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28)

연애학원 장학생, 그 남자

“아니, 한국에 무슨 뱀파이어가 있다고⋯.”

병원 복도를 걷던 초원은 벽에 걸린 십자가를 곁눈질했다. 골목마다 있는 게 교회고 십자가인 곳에 뱀파이어라니 말도 안 됐다.

유럽은 요즘 뱀파이어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들었지만 거긴 마늘을 잘 안 먹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마늘을 알감자처럼 구워 먹고 온갖 요리에 한주먹씩 턱턱 넣는 나라에 뱀파이어에 물린 시체라니⋯.

“뭐, 어쩔 수 없죠. 확인만이라도 해 달라니까.”

어깨를 으쓱한 현우는 얼굴에 ‘아, 짱 귀찮아.’가 쓰여 있는 초원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귀찮아하는 것도 귀엽다. 저도 모르게 그는 초원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앗, 만지지 마요.”

초원이 얼굴까지 찡그리며 몸을 피하자 현우는 머쓱해졌다.

“미안⋯.”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변했다. 전에는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였는데, 이젠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무뚝뚝한 구석은 있는 여자였지만 지금은 그 결이 다르다. 투명한 벽이 생긴 느낌이라고나 할까.

난감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그가 뭘 깨달았는지 표현하고 싶어도 저렇게 거리를 두는 사람에겐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나한테 화난 거 있나?’

깨어난 날, 초원의 따가운 눈빛을 불현듯 떠올린 현우는 아차 싶었다. 설마, 그것 때문일까?

지하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 초원이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좀처럼 원하는 게 안 찾아지는지 낮게 투덜대더니 초콜릿을 꺼내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니면 그냥 그날인가?’

“아, 오셨네요.”

“김영욱 경위님, 오랜만에 뵙네요.”

초원과 현우는 번갈아 가며 마포경찰서 김 경위와 악수를 했다. 김 경위는 경찰청에 접수된 특이 현상을 특관청으로 인계하는 일을 했다.

“제가 보내 드린 건 다 보셨죠?”

“네.”

올해 수도권에서 발견된 외국인 변사체 여러 구에서 패턴을 발견했다는 김 경위가 수사 자료를 보낸 게 저번 달이었다.

20~30대 사이인 변사체는 미국, 일본, 독일 등 국적도 발견 장소도 제각각이었지만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홀로 한국을 방문했다는 점과 시신에 혈액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경동맥에 구멍 두 개가 나 있다는 점.

“그거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시신 안치실 앞을 오가는 병원 직원들을 곁눈질하며 김 경위가 물었다.

“글쎄요⋯. 한국은 그런 생물이 살 만한 데가 못 되는데⋯.”

두꺼운 수사 자료를 끌어안으며 초원은 겸연쩍게 웃었다. 초원의 말이 맞다는 듯 현우도 옆에서 거들었다.

“저희 청 생기고 나서 뱀파이어 건은 한 번도 접수된 적 없거든요.”

“그래도 일단 오늘 수습된 시신 한 번 보시고 판단하시죠.”

김 경위가 안치실로 향하는 문을 열자 두 사람은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있는데도 서늘함에 몸을 떨던 초원은 코트 깃을 단단히 여몄다. 시신 안치실이 싸늘한 탓인지, 눈앞의 백인 남자가 기괴할 정도로 핏기가 없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신원은 확인됐나요?”

현우의 물음에 김 경위는 고개를 저었다.

“나체로 발견돼서 신원은 아직 모르고요. 발견 장소 주변에서 증거 수집은 해 뒀는데 쓸 만한 게 나올까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번엔 한강이 아니었나 보네요.”

다른 시신들은 거의 한강에서 발견되어 쓸 만한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물어서 생긴 거라면⋯.”

목에 뚫린 구멍을 유심히 관찰하던 초원이 고개를 들었다.

“타액이 묻어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렇죠. 안 그래도 샘플 채취해서 국과수에 보내 놨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거기도 일이 산더미인 데다가 연말이라⋯.”

초원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일산 연구소로 보내면 더 빨리 결과를 받아 볼 수 있겠지만 아직 특이 생물 짓이라고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덜컥 일을 넘겨받아 버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결과 나오면 알려 주세요.”

이렇게 마무리 멘트를 뱉고 한 발짝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현우가 시신의 머리 쪽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킁킁대기 시작했다.

“뭐 해요, 선배?”

“여기 와서 한 번 맡아 봐요.”

얼굴을 찡그리던 초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다가갔다.

“냄새나지 않아요?”

“흠⋯. 그렇네요.”

시신의 머리카락에서 옅은 향냄새가 나고 있었다.

“어디 제사나 초상집이라도 다녀왔나?”

“외국인이 여기까지 와서 제사나 초상집엘 왜 가요?”

고개를 든 초원은 현우의 엉뚱한 소리에 피식 웃었다.

“뭐, 강남에서 ‘도를 아십니까’한테 끌려가서 제사라도 지냈나 보죠.”

이제는 김 경위까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전혀 기죽지 않은 현우는 초원이 들고 있던 수사 자료를 뺏어 들더니 무언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향 마음에 들어요?”

“네?”

집으로 가는 길, 택시 안에서 창밖만 보던 초원은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현우를 바라보았다.

‘시체에서 나는 향이 왜 마음에 들어?’

초원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 눈만 깜빡였다.

“내가 준 향수 말이에요.”

“아⋯.”

그제야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초원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맡아보기는커녕 열어 보지도 않았다. 향수는 종이 백에 담긴 그대로 방구석 어딘가에 놓여 있었다.

향수는 그냥 향수일 뿐이라고, 그냥 친한 직장 동료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눈 딱 감고 쓸 수도 있었을 거다. 초원이 여전히 혼자였다면.

기껏 선물해 준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승준이 알면 불쾌해할 테니 빨리 처리해야 했다. 그렇다고 그 비싼 걸 버리긴 아까우니 신정 때 언니에게 주려는 생각이었다.

느닷없이 초원을 향해 몸을 기울인 현우가 코를 킁킁댔다.

“근데 왜 안 써요?”

“지금 쓰던 거 다 쓰고요.”

창 쪽으로 몸을 피하던 초원이 어정쩡한 미소를 짓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집 근처에 초밥집 새로 생겼던데.”

“그래요?”

현우의 말에 초원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며 관심을 보였다.

“별점 괜찮던데 가 볼래요?”

“아뇨, 괜찮아요.”

언제 가자는 건지 말도 안 했는데 초원은 거절부터 했다. 초밥이라면 마트에서 할인 스티커를 붙이는 시간을 외우고 다닐 정도로 초원이 사족을 못 쓰는 건데 말이다.

“초원 씨, 나한테 섭섭한 거 있죠?”

“네? 아뇨.”

“그때 엄마가 연주 덕에 나 깨어났다고 했을 때 초원 씨 화난 것 같았는데.”

“아, 그거요? 괜찮아요.”

초원은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꺼내는 건가 싶었다. 그때는 화가 났지만 지금은 홀랑 까먹고 있던 일이었다.

“미안해요.”

“괜찮다니까요. 모르시니까 그렇게 말하실 수도 있죠.”

“근데 난 아니까. 엄마는 멋모르고 연주 덕이라고 했지만 난 알잖아요. 다 초원 씨 덕분인 거. 늘 고맙게 생각하는 거 알죠?”

대답 대신 생긋 웃는 초원을 보니 현우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때 이 미소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초원은 알까?

“병실에 누워 있을 때, 초원 씨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요.”

묘한 말에 초원은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이내 저 말도 늘 그랬듯 별 의미 없으리라 생각하며 넘겼다.

“초원 씨가 곁에 있어 줘서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몰라요.”

“다행이네요. 난 괜한 민폐인가 싶었는데.”

“민폐는 무슨⋯.”

민폐? 혹시 엄마가 그만 찾아오라고 눈치를 준 걸까? 현우에게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니 그랬을 법도 했다.

‘아이고, 그 아가씨는 왜 자꾸 찾아오는지. 혹시나 연주랑 마주쳐서 괜한 의심 받을까 봐 얼마나 신경 쓰인 줄 알아? 아니,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밤에 또 찾아올 건 뭐니? 눈치도 없지.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랐네. 연주가 별소리 안 해?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해.’

하지만 연주도 초원의 이야기를 현우에게서 익히 들어 아는데 별소리를 할 리가 있나. 오히려 반가워했으면 했지.

“어⋯, 혹시 우리 엄마가 기분 나쁜 소리 했어요?”

“아뇨.”

초원은 이렇게 대답했지만 현우는 안 했으면 우리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됐어요. 사과할 일 없다니까요.”

“엄마가 뭐라고 했든 신경 쓸 거 없어요. 연주도 그런 사이 아니고. 아, 그날 안은 건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그런 거지만, 이젠 깔끔하게 정리하려고요.”

초원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왜 횡설수설하며 연주와의 사이를 저에게 해명하는 걸까? 정리하든 말든 초원이 알 바 아닌데. 그냥 혼자 하는 각오 같은 건가?

“아, 뭐, 잘됐네요. 선배도 선배 인생 살아야지. 과거에 언제까지나 매여 있을 순 없으니까요.”

초원은 잘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곤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럼 초밥 먹으러 갈래요?”

“네? 나 저녁 약속 있어요.”

“그럼 내일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끈질긴 걸까? 초밥이 그렇게 먹고 싶나? 같이 갈 사람이 초원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내일도 약속 있죠. 연말인데 스케줄 꽉 차 있지. 나 인기녀인 거 몰라요? 12월에 나랑 밥 먹으려면 최소 석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하는데.”

“와, 너무하다. 우리 사이에⋯.”

초원이 피식 웃더니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손가락이 핸드폰 위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선배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팀장님인 거 알죠?”

그 말을 끝으로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초원을 현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다. 화난 게 아니었나? 아니면 이 정도로는 풀릴 화가 아닌 건가? 저 시큰둥한 태도는 어떤 감정에서 나온 걸까?

분명 제게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왜 연주를 정리하겠다는 말에도 남 일처럼 덤덤하게 구는 걸까? 설마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아니면 연애를 할 마음의 준비까지는 아직 되지 않은 걸까?

그리고 지금 대체 누구랑 톡을 하는 걸까? 바쁘게 손가락을 놀리는 그녀가 좀처럼 돌아봐 주지 않자 현우는 창밖으로 씁쓸하게 고개를 돌렸다.

[집이에요?]

6시가 넘은 시각. 오늘은 칼퇴하고 같이 저녁을 해 먹기로 했으니 승준은 이미 초원의 자취방에 도착했을 터였다.

[응. 오는 중?]

[네]

[얼마나 걸리는데요?]

[한 20분 정도? 잘 모르겠어요.]

[흠⋯.]

[근데 우리 뭐 해 먹어요?]

[뭐 먹고 싶은데요?]

[글쎄요. 근데 우리 집에 먹을 게 있긴 한가요?;;]

[어]

[뭐요?]

[30대 짐승남]

푸훗 웃음을 터트리던 초원은 현우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 멋쩍은 듯 고개를 숙였다.

[-_- 안 먹어요]

[왜? 초원 씨가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그래서 폭*-_-*식하니까 안 돼요.]

[ㅋㅋㅋㅋ]

[아 쫌 진지하게! 장부터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듯]

[그럼 20분 정도 있다가 마트에서 만날래요?]

[그래요]

초원은 마트 위치를 찍어 톡으로 보내고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누구?”

“아, 가족 단톡방이에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현우의 얼굴이 어쩐지 떨떠름해 보였다.

“초원 씨 가족은 사이좋구나. 부럽네요.”

“아, 아빠가 아재 개그를 해서⋯.”

어색한 미소를 띤 초원은 어쩐지 목 주변이 갑갑해져 목도리 아래 목걸이로 손을 가져갔다.

‘그냥 얘기해 버려?’

그렇지만 사내 연애는 안줏거리가 되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씹히고 또 씹히는 걸 익히 봐 왔다.

사실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는 건 이미 이골이 난 초원이었다. 그러니 상사한테 꼬리친 여우 같은 년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준이 깨끗한 척 혼자 다 하더니 뒤에서는 부하 직원한테 손댄 놈이란 소리를 듣게 할 순 없었다. 능력이 출중한 만큼 호시탐탐 약점을 노리는 내부의 적도 많을 게 분명했다. 초원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남자에게 약점이란 자신밖에 없었다.

좁은 택시 안, 라디오의 웅얼거림을 가르고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목도리 아래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초원을 현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길이 막혀서⋯.”

길에서부터 뛰어왔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사과는 길 막은 놈들이 해야지.”

마트 입구 벤치에 앉아 있던 승준은 웃으며 초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뛰어올 필요 없었는데⋯. 잠깐 앉을래요?”

“아뇨, 아사하기 전에 장부터 봐요.”

정말 아사할까 걱정이라도 되는 듯 진지한 초원을 보고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내가 세 살짜리도 아니고⋯.”

카트 손잡이와 승준의 손바닥 사이에 낀 손을 비틀어 뺐지만 이내 다시 붙들렸다.

“누가 잃어버릴까 봐 잡고 있는 줄 아나?”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회사에서 멀지도 않은데⋯.”

초원은 혹시 아는 얼굴이 있나 싶어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말도 아니고 월요일 저녁 시간에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굵은 손가락이 가는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 손 안 잡는다고 안 들키나? 같이 장 보는 것만 해도 뻔한데.”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손 안 잡고, 따로 온 사람처럼 멀찍이 떨어져 걸어도 같은 카트를 쓰는 데 누가 안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할까?

초원은 붙잡힌 손을 더는 빼지 않았다. 맞잡은 손의 온기와 손등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엄지의 감촉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이렇게 일상을 공유하며 연애하는 기분을 만끽하는 게 몇 년 만인지 몰랐다.

“근데 우리 뭐 해 먹어요?”

저녁과 별 상관없는 과일 코너에서 바나나를 고르던 초원이 물었다.

“초원 씨 먹고 싶은 거로 해요.”

“한두 가지가 아닌데⋯.”

바나나 한 손을 카트에 담으며 중얼거리는 걸 본 승준이 알 만하다는 듯 웃었다.

“그냥 요리하지 말고 초밥 같은 거 사 먹을까요? 집에 밥도 없는데⋯.”

초원은 저 멀리 초밥 코너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할인 스티커는 안 붙어 있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사치를 부려도 좋지 않나 싶었다.

“밥은 내가 해 놓고 나왔어요.”

“오, 팀장님 좀 짱이시다.”

그새 밥까지 해 놓을 생각을 하다니. 역시 이 남자는 일등 신랑감이라고 속으로 감탄하며 엄지를 척 올렸다. 분명 칭찬인데도 어째선지 승준의 얼굴은 영 못마땅해 보였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내 이름이 언제부터 팀장이었더라?”

회사 밖에선 팀장이 아니라며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건만, 초원은 그래도 자꾸 ‘팀장님’, ‘팀장님’거렸다.

“아, 헤헤⋯.”

자꾸 ‘팀장님’이 먼저 입에서 튀어나오는 걸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몇 년이나 그렇게 불러왔는데 하루아침에 이름이 입에 붙을 리가 있나.

“불러 봐요.”

“⋯승준 씨.”

어쩐지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이 남자랑 물고 빨고 할 땐 몰랐던 어색함이 어째서 고작 이름 하나 부르는 데 이렇게 크게 다가오는 걸까?

“그렇지.”

강아지에게 재주라도 가르친 사람처럼 흐뭇하게 웃는 승준을 보니 초원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스윽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매달리더니 올려다보며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

“승준 오빠⋯.”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그가 아니었다. 승준은 체념한 얼굴로 긴 한숨을 쉬었다.

“하⋯, 왜? 이번엔 팀장 놈이 무슨 짓을 했길래. 어쨌거나 그놈이 죽일 놈이네.”

선수를 치는 그의 팔뚝에 얼굴을 묻고 깔깔 웃던 초원이 고개를 들더니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헐, 왜 우리 팀장님 욕해요? 세상에 우리 팀장님만큼 훌륭하신 분이 어딨다고⋯.”

능청을 떠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승준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 말은 그게 아니고요.”

초원은 붙들고 있던 팔을 놓더니 과일 코너로 몸을 돌렸다.

“오빠, 나 딸기 먹고 싶은데.”

제일 비싼 딸기 박스를 품에 안은 초원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승준이 입꼬리를 귀에 걸더니 딸기 박스를 냉큼 뺏어 카트에 넣었다. 윙크 하나에 넋을 놓은 게 이쯤 되면 뱀파이어에게 매혹당한 사역마 저리가라였다.

‘아싸!’

후식으로 딸기를 실컷 먹을 생각에 신이 난 초원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게 마냥 귀여웠던 승준은 강아지라도 쓰다듬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 호주산 국거리 행사하네.’

정육 코너 앞을 지나던 초원이 걸음을 멈추더니 진열대 안에 든 고기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소고기 먹고 싶어요?”

“소는 언제나 옳죠.”

그 생글생글한 눈웃음이 예뻐 승준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소고기 카레 해 먹을까요? 집에 고형 카레 있는데.”

“그래요.”

“저기, 이거⋯.”

초원은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직원을 바라보며 고기를 가리켰다. 직원에게 500g만 달라고 하려는데 갑자기 승준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끼어들었다.

“저쪽에 한우 안심 1킬로 주세요.”

초원은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한우예요. 어마어마하게 비싸잖아요.”

직원에게 안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직원은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팔아치울 생각인지 빠른 손놀림으로 고기 무게를 재고 있었다.

“먹는 데 돈 아끼는 거 아니에요.”

“팀장⋯, 아니지.”

덤덤하던 승준의 얼굴이 날카롭게 변하는 순간 초원은 입을 다물었다.

“1킬로보다 좀 더 나오시는데 괜찮으실까요?”

저울에는 1.3kg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저게 고작 ‘좀 더’야?’

딴 것도 아니고 100g에 만원이 넘는 한우인데 쿨하게 “네, 주세요.”할 수준이 아니었다.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뗐다.

“안 괜찮⋯.”

“네, 주세요.”

이 남자에겐 이게 쿨하게 넘어갈 수준이었나 보다. 초원이 눈을 부릅뜨든 말든 그는 포장된 고기를 받아 카트에 넣었다.

“제가 얼마나 잘 먹는지는 아세요? 먹는 데 돈 안 아끼다가는 패가망신할걸요?”

카레에 넣을 감자를 찾으러 채소 코너로 향하던 초원이 투덜거렸다.

“얼마나 잘 먹는지 아니까 1킬로 달라고 했지.”

그 말에 초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나나가 1,980원, 감자는 1,750원, 한우는, 아이고⋯.’

감자를 카트에 넣으며 총액을 계산해 보다 한숨을 쉬었다.

‘오늘 내가 내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그 흔한 커피 한 잔도 산 적 없었다. 지갑을 꺼내기만 해도 험하게 인상을 쓰는 통에 요즘은 계산대 앞에서 핸드백 끈도 못 고쳐 맸다. 오늘은 딸기만 사 달라고 하고 나머지는 초원이 낼 생각이었건만 저 한우가 문제였다.

‘한우는 출혈이 쫌 심하게 큰데⋯.’

스티커에 찍힌 숫자는 무려 여섯 자리였다.

‘아, 근데 팀장님이 이때까지 쓴 게 얼마야? 그럼 나도 이 정도는 군말 없이 써야지.’

마음은 그렇게 먹어도 벌써 이번 달 카드값이 무서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속옷 지른 거 취소해야 하나?’

불시에 촌스러운 곰돌이 속옷을 들키느냐 아니면 예쁜 속옷 입은 거지가 되느냐를 두고 치열한 고민을 벌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승준은 자꾸 옆에서 “이거 먹을래요?”, “저거 먹을래요?” 하더니 점점 묻지도 않고 막 집어넣고 있었다.

‘흠⋯, 이거 카레랑 먹으면 딱인데⋯.’

바삭해 보이는 새우튀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옆에서 승준이 한 팩을 덥석 집더니 카트에 넣어 버렸다.

‘뭘 보질 못하겠네⋯.’

‘헐⋯.’

계산대 디스플레이에 찍힌 금액을 보고 잠시 정신줄을 놓았던 초원은 카드를 꺼내는 승준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오늘은 내가 살게요.”

초원의 입에서 갑자기 외계어가 튀어나오기라도 한 듯 눈살을 찌푸린 그는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초원은 젖먹던 힘을 다해 손을 붙잡았다.

“내가 산다니까요.”

“왜 이래, 이거?”

때아닌 힘겨루기에 계산대 뒤 직원이 멋쩍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다른 손으로 덥석 초원의 두 손목을 한꺼번에 붙든 승준은 붙잡힌 손을 쉽게 빼냈다.

‘엄마야, 남사스럽게⋯. 침대에서 하던 버릇이 밖에서도 툭 튀어나오네.’

낄 때 안 낄 때 모르는 음란마귀의 낄낄거림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초원은 손을 비틀어 뺐다. 승준이 카드를 직원에게 넘기는 모습을 부루퉁하게 바라보다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 팀장님 진짜⋯.”

“쓰읍⋯.”

“아, 승준 씨 진짜⋯.”

답답하다는 듯 흘겨보는 초원을 향해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어디 아파요?”

차를 몰던 승준은 조수석 쪽을 곁눈질했다. 초원의 손에는 마트 약국에서 산 진통제가 들려 있었다.

“아, 그냥⋯. 그날이라⋯.”

겸연쩍게 웃은 초원은 약상자를 핸드백에 집어넣더니 초콜릿을 꺼내 들었다.

“아프면 말하지. 장은 나 혼자 봐도 됐는데.”

“낮에 약 먹어서 괜찮아요. 이건 그냥 미리 사 둔 거예요.”

초원은 초콜릿을 한 조각 쪼개 승준의 입술 앞으로 내밀었다. 승준은 익숙한 듯 여전히 운전대 너머를 응시한 채로 입술을 벌렸다. 입속으로 쏙 초콜릿이 들어가고 입술에 손가락이 와 닿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손끝에 입을 맞췄다. 수줍은 웃음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그나저나 아쉬워서 어떡해요?”

“뭐가?”

“오늘 밤 기대하고 오신 거 아니에요?”

초원은 초콜릿을 오물오물 먹으며 얄밉게 웃었다.

“후식은 그냥 딸기로 만족하셔야겠네.”

승준은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피식 웃었다.

“아, 근데 딸기 안 좋아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주면 먹는데. 아, 근데⋯.”

“네?”

“말투가⋯.”

“네?”

“그, ‘시’ 자 좀 빼고 말해요.”

‘시’ 자라니⋯. 초원은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오시다, 하시다 할 때 ‘시’ 자.”

“아⋯.”

“거리감 느껴지게⋯.”

아무 생각 없이 습관대로 쓴 말투가 승준은 내심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그 부루퉁한 얼굴을 보며 옅게 웃은 초원은 운전대에 걸쳐진 손 하나를 잡아끌었다.

“지금은요?”

치맛단 아래, 허벅지에 그 손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거리감 안 느껴지죠?”

대답 대신 승준의 입꼬리가 은근슬쩍 올라갔다. 허벅지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초원은 불현듯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떠올렸다.

“근데 왜 자꾸 돈 못 쓰게 해요?”

“왜? 그러면 안 되나?”

“서로 공평하게 쓰면 좋잖아요.”

“내가 더 쓰는 게 공평한 거 아닌가? 벌어도 내가 더 버는데.”

승준은 사회생활도 오래 했고 집도 차도 있어 여유가 넘쳤지만 초원은 달랐다. 언젠가 팀원들이 모여 점심을 먹던 자리에서 아직도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다며 푸념하던 걸 그는 잊지 않았다. 빠듯할 게 뻔한데 지갑을 열게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쓰는 게 아니라 다 쓰고 있으면서⋯. 계속 얻어먹기만 하니까 빈대 같잖아요.”

빈대 같다는 말에 승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 돈 내 여자한테 쓴다는데 무슨 빈대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초원의 입꼬리가 눈꼬리를 만날 기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남자 연애학원 다녔나? 장학생급인데? 아니지, 당장 가르쳐도 될 레벨인 듯.’

저 박력 넘치는 말 한마디에 초원은 내기고 뭐고 다 집어 던지고 확 덮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망할 자궁이 눈치 없이 깽판을 치지만 않았어도⋯.

달아오르는 몸을 식히려 의미 없는 손부채질을 하던 초원은 또 새침데기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괜한 소리를 했다.

“칫, 그러다 나중에 수틀리면 딴소리하는 거 아니에요?”

“나 그런 쫌생이 아니라니까. 대체 전에 어떤 놈을 만났길래 이래요?”

그 말에 잊은 지 오래됐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초원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랑 사귀니까 콘돔값 안 들어서 좋다는 놈이랑 만났지.’

처음엔 뭐든 다 해 줄 것처럼 굴더니 점점 잡은 고기에 먹이 안 주던 남자였다. 사귀는 내내 결혼이니 뭐니 사탕 발린 소리를 하더니만 막판에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꾼 남자이기도 했다.

초원은 해가 갈수록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금 와서 보니 어째서 그런 놈이랑 5년이란 시간을 허비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도 진짜 사람 보는 눈 없었구나.’

승준은 갑자기 조용해진 조수석 쪽을 곁눈질했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걸 보니 피가 끓어올랐다.

“그놈 이름, 생년월일, 주소.”

“네?”

“주소 모르면 직장이나 학력.”

“왜요?”

“일산 연구소 토끼 밥 주게.”

식인 토끼 격리실에 던져 넣겠다는 살벌한 소리를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하는 남자를 보며 초원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농담이죠?”

“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이나?”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게 정말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설령 말뿐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분노해 주니 답답했던 속이 시원해졌다.

“됐어요. 복수 같은 거 해서 뭐 하게요.”

그런 흔한 똥차에겐 복수할 정도의 관심도 사치였다.

“다 잊을 정도로 행복하게 잘 사는 게 복수죠.”

“그건 내가 책임질게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초원은 방긋 웃었다.

‘이 남자가 내 남자라니. 그동안 지지리도 안 풀린 게 다 이 남자 만나려는 거였나?’

원룸 주차장으로 들어온 차가 멈춰 섰다. 안전벨트를 푼 초원은 냉큼 두 손을 뻗어 승준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입술이 서로를 달콤하게 머금었다.

“자취하니까 제일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초원은 승준의 옆에 찰싹 붙어 생글생글 웃었다.

“뭔데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를 퍼서 그릇에 담던 그는 초원을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카레에 고기만 잔뜩 넣어도 되고 밤에 김치찌개 고기 건져 먹어도 등짝이 무사하다는 거죠.”

피식 웃은 승준은 국자 한가득 고기를 퍼 초원의 그릇에 올렸다.

“잘 먹을게요.”

초원은 식탁에 마주 앉은 남자 친구를 향해 활짝 웃었다. 밖에서 하는 데이트도 좋지만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나누는 것만큼 설레는 일도 없었다.

“나도 잘 먹을게요.”

“팀, 아니지 승준 씨가 거의 다 차린 거면서⋯.”

초원이 한 거라곤 부엌 어딘가에서 화석이 되어가고 있던 고형 카레를 발굴하고 감자 껍질만 몇 알 벗긴 게 다였다.

“한우 안심 카레라니 럭셔리하다. 꼭 랍스터 라면 느낌이지 않아요?”

숟가락을 들던 승준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집에 온 다음부터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발그레한 볼로 계속 조잘거리는 그녀가 귀여웠다.

그는 건성으로 카레를 비비며 마주 앉은 얼굴을 살폈다. 카레를 한술 떠 후후 불다 입속으로 넣은 초원이 이내 눈을 감고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요리해 주는 보람이 있는 여자였다.

“와, 비싼 고기는 다르네요. 오래 안 익혀도 진짜 야들야들하다.”

“거봐요. 먹는 데 돈 아끼는 거 아니라니까.”

그제야 승준은 흐뭇하게 웃으며 첫술을 떴다.

새우튀김 하나를 집어 카레에 찍어 먹던 초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승준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왜?”

시선을 느낀 그가 묻자 초원이 배시시 웃더니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승준 씨는 겉바속촉인 것 같아요.”

“겉바 뭐?”

한 번씩 초원이 이런 뜻 모를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이 어느새 요즘 유행어도 모르는 아재 반열에 오른 건가 싶어 당혹스러웠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이요.”

초원이 한 입 베어 문 새우튀김을 보란 듯 흔들며 설명했다. 새우튀김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자신을 보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는 의미를 몰라 승준의 미간은 더욱 좁아졌다.

“겉은 딱딱한데 속은 부드럽잖아요.”

그제야 이해한 그는 쑥스럽게 웃었다.

“무뚝뚝의 끝을 달릴 줄 알았는데 의외예요.”

그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은 승준은 숟가락으로 카레를 뒤적였다. 의외라니, 초원이 보기엔 그래도 나아진 모양이었다.

“예전엔 그랬지. 말로 표현도 못 하고⋯. 그러니까 오해밖에 안 생기고⋯.”

봉인되어 있던 옛 추억이 승준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일렁이는 불빛과 달아오른 숨소리, 그리고 그 끈적한 열기까지 생생했다.

‘오늘 밤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여느 때처럼 마음을 감추고 그것이 제 의무인 양 사무적으로 물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던 날이었다.

‘저 좀 사랑해 주세요.’

그 붉은 입술에서 탄식처럼 뱉어져 나온 말이었다. 그녀의 눈에 촉촉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승준은 이런 말을 하게 만든 자신이 싫어졌다. 다시는 비겁하게 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침묵을 깼다.

‘그건 늘 하고 있는데.’

초원은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뭐야? 전 여친 생각이라도 하나?’

초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뒤늦게 느낀 승준은 겸연쩍게 웃더니 딴소리를 했다.

“참, 오늘 병원 갔다 온 건 어떻게 됐어요? 진짜 뱀파이어 소행인 것 같아요?”

“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사체는 그래 보이는데 꼭 그게 뱀파이어 짓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흠, 그렇지.”

“특관청 생긴 이래로 뱀파이어는 접수된 적도 없다면서요?”

“아, 그건 엄밀히 따지면 사실이 아닌데. 등록된 적은 없지만 접수는 있었거든.”

“왜요? 놓쳤어요?”

“그건 아니고 추방시켜서. 옛날에 일본 쪽에서 세력 다툼하다가 밀려난 무리가 있었는데, 멋모르고 우리나라가 블루 오션이라고 왔다가⋯.”

승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며 물잔을 기울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마늘 먹은 사람 피 마시고 쓰러져서 응급실로 실려 가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지.”

“하하, 역시 한국이 뱀파이어 청정국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그래도 이번엔 뱀파이어가 머리를 좀 썼을 수도 있고⋯.”

그 말에 초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같은 사인으로 죽은 이들이 모두 외국인인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긴 피해자가 다 마늘 잘 안 먹는 나라 출신이네요.”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던 승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번엔 증거가 좀 나왔나?”

“그런 것 같아요. 일단 상처 주변에 타액이 있는지 본다고 검사 맡겨 놨다네요.”

“타액에서 혈액 항응고제 검출되면 뱀파이어일 가능성이 크니까 항응고제 검사도 신청해 놓으세⋯.”

승준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인상을 구겼다.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지?”

그 자조적인 한탄에 초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책상머리에서의 습관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밥상머리에서까지 튀어나왔다. 초원에게는 팀장이라고 부르지 말라 해 놓고는 팀장 짓을 해 버린 자신이 한심해 승준은 긴 한숨을 쉬었다.

“팀장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잖아요?”

초원은 일부러 극존칭을 쓰며 얄밉게 눈을 깜빡였다.

“우리 집에 우렁총각 생겼네.”

초원은 설거지를 하는 승준의 너른 등을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와락 껴안았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나며 그 넓은 등이 잠시 들썩였다.

“우렁각시의 남자 버전은 우렁서방 아닌가?”

승준은 한 팔을 들어 올리고 몸을 조금 틀었다. 등에 딱 붙어 있던 초원이 팔 아래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옆구리에 매달렸다. 아기 원숭이처럼 안긴 모습에 아빠 미소를 지은 그는 초원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허리 아프다면서요. 누워 있어요.”

“약 먹었잖아요.”

저녁을 먹고 나니 약효가 다 떨어졌는지 허리가 다시 아파 왔다. 욱신거리는 불편함이 끊어지는 아픔으로 변하기 전에 초원은 약국에서 사 온 진통제를 삼켰다.

“그래도 약 먹는다고 바로 낫나? 가서 누워 있어요.”

“그래도 하늘 같은 팀장님이 설거지하는데 주임 나부랭이가 어떻게 누워 있어요?”

반 농담, 반 진담이었다. 승준이 자신의 자취방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는 이 어색한 풍경을 술도 안 마신 맨정신으로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옆에서 귀여운 척이라도 하려 했는데 이 남자는 위협적인 척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당장 가서 안 누우면 내가 들쳐 메고 가서 침대 위로 던질 거예요.”

“오호⋯.”

기대에 차 생글거리는 눈빛에 승준은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그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장갑을 벗어 던졌다.

“아, 진짜 말 안 듣네.”

“앗!”

초원의 몸이 번쩍 위로 들렸다. 들어 올릴 땐 박력 넘치기 그지없더니 내려놓을 땐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되는 양 침대 위로 살포시 놓았다.

이불을 꼼꼼히 둘러 주는 손길을 느끼며 초원은 공주님이라도 된 기분을 만끽했다.

“여기 얌전히 있어요.”

승준이 몸을 일으키고 싱크대로 가려는 찰나, 초원은 이불 속에 묻혀 있던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앗, 까먹은 거 있는데⋯.”

그 말에 승준은 은근히 입꼬리를 올리더니 입술에 쪽 소리 나도록 입을 맞췄다.

“아니, 그것도 좋지만 내 핸드폰⋯.”

초원이 쑥스러운 얼굴로 식탁 위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김샌 듯, 쓰게 웃은 승준이 이내 핸드폰을 가지고 돌아왔다. 손을 내밀어 받으려는 찰나 그는 핸드폰을 등 뒤로 감추더니 몸을 숙였다.

“배달비.”

키득키득 웃은 초원은 그가 내민 입술에 쪽쪽 두 번이나 배달비를 냈다.

“아, 그건 내일 내가 버릴게요.”

핸드폰으로 몰래 하늘 같은 팀장이 설거지를 하는 진귀한 풍경을 찍던 초원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승준은 냉장고 옆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었다.

“잠깐 내려갔다 오기만 하면 되는데, 뭐.”

쓰레기봉투를 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승준의 움직임이 별안간 잠잠해졌다. 핸드폰을 놓고 몸을 웅크리던 초원은 현관이 조용하자 고개를 들었다. 승준의 날카로운 시선은 신발장 위의 작은 화분으로 향해 있었다.

‘왜 그러지?’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그제야 화분 뒤에 놓인 작은 종이 백을 눈치챘다. 가슴이 빠르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헉, 저게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승준은 아니나 다를까 종이 백 안을 들여다보더니 집어 들었다.

“이건 뭐예요?”

초원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저 짐승 같은 감하고는⋯.’

난처한 기색을 눈치챈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차 주임?”

그 세 글자를 뱉는 목소리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다. 초원은 눈을 감고 긴 한숨을 쉬었다.

“받고 싶어서 받은 거 아니에요. 필요 없다고 했는데 생일 선물이라고 주는 거 안 받기도 무안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쓸 생각 요만큼도 없고 다음에 언니 주려고 그냥 둔 거예요.”

길게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아 숨도 쉬지 않고 해명했지만 승준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한마디 따지지도 않고 그는 종이 백을 집어 든 채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현관문이 쾅 닫히고 초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이다.’

다시 침대에 누워 베개에 뺨을 묻고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왜 선배는 또 쓸데없이 안 하던 짓을 해서⋯.’

이내 문밖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승준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할지 잠자코 기다렸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냉장고로 가더니 딸기를 꺼내 씻기 시작했다.

연유를 잔뜩 뿌린 딸기를 가져와 침대 머리맡에 앉은 승준이 그제야 길고 불편했던 침묵을 깼다.

“흠, 별말 안 하네?”

“내 잘못인데요, 뭐.”

초원은 한탄하는 투로 중얼거리며 침대 정면에 있는 TV를 켰다.

“알긴 아네.”

승준은 따갑게 쏘아보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포크로 딸기 하나를 찍어 연유를 잔뜩 묻혔다. 그가 주는 딸기를 받아먹으면서도 초원은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예쁜 것도 잘못이지.”

풋, 웃음을 터트리는 초원의 턱을 잡고 격하게 입술을 집어삼켰다. 딸기의 상큼함과 연유의 달콤함이 입속을 감돌았다. 딸기가 이토록 맛있는 건지 승준은 이날 처음 알았다.

초원은 단단한 품에 안긴 채로 TV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드라마의 내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아랫배를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차갑던 아랫배가 따뜻해지면서 몸은 편안해졌지만 마음속으로는 불편한 감정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여자 많이 만나 봤겠지?’

날 때부터 여자를 이렇게 잘 아는 남자는 없다. 다들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생리통에는 배를 따뜻하게 해 주는 게 좋다’는 여자만의 상식을 체득하게 된다.

초원은 저녁을 먹다 말고 허공을 응시하던 승준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아련한 눈빛은 분명 여자를 향한 거였겠지.

‘어떤 여자였을까?’

분명 이 남자와 잘 어울리는 예쁘고 잘난 여자였을 거다.

‘그 여자한테도 이렇게 해 줬을까?’

배를 문지르는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초원은 목걸이로 손을 가져갔다.

‘많이 사랑했겠지?’

갑자기 정수리에 입술이 꾹 와 닿았다.

‘어쩌다 헤어졌을까?’

초원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그의 세찬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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