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적당히, 질투도 적당히
뚝, 샤프심이 부러졌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간드러진 웃음소리에 이를 앙다문 초원은 신경질적으로 샤프 끄트머리를 눌러댔다.
“홍 주임.”
“네?”
“듣고 있어요?”
옆에서 한참 뱀파이어 의심 건을 두고 가설을 가장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현우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안 이랬는데.’
초원은 항상 현우의 가설에 무조건 딴지를 걸고 헛소리 작작하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곤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반응이 없었다. 아예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정신이 딴 데 팔린 건지, 아니면 그냥 듣기 싫은 건지. 그 딴지와 눈살이 그리워지는 날이 오다니. 현우는 웃음이 나오려다가도 한숨이 나왔다.
“네, 듣고 있으니까 계속해요.”
멋대로 끄적이던 노트에서 시선을 뗀 초원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뱀파이어 건은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게 없었다. 검사 결과 타액은 맞았지만 검체가 너무 소량인 탓인지 항응고제 검출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아직 특관청 쪽 사건이 아닌데도 현우는 흥미가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내가 여름에 발견된 일본인 피해자 SNS를 확인해 봤는데요.”
“그런데요?”
“실종되기 전날에 친구한테 내일은 절에 간다고 댓글을 단 게 있더라고요.”
“그래요?”
“뭔가 딱 감이 오지 않아요?”
“뭐가요?”
“절이랑 향냄새.”
딱 맞는 퍼즐 조각을 찾은 듯, 신이 난 현우의 눈이 반짝였다.
“기억 안 나요? 2주 전에 발견된 백인 남자 사체에서 향냄새 났던 거?”
“흠, 그럴듯하긴 한데⋯.”
초원은 삐딱하게 의자에 머리를 기대곤 쓴웃음을 지었다.
“절은 관광객 필수 코스고 절 잠깐 구경하고 온다고 향냄새가 배지도 않잖아요.”
초원의 반박에 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옅은 한숨을 쉬다 풋 웃었다. 초원이 딴지를 거는 건 늘 힘 빠지는 일이었는데 오늘은 기쁘다니. 바보 같기 짝이 없다.
“그 남자도 절에 갔다는 증거는 있어요?”
“찾아봐야죠. 김 경위님이 그러던데, 그 사람 신원 확인했대요.”
“어떻게요? 빠르네요.”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짐 맡기고 안 찾아간 사람 있다고 신고했나 봐요.”
“착한 사람이네요. 그냥 꿀꺽 안 하고⋯.”
초원의 시니컬한 말투에 현우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경찰에서 조사 다 끝나면 소지품이랑 수사 자료 받기로 했어요.”
초원은 못마땅한 듯 다시 노트에 샤프를 아무렇게나 긁적이기 시작했다.
‘왜 벌써 땡겨 오려고⋯. 그럼 나도 같이 봐야 하잖아.’
그 속을 모를 리 없는 현우는 ‘아, 귀찮아.’가 쓰여 있는 초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웃었다.
“이건 뱀파이어로 확정될 때까진 내가 혼자 조사할 테니까 걱정 마요.”
“됐어요. 그런 게 어딨어요. 같이 해야지.”
아무리 귀찮아도 파트너를 모른 체할 만큼 모질지는 못했던 초원이었다.
어느새 표정을 풀고 현우에게 부드럽게 웃어 주던 그녀는 또 팀장실 문틈으로 여자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용건인 건지, 법무과 여자 변호사가 팀장실로 들어간 지 벌써 20분은 족히 넘었다.
“되게 분위기 화기애애해 보이네요.”
현우는 별일이 다 있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갑자기 병훈이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히죽히죽 웃었다.
“의왼데? 돌부처 같으신 양반이 여자 웃기는 재주가 다 있으시고⋯.”
뚝, 샤프심이 다시 부러졌다. 한 번만 더 인내심에 금이 가면 샤프심이 아니라 샤프가 부러지겠다 싶을 즈음, 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걸어 나온 여자가 갑자기 팀장실 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어쨌거나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에요. 팀장님 너무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여자의 눈웃음에서 농익은 요염함이 철철 흘러나왔다. 초원은 승준이 어떤 얼굴일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팀장실 흰 유리 너머로 보이는 건 그의 실루엣뿐이었다.
“아닙니다. 고생은 김 변호사님이 하셨죠.”
“그럼 다음에 고생한 사람들끼리 꼭 술 한잔하는 거죠?”
“아⋯, 하하⋯.”
난처한 웃음소리가 팀장실 문간을 넘어왔다.
“꼭이에요?”
김 변호사는 또 그 교태 넘치는 미소를 짓더니 도도한 자태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승준은 초원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레이저에 정통으로 맞고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대충 정리하고 송년회 하러 가죠.”
승준이 다시 팀장실로 들어가고 팀원들은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아, 누구 때문에 올해는 송년회 할 맛 안 나네.”
책상을 정리하던 병훈이 칸막이 너머로 초원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그럼 집에 가세요, 그냥.”
초원은 병훈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던졌다.
“대체 왜 그런 거야, 홍 주임?”
병훈이 울분을 터트리고 현우와 으뜸은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우리끼리 장어로 말 맞춰 놨잖아. 근데 왜 팀장님이 뭐 먹고 싶냐고 물었을 때 돼지갈비라고 그랬어?”
“팀장님이 홍 주임 뭐 먹고 싶냐고 물었지 박 주임 뭐 먹고 싶냐고 물은 거 아니잖아요?”
초원은 얄미운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노트북을 덮었다.
“아니, 돼지갈비 나부랭이를 꼭 송년회 때 먹을 필요가 있냐고.”
“그러길래 누가 송년회 때마다 나 팔래요? 그러니까 팀장님이 이젠 나한테만 묻는 거잖아요.”
드디어 복수에 성공한 초원은 승리한 자의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숯불에 고기를 굽는 달큰하고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빈 소주병과 맥주병이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줄지어 있었다.
병훈의 입으로 요즘 회사에서 도는 이런저런 소문을 가만히 듣던 승준은 병훈의 빈 소주잔 위로 병을 기울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병훈은 잔을 받자마자 바로 비웠다.
“그나저나 팀장님, 올해는 크리스마스 계획이 어떻게 되십니까?”
“음⋯. 그냥 집에서⋯.”
얼버무리며 멋쩍게 웃는 승준을 보던 초원은 반쯤 찬 소맥 잔을 비웠다.
‘집이면 집이지 그냥은 뭐람?’
속으로 투덜거리던 그녀는 입속으로 퍼지는 독한 술 냄새에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불 꺼진 자취방, 귤을 까먹으며 먹방 프로그램을 보던 초원이 중얼거렸다.
“아구찜 맛있겠다.”
그럼 주말에 아구찜 먹으러 가자고 해야 할 사람은 여기 없었다. 홀로 침대에 기대어 앉은 초원은 한숨을 쉬었다.
연말은 연인과 함께일 줄 알았더니 또 TV와 함께였다. 그 ‘연인’은 배 나온 아저씨들과의 회식에 불려 다니기 바빴다.
‘하긴, 초고속 승진이 능력만으로 되겠어? 사회생활도 잘해야지⋯.’
이렇게 알면서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삑삑-
느닷없는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초원은 귤껍질이 수북이 담긴 그릇을 서랍 위로 치우고 TV를 껐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 찰나,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초원은 자는 척하며 숨을 죽였다.
조심스레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등 뒤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자요?”
그 낮은 속삭임을 듣고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두꺼운 이불을 사이에 두고 뒤통수에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지더니 부스럭부스럭 옷 벗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등 뒤로 침대가 움푹 꺼지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온 긴 팔다리가 초원의 몸에 착 감겼다. 이 추운 겨울, 밖에 있다 온 사람답지 않게 몸이 뜨거웠다. 코에서 나오는 더운 숨이 그녀의 여린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아우, 술 냄새.”
초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벽 쪽으로 몸을 옮겼다.
“아우, 귤 냄새.”
승준은 피식 웃더니 곧바로 따라와 다시 끌어안았다.
“귤은 향기죠. 술이 냄새고.”
“홍 주당님 새삼스럽게⋯. 첫 키스도 술 냄새 풍기며 해 놓고.”
여름밤 초원이 술에 취해 친 대형 사고를 승준이 입에 올리자 발끈한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가요. 팀장님 집에 가요. 회식 끝났으면 집에 가지 여긴 왜 왔어요?”
“왜 또 팀장님이래⋯.”
초원이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었다.
“내가 여길 왜 오긴⋯.”
승준은 초원을 감싼 팔다리를 풀기는커녕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초원 씨가 있는 곳이 내 집인데.”
몸부림이 잠잠해졌다.
“미안해요, 혼자 둬서.”
“됐어요. 어쩔 수 없는 거 나도 아니까.”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렸구나 싶어 안도한 승준은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크리스마스 때 크게 갚겠다니까.”
“됐고 나는 집에서 케빈이랑 보내고 싶다니까요?”
“역시 화났구나?”
“그게 아니라 피곤하잖아요. 나가면 사람만 많고 춥고⋯.”
“그러니까 호텔에서 느긋하게 쉬다가 룸서비스 시켜 먹으면 좋지.”
“돈 아깝게 뭐 하러요? 승준 씨 집이 호텔 뺨치고 집주인은 호텔 셰프 뺨치는데.”
처음으로 몸을 돌린 초원이 승준을 바라보며 새초롬하게 웃었다. 승준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다가 그녀가 방심하는 틈을 노려 입술을 덮치려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엔 초원이 조금 빨랐다. 승준은 입술을 덮은 손바닥에 대신 입을 맞췄다.
“흠, 나보고 밥하라는 소리네 그럼.”
초원의 손이 떨어져 나가고 승준은 머리를 팔에 괸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하자는 거죠. 사이좋게⋯.”
“그럼 밥은 내가 혼자 할 테니까 초원 씨는 몸으로 때우면⋯.”
기다란 손가락이 초원의 잠옷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서로 좋지 않나?”
벌어진 틈을 가르고 손이 스윽 들어오더니 셔츠 아래에서 애가 탈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나 내기 안 질 건데⋯.”
“우리 사이에 이제 의미도 없는 내기 따위⋯.”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입술은 어느새 젖혀진 앞섶 사이로 드러난 꽃망울을 살포시 감쌌다. 봉긋한 가슴 위에 머무르던 손은 점점 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의미가, 하아⋯. 없긴 왜 없어요⋯. 난 근무평정 최고 등급 받을 건데⋯.”
몸을 꿈틀대던 초원이 승준의 어깨를 밀어내기 시작했지만 손만 계속 미끄러질 뿐,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꽃망울을 핥아 올리는 혀의 감촉에 위태롭게 어깨에 얹혀 있던 손이 마지막 남은 힘을 잃고 떨어져 나갔다.
“으음, 승준 씨⋯.”
손은 이미 속옷까지 다 벗겨 내고 다리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뒤늦게 다리를 오므렸지만 이미 떡하니 자리를 잡은 손은 비킬 생각이 없었다.
“늦었는데 그만, 앗⋯.”
깊숙이 속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초원의 허리가 뒤로 휘어졌다.
“이렇게 젖었는데?”
가슴에 묻었던 고개를 든 그는 점점 아래로 입술을 움직였다. 초원이 손을 뻗어 둔덕을 가렸지만 그 손도 촉촉하게 빨아대던 승준이 피식 웃었다.
“귤 맛 나. 대체 얼마나 먹은 거야?”
그는 초원의 손등에 제 손바닥을 겹치고 손가락을 억지로 벌렸다. 그 바람에 꽃잎이 한껏 벌어지며 숨겨져 있던 살점이 드러났다. 제 스스로 벌려 준 꼴이 된 초원은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혀끝이 살점을 핥아대기 시작하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촉촉이 젖은 살점에 닿자 그녀는 몸을 비틀었다.
“하읏⋯.”
깊숙이 꽂혀 있던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이고 초원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들려 애를 썼다. 그런 그녀를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의 눈으로 응시하던 승준이 불현듯 떨어져 나갔다.
숨을 헐떡이던 초원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속옷마저 벗어 던지고 나체가 된 그는 둔덕 위에 얹혀 있던 작은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물건을 감쌌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그것이 초원의 손안에서 움찔거렸다.
“더는 못 참겠어.”
그 말에 그녀는 손을 떼어 냈다. 어서 오라는 듯 두 팔을 벌리자 승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두 몸이 겹쳐지고, 다리 사이로 닿는 물건의 뜨거움에 초원의 몸은 익어 버릴 것 같았다.
성이 난 짐승이 제집을 찾아 꽃잎을 헤치기 시작하고 초원은 숨을 골랐다.
띠리리링.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움찔하면서 물건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아, 젠장⋯.”
미간을 좁히는 승준의 아래에서 초원은 체념한 듯 웃었다. 이 벨 소리는 초원의 것이 아니었다.
“무시해요.”
하지만 초원은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냈다.
“받아요. 나 어디 안 가니까⋯.”
“왜 하필 지금⋯.”
그는 성을 내며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갑자기 적나라하게 드러난 알몸이 부끄러워진 초원은 이불을 끌어당겼다.
“네.”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감상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승준은 긴 한숨을 쉬더니 목덜미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격리팀과 사고수습팀은 연락받았습니까?”
‘사고 터졌구나⋯.’
허탈해진 초원은 주섬주섬 속옷과 잠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그새 전화를 끊은 승준이 한숨을 쉬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4153번 개체 누구 담당이었지?”
“네?”
“그 술 마시면 개 되는 인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초원은 입었던 잠옷을 다시 벗어야 했다.
“팀장님, 혹시 별일 없으시면 김 변호사님 어떠세요? 제가 다리 놔 드릴 수 있는데. 두 분 잘 어울리시지 않나? 안 그래, 홍 주임?”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는 병훈의 목소리에, 뜨겁다 만 그날 밤을 떠올리던 초원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맞장구를 강요하는 병훈에게 눈을 흘긴 초원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하나도 안 어울려요.”
헉 소리가 주변에서 터져 나왔지만 초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빈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질투도 참 귀엽게 하네.’
승준은 눈치 없이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끌어 내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술기운에 안면 근육의 고삐는 풀려나간 지 오래였다. 그래도 팀원들 앞에서 티를 낼 순 없었던 그는 입술을 꾹 다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병훈은 언짢아 보이는 상사의 눈치를 살피다 수습에 나섰다.
“아이고, 홍 주임이 취해 가지고⋯. 홍 주임 말은 팀장님이 무지하게 아까우시다 이거죠. 하하⋯.”
승준은 부루퉁한 얼굴로 소맥을 들이켜는 초원을 곁눈질하다 쑥스러운 듯 웃었다.
“실은 내가 여자 친구가 있어서⋯.”
“오, 역시 팀장님! 상상 속의 동물, 여자 친구를 드디어 포획하셨군요.”
병훈은 양손 엄지를 척 올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혹시 전에 만나신다던 분입니까?”
으뜸이 아름의 생일 회식 때 승준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묻자 승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현우는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팀장님 초원 씨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다른 직원들에게는 저승사자라 불려도 유독 초원에게만은 약한 팀장이었다. 분명 그녀에게 마음이 있어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만나는 사람이 있다니⋯.
‘포기하신 건가?’
현우는 광대가 하늘로 치솟을 듯한 승준의 얼굴과 소주 병뚜껑 꼬리를 꼬느라 바쁜 초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긴⋯. 초원 씨 철벽이 장난 아니지.’
마음 흔들어 놓을 땐 언제고, 현우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눈치를 챈 건지 초원은 철벽을 단단히 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연주와 이제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초원의 태도는 더 차가워지기만 했다. 분명 초원과 자신 사이에는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끈끈함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랬던 초원이 요즘은 다른 남직원들을 대할 때와 다를 바 없는 대응을 현우에게 하고 있었다. 무관심. 선 긋기. 벽 쌓기. 거리 두기.
그새 질렸나? 아니면 애초에 그 눈물과 약속은 다 동료를 향한 의리일 뿐이었나?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다. 마주 앉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우는 입안을 감도는 쓴맛을 소주로 씻어 내렸다.
“크으, 팀장님 정말 부럽습니다.”
병훈의 과장된 반응에 승준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럼 이번 크리스마스도 솔로로 보내야 하는 저희들을 위해⋯.”
‘저희’라고 하며 병훈은 초원과 현우, 아름이 앉아 있는 쪽을 가리켰다.
‘난 아닌데? 헤헤⋯.’
속으로 웃은 초원은 겉으로는 태연하게 시치미를 떼며 병뚜껑으로 백조를 만들고 있었다.
“여자 친구님 통해서 소개팅이라도 주선해 주시면⋯. 근데 무슨 일 하시죠?”
이런 전개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초원이 흠칫했다.
“어⋯, 의사.”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승준은 나름 잘 대답했다고 뿌듯해했다. 초원이 의대를 졸업한 건 맞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오! 대박!”
병훈이 또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팀장님 야심가시네.”
테이블 한구석에서 희경이 삐딱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럼 홍 주임이랑 아름 씨는 의사 소개시켜주시고 저랑 차 주임은 여의사나 간호사로 어째 안 되실까요?”
“의사는 아무나 만나?”
희경이 가소롭다는 듯 병훈을 향해 피식 웃었다.
“아, 그냥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시네. 나 소개팅 있거든요?”
구시렁거리며 소주를 들이켜던 병훈은 갑자기 다른 ‘솔로’들로 화살을 돌렸다.
“그나저나, 아름 씨는 어리니까 상관없지만 홍차 주임은 어쩔 거야? 홍 주임은 곧 계란 한 판이네.”
병뚜껑으로 백조의 호수를 만들기 바빴던 초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눈만 흘겼다.
“홍차 주임은 그냥 서로 구제해 주지?”
병훈이 멋도 모르고 제 묏자리를 보기 시작하자 번쩍 고개를 든 초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의 입, 진짜.’
병훈의 옆에 앉은 승준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더니 못마땅한 듯 팔짱을 끼는 게 눈에 들어왔다.
“헛소리 작작 하세요.”
헛소리라니. 현우는 실소를 흘렸다.
‘너무한 거 아닌가? 내가 그렇게 남자로서 별로야? 아, 비참하다. 나도 감정이 있는 인간인데 좀 돌려서 말해 주지.’
소주가 절실했다. 앞에 있는 소주병은 어느새 빈 병이 되어 있는 걸 보고 현우는 새 소주병을 따기 시작했다.
“아니, 왜? 둘이 잘 어울리는데?”
그 말에 딴지를 걸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승준은 끓는 속으로 소주만 들이부었다.
“발끈하는 거 보니까 둘이 사실은 사귀는데 연애 금지 규정 때문에 시치미 떼는 거 아냐?”
잠시 조용한가 싶던 희경이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그런 거 전혀 아닌데요.”
“홍 주임 나 남자로 안 봐요.”
느닷없이 끼어든 현우가 쓰게 웃더니 손에 든 소주잔을 비웠다.
“얼마나 남자로 안 보였으면 작년 크리스마스 때⋯.”
현우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건지 눈치챈 초원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만해요.”
자리에서 급히 일어서며 현우의 입을 막으려고 손을 뻗는 초원을 승준은 굳은 얼굴로 응시했다.
“기억 안 나요? 그날 밤 내 침대에서 잔 거?”
“그런 얘긴 왜 해요?”
초원이 반쯤 울상이 된 얼굴로 노려보았다. 현우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기운에 마비되었던 이성이 돌아오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리 초원에게 섭섭했어도 이런 소리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해서는 안 됐는데.
“⋯미안해요.”
테이블 위로 귀신이라도 지나간 듯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아이고, 차 주임도 취했네.”
병훈이 뒤늦게 덧없는 수습을 시도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 사이로 승준의 얼굴은 점점 뒤틀려 가고 있었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더는 이 숨 막히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초원은 가방과 코트를 챙겨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다.
‘화났겠지?’
창 너머 가로등 불만이 새어 들어오는 어두운 방, 초원은 정장 차림 그대로 침대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그녀를 따라 나온 사람은 승준이 아니라 현우였다. 미안하다고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그에게 화를 버럭 내고 다시 대로변을 향해 걷는데, 이번에는 뒤늦게 아름이 쫓아왔다. 알아서 가겠다는 초원에게 아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주임님 집에 무사히 들어가는지 보고, 전화하라고 팀장님이 그러셨단 말이에요.’
그 말을 다시 떠올리니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려 했다. 직접 따라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름이라도 대신 보냈겠지.
‘근데 따라올 수 있는 상황이어도 따라왔을까?’
그저 보고 싶지 않아서 따라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초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미친⋯. 거기서 그런 얘긴 왜 해? 오해받기 딱 좋게.’
술 취해서 한 말실수라고 사람들이 웃어넘기고 잊어 줄 수준이 아니었다. 여자가 크리스마스에 남자 동료 집에서 잤다는 말을 듣고 이상한 생각을 안 할 사람이 있을까? 둘이서만 알면 웃기는 해프닝일 것이 남들이 알게 되면 망측한 스캔들이 되는 것이다.
‘또 이상한 소문 나겠네.’
이번엔 차라리 오피스 와이프가 양호할 수준의 소문이 날 게 분명했다. 온갖 추한 소문에 승준이 티도 내지 못하고 속앓이를 할 생각을 하자 미칠 것 같았다. 초원은 양손에 얼굴을 묻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팀장님도 나랑 현우 선배 사이에 뭐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벌써 전화를 열댓 번은 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초원은 물끄러미 발치에 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띠링. 마침 핸드폰이 짧게 울리고 승준인가 싶어 냉큼 핸드폰을 집어 들었던 초원은 실망해 얼굴을 찡그렸다.
[초원 씨. 진짜 미안해요. 내가 아까 하면 안 될⋯]
화면에 뜬 메시지는 잘려 있었다. 초원은 현우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전화 앱을 열었다.
“하아⋯. 진짜⋯.”
승준의 이름 위로 손가락을 댈 듯 말 듯 망설이던 초원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아무 일 없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온갖 최악의 반응이 스쳐 지나가면서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초조하게 손가락을 무릎 위로 두드렸다. 신호가 여섯 번이나 갔지만 받을 기미가 없었다. 원래라면 세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 너머로 초원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야 정상이었다.
‘화 단단히 났구나.’
마지못해 끊으려는 찰나, 신호음이 멈추더니 정적이 이어졌다.
“⋯네.”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 둔탁한 소리에 심장을 얻어맞기라도 한 듯 초원의 가슴이 아려왔다.
“⋯화났어요?”
“아니.”
차갑기 그지없는 대답이 아닌 게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진짜 화 많이 났구나.’
초원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내가 화날 권리가 있나?”
체념과 냉소로 벼려진 말투가 송곳처럼 머리를 파고들었다. 초원은 찌르르한 통증이 퍼지는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랑 사귀기 전에 초원 씨가 뭘 했든 내가 뭐라 할 권리가 있냐고.”
“뭐라 할 것도 없어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게 말이 돼? 둘이 그렇게 붙어 다니고 한방에서 잠까지 잤는데 아무 일이 없을 수가 있냐고.”
“진짜 아무 일 없었다니까요? 남녀가 한방에서 자면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해요? 우리도 울릉도에서 아무 일 없었잖아요.”
승준은 허탈한 듯 웃었다.
‘이 여자, 남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네.’
그날 밤 초원이 조금만 더 틈을 보였더라면 승준은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을 거다. 초원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이렇게 노리는 건 비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그녀의 몸으로 손이 가는 걸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날 내가 얼마나 참은 건지는 알아요?”
그날 밤 침대에서 몸과 이성의 사투를 벌이던 건 자신뿐인 줄 알았던 초원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놈도 남잔데, 게다가 저 좋다는 여자가 자기 침대에 누워 있는데 마음이 있든 없든 건드리고도 남지.”
아무 일 없었다고 몇 번을 말해도 승준이 믿지 않자 초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한다는 거예요?”
“혹시나 내가 화낼까 봐 숨기려는 거면 그럴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아니라니까요.”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통증에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혹시 차 주임한테 아직 마음 있으면서 나랑 만나는 거라면⋯.”
“네? 하아, 진짜 왜 그래요?”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고스란히 보여 줬는데 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왜 이렇게 믿어 주지 않는 걸까 싶어 초원의 눈시울이 시큰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요? 아무리 초원 씨 내 여자라고 외쳐도 한편으론 남의 여자 뺏은 기분인 거.”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초원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무 일 없었다니까요? 그냥 내가 한심하게 짝사랑 좀 했고 진짜 그게 다예요. 끝난 지 오래고 이젠 아무 감정도 없는데 왜 그래요?”
벌거벗겨진 기분을 느끼며 ‘아무 일 없이 끝난 한심한 짝사랑’을 제 입으로 인정하기까지 했건만 승준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답답함과 억울함에 초원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팀장님 말대로 사귀기 전 일에 화낼 권리도 없는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믿어 달라고 매달려야 해요?”
인내의 한계에 달한 초원의 태도마저 차갑게 변하고, 자신의 집 거실에서 바닥을 보이는 위스키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던 승준은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답은 혼자 정해 놓은 거잖아요. 애초에 내 말은 믿을 생각도 없었고⋯.”
그를 힐난하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젖어 있었다.
“초원 씨⋯.”
“하긴, 팀장님이랑 사귀지도 않는데 잤으니 내가 얼마나 헤픈 여자로 보였겠어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서러운 눈물을 초원은 연신 손등으로 닦아 냈다.
“무슨 소릴⋯.”
“현우 선배랑도 그랬을 거라고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이해해요.”
“나는 그런 뜻이 아니고⋯.”
“너무 오랜만에 해서 연애가 이렇게 피곤한 일이란 걸 잊고 있었네요.”
한숨처럼 초원이 쏟아 낸 말에 승준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어질 말을 예상하니 입 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지금 갈게요. 얼굴 보고 얘기해요.”
승준은 벌떡 일어나 소파에 아무렇게나 걸쳐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됐어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요? 저 피곤하니까 오지 마세요.”
“초원⋯.”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발치로 던진 초원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하는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든 그녀는 전원을 꺼 버리고 현관으로 향했다. 도어락의 빨간 스위치도 잠가 버리고 침대로 돌아와 쓰러지듯 누웠다.
‘짝사랑 좀 한 게 죄야?’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냥 바보짓 했다고 웃고 넘어갈 일인데 왜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두꺼운 베개 사이로 숨죽인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현우 선배도 팀장님도 다 짜증 나. 남자들 다 짜증 나.’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자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남자는 다를 줄 알았던 내가 바보지.’
처음엔 이 사람이 내 운명의 반쪽이라고 온갖 유난을 떨다가 끝에 가선 남보다 못한 싸늘한 사이가 되어 버리는 그런 흔한 연애와 이 연애도 다를 바 없을 텐데, 그 달콤함에 취해서 또 순진하게 평생을 약속해 버린 자신이 한심했다.
사랑이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바보로 만드는지 잊고 있었다.
‘바보 같아. 나도, 저 남자도.’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철컥 손잡이를 비트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다고 굳게 잠긴 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문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초조한 목소리에 초원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