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와 그 남자의 온도차 2
하늘은 돕는 자를 돕는다
‘춥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깬 현우는 침낭 안에서 뒤척였다. 가을밤 인적 없는 산속의 한기가 텐트를 뚫고 침낭 안까지 침범했다. 겨울용 침낭으로 바꿔 들고 오는 걸 깜빡한 게 문제였다.
“초원⋯.”
습관처럼 초원을 부르던 현우는 머쓱해졌다. 잠결에 오늘 혼자 온 것도 잊다니.
몸을 일으켜 배낭을 끌어당겼다. 배낭 안 어딘가에 담요가 있을 터였다. 찾던 것을 찾은 그는 담요를 덮은 다음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재미없네.’
이럴 땐 옆에서 겨울용 침낭 까먹었다고 핀잔을 주는 초원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따라 그 잔소리가 그리웠다.
‘요즘 좀 쌀쌀맞아졌어.’
원래도 차도녀였지만 겉만 그럴 뿐, 속은 다정했는데 요즘은 어쩐지 현우에게도 벽을 쌓는 느낌이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그렇다 해도 그런 걸 쌓아 둘 초원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요즘 멍하니 있는 일도 많아졌다.
‘월요일에 보면 맛있는 거 사 줘야지. 흠, 가을은 역시 전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른 새벽의 깊은 산속. 들리는 건 바람이 텐트를 스치는 소리와 개울물 흐르는 소리뿐.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근처에 개울이 없다는 것만 빼면.
‘드디어 나타났구나!’
현우는 다급하게 신발을 신고 손전등과 마취 총을 집어 들었다. 텐트 입구를 찢을 기세로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달이 뜬 밤이었지만 하필 구름에 가려 사방이 깜깜했다.
‘망할⋯.’
마음이 급해서인지 손전등 버튼 위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현우는 마취 총을 옆구리에 끼고 손전등을 켰다. 그 순간 물소리가 멈췄다.
‘뭐야? 어딨지?’
낭떠러지를 등진 채 텐트 뒤 산비탈로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새 가 버렸나?’
허탈했다. 그래도 열 발짝 정도 떨어진 나무에 묶어 둔 적외선 카메라에 뭔가 찍혔을지도 모른다. 현우는 손전등으로 등산로를 밝혔다.
그 순간 현우는 보았다. 등산로 옆 바위에 앉아 은빛 털을 휘날리는 짐승을.
그다음 순간 현우가 본 건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짐승과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발톱이었다.
***
띠리리링.
‘아, 일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누구야?’
초원은 침대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겨우 베개 밑에 껴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어 흐린 눈을 비벼 가며 확인했는데, 모르는 번호다.
‘뭐야, 요즘은 일요일 아침 7시부터 피싱 전화 돌리나?’
받지 말까 싶었지만 지역 번호가 부산이었다. 그 말은 현우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네.”
[홍초원 님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생각도 못 한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산기독병원 응급실입니다. 차현우 님 아십니까?]
병원 응급실이란 말에 초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붙들었다.
“현우 선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두부 손상이 심한 상탭니다. 지금은 안정됐지만 저체온증도 있었고요.”
병상 끄트머리에 기대어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는 의사의 얼굴이 피로로 찌들어 있었다.
“동공 반사는 있나요?”
“네.”
“그나마 다행이네요.”
“일단은 출혈도 멈췄고 환자가 젊어서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외상 정도가 심해서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 궁금하신 거 있으신가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의사를 붙들고 있는다고 환자를 깨울 방법이 나올 것도 아니었다. 병원을 믿고 시간에 맡기는 수밖에.
“아뇨, 감사합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온갖 기계에서 나온 케이블과 관이 이렇게 치렁치렁 매달린 상태라도.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머리맡이 살짝 위로 들린 병상에 미동도 없이 기대어 누워 있는 얼굴이 잔뜩 부어 있었다. 초원은 손을 들어 현우의 뺨 위, 테이프와 줄이 붙어 있지 않은 틈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살결이 푸석푸석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을 만져 본 적이 있었던가?
“선배, 나예요.”
대답이 없을 걸 뻔히 알아 놓고도 실망하는 건 뭔지 모르겠다.
“대체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고 물어서 뭐 해?
초원은 차오르는 눈물을 열심히 삼켰다.
‘같이 갔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지금쯤 둘이서 오늘도 허탕 쳤다며 산 밑에서 염소 고기나 먹고 있었을 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
깁스 아래로 삐져나온 불그스름한 손가락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등 뒤에서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아이고, 현우야!”
초원은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뺨이 통통한 중년의 여자가 사색이 되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큰 키에 마른 체형의 중년 남자가 굳은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중환자실에서는 조용히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테이션 뒤에 있던 수간호사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돌려 노려보더니 뒤따라오던 남자에게 고갯짓을 했다. 남자는 귀찮다는 듯 한숨만 쉬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이게 무슨 일이야.”
아들의 얼굴이며 팔다리 이곳저곳을 만져 보는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발치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초원은 어쩌면 좋을지 몰라 병상에서 조금 떨어져 서 있는데 현우의 아버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현우랑 아는 사입니까?”
“아, 직장 동료입니다. 홍초원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차진형이라고 합니다.”
진형이 손을 내밀자 초원도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이렇게 반갑지 않은 상황에서 반갑다며 악수를 하는 게 조금 불편했다.
“의사는 만나서 설명 들으셨나요?”
“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없이 현우를 내려다봤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응? 아가씨는 알고 있어?”
현우의 어머니가 벌게진 눈시울을 티슈로 닦으며 물었다.
“아뇨, 저도 서울에 있다가 연락받고 온 거라, 잘은⋯.”
“아니, 얘는 왜 혼자 산에서 그러고 있었던 거야? 혹시 일 때문이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장산범 찾느라 그러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아가씨. 그런 게 아니면 얘가 아는 사람도 없는 부산에서 뭘 하겠어? 응?”
씩씩거리기 시작하는 이 아주머니를 보니 괜한 불똥이 튀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 저는 회사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나가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남에게 화살을 돌리는 어머님도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도 남 일처럼 차분한 아버님은 더 이상했다.
초원은 병원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다. 회사에 알리긴 해야 하는데⋯. 손에 핸드폰을 쥔 채로 한참을 보도블록만 응시했다.
“하아⋯. 이것도 일인데 왜 그래, 정말?”
그날 이후로 최대한 둘만 있는 상황도, 직접 대화를 나누는 일도 피해 왔다. 그런데 일요일 오후에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야 한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현우의 일로⋯.
초원은 속으로 할 말을 연습하며 핸드폰을 열었다. 최대한 감정은 배제하고 말하자고 다짐했다.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신호음이 세 번쯤 갔을 때, 핸드폰 너머의 중저음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초원 씨?]
“아⋯. 팀장님. 저⋯.”
대사 다 연습해 놓고도 이런다. 초원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차 주임님이 지금⋯.”
뭐라 말하는 게 좋을까? 병원에 있습니다? 혼수상태입니다? 죽을지도 몰라요, 제가 속 좁게 굴다 안 따라가서?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자 초원은 저도 모르게 훌쩍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 어딥니까?]
“어, 조승준 팀장. 오랜만이네요.”
전화를 받고 급하게 부산으로 내려온 승준을 보고 진형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태연해도 너무 태연하시다.’
초원은 그 비현실적인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안 좋은 일로 다시 뵈어서 안타깝습니다. 현우 씨 상태는 어떻습니까?”
병원 푸드 코트 의자에 앉아 있던 현우의 모친이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앉자는 진형의 말에 네 사람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큰 고비는 넘긴 것 같고⋯. 운이 좋으면 며칠 내에 깨어나거나, 아니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데. 안 될 수도 있는 거고.”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훌쩍임이 곡소리가 되고 있었다.
“거, 그만 좀 해. 사람들 앞에서⋯.”
“아니, 지금 내 배 아파 낳은 아들이 저 꼴이 됐는데 그만하란 말이 나와? 아이고⋯.”
가슴까지 치며 따지는 아내를 보고 진형은 혀만 쯧 하고 차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초원은 이 상황이 민망해 어쩔 줄 몰라 눈을 돌리다가 옆에 앉은 승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민망했던지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아니, 팀장님이 여기 오셨으니까 말인데 쟤가 대체 여긴 왜 왔던 거예요? 여기 아가씨는 모른다고 하던데.”
‘또, 그러시네.’
초원은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는 걸 애써 폈다. 승준도 현우가 장산범을 쫓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겠지만, 직원이 주말에 뭘 하는지는 팀장이 알 리가 없지 않나.
‘왜 자꾸 우리한테 저걸 묻는 거지?’
승준이 초원의 얼굴을 한 번 흘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아니, 팀장이면서 그것도 모르면 어떡해요?”
“아 진짜, 이 사람이⋯. 회사 일도 아니고 주말에 저 혼자 내려와서 헛짓거리하다가 다친 걸 왜 조 팀장한테 물어?”
아무래도 현우의 아버지는 전말을 아는 눈치였다.
“회사 일인지 아닌지 그걸 어떻게 알아? 국정원에서 지금 얘한테 위험한 일 시켜 놓고 모르쇠로 나오는 거 아냐?”
“이 사람이 진짜⋯. 목소리 못 낮춰?”
“저 혼자 여기 와서 사고당하는 게 말이나 돼? 이거 산재인데 정부에서 안 물어 주려고 잡아떼는 거 아냐.”
초원은 그제야 왜 자꾸 이분이 현우가 부산에 있었던 이유를 따지고 드는지 알 것 같았다. 진형이 갖은 인상을 쓰더니 소리쳤다.
“당신이 산재가 뭔지나 알아?”
눈앞에서 살벌한 부부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초원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승준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움직이더니 무릎 위에 얹어 둔 손을 꼭 쥐었다. 초원은 손을 뺄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계속 붙들려 있었다. 부드럽게 손등을 매만지는 감촉에 온 신경이 손으로 쏠렸다.
“현우 회사 사람들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야? 조 팀장, 못 볼 꼴 보여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힘든 상황 아닙니까? 이해합니다.”
그제야 초원의 손 위로 포개어져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우습게도 온기가 사라지는 게 못내 아쉬웠다.
“저는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우 씨 잘 이겨 낼 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 제가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승준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 불편한 자리에 단 1초도 있고 싶지 않았던 초원은 말없이 따라나섰다. 병원 밖으론 이미 저녁 어스름이 짙어 가고 있었다.
“식사는 했어요?”
초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네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의 그 따뜻한 손이 초원의 뺨 위로 감겼다.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그녀는 말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품에 안겼다.
벌써 9일째였다. 혼수상태가 길어질수록 회생 가능성은 뚝뚝 떨어진다.
초원은 승준의 배려로 처음 이틀은 회사를 쉬고 현우의 곁을 지켰다. 그 이틀은 현우가 고비를 넘겨서 그저 감사했지만 이틀이 사흘, 일주일이 되고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이송되고 나서도 눈을 뜨지 않자 초조함을 견딜 수 없게 됐다.
초원은 빈 커피 컵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꾹꾹 눌러 접었다.
“차현우 어쩌냐, 정말⋯.”
회사 건물 뒤편에서 담배 연기를 뿜던 병훈이 중얼거렸다. 아름도, 으뜸도 다들 말이 없었다. 땅바닥을 쪼는 비둘기만 바라볼 뿐.
요즘 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자주 오가던 농담은 사라졌고 다들 말수가 줄었다. 타자 치는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 사이로 한 번씩 누군가가 한숨 쉬는 소리만 조용한 사무실을 울렸다. 그만큼 그가 팀원들에게 사랑받았다는 거겠지.
‘아니, 사랑받고 있다는 거지. 왜 과거형이야? 선배 아직 살아 있어.’
초원이 마른세수를 하자 병훈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힘내, 홍 주임. 깨어나겠지.”
“뉴스 같은 데 보면 막 몇 달 넘게 있다가도 깨어나고 몇십 년 혼수상태이다가 깨어나는 사람도 있던데⋯. 차 주임님 꼭 깨어나실 겁니다.”
초원은 그 자체가 기적이니까 뉴스에 나는 거라고 으뜸에게 말하려다 말았다.
‘괜히 죄 없는 사람들에게 까칠하게 굴어서 뭐 하게? 죄가 있으면 나한테 있는 거지.’
“올라가요.”
초원은 빈 커피 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일어섰다. 고작 1m 정도 떨어진 쓰레기통인데 빗맞았다. 짜증 섞인 한숨을 푹 쉬며 바닥에 떨어진 종이컵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요즘은 제대로 하는 게 없네.’
사무실로 올라 온 그녀는 왼쪽 빈자리가 주는 허전함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자리에 앉았다.
‘초원 씨 빈 자리가 눈물 나게 슬펐어요.’
초원이 조퇴를 한 날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걸 아는 사람이 일주일 넘게 자리를 비워 두고⋯. 나는 어쩌라고.’
한숨이 새어 나가지 않게 입술을 깨물며 사내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현대 의학에 길이 없으면 여기 어딘가에는 있겠지.
‘치유’, ‘회복’, ‘소생’ 같은 단어를 넣으며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다. 아쉽게도 나오는 결과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그중 몇 개는 초원의 보안 등급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나마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를 클릭했다.
일련번호: KAC-C-002567
안전 등급: 위험(C)
[물체 특징 개요]
외형: 약손 약국이라는 상호가 적힌 약 봉투에 담긴 개별 비닐 포장된 노란색 알약 39개
‘만병통치약 같은 건가?’
별칭: 확률형 만병통치약
‘그러네⋯. 근데 확률형은 또 뭐지?’
효과: 내복약으로, 한 알을 먹으면 일정 확률로 복용 10분 이내에 복용자가 가진 병이나 부상을 모두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 실험 결과 완치 확률은 34%가량. 나머지의 경우에는 33%의 확률로 복용자가 즉사하거나 좀비가 된다.
‘망할, 되는 게 없네.’
초원은 손가락을 들어 당겨오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다른 것도 확인했지만 쓸 만한 게 없었다.
초원의 보안 등급으로는 볼 수 없는 데이터에는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팀장실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탁해 볼까?’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쓸 만한 게 있어도 초원이 유용하도록 놔둘 리가 없으니까.
한참을 멍하니 ‘보안 2등급 이상 열람 가능’이라는 팝업 메시지를 노려보다 데이터베이스 창을 닫았다.
‘일해야지, 일.’
둘이서도 겨우 하던 일을 혼자 하려니 무서운 속도로 일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승준의 지시로 외근이 필요한 일은 거의 병훈과 으뜸이 맡고 있어 다행이었지만, 안 그래도 바쁜 두 사람이 더 바빠져 미안하기만 했다.
오후 내내 각종 공문이며 보고서며 회계과에 보낼 비용 증빙과 씨름하다 보니 어느새 5시 57분이었다. 초원은 하던 일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5가 6으로 바뀌는 순간 노트북을 껐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병훈과 으뜸이 초원을 향해 살짝 웃었다.
“차 주임한테 깨어나면 내가 맛있는 거 쏜다고 했다고 전해 줘.”
바쁠 때 일찍 가는데도 아무 말 없는 게 고마워 웃었다.
“아, 소는 안 된다고 그래.”
초원은 피식 웃고 의자를 밀어 넣었다. 짐을 챙겨 나서는 길에 인사를 하러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팀장님, 먼저 가 보겠습니다.”
“네.”
승준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일도 많이 밀렸는데 집에 일찍 간다고 뭐라 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어차피 집에 가는 게 아닌 걸 알아서 그러는 거겠지만.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병원 복도를 따라 걷다 현우의 이름이 적힌 병실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규칙적인 기계 소리와 누가 틀어 놓고 간 듯한 TV의 웅얼거림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선배⋯.”
침대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어두워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머리맡의 램프를 켰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갑자기 불을 켰을 때 얼굴을 찡그리게 마련이지만 현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잡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정맥 카테터가 꽂혀 있는 손등에 노랗고 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선배⋯. 진짜 너무하네.”
손등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초원은 누가 볼세라 엄지로 눈물을 훔쳤다.
“어제 약속했잖아요. 오늘은 일어나기로⋯.”
젖은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쁘다, 진짜. 내가 그날 하루 좀 안 갔다고 이러기예요?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진짜 미안해요. 다신 속 좁게 안 굴 테니까, 선배가 어딜 가든 따라가 줄 테니까 제발 일어나요.”
애도 아니고 스물아홉이나 먹고 남 앞에서 우는 거 끔찍하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건 지금 이 남자는 초원이 코앞에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른다는 거다.
초원은 울음이 멎을 때까지 조용히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현우의 긴 손가락을 매만졌다.
갑자기 배가 꼬르륵거렸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도 눈치 없이 배는 고프구나. 핸드폰을 열어 보니 7시 반이 넘은 시각이었다.
쓰다듬던 손을 붙잡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현우가 늘 그랬듯이.
“내일도 퇴근하고 또 올 테니까 꼭 일어나서 웃는 얼굴로 맞아 줘야 해요. 약속하는 거죠?”
초원은 대답도 미동도 없는 사람을 붙잡고 엄지 도장까지 찍은 다음,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왔다.
멍하게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뒤에서 누가 그녀를 불렀다. 돌아보니 현우의 어머니가 복도 끝에서 오란 듯 손짓했다.
“오늘도 왔어? 초원 씨도 바쁠 텐데. 고맙긴 한데, 이렇게 매일 안 와도 괜찮은데⋯.”
초원은 그녀가 준 미지근한 음료 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저기, 초원 씨는 어디 살아?”
“저는 삼각지에서 자취하는데요.”
“아니, 그거 말고. 부모님은 어디 사시는데?”
“인천이요.”
“송도?”
“아뇨.”
어머니의 얼굴에 탐탁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부모님의 재산 상태를 캐기 시작하는 의도야 뻔했다. 초원은 민망함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날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
“저기, 우리 아들이랑 그냥 직장 동료 사이인 거 맞지?”
“네.”
“이 병원 종양학과에 강정태 교수라고 알아?”
초원은 고개를 저었다. 졸업한 데가 아닌데 알 리가 없었다.
“유명하신 분인데, 몰라? TV에도 많이 나오시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인맥 자랑이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
“아니, 우리 현우가 강 교수님 둘째 딸이랑 약혼한 상태거든. 현우가 말 안 해?”
그제야 초원은 이분이 화제를 느닷없이 바꾼 게 아니란 걸 알았다.
‘현우 선배야 당연히 말 안 했지. 약혼 같은 거 안 했으니까. 굳이 이런 소리까지 하면서 견제 안 하셔도 되는데⋯.’
“우리 예비 며느리가 독일에서 잘나가는 첼리스트잖아. 결혼은 돌아오면 하려고 미뤘고. 아휴, 진작에 결혼을 시켰어야 하는데⋯.”
‘연주 씨, 강 씨였구나.’
이제야 알았다. 그러고 보니 초원이 알던 건 ‘현우 선배의 전 여친 연주 씨’뿐이었고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다.
“하여튼, 연주도 소식 들었으니까 며칠 안에 올 거야. 공연 끝나면 바로 온다고 그랬어.”
“선배가 알면 좋아하겠네요.”
“그니까⋯. 얼른 깨어나야 하는데. 기도 좀 열심히 해 줘.”
피곤하다. 복잡한 머릿속으로 지금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떠올랐다. 병실에서 나올 땐 분명 배가 고팠는데 어머님에게 붙들려 껄끄러운 소리를 듣고 나온 다음부턴 피곤하기만 했다.
터덜터덜 지하철역에서 자취방으로 걸어가는 길에 편의점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그냥 집으로 향했다. 나중에 배가 고파지면 후회하겠지만 지금은 만사가 귀찮았다.
구두를 벗자마자 가방을 내팽개치고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이불에 파운데이션 묻을 텐데⋯.’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알 게 뭐야. 이불이야 빨면 되지.’
지금이 팔자 좋게 이불 걱정할 때인가? 초원은 이불에 한쪽 뺨을 묻은 채로 어머님과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선배가 알면 좋아하겠네. 연주 씨 온다고⋯.’
그녀가 올 때마다 세상 다 가진 표정이던 현우였다.
‘내가 매일 가 봐야 뭐 하나. 연주 씨 한 번 오는 것만 못 할 텐데.’
초원은 그저 직장 동료일 뿐이고 연주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뭐라도 해 보려고 애를 쓰는 제가 미련해서 눈을 감았다. 콧잔등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이불 위로 흘러내렸다.
‘이불 빨래를 이런 식으로 하네.’
일주일 넘게 정신을 놓고 살았더니 오늘의 자신이 고통 받는다. 초원은 밀린 등록 처리를 하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오늘은 면회 가지 말고 야근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시온이 아버지가 또 전화 주셨네.”
칸막이 너머로 한참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병훈이 으뜸에게 푸념하듯 말했다.
“그분 심정도 이해는 되네요.”
“그러게⋯. 아, 우리도 빨리 애 찾아다 주고 싶지. 일손 모자라서 기다려야 한다면 애 아빠 입장에서는 납득이 되겠어?”
“근데 왜 얘는 격리를 안 한답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아직 애잖아. 엄마 아빠랑 살아야지. 그리고 격리해서 시스템에 공개하면 어떻게 되겠냐? 위의 높으신 분들이 얘를 가만두겠어? 생각을 해 봐라.”
높으신 분들이 3팀 사무실같이 누추한 곳에 있을 리는 없지만 병훈은 목소리를 죽였다.
“그럴 거면 다 같이 덕 보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건 안 되지. 시장 질서 무너지게. 여기 마침 의사 선생님 계시네.”
병훈이 칸막이 너머로 초원을 흘끗 보며 으뜸에게 핀잔을 주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턱이 없는 초원은 무시하고 제 할 일만 했다.
“여튼 간에 경남지청에 다시 재촉해 봐야지.”
수화기 달칵거리는 소리와 버튼 누르는 소리가 칸막이를 넘어왔다.
“흠⋯. 어, 김 주임님! 본청 생물3팀 박병훈입니다. 오늘은 외근 안 나가셨나 봐요? 자리에 있으시네. 아니, 다름이 아니고⋯. 그 치유 능력자 꼬맹이 일 때문에⋯.”
초원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병훈이 수화기를 귀에 댄 채로 뭐 하냐는 듯 올려다보았다. 으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홍 주임님, 왜 그러십니까?”
“자, 이게 그 꼬맹이 자료야.”
두꺼운 서류철 하나를 넘겨준 병훈이 현우의 의자를 끌고 와 옆에 앉았다. 초원은 서류철을 열어 첫 장을 재빨리 확인했다.
‘송시온, 7세 남아, 치유 능력자⋯.’
“확실한 거예요? 아무 부작용 없대요?”
병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기록이나 있었던 일을 보면 확실한 것 같은데?”
초원은 기대에 차 떨리는 손으로 자료를 넘기며 급하게 사례 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얘 능력이 처음 발현된 게, 돌 즈음 같던데. 얘네 할머니 집에서 암 걸려 오늘내일하던 강아지가 어느 날부터 멀쩡하더란 거야. 병원 데려갔더니 암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례 기록 가장 첫 장에 있는 동물병원 검진 기록을 넘기며 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얘네 부모는 얘가 한 일인 줄 몰랐는데 얘 엄마가 꽃게탕 하려고 죽은 꽃게를 사 왔는데 그걸 다 살렸다네?”
“죽은 것도 살려요?”
“응, 근데 너무 상태가 안 좋으면 어렵고. 아, 그러고 없는 건 못 만들어 준대. 근데 차 주임 상태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꽃게와 암 말기 강아지도 살리는 애인데 혼수상태인 사람은 충분히 깨우고도 남겠지.
“얘 지금 어디 있는데요?”
“아⋯, 그게 문젠데⋯.”
병훈이 서류철을 다시 가져가 마구 넘기더니 지도 하나를 펴서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손가락을 짚은 곳은 남해 위 어딘가였다. 초원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그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여기 작은 섬이 하나 있는데 사이비 종교 단체 하나가 기도원을 지어 놨거든. 얘 엄마가 종교에 미쳐 가지고 자기 아들이 제2의 메시아라면서 애 아빠 몰래 데려가 버렸대.”
“그럼 어떻게 데려오려고요? 법적으로는 방법이 없대요?”
“여기가 폐쇄적인 데라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데다가 애 아빠가 경찰에 신고도 하고 소송도 걸고 할 거 다 해 봤는데 안 되더래. 그래서 우리한테까지 온 건데⋯. 마침 경찰에서 여길 수사하고 있어서 국정원이라고 뻥 치고 자료를 좀 얻었지.”
병훈은 자료를 넘겨 건물 도면과 기도원 영내가 그려진 지도를 보여 주었다.
“밤에 몰래 들어가서 빼 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데 우리 둘만으론 안 되거든.”
그가 으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경남지청에 지원 요청했는데 거기도 요즘 바쁘다네.”
“그럼 내가 가면 되죠. 셋이면 할 만해요?”
“그럼 할 만하지. 몸 작고 가벼운 사람 있으면 눈에도 덜 띄고 애도 우리같이 시커먼 아저씨들보다는 예쁜 누나가 가자고 하면 잘 따라오겠지.”
“그럼 내가 갈게요.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보트랑 장비도 섭외해야 하고 작전도 짜야 하고 2~3일은 최소 걸릴 텐데. 그전에 팀장님 허락부터 받아야지.”
“1~2일로 줄여서 이번 주 내로 갈 수 있을까요?”
“한번 해 보지, 뭐. 차 주임 일인데.”
“팀장님 허락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밀린 일 처리하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는 없겠지. 팀장실로 가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초원을 병훈이 팔을 들어 막았다.
“왜요?”
“어, 팀장님 외근 가셔서 아직 안 오셨어.”
“아, 왜 하필 지금⋯.”
“기다리면 오시겠지. 너무 조급해하지 마.”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힐 길이 없었다.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현우를 살리라고 하늘이 내린 기회.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을 꾸역꾸역하며 사무실 입구만 계속 힐끔거렸다. 그렇게 수백 번은 했을 즈음 5시가 넘어 승준이 피곤한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초원은 벌떡 일어나 팀장실로 향했다. 평소라면 팀장이 피곤한 얼굴일 때는 눈치부터 살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똑똑.
“네.”
“팀장님.”
문을 살짝 여는데 초원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팀장의 허락만 받으면 착착 준비해서 꼬마를 현우에게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나올 수밖에. 그 얼굴을 보고 의아한 듯 눈썹을 살짝 올린 승준이 책상 앞 의자를 가리켰다.
“들어와요.”
초원은 자리에 앉아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어떻게 운을 떼야 좋을까 고민하는데 승준이 먼저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그러는 그도 조금 전보다는 훨씬 표정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뇨, 별일 없습니다.”
처음부터 대놓고 작전을 승인해 달라고 온 목적이 현우라고 밝히면 좋을 게 없었다.
“그럼 무슨 일입니까?”
“아, 그 치유 능력자 아이 건 때문인데요.”
승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박 주임이랑 이으뜸 씨가 맡고 있는 거 아닌가?”
“네, 오늘 박 주임님이랑 으뜸 씨가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됐는데 사람이 부족해서 구출을 못 하고 있다고 들어서요.”
“그래서요?”
어쩐지 그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굳은 것 같은 건 초원의 착각일까?
“굳이 경남지청 지원 기다릴 필요 없이 제가 같이 가면⋯.”
“안 됩니다.”
승준은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딱 잘라 거부했다. 초원은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왜 제대로 생각도 안 해 보고 무조건 안 된다는 걸까?
“어째서죠?”
그는 한참 입을 다물고 초원의 얼굴만 응시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위험하니까.”
고작 그게 이유라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저희가 하는 일이 원래 위험한 거 아닌가요?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승준은 또다시 한숨을 크게 쉬더니 의자에 기대며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또 한참을 초원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차현우 주임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까?”
속내를 들킨 초원은 시선을 내리깔고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안 된다는 말만은 하지 말았으면⋯.’
“기다리세요, 경남지청에서 지원해 줄 때까지. 그럼 차 주임한테 데려갈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그러다 너무 늦으면 어쩌려고요.”
아무리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애라지만 도박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경남지청에 다시 전화해 볼 테니까 홍 주임은 얌전히 기다리세요.”
‘얌전히’라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초원도 힘든 훈련 다 받고 까다로운 테스트도 다 통과한 요원인데 얌전히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라니.
“설마 제가 여자라서 그러시는 건가요? 박 주임님이나 으뜸 씨한테는 맡기셨잖아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뭔가요?”
“초원 씨, 저번에 울릉도에서 있었던 일 기억 안 납니까?”
그제야 배에서 얼마나 멀미를 했으며 물에 빠져 죽을 뻔하고 결국에는 팀장에게 매달려 울기까지 했다는 게 생각나 초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육로 작전이면 몰라도 이건 해로 작전입니다.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요?”
승준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섬이 육지에서 울릉도만큼 먼 것도 아니었고 저번에 바다에 빠진 건 불운한 사건에 불과했다.
“아무 일이 안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럴 가능성이 100%라면 허락하겠지만 아닌 이상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안 된다니⋯. 남들한텐 잘만 맡길 거면서.
“팀장님, 왜 이렇게 저 과보호하세요? 그게 제 기회를 빼앗아가는 길이라곤 생각 안 하세요?”
“언제는 챙겨 줘서 고맙다더니, 이제는 내가 걸림돌이라는 건가?”
“저한테 잘해 주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승준이 눈을 부릅뜨며 초원을 노려보았다. 못지않게 화가 난 그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할 말은 해야 했다. 나중에 후회할지라도.
“사적인 감정 때문에 이러시는 거라면 공사를 구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려보는 승준의 눈빛이 치명상을 입은 맹수의 눈빛 같았다. 초원은 속에서 울컥하는 무언가를 억누르며 그 두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쩐지 그녀의 심장에도 비수가 꽂히는 기분이었다.
“지금 공사 구분 못 하고 관리 대상을 빼돌려 달라는 건 홍 주임 아닌가?”
너무나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정곡을 제대로 찔렸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초원은 말없이 그의 차가운 얼굴을 응시했다.
“마음대로 해요.”
승준이 한숨처럼 말을 내뱉고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초원은 뻔뻔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는 팀장이 화났을 때의 고정 멘트였던 “나가 봐요.”가 들리지 않았다.
팀장실에서 나오며 문을 닫다가 멈칫했다. 승준은 등을 돌린 채로 허리에 손을 짚고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넓은 등이 오늘따라 외로워 보였다.
초원은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꼭 가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문을 닫지 못하고 망설였다.
‘죄송해요.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현우 선배가 아니라 팀장님이었어도 이랬을 거예요.’
속으로 되뇌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랬다가 이 아슬아슬한 관계가 빠져나오지 못할 수렁으로 곤두박질칠까 두려웠다.
솔직해지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등 뒤로 꽂히는 팀원들의 시선이 느껴져 조용히 문을 닫았다.
현우는 오늘도 약속을 어겼다. 병실은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오늘은 초원이 울지 않았다는 것.
“선배, 며칠만 더 버텨요. 선배 깨울 방법 찾았으니까 며칠만 더 버텨 줘요.”
다시 그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내가 꼭 선배 살려 줄게요.”
***
고무보트에 오른 지 40분이 넘어가자 슬슬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괜찮길래 멀미약이 효과가 있나 싶었더니⋯.
초원은 찬 바닷바람을 들이마시며 검은 바다와 밤하늘이 만날 법한 곳을 응시했다. 달빛이 밝지 않아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검게 울렁이는 바다를 보고 있으니 속에서 멀미와는 다른 무언가가 꾸물대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것 같더니 보트 옆 핸들을 붙든 손이 식은땀에 젖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네!”
마주 앉은 병훈이 앞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수평선 위로 듬성듬성 불빛을 밝힌 섬이 그 고개를 드러내고 있었다.
초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곧 단단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을 테니.
섬 가까이 다가간 보트는 가장 외진 곳으로 향했다. 누군가 모터 소리를 듣거나 보트를 발견하면 이 작전은 끝이었다.
기도원 단지의 반대편에는 험준한 바위 해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리 위성 사진으로 확인해 둔 자갈 해변에 으뜸이 고무보트를 댔다.
초원은 보트가 멈추기 무섭게 구명조끼를 벗고 해변으로 뛰어내렸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뒤이어 으뜸이 따라 내리고 두 사람은 총이며 손전등 같은 장비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조심해. 무슨 일 있음 바로 무전 치고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빠져나오는 거 알지?”
보트에 앉은 채로 병훈이 당부했다. 퇴로는 이 보트 하나뿐이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보트가 발각되면 이 셋은 꼼짝 없이 이 흉흉한 곳에 갇힌 신세가 되는 거였다. 그래서 병훈은 보트를 근처에 띄운 채로 기다리기로 했다.
“이제 가요.”
병훈이 멀어지는 걸 본 초원과 으뜸은 눈앞에 날카롭게 솟은 바위로 향했다. 다행히도 암벽 등반 수준은 아니어서 둘 다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둘은 작은 손전등 빛에 의존해 우거진 수풀을 지났다. 자정을 넘긴 시각, 숲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수풀을 넘자 기도원 건물이 하나둘씩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영내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어 손전등은 필요 없었지만 그만큼 들킬 위험도 컸다. 아이가 있는 전원주택 건물은 여기서 300m 떨어져 있었다. 두 요원은 눈을 피해 숲속에서 건물을 따라 걸었다.
한 절반쯤 갔을까, 멀리 건물 뒤편에서 웅얼웅얼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던 그들은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길에서 떨어져 숨기로 했다. 경사진 땅이 부드러워 발아래로 푹푹 꺼졌다. 겨우 위로 올라가 수풀 뒤에 숨자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길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이고, 목사님. 이 늦은 밤까지⋯. 그래도 장사 잘돼서 좋으시겠어요.”
‘장사?’
종교 단체라 하지 않았나? 하긴 사이비라면 신도들 착취하는 걸 장사라 부를 만도 했다.
“쓰읍, 이 사람아. 장사라니. 사역이지.”
“아, 그렇죠. 다 목사님 덕분에 수두룩한 사람들이 명줄 늘리는 거 아닙⋯.”
후두둑.
땅이 무너지면서 밟고 있던 돌멩이가 비탈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같이 미끄러지던 초원은 으뜸이 순발력 있게 잡아 준 덕분에 돌멩이와 같이 굴러가는 신세를 면했다.
“뭐야?”
안도한 것도 잠시, 두 사람이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숲으로 더 들어가기엔 너무 늦었다. 두 사람은 이미 비탈 아래 길가로 와 있었다.
“누가 있나?”
“산짐승 아닐까요?”
달리 방법이 없었던 초원과 으뜸은 몸을 더욱 숙였다. 목사라 불린 남자가 수풀 쪽을 응시하더니 비탈 바로 아래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초원의 머릿속으로 들켰을 때를 대비한 온갖 대처법이 떠올랐지만 적당한 게 없었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욱 숨을 죽였다.
“캬아옹!”
느닷없이 남자의 옆으로 검은 고양이 하나가 나타나더니 길을 가로질러 주차된 트럭 아래로 사라졌다.
“와 씨,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떨어지면 주워서 냉큼 팔아야지.”
“하하하, 목사님도 참.”
남자들은 허허 웃으며 길 저 아래로 사라졌다.
두 사람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 더 걷다 보니 저 멀리 조그만 밭과 그 옆의 전원주택이 보였다.
계속 숲을 따라 밭을 돌아 주택 뒤편으로 갔다. 높은 담이 주택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다행히 CCTV나 철조망 같은 건 없었다. 담 너머로 아무도, 심지어는 그 흔한 집 지키는 개도 없는 걸 확인하고 둘은 담을 넘었다.
2층짜리 전원주택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현관 근처 1층 한구석만 제외하면.
이 기도원에 있다가 탈출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메시아라고 불리는 아이는 작은 발코니가 있는 방을 쓴다. 이 주택에 발코니는 두 개. 그중 작은 쪽으로 향했다.
초원이 위로 올라가기로 하고 으뜸의 목말을 탔다.
‘으, 이럴 줄 알았음 다이어트 좀 할걸⋯.’
그래도 으뜸의 체력이 좋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초원은 난간을 붙잡았다.
유리문 너머 동태를 살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작은 침대나 옷장 같은 가구가 있었고 바닥에는 장난감이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이 방 맞구나.’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걸 확인한 후 난간을 붙들고 발코니 위로 몸을 끌어 올렸다.
유리 너머로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한쪽에 놓인 침대에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자료에서 본 그 얼굴이 맞는 듯했다.
미닫이 유리문을 살짝 밀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옅게 한숨을 쉰 초원은 잠시 고민했다. 밖에서 잠금장치를 열 방법이 있긴 했지만 시간이 걸렸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인적은 조금도 없었다. 아래층에 불이 켜져 있긴 했지만 이곳과는 멀었다.
초원은 ‘예쁜 누나’ 작전이 먹히길 간절히 바라며 유리를 살짝 두드렸다.
네 번쯤 두드렸을 때 아이가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에게 최대한 무해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한쪽 팔에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은 채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유리문 앞에 서서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아이에게 속삭였다.
“안녕. 이모 추운데 문 좀 열어 줄래?”
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방 안에 족적을 남기기가 꺼려져 발을 발코니에 걸친 채로 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 미친.’
무릎이 쪼개질 듯 아팠다. 찔끔 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무릎 아래 박힌 걸 끄집어 내어보니 블록 조각이었다.
‘슬개골 다 나가겠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에게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지금부터 조용히 얘기해야 해. 알겠지?”
집 안에 있는 누군가 듣지 못하게 아이를 조용히 시켜야 했다. 아이는 다행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시온이 맞지?”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눈에는 어떻게 알았냐는 의문이 서려 있었다.
“아빠 보고 싶지 않아? 이모가 아빠한테 데려다줄 테니까 갈래?”
어째선지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한테 가자고 하면 좋아서 따라나설 줄 알았더니.
“왜? 여기서 사는 게 좋아?”
그 말에도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낯빛에 두려움이 얼룩져 있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그게 이 아이의 첫 마디였다.
“그럼.”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방문 밖에서 나무 삐걱이는 소리와 둔탁한 발소리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초원은 재빨리 아이에게 속삭였다.
“나 여기 있다고 말하면 안 돼. 이건 비밀이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유리문을 닫고 발코니 화분 뒤에 숨었다.
‘제발 여긴 확인하지 말아라.’
갑자기 방이 밝아지며 발코니도 덩달아 밝아졌다. 발코니에 드리워진 아이의 그림자 옆으로 기다란 검은 그림자가 비치더니 유리문 너머로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 너 안 자고 뭐 해?”
“심심해서⋯.”
“잘됐네. 목사님이 너 지금 오래.”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불이 꺼졌다. 잠자코 기다리던 초원은 무거운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좌절했다. 흘끗 들여다본 방은 비어 있었다.
‘왜 하필 지금!’
“홍 주임님.”
“알아요.”
“따라갈까요?”
초원은 대답 대신 발코니 난간을 넘었다.
젊은 남자와 아이는 초원이 왔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초원과 으뜸은 자동차와 건물 뒤로 숨으며 멀찍이 떨어져 따라갔다.
두 사람이 발길을 멈춘 곳은 아까 목사라는 사람이 나왔던 건물이었다. 남자와 아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초원은 건물 주변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 시간에 애는 왜 데리고 가는 거지?’
으뜸이 망을 보는 사이 초원은 창문으로 건물 안을 엿보았다. 첫 번째 창문 너머에는 병원에서 볼 법한 의약품 냉장고와 의료 장비가 가득했다.
어떻게 봐도 기도원에 있을 법한 물건은 아니었다. 신도들을 위한 진료소를 운영한다 해도 산소통과 수술 장비는 왜 필요한 걸까?
초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환기구가 달린 다른 창문을 확인했다가 그대로 굳었다.
야전 병원 수준으로 어설픈 수술실에 좁은 수술대가 여럿 늘어서 있었다. 그 위에 누운 사람들은 피로 물든 채 산소마스크를 쓰고 잠들어 있었다. 창문 앞 수술대에 누운 남자의 복부에는 J자로 칼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목사와 꼬마가 들어왔다.
아이는 이 참혹한 광경이 너무나 익숙한 듯 거리낌 없이 가까운 수술대에 누운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 뒤로 수술복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장기 운송용 박스를 나르고 있었다.
‘간 밀매 조직이었구나.’
간은 부분 이식이 가능한 장기였다. 신도들을 속여 간을 일부 떼어 낸 다음, 떼어 낸 간은 하나에 몇억을 받고 팔고 잘린 부분은 아이가 다시 회복시켜 주면 이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이 없었다.
‘사악한 천재구나.’
초원은 사람들에게 손짓으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목사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아까 남자가 말한 ‘장사’가 뭘 뜻하는지 알게 되자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건물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뜸이 숲속으로 들어가 병훈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동안, 수풀 뒤에 숨어 건물 입구를 감시하던 초원은 바다 위도 아닌데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왜 아이가 아빠는 보고 싶지 않지만 여기선 나가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팔아 버린 엄마, 지켜 주지 못한 아빠. 아이는 이미 부모가 기댈 곳이 못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렇게 어린데⋯.’
왜 신은 아이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불임으로 만들고 부모 자격 없는 이들에게 아이를 내리는 걸까? 다음에 사무실에서 삼신할매를 마주치면 좀 따져야겠다.
으뜸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초원은 젖은 눈가를 재빠르게 소매로 훔쳤다. 마침 건물 문이 열리더니 젊은 남자와 아이가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다시 전원주택으로 향하는 걸 본 그들은 거리를 벌려 천천히 따라갔다.
아이 방 발코니 너머로 다시 불이 켜졌다 꺼지고, 1분 정도 기다린 초원은 다시 발코니 난간을 넘어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아이가 그녀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시온아, 가자. 여기서 꺼내 줄게.”
옷장 문고리에 걸려 있던 재킷을 가져와 아이에게 입혔다. 잠옷만 입혀서 바다를 건널 순 없었다.
“아롱이도 데려가도 돼요?”
“아롱이?”
초원의 물음에 아이는 옷을 입으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으려 애쓰던 강아지 인형을 들어 보였다.
“그럼, 당연하지.”
계속 풀이 죽은 표정이던 아이가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해야 하는 거 알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안아 올렸다.
발코니 너머로 으뜸에게 아이를 넘겨주고 초원도 도움을 받아 내려왔다. 둘은 그런 식으로 아이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담을 넘고 숲으로 들어갔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모든 게 순조롭게 되어 가고 있었다.
양말밖에 신지 않은 아이에게 축축하고 고르지 않은 숲속을 걷게 할 순 없었다. 으뜸이 아이를 업고 걷기 시작했지만 작은 두 손으로 인형을 쥐고 어른의 목덜미에 단단히 매달리는 게 어려웠나 보다. 얼마 가지 않아 인형이 바닥에 떨어졌다.
“앗!”
“쉬잇⋯.”
초원은 아이를 조용히 시키고 땅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집어 들었다. 흙먼지가 묻은 곳을 탈탈 털고 괜찮다는 듯 아이에게 인형을 흔들어 보였다.
“아롱이는 이모가 안아 줄게. 됐지?”
후드 집업의 지퍼를 내려 인형을 안에 넣고 다시 지퍼를 올렸다. 그제야 아이는 안심했는지 으뜸의 어깨에 얌전히 고개를 묻고 매달렸다.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방향을 가늠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따금 GPS 장비를 꺼내 위치를 확인하며 가자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홍 주임, 어디야?]
무전기 리시버 너머로 초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 주임님, 다 왔으니까 대기해 주세요.”
[오케이.]
파도 소리가 가깝다 싶더니 으뜸의 어깨 너머로 검은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우거진 수풀을 넘자 깎아지른 바위 아래로 자갈 해변이 펼쳐졌다. 모터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를 땅바닥으로 내린 으뜸이 먼저 바위 아래로 뛰어 내려가더니 위를 향해 팔을 벌렸다. 초원은 아이를 들어 올려 으뜸에게 넘겨주었다.
‘앗!’
오늘 계속 담이며 발코니를 타고 오르내리느라 무리한 건지 오른쪽 어깨가 갑자기 타는 듯 아팠다.
“홍 주임님, 괜찮으십니까?”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본 으뜸이 아이를 안아 올리다 물었다.
“괜찮으니까 빨리 가요.”
초원은 어깨를 문지르며 바위 가장자리에 앉은 다음 자갈 위로 뛰어내렸다.
어느새 으뜸과 아이는 보트 위로 오르고 있었다. 뒤따라 오른 초원은 미리 준비해 뒀던 아동용 구명조끼를 아이에게 입히고 인형을 꺼내 넘겨준 다음, 조끼를 입기 시작했다.
“꼭 잡아.”
병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트가 해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초원은 보트 옆 손잡이를 붙들고 다른 손으론 보트 가운데에 앉은 아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고생했어, 두 사람.”
보트를 조종하던 병훈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초원은 뿌듯하게 웃고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검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서워서 그러나?’
아이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멀미할 것 같으면 얘기해.”
아이는 여전히 보트 너머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초원은 뒤로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섬을 바라보았다. 이젠 손톱만 해진 섬을 향해 속으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해냈다. 아이를 무사히 구출했다. 이제 서울로 가 선배에게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곧 멀미가 찾아오면서 기쁨의 환호성은 절규로 바뀌었다.
“안 들켰지?”
“네.”
“캬, 우리 팀 환상의 호흡! 끝내준다.”
병훈과 으뜸이 자축의 하이파이브를 했다. 병훈이 초원에게도 손바닥을 내밀었지만 아이와 보트를 붙들고 있느라 남은 손이 없었던 그녀는 웃으며 어깨만 으쓱했다.
사실 하이파이브를 할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울렁울렁 멀미에, 거센 바람까지⋯. 가출하려는 혼을 겨우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팀장님께 전화드려야 하는데.”
병훈이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너무 늦은 시각 아닙니까?”
으뜸의 말에 초원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세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빠져나오면 시간 상관없이 바로 전화 달라고 하셨거든. 아, 근데 나 지금 정신없다. 홍 주임이 전화할래?”
보트를 몰며 통화를 하는 건 무리라며 병훈이 핸드폰을 넘기려 했지만, 초원은 지금 남는 손이 없단 걸 다시 보여 주며 고개를 저었다. 핑계가 그럴듯했던지 그는 으뜸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손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형식적인 말만 하면 되는 통화라 해도 일대일로 대화를 하는 건 불편했다. 그날 이후로 오늘까지 그는 그날의 언쟁을 두고 별말이 없었다. 대신 더는 말리려고 하지 않고 작전을 짜는 걸 꼼꼼히 감독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구해다 주었다.
초원은 고맙단 말은 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아직도 못했다. 사과할 생각이었지만 그건 서울로 올라가서 모든 걸 끝낸 후에 할 일이었다.
‘사과할 생각이라니⋯.’
저도 참 뻔뻔하다 싶었다. 일부러 잔인하게 상처 주고 그래도 받아 줄 거 다 아니까 뻔뻔하게 사과하고.
‘팀장님은 이런 내가 어디가 좋은 걸까?’
“아, 팀장님. 이으뜸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초원은 저도 모르게 휴대폰 너머로 승준의 목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귀를 기울였지만 모터 소리가 너무 컸다.
“네, 무사히 임무 완수했습니다. 네, 부상자도 없습니다. 아, 아직 육지로 가는 중입니다. 4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네? 아, 신경 쓰겠습니다. 네, 도착하면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병훈에게 핸드폰을 넘긴 으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멀미하는 사람 있다고 신경 써 달라시는데요.”
“멀미하는 사람? 난 멀미 안 하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초원을 바라보았다.
‘아, 쓸데없이 저런 소린 왜 한담?’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못되게 굴고 왔는데도 이 남자는 그녀가 멀미할까 걱정하고 있다니.
‘대체 내가 뭐라고⋯.’
마음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려 했다.
초원은 코를 훌쩍이다 무심결에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일곱 살치고는 너무도 조용한 아이. 저처럼 멀미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얼굴에는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그저 무심하게 검은 바다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
“시온아, 우리 이제 육지로 가면 차 타고 서울로 갈 거야.”
아이는 인형을 꼬옥 그러쥐기만 할 뿐 달리 반응이 없었다.
“괜찮아?”
아이는 여전히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이렇게 거센 데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바닷속에 괴물이라도 있을까 봐 그러는 건가? 저 검은 바닷속에 괴물이 있는 건 유경험자로서 잘 아는 바였지만 오늘 누군가가 그들을 공격하거나 방해할 이유는 없었다.
“무서워?”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때 아이가 꼭 끌어안고 있는 강아지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시온아, 얘는 왜 아롱이야?”
그제야 아이는 고개를 들고 자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할머니 집 멍멍이가 아롱이예요.”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치유 능력을 쓴 대상이 할머니 집 강아지라는 게 기억났다. 보고 싶냐고 물으려던 초원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강아지가 아직 살아 있는지 무지개다리를 건넜는지 초원으로선 알 턱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풀이 죽은 듯한 아이를 더 우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시온이가 아롱이 아픈 데 고쳐 줬다며?”
아이가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대단하다. 아롱이가 정말 좋아했겠네.”
씨익 웃던 아이가 입술을 잠시 달싹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롱이 보러 가고 싶어요.”
“그래, 곧 보러 갈 수 있을 거야.”
초원은 구명조끼를 붙들었던 손으로 아이를 살살 다독였다. 순간 거센 파도가 보트 가장자리를 때리면서 손등에 물이 튀었다.
“아!”
손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이를 토닥이던 손을 급히 들어 보니 손등 가장자리에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수풀을 넘다가 긁힌 모양이었다.
“아파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초원을 올려다보았다.
“아냐, 그냥 좀 긁힌 거야.”
“내가 고쳐 줄까요?”
초원을 향해 몸을 돌려 앉은 아이가 두 손을 그녀의 얼굴로 뻗었다.
“아니, 괜찮아. 별로 안 아파.”
가로젓던 얼굴이 아이의 작은 두 손에 붙들렸다. 아이가 고개를 든 채로 눈을 감았다.
‘나도 눈을 감아야 하나?’
“다 고쳤어요.”
“뭐? 벌써?”
“네.”
아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초원의 다리 사이에 놓았던 강아지 인형을 집어 들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빨간 상처가 사선을 그리던 곳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뽀얀 새살이 돋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만 해도 아팠던 어깨가 지금은 멀쩡했다. 얼얼했던 무릎도⋯.
‘그럼 혹시⋯.’
왼쪽 귀 뒤,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수술 흉터가 있어야 할 자리가 매끄러웠다. 감각도 돌아와 있었다. 여기서 머리가 나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겠지.
“고마워, 시온아.”
아이는 씨익 웃더니 다시 먼 바다를 응시했다.
죽음이 언제든 코앞까지 들이닥칠 수 있다고 20년 넘게 끝없이 상기시켜 주던 그 상처가 겨우 몇 초 만에 이 아이의 손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벅찬 감격을 겨우 ‘고마워.’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부족한 표현력이 야속했다.
초원은 아이를 붙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현우를 정말로 살릴 수 있다는 확신에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올 때보다 파도가 거셌다. 멀미도 멀미였지만, 보트를 찰싹찰싹 때리는 파도에 엉덩이와 등이 젖기 시작했다.
“얼마나 남았어요?”
초원은 그 찝찝한 느낌에 얼굴을 찡그리며 병훈을 돌아보았다.
“10분 정도.”
“아직도?”
육지의 불빛이 보이길래 거의 다 온 줄 알았더니. 10분 동안 이러고 가면 헤엄쳐서 간 거나 다름없는 꼴이 될 게 분명했다.
‘아, 갈아입을 옷 안 가져왔는데.’
이러고 어떻게 차를 타야 할지 막막해하는데 뒤에서 병훈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어? 저거 뭐야?”
그가 손가락으로 으뜸의 뒤를 가리켰다.
‘그냥 하늘 아닌가?’
그저 밤하늘인 줄 알았던 것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움직였다. 놀라 심장이 멎을 듯했다. 저 멀리서 장벽처럼 높은 파도가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아, 망할. 꼭 잡으십쇼.”
으뜸이 엔진 조향타를 병훈에게서 뺏어 잡고 방향을 틀더니 속도를 높였다. 초원은 보트 가장자리를 꼭 잡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아이에게 하는지 제 스스로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시야의 가장자리로 검은 장벽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초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이가 입은 구명조끼의 끈을 단단히 제 조끼에 묶었다. 머릿속으로 자꾸만 얼음장 같던 검은 바다의 기억이 밀고 들어왔다.
아무리 속력을 내도 고무보트로 파도를 앞지르는 건 무리였다. 파도가 불과 몇 미터 안으로 다가오자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안 죽어. 구명조끼도 입었잖아.’
아무리 이성이 달래려고 해도 교감 신경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도망가고 싶어도 이 망망대해에 발 디딜 곳은 없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에 귀가 먹는 순간, 보트 뒤쪽에 꽝 하고 무언가가 부딪히더니 충격을 받은 보트 후미가 위로 들렸다.
“어!”
“아악!”
그대로 파도가 선미로 밀려들어 오면서 보트가 뒤집혔다. 초원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차디찬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위로 올라가려고 팔다리를 허우적댔지만 계속 거센 파도에 휩쓸리기만 할 뿐이었다. 휘몰아치는 물살 속에서 겨우 시린 눈을 떴지만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분간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다 구명조끼고 뭐고 정말 죽겠다 싶었을 때 소용돌이치던 물살이 순식간에 찰싹이는 수준으로 잠잠해졌다.
초원은 팔을 휘저어 물 밖으로 머리를 끄집어냈다.
“하아, 하아⋯.”
숨을 고르며 아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물에 홀딱 젖은 꼴로 역시 홀딱 젖은 강아지 인형을 아직도 부둥켜안고 아이는 그녀의 옆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초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묶어 놓길 잘했네.’
“괜⋯.”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울거리던 바닷물이 자꾸 얼굴을 때리며 입속으로 들어왔다. 바닷물의 짠맛에 입속이 아렸다. 초원은 입을 꾹 다물고 아이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다들 어딨지?’
병훈과 으뜸을 찾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머리 두 개와 오렌지색 조끼가 엎어진 고무보트를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멀리도 떠내려 왔네.’
초원은 잠시 숨을 고르고 한 손으론 아이의 구명조끼를 붙든 채 보트를 향해 팔다리를 저었다. 아이는 바다에 빠졌는데도 겁에 질리거나 동요하는 구석 하나 없이 얌전히 딸려 왔다.
‘이따가 칭찬해 줘야지.’
한참을 아이를 끌고 물살과 씨름하며 헤엄을 치다 보니 슬슬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지가 코앞이었다. 네다섯 번만 더 팔다리를 저으면 보트를 붙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손끝에 잡힌 아이의 구명조끼가 가벼워졌다.
“안 돼!”
파도가 입속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원은 비명을 질렀다. 구명조끼 버클을 풀었다. 그것도 아이가, 제 손으로.
파도에 실려 떠내려가는 아이를 잡으려고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이 차디차고 거친 바닷속에서 아이는 강아지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로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파도가 다시 거세게 쳤다. 겨우 잦아들었을 때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초원을 향해 다가오는 어선의 노란 불빛이 검은 바다 위로 너울댔다. 아이를 집어삼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렁이는 수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눈물이 채 흐르기도 전에 찰싹이는 파도에 쓸려 사라졌다.
‘미안해, 난 그것도 모르고⋯.’
‘너 진짜 밉다.’
노란 불빛 아래, 거울 속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울 것 같은 얼굴로 쏘아보는 여자를 초원도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인간이네.’
현우를 구할 마지막 희망이 물거품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희망’은 자신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려는 어른들의 밤바다처럼 검은 속셈에 절망해 저승사자의 손을 잡았다. 그 이기적인 어른의 리스트 마지막쯤에는 ‘홍초원’, 이 세 글자도 새겨져 있겠지.
‘시온아, 미안해⋯.’
세면대를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뚝뚝, 하얀 도자기 위로 눈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좁은 욕실을 울렸다. 더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변기 위에 웅크리고 앉은 채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뭐라고 하지?’
현우에게 살려 주겠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했는데 서울 가서 볼 면목이 없었다.
‘팀장님은?’
무슨 일 안 생길 수도 있다며 큰소리 땅땅 치고 왔는데, 정말 무슨 일, 그것도 관리 대상이 구출 작전 중에 저승으로 가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엄청나게 혼나겠지?’
차라리 팀장이 혼내고 화내면 낫지. 싸늘하게 굴기 시작하면 어쩌나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얼마나 미울까? 나도 내가 이렇게 미운데, 팀장님 눈에는 또 얼마나 미워 보일까? 그런데 언제부터 나는 이 남자에게 미움받는 게 이렇게 무서웠던 거지?’
훌쩍임이 점점 흐느낌으로 변해 갔다.
손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던 초원은 욕실 밖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분주한 발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젖은 수건으로 대충 눈물을 닦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병실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병원 침대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아침 식사만이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입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침대 옆 캐비닛에 식판을 옮겨 놓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얇은 이불 너머로 따가운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퉁퉁 부어 아린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똑똑.
한참 뒤척이는데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팀장님인가?’
새벽, 응급실에서 병훈이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통화를 하는 걸 멀찍이서 지켜봤었다. 그때 출발했다면 지금 즈음이면 도착할 시간이었다.
“네.”
초원은 잠겨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문이 열리더니 승준이 아니라 처음 보는 중년 남자 둘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녀는 이불을 가슴 위로 끌어 올리고 팔짱을 꼈다.
“국정원 요원 맞습니까?”
“네?”
“경남지방경찰청에서 나왔습니다.”
둘 중에 그나마 말랐고 안경을 낀 남자가 무뚝뚝하게 소속을 댔다. 그제야 초원은 병훈이 국정원인 척하고 경찰청에서 기도원 정보를 받았다는 게 기억났다.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인지는 우리 쪽에서 물어야 하는 거 아인가?”
땅딸막한 다른 남자가 침대 가까이 다가오더니 위협이라도 하려는 듯 허리춤에 손을 짚었다.
“저는 모르니까 박병훈 주무관님이랑 얘기하시죠.”
남자는 잠시 초원을 노려보더니 팔뚝을 걷으며 한 발 다가왔다.
“아니, 그쪽은 같은 국정원 사람 아인가? 모른다고 잡아떼면 단교?”
안경을 낀 남자가 말리는 척 다른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기도원이 하루 사이에 다 난장판이 돼 가지고. 주범 다 도망가삐고⋯. 공들여 수사한 거 다 망쳐 놓고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교?”
왜 담당자인 병훈에게 가지 않고 초원에게 와서 이러는지야 뻔했다. 아무리 국정원이라도 수사를 망쳤으니 분풀이는 해야겠고, 분풀이에는 남자 둘보다는 만만한 여자 하나가 제격이겠지.
‘치졸하긴⋯.’
“수사하면서 증거 안 모으셨나 보죠? 도망갔으면 수배해서 잡는 게 경찰이 하는 일 아닙니까?”
초원의 대꾸에 남자는 열이 받은 듯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목을 좌우로 꺾기 시작했다.
“와, 씨⋯. 이 여자 말하는 거⋯.”
“당신들 뭐야?”
익숙한 중저음이 열린 문 너머로 울리더니 승준이 병실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그를 본 경찰이 침대에서 한 걸음 물러섰지만 딱히 태도가 부드러워지지는 않았다. 태도가 부드럽지 않은 건 승준도 못지않았다.
“환자한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장 나가요.”
남자들과 초원의 사이를 승준이 가로막고 섰다.
“아니, 누구신데?”
“이 여자 상삽니다. 그러는 그쪽은 뭡니까?”
남자가 나가질 않자 승준이 허리에 손을 짚더니 놈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초원은 이러다 정말 몸싸움이라도 벌어질까 조마조마했다. 그건 다른 남자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제는 진심으로 동료를 말리기 시작했다.
“경찰청에서 나왔는데, 별거는 아니고⋯. 아이고, 가입시다.”
“경찰청? 조폭이 아니고?”
승준의 어깨 너머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땅딸막한 남자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따질 게 있으면 병원에 누워 있는 말단 요원한테 이럴 게 아니라 윗선에 따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졸렬하기는. 내 손으로 끌어내기 전에 당장 나가세요.”
승준이 다시 문을 가리키며 위협하자 남자는 동료에게 끌려 병실 밖으로 나갔지만 문밖으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그를 향해 부릅뜬 시선은 절대 떼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승준이 뒤돌아 초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면목 없어진 초원은 차마 눈을 마주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치만 제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이것 봐. 나 또 이런다.’
또 이렇게 이 남자 앞에서 쓸데없는 객기를 부린다.
“나도 압니다.”
승준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끝으로 둘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는 침대 발치에 걸터앉아 벽만 바라보았다.
‘화나셨겠지?’
초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괜찮아요?”
그게 불편한 침묵을 깬 그의 첫마디였다. 그렇게 온갖 모진 말을 내뱉고 빽빽 우겨서 와 놓고는 다 망쳤는데, ‘내가 뭐랬습니까?’, ‘기껏 보내 줬더니 그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이런 비난 한마디 없이 “괜찮아요?”라니. 형식적으로 묻는 투도 아니고 저렇게 다정하고 아프게.
초원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단단한 팔이 들썩이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초원은 저를 놓고 그 따뜻한 품에 매달렸다. 커다란 손이 머리와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정수리에는 입술이 지그시 와닿았다.
‘이 남자 바보같이 왜 이래, 정말⋯.’
초원은 고개를 들고 힘겹게 울음을 삼켰다.
“팀장님은 제가 밉지도 않으세요?”
와이셔츠 옷깃을 부여잡고 분명 엉망이 됐을 얼굴로 물었다. 대답 대신 애틋한 손길이 젖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못지않게 애틋한 눈길이 굳어 버린 초원의 심장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한참 그녀를 어루만지던 그가 다시 그 다정하고도 아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운데, 살아 있으면 그걸로 됐지.”
겨우 억눌렀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팀장님 진짜⋯.”
초원은 다시 그 어깨에 매달려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정말로 눈물이 말라 더는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도 그는 그녀를 감싸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이성을 되찾고 몸을 떼어 냈을 초원도 얌전히 그의 품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품이 내 집처럼 편안해진 걸까?
“죄송해요⋯.”
“뭐가?”
“알잖아요⋯.”
“너무 많아서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두 사람은 동시에 피식 웃었다.
“습관만 들이지 마요.”
무슨 습관을 들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어 초원은 고개를 기울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말은, 물에 좀 그만 빠지라고. 앞으론 내가 위험해서 안 보낸다고 하면 제발 말 좀 들어요. 알겠죠?”
아이를 타이르기라도 하는 듯 내려다보는 승준에게 초원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대답을 해야지.”
“아야!”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볼을 살짝 꼬집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밀어내는데 두 손이 초원의 얼굴을 단단히 붙들더니 꼬집혔던 볼에 입술이 와닿았다.
‘이거 위험한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초원은 제 입술에 살포시 포개어져 오는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똑똑.
화들짝 놀라 그를 밀어냈다. 들어오라고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병원 직원이 점심 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식사하세요.”
거울을 안 봐도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게 느껴지는 초원과는 달리, 승준은 몇 초 전만 해도 부하 직원이랑 하면 안 될 짓 하던 사람답지 않게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저 입맛 없는데, 팀장님 드실래요?”
테이블 위에 놓인 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대답 대신 그는 그릇을 덮은 뚜껑을 하나씩 열더니 수저를 들어 초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입맛 없어도 먹어요. 안 먹는다 그러면 내가 직접 먹여 줄 거니까.”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아기 참새처럼 입을 벌리고 떠주는 밥을 받아먹는 상상을 하며 웃다가 그의 다음 말에 굳었다.
“박 주임 여기 불러 놓고. 그럼 다음 주부터 회사에 소문 다 나겠지.”
초원은 대꾸 없이 꾸역꾸역 밥을 넘겼다.
밥을 먹자마자 퇴원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욕실에서 대충 말린 옷을 입고 나왔더니 병훈과 으뜸을 보러 간다던 승준이 벌써 와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누워서 쉬어야 하지 않아요?”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초원을 보며 그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팀장실에서 자주 보던, 거짓말인 거 다 안다는 눈빛이었다.
“진짜요, 전 괜찮아요.”
‘진짜로요.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온몸이 안 쑤신 데가 없으니까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지도 모르겠네요.’
서울로 가는 길, 차 안에서 창밖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다시 죄책감과 절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머릿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무리했던 몸도 아프기 시작했다.
초원은 담요를 두르고 웅크리고 앉아 운전하는 그를 응시했다. 눈을 감고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려볼까 싶기도 했지만 눈을 감고 있으면 후회의 늪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승준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쪽은 눈보라 매섭게 날리는 겨울인데 저쪽만 벚꽃 흩날리는 봄이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그녀를 외롭게 했다.
‘화도 내든가, 혼이라도 좀 내 주지.’
혼나겠다고 조마조마했던 때는 언제고, 막상 비난하질 않으니 그게 더 아팠다.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차라리 후회의 늪이 낫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커다란 손이 초원의 머리를 잔인할 정도로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언제 잠든 걸까? 핸드브레이크 올리는 소리에 눈을 떴더니 자취방 앞이었다. 잠들기 전에는 분명 낮이었는데 벌써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다 왔어요.”
초원은 부스스 일어나 덮고 있던 담요를 접었다. 잠이 덜 깨 머릿속에는 짙은 안개가 껴 있었다.
“차 주임 일은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딴생각 말고 주말 동안 푹 쉬어요. 혹시 더 쉬고 싶으면 얘기하고.”
초원은 대답 없이 멍하니 자취방 창문을 올려다보다가 입을 뗐다.
“팀장님⋯, 혼자 사세요?”
시선은 불 꺼진 창문에 고정한 채였다.
“네, 그런데요.”
시선을 돌려 승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원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한참 시선을 마주하던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핸드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