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28)

지극히 흔한 연애

본청 사무실 전체가 크리스마스이브의 분위기에 젖어 들떠 있었다. 설령 솔로라 해도 빨간 날이 싫은 직장인은 있을 턱이 없으니.

퇴근을 5분 앞둔 5시 55분, 복도를 지나는 얼굴은 하나같이 싱글벙글이었지만 커피 가득한 머그잔을 들고 탕비실을 나서는 생물3팀 팀장만은 늘 그렇듯 저승사자 상이었다.

3팀 사무실로 들어오던 승준은 습관대로 초원의 자리에 시선을 던졌다. 평소라면 눈치채고 잠시라도 눈을 마주쳐 주었을 여자는 묵묵히 노트북 모니터만 응시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승준은 씁쓸한 얼굴로 팀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머, 이런 날은 여자 친구랑 보내셔야지 또 야근이세요?”

퇴근 인사를 하러 팀장실 문을 두드린 희경에게 승준은 대답 대신 쓰게 웃었다.

‘그러게⋯. 지금 그 말 홍 주임한테 가서 해 주지?’

희경이 나가자 팀원들이 하나둘씩 팀장실 앞을 지나치며 인사를 해 왔다. 내심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해 버리고 초원과 단둘이 남길 바랐던 승준은 유리 너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익숙한 실루엣을 보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 무미건조한 인사에 울컥한 그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때도 장소도 아니었다.

대답이 없자 초원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 숙이더니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승준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전화로 다퉜던 다음 날 초원은 출근하지 않았다.

“홍 주임은?”

출근 전 자취방에 다시 들렀지만 전날 밤처럼 초원의 머리카락조차 보지 못한 그는 사무실에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자 진이 빠졌다.

“아, 초원 주임님 아까 전화 주셨는데요. 두통이 심해서 오늘 출근 못 하실 것 같다시네요.”

그 말에 팀장실로 들어와 다시 전화를 해 봤지만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은 또 꺼져 있었다.

그날은 그답지 않게 마음이 종일 콩밭, 정확히 말하자면 풀밭에 가 있는 하루였다. 종일 미친놈처럼 핸드폰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 전화를 하고 또 했지만 초원의 핸드폰은 한시도 켜져 있는 틈이 없었고 점심도 포기하고 찾아갔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다.

인내심이 극에 달한 그는 별것 아닌 일로 이번 일의 원흉을 쥐 잡듯 잡았다. 다들 종로에서 뺨 맞은 팀장이 엉뚱하게 현우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승준은 뺨 때린 놈을 잡는 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갔던 윗사람들과의 송년회가 끝난 늦은 밤, 습관처럼 터덜터덜 초원의 자취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창문이라도 깨 버리면 나오려나?’

원룸 건물 앞에서 굳게 닫힌 검은 창문을 올려다보던 승준은 던질 돌이라도 있나 싶어 둘러봤지만 길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 열릴 걸 뻔히 알면서도 도어락으로 손을 가져갔다. 비밀번호를 이미 외운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띠리릭.

어쩐 일인지 이번엔 문이 열렸다.

천천히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했지만 창밖의 가로등 불빛 덕에 실루엣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방은 비었나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설마 집에 없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집주인은 집에 있었다. 승준은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베개를 끌어안고 죽은 듯 자고 있는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침대 옆 서랍 위에는 반쯤 빈 물컵과 진통제, 그리고 생일 선물로 준 목걸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몸을 숙여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랐는지 초원이 몸을 움찔하더니 베개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마는 뜨겁고 축축했다. 승준은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 넘겼다.

“많이 아파요? 병원은 갔다 왔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그는 한숨을 내쉬곤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수건이 이마에 닿자 잠시 움찔했을 뿐 초원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승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이마에 얹은 물수건을 붙잡고 있었다.

“약은 먹었어요?”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서랍 위의 진통제 포장만 봐도 그건 알 수 있었다. ‘네’, ‘아니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세요.’든 뭐든 좋으니 대답을 듣고 싶었는데 초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는 게 이런 뜻이군.’

“밥은?”

이번에는 정말 궁금해서 어깨까지 흔들며 물었지만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빈속에 약 먹으면 안 되는데. 죽 끓여 줄까요?”

어깨에 얹었던 손을 등으로 옮겼더니 셔츠가 축축했다. 차갑게 젖은 옷을 입고 있다가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 되었던 그는 초원이 안고 있던 베개를 뺏고 셔츠 단추로 손을 가져갔다.

“아, 나는 그게 아니고⋯.”

찰싹 맞은 손등이 쓰라렸다. 그제야 눈을 뜬 초원이 잠시 흘겨보더니 다시 베개를 끌어안았다.

“땀 너무 많이 흘려서 잠옷 다 젖었는데⋯. 이거 입고 자다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잘 거면 이거부터 갈아입고 자요.”

“팀장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응?”

드디어 초원이 입을 열자 승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머리 깨질 것 같아요.”

“병원 갈래요?”

“아뇨.”

“왜?”

“좀 조용히 해 주세요.”

승준이 말을 할 때마다 머릿속이 울렸다. 살짝 얼굴을 찡그린 초원은 물수건을 쥔 그의 손마저 밀어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사실 그녀의 두통을 없애는 특효약을 알고 있는 그였지만, 옷을 벗기려다 한 대 맞은 이 분위기에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변태 취급을 당할 게 분명했다. 결국 입을 꾹 다문 승준은 옷을 갈아입히는 걸 포기하고 이불을 단단히 덮어 주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한참을 초원의 얼굴만 내려다보았다. 다시 잠이 든 건지 숨소리가 잠잠했다.

어떻게든 사과를 하고 오해도 풀려고 왔는데 그녀는 그걸 받아 줄 상태가 아니었다. 어젯밤 초원이 연애가 피곤하다고 했을 때부터 그를 괴롭히던 초조함에 숨이 막혔다.

손에 쥐고 있던 물수건을 서랍 위에 놓은 그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꽃구경이라도 실컷 해야지.”

침대가 출렁이는 바람에 눈을 뜬 초원은 벽과 자신 사이의 좁은 공간을 큰 덩치로 비집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엉겁결에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누운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게 화가 많이 난 건 아닌가 보네.’

그는 다시 눈을 감은 초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감상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내가 왜 그랬을까?’

질투는 쉽게 사람을 미치게 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지 얼마 됐다고 아프게 한 자신이 한심했다.

승준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사랑해.”

살포시 입술을 포갰다. 거부할 줄 알았던 초원이 살짝 입술을 벌렸다.

‘화 풀렸구나.’

윗입술이 부드럽게 초원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눈을 감은 채로 은근히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구겨졌다.

“아!”

깨물린 입술이 얼얼했다. 고개를 뒤로 물리자 어느새 눈을 뜬 초원이 노려보고 있었다.

“거짓말.”

“뭐가? 사랑한다는 말?”

초원은 눈을 흘기더니 등을 돌려 버렸다. 쓰라린 입술을 문지르던 승준은 그녀의 등 뒤로 바짝 다가갔다.

“진심인 거 알면서.”

한 팔로 머리를 괸 그는 부루퉁한 얼굴을 한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팀장님이 나 못 믿는 건 괜찮고 나는 팀장님 하는 말 다 믿어 줘야 해요?”

“그게 아니라⋯.”

“나 하나도 안 믿으면서 사랑 좋아하시네.”

초원의 두 눈이 질끈 감기더니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서럽게 흐느끼는 소리에 승준의 가슴이 미어졌다.

“초원 씨⋯.”

뒤에서 끌어안았지만 초원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내가 잘못했어요.”

승준을 뒤로 밀어낸 초원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남의 여자 뺏어 온 것 같다니⋯. 지금까지 그런 기분으로 날 만난 거예요?”

몸을 일으킨 승준은 원망 가득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초원의 젖은 눈가를 손으로 훔쳤다.

“어젠 제정신이 아니어서 하면 안 될 소릴 했어요. 미안해요.”

“그래도 하고 싶었던 말 아니에요?”

초원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던 그는 곤란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냥 난 아직 마음이 안 놓여서⋯.”

목숨까지 걸 정도로 딴 사람을 좋아했던 여자가 갑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활짝 연 것이 못내 기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내가 그렇게 애매하게 굴었어요?”

초원의 두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아니, 초원 씨 잘못이 아니고⋯.”

다시 끌어안으려는 승준을 초원은 밀어냈다.

“난 진심으로 팀장님만 보고 있었는데⋯.”

어젯밤 승준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던 초원은 모든 게 허무해져 하루 종일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의심해서 미안해요.”

“나 진짜 그 사람이랑 연애 금지 규정 어길 만한 짓 안 했어요.”

억울함이 북받친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울기 시작했다.

“알아요. 미안.”

달래려고 다가가던 그는 다시 뒤로 밀쳐졌다.

“알긴 뭘 알아요? 아는 사람이 어제 그런 소릴 했어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하는 초원을 달래려 손을 들던 승준은 대신 서랍 위에 놓인 티슈 갑을 집어 건네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초원 씨 기분이 나아질까? 응?”

안아 주지도 못하게 하는 초원에게 뭐든지 하겠다는 간절함을 담아 물었다.

“내 기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티슈를 한 뭉텅이 뽑은 초원은 눈물을 닦더니 승준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집에 가세요.”

알아서 한다더니 며칠이 지난 지금도 초원의 기분은 그대로였다.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의미 없는 야근을 하던 승준은 고개를 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서울역을 밝히고 수많은 인파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저녁은 챙겨 먹었을까?’

[저녁 맛있게 먹었어요?]

쓰긴 했지만 보내진 못했다. 승준은 날짜가 12월 22일인 마지막 메시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혼자 있게 해 주세요.]

한숨을 쉰 그는 화면에 손가락을 대고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이브 날 같이 저녁 먹고 장 보러 갈래요?]

[나 시간 좀 주면 안 돼요?]

[무슨 시간?]

[감정 정리할 시간이요.]

그날 이 답장을 받고 심장이 철렁했다. 감정 정리라니 꼭 헤어지려고 마음먹은 사람 같지 않은가.

[무슨 감정?]

[혼자 있게 해 주세요.]

‘감이 안 좋아.’

이걸 다시 읽고 있자니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승준은 빈 머그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비실에 우두커니 서서 커피 머신이 멈추기만을 기다리는데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에 뜬 메시지를 확인하던 얼굴에 흥분과 긴장이 교차했다.

[끝이 안 좋을 걸 알아도 연애할 거예요?]

탕비실 테이블 앞에 앉은 그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왜 끝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어. 나는 할 건데.]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요?]

‘겪어 봤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땐 결말이 아플 걸 다 알고도 사랑해 놓고 이번에는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때의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어 두려운 걸까?

[인생도 그렇잖아요. 죽는 거 알고 시작하는 거. 이승에서의 기억도 인연도 다 버리고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래도 다들 살아가잖아.]

[태어나는 건 선택권이 없잖아요.]

[사랑도 똑같잖아요. 선택권이 어딨어? 나도 모르게 빠지는 거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초원은 답이 없었다. 승준은 기다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써 내려갔다.

[우리 끝이 어떨지 누가 알아요? 새드엔딩일 것 같다고 여기서 끝내면 그건 해피엔딩인가?]

이번엔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한 그였다.

[적어도 덜 아프겠죠.]

승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초원의 머릿속에서 이 연애는 슬픈 결말을 내린 모양이었다.

[한 번 생각해 봐요. 10년 20년 지나서 이번 일 생각하면 ‘그때 우리 왜 그랬지?’하고 웃음밖에 안 나올걸? 이 손 안 놓길 잘했다면서 둘이서 손 꼭 잡고]

잠시 조용하던 초원이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뭐 해요?]

[야근]

[왜요?]

[그냥]

또 답장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답장하기도 애매한 답을 했다 싶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은 챙겨 먹었어요?]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여기에도 한참 답이 없었다. 한숨을 쉰 그는 다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물로 세수를 한다고 답답한 속이 시원해지진 않았다. 얼굴에서 뚝뚝 흐르는 물을 종이 타월로 거칠게 닦아 낸 승준은 화장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텅 빈 복도를 지나 3팀 사무실로 들어가 팀장실 문을 벌컥 열던 그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언제 온 건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초원이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그녀를 보고 승준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감이 안 좋아.’

“뭐 해요?”

의아한 얼굴로 초원이 물었다. 우두커니 문간에 서 있던 승준은 그제야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체 무슨 용건으로 갑자기 찾아온 건지 가늠해 보려 해도 저 차분한 얼굴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올 게 온 건가?’

문자로 한참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여기로 찾아온 이유는 뭘까? 꼭 얼굴을 보고 해야 하는 이야기라면 좋은 소리일 리 없을 듯했다.

자리에 앉은 그는 깍지 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린 채로 선고를 기다리듯 눈앞의 여자를 응시했다.

초원은 희미하게 웃더니 용건을 꺼냈다.

“줄 게 있어서요.”

그 말에 승준은 그녀의 목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목걸이는 여전히 그곳에 매달려 반짝이고 있었다.

‘설마 돌려줄 거면 목에 걸고 오진 않았겠지?’

초원이 손을 들어 올리더니 책상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작은 종이 백을 한가운데로 밀었다. 정신이 없어 그런 게 책상 위에 있는 줄도 몰랐던 승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설마 헤어질 남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진 않겠지?’

나쁜 예감이 점점 틀려 가는 듯했다.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하는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초조히 떨렸다.

“설마 이거 이별 선물 뭐 이런 건 아니죠?”

종이 백에 든 검은 상자를 꺼내며 미심쩍은 듯 묻자 초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게 아니고, 이거 원랜 생일 선물인데⋯.”

“생일 선물?”

생일은 6월인데 어째서 반년이나 묵혀 뒀다 주는 건지 물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때 어쩌다 보니 못 줘서⋯.”

어쩌다 못 주게 됐는지 떠올리는 초원의 목덜미가 어렴풋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선물을 풀어 보기도 전인데 승준은 감격한 얼굴이었다. 조심스레 상자를 연 그는 반짝이는 은빛 시계를 가만히 어루만지다 고개를 들었다.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얼굴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응, 당연하지.”

싱글벙글 웃는 그를 보며 초원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이 목걸이 값의 10분의 1조차도 안 되는 시계가 뭐가 그리 좋을까? 그보단 그걸 사 준 사람이 좋아서 저렇게 웃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게 아렸다.

‘이 사람은 정말 나 하나로 일희일비하는구나.’

그러는 초원도 어느새 이 남자 하나로 일희일비하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깊어진 후에 빠져나오려 질척이다 넘어져 만신창이가 되기 전에.

이 남자가 한 말이 그렇게나 아팠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마음을 열고 싶었는데 언제 이렇게 활짝 열어 버린 걸까?

승준이 며칠째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앓는 걸 보니 고소하면서도 마음이 짠했다. 그러다가 흔들림 없이 10년, 20년 후를 이야기하는 이 남자의 말에 저도 모르게 설렜다.

‘나도 진짜 바보네.’

흔하디흔한 보통의 연애처럼 별것 아닌 일로 지독하게 싸우면서도 꼭 붙잡은 손을 놓지 않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미 빠져나오긴 늦었어.’

이제 경우의 수대로 책상 서랍 속에서 민트색 반지 케이스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엉뚱한 상상에 홀로 웃던 초원은 승준의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근데 이거 못 받겠는데?”

‘헐, 이건 그 마지막 경우의 수!’

마지막 경우의 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떠올린 그녀의 입술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아, 망할. 오늘 곰돌이 팬티 입었는데.’

기껏 통장을 털털 털어 가며 예쁜 속옷 다 마련해 놓고 이런 날 유치찬란한 걸 입고 온 자신이 원망스러워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었지만, 초원은 침착하게 정해진 대사를 뱉었다.

“⋯왜요? 김영란법⋯ 때문에요?”

“아니, 우리 사이에 무슨⋯.”

승준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상자를 닫았다.

“다른 거로 바꿔 줄 수도 있는데⋯.”

초원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다리를 배배 꼬았다. 이제 승준이 몸으로 받겠다며 벌떡 일어나 초원의 허리를 휘감을 차례였다.

“그게 아니라 지금은 크리스마스가 아니잖아. 같이 있다가 12시 땡 하면 줘요.”

“아⋯.”

오늘 밤은 안 보내 주겠다고 나름 머리 써서 한 말인데 어째선지 초원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왜 그러냐는 듯 눈빛으로 묻는 승준을 향해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 둔 코트를 집어 든 승준은 엉거주춤 서 있는 초원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래서 감정 정리는 다 끝난 거예요?”

은은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그의 목을 옥죄어오던 초조함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헤어지자고 할까 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승준은 다시는 안 놓을 기세로 초원을 꽈악 끌어안았다.

“내가 잘못했어요. 다신 초원 씨 아프게 안 할 테니까 다신 이렇게 겁주지 마요.”

“흐음, 하는 거 보고요.”

“차라리 멱살을 잡든지 한 대 치든지 하고.”

“진짜 그래도 돼요?”

초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넥타이를 있는 힘껏 잡아당겨 다짜고짜 입술 박치기를 해 버렸다.

‘이런 거면 평생 맞고 살고 싶네.’

오랜만에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을 탐하던 그는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별안간 입술을 뗀 그는 초원의 목덜미에 코를 묻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긴장한 초원이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젖은 것 같은데?”

배꼽 근처에 코를 대고 있던 승준이 고개를 들어 음흉한 미소를 짓고, 초원은 시선을 피하며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지금? 여기서?”

승준이 불쑥 일어서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고 바짝 끌어당겼다.

“아, 그건 좀⋯.”

초원은 말끝을 얼버무릴 뿐,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데, 뭐.”

허리를 감은 손을 푼 승준은 팀장실 입구로 걸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팔에 걸쳐 둔 코트를 뒤적이던 그는 지갑에서 네모난 포장지 하나를 꺼내 보란 듯 흔들었다.

언젠가 했던 야한 상상이 현실이 되려 했다. 초원은 눈치 없이 가빠지는 숨을 죽이며 저항 아닌 저항을 했다.

“야근하는 사람 있으면⋯.”

“이런 날 누가 야근한다고⋯.”

그 말에 초원은 그를 향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옷걸이에 코트를 다시 걸던 승준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갔다.

“나는 여자 친구님이 바람맞혀서 그런 거고.”

“흐응, 여자 친구분 너무 하시다.”

제 이야기가 아닌 척 능청스럽게 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승준은 뭔가 좋은 생각이 번쩍 든 듯 씨익 웃었다.

그는 초원을 그냥 지나쳐 자신의 의자로 가 앉더니 책상 위에 널려 있던 서류를 구석으로 치웠다. 어쩐지 쑥스러워 이런 건 잘하지 못하는 그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못 할 게 뭔가. 승준은 초원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흘끗 곁눈질하며 의자에 몸을 기대고 단단히 팔짱을 꼈다.

“이쪽으로 오세요, 홍 주임.”

목소리가 자세 못지않게 위압적이었다. 승준의 손가락은 그와 책상 사이의 좁은 틈을 가리키고 있었다.

‘상황극인가?’

초원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시키는 대로 다가가 책상을 등지고 섰다.

“누가 회사에 이런 걸 입고 오라고 했죠?”

그 말에 초원은 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패딩에 노란 후드 티, 레깅스와 운동화. 회사에 입고 올 차림은 아니었다.

“복장 규정 위반 아닙니까?”

웃음을 참는 듯 승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아싸, 상황극이로구나.’

초원도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급하게 오느라⋯.”

“아무리 급해도 품위는 지켜야지. 당장 벗으세요.”

품위를 지키라면서 벗으라니 모순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초원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웃기 시작했다.

“어? 웃어? 못 벗겠다면 내가 벗겨 주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승준의 손이 옷 속으로 마구 침범해 들어왔다.

“아, 과대 포장 심각하네.”

겹겹이 껴입은 옷을 하나하나 벗기던 승준이 낮게 투덜거렸다. 말투와는 다르게 다정한 손길에 괜히 싫은 척하면서도 몸을 내맡기고 있던 초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댄 승준은 예술작품이라도 감상하듯 앞에 선 여자의 나체를 응시했다. 걸친 거라곤 자신이 준 목걸이 하나뿐.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이 사무실에 눈을 뗄 수 없는 볼거리가 생겼다.

“홍 주임, 진짜 혼 좀 나야겠네.”

갈증이 나는 듯 혀로 입술을 축이는 그의 눈빛이 뜨거웠다.

“윗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 말이지.”

승준은 어느새 지퍼를 뜯고 나올 기세로 부풀어 오른 짐승을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팔로 가슴을 가리고 다리를 꼬아 은밀한 곳을 가렸지만, 온몸을 더듬는 강렬한 시선에 초원의 다리 사이는 촉촉하게 젖다 못해 미끈거렸다.

‘여기서 이 꼴로⋯. 진짜 미쳤어.’

창문에 어렴풋이 비치는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에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앉아요.”

승준이 책상을 가리키자 초원은 머뭇거리며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다리 벌려요.”

초원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지 반항하는 게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당장.”

그녀가 망설이자 승준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내 말이 우습나?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그가 불쑥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두 손으로 무릎 뒤를 단단히 붙들었다. 초원은 반사적으로 허벅지에 힘을 주었지만 그의 손아귀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벌어지고 말았다.

“팀장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저항 같지도 않은 저항을 하며 다리 사이를 가리려 했지만 승준이 손을 가볍게 쳐내고 손가락으로 꽃잎 사이를 훑어 올렸다.

“앗⋯.”

예민한 돌기를 툭 치고 올라온 손가락이 곧장 초원의 눈앞으로 들이밀어 졌다. 고작 한 번 휙 스쳤을 뿐인 손가락 끝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홍 주임, 정말 혼나야겠어.”

그를 이렇게나 원하면서 헤어질 것처럼 굴어서 사람을 힘들게 하다니. 오늘은 저 윗입이 솔직한 소리를 내뱉는 걸 꼭 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아흣⋯.”

“신성한 사무실에서 부적절한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신성한 사무실에서 부하 직원을 발가벗긴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초원은 따질 수 없었다. 손가락이 다시 꽃잎 사이를 가르기 시작했으니.

“누굽니까?”

승준이 몸을 일으켜 바짝 다가오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하아, 네?”

“홍 주임을 이렇게 젖게 만든 남자.”

“⋯팀장님이요.”

“나?”

다 알면서 놀란 척하는 게 티가 나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초원은 애써 참았다.

“홍 주임 안 되겠네. 상사를 가지고 야한 생각을 해?”

“죄, 죄송합니다.”

웃음이 새어 나가기 전에 재빨리 대답하고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내가 어디를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젖었어요?”

“아, 음, 그게⋯.”

아무리 그래도 ‘팀장님이 제 다리를 막 우악스럽게 벌리더니 입으로 막 이렇게 저렇게 했어요.’라고 털어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할 말을 못 찾고 있는데 손가락 하나가 젖은 돌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흐⋯.”

“이렇게 했나?”

초원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건가?”

귓가에 머물던 뜨거운 입술이 순식간에 다리 사이의 살점을 집어삼켰다.

“앗⋯.”

피식 새어 나온 웃음이 연약한 점막을 간지럽혔다.

“맞나 보네.”

어느새 그의 어깨 위에 걸쳐진 초원의 다리가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몸을 지탱하려 손을 책상에 짚었지만 팔이 점점 힘을 잃고 꺾이고 있었다. 그의 촉촉한 혀가 부풀어 오른 곳을 치고 지나갈 때마다 초원의 몸은 조금씩 뒤로 무너졌다.

골반을 붙들고 있던 그의 두 손이 허리를 타고 등으로 올라오더니 무너져 내리는 몸을 단단히 받쳐 들었다.

초원은 승준의 책상 위에 반쯤 눕다시피 한 채로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젖혔다. 그러고 보니 팀장실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천장에 이렇게 시선을 고정해 본 적은 없었다. 고개를 좀 더 젖힌 그녀는 우윳빛 유리 벽 너머를 곁눈질했다.

‘들키면 둘 다 사표각인데.’

유리 너머 어두컴컴한 사무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갑자기 둔덕에 묻혀 있던 입술이 점점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고 손가락 하나가 흠뻑 젖은 꽃잎을 감질나게 훑자 초원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더 달아오를 수도 없을 줄 알았던 얼굴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알몸으로 책상 위에서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여자와 흰 와이셔츠를 말끔히 차려입은 채로 여자의 젖가슴 아래에 얼굴을 묻고 있는 남자. 검은 창문에 고스란히 비친 그 음란한 장면에 초원은 숨을 몰아쉬었다.

승준의 입이 가슴을 한껏 베어 무는 순간 긴 손가락이 속살을 가르고 들어왔다.

“앗⋯.”

손가락은 잔인할 정도로 느렸다. 안달이 난 그녀는 재촉하듯 속살을 조여댔지만 손의 주인은 코웃음을 치더니 손가락을 느릿느릿 돌릴 뿐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초원은 손가락을 따라 허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랫배로 찌르르하게 아찔한 자극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하면 짜릿한 절정에 흠뻑 젖을 수 있겠구나 싶었던 초원의 허리가 빨라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예고도 없이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네?”

초원은 넋도 잃고 나라도 잃은 표정으로 승준을 응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남자는 태연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곰돌이 팬티를 집어 내밀었다.

“지금 장난해요?”

고지가 코앞인데 여기서 멈추자니. 초원은 이성을 상실했다.

“상사한테 말투가 그게 뭡니까, 홍 주임?”

“아아, 팀장님 제발⋯.”

두 팔을 붙잡고 매달리는 초원은 울 지경이었다. 승준은 작전대로라는 듯 한쪽 입꼬리만 살짝 들어 올리더니 여유를 있는 대로 부리며 속옷을 개어 다시 책상에 내려놓았다.

“제발 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지만 어느 곳도 만져 주지는 않았다. 그의 손길에 목말라 안달이 난 그녀의 몸이 작게 들썩였다.

“제발⋯.”

초원의 손이 바지 벨트의 버클을 덥석 잡더니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넣어 주세요.”

애타는 얼굴로 바지 지퍼를 내리는 여자를 보며 승준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초원은 신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단단한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분신이 비좁은 틈을 가르고 들어오고 아랫배가 가득 차는 느낌에 그녀는 몸을 살짝 비틀었다.

“괜찮아요?”

귓가를 더듬는 그 낮은 속삭임에 초원은 어깨에 매달린 채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못해 소름 돋는데⋯.’

파묻혀 있던 물건이 천천히 살을 스치며 빠져나가고 그녀는 몇 달 만에 느끼는 이 강렬한 자극에 몸을 떨었다.

‘이 남자 너무 잘해.’

입구에 머리만 걸릴 정도로 빠져나갔던 것이 다시 빡빡한 속살을 파고들어 왔다. 일부러 그런 걸까? 그의 분신이 가장 예민한 부분을 꾸욱 누르며 들어오자 초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며 옅은 신음을 흘렸다.

역시 노린 건지 승준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부서졌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그랬다. 초원의 몸을 이미 훤히 파악하고 있다는 듯. 이 남자, 어딜 어떻게 자극해야 그녀가 이성을 잃고 넘어오는지를 알아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타고난 걸까?’

승준이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입술을 꼬옥 깨문 초원은 점점 몽롱해져 가는 정신의 끄트머리를 붙들기라도 하려는 듯 흰 와이셔츠 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몸뿐 아니라 책상도 흔들리고 있었다.

‘밖에서 들리진 않겠지?’

거슬리는 삐걱삐걱 소리에 긴장한 초원은 저도 모르게 승준의 넥타이를 손에 감아쥐었다.

“집중해요.”

딴생각을 하고 있는 걸 어떻게 안 걸까? 허벅지를 단단히 쥐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더니 그 손의 주인에게 집중하란 듯 도톰한 젖꼭지를 비틀어대기 시작했다.

“앗⋯.”

초원은 그의 어깨에 입술을 단단히 파묻었다. 책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가는 신음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아랫배를 달구는 마찰열과 귓가를 달구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초원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몸인데도 이 남자의 품에 이렇게 안겨 있으니 추운 줄 몰랐다.

그녀의 입술이 애가 타는 듯 승준의 입술을 찾아 움직였다. 두 입술이 꼭 맞는 퍼즐 조각처럼 포개어지고 초원은 천천히 그 입술을 음미했다.

승준의 혀가 입술을 가르더니 입속으로 밀려들어 오고, 그의 분신을 한껏 머금는 아랫입처럼 그 부드러운 혀를 초원의 입술이 애원하듯 빨아 당겼다.

입술 사이에 머금은 혀가 여린 점막을 훑기 시작하자 기분 좋은 전율이 등을 타고 찌르르 퍼져 나가더니 아랫배 깊은 곳의 속살까지 퍼졌다. 그 전율을 느낀 건지 승준의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입술이 불현듯 멈추고 허리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쾌락에 취해 자제력을 잃고 덤비는 그를 보자 초원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팀장님, 여자 친구도 있으신 분이, 아흣⋯.”

승준이 자제력을 잃는다는 건 곧 초원이 정신을 놓는다는 뜻인 걸 잊었다. 뜨거운 물건이 쉴 새 없이 배 속을 치고 올라오는 통에 말문은 열리자마자 막혔다.

“⋯부하 직원이랑 이러시면, 앗⋯ 안 되는 거잖아요.”

아랫도리가 바쁜 승준은 대답 없이 피식 웃기만 했다.

“여자 친구분이 얼마나⋯ 슬프시겠, 아흑⋯.”

“내 여자 친구는 지금 그럴 정신이 없을 텐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아랫배가 초원의 다리 사이에 빠르게 부딪쳐 왔다.

“앗⋯.”

단단한 분신이 가장 예민한 곳만을 겨냥한 듯 거칠게 치고 들어오자 그의 목에 감겨 있던 팔이 힘을 잃고 스르륵 책상 위로 떨어졌다.

그의 격렬한 침범에 무너지며 점점 뒤로 젖혀지는 작은 몸을 승준은 두 팔로 단단히 감쌌다.

초원의 아랫배에서 피어오르던 열기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아⋯. 팀장님, 멈추지 마세요.”

“멈출 생각 없어요.”

그 말을 증명하듯 승준의 허리가 더욱 빨라졌다.

“아, 아흑⋯.”

강렬한 쾌락에 자제력을 놓은 초원이 앓듯이 신음하기 시작하자 승준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팀장실 밖을 곁눈질했다. 유리 너머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책상 위에서 발가벗은 채, 이성을 잃고 억눌린 신음을 토하는 여자에게 다시 시선을 돌린 승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분신을 꽉 문 속살이 세차게 물결치더니 그의 팔에 안긴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분신을 빨아 삼키는 듯한 아찔한 자극이 전신을 덮쳐오자 그도 더는 참지 못하고 모든 걸 쏟아 내었다. 얇은 라텍스에 가로막혀 초원의 배 속으로 쏟아 낼 수 없다는 것만이 아쉬울 뿐이었다.

오래 참았던 만큼 격렬한 해방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 듯 서로를 단단히 껴안고 숨을 고르던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질 거 두 달이나 사람 힘들게 하고 말이야.”

“힝, 내 등급⋯.”

또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이 잦아들자 승준은 애정을 잔뜩 머금은 눈빛으로 초원을 어루만졌다.

“이제 우리 같이 사는 거네.”

“같이 자는 거 아니었어요?”

“그게 그거지.”

“어쩐지 속은 기분인데⋯.”

“억울하면 내기 시작하기 전에 확실히 하지 그랬냐고 누가 그랬더라?”

자신의 꾀에 보기 좋게 걸려든 초원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던 승준은 그 입술을 냉큼 덮쳤다.

맞댄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또 그 속살의 전율을 느껴 보고 싶었는데 이 분위기면 이미 끈적한 어른의 키스는 글러 먹었다.

그래도 다리 사이의 짐승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초원이 웃음을 터트릴 때마다 속살이 꼬물대며 여전히 배 속에 끝까지 파묻혀 있는 짐승을 조여 오고 있었다.

흥분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승준은 그녀의 동그란 엉덩이부터 봉긋한 가슴까지 이어지는 곡선을 두 손으로 집어삼킬 듯 훑었다.

“진지하게 키스 좀 하자는데 웃어? 홍 주임 한 번 더 혼나야겠⋯.”

덜컥, 팀장실 문손잡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들썩였다.

“헉⋯.”

뒤도 안 돌아보고 냉큼 승준을 밀어낸 초원이 재빠르게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이런 날 이 시간에 대체 누가 팀장실 문을 열려고 하는 걸까? 설마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기라도 했나? 초원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누구예요?”

승준을 올려다보며 재빠르게 속삭였다.

“모르겠는데.”

초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흰 유리 너머를 응시하는 승준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얼른 숨어요.”

“괜찮아요. 문 잠갔는데.”

유리 너머 사무실이 환하게 밝아졌다. 문밖에서 웅얼웅얼 말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곧바로 날카로운 청소기 소리에 파묻혔다.

“헐, 원래 이 시간에 사무실 청소해요?”

초원은 책상 위로 손을 더듬으며 옷을 하나하나 끌어 내리고 승준은 티슈를 한 뭉텅이 뽑아 들었다.

“그러게⋯. 원래는 아침에 하지 않나?”

다 쓴 티슈 뭉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그는 바지 밖으로 삐져나온 와이셔츠 자락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잠잠한가 싶던 문이 두어 번 더 흔들리자 초원은 브라 후크를 채우다 말고 사색이 됐다.

“설마 열쇠 있는 건 아니겠죠?”

“에이, 설⋯.”

설마가 사람 잡을 기세로 문손잡이가 돌아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야, 놀래라.”

빈방인 줄 알고 들어오려다 승준을 발견한 중년의 여자가 소리치더니 가슴을 부여잡았다.

책상 앞에 태연히 앉아 일하는 척하던 승준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아이고, 나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날에도 늦게까지 일하시네요. 몸 축나겠네.”

“하하, 그러게요. 여사님도 늦은 시간에 고생 많으시네요.”

억지로 웃는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신경은 온통 초원의 손가락이 더듬거리고 있는 다리 사이로 쏠렸다.

책상 아래에 숨어 승준이 미처 올리지 못한 지퍼를 올려 주던 초원은 벨트에 손을 얹다 거두었다. 지퍼야 몰래 올릴 순 있어도 벨트까지 몰래 채우는 건 무리였다.

“아유, 우리야 뭐 늘 하는 일이고요. 아, 그럼 이 방 청소는 어쩌지요?”

입구에 선 채로 사무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아주머니의 시선을 따라가던 승준은 고이 접혀 서류함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초원의 팬티를 발견하곤 냉큼 오른손에 쥐었다.

“아이고, 직접 청소 중이셨나 보네요.”

다행인지 아주머니는 승준이 손에 쥔 천 쪼가리가 걸레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 커피를 쏟아서⋯.”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빈 머그잔을 핑계 삼아 가리켰다. 갈색 곰돌이 무늬와 갈색 커피라니 꽤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거 그냥 천으로만 닦으면 끈적끈적해질 건데?”

문밖에 놓인 청소 카트에서 스프레이와 걸레를 집어 든 아주머니가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승준은 급히 왼손을 내저었다.

“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여긴 청소 안 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될라나?”

“네, 바쁘실 텐데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시죠.”

승준은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책상 아래로 가져갔다. 손을 펼치자 책상 아래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걸레’를 냉큼 낚아채 갔다.

***

“으음⋯.”

요란한 벨 소리에 초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헐, 지각인가?’

눈을 번쩍 뜨고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든 초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오늘 크리스마스잖아.’

말라붙어 초점이 흐릿한 눈을 가늘게 뜨며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응시했다.

‘아 진짜, 쉬는 날 아침 댓바람부터⋯.’

아래층으로 내려가 받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침대에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초원을 휙 뒤로 당겼다.

“흐음⋯, 아침부터 어떤 놈이야?”

잠에서 막 깨어 잠길 대로 잠긴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초원은 베개에 다시 파묻힌 고개를 살짝 돌려 같은 베개를 베고 있는 남자에게 눈을 흘겼다.

“아빠거든요?”

단단히 감긴 팔을 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받으면 되지.”

이대로 버둥대다 전화가 끊길까 싶었던 초원은 어쩔 수 없이 승준의 침대에 누운 채로 전화를 받았다.

“어, 아빠.”

[어, 우리 딸. 잤어?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

“당연히 잤지. 노는 날인데⋯.”

[벌써 9시 넘었는데 그만 일어나야지. TV에서 그러는데 쉬는 날 늦잠 자면 더 피곤해진대.]

“어.”

[근데 크리스마슨데 어디 안 가니? 데이트하자는 남자 없어?]

핸드폰 밖으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듣던 승준은 초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웃었다.

‘따님 지금 남자랑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만.’

웃는 게 거슬리는지 초원이 몸을 비틀기 시작하고 승준은 다리까지 감으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끌어안았다.

“데이트는 무슨⋯.”

[너도 곧 서른인데 연애 좀 해, 제발. 엄마 아빠 소원이다. 응?]

“소원 이루셨는데⋯.”

승준이 중얼거리자 놀라 고개를 돌린 초원이 핸드폰 마이크를 막은 채로 눈을 흘겼다.

“알았어요. 안 할게.”

입술을 꾹 다물고 나서야 그녀는 핸드폰을 다시 귀에 올렸다.

“아, 아빠. 알았어.”

[아빠가 남자 소개시켜 줘? 그, 아빠 등산 모임에 어떤 아저씨 아들이⋯.]

“아,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남자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을까 고민하다 마음을 접었다. 그러면 또 꼬치꼬치 캐묻다가 “그 사람은 네 몸 상태 아니?”라는 말이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근데 정원이는 요즘도 게임해요?”

초원은 괜히 동생을 제물로 끌어들였다. 미끼를 덥석 문 아버지는 군대 갔다 와서도 정신 못 차린 동생을 두고 한참 푸념을 하더니 겨우 전화를 끊으며 마지막으로 신신당부했다.

[우리 딸, 오늘 꼭 데이트해. 알았지?]

“네, 장인어른.”

중얼거린 것 치고는 목소리가 컸다. 화들짝 놀란 초원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지더니 침대 위로 떨어졌다.

“미쳤어요?”

고개를 든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속삭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준의 얼굴에는 잘못했다는 기색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뭐라고? 초원아, 안 들리니?]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든 초원은 반대쪽 귀에 가져다 대었다.

“아, 폰 떨어트려서⋯.”

초원은 좀 떨어지라는 듯 한쪽 팔꿈치로 승준의 명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남자 목소리 들리지 않았나?]

“아니, 난 안 들렸는데. 아빠 밖이야?”

천연덕스럽게 모르는 척하는 그녀의 뒤에서 쿡쿡 웃던 그의 명치에 팔꿈치가 강하게 꽂혔다.

“컥⋯.”

승준이 나가떨어지자 자유의 몸이 된 초원은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켰다.

“제정신이에요? 들키면 어쩌려고요.”

“왜? 부모님은 아셔도 되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침부터 남자랑 있는 걸 들키면 어쩌자고요.”

베개를 집어 들어 침대에 모로 누운 승준을 향해 던졌다. 그걸 가볍게 받아 낸 그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선물 준 걸 이렇게 내팽개치고. 너무한데?”

“주긴 뭘 줘요. 집에 가져가지도 못하는데.”

어젯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받은 게 이 베개였다. 크리스마스에 누가 낭만 없이 베개를 사 주나 싶었지만 그래도 폭신해서 좋아했더니 집으로 가져가지 말란다.

“이젠 여기도 초원 씨 집이잖아.”

“그리고 내 거라면서 왜 승준 씨가 써요?”

이 넓은 침대의 절반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승준의 베개는 눌린 자국 하나 없었다.

“초원 씨가 내 거니까 초원 씨 것도 내 거지.”

승준은 몸을 벌떡 일으키곤 베개를 옆으로 던지더니 초원을 덮치듯 끌어안고 누워 버렸다.

“흐응, 남의 여자 아니고요?”

“아, 뒤끝 진짜⋯.”

승준의 밑에 깔린 초원은 싫은 척 몸을 꼼지락댔지만 그뿐이었다.

“나 뒤끝 되게 긴 거 몰랐나 봐요? 10년, 20년 후에도 이걸로 걸고넘어질 건데.”

“그래요. 10년, 20년 후에도 나랑 이러고 있을 거니까.”

커다란 손이 초원에게는 너무 헐렁한 남성용 잠옷 셔츠를 파고들어 왔다. 살갗을 스치며 올라오는 뜨거운 손길에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내 거라고 표시해 놔야지.”

목덜미를 입술이 가볍게 지분거렸다. 간지러워 몸을 움츠리던 초원은 그 입술이 여린 살을 빨기 시작하자 승준의 어깨를 밀어냈다.

“아, 자국 남기지 마요. 내일 출근하는데⋯.”

“여기 내 이름 써 줄까? 그럼 아무도 안 물어볼 텐데?”

승준의 손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제정신이에요? 뇌가 다리 사이에 달리기라도 한 거예요?”

“확인해 볼래요?”

잠옷 셔츠 아래에서 느릿느릿 무언가를 굴리던 손이 불쑥 밖으로 나오더니 초원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래로 끌어 당겨진 손안으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물건이 느껴졌다.

“어휴, 눈만 뜨면 그 생각뿐이죠?”

“눈 떴더니 초원 씨가 안겨 있는 걸 어쩌라고.”

초원이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승준은 재빠르게 헐렁한 잠옷 셔츠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앗⋯.”

가슴을 덮치는 야릇한 자극이 찌릿찌릿 다리 사이까지 퍼졌다. 초원이 몸을 움찔움찔 비틀자 커다란 두 손이 달래듯 허리와 골반을 어루만졌지만 그 묘한 자극에 긴장한 몸은 더 뻣뻣해질 뿐이었다.

승준이 달래야 할 곳은 따로 있었다. 몸을 들썩이던 초원은 엉덩이를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을 다리 사이로 끌어당겼다.

그의 입가에서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이 촉촉이 젖은 꽃망울을 간질였다. 셔츠 아래에 묻혀 있던 머리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잠옷 바지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얇은 속옷 위로 둔덕을 쓰다듬던 그는 그 한가운데로 입술을 꾹 눌렀다.

“앗!”

“안녕? 또 보네, 곰돌이.”

집에 가면 기필코 이 곰돌이 팬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겠다고 이를 갈며 초원은 속옷을 제 손으로 끌어 내렸다.

“오늘은 그냥 해도 될까?”

한차례 지나간 절정의 여운에 잘게 떨리던 몸 구석구석 입을 맞추던 승준이 물었다. 숨을 고르던 초원은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밖에다 할 테니까⋯.”

뜨거운 손이 아랫배의 곡선을 타고 내려갔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초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속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뜨거운 마찰에 골반을 비틀던 그녀는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승준이 상체를 세운 채로 허리를 서서히 움직이고 그와 붙은 듯 떨어진 것이 아쉬웠던 초원은 두 팔을 벌렸다.

이 침대에서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때만 해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사랑한다는 말에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하며 승준을 밀어내던 그녀였다. 그랬던 초원이 어느새 이렇게 두 팔을 벌리며 안아달라고 수줍게 웃다니. 이건 누가 뭐래도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녀의 옆으로 팔꿈치를 짚은 그는 손가락 두 개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거리를 좁혔지만 그것도 부족했는지 가느다란 두 팔이 그의 목을 단단히 감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무겁지 않아요?”

그 작은 몸이 바스러지진 않을까 무서웠던 승준은 최대한 무게를 싣지 않으려 애를 썼다.

“무거워서 좋아요.”

초원은 슬며시 웃는 입술에 살포시 입술을 맞대며 온몸으로 그를 느꼈다.

이 남자가 이렇게 바스러지게 안아 줄 때는⋯.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찾은 느낌.’

그래, 이 말이 딱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말을 머릿속에서 승준의 목소리가 읊조린 건지 초원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과 몸을 겹치고 있는 남자는 그런 말을 할 정신이 없는 게 분명했다.

침대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발치에 위태로이 걸쳐 있던 베개가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아시스의 그날 밤, 바닥으로 하나둘씩 떨어지던 쿠션처럼.

‘약속해 줘요. 기억을 잃어도 다시 나와 사랑에 빠지겠다고.’

그의 낮은 속삭임이 귓가에 생생했다.

‘뭐지, 이거?’

혼란스러웠던 초원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

겹쳐 있던 몸을 한 뼘 정도 떼어 낸 승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아, 그게 아니라⋯.”

띠리링.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핸드폰이 울리고 초원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내 폰 어딨죠?”

한 번 울리고 잠잠해진 핸드폰의 행방을 찾아 몸을 비틀던 그녀는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얼음처럼 굳었다.

[여보세요? 초원 씨?]

현우의 목소리에 승준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다. 놀라 사고가 멈춰 버린 초원을 대신해 몸을 일으키고 침대 위를 더듬던 그는 초원의 엉덩이와 침대 사이에 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안 들려요?]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핸드폰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승준은 무슨 생각인지 끊지 않고 초원의 왼쪽 귀에 가져다 대었다.

‘뭐 하는 거야, 이 남자.’

핸드폰을 뺏어 끊으려 했지만 금세 두 손이 그의 커다란 손에 붙들려 버렸다. 현우에게 들리지 않게 입 모양으로 끊으라고 했지만 승준은 모른 척하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답해요. 무슨 소리 하나 들어 보게.”

승준이 오른쪽 귓가에 속삭이고, 적당히를 모르는 이 남자의 질투에 한숨을 길게 쉰 초원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아, 초원 씨. 잘 안 들렸어요?]

“아⋯, 폰 떨어트려서⋯.”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초원의 귀를 간지럽혔다.

[뭐 해요?]

“그냥⋯.”

뜨거운 입술이 귓불을 집어삼키자 초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누워 있어요.”

“팀장 밑에 누워 있지.”

초원이 얼굴을 찡그리며 몸부림쳤지만 승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붙들려 머리맡으로 끌어 올려진 손목이 얼얼했다.

[나 지금 회사에서 뱀파이어 데이터 뽑아 온 거 보고 있는데⋯.]

“그거 3급 보안 걸린 거잖아. 외부 반출 금진데.”

이 순간에도 직업병을 버리지 못한 승준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허리는 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 이 사건 범인 누군지 알 것 같아요.]

현우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잔뜩 달아올라 있었지만 반대쪽 귓가를 달구는 숨소리의 뜨거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뜨거운 게 있다면 그건 주인의 난처함은 나 몰라라 한 채 제멋대로 타오르고 있는 초원의 속살이었다. 초원은 핸드폰 너머의 현우에게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안 바쁘면 이거 같이 확인해 볼래요?]

오른쪽 귓가로 얼음장 같은 웃음소리가 파스스 부서졌다.

“미친놈. 누가 데이트 신청을 저따위로 해?”

[초원 씨?]

거절의 말을 뱉기 위해 입술을 가까스로 떼는 찰나 승준의 입술이 거칠게 덮쳐왔다.

[자요?]

“나랑 자고 있지.”

입술에 대고 낮게 속삭이던 그가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영문을 모르고 계속 초원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갑작스레 끊겼다.

“오늘은 폰 압수예요.”

핸드폰을 완전히 꺼 버린 승준은 협탁 서랍에 핸드폰을 넣고 거칠게 닫았다.

“자기 파트너가 지금 누구한테 안겨 있는지도 모르고⋯.”

주인만큼이나 잔뜩 성이 난 분신이 초원의 배 속을 사정없이 헤집고 들어왔다.

“아, 아흑⋯.”

틈 하나 남기지 않고 몸을 겹친 승준은 코를 맞대고 초원의 두 눈을 응시했다. 거친 짐승의 눈빛이 여과 없이 꽂혔지만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숨길 게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건 그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있어서는.

난폭하게 날뛰던 그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점점 부드럽게 길들여졌다.

어렴풋이 미소를 짓는가 싶던 그가 눈을 감더니 이마를 맞대어 왔다. 초원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미쳐 날뛰던 다리 사이의 짐승도 뜨거운 것을 왈칵 토해 내더니 초원의 품속에 얌전히 파묻혔다.

“미안. 안에다 해 버렸네.”

미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는 담담한 말투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속 보여.”

당황할 줄 알았던 여자가 태연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승준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그를 끌어안으며 초원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승준은 웃음을 터트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맞은편에 서 있는 직원이 불편한 듯 터틀넥 니트의 목 부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 진짜. 전생에 문어였어요?’

출근 준비를 하다 목에 선명히 새겨진 영역 표시의 흔적을 발견한 초원이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이었다. 또 생각나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승준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띵동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이미 반 정도 들어찬 엘리베이터로 3팀 사람들은 꾸역꾸역 몸을 집어넣었다.

“점심 한 번 먹기 참 힘드네요.”

엘리베이터를 두 번이나 보내고 겨우 탄 병훈의 푸념에 어렴풋이 웃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옆에 서 있기라도 했다면 만원 엘리베이터에서 손이라도 잡는 대담한 짓을 벌여 봤겠지만 반대편에 섰으니 서로를 의식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어, 팀장님 시계 새로 사셨네요? 못 보던 건데.”

병훈이 승준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오전 내내 쓸데없이 팀원들 앞에서 얼쩡거리며 괜히 머리도 쓸어 올리고 일부러 왼팔이 위로 오게 팔짱도 끼면서 티를 있는 대로 냈는데 이제야 누가 눈치를 채 주는 모양이었다.

“아, 내가 산 게 아니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오, 여자 친구분이 주신 거구나. 이야, 팀장님께 잘 어울리는 게 여자 친구분께서 센스가 넘치시네요.”

병훈의 아부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승준뿐이 아니었다.

‘그래, 내가 센스 빼면 시체지.’

“나도 좀 봐요.”

희경이 궁금한 듯 고개를 앞으로 쭉 뺐다. 승준은 채신머리없어 보이지 않으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마지못한 척 팔을 내밀었다.

“흐응⋯.”

시계가 예쁘다며 칭찬 세례를 퍼붓는 팀원들 사이로 희경은 별 대단할 것도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 팀장님 이러다가 으뜸 씨보다 먼저 품절남 되시는 거 아닙니까?”

“어, 그럼 저도 순서 지키고 장가가니 하극상 아니게 되는 겁니까?”

결혼을 앞둔 으뜸을 두고 막내가 먼저 간다며, 3팀 사람들은 염불처럼 하극상을 읊으며 놀려대던 차였다.

느닷없는 결혼 이야기에 초원의 눈치를 살피던 승준은 멋쩍게 웃었다.

“뭐 꼭 식을 올려야 부부인가? 부부처럼 살면 되는 거지.”

“여자가 마음이 별로 없나 봐.”

빌딩 밖으로 나와 백반집으로 가는 길, 희경이 초원의 팔꿈치를 흔들며 속삭였다.

“네?”

“시계 브랜드 봤어? 완전 싸구려잖아.”

앞서 걸어가는 남자들을 흘끗 보던 희경은 초원의 표정이 굳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에이, 그래도 싸구려는 아니지 않아요? 막 엄청난 명품은 아니어도 준명품은 되는 브랜든데.”

“맞아.”

멋도 모르고 편을 들어주는 아름이 고마워 초원은 눈물이 찔끔 나는 걸 참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니, 그래도 급이 있는데. 여자 직업이 의사라며.”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카드빚을 내서라도 더 비싼 거 살 걸 그랬나?’

“잘 벌 텐데 고작 저런 거 사 주는 거 보면 팀장은 그냥 심심풀이로 만나는 건가 봐.”

‘그런 거 아니거든요?’

초원은 대놓고 반박도 못 하고 속으로 이만 갈았다.

“아님 어장이거나요. 사귀는 거 아닌데 팀장님 혼자 착각하고 막 이런 거 아니에요?”

이제는 아름까지 키득거리며 팀장 여친 앞담화에 끼기 시작했다.

“근데 팀장도 딱히 진지한 건 아닌가 봐. 아까 결혼 얘기 나오니까 뜨뜻미지근하게 답하는 거 들었지?”

“아, 그렇네요. 별로 책임질 생각 없다는 투랄까?”

‘니들이 뭘 안다고 그래?!’

지금 마그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부글부글 끓는 속 하나면 올겨울은 무리 없을 정도였다.

‘실질적 팀장 사모님 앞에서 이것들이⋯. 베갯머리송사의 파워를 보여 줘?’

앞으로 어떤 후환이 닥칠지는 꿈에도 모르고 두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남의 연애를 끝없이 헐뜯었다.

“적당히 갖고 놀다 버리겠단 소리 같기도 하고⋯. 팀장님 쫌 별로네요.”

“그치? 아니, 결혼을 하면 되지 그냥 부부처럼 살면 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안 그래, 초원 씨?”

맞장구를 강요하며 팔꿈치로 툭 치는 희경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주는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하⋯. 팀장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팀장님이 니들을 알아서 하시겠죠.’

“팀장은 혼기 다 지나가는데 아직도 저러고 다니네⋯. 저러다 늙으면 후회하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속이 그 말에 차갑게 굳었다.

“뱀파이어는 산송장이라 체온이랑 수분 조절이 안 돼서 햇빛을 싫어하는 거래요. 영화에서처럼 타들어 가는 건 아니고.”

밥을 먹으며 신나게 뱀파이어 이야기를 하는 현우의 말을 초원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아, 최면 능력 있는 경우도 있다네요. 그걸로 인간을 사역마로 만들어서 하인처럼 부린대요.”

“그래요? 부럽네.”

초원의 영혼 없는 대답에 대각선에 앉아 있던 승준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그 건은 이따가 저녁에 얘기해요.”

초원은 머릿속이 복잡해 현우의 말을 제대로 들어줄 수 없었다. 한편 승준은 저녁이라는 말에 의문 가득한 시선을 마주 앉은 두 사람에게 보냈다.

“아, 낮에 볼 시간이 없어서 뱀파이어 건은 이따 야근하면서 볼 생각입니다.”

초원은 ‘야근도 자진해서 하는 성실한 홍 주임’ 얼굴로 해명했다. 오늘 급하게 정해진 야근이었지만 어차피 승준도 회식이 있으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초원의 눈에 예전엔 안 보였던 게 보였다. 저 미세하게 불끈거리는 턱 근육 하며 평소보다 조금 삐죽 나온 아랫입술이 ‘초원 씨 저놈이랑 둘이서 야근하는 거 나는 반댈세!’라고 대놓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그냥 업무일 뿐인데⋯.’

초원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다른 팀원들은 잽싸게 탈출해 버린 사무실에서 초원과 현우는 경찰청에서 받은 박스의 내용물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말고 일찍들 들어가세요.”

언제 팀장실에서 나왔는지 테이블 주변을 기웃거리는 승준의 말에 초원은 속으로 웃었다. 평소엔 그냥 “수고들 하세요.” 이러고 가던 양반이 무리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라니. 그 속이 빤하다 못해 뻔했다.

“네, 팀장님.”

사무실용 미소를 지으며 어서 가라고 눈치를 줘도 승준은 괜히 수사 자료를 들춰보며 서성이고 있었다.

“일하는 데 방해되니까 가요.”

현우가 화장실에 간다며 사라지는 순간 초원은 싹싹한 홍 주임에서 저승사자도 떨게 하는 염라대왕으로 돌변했다.

“상사한테 말투가⋯.”

“하, 상사 자격으로 질척대고 있는 거 아니면서.”

“질척이라니⋯.”

삐죽 나왔던 승준의 입술이 돌연 쏙 들어갔다.

“어이, 조 팀장 갑시다.”

사무실 입구에서 다른 팀 팀장이 재촉하자 승준은 마지못해 발을 떼면서도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저녁부터 먹고 할까요?”

현우의 말에 초원은 피해자의 노트북에 전원을 연결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먹고 싶어요?”

“음, 그냥 아무거나요.”

“부대찌개 집 옆에 즉석떡볶이 집 새로 생겼던데 가 볼래요?”

떡볶이면 삼시 세끼 먹어도 안 질린다던 초원이었기에 한 말이었다.

“나가기 귀찮은데 그냥 햄버거 같은 거나 시켜 먹어요.”

테이블 저편에서 한참 반응이 없자 초원은 노트북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현우는 풀이 죽은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화났죠? 송년회 때 내가 한 말 때문에⋯.”

“아뇨, 그건 이미 얘기 다 끝냈잖아요.”

이상한 소문이 나더라도 초원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현우는 좋은 연막이라고. 청 사람들이 둘 사이에 뭔가 있다고 믿는 한 레이더가 승준을 향할 일은 없었다.

“초원 씨 뭔가 달라졌어요.”

노트북 트랙패드 위를 오가던 손이 멈췄다. 연막이 안 통할 레이더가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연막 본인이었다.

“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은 거리 두고⋯.”

“선배⋯.”

초원은 노트북을 닫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현우가 곤란한 소릴 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난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선을 지키려는 거예요.”

“나는 선 넘었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솔직히 직장 동료치고는 과했던 것 같지 않아요?”

“초원 씨는 나한테 단순한 직장 동료 이상이었는데.”

대체 무슨 뜻으로 뒤늦게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초원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린 그 이상의 끈끈함이 있었잖아요. 근데 나 복귀한 다음부터 그게 사라진 것 같아서 마음이 허전하네요.”

초원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 끈끈함이 뭐로 유지됐던 건지 알기나 하는 건가?’

시선을 들어 눈을 맞춘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 난 여전히 선배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예요.”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지못한 행동이라는 걸 초원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햄버거 뭐 먹을 건데요? 오늘은 내가 살게요.”

“진짜 딱딱 맞아떨어지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네요.”

지하철역에서 나와 자취방으로 걷는 길, 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의 추리가 맞아 가고 있었다. 피해자의 노트북에는 현우의 예상대로 템플스테이 검색 기록이 남아 있었다.

“마늘 들어간 거 안 먹지, 인적 드문 곳에 살지, 그러니까 십자가 볼 일도 거의 없고.”

뿌듯하게 웃는 파트너를 향해 초원은 어렴풋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 나 진짜 명탐정 소리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명탐정이 아니라 멍탐정이겠죠.”

놀림을 받고도 현우는 바보같이 웃기만 했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으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당연한 건데, 어?”

현우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원룸 건물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초원은 아차 싶었다. 자취방 창문이 환했다.

‘벌써 왔나?’

회식 끝났으니 집에 간다는 문자는 받았지만 벌써 와 있을 줄은 몰랐다.

“집에 누구 있어요?”

“아, 아침에 까먹고 켜 놓고 나왔나 봐요.”

초원은 제발 승준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불쑥 내밀지 않기만을 빌었다.

“확실해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꾸 창문을 바라보는 현우의 모습에 그녀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혹시 강도나 뭐 이런 거면⋯.”

“에이, 강도는 무슨⋯.”

“그래도⋯. 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요?”

“아, 됐어요. 그리고 가방에 총도 있는데⋯. 추운데 얼른 가요.”

초원의 손에 떠밀린 현우는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이쪽을 보며 뒷걸음질 치는 현우를 향해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짓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헉, 아저씨. 가진 거 다 드릴 테니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문을 열어 준 승준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여자를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술 마셨어요?”

막 들어와서 옷을 벗던 중이었는지 셔츠가 풀어 헤쳐져 있었다.

“아, 상황극인데 좀 받아 주지. 그럼 몸을 내놓으라고 해야죠.”

“안 마시고도 취하는 재주가 있네.”

초원은 눈을 살짝 흘기며 신발을 벗어 던졌다. 승준은 초원의 코트를 벗겨 옷걸이에 걸어 주더니 옷을 마저 벗으려는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뭐 해요?”

한참을 말없이 껴안고만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충전 중.”

풋 하고 웃은 초원은 고개를 들어 입술을 살짝 포개다 떼어 냈다.

“그럼 이건 급속 충전.”

“아니지. 급속 충전은 그쪽으로 하는 거 아닌데.”

엉덩이의 굴곡을 타고 내려간 손이 허벅지 안쪽을 훑으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어 키득키득 웃던 초원은 그 손을 붙잡아 코앞으로 끌어당겼다. 불빛 아래로 은빛 시계가 반짝였다. 초원은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년에 적금 타면 내가 더 좋은 거 사 줄게요.”

“왜? 난 이거 좋은데.”

“그래도⋯.”

“다들 잘 어울린다고, 예쁘다고 그러던데.”

그 말에 입술을 비죽 내미는 초원의 얼굴이 울적해 보였다.

“왜?”

“싸구려래요.”

“뭐? 누가?”

“안 모 사무관이요.”

승준은 싸늘한 코웃음을 쳤다.

“그 주둥아리가 싸구려겠지.”

그 말을 뱉을 땐 날카롭기 그지없던 눈빛이 초원의 두 눈을 향하는 순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오늘 마음 상했어요?”

슬픈 강아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초원을 승준은 부드럽게 보듬었다.

“난 누가 1억을 준다 해도 이 시계랑 안 바꿀 건데.”

“1억 준다면 내가 홀랑 가져가서 바꿀 건데요.”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한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렇고 방전되기 전에 급속 충전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방전을 걱정하기에는 지나치게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허벅지 사이로 다시 슬금슬금 들어오는 손을 초원은 간지러워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밀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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