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28)

나도 사랑해요

초원은 황금 같은 토요일을 침대에서 다 보낼 셈인 모양이었다. 승준이 사다 준 치킨으로 버틴 당직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 내내 기절한 듯 자더니 집에 와서는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쓰러졌다.

점심때가 한참 지나도 일어날 기미가 없어 생존 확인을 하러 2층으로 올라갔던 승준도 결국엔 침대 신세가 됐다.

‘이 여자 잠 깨우러 왔다가 엉뚱한 것만 깨웠네.’

힘이 빠지는지 초원의 엉덩이가 자꾸 아래로 무너졌다. 그와 반대로 목이 아파 보일 정도로 위로 들린 머리에서는 가쁜 숨소리와 자지러지는 신음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승준은 엎드려 누운 여자의 벌거벗은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뜨거운 손길이 훑고 지나갈 때마다 절정의 여운에 푹 젖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거칠던 숨소리가 점점 제 리듬을 찾아가고, 이만큼 기다렸으면 됐다 싶었던 그는 그녀의 골반을 단단히 잡고 엉덩이를 위로 들어 올렸다.

“아! 승준 씨.”

초원이 손을 불쑥 뒤로 뻗더니 골반을 감싼 손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왜?”

먹을 만큼 먹었다는 듯 자신을 툭 뱉어 낸 이 여우 같은 아랫입에 성이 날 대로 난 분신을 다시 물려 주던 그는 마지못해 움직임을 멈췄다.

“나 죽을 것 같은데⋯.”

입가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승준은 간절한 애원을 가볍게 무시하고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럼 텀을 좀 늘려 볼까?’

각도를 틀어 예민한 곳을 피해 가며 분신을 속살에 스쳤다. 아무리 피한다 해도 이 자세는 한계가 있었다. 뒤로 할수록 잘 느끼는 여자인지라 배 속은 지치지도 않는지 다시 찌릿찌릿 불꽃을 튀기며 달아올랐다.

“하아, 나 지금 몇 번이나 느낀 줄 알아요?”

“글쎄? 몇 번인데?”

“몰라요. 일곱 번째부터 세다가 말았어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린 승준은 상체를 앞으로 숙여 가녀린 어깨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그 바람에 각도가 달라진 그의 물건이 예민하게 부풀어 오른 곳을 꾸욱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자극의 포화에 긴장한 초원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몸을 들어 올린 승준은 그 작은 등에 도드라지는 뼈의 윤곽을 달래듯 손으로 훑었다.

“하아, 진짜⋯. 안 좋아요? 아님 참는 거예요?”

오늘따라 유독 오래 가는 이 남자 때문에 잠으로 겨우 비축한 에너지가 깬 지 1시간도 안 돼 다 방전될 참이었다.

“좋아 미칠 것 같은데⋯.”

그 말을 몸으로 보여 주겠다는 듯 그는 단단히 붙들고 있던 고삐를 놓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속살을 단단한 것이 마구잡이로 치고 들어오자 초원의 하체는 또 힘을 잃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승준은 골반을 받쳐 든 두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아흣⋯.”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그의 몸을 비틀어 쥐고, 초원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베개 끄트머리를 꼬옥 그러쥐었다.

벼랑 끝에서 겨우겨우 이성을 부여잡고 버티던 그녀는 벌어진 꽃잎 사이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돌기에 뜨거운 손가락이 와 닿는 순간, 더는 참지 못하고 거센 쾌락 속으로 몸을 던졌다.

“흑, 승준 씨⋯. 진짜⋯.”

초원은 여전히 승준의 분신이 깊숙이 박힌 채로 온몸을 바들거리며 흐느꼈다.

“아, 진짜 이대로 더 하면 다음번은 귀접이에요.”

등 뒤로 낮은 웃음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축 늘어진 몸을 침대 위로 내려놓은 승준은 그녀의 매끈한 등에 가슴을 포갰다.

“그만할까?”

“아직 안 끝났어요?”

물어 뭐 할까? 다리 사이에 파묻힌 짐승은 여전히 건재한 듯 속살을 톡톡 건드리며 불끈대고 있었다.

“그냥 참지 말고 끝내요.”

“왜?”

“아, 이놈의 ‘왜?’”

초원은 엉덩이를 비틀어 박힌 물건을 밀어냈다.

“내가 위로 올라갈래요.”

이대로 하면 이 남자는 작정하고 그녀의 절정 버튼을 눌러댈 테니, 그가 정상에 오를 때까지 초원은 수도 없이 산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런 하극상은 언제나 환영이지.”

팀장 위의 주임. 그 싫을 리 없는 하극상에 승준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벌러덩 몸을 뒤집어 바로 누운 그의 위로 초원이 올라왔다.

어서 삼켜 달라고 애걸하는 그의 분신을 손에 쥔 그녀는 다리를 한껏 벌리고 끈적하게 젖은 속살 깊숙이 분신을 머금었다. 허리를 살살 돌리며 분신의 뿌리부터 머리끝까지 자극하던 초원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치렁치렁한 머리를 쓸어 올리기 시작했다.

협탁에 있는 머리끈을 집어다 줄까 했던 승준은 1초도 안 돼 마음을 바꿨다. 두 팔을 머리 뒤로 올리고 머리카락을 틀어쥔 채로 허리를 흔드는 여자의 야릇한 모습이 숨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대학생이던 시절, 이탈리아의 어떤 박물관에서 보았던 대리석 조각을 떠올렸다. 당장 살아 움직일 듯 매끄러운 살결과 육감적인 자태를 자랑하던 걸작품이 지금 그의 아랫배에 앉아 있었다.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뽀얀 가슴이 탐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승준은 한층 도드라진 몸의 곡선을 손으로 훑으며 올라가다 물결치듯 흔들리며 그를 유혹하는 젖가슴을 두 손 가득 움켜쥐었다.

“아⋯.”

줄곧 감고 있던 눈을 뜬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얼굴에는 바보 같은 미소를 잔뜩 머금고 경이에 찬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앞에서 초원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민망하게⋯.”

“민망한 사람치고는 허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데?”

초원은 머리를 틀어쥐고 있던 손 하나를 내려 승준의 젖꼭지를 꼬집었다.

“아!”

“집중해요.”

“내가 집중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줄까?”

초원의 골반을 덥석 잡은 승준은 예고도 없이 재빠르게 허리를 위로 쳐올렸다.

“아, 아!”

그가 사정없이 치고 있는 건 속살만이 아니었다. 치골이 세차게 부딪힐 때마다 초원의 몸은 벼락이 내리치는 듯 움찔댔다.

“자, 잠깐만! 아, 안 돼요.”

초원은 숨을 헐떡이며 두 손으로 그의 아랫배를 눌러 내렸다.

“왜?”

“내가, 내가 하기로 했잖아요.”

“그래요, 그럼.”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한 그녀와는 달리 승준은 여유만만하게 깍지 낀 두 손을 뒤통수에 대고 누웠다.

한 손으론 머리카락을, 다른 손으론 승준의 허리를 잡은 채로 초원은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초원 씨, 하아⋯ 참 야한 여자야.”

“아흑⋯.”

초원의 리듬에 맞춰 승준이 가볍게 엉덩이를 튕기고, 붉은 입술 사이로 신음은 속절없이 새어 나갔다.

“평소에 회사에선 남직원들한테 그렇게 쌀쌀맞으면서⋯.”

“아, 승준 씨⋯.”

“내 위에 이렇게 올라타서 격하게 허리를 흔들고 있을 줄 누가 알겠어.”

“아흣⋯.”

뜨겁고도 보드라운 속살이 그의 분신을 꽉 물더니 초원의 허벅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보내 준다더니 왜 혼자 가고 있어?”

절정의 물결에 휩쓸려 힘을 잃고 뒤로 쓰러지는 그녀를 승준은 몸을 벌떡 일으켜 붙잡았다.

“하아⋯ 느껴지는 걸 어떡해요.”

주인 잃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고 그는 목덜미부터 어깨까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이젠, 더 못 해요.”

“사실 난 아까 끝났는데.”

“뭐야? 말을 해야죠!”

복수랍시고 맨 어깨 위로 이를 잘근대는 여자를 끌어안고 승준은 속삭였다.

“귀여워 죽겠네.”

달아올랐던 몸이 다 식고도 두 사람은 끌어안은 채 침대를 벗어날 줄을 몰랐다.

“저녁 뭐 먹을래요?”

“떡볶이⋯.”

“뭐 넣고?”

떡볶이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뭘 넣으면 맛있게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지 초원이 고민하는 사이, 협탁 위에 놓인 승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벌떡 몸을 일으키고 엉겁결에 초원도 일어나 앉았다.

“그럼 당장 격리 조치 들어가 주세요. 위험 등급이니 작전 주의해서 해 주시고요.”

전화를 끊은 승준은 걱정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초원에게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떡볶이는 사 먹어야겠는데?”

“왜요? 일 터졌어요?”

“응.”

“주말인데⋯.”

넓은 어깨를 안쓰럽다는 듯 쓰다듬던 그녀는 묘한 그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했다.

“뱀파이어 도주 중이라는데 담당자는 집에 있으려고?”

웃음을 터트리며 일어선 승준은 볼을 잔뜩 부풀린 초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물어보자마자 현우는 후회했다. 초원의 촉촉한 머리카락에서 진한 사과 향이 풍겨 왔다.

“미안해요. 길이 막혀서⋯.”

시간 없으니 같이 샤워하자고 할 때 말렸어야 했다. 샤워는 같이 하면 더 오래 걸린다는 걸 잠시 잊었다.

격리부대는 이미 격리 작전을 끝내고 일산 연구소로 개체 수송까지 마쳤다. 두 사람은 지하 3층 위험 등급 격리 구역 복도에 기대어 서서 승준이 나오길 기다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승준이 면담실 문을 열고 나오고 두 사람은 자세를 바로 고쳤다.

“혹시 생물1팀 박 팀장님이랑 최 사무관 못 봤습니까?”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서 있는 동안 지나간 사람이라곤 격리부대원 몇 명과 면담실 안으로 들어간 연구원들뿐이었다.

“아직 안 오셨나⋯.”

예전에 한국에 왔다 추방당했던 일본 뱀파이어들과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려면 그 건을 맡았던 두 사람이 필요했다. 언제쯤 도착하는지 물어보려 핸드폰을 꺼내 드는 승준에게 초원이 물었다.

“팀장님, 그럼 취조는 더 기다렸다 시작하나요?”

급하게 나오는 길에 초코바 하나 집어 먹은 게 다였던지라 1팀 사람이 오길 기다리는 사이에 편의점이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어, 그건 나랑 1팀 쪽에서 할 테니까, 두 사람은 주지가 데리고 있던 애를 맡아 주세요.”

승준은 손을 들어 아이가 있는 면담실을 가리켰다. 수사는 둘이서 거의 다 했는데 갑자기 취조는 빠지고 애나 보라는 말에 초원과 현우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아이 면담해 보고, 보호 기관에 넘겨야 하는데 우리가 직접 할 순 없으니 김영욱 경위한테 전화해서 부탁해 보세요.”

승준은 두 사람의 눈빛을 모른 체하며 아이가 있는 면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요?”

“주말인데요.”

“두 사람이 그럼 월요일 아침까지 여기서 애 보고 있을 겁니까?”

답답해서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면담실 문을 휙 열어젖히는 그를 보며 초원은 이 남자 참 공사 구분 끝내준다고 속으로 빈정거렸다.

‘아까 눈 반짝이며 쳐다보던 남자 어디 갔어?’

승준은 면담실에 있던 군인 두 명에게 눈인사를 했다.

“여긴 우리 요원들이 맡을 테니 가 보셔도 됩니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군인들이 나가고 두 사람은 마지못해 면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문을 닫고 나가든 잔소리를 더 하든 할 줄 알았던 승준이 조용하자 초원은 자리에 앉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문손잡이를 붙잡은 채로 아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손장난만 치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따로 자리 비우지 말고 항상 둘이 같이 움직이세요.”

“네.”

그래도 못 미더운 듯 승준은 세 사람에게 번갈아 가며 매서운 눈빛을 던지다 문을 닫고 나갔다.

“저승사자는 주말도 없네.”

초원의 빈정거림에 현우는 옅게 웃었다.

“아이는 그냥 보내 주십시오.”

승준은 팔짱을 끼고 앉아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를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이 좁은 면담실에 격리부대원 둘까지 가세해 덩치 큰 남자 넷이 들어차 있으니 숨이 막혔다. 그는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양손에 수갑이 채워져 테이블 위 철봉에 묶인 남자는 풀어 달라거나 어떤 협상도 시도하지 않고 아이는 그냥 보내 달라는 말만 기계처럼 내뱉고 있었다.

“어, 조 팀장. 늦어서 미안하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1팀 박 팀장을 보고 승준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뒤로 최 사무관까지 따라 들어오면서 면담실이 밤 10시 강남역 2호선 승강장을 방불케 했다.

승준이 부대원들을 복도로 내보내고 1팀 팀장은 승준이 앉았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조 팀장, 최 사무관! 배고프지 않나? 저녁 시간도 다 됐는데 밥부터 먹고 하지?”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쉬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조 팀장이 총각이라 몰라서 그래. 집에 애랑 마누라가 있으면 쉬는 게 쉬는 게 아냐.”

박 팀장 옆의 의자를 빼서 앉던 승준은 마지못해 웃었다.

“거, 최 사무관. 저기 격리팀 당직자 좀 찾아서 짜장면이라도 시켜 봐. 난 간짜장, 조 팀장은 뭐로?”

“전 나중에 먹겠습니다.”

“에이, 그냥 먹지? 최 사무관, 조 팀장도 간짜장 하나 시켜 드려.”

“네. 그, 시장하시면 여기 땅콩이라도 좀 드시죠.”

최 사무관은 재킷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땅콩 봉지를 꺼내더니 당직자를 찾는다며 밖으로 사라졌다.

“연무 스님⋯.”

승준은 핸드폰 녹음 앱을 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아, 이거 왜 이렇게 안 뜯어져?”

박 팀장이 온 힘을 다해 봉지 가장자리를 억세게 잡아당기는 순간 촤악, 소리를 내며 땅콩이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아이고, 이거 참⋯.”

땅콩을 주워 담으려는 박 팀장의 손을 승준이 잠시 기다려 보라는 듯 막았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의 적막이 이어지고 박 팀장은 물론, 주지마저 대체 뭘 기다리냐는 듯 의아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순간 승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초원 씨!”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면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화, 맞지?”

초원의 물음에도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흘끗 시선만 올려 매섭게 쏘아볼 뿐이었다.

“우리 나쁜 사람 아냐.”

“네, 경위님. 저희 쪽에서 계속 보호할 수가 없어서⋯.”

아이는 면담실 구석에 서서 통화 중인 현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이 뭐야?”

다시 시선을 테이블 위로 떨어트린 아이의 눈이 불안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절에 오기 전에 어디 살았는지 기억나니?”

여전히 대답 없이 아이는 눈 아래로 칭칭 감고 있던 목도리를 콧등을 다 덮을 정도로 끌어 올렸다.

“춥니?”

아이가 체감하는 온도는 다른 걸까. 외투를 벗고 있는 두 사람과는 달리 아이는 두꺼운 패딩에 장갑, 모자까지 갖춰 입고 눈만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아니면 몸이 안 좋아? 의무실에 지금 누가 있으려나⋯.”

절에서 보았던 때보다 안색이 안 좋았다. 먼지 쌓인 의학 지식을 발굴해 가며 의사 역할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아이가 말문을 열었다.

“네무세⋯.”

“응?”

“네무세 나.”

아이는 코를 잡는 시늉을 하며 눈을 찡그렸다.

“아! 냄새?”

드디어 아이가 말문을 연 건 좋은데 냄새가 난다니. 코를 킁킁거려 보던 초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 냄새 안 나는데⋯.’

그건 그렇고 아이의 발음이나 억양이 어눌했다. 마치 외국인처럼. 주지가 학교도 안 보내고 친구도 못 사귀게 했다더니 언어 발달이 늦어진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아이는 이미 초등학교 2~3학년 정도는 되어 보였고 주지와 살기 시작했을 땐 이미 말을 배우고도 남았을 나이였다.

‘설마 그 전부터 계속 학대를 받았던 건가?’

불안한 듯 몸을 앞뒤로 흔드는 아이를 초원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경위님 1시간 안에 오신대요.”

통화를 끝낸 현우가 자리에 앉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 오데로 가?”

아이의 독특한 말투와 짧은 말끝에 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초원을 곁눈질했다.

“어⋯, 경찰 아저씨가 곧 데리러 오실 거야. 그럼 아저씨가 엄마 아빠 찾아 주실 거니까 걱정 마.”

순간 아이의 얼굴에 조소가 스쳤지만 목도리를 꽁꽁 감은 채라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체하며 한참을 홀로 중얼거리던 아이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배고파요.”

아이가 불쌍한 토끼 눈으로 간절하게 바라보자 초원은 옆에 앉은 현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선배, 편의점 좀 갔다 와요.”

“팀장님이 자리 비우지 말라고⋯.”

“에이, 그건 맨날 하는 소리잖아요. 애는 한 사람이 봐도 충분한데.”

“하긴⋯.”

현우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원 씨도 사다 줄까요?”

“네, 나는 참치 마요 삼김 하나랑 컵라면 작은 컵 하나요. 정화야, 너는 뭐 먹을래?”

초원이 다정하게 물어보자 잠시 눈치를 보던 아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니기리⋯.”

외투를 걸치던 현우가 멈칫했다. 아이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손장난을 시작하고, 현우는 의아한 눈으로 초원을 바라보았다.

“뭐 해요? 얼른 갔다 와요. 저승사자한테 걸리기 전에.”

역시 쓸데없는 이질감이었을까? 초원의 재촉에 현우는 꺼림직한 기분을 떨쳐 버리곤 면담실 밖으로 나갔다.

“근데 너 오니기리란 말은 어디서 배웠어? 혹시 교포야?”

“日本人だから。” (일본인이니까.)

유창한 일본어에 초원은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헐, 그래서 그랬구나. 한국말 알아들을 순 있고?”

“お前、日本語できるの?” (너 일본어 할 줄 알아?)

“간단한 건 알아듣는데⋯.”

고등학생 때 일본 아이돌에 빠져 산 게 오늘 빛을 발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얘 왜 어른한테 반말일까?’

어쨌거나 이렇게라도 말이 통하니 아이를 집에 보내 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초원이 몸을 숙이며 다시 신원 정보를 물으려는 찰나, 아이는 눈 밑까지 덮었던 목도리를 턱 끝까지 휙 끌어 내렸다.

“俺の目を見て。” (내 눈을 봐 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초원은 숨을 멈췄다. 무언가 잘못됐다.

뿌연 안개가 의식을 집어삼켰다. 온몸을 잠식하는 그 섬뜩한 기운에 공포에 질린 비명을 내질렀지만 깊은 동굴 속에 갇힌 메아리처럼 머릿속에서만 울릴 뿐이었다.

‘심장을 쏘면⋯.’

허리춤에 찬 총을 뽑으려 해도 이미 주인을 바꾼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돼⋯.’

그 생각, 다 읽힌다는 듯 아이의 얼굴에 번지는 비소에서 역한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젠장! 그냥 인간이잖아!’

물건을 세는 데 광적으로 집착하는 게 뱀파이어였다. 눈앞에 땅콩이 저렇게 흩어져 있는데도 세질 않고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남자는 절대 뱀파이어일 리 없었다.

‘그럼 진짜 뱀파이어는⋯.’

승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초원 씨!”

문을 벌컥 열고 나간 그는 초원이 있는 면담실을 향해 뛰었다.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둘 다 징계 먹을 줄 알아.’

징계도 살아 있어야 내릴 수 있었다. 승준은 두 사람이 제발 무사하길 바라며 면담실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텅 비어 있었다. 초원의 코트와 핸드백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승준은 곧바로 몸을 돌려 복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격리부대원들에게 외쳤다.

“여기 있던 사람들 어디 갔습니까?”

“아, 남자분은 5분 전쯤에 나갔고 여자분이랑 애는 좀 전에 나갔는데요.”

혼자 두지 말라는 말은 대체 뭐로 들은 걸까? 현우를 믿은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어디로 갔죠?”

부대원들의 손끝이 면담실 바로 옆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 문을 벌컥 열어 위아래를 둘러보았지만 초원이 보이기는커녕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쾅, 승준의 주먹에 죄 없이 얻어맞은 문이 흔들렸다.

“젠장!”

“조 팀장, 왜 그래?”

복도로 나온 박 팀장이 땅콩을 오물거리며 물었다. 승준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텅 빈 면담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벽에 걸린 전화기를 집어 들어 붉은 버튼을 길게 눌렀다.

“본청 생물3팀 팀장 조승준입니다. 위험 등급 개체 탈주했으니 지금 당장 건물 출입구 폐쇄해 주세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상 사이렌이 복도를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개체는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남자아이 형탭니다. 당장 건물 내부부터 외부까지 샅샅이 수색 부탁드립니다.”

숨 쉴 틈도 없이 격리부대의 당직 간부에게 비상사태를 알리던 승준은 초조하게 숨을 들이쉬곤 재빠르게 당부했다.

“우리 쪽 여자 요원이 인질로 잡혀 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다쳐서는 안 됩니다. 이건 개체 격리가 아니라 요원 구출 작전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건 꼭 지켜 주십쇼.”

스위치를 딸깍 눌러 전화를 끊기 무섭게 그는 또 다른 번호를 눌렀다.

“보안실 맞습니까? 지금 당장 홍초원 요원 출입 카드 정지해 주세요. ID는 C0203417⋯.”

아직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면 건물 안에 숨으려 할 게 분명했다. 그러다 엉뚱한 격리실에 잘못 들어가서 다른 특이 개체와 얽혀 버리면 더 위험해질 수 있었다.

‘죽이진 않을 거야.’

전화를 끊은 승준은 초조하게 되뇌며 초원의 가방과 코트를 뒤졌다.

초원의 피를 빠는 건 놈에겐 자살행위였다. 그러니 부대원과 다른 개체만 조심하면 초원이 죽을 일은 없다. 그런 이성의 외침은 들리지 않는지 뇌는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기억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있었다.

‘핸드폰이 없어.’

승준은 복도 저편을 지나가는 군홧발 소리를 들으며 주지가 있는 면담실로 뛰어 들어갔다. 핸드폰을 집어 나오던 그는 여전히 사태 파악이 되지 않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박 팀장에게 외쳤다.

“그 남자애, 주지랑 같이 있던 남자애가 진짜고 저놈은 그냥 사역마입니다.”

“뭐?”

“박 팀장님, 관제실로 가서 CCTV 좀 확인해 주십쇼. 홍 주임 발견하면 전화 부탁드립니다.”

“어이, 조 팀장! 어디 가려고?”

누구든 초원을 해치기 전에 먼저 찾아야 했다. 승준은 비상계단 문을 벌컥 열고 사라졌다.

“하, 젠장⋯.”

초원의 벨 소리가 1층 여자 화장실에서 울리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던 승준은 절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를 조롱하듯 핸드폰만 두 번째 칸 변기 뚜껑 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초원의 핸드폰을 집어 주머니에 넣는 순간, 승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 팀장님, 찾았습니까?”

[어, 지금 그 애새끼랑 1층 C 구역 128호 근처에서 사무실 문 열어 보고 다니는데?]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기가 B 구역 끝자락이니 모퉁이 하나만 돌면 C 구역이었다.

모퉁이를 지나 C 구역 128호 쪽으로 향하던 승준은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발소리였다.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는 복도에 놓인 큰 화분 뒤로 몸을 숨겼다.

‘초원 씨!’

복도 끝 모퉁이의 오른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초원은 곧바로 왼쪽으로 사라졌다.

‘다친 덴 없구나.’

이내 작은 발소리가 느릿느릿 가까워지고 있었다. 승준은 건들건들한 걸음걸이로 초원을 따라가는 놈을 매서운 눈으로 좇았다.

“この女、ほんと役に立たないな。” (이 여자, 아무 쓸모가 없네.)

기계처럼 이 문 저 문 옮겨 다니며 손잡이를 흔들어 보고 리더기에 출입 카드를 대어 보는 초원의 뒤통수에 못마땅한 시선이 꽂혔다.

출구를 코앞에 둔 참에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리며 군인들이 나타나질 않나 창문으로 탈출하려 했더니 이 요상한 건물은 복도 어디에도 창문이 없었다. 방에는 창문이 있겠거니 싶었더니 이 여자, 열 줄 아는 문이 없다.

저 쓸모도 없고 마늘 냄새도 지독하게 나는 여자,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달려오는 트럭 앞에 뛰어들게 만들어야지라고 마음먹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트럭에 치이는 순간, 최면을 풀어 버리면 어떤 얼굴을 할지 무척이나 기대가 됐다.

“おーい、おまえ!” (어이, 야!)

들키려고 작정했나 보다. 조심성 없게 복도 끝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여자를 부르던 녀석의 몸을 육중한 무언가가 강타했다.

“컥⋯.”

초원이 멀리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다 달려든 승준에게 놈은 너무나도 쉽게 제압당했다.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어린아이의 신체로 잘 단련된 성인 남자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순식간에 두 손을 등 뒤로 붙들리고 목덜미를 눌린 녀석은 고통에 찬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새끼, 내 여자가 네놈한테 쓸모 있어 뭐 하게?”

몸부림치며 울부짖던 놈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지는 순간, 승준의 시야에 검붉은 하이힐 한 쌍이 들어왔다.

철컥.

불길한 소리와 함께 초원의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총구가 승준의 이마에 닿았다.

‘무슨 일이지?’

나갈 땐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들어올 땐 격리부대원들이 정문을 지키고 서서 신원을 확인한 다음에야 들여보내 줬다.

게다가 엘리베이터도 정지시켜 두다니. 하는 수 없이 비상계단 문을 열려던 현우는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팀장님?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밖에 나온 걸 들키면 한 소리 들을 테니 얼른 사라지는 게 상책이었다.

“초원 씨, 제발 정신 차려⋯.”

문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익숙한 이름이 똑똑히 들려왔다.

‘초원 씨? 설마 초원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현우는 몸을 휙 돌려 목소리가 나오는 쪽으로 뛰어갔다.

모퉁이를 돈 그는 눈앞의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어붙었다.

승준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아이의 척추를 무릎으로 제압한 채 두 손을 들고 있었다. 그 앞에 서서 승준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익숙했다. 그 여잔 어떻게 봐도 초원이었다.

‘초원 씨가 저럴 리가 없잖아.’

“殺せ! 早く殺せ!” (죽여! 얼른 죽여!)

상황 파악이 된 순간, 손에 든 비닐봉지를 떨어트린 현우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안 돼, 차 주임!”

승준은 생기가 사라진 초원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필사적으로 외쳤다. 대체 뭘 하려고 총을 뽑는 걸까? 현우가 그 거리에서 정확히 맞출 수 있는 건 초원뿐이었다. 아무리 급소를 피한다고 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쏠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쏘면 안 돼!”

승준의 지시를 어기며 홀스터에서 총을 뽑아 든 현우는 난처해졌다. 초원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건 그도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았다. 자신이 초원을 쏘면 둘 다 살 가능성이 있지만 초원이 승준의 머리를 영점 거리에서 쏘는 순간 승준의 목숨은 거기서 끝이었다.

“팀장님, 생명에는 지장 없게 쏠 테니⋯.”

“안 된다고 했지 않나!”

승준은 이미 괴물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초원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저기 어딘가에서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제 목숨보다도 아끼는 여자의 흔적이 나타나 주길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둘 다 살리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뱀파이어를 죽이는 것. 하지만 현우가 이 거리에서 승준을 맞추지 않고 녀석을 쏘는 건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지금 녀석을 처치할 수 있는 건 승준뿐이었지만 현장 요원이 아닌 그에게 무기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현우는 바짝 말라 가는 입술을 깨물며 총구를 바닥을 향해 내렸다.

‘왜 하필⋯.’

현우는 어젯밤, 승준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랑을 늘어놓으며 볼을 붉히던 초원을 떠올렸다. 늘 무심하고 초연해 보이던 여자가 사랑에 달뜬 소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현우가 느낀 아픔은 연주가 떠났을 때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건 저 방아쇠를 당긴 후 초원이 죽는 날까지 느껴야 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팀장님 이렇게 가시면 초원 씨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겁니다.”

그 순간, 승준은 보았다. 굳게 다물려 있던 초원의 입술이 달싹였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안 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영혼 없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차가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넘쳐흘렀다.

초원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몸과 사고를 잠식한 괴물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何をしてる? 早く撃て!” (뭐 하는 거야? 얼른 쏴!)

하지만 인간의 정신력으로 뱀파이어의 정신 조정을 이겨 내는 건 무리였다. 살짝 아래로 처졌던 총구가 다시 번쩍 위로 들렸다.

“차 주임.”

“네.”

“초원 씨가 방아쇠 당기고 나면⋯.”

끔찍한 소리에 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입에 올리는 남자는 그를 죽이려는 여자를 여전히 애틋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신경과학팀으로 데려가 주세요.”

기억을 억제시키면 초원은 이 모든 걸 잊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초원 씨 잘못 아니야.”

승준은 물기가 말라 가는 싸늘한 눈을 깊이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알아들었으면 했다. 이렇게 떠나더라도 초원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나 지금이나 같이 있어서 행복했어.”

“お前、誰のものだと思うんだ? 撃て!” (너, 누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쏴!)

“사랑⋯.”

고막을 찢는 총성과 함께 승준의 눈앞에서 권총이 불꽃을 뿜었다.

첫발이 머리를 관통하는 순간, 승준의 몸이 튀어 오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탕!

두 번째는 정확히 심장을 관통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렀듯이.

이미 오래전 죽은 시체였던 몸뚱어리는 그 괴기한 원동력을 잃는 순간 말라비틀어지더니 순식간에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툭, 손에서 미끄러진 권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승준은 잽싸게 일어나 초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목숨을 건 사투 끝에 힘이 빠져 무너져 내리던 몸이 승준의 품속에 무사히 안겼다.

“잘했어. 초원 씨, 잘했어.”

숨죽인 흐느낌이 새어 나오며 초원의 등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승준은 그 떨리는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나도⋯.”

현우의 뒤로 몰려오기 시작하는 격리부대원들을 돌아보던 승준은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에 다시 초원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응?”

“나도 사랑해요.”

“살짝 따끔할 거예요.”

날카로운 바늘이 팔꿈치 안쪽의 여린 살을 파고들어 오는 순간, 초원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나비처럼 생긴 바늘의 끄트머리에 검붉은 액체가 맺히기 시작하는 걸 보고 눈에 띄게 안도하자 채혈을 하던 당직 간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 트레이에 튜브가 두 개나 더 남은 걸 본 초원의 입가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렵사리 진정시켰던 손이 다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샘플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요?”

“절차가 이래서요.”

간호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난처한 눈웃음을 지었다. 초원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 뒤로 흘러내리는 담요를 위로 끌어당겼다.

‘그냥 최면만 당한 건데⋯.’

그나마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평일이었다면 연구실에 끌고 가 뇌 영상까지 찍으려 했을지도 몰랐다.

놈이 만진 적도 없고 뭘 받아먹은 것도 아니니 피검사까진 필요 없다고 해도 승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저 얼른 집에 가서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초원은 한마디 더 하려다 그의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승준은 입씨름을 받아 줄 여유가 전혀 없었다.

굳게 닫힌 의무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굵은 목소리에 초원과 간호사는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바늘이 빠져나간 자리를 솜으로 꾹 누르던 초원에게 간호사가 알약 하나와 물잔을 내밀었다.

“신경 안정제예요.”

초원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직도 심장 소리가 귓속을 쿵쿵 울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약까지 먹을 일은 아니었다.

“저기 상사분이 꼭 드리라고 하시던데요.”

간호사의 난처한 낯빛을 본 그녀는 마지못해 약을 받아 삼켰다.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차 주임을 믿고 맡긴 내 잘못이지!”

간호사가 혈액 샘플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잠시 열렸다 닫힌 문틈으로 분노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이고⋯, 내 잘못인데⋯.’

초원은 어깨에 두른 담요를 걷어 내고 침대 아래로 내려가 빨간 하이힐 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아!”

다리에 힘이 풀렸을 때 삔 건지 왼쪽 발목이 아릿했다. 결국 구두를 신는 걸 포기하고 한 손에 든 채로 스타킹만 신은 발로 문을 향해 걸었다.

“⋯말라고 했는데 왜 지시를 어깁니까?”

“죄송합니다.”

문을 살짝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민 초원은 승준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는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미안함 가득한 눈빛을 현우와 주고받던 그녀는 문을 열고 의무실 로비로 나왔다.

“내 말이 그렇게 듣기 싫으면 다른 팀으로 가세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소리치는 승준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간 초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선 조 팀장의 홍 주임이어야 할지 승준의 애인이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팀장님.”

부르는 소리에 불쑥 뒤로 돌아보는 남자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어 있었다.

“왜 나왔어요? 신발은 왜 그러고 들고 있어요?”

“저, 다 제 잘못인데요. 차 주임님은 팀장님 말씀 때문에 안 가려 했는데 제가 괜찮다고 다녀오라고 한 거라서요. 죄송합⋯.”

“홍 주임은 끼어들지 말고 얌전히 혼날 차례나 기다리세요.”

차가운 말투에 초원은 몸을 움찔했다. 아무래도 쉽게 풀릴 화가 아닌 모양이었다. 승준이 몸을 돌려 다가오더니 다시 들어가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의무실 쪽으로 밀었다.

“앗⋯.”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해진 몸이 휘청거렸다.

“괜찮아요?”

어느새 목소리에 평소의 따스함이 돌아와 있었다.

간호사가 돌아오다 보면 소문이 날 수도 있었지만 알 게 뭔가? 초원은 약 기운을 탓하며 승준의 품에 그대로 몸을 기댔다.

살아 있는 남자의 몸. 초원의 손바닥을 그의 심장이 쿵쿵 두드리고 맞닿은 곳마다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어왔다.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려 까칠한 턱선을 매만졌다.

“우리 집에 가면 안 돼요? 떡볶이 해 주기로 했잖아요.”

“그래요, 먹고 싶다면 해 줘야지.”

화가 나다가도 이렇게 안겨드니 노여움이 눈 녹듯 녹았다. 승준은 초원을 꼬옥 끌어안으며 그의 샴푸 향이 진한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초원 씨 짐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초원을 의무실 로비 소파에 앉힌 그는 몸을 일으켜 돌아섰다.

“차 주임, 내가 올 때까지 초원 씨 옆 지켜 주세요. 이것마저 제대로 못 하면 자를 겁니다.”

조금 전보다는 화가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서슬 퍼런 말투였다.

승준이 복도로 사라지자 의무실에 남은 두 사람 사이에 어정쩡한 적막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또 한 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한 기분을 현우는 느끼고 있었다. 어디에도 없다고 자부했던 둘만의 끈끈함보다 더한 무언가가 초원과 승준의 사이에 있었다. 그 무언가의 이름은 당연히 사랑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몇 달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이렇게 깊어질 수 있는 것인가? 4년을 함께 했어도 안전선 안에 머무르며 제자리걸음만 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그리고 초원은 멀게만 느껴졌다.

“⋯미안해요. 다 내 잘못인데⋯.”

침묵을 먼저 깬 초원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내가 미안하죠. 제대로 파악 못 한 내 탓도 있으니까.”

“그건 내 탓이기도 하죠.”

각자의 생각에 잠긴 두 사람 사이로 다시 길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잠이 안 와.’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해 주지 못하고 죽이기 직전까지 갔는데 잠이 오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저녁때 먹은 신경 안정제도 모자라 승준이 먹던 수면제까지 먹었는데도 말짱한 정신이 괴로워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정말⋯.’

곧바로 눈을 번쩍 떴다. 눈을 감을 때마다 승준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죽음의 공포로 떨리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초원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더니 베개 위로 떨어졌다.

죽음이 안 두려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두려웠으면서도 꾹꾹 억눌러가며 애써 담담한 척하던 남자였다.

‘쏘지 말라니⋯. 죽느니 그게 낫잖아.’

누군가 와서 자신을 막아 주길 바라던 찰나에 승준이 현우를 부르자 속으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초원은 안도했었다. 곧 끝나겠다고 기뻐했는데 쏘지 말라니.

‘초원 씨가 방아쇠 당기고 나면 신경과학팀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 절명의 순간에도 이 미련한 남자는 자신을 죽이려는 여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초원은 아랫배에 얹힌 커다란 손을 그녀의 작은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인간의 정신력으로 뱀파이어의 초능력과 싸우는 건 한계가 있었다. 초원이 할 수 있는 건 방아쇠를 당기려 구부러지는 손가락을 온 힘을 다해 다시 펴는 것뿐이었다.

‘여긴 왜?’

몸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면 그 순간 눈이 두 배는 커졌을 거다. 현우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승준의 주변으로 그의 집에 사는 지박령이 맴돌기 시작했다. 설마 그를 데려가려고 온 걸까?

‘안 돼! 데려가지 마!’

악귀는 아니라고 믿었던 초원은 절규했다.

“너, 누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쏴!”

놈이 외치는 순간 귀신이 놈의 몸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찰나 초원을 조종하던 섬뜩한 안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구를 내려 그대로 놈의 머리를 쏘았다.

‘영혼 없는 뱀파이어에 빙의하는 건 그냥 지하철 빈자리에 앉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혼이 있는 자에게 들어가는 건 심령관리팀의 손에 저승으로 끌려갈 일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머리가 비상한 귀신 덕에 초원은 오늘 밤도 이 포근한 숨소리와 심장 박동에 폭 파묻혀 잠들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초원은 침대 옆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귀신을 향해 속삭였다.

[박병훈: 홍 주임 무슨 드라마 여주인공이야?]

[홍초원: -_-]

‘내가 여주인공이면 이딴 걸 쓴 작가의 멱살을 잡아야지.’

초원은 사내 메신저 창을 내리고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지만 정신 사납게 깜빡이는 메신저 아이콘이 거슬려 다시 열 수밖에 없었다.

[박병훈: 아니 왜 자꾸 대형 사건을 몰고 다녀?]

[홍초원: 그 자리에 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박병훈: 홍 주임이 연구소랑 합이 안 맞나?]

[홍초원: -_-]

[박병훈: 몇 년 전에 가스 누출 사고도 그렇고]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일산 연구소 가스 누출 사고 이야기가 나오자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박병훈: 와 씨 역시 홍 주임이 몰고 다니네. 나 홍 주임 연구소에 있을 때 절대 안 가야지.]

이번 일은 그렇다 쳐도 그 사고는 초원이 저지른 일도 아니라 울컥했다.

[홍초원: 왜 내가 원흉이에요? 그때도 팀장님이랑 현우 선배도 있었거든요?]

[박병훈: 와 소름 ㄷㄷㄷ 나 이제 무서워서 연구소 못 갈듯. 홍 주임은 안 무섭냐? 누출 사고만 해도 그때 현충원에 묻힌 사람이 몇 명이야 ㄷㄷㄷ]

[홍초원: 기억 하나도 안 나는데]

기억 나는 거라곤 그 당시 하늘 같았던 팀장님과 함께 서 있는 관찰실 공기가 참으로 어색했다는 것. 그리고 격리실 안에서 연구원과 대화를 나누는 파트너가 얼른 돌아와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 주길 바랐다는 것뿐.

그다음 기억은 연구소 어딘가의 간이 병상에 누운 채로 눈을 떴다가 취한 듯 비몽사몽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따르릉.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초원은 반사적으로 전화기로 손을 가져가다 멈췄다. 소리는 옆 칸에서 나고 있었다.

“네, 팀장님. 네.”

수화기를 내려놓은 현우는 곧바로 일어서서 팀장실로 향했다.

‘뭐지? 또 혼내려는 건가?’

초원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제 잘못이 큰데 욕은 현우 혼자 먹고 있었다.

일요일 내내 승준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 무거운 침묵이 무서웠던 초원은 귀찮을 정도로 옆에 딱 붙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귀여운 척까지 해 보았지만 그는 어렴풋이 웃기만 할 뿐, 다시 침묵 속에 잠겼다.

[박병훈: 다음은 홍 주임 차례겠네. 명복을 빈다]

차라리 불려가서 된통 욕을 먹고 혼이 나면 시원할 것 같았다. 승준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가늠해 보려 팀장실 쪽으로 귀를 기울였지만 의외로 잠잠했다.

[박병훈: 세상에 팀장님한테 총질이라니 하극상 끝판왕이네.]

그 자리에 있던 셋이서만 알고 묻어 두자고 한 일인데 세 사람의 대치 장면을 CCTV로 목격한 생물1팀 박 팀장이 주말 내내 나불대고 다녔나 보다. 월요일 아침부터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걸 봤으면 격리부대나 잽싸게 보내 줄 것이지.’

팀장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어? 빨리 끝났네?’

혼내려고 부른 게 아니었던 건가 싶었지만 돌아와 앉는 현우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뭐라셔?”

칸막이 너머로 눈을 빼꼼 내밀고 묻는 병훈에게 현우는 쓴웃음만 지었다.

“홍 주임 들어오란 소린 안 하셔?”

현우가 고개를 젓자 병훈은 ‘하긴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을 짓다 고개를 숙였다.

“차 주임도 예쁜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칸막이 너머로 들려오는 비아냥에 초원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탕비실 테이블에 현우와 마주 보고 앉은 초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동안 툭하면 지방으로 보낸다고 염불처럼 외긴 했지만 정말 보낼 줄은 몰랐다.

‘부산지청이라니⋯.’

깡시골도 아니고 대도시니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보여 주기식 좌천 같겠지만 초원이 보기엔 달랐다. 하필 장산범이 있는 지방이라니. ‘너는 내려가서 그렇게 좋아하던 장산범이나 쫓아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좀 아니잖아요.”

“어쩔 수 없죠, 뭐.”

현우는 따뜻한 머그잔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쓰게 웃었다.

“이번 일 아니었어도 난 다른 일로 지방으로 쫓겨났을 거예요.”

“그건 또 모르죠.”

“팀장님, 내가 사고 치기만 기다리고 계셨을 텐데⋯.”

그 말에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어떻게든 여기저기서 이번 조치를 두고 말이 나오는 걸 막아야 했다.

“아직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했죠?”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 쉰 초원은 손을 내밀어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내가 어떻게 해 볼 테니까 다른 사람, 아 절대로 집에는 아직 얘기하지 말아요.”

그 순간 탕비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의 얼굴이 돌처럼 굳는 걸 본 현우는 손을 잽싸게 뒤로 뺐다. 승준이 아무런 말도 없이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나가 버리고, 거칠게 닫힌 탕비실 문이 흔들렸다.

“벌써 잘 안 될 것 같네요.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초원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사람들 들으라고 일부러 혼나러 가는 길, 승준의 기분이 좋으면 더 곤란했다.

“팀장님, 바쁘세요?”

“뭡니까?”

일부러 혼나러 온 건 맞지만 싸늘한 태도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안으로 들어가 팀장실 문을 닫은 초원은 승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 차 주임님⋯.”

용건은 제대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승준은 벌써 분통 섞인 한숨을 터트렸다.

“⋯부산지청 전보 조치 내리신 거 다시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언제부터 주임이 팀장 결정에 이래라저래라 했지?”

그 노기 어린 목소리가 팀장실 안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이 정도면 사무실에서 내용은 몰라도 승준이 화가 났다는 건 눈치채고도 남지 싶었다.

“이래라저래라가 아니고 부탁인데요.”

“열녀 났네.”

진심으로 싸우려고 온 건 아닌데 승준이 비아냥거리자 초원도 슬슬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요.”

“홍 주임님이나 딴 놈 적당히 챙기시죠. 이러니까 오피스 와이프 소리 듣는 거지.”

승준은 초원에게 눈길도 안 주고 눈앞의 서류에 무언가를 휘갈기더니 거칠게 서류함 위로 던졌다.

“같이 부산으로 보내 줄까? 둘이서 손잡고 장산범이나 쫓든지.”

“네, 꼭 그렇게 해 주세요.”

다른 서류철을 열어 넘기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그의 눈을 초원도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내가 지금 현우 선배 편드는 줄 알아요?”

“그게 아니면 뭔데?”

“이젠 선배도 우리 사이 아는데 이건 누가 봐도 사적인 감정으로 인사 조치 내린 것 같잖아요.”

“경고도 여러 번 했고 그간 사고 친 기록도 뻔히 있는데 내가 하찮은 질투심 때문에 이러는 거로 보이나?”

“아무리 아니라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알면 수군댈 거라고요.”

초원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언젠간 들키게 돼 있어요.”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흔적 때문에 현우가 눈치챘다면 다음은 병훈이든 희경이든, 이 사무실의 누군가가 눈치챌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중 누구도 현우처럼 스스로 비밀을 지켜줄 만한 이는 없었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다들 승준 씨가 질투에 눈이 멀어서 부당한 인사 조치했다고 수군댈 거고, 심하면 감사 들어올 수도 있다고요.”

“나는 떳떳하다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요?”

아무리 본인이 떳떳해도 여러 사람이 미심쩍다고 몰고 가면 그만이었다.

“거기다가 선배 아버지 되게 높은 사람이잖아요.”

병원에서 현우의 아버지와 승준이 오랜만이라며 악수를 하던 모습을 초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들이 오늘내일하는 것에 무덤덤할 정도로 현우에게 애정이 없으면서 직속상관과는 알고 지낸다는 게 영 이상했다.

“아무리 자식한테 관심 없어 보이는 양반이라도 선배가 좌천당했다는 거 알면 자기 명예에 먹칠하게 생겼으니 승준 씨 곱게 안 볼 텐데⋯.”

“그러니까 지금 차 주임이 아니라 내 걱정하는 거예요?”

“내가 현우 선배 걱정을 왜 해요? 돈 있고 힘 있는 집 아들내미 걱정할 시간에 아무것도 없는 내 걱정하기도 바쁜데.”

줄곧 굳어 있던 승준의 얼굴에 바보 같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긴⋯. 내가 있는데.”

“그러니까, 승준 씨가 내 유일한 빽이니까 무덤 파지 말라고요.”

그 말에 승준은 싱글벙글 웃으며 두 손을 책상 너머로 내밀었지만 초원은 잡아 주기는커녕 몸을 뒤로 빼며 팔짱을 단단히 꼈다.

“그리고 징계를 내릴 거면 나한테도 내려야죠. 벌써 밖에서 왜 팀장이 홍 주임은 안 부르냐고 수군댄다고요.”

“난 징계 안 내린다고 한 적 없는데?”

승준은 뻗었던 손을 뒤로 물리곤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그걸 받아 본 초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부터 팀장이 부하 직원 사직서 대신 쓰는 사람이었어요?”

사직서에는 초원의 이름부터 입사 일자, 심지어 퇴사 이유까지 모든 기입란이 다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팀장 직인란에는 이미 서명까지 되어 있었다.

“서명해요.”

“제정신이에요?”

장난도 정도가 있지. 초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사직서를 승준의 앞으로 밀었다.

“내가 아직 제정신일 때 서명해요.”

“왜 이래요, 진짜?”

장난이라기엔 지나치게 진지한 표정에 초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관두고 초원 씨 하고 싶은 일 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라니. 초원이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하는 이유를 다 알 텐데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관두면 꼼짝없이 신내림 받아야 하는 거 알잖아요.”

“심령관리팀에 물어봤는데 잡귀들은 직원 가족도 못 건드린대요.”

승준이 다시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초원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혼인신고부터 합시다.”

“네?”

요 며칠, 심장이 대체 몇 번이나 철렁 내려앉는지 알 수가 없었다. 초원은 이러다 제명에 못 죽고 잡귀 신세가 되겠다 싶었다.

“안 한다고 했잖아요.”

“그 결혼 안 한다는 이유, 우리 둘 중 하나가 죽는 것보다 끔찍한 이윤가?”

그건 아니지만 아직은 말할 각오가 되지 않았다.

“이유 묻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무슨 이유냐고는 안 물었어요.”

그는 빠져나가려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을 더 단단히 감쌌다.

“이 일, 너무 위험해서 안 되겠어요.”

위험 등급 이상인 개체는 전체의 10%도 안 됐지만 그 10% 미만에 언제 어떻게 휘말려 잘못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초원 씨가 큰 건 맡을 때마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은 거 알아요?”

팀장이니까 초원이 안전 등급만 맡게 할 수도 있겠지만, 또 팀장이니 그렇게 팀원을 차별해선 안 됐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결혼 안 한다는 사정, 난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구청 가서 혼인신고나 합시다.”

초원이 곤란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이자 승준은 답답한 듯 한숨을 터트렸다.

“아니, 뭐 주민번호 앞자리가 1번이라거나 이런 것도 아니잖아요.”

“그게⋯.”

묘한 표정을 짓던 초원이 갑자기 고개를 떨어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던 승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해요, 형.”

‘형’이라는 소리가 웃음과 뒤섞여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이 분위기에 혼자 장난치고 혼자 웃는 여자를 보며 승준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장난치지 마요. 나 지금 진지하니까.”

잡았던 손을 놓은 그는 펜을 사직서 위에 올려 다시 초원의 앞으로 내밀었다.

“어이가 없어, 진짜.”

“뭐가?”

인내에 한계가 온 승준이 펜을 집어 내밀었지만 초원은 몸을 뒤로 젖히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열녀니 오피스 와이프니 사람 열받게 해 놓고 결혼하자고 하면 누가 해 줘요?”

“아니, 난 또 차현우 감싸러 온 줄 알고⋯.”

“이러니까 아직 결혼을 못 했지.”

“아니지, 난 초원 씨가 아직 안 해 줘서 못 한 건데?”

그 말에 키득키득 웃던 초원은 입을 막으며 사무실 쪽을 힐끔거렸다. 어느새 여기 온 목적을 잊고 이 남자와 화기애애하게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큰일인데 이렇게 충동적으로⋯.”

“난 고민 많이 했어요.”

“나는 어쩌고요? 내 인생인데 나도 고민해야죠.”

초원은 사직서를 멀리 밀었다.

“천천히 생각할 시간 좀 줘요.”

“긍정적으로 생각할 시간은 줄 수 있어요.”

초원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갔다.

“여튼 생각해 볼 테니까 내 부탁 들어줄 거죠?”

다시 현우의 거취 이야기를 꺼내며 승준이 좋아하는 눈웃음을 치기 시작하는 초원에게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초원 씨가 그렇게 귀엽게 웃는다고 부탁하는 건 뭐든 다 해 줄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럼 귀엽게 우는 건요?”

“하아⋯, 이 여자 진짜.”

초원이 입술을 비죽 내밀기 시작하고 승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팀장실 밖으로 나오며 초원은 일부러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홍 주임?”

병훈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초원은 몰래 안도했다. 역시나 밖에선 초원이 혼나는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라셔? 화 많이 나신 것 같던데 잘못했다고 싹싹 빌지.”

“현우 선배랑 나랑 오늘 중으로 시말서 써 오래요.”

현우는 그 말에 혹 떼러 갔다 혹을 붙여 온 건가 싶어 웃었다. 초원이 자리에 앉고 현우의 메신저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홍초원: 선배, 방 안 빼도 돼요.]

[차현우: 헉, 정말? 진짜 고마워요 ㅠㅠ 근데 나 때문에 괜히 혼난 거 아니에요?]

[홍초원: 어차피 나도 혼낼 생각이었대요.]

‘결혼도 혼이라면 말이지⋯.’

초원은 노트북 모니터를 멍하니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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