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의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뭐지, 진짜?’
벌써 나흘째였다.
긴 한숨 소리에 탕비실에 있던 직원 둘이 나를 곁눈질하더니 알 만하다는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우리 팀이 요즘 줄초상 난 분위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인원 겨우 일곱 명인 팀인데 하나는 병원에 누워 있고 셋은 작전 중에 저승길로 갈 뻔한 데다가 덤으로 구출 대상은 정말로 저승으로 가 버렸다. 팀장님이 수습을 하고 간 건지 우리가 윗선에서 질책을 듣는 일은 없었지만, 그의 빈 자리를 대신해야 했던 안 사무관의 히스테리가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렇다. 일요일 밤 이후로 팀장님이 자취를 감춘 게 벌써 나흘째였다.
아름 씨 말로는 갑자기 이번 주 내내 연가를 냈다는데 어째서 주말을 같이 보낸 나한테는 한마디도 없었을까?
핸드폰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해야지, 일⋯.’
탕비실 밖으로 나가 복도를 걷던 나는 며칠째 기다리던 얼굴을 드디어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 김 차사님! 잠시만요.”
내 부름에 멈춰 선 김 차사가 그 검푸른 입술을 잔뜩 휘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홍 주무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 다름이 아니고⋯.”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저승사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등골이 서늘해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말씀하세요.”
“그, 혹시 거제도 쪽 담당하시는 용궁차사님 아시나요?”
“네? 용궁차사요?”
“아, 그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시면 제가 전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저번 주 금요일에 요만한 남자아이 데려가셨을 텐데⋯. 이름은 송시온이고요. 잘 갔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궁금해서요.”
“개인적으로 아시는 아이인가 봅니다.”
“네⋯.”
나는 쓰게 웃다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다행히 김 차사는 더는 묻지 않고 용궁차사에게 말을 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지금 바빠 죽겠는데 남자한테 눈웃음이나 치며 노닥거릴 때야?”
사무실 입구에 팔짱을 끼고 선 안 사무관이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언제 눈웃음쳤다고⋯. 그러는 본인은 짜증 난다고 나가서 한 시간 넘게 자리 비운 주제에⋯.’
느닷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안 사무관은 이제야 들어왔는지 아직도 코트 차림에 겨드랑이에는 지갑을 끼고 있었다.
“노닥거린 게 아니라 물어볼 게 있어서요.”
“한마디도 안 지고 말대꾸하는 것 좀 봐. 어휴, 진짜 이런 애들 데리고 일하려니 내가 속 터져서.”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하고 싶은 걸 꾹꾹 참으며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내기 소원 못 바꾸나?’
내가 이기면 이 인간을 확 잘라 달라고 할걸⋯.
평소라면 나를 도와줬을 병훈 선배도 오늘은 조용했다. 하긴, 팀장님도 없는데 괜히 안 사무관 앞에서 깐족거리며 내 편을 드는 건 화약고 안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분이 안 풀리는지 안 사무관은 자기 자리로 가는 와중에도 계속 구시렁댔다. 얌전히 내 자리로 가 앉은 나는 녹취록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어폰을 꼈다.
[박병훈: 홍 주임]
한참 일하는데 사내 메신저 알림이 떴다.
[홍초원: 왜요?]
[박병훈: 차 주임 면회 한 번 가야 하지 않을까?]
그날 이후로 현우 선배에게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면목이 없어서? 포기해서? 사실 나도 내가 무슨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가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뭐⋯.’
그래도 팀원들이 가는 데 안 간다고 하기도 그랬다.
[홍초원: 그래야죠.]
‘나는 할 만큼 했어⋯.’
병실 반대편에 서서 현우 선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배는 저번 주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젠 선배가 알아서 이겨야 할 싸움이었다.
‘팀장님 말대로 내 잘못도 아니고⋯.’
내가 선배를 낭떠러지로 민 것도 아니고 선배 엄마도 아닌데, 마음은 아프지만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근데 이 남자는 진짜 어디 있는 거야?’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지만 부재중 전화도 문자 하나도 없었다.
그냥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가를 냈다고 하기에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제는 아파트까지 찾아가 봤지만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었다.
‘말이라도 해 주고 사라지든가⋯.’
초조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쉬었다. 병훈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현우 선배 어머님이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팀에 마가 꼈나?”
병훈 선배의 말에 피식 웃으며 소주잔을 비웠다.
“차 주임 저러고 있지. 다 성공한 작전 망했지.”
“그러게 말입니다.”
열심히 삼겹살을 굽던 으뜸 씨가 중얼거렸다.
“우리 팀 뭐 남해 용궁에 책잡힌 거라도 있어? 어디서 갑자기 너울성 파도가 닥치는 거야.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 말에 보트를 향해 밀려들어 오던 검은 장벽이 떠오르자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나는 선배와 으뜸 씨가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아 근데, 또 팀장님은 휴가도 잘 안 쓰는 양반이 꼭 이럴 때 사라지셔서 안 모 씨한테 시달리게 만드시네.”
그러게, 평소에는 휴가도 잘 안 쓰는 사람이⋯. 나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이죠.”
쓰디쓴 소주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호랑이와 여우라니 이것보다 딱 맞는 비유도 없었다.
“진짜 우리 팀 굿이라도 해야 할까 봐.”
“농담이죠?”
“아냐, 나 심각해. 홍 주임 어머님, 가족 할인으로 어떻게 좀 디스카운트된 가격에 안 되실까?”
굿에 가족 할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대체 무슨 예산으로 내려고요? 영수증 발행인에 연화 선녀라고 써 있으면 회계과에서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요.”
애초에 우리 엄마가 영수증 같은 거 써 주던가? 병훈 선배의 엉뚱한 발상에 피식 웃으며 양파절임 그릇을 뒤적였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아, 진짜 이 아저씨 어디 간 거야?”
술에 취해 집으로 가는 길, 짜증이 나서 투덜거렸다. 그런 나를 원룸 주차장에 숨은 길고양이들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핸드백에서 손가락 굵기의 소시지 두 개를 꺼냈다. 주차장 구석에 쪼그려 앉아 껍데기와 씨름하는 나를 본 고양이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얘들아, 혹시 우리 집에 가끔 오던 아저씨 못 봤니?”
소시지를 작게 떼어 주며 고양이들에게 실없는 소리를 했다.
“키 되게 크고 되게 잘생겼고⋯.”
먹기 바쁜 고양이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남들한테는 더럽게 쌀쌀맞으면서 나한테는 바보같이 다정한데⋯.”
소시지를 잘라 주던 손을 멈추자 고양이들이 뭐 하냐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되는데⋯. 나중에 후회할 텐데⋯.”
남은 소시지를 전부 주고는 손을 털며 일어섰다. 코가 시큰거렸다.
불 꺼진 방에 멍하니 누워 창문을 응시했다. 온갖 살림이 들어찬 이 코딱지만 한 원룸이 언제부터 이렇게 허전했더라?
다시는 안 보겠다고 서랍 위에 놓았던 핸드폰에 또 습관처럼 손을 뻗었다. 화면에는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대체 뭐 하고 있길래 핸드폰도 며칠째 꺼 놓고⋯.’
나는 텔레파시라도 보내는 양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전화 좀 해요, 제발.’
아쉽게도 나는 초능력이 없었다. 야속하게 시계 숫자만 올라가는 핸드폰을 다시 서랍 위에 놓았다.
아까부터 머릿속에는 같은 말이 맴돌고 있었다.
‘‘사랑해’라니⋯.’
난 팀장님에게 해 준 거 하나 없는데⋯. 단순히 좋아한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사랑한다니.
‘왜?’
아니, 지금은 그것보다는 ‘어쩌면 좋을지’를 물어야 할 때였다. 둘 다 상처받지 않고 외롭지도 않을 적당한 거리란 게 있긴 한 걸까? 한쪽이 사랑을 외치더라도? 그 ‘사랑’에는 대체 어떤 전제조건이 깔려 있는 걸까?
‘왜?’
그러다 보니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 있었다. 왜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내가 비밀을 털어놓아도 사랑이 변하지 않을 만큼 절대적인 이유일까?
‘말해 볼까?’
근데 그랬다가 정말로 식어 버리면? 그렇게 다정하던 사람이 차갑게 돌아서는 상상을 하자 가슴 깊은 곳이 찡하게 아려왔다. 역시 그냥 없던 일처럼 지내는 게 나으려나.
‘아, 진짜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잠이나 자.’
한숨을 쉬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베개를 끌어안고 눈을 감는 순간 갑자기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벨 소리가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잽싸게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찍힌 이름을 보니 눈물이 찔끔 났다.
“팀장님?”
[어, 자고 있었어요?]
“아뇨.”
[아⋯, 불 꺼져 있길래⋯.]
“헉, 지금 집 앞이세요?”
[응.]
“내려갈게요. 잠시만요.”
전화를 끊고 걸칠 만한 카디건을 찾던 나는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리 그래도 핫핑크색 오리 무늬 수면 바지를 입고 내려가는 건 좀 심했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헐레벌떡 내려갔더니 1층 유리문 밖에 팀장님이 서 있었다.
“핸드폰도 꺼 놓고 어디 계셨던 거예요?”
나를 보고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전화 많이 했던데⋯.”
“아뇨, 별일 없는데요.”
“그럼 나 걱정해서 전화한 거예요?”
“걱정을 안 할 수가⋯.”
입술을 비죽 내미는 나에게 팀장이 손에 든 걸 내밀었다. 얇은 종이에 싸인 가늘고 길쭉한 물건을 받아 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를 살짝 걷어 보았다.
‘뭐지? 설마 꽃 한 송이 주려고 이 밤에 온 건 아닐 테고⋯.’
흰 꽃과 팀장님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더니 그가 씨익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그랬잖아요. 차 주임 깨울 방법 알아봐 준다고⋯.”
그럼 나흘이나 연락 두절된 게 그 일 때문이었나? 나는 팀장님이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팀장님⋯.”
“이거 뭔지 알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리데기 설화 들어봤죠?”
버림받은 공주가 죽을병에 걸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저승에 가 온갖 고생 끝에 약수와 꽃을 얻어 부모를 소생시켰다는 이야기는 어릴 때 TV에서 본 적 있었다.
“이거 혼살이꽃이에요.”
“네?”
“이름 그대로 혼을 살려내는 꽃.”
꽃을 쥔 손이 떨렸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구해 오신 거지?
“이거 어디서 구하셨어요?”
“서천꽃밭에서⋯.”
서천꽃밭이라⋯. 잠깐, 거긴 이승에 속한 곳이 아니잖아?
“대체 거긴 어떻게 가신 거예요?”
“그냥 아는 사람 통해서⋯.”
살아 있는 사람은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마치 잠깐 옆 동네 마실 갔다 온 것처럼 팀장은 태연한 투로 대답했다.
‘헐, 설마 이 사람 진짜 저승사자인 건가?’
멍하니 팀장님의 얼굴을 응시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 주임한테 가요.”
넋이 분명 나가 있을 내 얼굴을 보고 멋쩍게 웃은 팀장이 건물 앞에 세워진 차를 향해 손을 잡아끌었다.
똑똑.
“하핫⋯.”
매너 넘치게 병실 문을 두드리는 팀장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혼수상태인 사람이 대답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는 듯 어리둥절해 쳐다보는 팀장에게 씨익 웃고는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예상대로 어두컴컴한 병실에는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낮게 깔려 있었다. 문 옆의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때와 다름없이 죽은 듯 누워 있는 선배 옆에 서서 팀장님을 돌아보았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거예요?”
손에 든 꽃을 보란 듯 살짝 흔들었다.
“코에 대어 주면 된다던데⋯.”
“그래요? 그게 다예요?”
팀장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참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네⋯.’
포장지를 살짝 벗기자 흰 꽃잎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 심호흡을 한 나는 조심스럽게 선배의 코끝에 꽃을 가져다 대었다.
‘흠, 별 반응 없⋯.’
그 순간 선배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더니 쿨럭쿨럭 발작적인 기침이 시작됐다.
“선배!”
그동안 미동도 없었던 손이 기침을 막으려는 듯 입가를 향해 움직였다.
“선배, 눈 좀 떠봐요.”
그 말에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던 선배가 곧바로 눈을 찡그렸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셨나 보다. 나는 손을 들어 불빛을 가려 주었다.
“초원 씨?”
잔뜩 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눈을 깜빡이던 선배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선배, 얼마나 오래 이러고 있었는지 알기나 해요?”
나는 선배를 향해 안도 섞인 원망을 내뱉었다. 드디어 깨어난 게 기뻐 부둥켜안고 싶으면서도 주변 사람들 그 고생시킨 게 정말 미워서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음⋯. 여기 어디⋯.”
선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병원이에요.”
선배가 초점을 맞추려는 듯 눈을 찡그리더니 내 뒤쪽을 응시했다.
“어⋯, 팀장님?”
뒤돌아보니 팀장님이 두 걸음 뒤에 서서 이쪽을 보며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아, 진짜 이 남자는 또 왜 저래⋯. 신경 쓰이게스리⋯.’
나는 한숨을 쉬며 문으로 향했다.
“팀장님은 여기 계세요. 저는 나가서 선배 깨어났다고 얘기하고 올게요.”
분주하게 움직이던 의사와 간호사가 하나둘씩 병실 밖으로 나갔다. 팀장님과 나는 의자에 나란히 앉아 선배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살 것 같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빈 물잔을 병상 옆 테이블에 놓던 선배가 흰 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걸로 선배 살린 거예요.”
“아⋯.”
그 말에 꽃을 집어 든 선배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이런 거 처음 보는데⋯. 이거 뭐예요?”
“혼살이꽃이래요. 서천꽃밭에 피는⋯.”
“서천꽃밭? 이걸 어떻게 구했어요?”
거기 아무나 못 가는 걸 선배도 알고 있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팀장님이 구해 오셨어요.”
이제는 입까지 쩍 벌리며 놀란 선배가 팀장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팀장님은 무덤덤하게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선배, 또 장산범인지 뭔지 쫓아다니기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고, 우리 아들!”
현우 선배 어머님이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오셨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어머님의 목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아버님과 함께 걸어 들어오는 젊은 여자를 보고 멈칫했다.
‘아⋯.’
앙증맞아 보이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를 본 선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우리 현우. 연주 오니까 깨어난 것 좀 봐. 연주 덕에 살았네.”
‘이 아줌마가 진짜 뭐라는 거야?’
“응? 연주야. 현우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으면 네가 한국 땅 밟자마자 깨어난 것 좀 봐라.”
우리 팀장님이 기껏 고생해서 현우 선배 살려 놨는데 저 여자가 대체 한 게 뭐 있다고⋯. 이 아줌마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왜 저런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지 못해 아줌마와 현우 선배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이글거리는 내 시선을 눈치챈 선배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현우야, 너 진짜⋯.”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던 여자가 병상으로 다가가더니 선배의 품에 안겼다. 선배는 깁스를 하지 않은 팔을 들어 감싸 안더니 그녀의 머리에 고개를 묻었다.
어? 이상하다.
이거 마음이 아파야 하는 장면 아닌가?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했다.
‘그렇구나⋯.’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애초에 저 자리는 내 자리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내 자리가 될 수 없으며 이제는 준다 해도 싫다는 것을.
현우 선배에게 연주 씨가 아닌 여자는 아무 의미 없듯, 나 아닌 여자는 아무 의미 없다는 남자가 바로 내 옆에 있다는 것을.
갑자기 등 한가운데로 손이 와 닿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팀장은 내가 마음 아파한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본인의 아픈 마음이나 살필 것이지⋯. 이 바보 같은 남자는 걱정 어린 눈길로 내 눈치를 살피며 등을 달래듯 쓰다듬고 있었다.
‘이럴 필요 없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그 손을 붙잡아 단단히 깍지를 꼈다.
“우리는 이제 가요.”
귓가에 속삭이며 문을 향해 손을 잡아끌었다.
팀장님과 손을 잡고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우리.’
내 사전에서 ‘우리’라는 말은 이제부터 조승준이라는 남자와 나로 정의하기로 했다.
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집 앞에 차가 멈춰서고 엔진 소리가 잦아들었다. 가로등 불 아래, 텅 빈 골목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팀장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네?”
“이 빚을 어떻게 갚죠?”
“갚을 필요 없어요.”
팀장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 바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초원 씨가 빚진 것도 아니고.”
이 남자는 진짜⋯. 고생해서 구해 왔을 게 뻔한데 생색도 실컷 내고 자기 몫 좀 챙길 것이지. 그것도 좋아하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를 살리겠다고 미련하게 이 짓을⋯.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왜, 왜 울어요?”
내가 훌쩍이며 눈가를 훔치기 시작하자 당황한 듯 팀장이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붙들었다.
“팀장님⋯.”
“왜 그래요?”
“현우 선배가 대체 뭐라고 한심한 짓 다 하고 다닌 저도 참 바보 같은데⋯.”
마주 보는 팀장님의 입꼬리가 잔뜩 아래로 처졌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사서 고생하시는 팀장님은 더 바보 같아요.”
그 말을 내뱉고 나니 울음이 더 터져 나왔다.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팀장이 나를 끌어당겨 단단히 안았다. 나는 두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럼 바보 하지, 뭐. 초원 씨밖에 모르는 바보.”
팀장님의 어깨에 매달려 울던 나는 그 말에 풋 웃음을 터트렸다.
‘나밖에 모르는 바보라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네.’
나는 그의 품에 기댄 채로 계속 훌쩍였다. 내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던 팀장이 고개를 기울여 머리에 입을 맞췄다.
“울지 마요. 초원 씨 울지 말라고 한 일인데 이렇게 울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
그제야 고개를 들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그런 나를 팀장이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다는 듯 씨익 웃은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두 뺨을 감쌌다.
“팀장님, 약속해 주세요.”
“응?”
“다시는 이런 일 안 한다고요. 저 때문에 희생하지도 말고 말없이 사라지지도 말고요, 네?”
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팀장은 손을 들어 내 눈가를 훔치며 되물었다.
“왜?”
“하, 왜라뇨⋯.”
“난 희생이라고 생각 안 하는데.”
“진짜, 팀장님⋯.”
이 바보 같은 남자 정말 어쩌면 좋을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삼켰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맞췄다. 여전히 걱정 어린 그 시선이 여과 없이 내 심장에 박히고,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 주 내내 팀장님 생각밖에 안 났어요.”
바보같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뜨거워지는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걸 꾸욱 참고 한숨처럼 진심을 토해 냈다.
“걱정돼서 죽을 것 같았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 잠도 못 잤어요.”
내 목소리만큼이나 팀장님의 눈동자도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신 안 이런다고 약속해 주세요.”
팀장은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 얼굴이 점점 다가가는 만큼 그의 입꼬리도 점점 올라갔다.
살포시 맞댄 내 입술을 그의 입술이 포근하게 감싸고 나는 그 부드러운 감촉에 매달려 모든 걸 잊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나와 이 남자, 우리 둘뿐이었다.
숨이 가빠 마지못해 입술을 뗐을 때 팀장이 열에 달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웃었다.
“이런 일 다신 없을 거라더니 작심 사일이네.”
“키스는 그런 일로 안 치거든요.”
우리는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코끝이 부드럽게 서로를 스치기 시작했다.
“흠, 그렇다는 건 키스는 마음껏 해도 된다는 뜻인가?”
“제 마음껏이요. 팀장님 마음껏 말고⋯.”
“치사하게 그런 법이 어딨나?”
이번에는 팀장이 내 얼굴을 움켜쥐고 입술을 겹쳐 왔다.
“흠, 홍 주임.”
손을 흔들어 주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느닷없이 팀장이 나를 ‘홍 주임’이라고 불렀다.
“네?”
“상사가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라면 먹고 갈래요?’ 뭐 이렇게 묻는 게 예의 아닌가?”
팀장은 팔짱을 끼고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은근하고도 노골적인 말에 웃음부터 터트린 나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눈을 흘겼다.
“내기 아직 안 끝났거든요?”
이제 시작한 지 겨우 4일째인데 내가 그렇게 쉽게 질 줄 알고?
“그게 아니고⋯. 나 진짜 배고픈데 라면 두 개만 끓여 주면 안 되나?”
순식간에 전략을 바꿨는지 능글맞은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불쌍한 표정이 얼굴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아 진짜, 이런 거에 마음 약해지면 안 되는데⋯.’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팀장은 정말 허기진 사람처럼 배를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진짠데⋯. 나 저녁도 못 먹었거든.”
정말, 이게 뭐라고 끼니까지 거르면서⋯. 나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진짜 라면만 먹을 거죠?”
“먹는 김에 후식으로 초원 씨도⋯.”
“안 됩니다, 팀장님.”
평소의 팀장답지 않게 아랫입술을 비죽 내미는 그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밀었다. 뿌듯하게 웃으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 남자 은근히 귀엽네.’
회사에서는 농담 비슷한 것조차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고 무뚝뚝, 노잼 그 자체이던 남자인데⋯. 거대한 빙산 같은 이 남자, 수면 아래에는 어떤 모습이 더 숨어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