. 옅은 흐느낌이 떠난 자리를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채우기 시작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뜨거운 혀가 밀고 들어왔다. 입술 안쪽을 애태우듯 간질이던 혀는 입 안 깊숙이 침범하더니 제 짝을 찾아 헤맸다. 혀끝이 닿을 때마다 놀리듯 이리저리 피하던 초원도 어느 순간 그 보드라운 감촉에 취해 혀를 끈적하게 섞고 있었다.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따뜻했다. 회사에서는 그렇게 거칠고 차가운 말만 쏟아 내는 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은 꿈에도 모르겠지.’
오직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이 남자의 온도 차였다.
초원이 승준의 목을 단단히 휘감고 그 황홀한 침범을 만끽하는 동안 그의 손가락은 초원의 잠옷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단추를 푼 손은 그대로 팬티 속으로 파고들더니 옷을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엉덩이부터 허벅지, 종아리까지 아래로 훑고 내려가는 뜨거운 손길에 맞춰 초원이 하체를 들어 올리고, 이내 잠옷 바지와 속옷은 부스럭 소리를 내며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든 승준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봉긋한 젖가슴을 아슬아슬하게 덮고 있는 셔츠도 그 아래 도톰한 꽃망울의 탐스러움은 가리지 못했다.
얇은 천 아래로 불거져 나온 꽃망울을 승준이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고 그 찌릿찌릿한 감각이 배 속을 타고 다리 사이까지 퍼지자 초원은 몸을 비틀며 다리를 꼬기 시작했다.
그걸 재밌다는 듯 내려다보는 그의 눈앞으로 초원은 손을 뻗었다.
“아, 하지 마요.”
“이제 와서 부끄럽다고?”
피식 웃은 승준은 옷깃을 어깨 너머로 활짝 젖히고 붉게 솟아오른 꽃망울을 단숨에 입속으로 삼켰다.
뜨겁고 촉촉한 혀가 젖꼭지를 휘감고 굴리자 모든 신경이 그 작은 돌기 하나로 쏠리며 초원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 남자의 뜨거운 손길, 그리고 그 능란한 혀 놀림과 허리 놀림 앞에서는 어떤 고민이든, 어떤 걱정이든 그 의미를 잃었다.
초원은 두 눈을 감았다. 가슴을 핥고 빨아대는 적나라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 남자가 자신의 걱정과 두려움을 모조리 빨아 삼켜 주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렸다.
불현듯 입술이 떨어지고 손이 갑자기 배에 와 닿자 그 손길의 뜨거움에 놀란 초원은 몸을 움찔했다.
승준은 그 납작한 배를 애틋한 손길로 연신 쓰다듬었다.
그 시절의 초원은 제 몸이 변해 가는 걸 싫어했었다. 부풀어 오른 배며 가슴이며 뚱뚱하고 미련해 보인다며.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건 본 적이 없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해도 초원은 임산부 기분 맞춰 주려 하는 소리라며 한 번도 믿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몸에서 두 사람의 새로운 아이가 자라게 될 것이다. 삼신할매의 약속대로 두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을, 아니 정확히 말해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을 아이였다.
이 가족은 꼭 지키겠다고 다짐한 그는 머지않아 부풀어 오를 배에 입을 맞췄다.
고개를 들자 애가 타 재촉하는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열기에 물들어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귀여웠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온몸이 달아올라 자신을 격렬하게 갈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승준은 그 무언의 애원을 무시하고 입술을 아랫배로 내렸다.
입술이 여린 살에 붉은 궤적을 남기며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초원의 숨결이 기대감에 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짓궂기 그지없게 승준은 도톰하게 솟아오른 둔덕을 훌쩍 건너뛰더니 다리를 벌려 매끈한 허벅지 안쪽을 지분대기 시작했다.
닿을 듯 말 듯 그의 뜨거운 숨결이 이슬을 머금은 꽃잎을 스치자 제발 이쪽도 봐 달라는 듯 아랫입이 뻐끔거렸지만, 그는 손길 한 번 스쳐 주지 않고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아, 흐응⋯.”
무릎 뒤를 촉촉한 혀가 파고들자 다리 사이로 파고든 것만큼이나 격렬한 반응이 초원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아찔한 자극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쉬움 가득한 눈길을 가볍게 떨치고 천천히 입술을 아래로 내리던 그는 기껏 신겨 놓은 양말을 벗겨 버리고 꼼지락거리는 작은 발가락 하나를 입속에 물었다.
“하아⋯.”
말캉한 혀가 여린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자 점점 초점을 잃고 흐릿해지는 초원의 눈에 물기가 어른거렸다. 그 발그레한 얼굴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던 승준은 발가락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핥다 웃었다.
“이걸로 되려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초원의 고개가 좌우로 도리질 쳤다.
“그럼 어딜 또 이렇게 빨아 주면 좋으려나⋯.”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말랑하고 촉촉한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초원은 손가락을 들어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승준은 피식 웃었다. 이럴 때는 대답이 참으로 빠른 여자였다.
붙잡고 있던 발에 다시 양말을 신기고 침대 위로 살포시 내려놓았다. 초원의 허벅지를 한껏 벌리고 붉게 달아오른 꽃잎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붉은 속살을 드러내는 게 부끄러운 건지 초원의 몸이 비틀리고 승준은 허벅지를 벌린 손에 힘을 주었다.
다리 사이의 계곡은 이미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지만 그가 어서 닿기를 갈구하는 초원의 얼굴에는 타는 듯한 갈증이 번져 있었다. 바짝 마른 그 작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승준은 고개를 내렸다.
촉촉이 젖은 여린 살을 혀로 살짝 젖혔을 뿐인데 벌써 엉덩이가 들썩였다. 승준은 손을 아래로 밀어 넣어 동그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꽃잎을 간지럽히다 입속으로 빨아당기자 초원의 입에서 한숨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입술 사이에 머금고 괴롭히던 꽃잎을 놓아준 승준은 계곡의 가장 깊은 곳부터 초입까지 혓바닥으로 길게 훑어 올렸다.
“흣⋯.”
바르르 떨리며 비틀리는 엉덩이를 그는 바짝 끌어당겼다. 느릿하지만 정확한 혀 놀림에 부풀어 오르는 이 살점의 단단함과 그의 커다란 두 손을 가득 채우는 살결의 보드라움, 그리고 이 여자만의 달큰한 젖은 내음과 야릇한 흐느낌. 승준은 이 감각의 포화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손을 떼고 싶지 않은 이 탐스러운 몸에서 가장 여리고도 뜨거운 곳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앗!”
초원의 상체가 물결치듯 들썩였다. 손가락이 들고 날 때마다 젖은 속살과 손가락이 스치는 그 노골적인 소리가 좁은 원룸을 가득 채웠다. 그 리듬에 맞춰 혓바닥이 부드럽게 살점을 굴리고, 밭은 숨을 내뱉는 초원의 눈가로 굵은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흣⋯.”
손가락을 아무리 깨물어도 적나라한 신음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초원은 이내 포기하고 몸을 바르르 떨며 침대 시트를 두 손으로 꼬옥 그러쥐었다. 아랫배를 집어삼킨 불꽃이 머릿속도 다 태워 버린 듯 새하얬다. 아득한 눈으로 천장 벽지 무늬를 따라가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몇 개 그리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힐 수밖에 없었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푹 젖은 몸이 이내 힘을 잃고 축 늘어졌지만 다리 사이를 헤집고 있는 남자는 멈추기는커녕 한계까지 밀어붙일 기세로 속도를 내고 있었다.
“아, 스, 승준 씨⋯.”
이러다 정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침대 시트를 놓은 초원은 다리 사이에서 떨어져 나갈 줄을 모르는 승준의 머리를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 그만⋯. 앗!”
번개라도 맞은 듯 손이 허공에서 멈추더니 상체가 호를 그리며 크게 휘어졌다. 결국 한계를 넘은 아랫배에서 뜨거운 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고, 승준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속살에 파묻혀 꼼지락대고 있었다. 멍하니 초점을 잃은 초원의 눈가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 그는 대단한 업적이라도 달성한 양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초원의 온몸이 구름 위로 날아올랐다. 절정의 강렬함에 압도되어 가쁜 숨만 겨우 토해 낼 뿐, 제대로 흐느끼지도 못하던 초원은 이내 이대로 땅 위로 곤두박질쳐 파스스 부서져 버릴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역시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안아달라는 듯 두 팔을 벌리는 그녀에게 승준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포갰다. 초원을 가뿐히 안아 올린 그는 시트가 젖지 않은 벽 쪽으로 몸을 옮겼다.
“하아, 시트는 승준 씨가 갈아요.”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 거였다. 그 말이 떠올려 준 뜨거웠던 추억에 승준은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초원을 아기라도 다루듯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속옷을 벗어 던진 그는 다시 그 탐스러운 몸 위로 몸을 겹쳤다.
“예뻐 죽겠네.”
초원의 입술 위로 속삭이던 그가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어 왔다. 두 입술이 포근하게 서로를 감싸고, 승준의 분신도 제 짝의 따뜻한 품을 찾아 파고들었다.
속살에 닿는 분신이 달궈진 쇠처럼 뜨거웠다.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초원의 엉덩이가 튀어 올랐다.
“괜찮아요?”
뜨거운 건 그뿐이 아니었다. 그 다정한 목소리와 눈빛에 온갖 상념이 눈 녹듯 녹아내려 사라질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이 남자와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아슬아슬 끄트머리만 파묻혀 있던 페니스가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잦아들었던 것도 잠시, 다시 가빠지기 시작한 초원의 숨소리는 이내 승준의 거친 숨소리에 묻혔다.
초원은 손을 뻗어 승준의 불덩이 같은 등을 어루만졌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근육이 그녀의 손 아래에서 불끈거렸다. 기분이 좋았다. 지금 이 순간, 이 남자의 모든 것이 그녀와 하나가 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어쩌면 이 남자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걸까?
“좋아요?”
“하⋯, 당연하지.”
초원을 내려다보는 두 눈에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아무런 장벽 없이 서로의 가장 예민한 살을 맞대고 있는데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실 그게 아니라도 좋았다. 그는 초원의 모든 게 좋았으니 말이다.
그 곰 같은 고집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우 같은 매력, 먹을 때 햄스터처럼 오물오물하는 작은 입매, 그리고 심지어 초원은 있는지도 모를 오른쪽 네 번째 발가락의 깨알 같은 점까지도.
하필 이 여자와 그날 그 시간 그 관찰실에서 단둘이 있었던 건 그의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다.
파트너건 부하건 규정에 어긋나는 사내 연애를 이해하지도 못했고 해 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그였다. 그러니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제 짝을 눈앞에 두고도 평생 못 찾았을 게 뻔했다.
그 일이 있기 전 승준에게 초원은 그저 성실하고 눈치 빠른 직원이었을 뿐. 미인이라며 남직원들이 눈독 들이는 게 거슬리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간만에 들어온 괜찮은 직원, 다 가르쳐 놨더니 결혼한다며 관둬 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걸 이제는 그가 직접 임신시켜 관두게 만들려 애쓰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흣⋯.”
속살이 파르르 떨며 그의 몸을 단단히 조여 오고, 초원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흰 목덜미가 그의 입술을 부르기 시작했다. 승준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그 매끄러운 살결과 향긋한 살 내음을 마음껏 탐닉했다.
“하아⋯, 사랑해.”
두 사람 모두에게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승준은 고개를 들고 초원의 두 눈을 내려다보았다. 자제력을 잃어 가는 그의 허리가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거칠게 부딪쳐 오고, 달싹거리던 초원의 입술 사이로 숨넘어가는 소리만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초원 씨, 사랑해.”
“아흑⋯.”
온몸이 물결에 휩쓸리듯 들썩이고 속살이 그를 쥐어짜듯 움켜쥐는 순간, 승준은 분신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보드랍고 동그란 입구에 머리가 닿는 순간 뜨거운 체액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늘 절정을 만난 후에도 물건이 힘을 잃을 때까지 속을 헤집던 그였지만 오늘만은 깊숙이 파묻은 채로 두었다. 여전히 예민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초원의 허리에 팔을 휘감고 살짝 들어 올린 그는 베개를 집어 허리 아래에 받쳤다.
“승준 씨⋯.”
“응?”
“나도 사랑해요.”
초원은 숨이 막혀 제때 할 수 없었던 말을 속삭였다. 입술이 또다시 얽혀 들다 떨어지고, 온몸을 어루만지던 승준의 애틋한 손길이 아랫배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홍 선생님, 정자는 한 번에 몇 마리나 나오죠?”
“음⋯, 한 5억 마리 되려나⋯. 잘 모르겠는데요.”
승준은 고개를 숙이며 씨익 웃더니 초원의 아랫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힘내, 5억 마리의 내 새끼들.”
초원의 입가로 터져 나오던 웃음은 이내 쓰게 변해 갔다. 제대로 털어놨어야 하는데 눈물이 터지는 바람에 그대로 휩쓸려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제 와서 말하자니 기대에 차 활짝 핀 저 얼굴에 실망감이 얼룩지는 모습을 볼 자신은 죽어도 없었다.
‘삼신할머니, 이 사람한테는 안 된단 소리 안 하신 할머니 잘못이에요.’
초원은 승준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제발 도와주세요.’
망가질 대로 망가져 깨어나지 못할 잠에 빠진 세포 하나가 불현듯 눈을 뜨고 먼 길을 내려와 이 남자의 세포와 만나 하나가 되길. 그렇게 빚어진 두 사람의 결실이 초원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아홉 달을 보내다 세상의 빛을 보고,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아름답게 자라나길.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초원은 애타게 빌었다.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같은 신에게 똑같은 소원을 비는 두 사람의 위로 주말 아침의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 포근함에 젖어 무거워지던 초원의 눈꺼풀이 요란스러운 벨 소리에 번쩍 뜨였다.
승준이 집어다 준 핸드폰을 받아 든 초원은 깜짝 놀랐다.
“헐, 벌써 11시예요?”
화면에 찍힌 이름을 본 초원은 망설였다. 지금 이 상태로 받기에는 몹쓸 짓이라도 한 듯 마음이 매우 불편해지는 전화였다.
“안 받아요?”
“아, 뭐 뻔한데요. 밸런타인데인데 데이트 안 하냐는 잔소리만 할 텐데.”
이내 전화가 끊어지고 그제야 화면에 나타난 메시지 알림을 본 초원의 눈이 두 배는 커졌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를 승준의 손이 막았다.
“안 돼. 아직 움직이지 마요.”
“지금 그럴 때 아니에요. 아, 진짜. 나 티슈 좀 줘요.”
“왜 그래요?”
초원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승준은 서랍 위의 티슈 갑에서 티슈를 뽑아 초원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희뿌연 액체를 닦아 냈다. 초원은 아무 대답 없이 핸드폰을 누르더니 귀에 가져다 대었다.
“어, 아빠. 지금 어디야? 뭐? 벌써? 아, 집이긴 한데, 안 갖다 줘도 되는데. 미리 말을 하지. 아니, 2시간 전에 문자 보낸 게 뭐가 미리 말한 거야.”
상황 파악이 된 승준의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가 스쳤다.
전화를 끊은 초원은 알몸으로 침대 앞에 서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 행거에 걸린 승준의 옷가지며 화장대 위의 애프터셰이브, 결정적으로 엉망이 된 침대 시트와 그 위에 알몸으로 떡하니 앉아 있는 남자까지,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치워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용산역에서 지금 막 내린 부모님이 자취방으로 들이닥치기까진 15분도 채 안 남았다.
“무슨 일인데?”
승준은 능청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양 물었다.
“아, 진짜. 엄마랑 아빠가 친구 만나러 가는 김에 반찬 갖다 주러 온대요.”
일단 씻고 옷부터 입어야 했다. 초원은 욕실로 향하며 외쳤다.
“얼른 집에 가요. 아, 가기 전에 시트는 갈아 주고 가요.”
1분도 채 안 돼 욕실 밖으로 나온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알몸인 승준은 한가롭게 세탁기 버튼이나 누르고 있었다. 시트를 갈았으니 가겠거니 싶어 별말 없이 옷을 입던 초원은 욕실 문 닫히는 소리에 놀라 쫓아갔다.
문을 휙 열어젖혔더니 승준은 무슨 드라마 샤워 신이라도 찍는 양 한가롭게 물줄기를 맞으며 샤워 중이었다.
“뭐 해요, 안 가고?”
“샤워는 해야지.”
“집에 가서 하면 되잖아요.”
“초원 씨 때문에 여기 다 젖었는데 이러고 어떻게 옷을 입어?”
‘여기’라고 하며 승준은 제 다리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게 어떻게 나 때문이에요?”
‘그렇게나 흥분시킨 사람 잘못이지.’라고 속으로 투덜댔다.
“그나저나 내 칫솔 어디 갔어요?”
욕실장을 연 그는 초원이 급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 둔 자신의 물건을 하나하나 찾아 꺼냈다.
“아, 진짜!”
입씨름할 시간이 없었던 초원이 짜증을 내며 문을 쾅 닫아 버리고 승준은 칫솔 위로 치약을 주욱 짜며 웃음을 터트렸다.
씻고 대충 말린 머리에 왁스까지 단정하게 바르고 나왔더니 초원은 원룸 곳곳에 있는 그의 물건을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게 귀엽기 그지없었다. 피식 웃은 승준은 옷장을 열고 적당한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빨리 옷 입고 가요.”
이제 겨우 바지만 입었는데 초원은 벽에 걸려 있던 패딩을 가져와 안겨 주며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양말의 보풀을 떼어 가며 한 짝씩 신고 있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간다니까. 맨발로 갈 순 없잖아.”
그 말에 초원이 투덜대며 욕실로 들어가고, 이내 짜증 섞인 외침이 좁은 욕실 벽을 울렸다.
“왜 다 꺼냈어요?”
셔츠 단추를 채우는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승준의 물건을 다시 숨기고 나온 초원은 한숨을 내뱉었다. 간다던 사람이 옷을 다 입고도 거울 앞에 서서 태연하게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아, 제발 좀 가요. 들키면 안 된단 말이에요.”
발을 동동 구르며 애원했지만 승준은 거울 옆의 서랍만 뒤지고 있었다.
“어, 근데 내 차 키가 안 보이는데?”
그 말에 평소에 차 키를 올려두는 신발장으로 가 봤지만 키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 몰라. 지금은 그냥 택시 타고 가요.”
“안 돼. 찾아야지. 누가 훔쳐 갔으면 어쩌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며 애프터셰이브를 바르고 있는 남자를 문 쪽으로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어느새 강렬한 애프터셰이브 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어젖힌 초원의 숨이 멎었다.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원룸 건물 앞으로 다가오는 부모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진짜!”
짜증을 내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자 빗지도 못했던 머리가 완전히 산발이 됐다. 승준을 내보내긴 너무 늦어 버렸다. 작전을 바꿔야 했다.
“가실 때까지 나오지 마요.”
초원이 헐레벌떡 신발을 구겨 신고 밖으로 나가고, 승준은 그제야 패딩을 집어 들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냐, 됐어. 약속 늦지 않았어요? 얼른 가요. 이건 맛있게 잘 먹을게.”
원룸까지 올려다 주겠다는 아버지를 극구 말리며 무거운 장바구니를 빼앗아 들던 초원의 등 뒤로 건물 현관의 유리문이 드르륵 열렸다.
‘아, 진짜 미치겠네⋯.’
역시나 뒤에서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장바구니를 가져갔다. 승준이 초원의 옆에 서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장모님, 장인어른, 안녕하십니까.”
딸의 자취방 건물에서 나온 낯선 남자가 뜬금없이 장인장모 소리를 하자 부모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승준이라고 합니다.”
“어⋯, 그럼 우리 딸이랑은⋯.”
초원의 아버지, 원태의 물음에 승준은 직접 대답하라는 듯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남자 친구⋯.”
어쩐지 꽈배기 귀신이라도 빙의된 듯 몸이 배배 꼬였다.
“아이고, 그래?”
“어머나, 얘는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원태와 화영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원태는 손뼉까지 치며 반기더니 승준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장인어른, 말씀 편하게 해 주십쇼.”
이 상황이 쑥스럽고도 난처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초원에게 아니나 다를까 질문의 포화가 쏟아졌다.
“아니, 얼마나 됐어?”
“어떻게 만난 거야? 그러고 있지 말고 얘기 좀 해 봐.”
“아, 약속 늦잖아. 나중에 얘기해요.”
부모님의 등을 떠미는 순간 주차장에 있던 차에서 삑 소리가 울렸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뒤를 돌아본 초원은 승준의 손에 떡하니 들린 차 키를 보고 눈을 흘겼다.
“누가 훔쳐 갔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둑이 주머니에 넣어 놨더라고.”
그 얼굴에서 능청스러운 미소가 철철 흘러넘쳤다.
‘알고 보면 저승사자가 아니라 900년쯤 묵은 능구렁이일지도⋯.’
따지는 듯한 초원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승준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올려놓고 올 테니 초원 씨는 부모님이랑 차에 들어가 있어요.”
그는 차 키를 넘겨주곤 건물로 들어갔다.
“가족 이야긴 물어보지 마.”
차 안에 앉아 부모님의 맹렬한 질문 공세에 철저한 방어를 펼치던 초원이 문득 생각난 듯 당부했다.
“왜?”
역시나 호기심 많은 원태는 앞좌석을 향해 몸을 숙이며 캐물을 자세를 취했다.
“그냥 물어보지 마. 내가 나중에 따로 얘기해 줄게요.”
“왜? 묻지 말라니까 더 묻고 싶잖아. 아빠 궁금하게시리.”
“아이고, 이 양반아. 묻지 말라면 좀 그런가 보다 해.”
화영이 철없는 남편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는 순간,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고 초원의 무릎 위로 검은 패딩 점퍼가 떨어졌다. 급하게 나오느라 겉옷을 못 챙긴 걸 승준은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차가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엔진이 달궈지면서 히터에서 나온 열기가 차 안을 훈훈하게 덥히기 시작했다.
“그래, 자네가 우리 초원이네 팀장이라고?”
초원의 뒤에 앉은 원태가 몸을 바짝 앞으로 기울였다.
“네, 맞습니다.”
“우리 딸 똑똑하고 성실해서 일 잘하지 않나? 그래서 반했나 보네.”
“하하, 네.”
그것 때문에 반한 건 전혀 아니었지만 승준은 초원의 살벌한 미소에 기가 눌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자앤데 위험하고 험한 일은 안 시켰으면 좋겠네.”
“그래서 저도 초원 씨가 그만두고 결혼하면 좋겠는데 말이죠.”
지원군이 간절했던 승준은 초원의 부모님 앞에서 슬쩍 결혼 이야기를 흘렸다.
“그래, 초원아. 관두고 결혼해.”
“아, 쫌⋯.”
원태가 잘됐다는 듯 어깨를 두드렸지만 초원은 난감함에 짜증만 냈다.
“얘가 못 관두는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승준의 뒤에 앉아 있던 화영이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아, 그건 제가 심⋯.”
심령관리팀에 물어봤더니 걱정할 필요 없다 했다고 설명하려는 찰나 초원의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마조마하게 뒷좌석을 가리키는 눈짓을 본 승준은 그제야 초원의 아버지는 특관청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왜? 뭔 사정인데?”
앞좌석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원태가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캐묻기 시작했다.
“아, 학자금 대출. 돈 벌어서 다 갚기 전엔 결혼 안 할 거야.”
초원이 적당한 핑계를 찾아내자 나머지 두 사람은 몰래 안도했다.
“그럼 관두고 의사를 할 것이지. 아무리 공무원 철밥통이 최고인 세상이래도 글치.”
“아, 됐어.”
적당한 줄 알았는데 허술한 핑계였나 보다. 할 말이 없어진 초원은 괜히 퉁명스럽게 굴었다.
“그렇게 많이 남았어?”
“아, 아빠 딴 얘기 해.”
“우리 집이 그렇게 없는 집은 아닌데⋯.”
딸의 남자 친구 앞에서 돈 이야기가 나오자 민망해진 원태는 괜히 묻지도 않은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얘 위로 언니가 연년생이고 밑에 또 남동생이 있어 가지고 우리가 얘 예과까지만 등록금 내주고 그다음부터는 못 내줬거든⋯.”
“괜찮아. 내 공부 내 돈으로 해야지.”
“에이, 엄마 아빠가 혼수로 내줄 테니까 얼른 시집 가.”
“아, 초원 씨 혼수 안 해 와도 됩니다. 제가 집도 해 오고 대출도 갚을 테니 몸만 오면⋯.”
“헐, 그걸 승준 씨가 왜 갚아요?”
“왜 갚냐니⋯. 부부는 일심동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까, 장인어른?”
“그렇고말고.”
오늘 처음 본 남자들끼리 손발을 척척 맞추며 초원을 코너로 몰아넣고 있었다. 여기까지 했는데도 그녀는 좀처럼 져주지 않고 이젠 승준을 향해 그만하라는 듯 눈을 흘기고 있었다.
“초원 씨가 고집이 세네요.”
고집 세다는 말에 시선이 한층 따가워졌지만 승준은 모른 척 싱긋 웃었다.
“하긴 그렇지? 얘가 엄마를 많이 닮아서 이래.”
“이 양반이, 진짜.”
“아! 아파.”
원태는 꼬집혀 얼얼한 허벅지를 문지르며 씨익 웃었다.
“초원 씨가 장모님을 많이 닮아서 이렇게 미인인가 보네요.”
그 말에 두 여자의 입꼬리가 동시에 귀에 걸렸다.
“맞아, 우리 초원이 엄마가 좀 미인이어야 말이지.”
자칭 사랑꾼인 원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승준의 아부에 숟가락을 떡하니 얹었다.
“승준 씨도 참 잘생겼어요.”
화영이 운전석 시트를 붙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칭찬을 들었으니 입을 싹 닦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관상도 좋고 키도 크고 훤칠하니 잘생겼네.”
“감사합니다.”
“초원이 엄마야, 그래도 젊었을 때 내가 더 낫지 않나?”
“아, 진짜. 이 양반 왜 이렇게 주책이야.”
뒷좌석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던 승준은 웃지 않으려고 기를 써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유, 얘가 미리 말했으면 승준 씨가 좋아하는 반찬도 준비했을 텐데.”
“아닙니다. 솜씨가 워낙에 뛰어나셔서 전에 해 주신 반찬 전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호호, 그래요? 아이고, 얘는 말 좀 하지. 그럼 엄마가 더 담아왔을 텐데.”
“그나저나 딸, 오늘 밸런타인데인데 아빠 초콜릿 안 줘?”
“엄마한테 받아.”
그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말투에 승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참 나, 내 딸이라 이런 말 하면 내 흉이지만 얘가 참 무뚝뚝해.”
“하하, 무뚝뚝하면서도 귀여운 게 초원 씨 매력이죠.”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는 말에 초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드디어 차가 길가에 멈춰 서자 초원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조 서방.”
초원은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 봐 놓고 조 서방 소리를 하는 아버지도 초면에 장인어른이라 부르는 승준 못지않았다.
“우리 초원이랑 싸우지 말고 많이 예뻐해 주고⋯.”
“네, 걱정 놓으십쇼.”
원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화영은 승준의 어깨를 고맙다는 듯 두드렸다.
“아쉬워라. 오늘 약속만 없었어도 식사라도 하면 좋을 텐데.”
“다음에 제가 좋은 자리 마련해서 모시겠습니다.”
“아니지, 우리가 초대해야지.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 와요. 맛있는 거 많이 해 줄게요.”
“네, 꼭 가겠습니다.”
차에서 내려 길가에 선 부모님에게 초원은 손을 흔들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쪽을 보며 선 화영의 손을 원태가 슬그머니 붙잡았다. 그걸 쌀쌀맞게 뿌리치는 화영의 모습을 백미러로 보던 승준은 웃었다.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초원 씨가 진짜 장모님을 많이 닮았구나.”
“엄마를 안 닮으면 누굴 닮아요.”
좋으면서 무뚝뚝하게 구는 것도 유전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다음번엔 셋이서 뵈면 되겠네?”
승준의 얼굴에 애틋한 기대감이 번지고 초원은 한숨을 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