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꿈보다 더하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초원의 자취방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여긴 사람 사는 집이 아니었다. 비밀번호 누르는 걸 보지 못했다면 이 남자가 저를 호텔에 데려왔나 착각했을지도.
흰 대리석이 깔린 현관을 지나자 눈앞에 한강의 야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초원은 홀린 사람처럼 집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남의 집 거실을 가로질러 통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도시의 불빛이 검은 한강을 붉고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승준의 손이 초원의 허리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감겨왔다.
“야경 보면서 와인이라도 한잔할래요?”
“아, 그게⋯.”
이미 각오는 하고 왔다. 팀장의 사적인 공간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공적인 가면은 벗어 던지고 그의 밑에 깔려 알몸으로 떨게 될 거라고.
“샤워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너무 노골적인가? 그렇지만 이런 꼴로 하는 건 싫었다. 병원에서 대충 씻어서 아직도 소금기가 남은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빨지 못한 옷은 소금에 절인 수준이었다.
“그래요, 그럼.”
초원은 승준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큰 집도 복층 구조가 있구나.’
2층에 있는 침실은 막혀 있지 않았다. 저기서 뒹굴다가 제 신음 소리가 이 벽 저 벽 온 집 안에 적나라하게 메아리치는 상상을 하자 낯이 뜨거워졌다.
“갈아입을 옷이 있어야겠네.”
침실을 지나 드레스 룸으로 들어선 그가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집 앞까지 가놓고도 정신이 없어 옷을 챙겨올 생각을 못 했다. 초원은 네이비색 후드 티와 검은 잠옷 바지를 받아 들고 드레스 룸 안쪽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대리석이 하얗게 반짝이는 남의 욕실에서 옷을 한 장씩 벗고 있자니 잠잠하던 수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나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무서웠다. 이성을 놓고 이 남자의 앞에 자신을 내던지는 게. 그리고, 오늘 밤을 기점으로 송두리째 바뀔 관계가.
‘그냥 집에 갈까?’
브라 후크를 풀다 말고 손을 멈췄다. 갑자기 마음을 바꿔 집에 가겠다고 해도 억지로 붙들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 꺼진 집으로 돌아가 홀로 남겨지는 건 더 무서웠다.
초원은 눈을 질끈 감고 속옷을 마저 벗은 다음 샤워 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다가 씻으려고 벽 선반을 봤더니 샴푸인지 뭔지 모를 병이 딱 하나만 놓여 있었다. 병을 집어 들고 라벨을 읽다 피식 웃었다. ‘샴푸와 바디 워시와 클렌징 폼이 한 번에’라니. 그 조승준 팀장다웠다.
‘여자는 확실히 없구나.’
샤워 부스 밖으로 나가 물기를 닦으며 욕실을 둘러보았다. 워시도 달랑 한 병, 칫솔도 한 개. 여자가 쓸 만한 물건도 없었다.
대충 머리를 말린 초원은 승준이 준 옷을 속옷 없이 걸쳤다. 거울 속 모습을 빤히 보고 있자니 실소가 터졌다. 섹시함을 0에서 10까지 점수로 매기라면 이건 한 -3쯤 되는 차림이었다. 그래도 아까는 -10이었으니 장족의 발전인가?
벗어 둔 옷을 챙겨 욕실 밖으로 나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 거실 테이블에 레드 와인 병을 내려놓던 승준이 돌아보며 슬며시 웃었다.
“저, 세탁기 좀 써도 될까요?”
“이리 줘요.”
마지못해 옷을 넘겼다. 안에 속옷도 있는데⋯.
승준이 주방 뒤편으로 사라지고 초원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와인 병을 집어 들어 라벨을 읽어 보았지만 마트에서 할인 행사하는 와인만 사 마시는 처지라 뭔지 알 턱이 없었다.
“안주할 게 없네. 뭐라도 시켜 줄까요?”
“아뇨.”
“저녁때도 놓쳤는데 배 안 고파요?”
옆에 앉아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팀장님은요?”
“나도 딱히⋯.”
와인 병을 딴 그는 향을 맡아 보라는 듯 코르크 마개를 내밀었다. 초원은 달큰한 석류 향을 느끼며 잔을 채우는 그의 마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 저 손이 초원의 옷, 아니 초원의 몸을 감싼 승준의 옷 속으로 파고들겠지.
‘이게 얼마 만이더라?’
승준이 건네주는 와인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적셨다.
세상에 달콤하고 씁쓸한 것이 초콜릿뿐인 건 아니다. 이 와인이 그렇고, 지금 초원의 기분이 그랬다. 승준의 품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며 와인을 홀짝였다. 오늘의 참담했던 시작을 생각하면 사치스럽고 과분한 마무리였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지금 허리를 달콤하게 쓰다듬는 저 손 외에는. 쓰디쓴 자기혐오며 죄책감이며 절망감이며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모든 게 다시 머릿속에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흑⋯.”
초원의 손에서 와인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올려놓은 승준이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고 달래듯 흔들기 시작했다.
“괜찮아. 초원 씨 잘못 아니야.”
젖은 뺨을 한 손으로 감싸고 그는 귓가에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속삭이고 또 속삭였지만 초원에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팀장님⋯.”
고개를 들고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잠깐이라도 잊고 싶어요. 제발 잊게 해 주세요.”
마주한 그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더 찢어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갈기갈기 조각나고 있었다. 초원은 너무 늦기 전에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입술을 삼켰다.
와닿는 숨결이 점점 격해지기 시작했다. 허리께에서 방황하는 손을 덥석 잡아 옷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더니 커다란 손이 젖가슴을 삼키듯 감싸 쥐었다. 그 손의 뜨거움에 초원은 저도 모르게 밭은 숨을 토해 냈다.
“하아⋯.”
둘은 닿을락 말락 입술을 떼고 옅은 신음을 섞었다. 지금 초원의 젖꼭지를 적나라하게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누구의 것인지 똑똑히 알라는 듯, 뜨겁게 달아오른 시선이 그녀의 두 눈에 내리꽂혔다. 그 열기를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침대로 가요.”
갈증 섞인 속삭임이 초원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에게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가는 길,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못내 허전했다.
그것도 잠시, 침대 위에 적나라하게 흐트러진 초원의 알몸을 승준은 좀처럼 잡히지 않던 먹잇감이라도 되는 듯 구석구석 음미하기 시작했다. 초원은 그 낯설고도 그리웠던 감촉에 몸을 떨었다.
숨이 가빠졌다. 손으로는 연신 허벅지 안쪽을 쓸어 올리며 입으로는 연한 젖가슴을 깨물듯 집어삼키던 승준이 고개를 들더니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초원은 그의 타액에 촉촉이 젖은 가슴을 내려다보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위로 끌어 올린 그가 다정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
허벅지 안쪽에 머물던 손이 예고도 없이 다리 사이를 훑었다.
“입.”
무슨 소린지 몰라 멍하니 그의 두 눈을 응시했다.
“벌려봐요.”
살짝 벌린 입술을 굵은 손가락 두 개가 가르고 들어왔다. 혀를 지그시 누르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빨아 적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야수 같은 두 눈을 버티지 못하고 초원은 눈을 감았다.
입속을 헤집던 손가락이 둔덕을 가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거기 있는지 알았다는 듯 주저 없이 예민한 살점을 덮은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고 그에 맞춰 초원의 허리도 비틀렸다.
“흡⋯.”
새어 나오는 신음을 저도 모르게 손으로 틀어막는 순간 승준의 손이 거칠게 손목을 틀어쥐고 침대에 내리꽂았다. 놀라 눈을 떴더니 적나라한 그의 시선이 두 눈으로 파고들었다. 살점 아래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깊은 곳에 숨겨진 속살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시선에 숨이 막혔다. 그가 몸을 갖는 건 허락해도 영혼까지 가져가게 할 수는 없었다.
“팀장님, 아흣⋯.”
초원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살점을 가지고 놀던 손가락이 빨라졌다.
“하, 하지 마세요.”
“뭘?”
초원은 붙들리지 않은 손을 들어 승준의 눈을 가렸다. 피식 웃은 그가 붙들었던 손을 풀더니 눈을 가린 손을 아래로 끌어당겨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귀엽기는⋯.”
그의 말캉한 혀가 손가락을 하나씩 빨아들이는 순간 절정이 찾아왔다.
“하아⋯.”
초원은 눈을 질끈 감고 전신으로 퍼지는 그 황홀한 감각에 몸을 내맡겼다.
“흡⋯.”
내뱉으려던 신음이 순식간에 입술을 덮친 승준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손은 멈추기는커녕 끈적하게 젖은 살점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바르르 떨리다 못해 파닥파닥 튀어 올랐다. 계속 이러다가는 지나치게 예민해진 몸이 바스러질 것 같았다. 초원은 아래로 손을 뻗어 승준의 팔뚝을 붙들고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계속 입술을 훔치던 그가 초원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드디어 손이 떨어져 나가나 싶더니 손가락 하나가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앗!”
“아파요?”
젖어 있어 아프지는 않았지만 속살도 바깥 못지않게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초원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쥐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승준이 다시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지만 초원은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만 흘릴 뿐 제대로 받아 줄 수가 없었다. 다리 사이에 파묻힌 손가락이 마찰열을 내기 시작하고 온 신경이 그곳으로 쏠렸다.
초원의 입가를 지분거리던 그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촉촉한 입술이 젖꼭지를 감싸는 순간 엉덩이가 저도 모르게 튀어 올랐다. 그 강렬한 감각에 취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신음을 흘리던 그녀는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잠시, 더더욱 아래로 내려가던 입술이 둔덕에 파묻혔다.
다리를 내저으며 침대 시트를 손으로 꼭 그러쥐었다. 그와 동시에 손 하나가 정신없이 비틀리는 엉덩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아흣, 팀장님⋯.”
잔뜩 부풀어 오른 살점을 빨고 핥아대던 입이 더욱 빨라졌다. 둔덕 너머로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 번뜩였다. 눈을 감는 순간 손가락이 멈추는가 싶더니 하나가 더 살을 가르고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손가락이 가장 예민한 곳을 아찔하게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곳과 맞닿은 바깥쪽에서는 보드라운 혀가 꽃잎과 돌기를 마구 훑었다.
“아아, 아앗⋯.”
다리 사이에서 잔뜩 부풀어 오른 열기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터지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초원을 괴롭히던 비명 소리가 잠잠해졌다. 절망의 늪에서 질식해 가다 마침내 고개를 수면 위로 내민 기분이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흐느낌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었다.
몽롱한 여운에 젖어 널브러진 몸 구석구석 입을 맞추던 승준이 덮치듯 초원의 위로 올라왔다. 초원은 없는 기운을 짜내어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조금 더 벌렸다.
머릿속의 비명을 완전히 잠재우려면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더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던 그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잘 자요.”
완전히 지쳐서 눈을 뜰 힘도, 손가락을 들 힘도 없었던 초원은 더 해 달라는 말도 못 하고 가쁜 숨만 골랐다. 옆에 누운 그가 그녀의 몸을 당겨 끌어안았다. 다정히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잠에 빠져드는 순간 초원의 머릿속 음란마귀가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팀장님 고자인가?’
저도 모르게 풋 웃었다. 그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아랫배에 와 닿는 그의 몸은 너무나도 단단했다.
***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으음, 뭐래⋯.’
한창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현실로 질질 끌려 나왔다.
두꺼운 이불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던 초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떼어 냈다. 흐릿한 초점을 맞추기도 전에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실망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어디 가셨지?’
어제 분명 안겨서 잠들었는데 설마 그것도 꿈이었나? 몸을 비틀던 초원은 맨 허벅지가 서로 스치는 느낌에 이불을 살짝 들어 내려다보았다가 곧바로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꿈 아니었네.’
벌거벗은 몸 이곳저곳에 붉게 남은 흔적이 그 증거였다. 이불을 칭칭 감고 저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다 보니 이 손가락을 적나라하게 빨며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 다리 사이가 움찔거렸다.
“아아, 진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가 그 아래에 펼쳐진 장관에 바로 후회하며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옷 어딨지?’
바닥에 있으려나 싶어 뒤로 고개를 돌렸더니 침대 옆 협탁 위에 가지런히 개어진 옷과 머그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불 속에서 한쪽 팔만 뻗어 옷을 집은 초원은 누가 볼세라 후다닥 옷을 걸치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이건 뭐람?’
협탁 위에 놓인 머그잔 위에는 작은 접시가 덮여 있었다. 접시를 들어 올리자 고소한 커피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언제 내린 건지는 몰라도 아직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커피까지 내려 주고 어디로 사라지셨지?’
드레스 룸과 욕실을 살짝 확인해 봤지만 비어 있었다. 1층에 있나 싶어 계단을 내려가는 길, 갓 지은 밥 냄새에 배꼽시계가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실에도 주방에도 그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주방 옆 다용도실도 확인해 봤지만 초원의 옷, 그러니까 브라와 팬티가 건조대에 보란 듯 걸려 일광욕을 하고 있을 뿐 승준은 온데간데없었다.
주방으로 돌아온 초원은 밥솥 위로 풍기는 밥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배가 고파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냉장고를 열었지만 안에는 양념류와 맥주뿐. 실망해서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얼굴 보기가 민망해져 어디로 도망가 숨으면 좋을지 고민했다.
수치심 없이 그의 앞에서 다리를 벌린 어젯밤의 자신이 수치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초원이 저를 놓은 사이 그는 끝까지 자제력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어젯밤 저 남자도 욕망 앞에 자신을 내던지고 짐승처럼 자기 욕구를 채웠다면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승준이 주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일어났네요.”
초원은 어색함을 참으며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장바구니를 주방 카운터 위에 내려놓은 승준이 그녀의 뺨을 감싸더니 망설임 없이 입술을 포개어 왔다.
“잘 잤어요?”
초원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웃으며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그는 장바구니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배고프죠? 조금만 기다려요.”
저를 여자 친구 대하듯 하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남자를 보니 다시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싶어졌다. 그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던 초원은 승준이 비우다 만 장바구니 안을 무심코 들여다보았다가 피식 웃었다.
‘팀장님 고자 아니네.’
장바구니 안에는 칫솔 하나와 젤, 빨간 콘돔 상자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장비가 없었던 것뿐이지⋯.’
바쁘게 재료를 준비하는 남자의 너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가 없긴 진짜 없나 보네. 콘돔 하나 없어서 어제 날 그냥 재운 걸 보면⋯.’
우습게도 그 순간 수치심이 잦아들었다.
아빠가 아닌 남자가 차려 주는 밥상은 처음이었다. 부모님 집에서 살았던 전 남친은 요리라고는 라면 끓이는 거밖에 할 줄 몰랐다. 그마저도 물을 못 맞춰 밍밍한 국물에 김칫국물을 부어 먹기 일쑤였지만⋯.
“초원 씨 입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맛있어요.”
네모반듯한 계란말이를 집어 올리던 초원이 승준을 향해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흐뭇하게 웃은 그가 다시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키스도 잘해 요리도 잘해, 못하는 게 없네.’
간이 적당한 계란말이를 씹으며 마주 앉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생겼지 키도 크지 커리어도 빵빵하지 돈도 있지, 거기다가 가정적이기까지. 흠, 밤일은⋯. 아직 본선을 못 치러 봐서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여튼 어떻게 보아도 일등 신랑감인데 왜 아직도 싱글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짜 내가 멀쩡하기만 했어도 당장 품절남 만들어 주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 안이 까끌해졌다. 이 남자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초원에게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걸 텐데. 못 쓰는 나무를 멋모르고 열심히 찍어 대는 그가 안타까웠다.
사실대로 말하면 뭐라고 할까? 분명 마음 정리하려 하겠지? 설령 지금은 괜찮다고 해도 나중에 단물 다 빠지고 나면 ‘역시 나는 아빠가 되고 싶다.’며 씹던 껌처럼 버릴 게 불 보듯 뻔했다. 전 남친이 그랬듯이⋯.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초원이 안타깝게 여겨야 할 사람은 승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근데 나 진짜 여기서 뭐 하는 거람?’
파트너는 병실에 누워 있고 아이는 제대로 구출도 못 하고⋯. 무책임하게도 그걸 다 잊고 싶다며 저를 감싸 주는 상사에게 매달리기나 하고⋯.
‘참 잘하는 짓이다.’
머릿속이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밥을 먹다 말고 긴 한숨을 쉬는 그녀를 승준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냥 돌아갈까?’
초원은 아침을 먹자마자 돌아갔다. 다시 침대로⋯.
어젯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초원이 강아지 기지개 켜듯 엉덩이를 쳐들고 침대에 고개를 박은 채로 팀장의 리듬에 따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뿐.
배부를 텐데 이렇게 엎드려도 괜찮냐며 그는 초원이 돌아눕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초원은 고집을 부렸다. 눈을 보지 않는 편이 편하니까. 이건 섹스이지 사랑이 아니어야 하니까.
커다란 손바닥이 다리 사이 돌기를 지그시 누르더니 천천히 굴리기 시작했다. 속살의 움찔거림을 그도 느꼈는지 등 뒤에서 낮은 신음이 퍼졌다.
돌기를 압박하던 손이 떨어져 나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 뜨거운 손이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아흣⋯.”
굵은 페니스가 속살을 마구 파고들고 손가락이 단단하게 선 젖꼭지를 비틀었다. 위아래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자극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초원의 벌거벗은 등을 불덩이 같은 몸이 감싸더니 목덜미에 입술이 와 닿았다. 살결을 간질이는 더운 입김에 놀라 몸을 떠는 순간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이 목을 타고 올라와 턱 끝을 붙잡았다.
얼굴을 억지로 돌린 승준이 입술을 베어 물듯 삼켰다. 거친 시작과는 달리 키스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런 그에 맞춰 입술과 혀를 천천히 움직이던 초원은 아랫배에 고여 있던 열기가 스멀스멀 전신으로 퍼지는 걸 느끼며 입술을 뗐다.
몸을 다시 일으킨 승준이 초원의 가는 허리를 단단히 붙들더니 거칠게 엉덩이를 밀어붙였다. 초원을 괴롭히던 머릿속의 잡음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초원은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팀장님⋯, 아앗!”
더 세게 해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허리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엉덩이가 얼얼해질 정도로 골반이 재빠르게 부딪혀 왔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야릇한 소리가 신음 소리와 뒤섞였다. 그가 파고들 때마다 온몸에 벼락이 내리쳤다. 초원은 침대에 고개를 묻은 채로 얕은 신음을 토하며 헐떡였다.
마찰에 뜨겁게 달아오른 속살이 승준의 분신을 쥐어짰다. 아랫배가 당길 정도로, 그를 밖으로 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조여들었지만 그는 물러설 줄 몰랐다.
커다란 손이 등을 지그시 아래로 누르더니 무릎이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넓게 벌렸다. 더욱 깊숙이 들어온 그가 초원의 가장 은밀하고 예민한 곳을 빈틈없이 파고들었다. 숨을 고를 틈이 생겼나 싶었던 것도 잠시, 그의 손에 단단히 붙들린 채로 계속되는 깊숙한 침범을 받아 내던 초원은 절정의 전조가 시작되자 두려움에 흐느꼈다.
더는 오므릴 데를 찾지 못한 안쪽이 파르르 떨리는 순간,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이성이 무너지며 절정의 물결이 그대로 쏟아져 내려 온몸을 휩쓸었다. 머릿속을 울리던 잡음이 사라지고 어떤 일이든 다 잘될 것만 같은 환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초원은 할 수 있는 한 고개를 젖히고 갇혀 있던 신음을 뱉었다.
“아, 아아, 아앗.”
소리 진짜로 잘 울리는구나. 절정을 느끼다 말고 침대에 한쪽 뺨을 박은 채로 풋 웃었다.
“하아⋯. 뭐가 그렇게 웃겨요?”
속도를 줄인 승준이 초원의 골반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냥⋯. 저 너무 시끄러운 것 같아서요⋯.”
“난 듣기 좋은데⋯.”
그의 뜨거운 손이 초원의 뺨을 쓸어내리더니 얼굴 위로 마구 흐트러져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겼다. 회사에서는 저승사자라 불릴 정도로 차가운 남자가 침대에서는 뜨겁기 그지없었다.
몸을 지탱하고 있던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손 닿는 곳마다 부드럽게 쓰다듬던 승준이 허리를 살짝 뒤로 물렸다. 다리 사이에 박혀 있던 굵은 물건이 빠져나가자 그 허전함에 초원은 몸을 잘게 떨었다.
모든 게 다 잘될 것 같은 환희는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계속 이 남자에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으니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욕실로 가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승준이 한 팔로 초원의 젖가슴을 감싸더니 어깨와 목덜미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돌아누워요.”
“네? 끝난 거 아니에요?”
“끝은 무슨⋯. 이제 시작인데.”
살짝 돌아보았더니 그의 다리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짐승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세상에나⋯.’
초원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엎드려 누웠다.
“안 돌아누울 거예요?”
그의 못마땅한 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원은 매트리스에 묻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옆으로 눕든가.”
또 주저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피식 웃는 소리가 초원의 어깨를 간질이더니 다리 사이를 다시 그 성난 짐승이 가르고 들어왔다. 여린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그가 중얼거렸다.
“사람 정말 안 변하네.”
“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승준을 바라보았다가 대답을 듣기는커녕 입술만 빼앗겼다. 입술이 얼얼해질 정도로 빨던 그가 나른한 눈빛으로 초원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내 말은⋯ 귀엽다고⋯.”
미심쩍은 눈초리에도 별말 않고 코끝에 입만 맞춘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속도를 냈다. 이미 달궈질 대로 달궈졌던 초원의 몸이 곧바로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미치겠다. 현실이 꿈보다 더하네.’
‘날씨 탓인가?’
초원의 마음을 대변하듯 창밖은 우중충하기 그지없었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며 소파에 엎드려 누운 그녀의 손에는 맥주 캔이 들려 있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벌인 정사 후, 머릿속의 비명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이제는 알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꾸물꾸물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무엇이 불편한 걸까? 자제력을 놓아서? 팀장과의 관계가 초원이 그어 둔 궤도를 이탈해서? 아니면 지금 커피 테이블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자신을 동물원 원숭이인 양 관찰하고 있는 저 혼령 때문에?
“혼자 사신다던 분 집에 여자 귀신이 있네.”
초원이 영을 감지하는 줄은 몰랐을 귀신이 그 말에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은 후 승준이 볼일이 있다며 나가자마자 어디선가 나타난 이 처녀 귀신이 자꾸 초원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보통 간이 크지 않고서야 특관청 직원을 따라다니는 귀신은 없는데, 이 여자는 좀 독특했다.
그래도 딱히 해코지하려는 속셈은 아닌 듯해 모른 척하려 했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은 거라고는 후드 티에 팀장에게서 빌려 입은 남자 팬티 하나뿐인데⋯. 아무리 같은 여자끼리라도 저 호기심 어린 시선이 불편해 초원은 계속 후드 티를 아래로 당겼다.
“아가씨, 미안한데 나 느낄 줄만 알지 보고 말하는 건 못하거든요.”
초원이 영매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코앞까지 다가왔던 귀신은 그 말에 실망한 기운을 역력히 냈다.
“미안해요.”
초원은 귀신의 얼굴이 있을 법한 허공을 향해 멋쩍게 웃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에 들린 맥주 캔이 점점 미지근해져 갔다.
‘진짜 비슷해.’
꿈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본 적 없는 몸인데 꿈이 어떻게 그렇게 정확할 수 있었을까?
‘나 설마 없던 능력이라도 생겼나?’
그 찜찜한 생각에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삑삑삑삑.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이어 덜커덩 문 열리는 소리가 거실을 가로질렀다. 초원은 거실로 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들고는 이 집의 지박령이라도 되는 듯 굴었다.
“어서 오세요.”
정작 이 집의 진짜 지박령은 승준이 들어오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승준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집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도 기뻤지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아슬아슬한 차림의 초원이라는 건 꿈만 같았다.
“안녕.”
허리를 굽혀 살포시 입을 맞췄다. 쑥스러워하는 얼굴이 귀여워 한 번 더 살짝 입을 맞추고는 손에 든 봉투를 내밀었다.
“뭔데요?”
초원이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더니 봉투를 받아 들었다.
“연고.”
초원이 고개를 갸웃하자 어느새 옆에 앉은 승준은 그녀가 입은 후드 티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제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아까 보니까 옆구리에 멍들었던데.”
손을 떼어 내며 옷을 다시 끌어 내리던 초원이 잠잠해졌다. 손끝이 옆구리를 훑기 시작하자 그녀는 몸을 살짝 비틀었다.
“아파요?”
“그냥, 약간요.”
“이거 좀 벗어 봐요. 약 발라 줄 테니까.”
남자 팬티 하나 달랑 걸치고 남의 거실에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옷에 연고를 묻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초원은 머뭇머뭇 후드 티를 벗어 끌어안으며 가슴을 가렸다.
‘멍이 언제 든 거지?’
보트 위에서 꼬마가 다친 데를 다 고쳐 주었으니 그전에 생긴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구조하러 온 어선에 오를 때 생긴 모양이었다. 등 뒤에서 연고를 발라 주던 승준이 느닷없이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초원 씨는 참 손이 많이 가는 여자야. 내가 살다 살다 타박상 연고만 세 번 사다 준 사람은 초원 씨가 처음이네.”
초원이 허리를 비틀어 뒤로 살짝 돌아보더니 눈을 흘겼다.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다른 손이 옆으로 쑤욱 들어와 초원의 아랫배를 붙들었다. 그녀는 옷을 붙잡고 있던 손 하나를 내려 승준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아, 뱃살 만지지 마세요.”
“만지고 싶어도 없는데, 뭐.”
그 말에 풋 웃은 초원은 손을 거뒀다.
“근데 설마 이거 사러 나갔다 오신 건 아니죠?”
미안한 마음에 묻고 보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연고 하나 사는데 두 시간 넘게 걸릴 리가.
“응? 겸사겸사.”
뭘 하고 왔는지 자세히 묻지 말라는 어투인 것이 걸렸다.
‘설마 그 선녀?’
정사가 끝난 후, 샤워를 하고 나온 초원은 속옷을 빌리려다 본의 아니게 승준의 전화 통화를 엿듣게 됐다. 드레스 룸 맞은편, 서재의 닫힌 문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단어 몇 개를 주워들은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선녀님?’
승준은 분명 전화 너머의 상대를 그렇게 불렀다. 설마 그 팀장이 전화로 사주 상담을 받고 있을 리는 없고, 이건 진짜 선녀라는 소리였다. 저승에서 저승사자들이 외근 오듯, 천계에서 선녀들이 청에 외근을 오곤 했다. 그럼 설마 일 중독자 팀장이 주말에도 일을 하는 걸까? 하지만 들리는 단어들이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꽃밭이니 꽃이니 뭐니.
‘뭐야⋯.’
조금 전까지는 초원을 침대에서 못 나가게 하려고 기를 쓰더니 정사가 끝나자마자 딴 여자랑 통화라니.
‘알 게 뭐야. 팀장님 사생활인데.’
초원은 마음속에서 고개를 드는 묘한 감정을 억눌렀다. 사랑이 아닌 섹스를 원한 주제에 다른 여자를 신경 쓰는 건 모순이니까.
“다 된 거 아니에요?”
등 전체가 멍이 들었을 리도 없는데 손가락이 계속 이곳저곳을 훑고 있었다.
“또 멍든 데 있나 봐야 하니까⋯.”
핑계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속아 주기로 했다. 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불쑥 아랫배로 오더니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초원은 승준의 허벅지에 앉은 꼴이 됐다.
“뭐 하시는 거예요?”
후드 티를 뺏으려는 그를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밀어냈다.
“앞쪽도 확인해야지.”
“여긴 멍 없어요.”
“그럼 이건 뭐죠?”
승준은 가슴골이 시작되는 부분의 작고 불그스름한 자국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내려다본 초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키스 마크는 멍 아닌가요, 홍 선생님?”
“⋯의학적으로는 멍이긴 하죠.”
씨익 웃은 승준이 순식간에 몸을 가린 후드 티를 빼앗아 소파 너머로 던졌다. 그냥 두면 사라질 자국에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려도 하나하나 찾아 약을 바르더니 이제는 아무 상관 없는 그녀의 입속을 혀로 확인하고 있었다.
“으읍, 아직 맥주 덜 마셨는데⋯.”
승준을 겨우 밀어내고 입술을 뗀 초원이 협탁 위의 맥주를 핑계랍시고 가리켰다.
“이따가⋯.”
이미 달아오른 남자에게 그런 저렴한 핑계가 통할 리가 없었다.
“김빠지잖아요.”
“새 거 따면 되지.”
초원은 더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뜨거운 혀가 그녀의 붉은 젖꼭지를 부드럽게 휘감기 시작하자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건 신음밖에 없었다.
“아흣⋯.”
승준은 탐스러운 가슴을 입에 가득 문 채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주는 야릇한 감각에 한껏 취해 숨이 넘어갈 듯 고개를 젖힌 초원을 보는 것만큼 만족스러운 일도 없었다.
커다란 손이 속옷 속으로 파고들어 오기 시작하자 초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해 놓고 또 하자니⋯. 이 남자 대체 얼마나 굶은 거야?’
팔 하나가 초원의 허리를 휘감고 끌어 올리더니 속옷을 끌어 내리려 했다. 이대로 하면 마주 보고 해야 할 게 뻔했다. 초원은 속옷을 다시 위로 끌어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소파 아래로 내려간 그녀는 승준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에게 한 번 생긋 웃어 준 초원은 그의 벨트 버클을 풀었다. 이내 잔뜩 흥분한 그의 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원은 굵은 기둥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다 끄트머리를 할짝할짝 핥아 보았다. 보드라운 혀가 뜨거운 머리에 닿는 순간 승준의 허벅지가 움찔거렸다.
‘재밌네, 팀장님 반응.’
잡아먹히는 입장에서 잡아먹는 입장이 되는 건 색달랐다. 자신감을 얻은 초원은 고개를 살짝 들어 승준에게 눈을 맞췄다. 그렇게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서서히 뿌리부터 끄트머리까지 혓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그 노골적인 혀 놀림을 지켜보던 승준이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초원은 다시 그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흩어지는 뜨거운 한숨을 느끼며 끄트머리만 조심스레 입에 머금었다. 손을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입술과 혀로 머리를 부드럽게 빨고 간지럽혔다. 그러자 한숨이 점점 거친 숨소리로 변해 갔다.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승준의 굵은 손가락이 얽혀 들어왔다. 그걸 신호로 받아들인 듯 초원의 머리가 아래로 깊숙이 내려가자 애틋하게 머리를 어루만지던 손이 점점 속도를 잃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초원의 머리는 서서히 속도를 내고 있었다. 입속 깊이 그의 버거운 분신을 머금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한동안 턱에 무리 가는 건 못 먹겠네.’
“하아⋯.”
한숨 같은 신음 소리에 위를 살짝 올려다본 초원은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한창 좋을 때일 텐데 갑자기 승준이 어깨를 뒤로 밀며 멈추게 했다. 고개를 든 그녀는 그의 분신을 아이스크림이라도 되는 듯 입에 문 채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얼굴로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 물건을 물고 있는 그 광경에 승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위로⋯ 올라와요.”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초원의 뜨겁고 촉촉한 입속이 선사하는 느낌은 황홀하기 그지없었지만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초원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지 욕구를 풀자는 게 아니었다.
승준의 말을 뻔히 이해해 놓고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한 초원은 눈을 나른하게 뜨더니 입속의 혀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 아찔한 감각에 잠시 승준이 할 말을 잃고 멈칫하는 순간, 다시 고개를 숙인 그녀가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이 여자 진짜 사람 미치게 하네.’
이 여자, 영악하다는 걸 잠시 잊었다. 승준은 결국 포기하고 초원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는 그를 슬쩍 올려다본 초원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요즘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적어도 이 남자한테는 쓸모 있네.’
사무실에서는 만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남자가 그녀의 손안에서 자신을 놓고 쾌락에 몸을 내맡기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 작은 손에 붙들린 뿌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내 머리 위에서는 한숨 같은 신음이, 그리고 초원의 입속으로는 뜨거운 액체가 터져 나왔다.
꿈틀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초원은 천천히 그의 분신을 핥았다. 혀가 스칠 때마다 절정에 취해 가만히 숨을 고르던 승준의 허벅지가 움찔거렸다.
숨죽여 웃는 초원을 승준은 위로 끌어 올려 허벅지 위에 앉혔다. 이제야 얌전히 앉아 그가 원하는 대로 입술을 맞춰 주던 초원이 속삭였다.
“좋았어요?”
“좋았냐가 아니라 괜찮냐고 물어야지.”
승준은 초원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왼쪽 가슴에 놓았다. 그녀의 작은 손 아래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기세로 뛰고 있었다.
“좋은 부하 직원이 되는 게 이렇게 쉬운 건 줄 몰랐네요, 팀장님.”
주방에 서서 수건으로 입가의 물기를 닦던 초원은 2층에서 내려오는 승준을 보고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다음 평가 때 잊지 말고 참작해 주세요.”
피식 웃은 승준은 냉장고를 여는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은 부하 직원이 아니라 사랑받는 부하 직원이지.”
‘사랑’이라는 단어에 초원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등 뒤에 서 있던 그는 보지 못했다.
“받기만 하니까 미안한데, 내가 뭘 해 주면 좋을까?”
뒤에서 끌어안았지만 초원은 맥주 캔을 따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응?”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재차 물었다.
“뭐 해 주실 건데요?”
“초원 씨가 원하는 거면 뭐든지.”
“진짜요?”
승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초원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럼 연봉 올려 주세요.”
“그건 안 됩니다.”
“칫⋯.”
부루퉁한 얼굴로 맥주를 들이켜는 초원을 끌어안고 승준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웃었다.
“이쪽으로 와 봐요.”
맥주 캔을 들지 않은 손을 승준이 잡아끌었다. 아일랜드 카운터를 등지고 선 순간, 초원의 몸이 위로 번쩍 들리더니 카운터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꼴이 됐다.
“앗!”
그 바람에 찰랑거리던 맥주가 손 위로 넘쳐 흘렸다. 그 찝찝한 느낌에 초원은 눈을 찡그렸다.
“금방 새 맥주 땄는데 진짜 이러기예요?”
카운터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승준이 장난기 넘치는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그 청량한 미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남자 이렇게 웃을 줄도 알아?’
당황한 초원은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맥주 캔을 카운터 위에 놓았다.
“맥주 아깝게 다 흘렸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승준이 그 젖은 손을 붙들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빨았다. 말랑한 혀가 부드럽게 손가락을 휘감았다. 시선을 떼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을 입속으로 집어넣는 그를 보자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초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리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됐죠?”
손을 놓자마자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을 붙든 승준은 입술을 겹쳤다. 끈적하게 얽혀 드는 혀끝으로 씁쓸한 맥주의 향이 감돌았다.
한참 혀를 섞던 그는 눈을 슬며시 뜨고 초원의 반응을 살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입을 맞추는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살포시 눈을 뜬 초원은 자신을 줄곧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해 곧바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승준은 그녀의 눈 속에 깊이 새겨진 갈증을 놓치지 않았다.
갑작스레 입술이 떨어지자 초원의 몸이 휘청했다. 엉덩이로 손이 파고들더니 초원이 미처 저항을 하기도 전에 속옷을 끌어 내렸다. 맥주는 한 캔도 제대로 못 마셨건만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해진 그녀는 얌전히 그의 손길에 몸을 내맡기고 다리를 벌렸다.
“아흣⋯.”
계곡의 초입으로 갈 줄 알았던 혀가 곧바로 가장 깊숙한 샘을 파고들었다. 보드랍고 말캉한 혀가 안쪽을 헤집는 그 생소하고도 황홀한 감각에 초원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온몸이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렸다. 더는 버틸 수 없어진 그녀는 천천히 카운터에 몸을 눕혔다.
혀가 여린 속살을 핥을 때마다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그런 그녀의 하체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오고 그에 맞춰 혀도 꽃잎을 훑으며 서서히 돌기를 향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쉬워하던 것도 잠시, 뜨거운 두 손이 옷 속을 파고들어 와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촉촉한 입술이 민감한 돌기를 머금었다.
“앗⋯.”
짧은 신음을 토해 낸 초원은 입술을 깨물고 몸을 비틀었다. 가슴을 주무르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돌기를 살살 빨아대던 입술이 멈추더니 혀가 마구 훑어대기 시작했다. 그 압도적인 자극에 몸이 부서질 것 같았던 초원은 혀가 돌기를 쓸어 올릴 때마다 입술 사이로 야릇하게 새어 나가는 신음을 막을 겨를이 없었다.
“아흣, 팀장님⋯.”
‘좀 더’와 ‘그만’을 동시에 외치고 싶은 느낌이 계속됐다. 이러다가 정말 몸이 재가 되어 부서져 내릴 것 같았던 초원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승준의 머리를 밀었다.
“왜? 싫어요?”
싫을 리가 없다는 건 승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과 헐떡이는 숨소리, 애타게 뻐끔거리기 시작하는 입구가 말해 주고 있었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죽을 것 같아서⋯.”
초원의 다리 사이로 파스스 부서지는 웃음소리가 한껏 예민해진 꽃잎을 간질였다.
“이 정도로는 안 죽어요.”
“아앗⋯.”
혀가 다시 격하게 살점을 헤집더니 긴 손가락 하나가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잔뜩 달아오른 목소리가 다시 주방을 울리기 시작했다.
절정을 만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원은 남의 집 주방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리를 벌린 채 누워 숨을 헐떡였다. 그런 그녀를 덮치듯 몸을 숙인 승준이 가볍게 입을 맞추며 괜찮냐고 물었지만 초원은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떨림이 잦아들자 서서히 정신이 든 그녀는 승준의 도움을 받아 다시 바닥에 발을 디뎠다.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대로 설 수 없었던 초원은 승준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다 아랫배에 닿는 그의 몸이 단단하게 부풀어 있는 걸 느끼고 못 믿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승준이 바지 주머니에서 네모난 포장지를 꺼내 들었다.
“소파로 갈래요?”
‘아, 이 남자 진짜. 휴가 나온 군인도 아니고⋯.’
한숨을 쉰 초원은 아일랜드 카운터 가장자리에 팔꿈치를 얹고 엉덩이를 뒤로 쭉 내밀었다.
“그냥 여기서 해요.”
그 모습을 본 승준은 한숨을 쉬었지만 군소리 없이 바지 버튼을 풀었다. 안달이 난 분신에 콘돔을 씌우고 그녀의 입구에 몸을 맞춘 그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고집하고는⋯.”
초원의 몸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신을 휩쓰는 물결에 몸을 내맡기던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미치겠다. 이 남자 왜 이렇게 잘해?’
“맥주 새 거 따 줄까요?”
옷을 주워 입고 거실로 향하는 초원을 향해 승준이 물었다.
“아뇨, 새 거 딸 때마다 팀장님이 달려들까 봐 무서워서 못 마시겠어요.”
부루퉁하게 대답한 초원은 가까이 다가오는 낮은 웃음소리를 피하듯 소파에 털썩 누웠다.
“자려고요?”
팔뚝으로 눈을 가린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하루도 채 가기 전에 일 년 치의 격정을 불살랐더니 온몸이 나른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거실을 오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발치에서 천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초원의 맨다리를 보드라운 담요가 감쌌다.
“잘 자요.”
뜨거운 입술이 짧게 와닿았다. 이내 멀어지는 기척을 느끼며 초원은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발치의 협탁에 마시다 놓아둔 맥주 캔을 치우려는 건지 승준이 집어 들었다.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 보며 캔을 흔들던 그가 김빠진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초원은 자는 척하던 것도 잊고 쿡쿡 웃었다.
“팀장님은 요리도 잘하시네요.”
거실에 앉아 승준이 해 준 떡볶이와 어묵탕을 먹던 초원이 생긋 웃었다.
“그래요? 요리 잘한다는 말은 처음 듣네.”
쑥스러운 듯 웃는 승준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올 줄 몰랐다.
“왜요? 이렇게 맛있는데.”
“늘 혼자 해서 혼자 먹으니까⋯.”
“아⋯.”
그의 쓰디쓴 미소에 그간 지고 살았을 외로움의 흔적이 얼룩져 있었다. 가족을 끔찍한 사건으로 일순간에 모두 떠나보내고 홀로 묵묵히 살아오던 남자였다. 평소에 내색은 안 해도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모습을 보는 초원의 마음 한편이 아렸다.
‘그냥 계속 이런 식으로만 만나면 괜찮지 않을까?’
적당히 선을 그어 두고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만난다면 승준이 외로울 일도, 초원이 아플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녀의 시선을 느낀 승준이 슬며시 웃었다.
“오늘은 초원 씨랑 먹으니까 맛있네.”
마음이 약해진 초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떡 하나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제가 차린 건 아니지만 많이 드세요.”
눈을 반짝이며 떡볶이를 받아먹은 승준이 흐뭇하게 웃었다.
승준은 소파에 기댄 채로 맥주를 마시며 초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뜨거운 어묵을 후후 불며 TV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녀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요즘 지치고 우울해 보이기만 하던 초원이 원래의 발랄함을 점점 되찾고 있는 듯했다.
초원의 가슴을 여전히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문제도 머지않아 해결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잘만 된다면⋯. 잘 안 되는 경우의 수도 넘쳤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오늘이 초원과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이었다.
“왜요?”
시선을 느낀 그녀가 맥주 캔을 기울이다 말고 쳐다보았다. 그 동그란 눈이 새삼 귀여워 승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예뻐서⋯.”
그 말에 초원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눈썹을 찡그리더니 다시 TV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슬며시 웃은 그는 말없이 앉아 그녀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추워⋯.’
한참 달게 자던 초원은 눈을 감은 채로 몸을 웅크렸다. 아무래도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자는 건 무리였나 보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맨 팔뚝이 시렸다. 겨우 눈꺼풀을 떼고 내려다보니 이불은 허리까지 내려가 있었다. 옅은 한숨을 쉬고 이불 끝을 잡으려는 찰나, 그녀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움직이더니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포근한 이불에 파묻혔으니 잠이 잘 올만도 했지만 초원은 다시 잠들지 못했다. 팔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과 목덜미에 와 닿는 고른 숨결의 온기를 느끼며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푸른 새벽빛이 흰 벽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각, 초원은 다시 눈을 감고 베개 깊숙이 뺨을 파묻었다. 팔을 쓰다듬던 손은 이제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만 됐으니 자라는 뜻으로 초원은 그 손에 깍지를 껴 붙들었다.
하지만 그걸 전혀 다르게 해석한 승준은 그녀의 목덜미에 천천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으음⋯. 팀장님, 간지러워요.”
초원은 목을 움츠리고는 이불을 더욱 끌어 올렸다. 그 바람에 자유를 얻은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티셔츠를 걷으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초원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팀장님은 지치지도 않으세요?”
초원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흘기자 가슴을 부드럽게 쥐던 손이 멈췄다.
“그만할까요?”
거칠게 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초원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아뇨.”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승준이 몸을 일으키더니 옆으로 누워 있던 초원을 젖혀 바로 눕혔다.
“어제는 초원 씨가 하자는 대로 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게요.”
대답 대신 한숨을 쉰 초원은 속옷을 끌어 내리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눈만 안 마주치면 그만이니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못 할 것도 없었다.
눈을 감고 있자니 남은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여린 살결을 스치는 거친 턱과 혀를 휘감는 이 남자의 강렬한 맛, 옅어질 대로 옅어져 이미 맡아 보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애프터셰이브 향, 그리고 마구 뒤섞여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가쁜 숨소리까지.
달아오른 몸 곳곳을 아찔하게 덮치던 감각의 포화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리 사이 깊숙한 곳으로 모두 쏟아졌다. 침대 삐걱이는 소리와 자신의 신음 소리, 그리고 남자의 거친 숨소리에 초원은 귀가 얼얼했다.
땀에 젖은 그의 단단한 가슴이 미끄러지듯 스쳐오자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젖꼭지부터 아랫배까지 찌르르 전율이 흘렀다. 정상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 초원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순간, 그녀의 목덜미에 줄곧 묻혀 있던 승준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초원 씨.”
느닷없이 몸을 일으킨 그가 이름을 불렀다. 얼떨결에 눈을 뜬 초원은 후회하며 곧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보지 말아야 할 걸 보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두 눈에 이미 발가벗고도 더욱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초원 씨, 나 좀 봐줘요.”
뜨거운 손이 그녀의 두 뺨을 단단히 붙들더니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보았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승준의 눈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을. 그렇다면 이 남자가 보는 자신의 눈 속에는 지금 어떤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는 걸까?
‘무서워⋯.’
곧바로 절정이 밀려오고 초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눈 좀 떠 줘요.”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애원에 마지못해 눈을 뜨는 순간, 갇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눈가를 타고 승준의 손가락 위로 흘러내렸다.
“사랑해.”
“하지 마세요.”
억누르지 못한 흐느낌에 초원의 가슴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승준은 물러설 줄 몰랐다.
“사랑해, 초원 씨.”
“하지 마세요, 제발⋯.”
초원은 손을 들어 승준의 가슴팍을 할 수 있는 한 세게 밀쳤다. 그 손을 가볍게 떼어 낸 그는 흐느끼는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초원이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칠수록 몸을 휘감은 팔은 더욱 단단해졌다. 자포자기한 그녀는 그의 품에서 서럽게 울었다.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란 말이에요. 내가 부족한 여자인 거 알면 싸늘하게 식어 버릴 사랑 따위⋯.’
새벽의 어스름이 서서히 물러나고 늦가을 아침의 햇살이 침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방이 환해지고도 그 숨죽인 흐느낌은 좀처럼 잦아들 줄 몰랐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제 옷으로 다 갈아입고도 초원은 욕실에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의 멍한 시선 끝에는 칫솔 두 개가 컵 하나에 사이좋게 꽂혀 있었다.
발이 들러붙기라도 한 듯 한참을 그러고 서 있던 초원은 분홍 칫솔을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 손에 쥔 칫솔을 내려다보며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다 결심한 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리는 순간⋯.
툭.
둔탁한 소리를 내며 칫솔은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잘 쉬었어요. 감사했습니다.”
일요일 저녁, 초원의 자취방 앞에 멈춰선 자신의 차 안에서 승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쓸데없는 감사 인사가 쓸데없이 예의 발랐다.
‘우리 사이에 ‘감사했습니다’라니.’
초원이 이런 식으로 선을 긋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여기까지 와 놓고 다시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로 돌아가자니⋯. 그게 가능한 줄 아나?’
승준은 말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손가락만 내려다보던 초원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런 일⋯ 다신 없을 거예요.”
단호하게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렇다고 고쳐 말하는 건 더 이상했다.
초원은 운전석 쪽을 곁눈질하며 승준의 반응만 살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불끈거렸다.
‘화나셨나?’
정작 승준은 이를 악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저렇게 확신 없는 목소리로 이런 일 다신 없을 거라니⋯. 이건 여자들이 싸웠을 때 하는 ‘헤어지자’는 말이 사실은 ‘날 붙잡아 달라’는 말인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확실해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초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승준이 물었다.
“네?”
“나는 이런 일 다시 있을 것 같은데?”
승준의 장담에 마음이 불편해진 초원은 몸을 살짝 비틀었다.
“나랑 내기할래요?”
“네?”
“이런 일 또 있으면 초원 씨가 내 소원 들어주고 없으면 내가 초원 씨 소원 들어주고. 어때요?”
이런 일에 애들 장난도 아니고 내기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초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기는 무슨 내기예요, 이런 일에⋯.”
“흠, 벌써 질 거 알고 있구나.”
승준이 피식 웃자 발끈한 초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네? 아니거든요?”
그의 도발에 잠자고 있던 초원의 승부욕이 서서히 꿈틀대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이 말도 안 되는 내기를 덥석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이길 자신 있는 목소리가 아닌데? 하긴 나도 결과가 뻔한 내기는 이겨도 재미없지.”
“안 질 거거든요?”
“말이야 쉽겠지.”
가소롭다는 그의 표정에 초원은 팔짱까지 끼고 쏘아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해요? 무한정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유치하다며 거절할 줄 알았던 초원이 조건을 따지기 시작하자 승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초원은 낚기 쉬운 물고기였다. 도발이라는 미끼만 눈앞에 흔들어 주면 그놈의 승부욕이 냉큼 물어 버렸다.
“1년? 아니면 6개월?”
초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너무 길고요. 올해 마지막 날까지는 어때요?”
“그렇게 짧게?”
겨우 두 달 남짓이었다. 짧을수록 승준이 불리해지는 내기였지만 너무 짧다고 앓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도 그놈의 승부욕이 불타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래요. 초원 씨 소원은 뭔데요?”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초원은 무슨 좋은 꿍꿍이라도 있는 듯 씨익 웃었다.
“뭔데 그래요?”
“저⋯ 다음 평정 때 제일 높은 등급 주세요.”
그제야 왜 내기의 기한을 올해 말까지로 잡으려 했는지 이해한 승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노골적인 요구를 내뱉고 민망해진 초원은 일부러 헤실헤실 웃었다. 그 얼굴에 대고 싫은 소리 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는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
“팀장님은요?”
원래라면 사귀자고 하려 했던 승준은 초원만큼 무리수를 두기로 했다.
“초원 씨가 지면 우리 집으로 이사 와요.”
“네?”
“같이 살자고.”
“그건 좀⋯.”
“왜? 나랑 사는 거 별론가? 청소 안 해도 되고 내가 맛있는 것도 해 줄 건데⋯.”
“아니, 그건 좋지만요. 부모님이 아시면 난리 나는데⋯.”
초원이 곤란해하는 걸 보고 승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진지하게 내기 결과를 따진다는 건 질 가능성을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매일 밤 내 옆에서 자는 건?”
“그건 뭐가 다른데요?”
“초원 씨 자취방은 그대로니까⋯.”
“흠⋯.”
초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와서 산 지 오래되니 부모님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일도 요즘은 없었다.
하지만 매일 밤 옆에서 자라니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그게 가능이나 할까? 그래도 안 지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래요, 그럼. 질 것도 아닌데요, 뭐.”
아침의 그 일 후로 종일 기운이 없던 초원이 겨우 내기 하나에 정신이 팔려 원래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승준은 자신만만하게 웃는 초원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일 뵐게요.”
차 문을 열고 나가려는 초원에게 뭔가를 말하려 입을 열던 승준은 곧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차 밖으로 나가 원룸 입구로 향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차 주임 일은 내가 알아볼 테니까 걱정 말아요. 혹시나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생각도 안 하고 있던 현우 이야기를 뜬금없이 꺼내자 초원은 얼떨떨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더 할 말이 있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품 안으로 쏙 들어온 그녀를 단단히 감쌌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에서 그가 쓰는 샴푸 향이 은은히 퍼져왔다. 눈을 감고 초원의 체취와 감촉을 몸에 새기던 승준은 서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초원의 고개가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
내기 이야기에 완전히 기분이 풀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승준은 얼굴을 조금 뒤로 물리고 뺨을 감싸 쥔 손을 마지못해 떼어 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초원이 쓰게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 괜히 했나?’
좀 더 기다렸어야 했을까? 하지만 이제 기다리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수백 번을 참고 참은 말이었다. 고작 두 번 내뱉은 것만으로는 지독한 갈증이 풀릴 리가 없었다. 숨 쉬듯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또 초원을 울릴 수는 없었다.
승준은 말 대신 눈빛에 애틋한 마음을 가득 담아 보냈다. 그걸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초원은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은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나중에 봐요.”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초원은 등을 돌려 건물 입구로 향했다.
불을 켜고 익숙한 원룸 안을 둘러본 초원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창문으로 다가간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창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었다.
예상대로 승준은 골목길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이 열리는 걸 본 건지 그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뭐 하세요?”
창을 조금 더 열어젖힌 초원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냥, 잘 들어갔나 싶어서.”
건물 입구에서 3층 원룸까지 얼마나 된다고 잘 못 들어갈 이유도 없는데, 그 말이 어처구니없어 초원은 깔깔 웃다가 창밖으로 손을 내저었다.
“얼른 가세요. 그러고 불쌍하게 쳐다본다고 누가 올라오라고 할 줄 아세요?”
“와⋯, 섭섭하네.”
피식 웃은 승준이 굳게 다문 입술을 비죽이더니 운전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가 골목길 끝으로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원은 창문을 닫고 멍하니 침대로 다가갔다. 매트리스 위로 풀썩 쓰러지듯 누워 가만히 천장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현실 맞나?’
집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침대에 뻗어 있으니 주말 동안 벌어졌던 일이 다 꿈만 같았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금 입은 옷에서 솔솔 풍겨 오는 향이 너무 포근했다.
‘섬유 유연제 뭐 쓰나 물어볼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