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8)

사랑 타령은 퇴근 후에

승준은 작은 투명 케이스에 든 물건을 말없이 응시했다.

‘겨우 100원?’

고작 100원짜리를 가지고 서로 멱살 잡고 싸우다 집에 불을 지르다니. 세상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 천지였다.

고개를 들고 회의실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았다. 30cm 정도 높이의 식물, 아니 식물이라기에는 기괴한 회색빛인 생물에는 콩깍지 같은 게 열 개 정도 달려 있었다. 깍지 하나에 100원짜리 세 개니까 저 돈 나무 하나에 30개, 겨우 3,000원이었다.

‘만 원짜리면 이해하겠는데⋯.’

이걸 갖겠다고 싸운 발견자들도 이해가 안 되지만 이걸 맡겠다고 싸우려 드는 특이물체1팀 팀장은 더 이해가 안 됐다.

‘마누라 몰래 비상금이라도 챙길 생각인가⋯.’

“아니, 씨앗은 물체죠.”

식물은 생물이니까 이쪽에서 맡는다는 특이생물관리과 과장 말에 특이물체1팀 팀장이 열을 내며 우기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서로 맡기 싫어서 싸우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서로 맡겠다고 난리라니.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100원짜리 다 수거해서 처리할 테니까⋯. 거, 조승준 팀장 쪽에서 남은 식물은 폐기하든가 연구소 갖다 주면 조 팀장도 편하고 좋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항상 일손은 부족하고 일은 넘치는 3팀이었다. 이렇게 귀찮은 일을 안 맡을 수 있으면 좋은 거지만, 저 빤히 보이는 속셈이 괘씸해서 순순히 넘어가 줄 순 없었다.

승준은 핸드폰으로 검색해 둔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씨앗은 생물입니다. 겨울잠 같은 깊은 휴면 상태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생장할 수 있고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식물의 씨앗은 동물의 배아에 해당합니다.”

1팀 팀장이 한숨을 쉬더니 못마땅한 듯 인상을 구겼다.

“정 팀장님 말씀대로 이 씨앗이 물체면⋯.”

승준은 손에 든 투명 케이스를 살짝 흔들었다.

“그럼 겨울잠 자는 곰은 앞으로 물체팀에서 맡으실 겁니까?”

“그래서 우리 팀에서 맡게 됐으니까 한동안 수고 좀 해 주세요.”

승준은 회의실에 앉아 3팀 팀원들을 둘러보며 당부했다.

“이거 그냥 연구소에 가서 맡기면 끝나는 거 아니에요, 팀장님?”

‘한동안’이라는 말에 희경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면 좋겠지만 발견자들이 이미 써 버린 동전이 많아서⋯.”

회의실 테이블 양쪽에서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걸 다 어느 세월에 수거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돈 나무 뺏기고 발견자들 속 좀 쓰리겠는데요.”

병훈이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화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뭐, 그 사람들은 이미 연구소에서 기억 억제술을 받았으니까⋯.”

사회 안정을 위해 일반 시민들은 초자연 현상을 몰라야만 했다. 그래서 현상에 노출된 일반인은 기억 억제술을 받는 게 원칙이었다. 가끔은 특관청 직원들도 받아야 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리고 위폐 유통으로 처벌 안 받는 것만 해도 다행이죠.”

이 건에 사법 절차를 진행한다는 건 대중들에게 ‘여러분, 돈 나무가 진짜 있습니다!’라고 떠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 수거는 어떤 식으로 하나요?”

초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승준은 입술을 한층 굳게 다물었다. 망할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흠흠, 그건 한국은행에 가서 직접 분류해서 수거하면 됩니다.”

“직접요?”

아직 누가 맡을지 말도 안 했는데 나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초원의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그 슬픈 강아지 같은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보며 승준은 속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지금은 안 돼.’

초원이 저렇게 큰 눈을 깜빡이며 쳐다볼 때마다 얼굴을 움켜쥐고 키스를 퍼붓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그녀는 알 턱이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고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장비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건 방사선 노출 문제도 있고⋯. 여기 불임 되고 싶은 사람 없잖아요?”

순간 펜을 놀리던 초원의 손가락이 멈췄지만 승준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 하필 가장 아픈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수작업이 귀찮기는 하지만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승준은 앞에 놓인 투명 케이스를 열어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 들었다.

“씨앗은 전부 1998년도가 찍혀 있고 여기 가장자리를 보면 꼬투리에서 떼어 낸 자국이 있습니다.”

팀원들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호기심이 인 현우는 깁스를 하지 않은 손으로 지갑을 꺼내 동전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거 참고삼아서 분류 작업하세요.”

승준은 씨앗을 다시 케이스에 넣고 희경을 향해 밀었다. 희경이 이걸 왜 자신에게 주냐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타 부처에 요원만 보내기도 그렇고 둘보다는 셋이 나을 테니 안 사무관이 맡아 주세요.”

벌레 씹은 얼굴이 된 희경을 보고 초원은 속으로 웃었다가 다음 말에 굳었다.

“차 주임이랑 홍 주임이 따라가고.”

“네⋯.”

대답하는 초원의 말꼬리가 유독 길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던 승준은 팀 회의 내내 초원 쪽을 곁눈질했다.

‘화난 건 아니겠지?’

희경과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던 초원이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흘끗거렸다. 승준은 웃어 주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눈빛만 보냈다. 느닷없이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목덜미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허⋯. 아파서 앓는 게 아니라 딴 걸 앓는 거였네.’

여태까지 회사에서 초원이 저렇게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감기라도 걸렸나, 열이라도 있나 싶어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완전 헛짚었구나 싶었다.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시간 낭비했네.’

고개를 숙인 채로 펜 끝을 깨물던 초원이 다시 이쪽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기고 싶었으면 말이나 하든가 하지.’

그는 초원을 향해 피식 웃고는 회의 자료로 시선을 돌렸다.

‘관상용 조각 미남⋯.’

서류를 넘기는 승준을 흘끗 훔쳐보던 초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조각은 관상용이지.’

몇 년 전, 특관청 여직원들끼리 가진 모임에서 모 간부의 비서가 조승준 팀장을 두고 그랬다.

관상용 미남이라고.

어떤 여직원이 이곳에 취직한 지 얼마 안 돼 팀장의 잘생긴 얼굴만 보고 대시를 했는데 칼 같이 거절당했단다. 그래서 마음에 스크래치가 생겼다며 하소연하는 직원에게 청에 다닌 지 오래된 한 간부 비서가 그랬다.

‘조승준 팀장님은 관상용 미남이지. 잘생겼는데 얼굴에 ‘만지지 마시오.’가 궁서체로 써 있잖아.’

그러게, 만지지 말라면 만지지 말았어야지. 괜히 술 취해서 입술 한 번 맞댔다가 어느새 몸도 마음도 다 넘어가 버렸다.

‘근데 먼저 만진 건 팀장님 아닌가?’

반년도 넘게 지난 일인데 입술에 닿았던 그 뜨거운 손끝을 떠올리면 여전히 몸속 깊은 곳이 움찔했다.

‘아, 진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초원은 또 몰래 승준의 팔뚝을 훔쳐보고 있었다.

‘덥지도 않은데 팔뚝은 왜 걷어붙이고 난리람⋯.’

정작 난리 난 건 그녀의 몸이었다. 아까 눈이 마주치면서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숨이 가빠져 오기 시작했다.

지금 승준이 팀원들에게 뭔가 열심히 지시를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한껏 예민해진 가슴을 꾹 눌러 감싸던 저 팔뚝의 단단함만이 자꾸 떠오를 뿐이었다.

또 눈이 마주쳤다.

그의 묘한 눈빛에 초원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곧바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홍 주임, 잠깐 나 좀 봅시다.”

회의가 끝나고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던 초원은 화들짝 놀랐다. 승준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팀원들이 눈치를 보더니 하나둘씩 회의실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홍 주임, 뭐 실수한 거 있어요?”

옆에 선 현우가 속삭이고 초원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차 주임, 문 닫고 나가세요.”

회의실 밖으로 나가던 현우가 그 말에 멈춰 섰지만 한 팔은 깁스 신세, 다른 팔은 이미 회의 자료를 들고 있는 신세라 남은 손이 없었다. 허둥지둥하는 그를 본 초원이 다가가 문을 닫았다.

“이리 와 봐요.”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초원을 보고 승준이 손을 내밀었다. 화난 투로 잠깐 보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목소리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좀 보자’는 이유가 다분히 사적인 게 분명해지자 초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팔짱을 꼈다.

“왜 그러시는데요?”

“와야 얘기를 하든가 하지.”

“여기서도 잘 들리는데요.”

“아, 진짜 고집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승준이 성큼성큼 초원을 향해 걸어왔다. 껴안으려는 건가 싶어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승준은 초원의 목덜미 근처에 코만 대고 있었다.

“뭐 하세요?”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맨살에 숨결이 닿자 간지러웠다. 몸을 움츠리는 초원을 보고 그는 씨익 장난스럽게 웃었다.

“초원 씨.”

“네?”

“그거 알아요?”

“뭘요?”

“초원 씨 흥분하면 체취가 달라지는 거.”

듣도 보도 못한 소리에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들킨 건가 싶어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아, 뭐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초원은 승준의 팔을 뿌리치고 회의실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른 짐을 챙겨 나가지 않으면 위험했다.

“내 말이 틀린지 맞는지 확인해 볼까?”

뒤에서 구릿빛 팔뚝이 불쑥 튀어나와 허리를 휘감았다.

“지금 젖어 있죠?”

그의 품에 닿은 작은 등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세찬 심장 박동이 얇은 셔츠와 블라우스를 뚫고 초원의 심장까지 쿵쿵 울렸다.

“하아, 진짜⋯.”

한숨을 내쉬자마자 승준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외근 갈래요? 우리끼리⋯.”

“저 이미 외근 있거든요.”

“한국은행은 안 사무관이랑 차 주임, 둘이서 가라고 하고⋯.”

“아, 저 이 일에 필요 없는 거였어요? 그럼 아주 빼 주시지.”

초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았다.

“아니, 오늘 오후만⋯.”

“팀장님 바쁘신 분인 줄 알았는데⋯. 그럴 시간 있으시면 직접 와서 도와주시는 건 어때요?”

팔을 떼어 낸 초원은 다시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물건을 집어 들고 나가려는데 승준이 허리춤에 손을 짚은 자세로 막아섰다.

“내기는 적당히 하고 그냥 지지? 손해 볼 것도 없는데⋯.”

“내기는 팀장님이 먼저 시작하신 거 아니에요? 아직 3주도 안 됐는데 이렇게 인내심이 없으셔서야⋯.”

초원이 얄밉게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지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앞에 선 남자는 싱글벙글이었다.

“아니, 나는 어차피 초원 씨가 질 게임인데 애써 버티는 게 안쓰러워서 그러지.”

“헐, 누가 지는 게임일지는 붙어봐야 아는 거죠.”

“우리 이미 붙어봤잖아. 항상 초원 씨가 먼저 나가떨어지던데?”

“네?”

생각도 못 한 음담패설이 이 돌부처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초원의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노려 승준이 입술을 겹쳐왔다.

직원들 득시글거리는 회사 한가운데라는 것도 잊고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끈적하게 머금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입술이 떨어지자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승준이 물었다.

“흠, 어쩌죠? 나 데이트 있는데⋯.”

데이트라는 말에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누구랑.”

“직업 군인이래요.”

금방 그렇게 달콤하게 입을 맞춰놓고 딴 남자랑 데이트라니⋯. 승준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입술에 번진 립스틱을 손가락으로 닦아 낸 초원은 회의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려 장군이래요. 이순신 장군이라고.”

그제야 100원짜리 동전을 말한 거란 걸 깨달은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초원은 씨익 웃더니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나가 버렸다.

***

금속 부딪히는 소리에 이따금 한숨 소리가 섞여 들었다. 창문 하나 없는 방에 갇혀 청원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혔다.

‘이게 벌써 며칠 째야?’

한국은행 직원이 동전 묶음을 풀어 건네주면 초원은 그 속에서 1998년도 발행 주화를 찾아 가장자리를 확인한 다음, 특이 생물이면 테이블 가운데의 상자에 넣고 계수기 숫자를 하나 올렸다. 멀쩡한 동전인 경우에는 한은 직원에게 다시 돌려주고 개수가 맞는지 확인하는 지루한 작업이 계속됐다.

하루 종일 100원짜리 동전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더니 눈이 빠질 것 같았다. 분명 배정된 인력은 셋인데 제대로 1인분을 해내는 건 초원뿐이었다. 손 하나를 못 쓰는 현우는 초원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고 희경은 툭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방 밖으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아이씨, 짜증 나게⋯.”

30분 넘게 사라졌다 겨우 돌아와 앉은 희경이 일을 시작하자마자 짜증을 냈다. 얼굴을 찡그리며 긴 손톱을 내려다보더니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 새로 한 네일인데⋯.”

그러고도 희경은 이 네일이 얼마짜리인지, 이거 한다고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왜 팀장은 이런 일을 남자들 안 시키고 여자들한테 시키는 건지 불평을 끝없이 쏟아 냈다.

이런 분위기인데 대놓고 이어폰을 낄 수도 없어 초원은 꾹꾹 참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죽음의 조를 짠 거야? 팀장님 보면 명치 세게 때려 줘야지⋯.’

“나 먼저 간다. 자기들도 하던 것만 대충 마무리하고 가.”

6시가 되려면 아직 30분도 넘게 남았는데 희경은 자체 퇴근해 버렸다.

‘그래, 차라리 없는 게 도와주는 거지.’

초원은 새 동전 묶음을 쫙 펼쳐 연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오늘은 6시 땡 하면 가요.”

현우의 말에 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직원들을 붙잡고 계속 야근을 하는 것도 무리였다.

“오늘 약속 있어요?”

“네? 아뇨.”

초원은 분주히 동전을 골라내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야근할 줄 알았으니 저녁 약속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전어 먹으러 갈래요?”

“전어요?”

그제야 고개를 든 초원이 의아한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응. 초원 씨 전어 좋아하잖아요.”

그 말에 초원은 피식 웃었다.

“선배가 사는 거예요?”

“당연하지.”

활짝 웃는 현우를 향해 어렴풋이 웃은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바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잘 먹을게요.”

초원은 소주잔을 들어 현우의 잔에 부딪쳤다.

“맛있게 먹어요.”

“벌써 맛있네요.”

초원은 고소한 전어를 잔뜩 집어 올려 입에 넣었다. 집 나간 며느리가 어째서 돌아오는지 충분히 납득이 되는 맛이었다. 물론 굳이 시월드로 돌아가지 않아도 전어 먹을 곳은 넘친다는 딴지는 걸지 않기로 했다.

전어를 오물오물하며 시선을 들었더니 현우가 먹지는 않고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저런 미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근데 왜 느닷없이 전어를 사 주는 거예요?”

오늘이 무슨 날도 아니고, 별일도 없는데 갑자기 밥을 사겠다는 게 의아했다.

“원래 사 주려고 그랬거든요.”

씁쓸한 미소가 현우의 얼굴 위로 번졌다.

“그날 밤에 ‘초원 씨 전어 사 줘야지.’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사고 나서⋯. 못 사 줄 뻔했네.”

그 말에 한숨을 쉰 초원은 소주잔을 다시 채우고 비웠다.

“몸은 괜찮아요?”

현우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이거만 풀면 더 바랄 게 없는데 말이죠.”

깁스를 한 왼팔을 들어 보인 그는 입술을 비죽였다.

“갑갑해도 어쩔 수 없으니 좀 참아요.”

그 말투가 꼭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이렇게 아이 취급을 하면 듣기 싫은데 이상하게 초원이 하면 듣기 좋았다. 그리고 이제야 현우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초원의 가방 안에 있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 일하는 중?]

[아뇨]

[저녁은?]

[먹고 있어요]

[왜?]

‘밥때 돼서 밥 먹는다는데 ‘왜?’라니 무슨 질문이 이래?’

사실 ‘같이 저녁 먹자 하려고 문자했는데 벌써 먹고 있다 하니 매우 실망했다.’가 아주 잘 함축된 한마디인 건 초원도 알고 있었다.

‘쫌 귀엽네⋯.’

피식 웃는 초원을 현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흠, 남자?”

솔직하게 답하면 캐물을까 두려웠던 초원은 대충 고개를 젓고는 계속 답장을 썼다.

[팀장님도 저녁 맛있게 드세요. 이따 집에 가서 전화할게요.]

메시지가 전송된 걸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참, 나 초원 씨 면회 온 거 기억나요.”

분명 의식이 없었는데 기억이 난다니⋯. 초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초원 씨가 막 내일은 꼭 일어나 달라고 그랬잖아요.”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주변에서 오고 간 대화를 듣고 기억하는 일도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 듯했다.

‘헐, 설마 내가 운 것도 다 들은 건 아니겠지?’

혼자 정신줄 놓고 신파극 찍은 걸 생각하자 얼굴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초원은 고개를 숙이고 죄 없는 콘 치즈를 뒤적였다.

사실 현우는 다 들었다. 그리고 놀랐다. 늘 무심하고 자존심 센 초원이 그의 앞에서 운 건 처음이라서. 마음이 너무 아파 달래 주고 싶은데도 그럴 수 없어 얼마나 끙끙 앓았는지 초원은 모를 거다.

아마 이것도 모를 거다. 매일 초원이 찾아오는 시간만 기다린걸. 죽음의 문턱 앞에서,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막막함 앞에서 매일 들려오던 초원의 목소리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리고 손에 감기는 그 서늘한 체온과 따뜻한 손길도. 일어나 그 손을 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힘없는 현우의 목소리에 초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은 지켰잖아요. 그러면 됐죠.”

“박 주임님이 그러던데, 초원 씨가 나 깨우려고 고생 많이 했다고⋯.”

깨울 방법을 찾았다며 꼭 살려 주겠다고 한 후로 초원이 찾아오지 않아 걱정했었다. 희미한 감각과 몽롱한 의식밖에 남질 않아 며칠이 흘렀는지는 몰랐지만, 어렴풋이 알았다. 초원이 오지 않은 지 꽤 되었다고. 대체 무슨 방법이길래. 설마 위험한 일은 아니길. 초원이 다치거나 혹시 더 끔찍한 일을 당한 건 아니길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깨어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는 어찌나 미안했던지. 저 때문에 그 힘든 일을 겪어야 했다니 말이다. 그리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를 위해 이렇게까지 애를 써 주다니.

하지만 그 사건은 초원에게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한숨을 쉰 그녀는 화제를 돌려 버렸다.

“다신 그 고생 안 할 거니까 또 장산범 쫓아다니기만 해 봐요.”

장산범 소리에 쓰게 웃은 현우는 소주를 들이켰다.

“아깝네. 다 잡은 거였는데⋯.”

“잡기는⋯. 잡힐 뻔해 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던 초원은 단호하게 표정을 고치곤 현우를 마주 보았다.

“약속해요. 다신 장산범 안 쫓아다닌다고.”

“알았어요.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욕 많이 먹었어요.”

장산범을 다시 쫓을 일은 없을 거다. 초원은 안 믿는 눈치이지만 진심이었다.

혼자 맹수를 잡으려 하다니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초원은 같이 갔더라면 현우가 다치지 않았을 거라 자책했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날 초원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가 초원도 다쳤더라면 현우는 평생 저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다.

‘난 왜 멍청하게 매번 그 위험한 일에 초원 씨를 끌고 간 걸까?’

의식이 잠시 돌아올 때마다 후회했다. 그러다 한순간 깨달았다. 그가 좋아했던 건 그 위험한 추적이 아니라 초원이었다는걸. 장산범이 나타나지 않아도 그게 허무했던 적은 없었다. 밤에는 캠핑 온 것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날 산을 내려오면 초원에게 지갑을 기꺼이 털려 주는 그 시간이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초원 없이 홀로 간 그날은 재미가 없었지.

산에 어둠이 짙게 내리면 세상에 그와 초원, 단둘만 있는 기분이었다. 그럴 때면 가슴 속에서 솜털이라도 날리듯 간질간질한 느낌이 드는 걸 애써 모른 척했었다.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라며. 그런데 이제는 그런 사이이고 싶어졌다.

그리고 초원도 그런 사이이고 싶은 거 아닐까? 설마, 회사 동료일 뿐인 남자를 위해 매일 울어 주고 팀장과 싸워가며 위험천만한 일에 자신을 내던지지는 않을 테니까.

무언가 기대하듯 초원의 표정을 살피던 현우는 소주병을 들어 초원의 잔을 채웠다.

“많이 먹어요. 초원 씨 고생시킨 거 사과하는 의미로 사는 거니까. 물론 이거 한 번으로 되진 않겠지만⋯.”

“그럼 앞으론 미안할 일을 안 하면 되죠.”

그 칼 같은 말에 현우는 싱겁게 웃었다. 이럴 때 초원은 꼭 엄마 같았다. 현우가 대답은 하지 않고 실없이 웃기만 하자 초원이 부루퉁하게 쏘아보기 시작했다.

“진짜 약속할게요. 앞으론 초원 씨 생각해서 위험한 일 안 할게요.”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알았다는 듯 초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씨익 웃으며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내키지 않는 척 잔을 부딪친 초원은 소주잔을 바로 비웠다.

반찬으로 나온 삶은 메추리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원이 물었다.

“근데 밥은 팀장님한테 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작 선배 살려 준 사람은 팀장님인데⋯.”

“아, 안 그래도 팀장님께 감사하다고 보답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하하⋯.”

현우는 말을 하다 말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랬는데요?”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저러나 싶어 초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예뻐서 한 일도 아니니까 보답 같은 거 필요 없으시다네요.”

그 말에 초원은 눈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괜히 볼을 부풀렸다.

‘내가⋯. 내가 예뻐서 한 일이지.’

혼자 생각하다 혼자 쑥스러워진 초원은 먹지도 않을 와사비만 간장에 열심히 개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또 혼났어요.”

“흐응, 왜요?”

의미 없이 젓가락을 놀리며 건성으로 물었다. 현우가 승준에게 혼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초원 씨 힘들게 했다고.”

그 말에 콧날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이 남자 정말⋯.’

젓가락을 내려놓은 초원은 말없이 소주를 잔에 따랐다.

“또 사고 쳐서 초원 씨 힘들게 하면 그때는 진짜 지방으로 보내 버린다고 하시더라고요.”

“잘 가요. 멀리 안 나갈 테니까.”

피식 웃으며 놀린 초원은 소주잔을 비웠다.

“사고 안 친다니까요?”

“그간 선배를 봐 온 내 감으로는 흠⋯ 3개월 줄게요.”

“와, 심했다.”

능청스럽게 턱 끝을 문지르며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내리는 초원을 보며 현우가 섭섭한 듯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아, 이것도 너무 길게 쳐줬네.”

“앞으론 진짜 몸 사린다니까요?”

“늦기 전에 지금 있는 오피스텔이나 내놔요. 짐도 미리 싸 놓고⋯.”

“그럼 초원 씨도 원룸 내놔야지.”

현우는 젓가락을 놀리며 씨익 웃었다.

“내가 왜요?”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그제야 차돌박이를 먹으며 했던 약속이 떠오른 초원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그때랑 지금이랑 같나⋯.’

매정하다 해도 할 말 없지만, 저승길이라도 같이 가고 싶은 남자의 자리는 이미 주인이 바뀌었다. 말 그대로 정신줄을 놓고 있는 현우를 승준이 뻥 차 버리고는 그 자리를 차지한 게 언젠데 이제 와서 같이 가자니⋯.

“손가락도 걸고 약속했는데 벌써 잊은 거 아니죠?”

“내가 언제 걸었어요. 선배가 억지로 걸었지.”

초원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더니 회와 마늘을 잔뜩 집어 쌈을 싸기 시작했다.

“와, 치사하다.”

쑥스러워서 튕기는 거겠지.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딜 가든 같이 가준다고 이미 병실에서 약속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말 바꾸기 있⋯.”

턱이 붙들리더니 주먹만 한 쌈이 현우의 입속에 쑤셔 넣어졌다.

“위약금이에요. 됐죠?”

인상을 찌푸리고 우물우물 쌈을 씹는 현우에게 초원은 얄밉게 눈썹을 쫑긋거리더니 메추리알을 휴지로 정성스럽게 감싸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사는 거로 위약금을 내는 경우가 어딨어요.”

겨우 쌈을 삼킨 현우가 물로 마른 목을 축이며 따졌다.

“그런 경우 여깄네요.”

초원은 실실 웃으며 메추리알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근데 그건 왜 안 먹고 싸가요?”

현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지만 초원은 대답 대신 빙긋 웃기만 했다.

띵동.

문 건너편에서 드르륵 중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현관문을 활짝 연 집주인의 얼굴은 회사에서 볼 때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전화도 안 하고 어디서 뭐 하나 했더니 우리 집 오는 중이었네.”

싱글벙글 웃는 승준에게 초원은 손에 든 걸 내밀었다.

“뭔데요?”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선 그는 물건을 감싼 휴지를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메추리알?”

“네.”

중문 문턱에 앉은 초원이 부츠를 벗으려고 낑낑대기 시작하자 승준은 다가가 한 손으로 쑥 뽑아 벗겨 주었다.

“메추리알은 왜?”

“까 주세요.”

자신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 여자를 보고 승준은 맥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이 아가씨 취했네⋯.’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까 달라니⋯.”

싱크대 앞에 서서 메추리알 껍질을 까던 승준은 아일랜드 카운터에 기대어 선 초원을 향해 피식 웃었다.

“팀장님 드실⋯.”

초원의 입에 메추리알을 쏙 집어넣은 승준은 곧바로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감쌌다.

“내가 먹고 싶은 건 따로 있거든.”

미처 대꾸도 하기 전에 초원의 몸이 위로 들리더니 카운터 가장자리에 엉덩이가 걸쳐졌다. 손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내려 온 그녀는 미꾸라지처럼 승준의 팔 아래로 빠져나가 거실로 도망쳤다.

“많이 드셨잖아요.”

“굶은 지 오래됐잖아요.”

초원의 말투를 따라 하던 그가 거실로 와 소파에 앉더니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여자에게 앉으라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원은 옆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먹어 봐야 이미 아는 맛인데⋯.”

“먹어 봐서 아니까 더 먹고 싶은 거지.”

승준은 똑바로 앉은 초원의 허리와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그 몸을 옆으로 돌렸다. 초원의 다리가 그의 허벅지 위에 가로로 걸쳐지고 허리를 감쌌던 손은 어느새 위로 올라와 머리를 감쌌다. 얼굴이 점점 다가가고 조금 전처럼 빠져나갈 줄 알았던 초원은 어쩐 일인지 고개까지 살짝 기울이며 입술을 받아들였다.

한참 승준의 움직임에 맞춰 입술을 겹치던 초원은 그의 손끝이 스타킹 위로 다리를 감질나게 쓰다듬기 시작하자 입술을 뗄 수밖에 없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아오른 한숨이 새어 나갔다.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그녀의 콧날에 코끝을 부드럽게 비비던 승준이 속삭였다. 초원은 대답 대신 싱긋 웃더니 가볍게 입을 맞췄다.

“데리러 오라고 하지.”

“택시 타면 되는데요, 뭐.”

“위험하잖아. 앞으로는 나 불러요.”

승준은 초원에게 눈을 맞춘 채로 그녀의 손바닥과 손끝에 끈적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 눈빛이 더 위험한 것 같은데⋯.’

입속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술 탓일 거라고, 아니 술 탓이어야 한다고 초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녁 누구랑 먹었는데요?”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입을 맞추던 그가 물었다.

“어⋯.”

딱히 켕길 짓 한 건 없지만 반응이 안 좋을 걸 알기에 대답하기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무덤을 파는 짓이었다.

“차 주임님요.”

역시나였다. 승준은 미간을 잔뜩 좁히더니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초원은 떨어져 나간 손을 잽싸게 붙잡아 자신의 허리께에 얹었다.

“그럼 뭔데?”

“그냥 미안하다고 밥 사 주겠다길래 얻어먹은 거예요.”

“미안할 짓을 안 하면 되지. 이거 일부러 사고 치고 그 핑계로 수작 부리는 거 아닌가?”

“아, 차 주임님 나 돌 보듯이 하는 거 알면서 그러시네.”

“난 그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눈이 달렸으면 이게 어떻게 돌로 보이냐고, 꽃이지!”

‘이게’라고 하며 승준은 두 손으로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엉뚱한 포인트로 분통을 터트리는 그를 보고 초원은 사뭇 심각한 분위기인 것도 잊고 깔깔 웃었다.

어쨌거나 꽃이라니 기분이 좋았던 초원은 그의 허리에 팔을 휘감고 목덜미에 자잘하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지만, 승준은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회사 사람들이 초원 씨랑 차 주임 두고 뭐라는 줄 알아요?”

“흠⋯.”

또 보나 마나 둘이 썸 탄다, 사귄다 이런 소리겠지 싶었던 초원은 대수롭지 않게 그의 가슴팍만 매만졌다.

“초원 씨보고 차 주임 오피스 와이프래요.”

“헐⋯.”

처음 듣는 소리였다. ‘둘이 사귄다’와 ‘누가 누구의 오피스 와이프다’는 그 어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목덜미에 묻었던 고개를 든 초원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누가 그래요? 미친 거 아닌가?”

몸을 더 일으킨 그녀는 당장 따지러 갈 기세로 주먹을 쥐었다.

‘오피스 와이프는 무슨, 오피스 마미면 몰라도.’

그동안 현우의 뒤치다꺼리를 너무 과하게 해 줬나 보다. 초원은 선을 더 확실히 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친놈은 그놈이지. 왜 남의 여자한테 밥을 사 준다고 그래.”

“앞으론 내가 조심할게요. 네?”

초원은 미안한 얼굴로 그의 가슴팍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반응에 승준은 화가 좀 누그러졌다. ‘남의 여자’, 달리 말해 초원은 승준의 여자라는 말에 그녀는 딴지를 걸기는커녕 현우와 거리를 두겠다고 약속했다.

요즘 내기네 뭐네 하며 열심히 튕기고 있긴 해도 역시 진심으로 밀어내는 건 아니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내가 밥 먹자고 할 때마다 퇴짜 놓더니⋯.”

기분이 좀 풀린 승준은 입으로는 여전히 불평을 쏟아 내면서 손으로는 그녀의 작은 발을 잡고 부드럽게 마사지를 시작했다. 초원은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부츠 속에 갇혀 있던 발이 그의 따스한 손길에 말랑말랑 녹아내렸다.

“퇴짜가 아니라 요즘 누구 덕분에 야근하느라 그런 거잖아요.”

그 ‘누구’는 피식 웃더니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근거 없는 질투는 좀 접어 두세요. 밥은 아무하고나 먹는 거지만 밤은 팀장님하고만 보내는 건데⋯.”

발을 어루만지던 손이 멈췄다. 온몸의 피가 다리 사이 짐승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침대로 갈⋯.”

“아! 우리 공사 구분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응?”

불쑥 고개를 든 초원이 느닷없이 화제를 돌렸다.

“여기가 회사도 아닌데 호칭이 좀 그렇잖아요.”

“그렇지.”

승준의 얼굴이 형광등 100개를 켠 듯 환해졌다. 무슨 상처 입은 짐승도 아니고, 다가오나 싶다가도 물러나 일정 거리를 유지하던 초원이 오늘따라 나서서 벽을 허물어 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술의 힘인가?’

그러고 보니 그 여름밤의 역사적인 키스도 다 초원이 취한 덕이었다. 승준은 평일에 낮술을 잔뜩 먹인 다음 잠깐 쉬다 가자며 구청으로 끌고 가는 음흉한 흉계를 꾸몄다.

‘잠깐, 혼인신고는 어떻게 하는 거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묘하게 웃는 남자를 보며 초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뭐라고 불러요?”

“글쎄⋯. 이름으로 불러도 좋고⋯. 오빠라고 불러 주면 더 좋고.”

승준이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오빠’ 소리를 꺼내자 초원은 피식 웃었다.

‘아, 진짜 남자들이란⋯. 오빠 소리 못 들어 죽은 귀신이라도 씌었나.’

초원은 볼을 한껏 부풀리더니 결심한 듯 입술을 벌렸다.

“오빠⋯.”

마주 보고 있는 남자의 입꼬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다.

“으응? 왜?”

승준은 그녀의 볼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기 시작했다.

“오빠, 나 오늘 짜증 나는 일 있었어요.”

초원이 어울리지 않게 혀 짧은 소리까지 내기 시작했지만, 콩깍지가 겹겹이 씐 눈에는 그게 그저 깜찍해 보일 뿐이었다.

“왜? 누가 우리 귀여운 초원 씨 짜증 나게 했어?”

승준은 다른 손으로 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오빠가 혼내 줄 거예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 떨던 애교를 백만 년 만에 떨려니 오장육부에 닭살이 돋아 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남자는 오빠 소리에 영혼이라도 판 듯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당연하지. 누가 그랬어, 누가?”

사실 묻지 않아도 누군지는 뻔했다.

‘분명 안 사무관이 또 여우짓이나 헛소리를 했겠지.’

그게 아니라 한국은행 쪽 사람이라면⋯.

“팀장님이요.”

헤벌레 웃던 승준의 표정이 아주 보기 좋게 얼어붙었다. 초원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참았다.

“우리 팀장님 명치 완전 세게 때려 줘요.”

그 큰 눈을 얄밉게 깜빡이며 검지로 승준의 명치를 쿡 찔렀다. 그는 얼이 빠진 얼굴로 초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잔망스럽다.’

학교 다닐 적 교과서에서 본 그 단어. 지금까지 전혀 와 닿지 않았던 그 단어의 의미가 지금 초원을 보니 아주 뼛속까지 시리게 와 닿았다.

여우 같이 싱긋 웃으며 검지로 가슴팍을 훑어 내리는 여자에게 그는 체념한 듯 웃었다.

“왜? 그놈이 뭘 했길래?”

대체 무슨 소릴 하려는 건가 싶어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팀장님이 나 싫어하나 봐요.”

“에이,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입가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갔다.

“안 그럼 왜 날 죽음의 조에 밀어 넣었겠어요?”

“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승준은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한 손밖에 못 쓰는 사람이랑 나 끔찍하게 싫어하고 땡땡이만 치는 사람이랑 굳이 팀을 짠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제야 초원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깨달았다. 승준은 다시 그녀의 발을 잡고 가볍게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팀장도 어쩔 수 없었겠지. 박 주임이랑 으뜸 씨는 요즘 외근이 많았잖아요. 초원 씨랑 같이 다니는 그 대책 없는 놈 때문에⋯.”

“그건 이해하지만 대체 없느니만 못한 안 사무관은 왜 넣느냔 말이죠.”

점점 위로 올라와 무릎 뒤를 야릇하게 어루만지는 손을 초원은 단호하게 밀어냈다.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바쁠 땐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이제 승준의 손은 머리끈을 제멋대로 풀어내고 있었다.

“아, 그 고양이 툭하면 가출하고 동전 고르다가 네일 깨졌다고 온종일 꿍얼거렸다고요. 집에도 자기 멋대로 일찍 가 버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홀린 사람처럼 손으로 빗던 승준이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다.

“몇 시에?”

“아⋯. 음⋯.”

“말해요.”

“한⋯ 30분 정도 일찍⋯.”

“흠⋯.”

초원은 어느새 특관청의 저승사자, 조승준 팀장으로 돌아온 그의 표정을 살피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마세요.”

“굳이 말할 거 있나. 하반기 평정 등급 깎으면 되지.”

그 서슬 퍼런 미소에 초원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그럼 내일부터 초원 씨나 안 사무관 중 한 사람을 빼줘요?”

순식간에 표정이 온화해진 그는 초원의 귓불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아뇨, 됐어요. 이제 하루 이틀 하면 끝날 건데요.”

“그래도 스트레스 받잖아요.”

“이젠 괜찮아요. 그냥 하소연할 데가 필요했어요.”

사실 술김에 불평을 쏟아 냈을 뿐, 뭘 어떻게 해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리 와요.”

승준은 그녀를 가까이 당겨 꼭 끌어안았다.

“우리 초원 씨 요즘 힘들었구나.”

“저야 뭐⋯. 팀장님이 더 힘들겠죠.”

초원은 그 따뜻한 품에 안긴 채로 눈을 감았다.

“난 요즘 초원 씨 사무실에서 못 보는 게 제일 힘든데⋯.”

“이거 맡길 땐 그럴 줄 모르셨어요, 팀장님?”

초원의 웃음소리가 승준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근데 왜 또 팀장님이라고 불러요?”

“네? 공사 구분 타임 다 끝났는데요?”

살짝 고개를 든 초원이 헤실헤실 웃었다.

“하, 그럼 내 앞에서 내 욕할 때만 오빠라고 불러 주겠다는 거네?”

“헤헤⋯.”

승준은 눈을 가늘게 뜨곤 그녀의 보들보들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 그럼 홍 주임. 나도 하소연할 거 있는데.”

몸을 단단히 휘감고 있던 팔이 풀리더니 그녀의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뭔데요?”

“일 얘기는 아니고 연애 상담.”

“네?”

푸훗 웃음을 터트린 초원은 표정을 가다듬더니 ‘똘똘한 부하 직원, 홍 주임’ 가면을 썼다.

“흠흠⋯. 말씀하세요, 팀장님.”

“그게, 내가 요즘 만나는 여자가 있는데⋯.”

“오, 진짜요?”

초원이 천연덕스럽게 두 손을 모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걸 보는 승준은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단단히 깨물었다.

“아니, 이 여자가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고, 밀어내기만 하다가 간만에 당기길래 딸려갔더니 뒤통수를 후려치네.”

“몹쓸 여자네요.”

남 이야기하듯 자신을 몹쓸 여자라 부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초원을 보고 승준은 기가 차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요?”

“아, 그래서 홍 주임 생각은 어때요? 이 여자 왜 이러는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모르겠고 팀장님이 너무 아까워요. 그 여자 똥차 같은데 그냥 갖다 버리시고⋯.”

그날 밤 차 안에서처럼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아 주길 바랐건만, 엉뚱하게 갖다 버리라는 말을 들은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신 저는 어떠세요, 팀장님?”

초원이 두 손을 번쩍 들더니 그의 목을 휘감았다. 살짝 기울어진 그녀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초원은 굶주린 사람처럼 승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평소답지 않은 적극적인 태도에 또 그의 다리 사이로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진짜, 들었다 놨다. 미치겠네.’

보드라운 혀가 입술 안쪽을 훑자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갈 곳을 잃고 초원의 작은 몸 위를 방황하던 두 손이 결심한 듯 한곳으로 향했다.

지이익. 원피스 지퍼를 내리자마자 브라 후크까지 툭 풀어 버린 승준은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를 확 끌어 내렸다. 허리 위로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버린 초원이 입술을 떼고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지만 너무 늦었다.

부드럽게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길과 쇄골을 더듬는 입술의 열기에 몽롱해진 그녀의 손이 점점 힘을 잃고 아래로 늘어졌다.

‘아, 요즘 잘 피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내기에 지는 건가 싶었다.

“아! 아파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순식간에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돌기를 손끝으로 살살 굴리고 목덜미를 붙잡고 입만 살짝 맞춘 게 다인데 뭐가 아프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초원은 눈을 찡그린 채로 목덜미를 한 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세게 잡았나?”

“그게 아니라 요즘 계속 고개 숙이고 일해서⋯.”

고개를 어정쩡하게 숙인 자세로 종일 있었더니 목과 어깨가 아팠다. 승준은 미안한 얼굴로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사지해 줄 테니까 샤워하고 와요.”

목 마사지와 샤워는 대체 무슨 관계냐고 물으려던 초원은 입을 다물었다. 승준은 마사지라고 했지 목이라고 콕 짚어 말하지 않았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가는 목을 타고 내려오다 뽀얀 젖가슴 사이 계곡으로 사라졌다. 그걸 넋을 놓고 바라보던 승준은 가슴 위로 전신 타월을 더욱 단단히 여미는 작은 두 손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갈 데까지 다 가 놓고 새삼스럽게⋯.’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는 바로 옆을 손으로 두드렸다.

“이리 와요.”

머뭇머뭇 다가와 앉은 초원의 어깨에 손을 얹던 그는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머리 묶어야 할 것 같은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 올리는 초원의 뒷모습을 잠자코 감상했다. 그 새하얀 목덜미에 보송보송하게 돋은 솜털을 보자 결국 참지 못하고 손끝으로 그 여린 피부를 더듬기 시작했다. 잠시 움찔하던 초원은 다시 머리를 빗어 올리기 시작했다.

살결이 촉촉했다. 갑자기 갈증이 인 승준은 그 물기를 다 핥아 마실 기세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아, 진짜. 무슨 마사지를 입으로 해요.”

초원이 몸을 살짝 빼더니 어느새 타월 위로 가슴을 쥐고 있던 그의 손도 마저 밀어냈다.

“좋으면 그만이지.”

승준은 몸을 기울여 협탁 위에 놓인 작은 병을 집었다. 손바닥만 한 병이 열리자 달콤한 코코넛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이건 뭐예요?”

병 속으로 손가락을 담그던 승준은 씨익 웃었다.

“코코넛 오일.”

오일에 적셔진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초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흠, 의외네요.”

“뭐가?”

“팀장님 집에 이런 게 있는 게요.”

“어째서?”

“워시도 딸랑 한 병밖에 없으시면서⋯.”

두 손으로 목과 어깨가 만나는 곳을 살살 풀어 주던 승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초원 씨가 좋아할 것 같아서 사 둔 거예요.”

“흠⋯.”

여자가 좋아할 만한 거라면 보통 디퓨져나 여성용 워시를 사다 놓지 이런 걸 사 두지는 않지 않나 싶어 초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 혹시 병 주고 약 주는 빅픽쳐예요?”

“하하, 그런 게 아니고⋯.”

단단히 뭉친 곳을 손가락이 원을 그리듯 꾹 누르며 내려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으음⋯.”

눈을 감고 신음 소리를 내는 초원의 얼굴이 절정을 느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냥 마사지로 느낄 수도 있나?’

마사지도 마사지지만 이 코코넛 향이 그녀를 미치게 했다. 왜 하필 오일을 사도 코코넛으로 샀을까? 요즘 코코넛이 든 건 다 피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어느샌가부터 이 향을 맡으면 몸이 저도 모르게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건 다 꿈속에서 이 남자와 몸을 섞고 있을 때 가끔 코코넛 향이 난 탓이었다.

‘설마 독심술이라도 하나.’

천천히, 하지만 점점 크게 들썩이는 초원의 가슴을 내려다보던 승준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깨를 주무르던 손이 서서히 날개뼈 아래까지 내려갔다. 그 바람에 등을 감싸고 있던 타월이 내려가면서 앞섶이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긴 손가락이 가슴에 닿을락 말락 옆으로 감기자 초원은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 아래로 흘러내리려는 타월을 가까스로 붙들자마자 타월 아래로 뜨거운 두 손이 파고들어 왔다.

“앗⋯.”

짜릿한 자극이 젖가슴을 덮쳤다. 고개를 뒤로 젖히는 초원의 귓가에 승준은 속삭였다.

“기분 좋죠? 이젠 어딜 주물러 줄까?”

‘아, 이 여자 진짜⋯.’

말랑말랑한 살을 두 손으로 주무르던 승준은 엎드려 누운 뒤통수를 못마땅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 분위기에 다리 주물러 달라는 여자가 어딨나?’

종아리를 엄지로 살살 누르며 내려오던 그는 코코넛 오일을 조금 떠서 초원의 발에 바르기 시작했다. 발바닥을 꾹꾹 눌러 주자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녀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그렇게 마사지를 하다 다른 발로 옮겨 간 승준은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헛웃음이 터졌다.

“흠, 마사지 한 시간에 뽀뽀 백 번이에요.”

그 말을 받아쳐야 할 여자는 반응이 없었다. 그새 새근새근 잠든 초원을 보고 허탈해진 그는 한숨을 쉬더니 잡고 있던 발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앗⋯.”

이상야릇한 느낌에 잠이 깬 초원은 고개를 불쑥 들었다.

“으음⋯. 팀장님⋯.”

대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저렇게 발가락을 쪽쪽 빨고 있으면 대답을 할 수가 없겠지.

발가락 사이로 말캉한 혀가 파고들어 왔다. 그 축축하고 간지러운 느낌에 기분이 나빠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배 속 깊은 곳이 뜨거워졌다.

몸을 파들파들 떨며 흐느끼듯 신음을 뱉는 초원을 내려다보던 승준은 느릿느릿 혀를 놀리면서 한 손을 그녀의 무릎 뒤로 가져갔다.

손끝이 간질이듯 무릎 안쪽을 더듬기 시작하고 뜨거운 혀가 발가락에 착 감겼다. 그 짜릿한 느낌에 숨이 가빠왔다. 다리 사이 속살도 잔뜩 흥분해 움찔거렸다.

“아흣, 팀장님. 제발⋯.”

“왜?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자요.”

잠시 떨어졌던 혀가 다시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아,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자.’

없던 성감대를 개척 당한 판인데 팔자 좋게 잘 수 있는 여자가 있을 리 없었다. 무릎 안쪽을 야릇하게 압박하는 손길과 발끝으로 느끼는 혀의 촉촉함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읏⋯ 팀장님⋯.”

“기분 좋죠?”

불현듯 애무를 멈춘 승준이 옆으로 와 얼굴을 맞대고 누웠다. 물기 어린 초원의 눈동자는 희열에 한껏 취해 있었다.

가만히 숨을 고르던 그녀는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 손길에 다시 몸을 움찔거렸다.

“더 좋게 해 줄 수 있는데⋯.”

초원은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내기는 이쯤하고 포기하는 게 어때요?”

더욱 위로 올라온 손이 어느새 끈적하게 젖은 입구를 감질나게 매만졌다.

“⋯해 주세요.”

씨익 웃은 승준은 엄지로 입구를 살살 누르면서 민감한 돌기를 찾아 중지로 꽃잎을 헤치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는 건 ‘이런 일’로 안 치거든요.”

손이 멈추더니 승준의 입가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 초원 씨 정말 제멋대로네.”

“‘이런 일’ 없을 거라고 한 건 저니까 ‘이런 일’의 정의는 제가 내리는 거 아닌가요?”

“치사하게, 진짜.”

“억울하면 내기 시작하기 전에 확실히 하셨어야죠. 아니면 그냥 팀장님이 지는 거로 하시든지요.”

초원은 보란 듯 씨익 웃었다.

“그건 안 되지.”

예고도 없이 손가락이 안으로 쑤욱 파고들어 왔다.

“앗!”

“초원 씨가 안달 나서 ‘제발 넣어 주세요, 팀장님.’ 이럴 때까지 괴롭혀야지.”

뜨거운 살 속에 묻힌 손가락을 서서히 뺐다. 속살은 가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꽉 물었다.

늘 아리송한 짓을 해대는 저 윗입과는 달리 이 아랫입은 항상 솔직해서 좋았다.

‘그럼 눈은?’

승준은 일부러 초원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곧 눈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려 버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초원은 눈을 완전히 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는 그 눈빛이 안쓰러웠던 그는 이마에 입을 살짝 맞추고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감겼다.

“으음⋯.”

다리 사이를 손가락이 능숙하게 휘젓고 초원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초원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무는 순간 뜨거운 손가락이 이에 짓눌린 입술을 떼어 냈다.

“다쳐요. 하지 마요.”

부드러운 입술이 포개어져 왔다. 위아래를 한꺼번에 헤집어지는 통에 초원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으읍⋯.”

아래가 손가락을 콱 물고 파르르 떠는 순간, 그녀는 억눌린 신음을 승준의 입속으로 토해 냈다.

온몸이 자지러졌다. 초원은 어쩔 수 없이 입술을 떼어 내고 밭은 숨을 쏟아 냈다.

강렬한 물결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몸이 잘게 떨렸다. 승준은 느릿느릿 깜빡이는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등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초원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팀장님도⋯.”

아직도 숨이 가쁜 건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해 드려요?”

그녀의 작은 손이 승준의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딱히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초원은 옷 위로 불거져 나온 그 단단한 윤곽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아니, 됐어요.”

커다란 손이 초원의 손목을 감더니 가슴팍으로 끌어 올렸다.

“왜요?”

의아한 얼굴로 묻는 그녀를 승준은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지금 눈에 졸음이 가득한데 뭘 하려고.”

초원의 머리 위로 꾹, 입술이 와 닿았다.

“푹 자요. 요즘 피곤했을 텐데⋯.”

승준은 규칙적인 숨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이 무신경한 여자는 알 턱이 없었다.

불쑥 고개를 들고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데는 없는지 확인한 그는 초원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다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랑해⋯.”

잠결인지 초원이 느닷없이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런 그녀를 꼭 끌어안고 승준은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수면제가 필요 없었다. 인간 수면제가 그의 품으로 돌아왔으니까.

“어디서 맛있는 냄새 안 나?”

테이블 위에 동전을 펼쳐 놓은 채로 핸드폰만 들여다보던 희경이 고개를 들고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창문 하나 없어 공기 텁텁한 이 밀실에서 무슨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그러는지, 초원은 무시하고 동전 하나를 집어 올려 가장자리를 살폈다.

“흠, 그러네요. 되게 달달한 냄새나네.”

현우까지 손을 멈추고 코를 킁킁거리더니 옆에 앉은 초원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어, 홍 주임이네. 홍 주임 되게 맛있는 냄새 난다.”

“아 뭐야, 일이나 해요.”

멋모르고 해맑게 웃는 현우에게 저리 가라며 휙휙 손을 내저은 초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쳐요. 하지 마요.’

그의 낮은 속삭임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 그녀는 얼얼한 입술을 혀로 핥았다. 걱정과 애정이 어린 어젯밤의 그 목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두근댔다. 그 천둥 같은 소리가 이 작은 방에 울리지나 않을까 초원은 조마조마했다.

***

“생일 축하합니다.”

초원은 현우가 다시 씌워 준 고깔모자를 휙 벗었다. 이런 거 쓸데없이 사 오지 말라고 아름에게 누누이 말했는데 번번이 무시당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현우에게 눈을 흘기고 고깔을 테이블 반대편으로 던지다 승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 이글거리는 눈빛에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아 시선을 돌렸다.

“사랑하는 초원 씨.”

초원의 심장이 오그라들다 못해 철렁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항상 ‘사랑하는’은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게 불문율인데, 승준 혼자 큰 소리로 불러 댔다.

‘사랑 타령은 퇴근하고 할 것이지!’

초원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몇몇은 표정 관리 중이었고 현우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승준은 눈이 마주치자 은근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러 저러는 거네⋯.’

초원은 살짝 눈을 흘겨 주곤 시선을 피했다.

“홍 주임, 뭐 해. 얼른 촛불 꺼야지.”

“아, 맞다.”

병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테이블 위의 케이크로 시선을 돌렸다.

“아, 맞다? 멍 때리는 것도 때와 장소가 있는 거지. 자기 생일 케이크 앞에 놓고 그러는 사람은 홍 주임이 처음일걸?”

병훈을 향해 눈을 흘긴 초원은 케이크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 순간 손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소원부터 빌어야죠.”

“아⋯.”

어정쩡하게 고개를 든 그녀는 반걸음 옆으로 옮겼다. 그제야 현우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좀 더 들고 승준을 곁눈질했다. 아니나 다를까 살기등등한 눈으로 현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초원의 시선을 느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얼굴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초원은 다시 케이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남자의 사랑이 변하지 않게 해 주세요.’

숨을 깊이 들이쉰 그녀는 한 번에 촛불을 불어 껐다.

“근데 생일 소원은 어느 신이 들어주는 거예요?”

케이크 위의 딸기를 포크로 찍던 병훈이 느닷없이 물었다.

“흠, 글쎄⋯.”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승준은 케이크 위에 놓인 딸기를 집어 들더니 초원의 접시에 놓았다.

“난 딸기 별로 안 좋아해서⋯.”

“아⋯, 감사합니다.”

사실 딸기가 딱히 싫지는 않은 승준이었지만 초원이 좋아하는 거라면 자신은 안 먹어도 그만이었다.

“앗, 그럼 제가 먹어도 될⋯.”

“오늘 아름 씨 생일이었나?”

눈치 없이 손을 들던 아름이 승준의 날카로운 눈빛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냥 아름에게 줄까 하던 초원도 그 눈빛을 보고 조용히 딸기를 베어 물었다.

“아, 왜 내 소원은 안 들어주지? 좀 물어보고 싶은데⋯.”

병훈은 아직도 로또 1등 생각뿐이었다.

“다음에 설향 선녀님 오시면 물어봐야겠네, 헤헤.”

그 말에 초원은 피식 웃었다. 가끔 청에 예쁜 선녀가 외근 왔다 하면 이곳 남직원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하지만 정작 선녀들은 이승계 남자들을 끔찍이 싫어했다. 옛날에 선녀 하나가 변태 나무꾼에게 납치당해 강제 결혼 생활을 하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후로 이곳 남자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고 한다.

“어휴, 선녀님들한테 찝쩍대지 좀 마. 아주 추해 죽겠어.”

희경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왜 그걸 찝쩍댄다고 하시나? 선남선녀가 만나서 썸 탈 수도 있지.”

병훈의 말에 피식 웃은 승준이 포크로 케이크를 찌르며 중얼거렸다.

“선녀랑 썸 타봐야 좋을 것도 없는데⋯.”

“오, 팀장님 경험 있으신가 보네요?”

승준의 손에 들린 포크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흠, 아니.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하긴⋯. 서로 다른 세상 사는 사람들끼리 잘 되기 힘들죠.”

의외로 현우가 승준의 말을 받아넘겨 주면서 위기를 쉽게 넘기는 건가 싶었다. 승준은 곁눈질로 초원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건 또 쓸데없이 촉이 좋은지 초원은 부루퉁한 얼굴로 느릿느릿 포크를 움직이고 있었다.

“집에 안 가요?”

책상 위를 정리하던 현우가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초원에게 물었다.

“음⋯, 이거만 마저 하고 가려고요.”

초원은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인천까지 가려면 오래 걸릴 텐데⋯.”

“그래도 지옥철 좀 피하고 가려고요.”

그제야 현우에게 시선을 돌린 초원이 멋쩍게 웃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거짓말을 한 게 마음에 걸렸다. 저번 주에 느닷없이 현우가 생일날 맛있는 걸 사 주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 그날 본가에 가기로 했는데요.” 같은 뜬금없는 소린 지어내지 않아도 됐을 거다.

“이거 받아요.”

작은 종이 백 하나가 칸막이를 넘어왔다.

“뭔데요?”

초원은 뚱한 얼굴로 종이 백을 응시했다.

“생일 선물.”

“선배, 이런 거 안 해도 돼요.”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예전이라면 냉큼 받고 ‘이거 사랑인가?’ 하며 혼자 설렜겠지만 지금은 사랑인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설레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예요. 내 생일 때 갚을 필요 없으니까 부담 느끼지 말고 받아요.”

차마 생긋 웃는 얼굴에 대고 안 받을 테니 도로 가져가라고 할 수가 없었던 초원은 마지못해 종이 백을 받아 들었다. 작은 백이 제법 묵직했다. 안을 들여다보니 향수 브랜드 이름이 찍힌 상자가 들어 있었다.

“초원 씨 달달한 향 잘 어울리길래⋯.”

‘달달한 향’이라는 말에 초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생일 축하해요. 부모님이랑 즐겁게 보내고 월요일에 봐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현우에게 마지못해 웃어 주었다. 현우가 사무실 밖으로 사라지고 그녀는 한숨을 길게 쉬며 종이 백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 그만하세요.”

“왜? 예뻐서 그러는데⋯.”

민망해진 초원은 손을 내밀어 승준의 핸드폰을 뺏으려 했지만 그 빠른 반사 신경을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이 찍었잖아요.”

“이거 사진 아닌데?”

“아, 진짜⋯.”

초원은 손으로 옆얼굴을 가리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은 승준이 웃더니 핸드폰을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젠 안 찍을 테니까⋯.”

한 팔로 초원의 어깨를 감싼 그는 얼굴을 가린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나 좀 봐요.”

손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고개가 점점 이쪽으로 움직이는 순간 승준은 잽싸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앗, 뭐 하시는 거예요. 여기 사람도 많은데⋯.”

초원은 불금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가득한 호텔바 안을 곁눈질했다. 웨이터 하나가 이쪽으로 오다 그 장면을 봤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럼 사람 없는 데로 갈까요?”

그 속이 빤히 보이는 말에 초원은 눈을 흘기다 테이블 위의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집어 들었다. 빨대를 빠느라 움푹 들어간 볼을 귀엽다는 듯 승준의 손이 쓰다듬기 시작했다.

“근데 왜 내 문자에 답장 안 해요?”

“풉, 이모티콘 딸랑 하나 보낸 거에 무슨 답장을 해요?”

사무실에서 짧은 생일 파티를 끝내고 자리에 앉아 한참 공문과 씨름하는데 초원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책상 위에 엎어뒀던 핸드폰을 뒤집어 확인한 그녀는 풋 웃고는 다시 엎어 버렸다.

문자는 ‘♡’ 이게 전부였다.

“딸랑 하나라니⋯. 내 마음이 전부 담긴 건데⋯.”

섭섭한 티를 내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초원은 생각에 잠겼다. 일하다 말고 난데없이 그런 문자를 보낸 게 수상쩍었다.

“팀장님⋯.”

“응?”

“선녀랑 사귄 적 있어요?”

그녀의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아니⋯.”

사귄 적은 분명 없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짜요?”

승준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사귄 적도 없는데 번호는 알아요?”

불쑥 내뱉고 초원은 아차 싶었다. 통화를 엿들은 걸 제 입으로 실토해 버렸으니 말이다.

“응?”

“아, 됐어요.”

초원이 찔려서 대충 얼버무리는 걸, 승준은 토라진 것으로 오해했다.

“아니, 번호는 일 때문에 저장해 둔 건데. 내 폰에서 봤어요?”

“아뇨, 팀장님 폰을 제가 왜 봐요?”

“봐도 상관없는데.”

승준이 테이블에서 핸드폰을 집어 내밀자 초원은 그걸 도로 밀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냉큼 집어서 보면 무슨 의부증 있는 여자 같지 않나.

“됐어요. 폰에서 본 게 아니라 전에 통화하는 거 아주 우연히, 쪼끔 들은 게 다예요.”

핸드폰을 몰래 뒤져본 여자가 되느니 통화를 엿들었다고 실토하는 게 백 배는 나았다.

“아⋯, 그거?”

“근데 주말에도 전화할 정도로 편한 사인가 보네요.”

초원이 칵테일 잔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아주 잘 보였다. 승준은 피식 웃으며 그 입술을 손가락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아니, 그건 차 주임 일 때문에 부탁할 게 있어서 통화한 거지.”

“그럼 그 선녀님이 꽃 구해 주신 거예요?”

“아니, 그건 내가 꺾어 온 건데.”

“그럼 선녀님이랑 같이 가신 거예요?”

“무슨⋯, 선녀가 서천꽃밭 가서 꽃 훔치다 걸리면 날개옷 벗어야 하는데. 그 선녀님은 그냥 가는 길만 도와주신 거예요.”

“그럼 인간은 훔치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저승에 붙잡혀 못 돌아오겠지. 운 좋으면 청에서 협상을 해 빼내어 주겠지만 그랬을 경우 파면은 확정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했다가는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냐고 초원이 멱살을 잡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승준은 모른다는 척, 어깨만 으쓱했다.

“근데 그런 엄청난 부탁도 들어줄 정도면 되게 가까운 사인가 보네요.”

또 입술이 삐죽 나오고 있었다. 승준은 눈이 휘도록 웃으며 그 입술을 꾹 눌렀다.

“초원 씨가 질투를 다 하고 영광이네.”

초원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나저나⋯.”

승준은 초원이 더 캐려 들기 전에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놈 한 번만 더 초원 씨 몸에 손대면 진짜 지방으로 보내 버릴 거야.”

“왜 저한테 얘기하세요? 본인한테 하셔야지.”

요즘 열심히 거리를 두고 있는데 현우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선을 넘었다. 승준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 만큼 초원이 받는 스트레스도 머리끝까지 치솟고 있었다.

“그냥 얘기해요.”

“네?”

“남자 친구 있다고 해요.”

“그랬다간 누구냐고 캐물을 텐데요.”

“적당히 둘러대면 되지.”

“거짓말이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초원은 콧날을 찡그리며 칵테일 잔을 빨대로 저었다.

“그럼 나랑 사귄다고 솔직히 얘기하든가.”

“그러다 소문나면⋯.”

현우가 병훈처럼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또 모르는 일이었다. 들키는 날에는 승준은 부하 직원과 사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잘나가던 커리어가 막힐 수도 있고 초원이 다른 팀으로 옮겨야 하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배시시 웃더니 승준에게 눈을 맞췄다.

“아, 근데 팀장님이 제 남자 친구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진도 뺄 거 다 빼고 주말마다 데이트도 하고 이젠 서로 집 비밀번호도 아는 사이인데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는 여자가 승준은 당황스러웠다.

“아닌가?”

“난 사귀자는 말 못 들었는데.”

새초롬하게 입술을 삐죽 내미는 초원을 보고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사이에 새삼스럽게⋯.”

“남자들 속이야 시커메서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여자들이야말로 속을 모르겠던데. 지금 초원 씨처럼⋯.”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던 그녀는 풋 웃더니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여자들은 확실하게 착착 절차를 밟아 주는 걸 좋아한다고요.”

손바닥 위로 손날을 두드리며 ‘착착’을 강조하는 초원이 귀여워 승준은 볼을 살짝 꼬집었다.

“프러포즈 안 하고 어물쩍 결혼해서 평생 욕먹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초원의 언니만 해도 그랬다. 애가 두 돌이 넘은 지금까지도 언니에게 형부는 남들 다 하는 프러포즈도 안 한 썩을 놈이었다.

“참 나, 그냥 썸만 탈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남자도 있나?”

승준은 소파 팔걸이에 걸쳐 두었던 코트 주머니를 뒤지더니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냈다. 그 민트색 상자에 적힌 검은 글씨를 본 초원의 심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 이거 그 경우의 수랑 비슷⋯. 헐⋯.’

“사랑하는 초원 씨, 생일 축하해.”

얼떨떨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여자에게 살짝 입을 맞춘 그는 상자를 다시 내밀었다.

“풀어 봐요.”

초원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천천히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검은 벨벳 상자를 꺼내 열자 스포트라이트 조명 아래로 무언가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 반지 아니네.’

초원은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목걸이를 조심스레 손끝으로 훑어보았다. 로즈골드 체인 가운데에 다이아몬드가 줄지어 하트 모양을 그려 내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요?”

초원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랑 사귈래요?”

사귀자는 말 안 했다고 핀잔줄 땐 언제고, 막상 이제 와서 들으니 새삼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언젠가 하고 싶어지면 나랑 결혼도 해 주세요.”

“네?”

설렘과 불안이 한 데 뒤섞이면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물쩍 넘어가지 말라면서요.”

“⋯저 결혼 안 한다니까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그럼 대신 평생 내 거 해 줘요.”

승준의 손이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기 시작하고 초원의 입꼬리가 어렴풋이 올라갔다.

“그러다 딴 놈이랑 결혼하면 안 돼요.”

그제야 고개를 든 그녀는 풋 하고 웃었다.

“아, 어물쩍 넘기지 말고 약속해요.”

“약속할게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자꾸 입가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초원을 보고 흐뭇하게 웃은 승준은 목걸이를 집어 들어 목에 걸어 주었다.

“잘 어울리네.”

조금 뒤로 물러난 그는 쇄골 아래에 매달려 반짝이는 하트를 감상했다.

“고마워요. 근데 이거 엄청 비쌀 텐데⋯.”

얼떨떨한 기분으로 목걸이를 매만지던 초원이 중얼거렸다. 언니가 예물로 그렇게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결국 비싸서 못 한 브랜드라 어느 정도 가격대인지는 알고 있었다.

“응, 엄청 비싸요.”

보통은 “초원 씨한테 이 정도야⋯.” 뭐 이렇게 대답하는 게 정해진 시나리오 아닌가? 대본에 없는 솔직한 대답이 나오자 초원은 당황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초원 씨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좀 알아줘요.”

그 말에 수줍게 미소 짓는 초원은 꼭 열아홉 살 소녀 같았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승준은 정장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기 져달라고 주는 뇌물이기도 하고⋯.”

밖으로 나온 손에는 호텔 카드 키가 들려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호텔 룸 앞에 서기까지 두 사람은 전혀 말을 섞지 않았다. 혀를 섞기에도 바쁜 시간이었다.

승준은 손으로 카드키 넣을 곳을 더듬었지만 초원의 입술이 혀를 부드럽게 빨아 당기는 통에 손이 멈추기 일쑤였다. 문과 승준의 탄탄한 가슴 사이에 낀 그녀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야릇한 마찰을 만들어냈다.

철컥.

드디어 문이 열리고 휘청거리는 초원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휘감았다. 그제야 입술이 떨어졌다.

“와⋯.”

나지막이 감탄한 초원은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발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그 모습에 흐뭇하게 웃은 승준은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욕실에서도 감상할 수 있는데⋯. 욕조에 몸 담그고 샴페인 한잔하는 건 어때요?”

초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씩 웃은 그는 소매를 걷으며 욕실로 사라졌다.

가방을 의자 위에 내려놓은 초원은 방을 둘러보았다. 작은 테이블에는 이미 얼음 가득한 와인 쿨러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샴페인이 꽂혀 있었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확인하던 그녀는 풋 웃었다. 공들여 발랐던 립스틱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멍하니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초원은 승준이 욕실 밖으로 나오자 부끄러운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웃었다.

“이리 와요.”

와인 쿨러를 옆구리에 끼고 샴페인 잔을 한 손에 든 그가 손을 내밀었다.

욕실을 서성이며 톡 쏘는 샴페인을 음미하던 초원은 살짝 입맛을 다셨다.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거품 속에 손을 넣고 물 온도를 가늠하는 승준의 팔뚝이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술의 힘을 빌려 용기를 낸 그녀는 다가가서 그의 허벅지 위에 덜컥 앉아 버렸다. 승준의 입이 귀에 걸렸다. 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더니 두 팔로 가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렇게 귀엽게 굴면 침대로 직행하고 싶어지는데⋯.”

그는 키득키득 웃는 초원의 입술을 살짝 머금고는 목선을 따라 서서히 입술을 내렸다. 목걸이에 잠시 와 닿은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어느새 위로 올라온 손이 블라우스의 버튼을 하나씩 풀어 내렸다. 점점 벌어지는 옷깃 사이로 복숭앗빛 레이스 브라가 슬쩍 자태를 드러냈다.

브라 위로 도드라진 가슴을 입술로 지분거리던 승준은 달아오른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얇은 레이스의 가장자리를 그의 손끝이 간지럽히듯 더듬었다.

“포장이 너무 예뻐서 벗기기 아까운데?”

그 말에 초원은 수줍은 미소를 띤 채로 그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등 뒤로 툭, 브라 후크가 풀렸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네. 내일 아침에 다시 입혀 줄게요.”

순식간에 알몸이 된 초원은 팔로 몸을 가렸다. 이미 욕조 안에 자리를 잡은 승준이 피식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욕조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그의 다리 사이에 어정쩡하게 앉았다. 허리에 닿는 그의 분신은 이미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욕조 안을 내려다본 초원은 곧바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 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두 팔이 그녀의 몸을 감더니 뒤로 끌어당겼다. 초원은 그의 단단한 품에 기댄 채로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등에 닿은 몸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 시작했다. 초원은 욕조 옆 창밖의 야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몸 이곳저곳을 쓰다듬는 손길을 즐겼다.

‘괜찮을 거야.’

시야의 가장자리로 비누 거품이 출렁댔다. 심장 소리가 귀를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초원은 가빠지는 숨을 억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욕조잖아. 팀장님도 있고⋯.’

지금 여기서 빠져 죽을 일도 없는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맞닿은 승준의 살결에 온 신경을 집중하려 해 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검은 물살이 휘몰아치며 흰 물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따뜻한 물속인데 어쩐지 온몸이 차가워지며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흑⋯.”

승준의 팔뚝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왜 그래요?”

“모, 못하겠어요.”

얼굴은 이미 눈물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바들바들 떨며 몸을 일으키던 초원은 이내 다시 주저앉았다.

“괜찮아요?”

부드러운 타월이 몸을 감싸자 그제야 정신이 든 초원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욕조 밖으로 나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어떻게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미안해요⋯.”

“대체 뭐가⋯.”

물기를 닦아 주던 승준은 연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초원을 품에 안았다.

“미안해요⋯.”

“그만하라니까.”

목욕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누운 초원에게 이불을 덮어 주던 승준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돈도 많이 썼을 텐데 다 망친 것 같아서⋯.”

마주 보고 누워 있던 승준은 주름이 깊게 잡힌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쫌생이에, 그 짓에 미친 놈도 아니고⋯.”

눈치를 살피던 초원이 다시 입술을 달싹이자 미간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그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또 미안하다고 할 거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씁쓸하게 웃은 그녀는 떨어져 나가려는 손가락을 붙잡고 쪽 입술을 맞췄다. 승준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지만 잠시뿐이었다. 다시 걱정 어린 얼굴로 초원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원래는 물 안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초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전거보다 수영을 먼저 배웠다. 여름이면 계곡이며 바다며 워터파크를 찾아다니기 바빴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욕조에 몸도 못 담그게 됐을 줄이야.

“바다에 계속 빠져서 그런가 보네.”

승준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다 제 탓이었다. 울릉도에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구출 작전을 끝까지 말리기만 했어도 초원이 트라우마를 겪지 않아도 됐을 거다.

PTSD란 게 얼마나 지독한 병인지 겪어 봐 잘 아는 승준은 사랑하는 여자가 그걸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졌다.

멍하니 누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초원을 끌어당겨 안았다.

“미안해요.”

“칫, 나는 미안하다는 말 못 하게 해 놓고 팀장님은 해도 돼요?”

초원은 할 수 있는 만큼 목소리를 밝게 꾸몄다.

“내 잘못이니까.”

“팀장님이 나 바다에 밀어 넣은 것도 아니면서⋯.”

초원은 한 팔을 그의 몸에 휘감고 등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승준이 물었다.

“근데 수술 자국은 어디 갔어요?”

분명 울릉도에서의 그날 밤에는 있었던 흉터가 요즘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 그 구출 작전 때 꼬마가 고쳐줘서⋯.”

“아⋯.”

긴 한숨이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승준은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소원 뭐 빌었어요? 빌기 전에 나 흘끗 보던데⋯. 나랑 관련된 건가?”

“아, 하하⋯.”

“맞구나?”

그는 고개를 내려 초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뭔데요, 응?”

“안 돼요. 말하면 안 이뤄지잖아요.”

무슨 소원인지는 몰라도 꼭 이루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에 기분 좋게 웃은 승준은 그녀를 한층 단단히 끌어안았다.

잠이 들었나 싶을 정도로 한참을 잠자코 있던 초원이 물었다.

“팀장님, 나 진짜로 사랑해요?”

“당연한 걸 묻네.”

팔을 살짝 풀고 고개를 뒤로 물린 승준은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불안한 기색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왜 사랑하는데요?”

“왜냐니⋯.”

“이유나 계기가 있을 거 아니에요.”

“흠, 글쎄. 어쩌다 보니⋯.”

“뭐야⋯.”

정말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얽혔다. 그렇게 둘이서 몸부림을 치다 보니 어느새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걸 홀로 기억하는 건 외로운 일이었지만 초원은 잊고 있는 편이 나았다. 승준은 복잡한 심경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뗐다.

“이 여자 사랑스럽네. 근데 사람을 자꾸 들었다 놨다 하네. 대체 이 여자 무슨 생각이지? 이러고 있다 보니까 이렇게 됐는데.”

“그게 다예요?”

“왜? 이런 식으로 사랑에 빠지면 안 되나?”

“아니, 그게 아니고 좀 진지하게 왜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시라고요.”

“초원 씨는 숨 쉴 때 왜 쉬는지 생각하고 쉬어요? 안 쉬면 죽으니까 본능적으로 쉬는 거지.”

그 진지한 눈빛에 초원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욕조에서와는 달리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입술이 살포시 겹쳐지고 두 사람의 숨결이 하나가 되었다.

한참 서로를 머금던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초원은 고개를 들어 승준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달달하기 그지없었다. 그걸 보는 초원의 마음은 달콤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했다.

‘나도 거침없이 같은 눈빛으로 이 남자를 볼 수 있었으면⋯.’

지금 초원의 눈은 무얼 말하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승준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포근하게 감쌌다.

“사랑해.”

초원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입술을 내렸다.

‘나도 거리낌 없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신이 갑자기 나타나 ‘이 사랑은 해피엔딩!’이라고 스포일러를 던져 주고 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거침없이 솔직하게 사랑할 수 있을 텐데.

입술이 다시 떨어지고 초원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팀장님⋯.”

“응?”

“결혼하자고 하면 안 돼요. 그럼 나 떠날 거니까.”

대답 대신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초원은 묵직한 그 무게감이 좋았다.

“흠, 근데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결혼이 왜 싫은 거예요?”

싫은 건 아니었다. 결혼의 문턱을 넘기 위해 해야 하는 고백이 두려웠을 뿐. 그 고백을 미룰 수 있는 한 미루고 싶었다. 언젠가 그런 식으로 잃을 사랑이라 해도 이미 시작해 버린 것, 최대한 늦게 잃고 싶었다.

“그 이유를 물어도 떠날 거예요.”

초원은 더 파고들 데도 없는 품으로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알았어요. 안 물을게요.”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자장가 같았다. 평생 이 남자의 사랑이 변치 않고, 평생 자신의 아픈 곳을 드러낼 필요도 없이, 김 차사가 이름을 부르는 그 날까지 이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 수 있게 해 달라고 초원은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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