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28)

상실의 기억

“그냥 가지?”

승준은 안전벨트 버클을 푸는 초원을 못마땅한 눈으로 응시했다.

“됐어요. 급행 타면 되는데 번거롭게.”

초원은 멋쩍게 웃으며 핸드백을 어깨에 멨다. 이 대화를 승준의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용산역 앞에 차가 멈춘 지금까지 몇 번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운전대 잡은 사람이 안 번거롭다는데. 인천까지 타고 가면 초원 씨도 편하고 좋잖아요.”

‘마음이 안 편하잖아요!’

새해 떡국을 먹으러 본가에 가는 길, 계속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게 난감했다.

‘먼 길 운전해 왔는데 집 앞에서 그냥 가라고 할 수도 없잖아.’

딸이 정초부터 예고도 없이 ‘짠, 나 남자 친구 생겼지롱!’ 이러고 남자를 데려오면 부모님이 과연 좋아하실⋯. 아, 물론 난리부르스에 지르박까지 추시며 좋아하시겠지만, 신나서 이것저것 묻다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까지 나올까 걱정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사귄 지 3개월도 안 됐는데 쫌 이르지 않나?’

초원은 이미 수십 번도 더 한 거절 대신 입술을 부드럽게 포갰다. 입술이 떨어지자 서운함 가득한 그의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떡국 먹고 싶은데.”

어린아이처럼 본심을 드러내는 그 말에 웃던 초원은 승준의 뺨을 다정하게 감쌌다.

“저녁때 와서 내가 해 줄게요. 알았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입술이 다시 살짝 와 닿았다. 이내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다 역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초원을 승준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좇았다.

집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읽겠다고 펼쳐 든 책은 30분 넘게 한 페이지조차 넘기지 못했다. 이게 다 이 음울한 적막 탓이었다.

‘그냥 회사로 갈까?’

일에 파묻혀 있으면 잊을 수 있을 터였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지독한 일 중독자라고 불렀지만 사실 지독한 건 이 허전함이었다. 두려움을 모를 것 같은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텅 빈 집으로 돌아와 홀로 적막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책을 덮고 잠시 고민하던 승준은 TV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보지도 않을 TV를 켜고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높은 천장과 유리창에 반사된 소리가 집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연말연시 끔찍하네.’

연말연시만 끔찍한 게 아니었다. 설날도 추석도 어버이날도 가족의 생일도 기일도⋯. 끔찍한 날이 한둘이 아니었다.

잠시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는 결심한 듯 리모컨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현관 옆 작은 방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지만 아무래도 용기가 더 필요했다.

주방으로 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맥주 캔이 들려 있었다. 아직 제대로 돌지도 않은 술기운을 핑계 삼아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낮인데도 방은 어두컴컴했다.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박스 사이로 조심스레 발을 옮겨 창문으로 다가갔다.

두꺼운 커튼을 젖히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속으로 먼지가 유령처럼 피어올랐다.

방 안에는 주인들이 떠난 후 시간이 멈춰 버린 물건들이 가득했다. 주인과 함께 떠나보내 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살아가야 할 시간이 많이 남은 승준은 차마 그러질 못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낡은 피아노 위의 흰 레이스 덮개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그 위에 놓인 목제 보석함을 열었다.

금반지 한 쌍 옆에 놓인 진주목걸이를 한 알 한 알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그렇게 갖고 싶어 하시더니 아낀다고 정작 몇 번 걸어 보지도 못한 목걸이였다.

승준은 옆 칸에 고이 잠든 고장 난 은빛 시계를 집어 들며 아련하게 웃었다.

‘사랑하는 아들, 졸업 축하한다.’

뒷면에 새겨진 글귀를 엄지로 매만지던 그는 시계를 다시 제자리에 두고 보석함을 닫았다.

먼지 구덩이인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손에 잡히는 대로 박스를 열어 보기 시작했다.

하트를 안고 있는 곰 인형과 가운데에 책갈피가 꽂혀 있는 만화책이 나오는 걸 보니 동생의 물건이 담긴 박스인 모양이었다.

‘열심히 사 모으더니 결국 결말도 못 보고⋯.’

만화책을 다시 박스에 넣으려던 승준은 책 귀퉁이에서 검붉은 자국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자국이 생겨난 그날 밤의 기억이 막을 새도 없이 의식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녹슨 쇠처럼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 왔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으니 다들 깨어 있을 시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거실에는 TV 불빛이 아른거리고 있었고 여동생의 방문 틈으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집에서 이상한 냄새 나는데⋯.”

여전히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신발을 벗은 승준은 중문을 지나 가장 가까운 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뭐하냐? 대답도 없⋯.”

문을 열어젖힌 그는 그 자리에 굳었다. 눈앞의 광경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페인트라도 뒤집어쓴 걸까? 하필 새빨간 색으로 말이다.

끄윽끄윽 힘겹게 헐떡이는 숨소리에 별안간 정신이 든 승준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승아야!”

침대 위로 올라가 고통에 일그러진 동생의 얼굴을 붙들었다. 침대가 출렁이고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 쇳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티셔츠가 온통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가 배어 나오는 곳을 압박하려 해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던 승준은 베개를 집어 들어 복부를 눌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핸드폰을 꺼내 들고 119를 누르는 손이 덜덜 떨렸다. 다급하게 신고를 한 그는 구급차가 올 때까지 승아의 의식을 붙들어 두려 애썼다.

“승아야, 정신 차려! 자면 안 돼!”

뺨을 계속해서 두드리자 흐리멍덩하던 눈에 일순간 빛이 돌아왔다.

“승아야, 오빠야.”

그 말에 이미 핏기 없는 승아의 얼굴이 더욱 새파랗게 질렸다. 뒤늦은 방어라도 하듯 이미 만신창이가 된 팔을 승준의 눈앞으로 힘없이 내젓더니 곧바로 축 늘어졌다.

“안 돼!”

헐떡임이 멈췄다. 승아의 두 눈은 공포에 파랗게 질린 그대로 영원히 빛을 잃었다.

“뭐야, 이 새끼. 왜 일찍 오고 지랄이야?”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승준은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늦었다. 눈앞으로 끈 같은 게 불쑥 나타나더니 목을 옥죄기 시작했다.

“씨발, 나라의 녹을 먹는 새끼가 빠져 가지고.”

끈이 살을 파고들어 오고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목을 조르는 끈과 그걸 붙들고 있는 손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압박만 거세질 뿐이었다.

싸워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승아의 뒤를 따라가는 건가 싶던 순간 국정원 연수 때 배웠던 호신술이 뇌리를 스쳤다. 승준은 있는 힘껏 몸을 돌려 놈의 얼굴을 가격했다.

쿵, 바닥을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목을 조르던 끈이 떨어져 나갔다. 숨을 헐떡이던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놈의 얼굴을 보고 다시 숨을 멈췄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거 악몽인가?’

매일같이 야근에 시달리다 책상 앞에서 곯아떨어진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말이 됐다.

‘왜 내가 저기 있지?’

또 다른 승준은 바닥에 떨어진 노끈을 집어 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 뭐야?”

“알아서 뭐 하게?”

놈이 다시 달려들었다. 몸싸움이라면 웬만해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달랐다.

뒤엉켜 싸우다 잠시 빈틈을 보인 걸, 놈은 놓치지 않았다. 두 손이 목을 강하게 옥죄어 왔다. 놈을 떼어 내려 몸부림치던 그의 시야에 침대 아래 피로 물든 식칼이 들어왔다.

“악! 이 새끼가!”

놈이 허벅지를 감싸며 저 멀리 물러났다. 몸을 일으키던 승준은 눈을 찌푸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두 번이나 목을 졸리고 나니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그는 칼 손잡이를 단단히 붙들었다. 문틀에 기대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상처를 감싸고 있는 저 괴물이 언제 또 달려들지 몰랐다.

그때 창밖에서 귀청을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아, 썅. 너 이 새끼 내가 꼭 끝내러 올 거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라.”

다리를 절뚝이며 밖으로 도망치려는 놈을 잡아야만 했다. 벌떡 일어나 몸을 던지던 승준은 놈이 휘두른 탁상 램프에 맞아 그대로 고꾸라졌다. 시야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철컥,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손을 뻗던 그는 정신을 잃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지만 이미 늦었다. 가족을 구하지도, 살인마를 잡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건 악몽의 시작일 뿐이었다.

모든 증거가 승준을 향하고 있었다. 아파트 CCTV에 찍힌 승준 아닌 승준의 모습부터 칼에 남은 지문까지 누가 봐도 그가 범인이었다.

담배 연기로 희뿌연 조사실, 승준과 마주 앉아 있는 두 형사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아니라는 증거는 충분히 댔지 않습니까?”

퇴근길 CCTV 영상과 핸드폰 위치 기록 모두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주고 있었지만 사건을 쉽게 해치우고 싶었던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애초에 아파트 CCTV에 제가 다른 차림으로 들락날락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럼 조승준 씨랑 똑같이 생긴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식구들을 싸그리 죽였다는 건 말이 되고?”

형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승준이 생각해도 미친놈 취급당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그는 핏발이 선 두 눈을 비볐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그놈이 도망치는 장면이 CCTV에 찍혔는데 그 시간에 제가 집에 있었다는 건 구급대원이 이미 증명한 거 아닙니까?”

형사들이 피곤하다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러는 사이에 진범 놓치는 건 걱정도 안 되나 봅니다.”

경찰에겐 남의 일일 테니 애가 타는 건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승준뿐인 듯했다.

“아니, 우린 조승준 씨 말대로 잡아 온 건데? 조승준 씨랑 똑같이 생겼다며?”

“DNA도 똑같던가요? 칼이랑 방바닥에 혈흔 남은 건 조사해 보셨냔 말입니다.”

승준이 더는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리자 조용히 있던 다른 형사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내밀었다.

“이제 그만 자백하고 편해집시다.”

자백이란 말에 그가 눈을 부릅뜨자 형사는 멋쩍은 듯 입맛을 다시며 담배를 집어넣더니 다른 형사에게 중얼거렸다.

“뭐 이 정도면 증거도 충분한데 검찰에 송치시키고⋯.”

‘이제 남은 생은 감방에서 썩는 거구나.’

긴 싸움에 지친 승준은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

형사들이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아, 계장님. 여긴 어쩐 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의 남자에게 형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분이 그 반포 일가족 살인사건 장남인가?”

형사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나가 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이 건은 딴 기관에서 맡기로 했으니 나가 보세요.”

형사들은 어리둥절한 시선을 주고받다 계장이란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에 기가 눌려 쭈뼛쭈뼛 문밖으로 자취를 감췄다.

“들어오시죠.”

계장의 말에 아까부터 문간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젊은 남자 둘이 조사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흰 조승준 씨 말 믿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대뜸 꺼낸 말이었다. 지금까지 세 살짜리에게도 안 통할 거짓말을 하는 존속 살해범 취급을 당하던 승준은 그 말이 쉽사리 믿기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다른 남자가 서류 가방에서 두꺼운 서류철을 꺼내더니 승준을 향해 내밀었다.

미심쩍은 기색이 역력하던 그의 눈빛이 수사 자료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변신 능력이 있는 연쇄 살인마입니다. 장남이 있는 가족을 골라 장남으로 변신해 나머지를 살해하고 장남은 자살로 위장시키죠.”

모든 의문이 풀렸다. 이제 남은 건 놈을 잡는 일뿐.

“어디서 나오셨죠?”

“특이현상관리청이라고 행안부 산하 비밀 기관입니다.”

“전 국정원 소속입니다. 그쪽으로 이동 가능합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멈칫하던 남자들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 인력이 늘면 저희야 좋은데⋯.”

“저희 팀장님께 한 번 여쭤봐야겠네요.”

그 후로 지독하다 소리를 들을 정도로 놈을 쫓는 데 매일을 바쳤다. 그러다 2년 만에 결국 놈을 잡아 전라도 외진 섬의 격리소에 감금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승준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밤마다 그를 괴롭히던 악몽은 사라지지 않았고 인생의 갈피만 잃었다.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그는 기계처럼 일에만 매달렸다.

만화책 귀퉁이의 검붉은 자국을 닦아 낼까 고민하던 승준은 책을 박스에 넣고 덮어 버렸다.

다른 박스를 연 그는 두꺼운 앨범 하나를 꺼내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사진 속에선 행복해서 좋네.’

사진이란 참 좋은 물건이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야속하게도 희미해져 가는 얼굴을 이렇게 다시 기억에 새길 수 있으니.

승준은 불현듯 긴 한숨을 쉬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든 또 다른 가족은 사진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얼굴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사고라도 쳐야겠네⋯.”

씁쓸하게 웃던 그는 앨범을 박스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렇게 짐이 많으면 그냥 인천까지 데리러 오라고 하지.”

양손 가득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주방으로 가던 승준이 볼멘소리를 했다. 초원도 체력 검정 다 통과한 특수 요원이란 걸 항상 잊는 그는 저 가느다란 팔로 이걸 들고 용산역까지 왔을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괜찮아요. 지하철역에서만 들고 나머진 편하게 왔는데요, 뭐.”

초원은 냉장고를 열더니 본가에서 가져온 반찬을 장바구니에서 꺼내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엄청 많네. 둘이서 이거 다 먹을 수 있나?”

가방에서 끝없이 나오는 반찬통을 보며 승준은 이쯤이면 부모님 댁 냉장고를 다 털어 온 수준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됐다.

“걱정 말아요. 내가 있는데.”

초원은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두 번째 장바구니를 비우기 시작했다.

“아, 오징어 젓갈 좋아해요? 이거 우리 엄마가 직접 담근 건데 떡국이랑 먹으면 짱 맛있어요.”

젓갈 병을 흔들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승준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이처럼 신이 난 그 얼굴이 기억 속의 앳된 얼굴과 빼다 박은 듯 닮아 있었다. 제 손보다 커다란 빨간 사과에 손톱보다도 작은 잇자국을 남기며 생글생글 웃던 얼굴과.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난생처음 아빠라고 불러 준 날이었으니까.

“왜요?”

우수에 잠긴 눈빛에 놀란 초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도 떡국 먹고 싶었는데.”

승준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어설픈 핑계를 댔다.

“에이, 내가 해 준다니까요? 안 그래도 집에서 떡이랑 사골국도 다 챙겨 왔어요.”

초원은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장바구니에서 재료를 꺼내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이거 내가 다들 TV 볼 때 언니 거에서 몰래 두 주먹 더 훔쳐 왔어요. 잘했죠?”

본가에서 가져온 LA갈비를 굽던 초원은 칭찬해 달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를 뒤에서 껴안고 있던 승준이 잘했다는 듯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니, 나는 혼자 사니까 작은 통 갖고 가라는 거예요. 그런 게 어딨어? 안 그래요?”

어릴 때부터 홍씨 집안 삼 남매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였다. 안 나눠 주면 온 집안이 뒤집어졌으며 정확히 3분의 1을 하지 않았을 때도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그래도 언니가 가정을 꾸리고부턴 조카 생각에 양보하던 초원이었지만 먹여야 할 입이 하나 늘어난 이번에는 어림도 없었다.

“오랜만에 가족들 보니까 좋았어요?”

“뭐, 좋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요.”

늘 그렇듯 부모님이 ‘저거 저러다 혼자 살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얼굴로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오늘은 그냥 ‘네, 네.’ 하며 참았다. 반찬을 무사히 얻어 가려면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 했다.

“왜? 싫은 소리 들었어요?”

“늘 그렇죠, 뭐.”

“흠, 연애 왜 안 하냐는 소리?”

크리스마스 날 전화를 해 데이트 좀 하라고 신신당부하실 정도였으니 집에서도 분명 그 소릴 들었겠지 싶었다.

보통 그 나이대의 부모님이라면 딸에게 결혼으로 잔소리를 해도 연애를 하라고 그렇게 닦달하진 않을 텐데, 승준이 보기에 초원의 부모님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

초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끓어오르는 떡국 냄비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내 얘긴 안 했나 보네⋯.”

그 목소리에 섭섭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 하고는 싶었죠. 근데 얘기하면 피곤해져요.”

초원은 떡이 눌어붙지 않게 냄비 바닥을 연신 저었다.

“막, 호구조사부터 시작해서 언제 데려올 거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그리고 ‘그 사람은 알고 있니?’까지.

“난 호구조사 당당히 당해 줄 수 있는데? 오라 하시면 당장 갈 수 있고.”

초원은 피식 웃으며 노릇노릇 익어 가는 갈비를 하나하나 뒤집기 시작했다.

“안 돼요. 조승준 씨 하는 거 보고요.”

떼를 쓰는 아이에게 주의라도 주듯 집게를 세워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딱 한 번 그랬는데. 이젠 안 그러잖아요.”

“고작 일주일 지났는데 무슨⋯.”

언제 또 폭주할지 모르는 이 남자의 질투심은 볼모로 잡기 딱 좋았다. 역시나 통한 듯 승준은 더는 부모님을 뵙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잠자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승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당연히 보고 싶었죠. 생각나서 맛있는 거 잔뜩 싸 온 건데.”

돌아보는 초원의 눈빛에서 그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넘쳐흘렀다.

“사랑해.”

승준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고백에 초원은 언제나처럼 말없이 웃으며 입술을 포갤 뿐이었다.

‘언제쯤 들을 수 있으려나, 사랑한다는 말⋯.’

눈빛은 이미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입으로는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승준이 끓어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해 매일같이 사랑 고백을 할 때마다 초원은 수줍게 웃으며 입을 맞추는 게 다였다.

“떡국 담을 그릇 어딨어요?”

가스 불을 끄고 냄비 속을 국자로 젓던 초원이 물었다.

“뜨거우니까 내가 할게요. 초원 씨는 가서 앉아 있어요.”

어느새 그릇을 꺼내 온 승준이 국자를 뺏어갔다. 가서 앉으란 말에도 옆에 서서 방긋 웃던 그녀가 그의 뺨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자 승준의 얼굴에도 똑같은 미소가 번졌다.

“맛있죠?”

열심히 먹느라 말할 겨를이 없었던 승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에 파김치 얹어 먹으면 더 맛있어요.”

초원은 파김치를 덜더니 살코기에 얹어 집어 올렸다. 입에 쏙 넣어 준 갈비를 맛있게 먹는 그를 보니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게 지금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장모님 요리 정말 잘하시네.”

그 순간 초원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졌다. 웃으며 태연하게 장모님 소리를 하는 이 남자를 보고 있자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죄책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팀장은 혼기 다 지나가는데 아직도 저러고 다니네⋯. 저러다 늙으면 후회하지.’

불현듯 희경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더 늦기 전에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에 자신에게 이렇게 목매고 있느라 결혼도 못 하고 아빠도 못 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팀장님.”

한참 국그릇에 고개를 박고 있던 승준이 떡국을 뜨던 숟가락을 놓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 진짜. 이거 입에 붙어서 안 떨어지는 걸 어떡해요.”

“그럼 앞으로 내 이름 입에 붙을 때까지 하루에 100번씩 불러요.”

푸훗 웃던 초원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 듯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보자⋯. 하루 24시간에 자는 시간 7시간, 회사가 9시간⋯.”

“하, 누가 이과 아니랄까 봐⋯.”

그냥 한 말인데 이과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여자를 보자니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럼 남는 건 8시간뿐인데 이게 480분⋯.”

초원은 핸드폰을 내려놓더니 머리를 굴리며 암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4.8분이니까 4분 48초마다 한 번씩 불러야 한다는 거네요.”

“그럼 4분 48초마다 울리게 알람 맞춰 놔요.”

그 말에 초원은 키득키득 웃으며 수저를 다시 들었다.

“근데 난 이름 부르려니까 쫌 어색한데⋯. 그냥 오빠라고 부를까요?”

나이 차이도 제법 나는 그를 몇 번 장난삼아 부르는 것도 아니고 계속 ‘승준 씨’라고 부르려니 어쩐지 원래도 별로 없는 위아래가 더 없어진 기분이었다.

“난 평소엔 이름 불러 주는 게 더 좋은데.”

“왜요? 오빠 소리 더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초원 씨 아니면 누가 내 이름 불러 주겠어요.”

“아⋯.”

그제야 승준의 속뜻을 알게 된 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 아니면 다 팀장님이라고 부르겠지.’

언젠가 배터리가 닳은 초원의 핸드폰 대신 그의 핸드폰을 쓰다 몰래 주소록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는데 죄다 회사 사람들 아니면 다른 기관에 다니는 공무원들뿐이었다. 심지어 그 흔한 SNS 앱조차 깔려 있지 않은 핸드폰이라 궁금하디 궁금한 그의 과거를 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왜 불렀어요?”

“아, 승준 씨도 나이가 있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본론을 초원이 조심스레 꺼내기 시작하고, 갑자기 나이 이야기라니 의아했던 승준은 수저를 멈췄다.

“결혼도 하고 아빠도 되고 싶지 않아요?”

집에 다녀오더니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그의 얼굴에 기대감이 옅게 번지기 시작했다.

“나랑 시간 낭비하지 말고요.”

그러면 그렇지. 기대를 한 게 어리석었다.

‘그런 소리 할 거면 자기가 해 주면 되는 거지.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승준은 한숨을 길게 쉬더니 다시 수저를 들었다.

“요 며칠 잠잠한가 싶더니 또 헛소리 시동 거네.”

“헛소리가 아니고 승준 씨 나중에 후회할까 봐⋯.”

“참 나, 후회할 일이 그렇게 없나? 그리고 나도 결혼 생각 없다니까?”

반지 한 쌍을 나눠 낄 상대가 초원이 아니라면 결혼은 의미도 관심도 없는 그였다.

“나한테 결혼하자 할 땐 있는 거 아니었어요?”

“내 말은 초원 씨가 해 주면 하고 싶다는 거지.”

승준은 초원이 그랬듯 갈비 위에 파김치를 얹어 내밀었다. 이 여자의 헛소리 대잔치를 멈추는 데에는 먹는 거로 입을 막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었다.

“내가 진짜 초원 씨 버리고 딴 여자한테 가 버리면 좋겠어요?”

“아뇨, 안 돼요.”

입 안 가득한 갈비를 오물거리던 초원은 다 씹어 넘기길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가린 채 대답했다.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그래도, 그래도’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재빠르고 솔직하게 대답을 내어놓는 그녀를 보며 승준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릴 정초부터 하고 그래.”

그러게, 초원은 괜히 속으로 앓던 이야기를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자꾸 이렇게 헛소리하면 혼낼 거예요.”

“침대에서요?”

초원은 어느새 여우로 돌변해 요염한 눈웃음을 치더니 식탁 아래로 발끝을 들어 승준의 허벅지 사이를 감질나게 훑었다.

“하여튼 얕은수만 빠삭해서는⋯.”

“얕은수라뇨. 울 엄마가 만든 것 중에 제일 맛있는 걸 먹게 해 준다는데.”

그 야릇하기 그지없는 말에 승준은 숟가락을 들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년엔 나도 같이 가요.”

웃음이 잦아들고 조용히 식사를 하던 그가 다시 침묵을 깼다.

“네?”

“초원 씨 부모님 댁에.”

역시나 초원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아, 웃기만 하지 말고 확실하게 대답해요.”

“승준 씨가 나 안 버리면요.”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았을 때도 부모님을 뵙고 싶어 할까? 어쨌거나 이렇게 대답을 했으니 올해 안에는 털어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헛소리하면 혼낸다고 한 지 5분도 안 됐는데.”

이번엔 야릇한 도발 대신 쓰게 웃었다. 헛소리일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으니.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온도차 3

잡히지 않는 것만을 쫓는 남자

‘벌써 피 딸려.’

직장인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커피라더니. 출근하자마자 수혈한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출혈이 컸던 초원은 탕비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어, 초원 씨도 와서 하나 먹어 볼래요?”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던 여직원들 중 하나가 오라고 손짓했다. 커피 머신 버튼을 누른 초원이 테이블로 다가가자 직원은 작고 네모난 포장을 하나 내밀었다.

“오, 이 주임님 감사합니다. 근데 이거 뭔가요?”

“펑리수라고 파인애플 케이크 같은 거예요.”

“이 주임님이 대만 가서 사 오셨대요.”

“그렇구나. 여행 다녀오신 거예요?”

초원은 포장을 까서 노란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 이거 되게 맛있다!”

촉촉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쵸?”

“우와, 대만 갈 이유가 하나 생겼네요.”

남은 반쪽도 입속에 쏙 집어넣은 초원은 테이블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저, 주임님.”

“네?”

“저 이거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한참 미간에 주름을 잡고 수화기 너머 상대방과 씨름을 하던 승준은 노크 소리에 팀장실 문을 곁눈질했다.

“아, 담당관님. 잠시만요.”

승준은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문을 향해 외쳤다.

“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얼굴에 그의 미간은 다리미라도 지나간 듯 활짝 펴졌지만, 손에 수화기가 들려 있는 걸 본 초원은 멈칫했다.

“바쁘시면 이따가⋯.”

“아니, 들어와요.”

초원이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오고 승준은 다시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담당관님, 말씀 계속하시죠.”

책상 맞은편의 의자에 앉으려는 초원에게 그는 계속 오라고 손짓을 했다.

‘왜?’

초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책상을 빙 돌아 옆에 멀뚱히 섰다.

“앗!”

불쑥 내밀어진 팔이 허리를 낚아채더니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혀 버렸다.

“뭐 하는 거예요?”

승준은 수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더니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 하나를 초원의 입술에 올렸다.

“네, 그 점은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몸을 비틀어 빼려 해 봤지만 팔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희도 규정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니까 제재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좀 알아주시죠.”

초원은 흰 유리 너머에서 움직이는 희미한 회색 그림자를 불안한 눈빛으로 좇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마침내 끊은 승준은 사무실 쪽을 망보는 미어캣처럼 주시하고 있는 여자를 두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앗, 뭐 하는 거예요? 사람들 있는 데서.”

“여기 우리 말고 누가 있다고.”

그 말에 초원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 쪽을 가리켰다.

“잘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한숨을 쉬며 초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잠깐 충전 좀⋯.”

“왜요? 무슨 전화였길래요?”

지친 기색이 가득한 그 목소리에 초원은 밀어내기를 포기하고 목 아래에 파묻힌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순간 이동 능력자 건⋯.”

“아⋯.”

얼마 전 인터넷에서 소름 돋는다며 화제 몰이를 한 영상이 있었다. 강남대로를 지나던 차의 블랙박스에 어떤 남자가 뿅 하고 도로 한복판에 나타나는 장면이 찍힌 것이다.

사람들은 시공간에 균열이 생겼다느니 포털이 열렸다느니 마법사라느니 온갖 추측을 했고 영상은 여기저기 퍼 날라지며 삽시간에 온갖 커뮤니티로 퍼졌다.

‘소개팅 늦었다고 강남 한복판으로 순간 이동하는 인간이 어딨어?’

결국 3팀 팀원들은 순간 이동 능력자를 욕하며 인터넷에서 다중이 짓을 밤낮으로 한 끝에 주작으로 몰아가기에 성공했다.

“그거 끝난 거 아니었어요?”

“근데 행안부에서 관리 부실이라고 트집 잡네.”

“헐, 우린 할 일 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범죄 일으킨 것도 아닌데 격리를 하라니⋯.”

“헐, 그건 심하다. 그냥 이대로 지나가면 다 묻힐 일인데⋯.”

“그러게. 근데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닌가?”

승준은 고개를 들더니 블라우스 옷깃 위로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를 입술로 더듬었다.

“아, 맛있는 거 얻어 왔어요!”

초원은 손에 든 펑리수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역시 스트레스에는 단 게 최고잖아요.”

“그런 의미로 최고는 초원 씨 아닌가?”

키스해 달라는 듯 승준이 쭈욱 내민 입술을 초원은 매정하게 손바닥으로 밀어내고 펑리수의 포장을 까기 시작했다.

“나는 쓴맛도 있으니까 단쓴이고요.”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쓰잖아.”

초원은 포기를 모르는 이 남자가 또 내미는 입술 사이로 펑리수를 밀어 넣었다.

“나 가서 일해야 하니까 얼른 먹어요.”

그래도 승준은 요지부동이었다. 부드러운 케이크의 끄트머리를 입에 물고 초원의 입술을 향해 내밀더니 초원이 고개를 돌려 버리자 이제는 케이크로 볼을 찌르고 있었다.

“아, 진짜.”

초원은 마지못해 반대쪽 끝을 물며 사무실 쪽을 초조하게 곁눈질했다. 한입 베어 물고 물러나려는 그녀의 머리를 승준이 붙들더니 진하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맛있네.”

바보같이 싱글벙글 웃는 남자를 향해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 진짜 사무실에서⋯. 들키면 어쩌려고⋯.”

“들키면 좀 어때?”

“헐, 꼭 들키고 싶어 하는 사람 같네요.”

“그걸 이제야 알았나?”

“제정신이에요? 그럼 난 다른 팀으로 가야 하는데?”

“그럼 좋지. 차현우랑 붙어 다니는 꼴 안 봐도 되니까.”

“진짜 아직도 그 소리예요? 이쯤이면 내가 아니라 현우 선배한테 집착하는 것 같은데?”

“무슨 헛소릴 하고 있어.”

인상을 구기는 승준의 얼굴이 진심으로 불쾌해 보였다.

“내가 그랬잖아요. 근거 없는 질투심은 좀 넣어 두라고. 꺼낼 거면 침대에서나 꺼내든가.”

초원은 오늘 밤 침대를 규모 7.0의 강진이 강타하길 기대하며 승준의 입술 위로 번진 립스틱 자국을 손끝으로 지웠다.

“흠, 침대에서만?”

승준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드렸다.

“홍 주임, 오늘 남아서 야근하세요.”

무릎 뒤를 야릇하게 더듬는 손을 초원은 몸을 비틀며 쳐냈다.

“다신 안 해요.”

“왜? 좋아해 놓고.”

“승준 씨는 잘려도 갈 데가 있겠지만 난 잘리면 무조건 작두 타야 하거든요?”

“그럼 난 선녀님이랑 사귀는 거네?”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초원은 말문을 잃고 승준의 코끝만 꼬집었다.

“조승준 팀장님, 연애질 그만하고 일하세요, 일!”

“네, 네, 하늘 같으신 홍 주임님.”

팀장실 문을 닫고 뒤돌아서던 초원은 흠칫했다. 언제 왔는지 현우가 바짝 붙어 서 있었다.

“팀장님 지금 기분 어떠세요?”

“어⋯.”

나올 땐 분명 승준의 광대가 올라가다 못해 대기권을 뚫고 승천할 기세였다.

‘근데 선배가 들어가면 심해로 곤두박질칠 텐데.’

초원은 멋모르고 두 사람 사이에 껴서 영문 모르고 치이고 있는 현우가 안타까웠다.

“팀장님 기분이야 늘 그렇죠, 뭐. 근데 왜요?”

“아, 그 뱀파이어 건 승인 받으려고요.”

현우는 승준에게 보여 줄 서류철을 들어 올리다가 코를 킁킁거렸다. 초원의 몸에서 포근한 비누 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향수 바꿨어요? 내가 준 건 아닌데?”

“아, 향수가 아니라 섬유 유연제예요.”

승준의 집에서 세탁기를 돌리다 드디어 그 비누 향의 정체를 알아낸 것까진 좋았는데 고농축인 걸 모르고 평소 쓰던 것처럼 들이부은 게 문제였다.

“향 좋죠? 어디 건지 알려 줘요?”

“아뇨, 됐어요.”

그가 궁금한 건 섬유 유연제 이름 따위가 아니라 왜 그가 준 향수는 쓰지 않는 건지였으니 말이다. 현우는 어렴풋이 웃으며 초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네.”

“팀장님, 바쁘십니까?”

“들어와요.”

승준은 회의용 테이블에 서류 더미를 쌓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뱀파이어 건 보고 드리려고요.”

“앉아요.”

승준은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저희가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랑 증거를 살펴봤는데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뱀파이어라는 심증이 있어서 더 자세히 수사해 보려고 합니다.”

승준은 현우가 내미는 자료를 한 장 한 장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뭐죠?”

“아, 저희가 피해자들 여행 일정이랑 SNS랑 검색 기록을 살펴봤는데요. 다들 템플스테이를 하려 한 증거가⋯.”

“요점을 말하세요.”

승준의 날카로운 말에 현우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범인은 스님인 것 같습니다.”

“흠⋯, 사찰 음식에 마늘은 금기죠.”

“네. 스님으로 위장한 뱀파이어가 마늘 안 먹는 외국인들을 노린다는 게 저희 생각입니다.”

현우가 ‘저희’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승준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불끈대고 있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현우는 승준을 향해 몸을 숙이고 자료를 넘기기 시작했다.

“이게 저희가 추린 수도권 절 목록입니다.”

영문 모를 한숨을 쉬는 상사를 현우는 초조하게 곁눈질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피해자들 행적을 대조해 가며 딱 네 곳으로 줄인 건데 대체 뭘 잘못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직접 가 보고 주변도 탐문⋯.”

순간 기분이 묘했다. 어째서 여기 없는 여자의 향기가 코를 강하게 자극해 오는 걸까?

“⋯해 보려고 합니다.”

‘설마⋯.’

과한 의심일 게 분명했다. 방금까지 이 방에 있다 나갔으니 아직 잔향이 남은 건지도 몰랐다.

“흠, 당연한 절차겠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데⋯.”

승준이 팔을 들어 올리며 소매를 걷어붙이기 시작하자 진한 비누 향기가 훅 끼쳐 왔다. 초원을 걱정하며 고민에 빠진 그는 현우의 눈빛이 달라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승인은 해 주는데 사복 입고 특관청 요원인 거 안 들키게 조심해서 움직이세요. 자주 보고하고.”

“⋯네.”

왜 이걸 놓쳤을까?

갑자기 쌀쌀맞게 변해 버린 초원과 느닷없이 여자 친구가 생겼다며 답지 않게 자랑을 하던 팀장. 게다가 그 여자 친구는 의사라니.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현우는 나란히 걷고 있는 초원을 곁눈질했다.

‘이해가 안 돼.’

연애 안 한다고 외치고 다니던 사람이, 어디에 매이지 않고 늘 그랬듯 옆에 있어 주기로 약속했던 사람이, 게다가 팀장이 마음이 있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하던 여자가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뒤집어 이렇게 쉽게 연애를, 그것도 나이 차이 나는 상사와 비밀 연애를 하다니. 현우가 알던 초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초원 씨가 원해서 하는 연애가 아니라면?’

현우는 앞서 걷는 승준의 등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현우를 제 손으로 살려 주겠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초원은 분명 그에게 다정했다. 하지만 작전을 실패한 후 팀장의 도움 덕에 그가 깨어나자마자 태도가 돌변했다.

그를 싫어하는 팀장이 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꽃을 구해다 줬을까? 처음에는 그가 아니라면 돈도 권력도 있는 아버지에게 원하는 게 있는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라 팀장에게 따로 보답할 자리를 마련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팀장은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다.

‘차 실장님의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정중한 거절이었지만 아버지는 꺼림직하다고 했다.

‘조승준, 저놈이 충직한 개처럼 굴어도 실은 교활한 여우인데 말이지. 밑지는 장사는 절대 하는 법이 없거든.’

그래서 대가를 치르고 빚을 정리하는 편이 이쪽에서는 오히려 마음 편해지는 길인데 받지 않고 빚을 남겨 두는 이유를 몰라 꺼림직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겠다. 팀장이 빚을 지우려는 쪽은 법무부 차 실장이 아니라 초원이었다.

팀장이 대가로 원한 건 초원 씨였구나. 내 목숨을 구한 대가로 초원 씨가 마음에도 없는 연애를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하고 있구나.

그렇게 현우의 머릿속에서 근거는 없지만 그럴듯한 가설이 척척 세워지고 있었다.

‘아냐, 이건 다 심증이잖아.’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백반집에 들어선 현우는 늘 당연하게 앉던 초원의 옆자리가 아닌 맞은편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승준이 초원의 옆에 잽싸게 앉았다.

식사를 하는 승준의 표정이 평소보다 부드러워 보이는 반면, 초원의 얼굴은 긴장돼 보였다.

“초원 씨 계란말이 좋아하죠? 내 거 초원 씨가 먹어요.”

현우는 자신의 몫으로 남은 계란말이를 집어 초원의 밥그릇에 올렸다.

“됐어요.”

예상대로 초원은 사색이 되며 계란말이를 도로 반찬 그릇에 놓았고 승준은 벌레 씹은 얼굴이 되었다.

‘이놈 봐라⋯.’

승준은 실험실 쥐라도 관찰하듯 자신을 응시하던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일부러 도발하는 거네. 눈치챘구만.’

현우는 겁도 없이 눈을 피하지 않고 따지는 듯한 시선을 쏘아대고 있었다.

‘어쭈, 네놈이 뭔데? 이 여자가 네 거라도 되나?’

남자의 쓸데없는 자존심을 건 찌질한 눈싸움이 계속됐다. 이대로 가다간 같은 테이블에 앉은 초원은 물론이고 아름도 눈치채고 이상하게 볼 걸 알면서도 두 남자는 서로를 죽일듯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아, 그 얘기 다들 들으셨어요?”

병훈의 느닷없는 물음에 놀란 두 사람의 팽팽한 시선 줄이 툭 끊어졌다.

“연구소에서 이제부터 기억 억제술 할 때 체중 안 물어보고 직접 재기로 했다던데.”

연구소에서 기억 억제 절차를 어떻게 바꾸든 관리팀이 관심 가질 이유는 없었다. 다들 시큰둥하게 다시 밥그릇에 고개를 묻는데 승준은 무덤덤하게나마 관심을 보였다.

“그래요?”

“그게, 억제 풀린 케이스가 발견됐다네요.”

다시 수저를 들던 승준의 손이 불현듯 멈췄다.

“흠, 어쩌다가?”

“그게 진짜 골 때리는데⋯. 저번에 그 술 마시고 개 된 아저씨 목격한 여자분이 며칠 만에 기억 다 찾아서 연구소 뒤집어졌었대요.”

승준은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그제야 내쉬었다.

“장 박사님 팀이 특이 케이스라며 조사하고 난리가 났는데 알고 보니까 몸무게를 20킬로 넘게 줄여서 말했다는 거 아니에요, 하하.”

“그럼 억제제 덜 들어갔겠네요.”

초원이 알기론 기억 억제에는 약물과 최면을 동시에 써야 했다. 체중을 기준으로 쓰는 억제제인데 20kg이나 줄여 말했다니. 게다가 아직 개발 중인 시술이라 불완전하다고 들었다. 기억을 다시 되살려 줄 트리거를 접하는 순간 억제가 풀리는 경우도 있다고. 그런 데다 억제제가 정량보다 훨씬 덜 들어갔으면 억제가 쉽게 풀릴 만도 했다.

“근데 그걸 믿었대? 보면 티 안 나?”

희경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니까 말이죠. 그래서 이제부터는 직접 잰대요.”

“근데 막 사람들 앞에서 몸무게 공개 당하면⋯.”

아름이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차피 기억 못 할 텐데요, 뭐.”

멋모르고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는 초원을 승준은 조심스레 곁눈질했다.

***

“후드 티 빌려 입어도 돼요?”

초원은 2층 난간을 붙잡으며 1층 어딘가에 있을 후드 티 주인에게 소리쳤다.

“별걸 다 묻네.”

목소리만 들릴 뿐 승준은 뭘 하는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긴 주인이 내 거면 후드 티도 내 거죠.”

멀리서 들리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초원은 드레스 룸으로 다시 발을 옮겼다.

오늘은 종일 외근이었다. 하루 만에 사찰 네 곳을 다 도는 게 가능할까 싶었지만 바쁜 일정을 쪼개 겨우 비운 하루였다.

평소의 정장 차림이 아닌, 연분홍 셔츠에 초원에게는 오버핏인 승준의 네이비 후드 티를 걸치고 검은 스키니진을 입으니 누가 봐도 놀러 다니는 것 같은 차림이 완성됐다.

“⋯지 마요.”

“네?”

너무 멀어서 승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초원은 드레스 룸 밖으로 나왔다.

“귀걸이! 잊지 말라고!”

“아!”

다시 드레스 룸으로 돌아와 승준이 사다 준 십자가 귀걸이를 귀에 걸었다.

계단을 내려가 주방으로 향한 초원은 강한 마늘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뭐 해요?”

바쁜 평일 아침은 그냥 토스트에 잼을 발라 먹거나 운 좋게 국이라도 있으면 밥을 말아 훌훌 마시는 게 일과였는데, 어쩐지 오늘 아침은 승준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앉아요.”

승준은 카운터 위에 나란히 놓은 밥그릇 두 개에 참기름을 두르더니 식탁으로 가져왔다.

“진짜 이건 오버예요.”

“후회하느니 오버하는 게 낫지.”

초원의 밥그릇에서 마늘 향이 진동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 위에 작게 썬 명란젓과 얇게 저민 생마늘이 얹혀 있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어차피 한국 사람 피는 안 빠는데⋯.”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마늘 냄새 풍기고 다니면 뱀파이어 판별하기도 쉽고.”

“십자가에 마늘까지⋯. 무슨 결계 치는 것도 아니고⋯.”

오버한다고 투덜투덜 댈 땐 언제고 일단 한술을 뜬 초원은 냉장고에서 김 가루까지 꺼내 와 뿌려 가며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으, 마늘 냄새⋯.”

출근길, 습관처럼 코를 막으려던 초원은 머쓱해졌다. 밖에서 나는 것도 아니고 제 입에서 나는 냄새인데 코를 막아서 뭐 하겠는가.

“이 정도로 지독하면 뱀파이어가 아니라도 도망갈걸요?”

마늘 냄새 안 나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차 창문을 살짝 열었더니 운전석에 앉은 승준이 피식 웃었다.

“홍초원 주임님, 오늘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했죠?”

승인을 받은 다음부터 집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주의 사항이라 초원은 이제 자다가 잠꼬대로도 읊을 수 있겠다 싶었다.

“안전이요.”

“두 번째로 중요한 건?”

“들키지 말 것.”

“총은?”

초원은 오른쪽 허리께 후드 티 아래로 불거진 무언가를 보란 듯 탁탁 쳤다.

“다른 델 쏘면 제압은 되지만 완전히 처치하려면 심장을 쏴야 해요.”

“알아요.”

“절대 혼자 행동하지 마요. 뱀파이어랑 단둘이 남으면 안 되니까 항상 차 주임이랑 같이 다니고.”

“네.”

평소에는 붙어 다니는 꼴 보기 싫다던 사람이랑 꼭 붙어 다니라는 걸 보니 어지간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탐문 수사일 뿐인데 승준은 초원이 당장 격리 작전이라도 하러 가는 것처럼 굴었다.

“뱀파이어 판별법은?”

초원의 머릿속으로 수능 날 아빠 차를 타고 시험장으로 가던 순간이 스쳤다.

‘초원아, 신분증 챙겼지? 시계는? 시간 안배 잘하고. 아빠는 너를 믿는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만 해. 화원아, 동생 오답 노트 좀 다시 읽어 줘라.’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게 이런 뜻은 아니었는데⋯.’

초원은 한숨을 쉬다 코를 찌르는 마늘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대답.”

“네, 네, 팀장님. 피부가 차가우니 악수해 볼 것. 마늘 냄새와 십자가에 과도하게 반응하는지 볼 것. 물건의 개수를 세는 데 집착하는지 볼 것. 햇빛은 겨울이라 딱히 도움이 안 되네요.”

차가 멈춰서고 초원은 현우의 오피스텔 건물 입구를 곁눈질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보자고 했으니 여기 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조심해요. 뱀파이어도 파트너도.”

“헐, 뭘 조심해요? 아깐 같이 다니라면서요.”

“차 주임이랑 단둘이 있는 것도 위험해.”

사내 비밀 연애를 눈치채면 보통은 입을 다물거나 입을 다물지 않거나 둘 중 하나지, 현우처럼 굴지는 않았다. 선을 넘을 듯 말 듯한 도발과 한 번씩 도둑놈 보듯 승준을 보는 그 눈빛이 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미친놈. 뒤늦게 남의 여자한테 흑심 품네.’

“뭐야⋯. 나 못 믿어요?”

“초원 씨는 당연히 믿지. 그놈을 못 믿는 거지.”

“남자가 다 누구처럼 늑대인 줄 아나.”

초원은 꿍얼거리며 ‘늑대’의 어깨에 붙어 있는 긴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그러니까 못 믿는 거지. 늑대는 평생 자기 짝 하나만 사랑하는 거 알아요?”

승준은 생긋 웃는 초원의 두 볼을 붙들고 입술을 맞대다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흠, 내가 마늘을 너무 많이 넣긴 했네⋯.”

“에잇, 복수다!”

초원은 뒤로 물러나려는 승준의 목을 단단히 휘감고 입술을 사정없이 비볐다.

오전 내내 흐리고 이슬비도 내리더니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지금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황량한 논밭과 비닐하우스의 행렬이 잦아들고 나지막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에 들어서자 현우는 걷는 게 차라리 빠를 정도로 차의 속도를 줄였다.

“저긴 어때요?”

창밖을 유심히 관찰하던 초원이 허름한 식당 하나를 가리켰다.

“제법 이 동네 사람들 핫스팟 같아 보이는데.”

스치듯 보긴 했지만 유리문 너머로 뽀글뽀글 파마머리가 여럿 모여 있는 것이 동네 소문을 듣기엔 딱일 듯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가에 차를 대었다.

“초원 씨 생각은 어때요? 난 여기에 한 표.”

이 마을의 뒷산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그럴 규모도 되어 보이지 않는데 템플스테이 사이트에 올라와 있었고 네 곳 중 유일하게 외국인만 받는 곳이었다.

오전에 가 본 곳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그저 평범한 절에 평범하게 사람 좋은 스님들이 있었을 뿐. 데이트 나온 커플인 척하며 스님에게 이것저것 물었더니 두 사람이 마음에 들었는지 친절하게도 점심을 먹고 가라는 걸 사양하고 이곳으로 왔다.

“나도 한 표요. 제발 여기가 맞아서 딴 데 안 가 봐도 되면 좋겠네요.”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도합 10개의 눈동자가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주인인 듯 앞치마를 맨 중년의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거기 말고 이쪽에, 바닥에 앉아. 여기가 따뜻해.”

호피 무늬 블라우스 위에 팥죽색 패딩 조끼를 입은 다른 아주머니가 식탁에 앉으려는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 상 앞에 앉자 주인아주머니가 물병과 물잔을 가지고 왔다.

“뭐로 드릴까?”

아주머니의 물음에 두 사람은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다 서로 눈치를 살폈다.

“초원 씨 뭐 먹고 싶어요?”

“음, 두부전골 괜찮아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식당 주인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럼 저희 두부전골 주세요.”

어떻게 동네 주민과 자연스럽게 말을 섞어야 할지 초원은 고민했다. 아주머니들이 먼저 오지랖을 부려 주었으면 했지만 초원의 뒤에 있는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아주머니들은 막장 드라마 재방송을 보며 남자 주인공을 욕하기에 바빴다.

“아이고, 염병을 한다. 소원이 눈앞에서 딴 년 끌어안아 놓고. 뭐? 소원 씨 보고 싶었어요?”

“허이구, 저놈은 대체 뭔 생각이다냐.”

“저렇게 양손에 떡 하나씩 쥐고 뭐 먹을까 하는 놈들은 떡 평생 못 먹어. 딴 놈이 그새 다 채가지.”

“쯧쯧, 저러다 땅을 치고 후회하지.”

대체 무슨 스토리인가 싶어 몸을 뒤로 틀어 TV를 보던 초원은 목이 아파 오자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왜요?”

현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그가 바라보던 건 초원이 입고 있는 네이비색 후드 티였다. 패딩을 입고 있을 땐 몰랐는데 벗고 있으니 후드 티에 적힌 글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실 대학교 이름이 적힌 후드 티야 흔하디흔한 것 아닌가. 현우의 시선을 끈 건 다름 아니라 그 대학 이름이 초원이 나온 곳이 아닌 승준이 나온 곳이란 사실이었다.

‘대체 왜? 정말 나 때문에⋯?’

입이 쓰고 속이 쓰렸다. 초원과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운을 떼야 좋을지 몰랐다. 입술을 달싹이던 현우는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물어본다 한들 아니라고 할 게 분명했다.

“근데 여긴 어떻게 알고들 찾아왔어요? 마실 나왔나?”

식당 주인이 두부전골 냄비를 내려놓으며 묻자 현우는 방바닥에 둔 카메라를 보란 듯 들어 올렸다.

“드라이브하러 나왔는데요. 여기 사진 예쁘게 잘 나오는 데 없나요?”

“저어기 뒷산에 약수터까지 가면 누각도 있고 거기서 내려다보면 경치 끝내줘요.”

“아니지, 은애 엄마야. 총각은 경치가 아니고 여자 친구 찍어 주려고 하는 거 아냐?”

“아이고, 여자 친구야 이쁘게 바라보면 아무렇게나 찍어도 이쁘게 나오겄지.”

“하하, 기왕이면 배경도 예쁘면 좋으니까요. 뒷산에 운치 있는 절 같은 건 없나요?”

현우는 슬슬 미끼를 던지기 시작했다.

“아, 있지. 약수터 가는 길에 암자 작은 거 하나 있어요.”

“아유, 거길 가라고 하긴 그렇지.”

초원의 뒤에 앉아 있던 호피 무늬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주인을 말렸다.

“왜요?”

초원이 뒤를 돌아보며 묻자 아주머니들은 기다렸다는 듯 암자에 사는 주지 스님의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양놈들이랑 왜놈들한테만 굽신대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주 찬밥 신세야. 뒤늦게사 돈독이 들었나.”

“근데 그 머시기 스테이가 돈이 되긴 하나? 많이 델꼬 오지도 않더만.”

현우와 초원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잠시 주고받았다.

“그 냥반이 갑자기 이상한 바람이 들었나. 원랜 안 그랬는데.”

“애가 불쌍해서 우짤꼬⋯.”

“애요? 스님이 애가 있어요?”

전혀 예상 못 한 정보에 초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 자기 애가 아니고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어디서 애 하나를 데려왔더라고.”

“난 또 고아 키워 준다고 좋은 일 하신다고 우리 애들 어릴 때 보던 동화책도 갖다주고 했는데. 에잉, 아까비라.”

“그러게 키운다고 데려왔으면 학교도 보내 주고 해야지 동네 애들이랑도 못 놀게 하고.”

“생긴 것도 히마리 없이⋯. 얼라가 핏기가 하나도 없어 가지고⋯.”

초원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현우에게 보냈다.

‘설마 애를 먹이로 삼고 있는 건가.’

갈증이 심해질 때를 대비해 힘없는 아이를 비상식량 삼아 키우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저번에 절밥 지어 준다고 갔을 때⋯.”

초원은 식당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맛있는 거 준다고 오랬더니 애가 겁먹었는가 오지도 안 하고.”

“절밥도 지으세요?”

“응, 가끔 그 외국인 손님들 오거나 49재 있으면 내가 올라가서 하거든.”

그렇다는 건 식당 주인은 절에서 무언가를 봤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돈독이여. 기도는 안 열면서 49재는 챙기고.”

“아이고, 기분 좋게 놀러 온 사람들 기분 잡치게 이런 이야길 하고 있어.”

“아, 아닙니다. 저 이런 이야기 좋아하거든요. 또 막 오싹한 소문 없나요?”

최대한 정보를 얻어 내야 했다. 현우는 아주머니들을 향해 그 특유의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오싹한 거 좋아한다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 요즘 동네 개들이 그렇게 죽어 나가네.”

“오, 어쩌다가요?”

“아이고, 이거 밥 먹으며 할 얘긴 아닌데⋯.”

“아, 괜찮아요. 저희 비위 좋거든요.”

초원은 웃으며 두부 한 조각을 입속에 넣었다.

“몸에 구멍이 뚫려 가지고⋯.”

“구멍만 뚫렸나? 입 안이 허연 거 보니까 피도 다 빠져서 죽었던데?”

인간 사냥이 힘드니 가축 사냥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연무 스님 짓 아녀? 우리 집 황구가 접때 스님 보더니 꼬리를 막 요렇게 다리 사이에 숨기고 벌벌 떨면서 오줌을 지리더라니까?”

“아유, 설마. 스님이 그런 짓을 하겄어?”

뱀파이어라면 하고도 남을 짓이었다. 퍼즐이 척척 풀려 가고, 현우는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리며 초원을 향해 속삭였다.

“초원 씨, 오싹한 절 데이트 어때요?”

초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산길이 가파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놈의 마늘 냄새가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입으로 가쁜 숨을 쉴 때마다 매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힘들어요?”

앞서가던 현우가 손을 내밀자 초원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가렸다.

“질식하기 싫으면 어서 가요.”

“얼굴 가까이 대고 있는 거 아니면 냄새 별로 안 나는데⋯.”

초원은 계속 손을 내미는 현우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작은 암자라 하더니 건물이 세 채나 됐다. 초원은 긴장한 듯 후드 티 아래로 불거진 총을 매만지다 텅 빈 마당으로 발을 옮겼다.

‘아무도 없⋯.’

마당 가장자리에 서서 경내를 둘러보던 초원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찰칵 소리에 움찔했다. 뒤를 돌아보자 현우가 수사 자료로 쓸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보수를 안 하는지 곧 쓰러질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법당을 향해 초원은 다가갔다. 세찬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쨍, 하고 귀를 찔러왔다.

향냄새가 진동하는 법당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비었어요.”

엉성한 돌계단 아래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현우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앗!”

이끼 낀 돌계단 위로 내디딘 발이 미끄러졌다.

“조심해요!”

현우가 재빠르게 허리를 붙들어 당겨 준 덕에 엉덩방아는 면했지만 놀라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좀 과한데.’

초원은 순식간에 현우의 품에 안긴 꼴이 됐다.

“서, 선배, 고마운데 이제 됐어요.”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지만 현우는 놓아주지 않았다. 초원은 뱀파이어도, 파트너도 조심하라던 승준의 말이 근거 없는 질투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초원 씨⋯.”

현우는 초원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저 어딘가에 진실이 있지 않을까. 그를 위해 매일 울어 주던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그를 밀어내고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간 건지. 그 답을 현우는 간절히 찾아 헤맸다.

역시 그런 걸까?

그를 밀어내던 두 손이 뚝 멈췄다. 초원이 갑자기 고개까지 젖혀 들더니 현우를 향해 입술을 내밀었다.

‘역시 초원 씨가 나를 좋아하는 게 맞구나. 이게 다 그 망할 팀장이 억지로⋯.’

굳게 다물렸던 초원의 입술이 벌어지는 순간, 현우도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후우⋯.”

“헉, 콜록 콜록⋯.”

아무래도 마늘은 뱀파이어만 쫓으라고 퍼 먹인 게 아니었나 보다. 초원은 승준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현우를 뿌리치고 걸었다.

“초원 씨⋯.”

“선배, 일하러 왔으면 일이나 해요.”

“잠깐 얘기 좀⋯.”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건물 뒤에서 회색빛 승복을 입은 초로의 남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저흰⋯.”

“약수터는 이쪽이 아니고 나가서 더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묻지도 않은 길 안내를 하는 말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서슬 퍼렜다.

“절이 참 고즈넉하고 좋네요.”

초원이 마지못해 눈웃음을 살살 쳐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주지는 소매로 코를 가리더니 다른 손을 휘저으며 두 사람을 쫓아내려 했다.

“여긴 볼 거 없습니다.”

“저기, 49재⋯.”

현우가 불쑥 내뱉은 단어가 통했는지 주지는 내젓던 손을 뒤로 물리곤 현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를 올려야 하는데 누가 여길 추천해서요.”

“그러십니까? 돌아가신 분과의 관계는⋯.”

“아, 저희 할머니께서 며칠 전에⋯.”

사실 현우의 할머니는 아직도 며느리를 쥐 잡듯 잡으실 정도로 팔팔하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초원은 마주 고개를 숙이는 두 사람에게서 떨어져 다른 건물로 다가갔다. 주지가 돈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경내를 둘러볼 생각이었지만 자꾸 등 뒤로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아, 저기⋯. 화장실 좀 가고 싶은데⋯.”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눈초리로 주지는 작은 건물 뒤편을 가리켰다.

드디어 불편한 이들을 피해 경내를 돌아볼 수 있게 된 초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작은 해우소 건물 뒤편에서 닭소리와 어린아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건물과 산비탈 사이의 작은 뜰에는 닭 세 마리와 병아리 여러 마리가 종종대며 바닥을 쪼고 있었다.

‘저 아이인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엉성한 닭장 앞에 쪼그려 앉아 병아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쥬니⋯.”

‘병아리 이름인가?’

한 걸음 다가가자 인기척을 눈치챈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과 피로가 서려 있는 그 눈빛을 보자 초원은 저승 어딘가에서 강아지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아이를 떠올렸다.

“안녕?”

아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더니 병아리를 작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초원은 아이의 옆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혹시나 목에 물린 자국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아이는 얼굴만 남긴 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주민들 말대로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했다. 추운 날씨에 튼 건지, 아토피라도 있는 건지 피부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이름이 뭐야?”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다리에 힘이 빠진 듯 풀썩 주저앉았다.

“괜찮니? 어디 아파?”

초원이 재빨리 손을 뻗어 일으켜 주려 했지만, 아이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벗어나려 애를 썼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언제 온 건지 주지의 천둥 같은 호통이 귀청을 울렸다.

“아, 애기가 넘어져서요.”

“당장 나가요, 당장!”

삿대질을 하며 불호령을 치는 남자의 눈이 이상했다. 그 섬뜩한 광기에 떨며 초원은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절 입구까지 따라 나와 두 사람을 쫓아내는 주지에게 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49재는 아버지와 상의해 보고 전화드리겠습니다.”

주지가 핸드폰 번호를 적어 준 쪽지를 만지작거리며 악수를 청했지만 주지는 뒷짐을 풀지 않고 두 사람을 살벌하게 노려보기만 했다.

“맞는 것 같죠?”

산을 내려가는 길, 길고도 어색했던 침묵을 깨고 현우가 물었다.

“네, 느낌이 그렇네요.”

“아까 초원 씨가 말할 때 손으로 코 가리는 거 봤어요?”

“네.”

“손도 잡아봤어야 하는데 아쉽네.”

“근데 이 정도면 확실한 것 같아요. 가서 팀장님한테 보고해 봐요.”

“원래는 주지가 안 그랬답니까?”

“네, 주민들 말은 그렇습니다.”

초원은 잠자코 팀장실에 앉아 두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흠, 그럼 어떤 경로로 변이가 일어난 거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승준의 어깨 너머로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뭐, 확실한 것 같은데⋯. 우린 여기까지 하고 경기지청에 맡기도록 하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절은 경기도에 있으니 엄밀히 따져 본청 관할이 아니었다. 승준의 속셈은 그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초원이 알면 공사 구분 못 한다고, 팀장이랑 사귀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았더니 출셋길만 막힌다며 멱살을 잡고 따지겠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을 계속 맡기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역시나 말 더럽게 안 듣는 두 요원은 장단을 척척 맞춰가며 ‘하지만, 하지만’을 외치고 있었다.

“사건 이송하면 한두 달은 걸릴지도 모릅니다, 팀장님.”

“맞아요. 그러다 그사이에 도망가서 숨어 버리면 어떻게 찾겠어요?”

“어차피 경기지청이 받아 가도 일산 연구소랑 격리부대도 같이 들어가야 하는 일인데요.”

“그러니까 팀장님께서 지휘해 주시고 저희가 계속 맡으면 빨리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네?”

‘하⋯, 저놈의 ‘네?’’

저렇게 한마디 덧붙여 간절하게 물으면 승준으로선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절 내부는 어떻게 되어 있죠?”

“별로 크진 않고 건물 세 채 정도 있습니다. 사진 보시겠습니까?”

“네, 그리고 내일 배치도 그려 오세요.”

현우가 건네는 카메라를 받아 사진을 확인해 보던 승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이 새끼, 절 사진 찍어 오랬더니 왜 남의 마누라 사진을⋯.’

초원이 안 찍힌 사진이 드물었다. 그것도 몇 개는 대놓고 줌을 당겨 얼굴을 찍었다.

‘젠장, 쓸데없이 예쁘네.’

승준은 초원이 작게 나온 사진들도 하나하나 확대해 보고 있었다.

‘예쁜 것도 사람을 좀 가려가며 할 것이지.’

심장이 빠르게 쿵쿵대기 시작하는 게 눈앞의 남자를 향한 분노 때문인지 그 옆의 여자를 향한 설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딴 놈이 든 카메라를 보고 이런 표정을 지어 주면 안 되지.’

그 ‘이런 표정’이란 건 초원이 뒤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일 뿐이었다.

‘혈세로 남친 놀이하라고 보내 준 줄 아나.’

이렇게 예쁜 초원의 사진을 찍고 간직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어야 했다.

‘망상은 집에서 저 혼자 할⋯.’

현우가 초원을 두고 역겨운 망상에 빠지는 상상을 하자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러워졌다. 승준은 카메라를 끄고 메모리 카드를 빼냈다.

“이건 내일 받으러 오세요.”

또 그 눈빛이었다. 도둑놈 보듯 하는 눈빛.

승준은 메모리 카드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발을 받았으면 정신 차릴 때까지 대응 사격을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수고 많았어요. 내가 저녁 살 테니 나가죠.”

“뭐 먹고 싶어요?”

셋이서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승준이 갑자기 허리를 휘감자 초원은 사색이 됐다. 바로 옆에 현우가 있는데 왜 이러냐는 듯 곤란한 얼굴로 밀어내도 승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우의 눈빛이 평소의 서글서글함을 잃고 날카로워졌다. 초원의 어깨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며 놓아주라고 하려는 찰나 승준이 건드리지 말라는 눈빛을 살벌하게 내뿜으며 초원을 바짝 끌어당겼다.

“차 주임 우리 사귀는 거 이미 알고 있던데. 그렇지 않나, 차 주임?”

승준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채, 눈을 커다랗게 뜨며 돌아보는 초원을 향해 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입으로 인정하라 이건가?’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저 남자는 저승사자도, 돌부처도 아닌 교활한 여우였다.

“차 주임이 눈치가 참 좋아. 우린 티 안 내려고 애썼는데, 그렇죠?”

초원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이 남자들 무슨 생각이야?’

들켰어도 모른 척하고 시치미를 떼야지 승준은 왜 잠자코 있던 현우에게 둘 사이를 인정하는 것이며, 현우는 알고 있었으면서 왜 끌어안았던 걸까?

“차 주임, 어떻게 알았어요? 얘기 좀 해 봐요.”

승준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현우의 입으로 두 사람의 연애를 인정하게 만들 셈인 모양이었다. 거기에 초원의 호기심 어린 시선까지 가세하자 현우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섬유 유연제 향이 같아서⋯.”

“아!”

초원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오, 이 바보야!’

들킨 건 완전히 제 잘못이었다.

“하하, 앞으로 빨래는 내가 해야겠네.”

승준은 웃음을 터트리며 보란 듯 초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분명 삼겹살과 소주가 간절했는데 초원은 이 껄끄러운 분위기에 목이 턱 막혀 술도 고기도 안 넘어갈 것 같았다.

옆에 앉은 남자나 앞에 앉은 남자나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이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분위기 화기애애하다 할 만했지만, 문제는 눈빛이었다. 초원은 인간에게 눈만으로 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냥 삼각 김밥 먹자고 할걸⋯.’

괜히 오래 걸리는 고깃집에 와서 두 남자의 살벌한 기 싸움을 연장전까지 봐야 한다니 체할 것 같았다.

주임 위에 팀장, 팀장 위에 팀장 여친이니 오늘 고기 집게를 잡아야 하는 사람은 현우였다.

고기가 익어가며 불판 위에 기름기가 돌기 시작하자 현우는 마주 앉은 사람들에게 묻지도 않고 김치를 집어 불판에 올렸다. 초원은 삼겹살을 먹을 때 김치를 같이 구워 먹는 걸 좋아했다. 승준도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현우가 알 바 아니었다.

“아, 차 주임. 여자 친구분은 잘 계신가? 전에 병실에서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못 했네.”

“아⋯, 전 여친입니다.”

현우가 ‘전’을 강조하자 이미 다 알면서도 물은 승준은 한쪽 입꼬리만 씩 올렸다.

“그래요? 꽤 가까워 보이던데.”

“그냥 친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흠, 보통 그냥 친구랑 그러던가? 하긴 뭐 사람마다 다르니까.”

일부러 초원의 앞에서 현우의 켕길 구석을 끄집어내어 확인 사살을 해 준 승준은 영전에 술을 올리는 마음으로 현우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이내 두 남자의 타오르는 시선이 부딪혀 불꽃을 튀기기 시작하고, 잠자코 있던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 말이⋯. 그냥 친구 사이가 보통 그래?’

딴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며 오매불망 연주 바라기이던 남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초원은 실망스러웠다. 한 여자만을 향하는 그 애틋한 연정이 아름다워서, 나도 저런 남자의 사랑을 받아 보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서 현우에게 마음을 품은 것도 있는데, 초원에게 남자 친구가 생긴 걸 알자마자 이렇게 돌변하다니.

‘뭐야? 자기가 갖긴 싫고 남 주긴 아까웠던 거야?’

초원은 남자 보는 눈이 더럽게도 없었던 과거의 자신을 속으로 쥐어박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현우가 잘 익은 삼겹살 몇 점을 집어 초원의 접시에 놓고, 그걸 승준이 냉큼 집어 명이나물 장아찌로 감싸더니 초원에게 내밀었다.

“아-.”

초원은 현우의 눈치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승준은 늘 그렇듯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맛있어요?”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승준은 흐뭇하게 바라보고, 그런 두 사람을 현우는 굳은 얼굴로 응시했다.

“그런데 난 이 장아찌 장모님이 해 주신 게 더 맛있던데.”

현우는 혼란스러웠다.

벌써 그렇게 깊은 사이인 걸까? 그에게 초원이 했던 말은 다 무엇이었을까?

현우는 며칠 전 식당에서 승준이 옆에 앉았을 때처럼 초조해 보이는 초원의 얼굴에 희망을 걸어봤지만, 소주를 한 잔 들이켠 그녀는 이내 어렴풋한 웃음을 얼굴에 띠고 승준을 흘겨보고 있었다.

‘으이그, 진짜. 이 남자 이러려고 밥 사 준다고 한 거야?’

초원은 클리셰 범벅인 소설을 읽듯이 그 속이 빤히 읽힌다는 눈빛을 승준을 향해 쏘아댔지만 이 남자는 모르는 일인 척 능청스럽게 웃어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질투와 견제는 귀여웠다. 그리고 오늘 절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잘한다고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 줘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고기를 더 시키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불판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점을 초원의 접시에 올려 준 승준이 물었다.

“초원 씨, 밥? 냉면?”

“초원 씨는 삼겹살 먹고 냉면 안 먹어요.”

또 현우가 도발을 하고 나섰다. 그래봤자 남자 친구도 아니고 직장 동료일 뿐이면서 이 여자는 자신이 더 잘 안다는 듯 구는 현우를 보며 승준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차 주임한테 물었나?”

살벌한 분위기에 초원은 다 씹지도 못한 삼겹살을 꿀꺽 삼키고 끼어들었다.

“됐어요. 안 먹어도 돼요.”

사실 아직 배가 덜 차 더 먹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현우의 말대로 밥을 먹는다고 하면 승준의 자존심이 상할 테고 그렇다고 차가운 냉면을 억지로 먹긴 싫었다.

“안 먹어도 되긴⋯. 밥 먹어요.”

현우와 혹한의 서릿발이 휘날리는 눈싸움을 벌일 땐 언제고 어느새 초원을 향하고 있는 승준의 눈빛이 봄날처럼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추운데 고생 많이 했겠네.”

승준은 종업원에게 식사를 시키더니 발그레하게 익은 초원의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다리 안 아파요?”

“아깐 좀 아팠는데 이젠 괜찮아요.”

“그럼 내일 더 아플 텐데? 밥 먹고 집에 가서 주물러 줄게요.”

초원의 뺨을 쓰다듬는 손에서 반짝이는 은빛 시계가 현우의 시선을 붙잡았다. 여자 친구가 사 줬다고 승준이 자랑하던 그 시계. 그리고 반년 전 즈음, 초원이 선물할 생각이라며 진열장 너머로 바라보던 그 시계.

맥이 빠졌다.

이걸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초원은 그때도 팀장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구나. 그걸 가장 가까운 사이라 생각했던 그도 눈치 못 챌 정도로, 그렇게 철저히 이 여자는 숨겨 왔구나.

‘하⋯, 나 정말 한심하네.’

초원은 애초에 그에게 마음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변해 버렸다며 자신이 뭘 잘못하기라도 했나 고민한 시간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의 관계를 오해했던 시간은 더 한심하고.

왜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연인은 아니더라도 서로 없인 못 사는 끈끈한 관계라고 믿은 건 자신뿐이었는지 몰래 비밀을 키워 온 초원에게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이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은 건지 마주 보고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연인을 응시하며 현우는 쓰디쓴 소주를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초원은 거울에 서린 김을 닦으며 칫솔을 바쁘게 움직였다. 거울을 보며 혀를 길게 뺀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칫솔을 혀 위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늘 냄새 제발 좀 사라져라.’

입을 헹구고 새 타월을 집어 샤워 부스에서 나오는 승준에게 내밀었다. 온몸의 물기를 닦은 그는 빨래 바구니에 타월을 던져 넣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초원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서서히 찔러오는 물건에 슬슬 반응이 올 법도 한데, 이 여자는 얼굴에 무언가를 열심히 찍어 바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뒤에서 끌어안고 한참을 구경하던 그는 들으라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곤 초원의 머리를 감은 타월을 풀어 젖은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아, 그 말을 안 했네.”

“응?”

“소문내지 말란 말요. 선배가 소문내면 어떡해요?”

승준은 타월로 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마요. 절대 소문 안 낼 거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소문나면 우리는 잃는 것도, 얻는 것도 있지만 그놈은 잃는 것뿐이거든.”

“어째서요?”

“초원 씨 딴 팀 가니까 파트너 잃지. 우리는 그 김에 대놓고 사귈 거고 사람들 다 아는데 그놈이 초원 씨 뺏어가려 할 수 있겠어요?”

예전이라면 현우가 자신을 돌 보듯 하는데 헛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줬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진짜, 뒤늦게 왜 저래?’

멋모르고 두 사람의 사이에 껴 치이고 있던 건 알고 보니 초원이었다.

***

인적이 드문 산길,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바스락 소리에 놀란 다람쥐가 손에 든 도토리를 입속에 쏙 집어넣더니 재빠르게 나무 위로 사라졌다.

이내 산길 아래쪽에서 검은 패딩 후드를 뒤집어쓰고 검은 마스크까지 낀 남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성큼성큼 뛰어 올라왔다.

낡은 은색 봉고차 한 대가 서 있는 작은 공터가 가까워지자 남자는 속도를 늦추고 발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나가는 등산객인 양, 차 뒤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지나치던 남자는 차 안이 빈 걸 확인하더니 다시 걸음을 돌려 다가왔다.

남자는 주변을 급히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잽싸게 차 옆에 쪼그려 앉았다. 줄곧 주머니 속에 박혀 있다 나온 오른손에는 성냥갑만 한 검은 물체가 들려 있었다. 남자가 가운데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가장자리에 초록불이 반짝였다.

남자는 그 손을 차 아래로 불쑥 집어넣으며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손은 비어 있었다.

짤랑 소리에 초원은 고개를 식당 입구로 돌렸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우는 뛰어왔는지 허연 입김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설치했어요?”

“네.”

주지 스님의 차에 GPS 추적기를 무사히 설치하고 돌아온 현우는 온돌 바닥으로 올라와 초원의 옆에 앉았다.

“별일 없었죠?”

현우의 물음에 초원은 고개를 저으며 왼쪽 귀에 낀 이어폰을 매만졌다. 주지의 핸드폰을 이용해 절 내부를 도청하고 있었지만 생활 소음과 닭 우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 대화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이고, 총각도 같이 왔네.”

초원이 저번과는 다른 남자와 식당을 찾자 ‘이 아가씨, 그새 남친을 갈아치웠나.’ 하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차던 식당 주인은 오해한 게 멋쩍어 괜스레 현우를 반갑게 맞았다.

아주머니가 초원의 새 남친으로 오해한 사람은 일산 연구소 신경과학팀에 있는 연구사일 뿐이었다.

두부전골 냄비를 버너 위에 내려놓고 가려는 아주머니를 초원이 붙잡았다.

“이모님, 잠시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뭔데 그래?”

초원은 가방에서 얇은 플라스틱 폴더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꺼내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혹시 이 중에 본 적 있는 얼굴 있으세요?”

피해자들의 생전 사진이었다. 템플스테이가 있을 때 절밥을 지으러 절에 간다고 했으니 분명 이 중에 본 얼굴이 있을 터였다.

아주머니는 팔을 뻗어 사진을 멀찍이 들고는 눈을 찌푸렸다. 그렇게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겨보더니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백인들은 다 똑같이 생겨서 말이지. 언놈이 언놈인지 모르겠네.”

초원은 실망이 잔뜩 섞인 한숨을 내쉬며 사진을 다시 돌려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아, 이 아가씨는 알겠네.”

식당 주인이 들어 보이는 사진은 일본인 피해자의 것이었다.

“절에 왔었어요, 이 여자분?”

“응, 언제 왔더라? 가물하네⋯.”

“혹시 여름 아니었나요?”

현우의 말에 아주머니는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응, 맞아 맞아. 내가 이 아가씨를 기억하는 게, 정화가 원래 사람을 안 따르는데 이 아가씨랑은 잘 놀더라고.”

“정화요?”

“그 스님이 키우는 애 말이야.”

초원은 남자아이치고 이름이 특이하다 생각하며 수첩을 꺼내 새로 얻은 정보를 기록했다.

“근데 이건 왜? 아가씨 경찰이야?”

그 말에 초원이 겸연쩍은 미소를 짓고, 약속이라도 한 듯 맞은편에 앉은 연구사가 아주머니를 향해 몸을 틀었다.

“자, 어머님. 제 눈을 봐주세요.”

“응?”

“어머님은 지금 마음이 아주 편안합니다. 온몸의 힘을 빼고 제 목소리에 집중합니다.”

누군가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서는 안 됐다. 조금 전 사진을 본 기억을 지우려 최면을 거는 단조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초원은 숟가락을 들었다.

“어머님은 지금 고요하고 잔잔한⋯.”

‘⋯호숫가에 서 있습니다. 홍초원 씨,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너무 아파요. 제발 다 잊게 해 주세요.’

쨍그랑, 숟가락이 상 위로 떨어졌다.

연구사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가게 앞 연석에 쪼그려 앉았다.

“안 추워요?”

급하게 나오느라 목도리도, 장갑도 챙기지 못한 초원의 얼굴과 손끝이 빨갛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넋이 나가 보이는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현우는 초원이 입은 패딩의 모자를 머리에 푹 눌러 씌우고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길 저편 담벼락 뒤에서 광기 어린 눈빛이 지켜보고 있었다.

***

“이럴 땐 시골이 좋네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초원의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추우니까 적당히 보고 들어가요.]

‘무슨 남자가 이렇게 감성이 메말랐어?’라고 속으로 투덜대던 초원은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하늘을 향해 들었다. 영상 통화 버튼을 누르자 희미한 미소를 띤 승준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초원은 높이 든 핸드폰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보여요?”

[아니. 그냥 다 새카만데?]

“힝, 보여 주고 싶은데⋯. 폰 카메라로는 잘 안 나오네.”

[별은 됐으니까 초원 씨 얼굴이나 보여 줘요.]

초원은 전등 빛이 밝히고 있는 펜션 현관 계단에 쪼그려 앉아 카메라 전환 버튼을 눌렀다. 이제 얼굴이 보이는지 승준의 눈에 서려 있던 피로가 걷히기 시작했다.

“올래요?”

오늘 당직인 초원은 작전 본부로 쓰이는 절 근처 펜션에 발이 묶인 신세였다.

[하⋯, 나도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여기도 일이 많아서⋯.]

넥타이는 풀었지만 여전히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그의 어깨 뒤로는 팀장실 창턱에 놓인 난초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중에 우리 은퇴하면 시골 가서 살까? 넓은 마당에 큰 개도 키우고 밤 되면 나란히 누워 별도 보면서.]

“나중에 늙으면 아파트가 최고네 뭐 이렇게 딴소리하기 없기예요.”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고요하던 마당을 울렸다.

[누가 할 소릴⋯.]

승준은 웃다 말고 목이 뻐근한 듯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기 시작했다.

“오늘 다 해야 하는 일이에요? 아니면 적당히 하고 들어가서 일찍 자요. 피곤해 보이는데⋯.”

[반겨줄 사람도 없는데 집에 가서 뭐 하게.]

초원은 승준의 집에 있는 지박령이 반겨 줄 거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귀신이 산다는 걸 알면 누가 집에 가고 싶어 하겠는가.

[그나저나 매일 같이 자기로 약속해 놓고는 벌써 어기네.]

“그건 우리 팀장님한테 가서 따져야죠.”

[참나, 경기지청에 보낸다는 거 꾸역꾸역 맡은 사람이 누구였더라?]

“아, 난 불만 없어요. 내 말은 불만 있는 사람이 가서 따지란 거죠.”

못마땅한 듯 가늘게 뜨여 있던 승준의 눈이 초원의 천연덕스러운 눈웃음을 따라 휘어지기 시작했다.

[나 무서워서 혼자 못 잘 것 같은데⋯.]

초원은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다 큰 어른이 무슨⋯.”

[진짠데. 나 잘 때 전화할 테니까 자장가 불러 줘요.]

“하하하, 자장가! 나 ‘잘 자라, 우리 아가’밖에 모르는데⋯.”

[그럼 그거 불러 주면 되겠네.]

“아니, 딱 그 부분밖에 모른다고요.”

엉뚱한 대답에 승준은 고개까지 뒤로 넘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릴 때 안 배웠어요?]

“오래돼서 다 까먹었죠, 이젠.”

까먹은 것. 대체 초원은 자장가 말고 또 무엇을 잊은 걸까?

“있잖아요. 좀 뜬금없는 질문인데⋯.”

[응?]

“만약에 특관청 직원이 기억 억제를 받으면 그것도 기록에 남아요?”

초원은 전화 연결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말없이, 미동 없이 있던 승준이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서야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안도했다.

[어⋯, 기록은 남는데⋯.]

승준은 말끝을 흐리며 콧잔등을 긁기 시작했다.

[본인은 열람 금지고 남의 것도 보안 2등급 이상이어야만 가능하고⋯.]

“흠⋯, 그래요? 그럼 승준 씨는 기록 볼 수 있는 거네요?”

[어⋯, 근데 그건 왜?]

달싹이던 초원의 입술이 잠잠해졌다.

눈앞으로 하얀 방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미워 죽을 만큼 사무적이던 연구사의 표정과 말투. 튜브를 타고 정맥 속으로 들어가던 억제제가 만들어낸 뻐근한 통증. 그리고 천장에 달려 있던 종이학 모빌. 누굴 놀리려고 달아 놓은 걸까? 무엇 때문에 그 모빌을 보고 화가 난 건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데 그 분노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 기억 억제는 왜 받은 걸까? 난 뭐가 그렇게 잊고 싶을 정도로 아팠던 걸까?’

그 답은 기록 속에서 구할 수 있겠지만, 두려웠다. 잊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던 기억이라면 묻어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걸 승준이 알게 되는 건 더 끔찍했다.

“그냥요. 오늘 기억 억제술 하는 거 보니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런데 지금 개체 감시는 차 주임이 하고 있어요?]

“네. 흠, 나 너무 오래 땡땡이치고 있었네.”

초원은 굳게 닫힌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얼른 들어가 봐요.]

“네, 자기 전에 전화해요.”

[응, 초원 씨도⋯. 아, 자면 안 되지.]

당직이니 새벽 내내 절을 감청하고 주지의 핸드폰과 차가 움직이지는 않는지 감시해야 했다.

“그럼 우리 팀장님이 가만 안 있으실 텐데요?”

능청스러운 공사 구분에 승준은 또 두 눈을 휘며 아빠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

초원은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카메라를 향해 입술을 내밀고 쪽 소리를 냈다.

“별일 없었죠?”

감시용으로 배정된 작은 방의 문을 열고 초원이 들어오자 구석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말 그대로 절간처럼 조용하네요.”

“흠, 말을 이렇게 안 하고 살기도 힘든데⋯.”

설마 도청당하는 걸 눈치채고 핸드폰을 피해 대화를 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의심병이 지독하게 심하지 않고서야 그걸 눈치채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여태 주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지금까지 수집한 증거면 며칠 내에 격리가 가능할 듯했다.

초원은 손에 들고 있던 병 커피 하나를 현우에게 건네주곤 옆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앉을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발치에 놓인 테이블 위의 노트북 화면에는 목표 개체의 핸드폰과 자동차 위치를 보여 주는 빨간 점이 깜빡이며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어색함이 초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현우가 차라리 핸드폰으로 게임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바쁜가 보다 했을 텐데 핸드폰은 옆으로 치워진 지 오래였다. 핸드폰 주인은 커피를 홀짝이며 노트북 뒤편의 흰 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침묵을 깨야 자연스러울지 한참을 고민하던 차에 갑작스레 현우가 말을 걸었다.

“팀장님이 초원 씨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침묵을 사르르 녹이는 방법이 있고 와장창 깨트리는 방법이 있다면 현우가 택한 건 후자였다.

초원은 대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현우 쪽을 곁눈질할 뿐이었다.

“초원 씨는?”

“네?”

“팀장님 사랑해요?”

“그럼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을 내어놓는 초원을 향해 현우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 숨도 안 쉬고 대답하네요.”

또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두꺼운 벽을 만들고 있었다.

“결혼할 거예요?”

“하고는 싶지만⋯.”

사람들의 축하와 가족의 인정을 받으며 결혼해 알콩달콩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난 초원 씨 결혼 안 했으면 좋겠어요.”

“네? 왜요?”

대체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으려는 건가 싶어 눈살이 찌푸려졌다.

“팀장님이랑 결혼하면 다른 팀 가야 하잖아요.”

“아⋯.”

생각했던 것만큼 엄청난 헛소리는 아니었다. 초원은 긴장을 조금 풀고 벽에 세워둔 베개에 등을 기대었다.

“선배가 입만 다물어 주면 그럴 일 없겠죠.”

“비밀 지켜줄 테니까 걱정 마요. 초원 씨가 다른 팀으로 가는 건 누구보다 내가 싫으니까.”

초원은 역시나 승준이 잘 간파하고 있었구나 감탄하며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난 초원 씨가 항상 내 옆에 있어 줄 줄 알았어요. 바보 같죠?”

현우는 술병을 쥐고 해야 할 고백을 커피 병을 쥐고 하고 있었다. 유리병에 그려진 인어마저 그를 바보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같은 사이라도 내 옆에 계속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현우는 대답을 원하는 듯 물끄러미 응시했지만 초원은 더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입에 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저번에 절에서 그 일은 미안해요. 내가 초원 씨를 오해한 것 같아요.”

“무슨 오해요?”

“초원 씨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 줄 알았어요.”

커피 병을 입술 위로 기울이던 초원의 손이 불현듯 멈췄다. 언제를 말하느냐에 따라 따지고 보면 오해가 아닐 수도 있었다.

“초원 씨가 병실에 매일같이 찾아와 주고 날 살리려고 애써준 거, 내 멋대로 초원 씨가 날 좋아해서 그런다고 착각해 버렸어요.”

‘그래, 그때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감정의 파편이 남아 있기는 했지.’

초원은 멍하니 반쯤 빈 커피 병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어렴풋이 끄덕였다.

“사실 난 그때 깨달았거든요. 내가 초원 씨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커피 병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그럼 남 주기 아까워 그런 돌발행동을 했던 건 아니었구나. 차현우라는 사람에게 실망했던 이유가 사라지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초원 씨의 감정도 나 좋을 대로 해석해 버렸나 봐요.”

초원은 긴 한숨을 내뱉고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제 그녀가 솔직해질 차례였다.

“선배⋯.”

“미안해요. 우리 사이에 이런 말 해서⋯.”

“그게 아니라⋯.”

초원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이런 말, 그 일 있기 전에 해 줬더라면 기뻤을 거예요.”

내쉬는 숨에 실어 말을 토해 냈다. 속 시원하게 인정하고 털어 버리고 싶었다. 다 지난 일인데 뭐가 그리 어려울까. 하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 의문이 가득 새겨진 현우의 두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맞아요. 나 선배 좋아했어요.”

“하⋯. 티를 좀 내 주지 그랬어요. 난 전혀 몰랐는데.”

그랬더라면 너무 늦기 전에 제 마음을 깨달았을 수도 있는데. 현우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좋아하면서도 일부러 쌀쌀맞고 무뚝뚝하게 굴며 마음을 숨기려 안간힘을 썼던 초원이었으니 몰랐을 법도 했다.

하지만 다 지난 일이었다. 초원은 현우가 덧없는 희망을 품기 전에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어째서요?”

“선배 깨어난 날, 깨달은 게 있어요.”

초원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그날 밤 일을 떠올리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연주 씨를 봐도 마음이 안 아프더라고요.”

“아, 그날 그건⋯.”

초원은 현우가 필요 없는 해명, 어쩌면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말을 잘랐다.

“선배의 마음속에서 연주 씨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는데 그제야 깨달았죠.”

고개를 들고 현우를 바라보는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난 남의 자리를 대신 채우고 싶진 않다는 걸요.”

“남의 자리라니⋯.”

다시 방 안에 씁쓸한 적막이 감돌았다. 현우가 반박할 말을 고르는 사이 초원은 어떻게 전해야 현우가 이해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렇잖아요. 내가 선배랑 만났어도⋯.”

고민을 먼저 끝낸 건 초원이었다.

“⋯선배 마음속의 1순위는 항상 연주 씨였을 거예요. 난 그걸 보며 앓았을 거고 선배랑 나는 불행한 연애를 했겠죠.”

“왜 그렇게 단정해요? 나도 확실히 정리했을 텐데.”

“그래도 난 혼자서 불안해했을 거예요.”

달리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입속으로 감도는 쓴맛은 커피 탓일 거라고 현우는 자신을 속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 병만 기울이며 조금 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는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초원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누구인지는 안 물어도 뻔했다.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고 핸드폰 화면 위로 열심히 손가락을 놀리는 그녀를 현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하필 팀장님이에요? 다른 남자들한테는 꿈쩍도 않더니⋯.”

“팀장님은 다르니까요.”

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돌아보는 초원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웃어도 나 때문이고 화를 내도 나 때문이고.”

바보같이 웃는 얼굴도, 그보다 더 바보같이 화내는 얼굴도 하나같이 귀여웠다. 그 의외의 매력을 항상 무표정한 가면 속에 숨기고 다니다가 자신과 있을 때만 벗어던지고 발산하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 앞에서 초원은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가 된 우쭐함마저 느끼곤 했다.

“사랑인지 아닌지 의심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얼굴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이 남자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절절하게 느껴지니까.”

초원은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야식 사다 줄게요.]

[멀고 피곤하잖아요. 얼른 집에 가서 자요.]

[뭐 먹고 싶은지 얘기해요. 안 그럼 빈손으로 갈 거예요.]

떨어져 있는 지금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차가운 기계와 일견 차가워 보이는 말투 너머로 따뜻한 애정이 진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치킨! 치킨! 반반 무 많이! +_+]

초원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함께 있는 순간마다 내가 얼마나 운 좋은 여자인지 감탄하게 된달까⋯.”

초원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현우에 대한 지난 마음을 고백할 때 씁쓸하고도 담담하던 그 눈빛은 승준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자취를 감췄다는걸. 꿈꾸는 열아홉 소녀처럼 반짝이는 저 눈빛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이었다.

“내가 보기엔 팀장님이 운 좋은 남자네요.”

저 눈빛이 자신을 향했던 적도 있었을까? 현우는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커피를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난 항상 잡히지 않는 것만 쫓는 바보고요.”

더는 커피 탓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씁쓸함에 현우의 심장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