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28)

어느 쪽이든 새드엔딩

‘이번 달은 치킨 시켜 먹기 글렀네.’

분명 쓰여 있는 건 한글인데 무슨 소린지 모를 메뉴판에서 눈에 들어오는 건 6자리나 되는 가격뿐이었다.

‘감성돔 사 달라고는 안 한다더니⋯. 이 돈이면 감성돔이 몇 마리야.’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을 쉬었다가 아차 싶어 맞은편을 흘끗 쳐다보았다. 초원은 진지하게 카드값 걱정 중인데 마주 앉은 남자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메뉴판을 보며 웃고 있었다.

“밥은 내가 살 테니까 초원 씨는 이따가 술 사요.”

“네?”

밥 사달라더니 갑자기 웬 술? 이거 무슨 수작이람.

“내일 평일인데요, 팀장님.”

그 말에 승준은 피식 웃더니 메뉴판을 접어 테이블 한구석에 놓았다.

“언제는 평일에 술 안 마신 사람처럼⋯. 어제는 평일 아니었나?”

‘네, 어제 평일인데도 술 퍼마시다가 평생 이불 킥할 흑역사를 남겼잖아요.’

초원은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걸 느끼며 메뉴판에 고개를 파묻다시피 했다.

“내일 아침에 힘들면 늦게 출근해요. 내가 팀장인데, 뭐.”

그 말에 오늘따라 조용하다 싶었던 음란마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래, 내일 아침에 힘들 테니까 팀장님 품에서 느긋하게 쉬다가 출근해. 후훗.’

‘좀 닥쳐. 낄 때 안 낄 때를 모르고⋯.’

초원은 머릿속에 적나라하게 그려지는 이미지를 지우려 머리를 흔들었다.

“왜?”

“아⋯, 뭘 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얼떨결에 댄 핑계에 승준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메뉴판을 들고 이것저것 설명해 주기 시작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전에 맡았던 그 포근한 향기가 코를 자극하면서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심장 소리에 귀가 먼 초원은 열심히 움직이는 그의 입술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은 취한 것도 아닌데 자꾸 저 입술을 느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건 분명 어젯밤에도 눈치 없는 잠재의식이 꿈을 들이민 탓이다. 어젯밤 꿈에서도 저 남자는 키스를 참 잘했으며 또 코코넛 향이 감돌았다. 말이 되나? 꿈에서 향이 나는 게?

하여간 어제의 사건은 다 꿈에서 팀장이랑 키스를 너무 많이 한 탓이었다.

아니다. 솔직히 꿈 탓도 양심 없다. 어제 꿈인 줄 착각하고 입술을 들이민 것도 아니지 않나. 현실인 줄 다 알고도 눈앞의 남자가 너무 멋있어 보여서 해 놓고는.

여튼 저 입술, 정말 꿈에서만큼이나 부드러웠는데.

멍하니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더니 승준이 말을 하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초원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그냥 팀장님 시키시는 거로 할게요.”

코스 요리와 와인을 시키고 나니 어색한 침묵이 테이블 위로 깔리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승준은 턱을 괸 채로 초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초원은 괜히 몸 둘 바를 몰라 테이블 위에 있는 식기며 물잔을 만지작거리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승준이 피식 웃었다.

“왜요?”

저를 보고 웃는 게 못마땅해 초원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는데 어째선지 승준은 아빠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귀여워서.”

귀엽다니⋯. 계란 한 판 다 된 여자한테 귀엽다니.

“귀여운 건 아름 씨 같은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말 아닌가요?”

“정아름 씨는 귀여운 게 아니라 애 같은 거고.”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는데요.”

“초원 씨는 어른스럽고 귀엽지.”

“어른스러우면서 귀여운 게 가능이나 한가요?”

이 아저씨가 지금 무슨 소리 하나 싶어 다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승준의 입꼬리는 더더욱 올라가기만 했다.

“지금처럼⋯. 그리고 귀엽다는 건 주관적인 개념이니까.”

초원은 입술을 한 번 비죽 내밀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 나한테 마음 없는 거 아니었나? 취했다고 집에 가라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왜 이래? 입술 한 번 맞대고 나니 갑자기 없던 마음이라도 생긴 건가? 하여간 남자들이란⋯.

턱을 괴고 야경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승준이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하긴 초원 씨는 귀엽다고 하면 항상 이런 반응이지.”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 찰나, 웨이터가 와인을 들고 왔다. 시음해 보라는 듯 잔에 조금 따라 주는 걸 초원은 한 모금 마시고 마음에 드냐고 묻는 웨이터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지금 이 상황은 마음에 안 들지만 술은 마음에 드네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승준이야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고, 초원은 평소라면 부하 직원의 본분을 다하고자 대화가 끊이지 않게 머리를 굴렸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이 남자는 지금 상사의 자격으로 여기에 앉아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게 키스는 왜 해 가지고⋯. 진짜 술 끊어야지.’

그러는 와중에도 손이 제멋대로 와인 잔을 집어 들더니 와인을 입속으로 흘려 넣었다.

‘그래, 이것만 다 마시고⋯.’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니 그나마 나았다. 저 남자도 계속 초원을 쳐다보며 식사를 할 수는 없으니까.

“우연치고는 절묘하네.”

두 번째 메인으로 나온 트러플 리조또를 내려다보며 승준이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 초원을 그가 뭔가 기대하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쓰게 웃었다.

“그냥, 추억의 요리 같은 거예요.”

‘트러플 리조또가 추억의 요리라니⋯. 되게 고급스러운 추억을 갖고 계시네.’

식사를 마치고 같은 건물에 있는 바로 자리를 옮겼다. 어두컴컴한 공간, 이렇게 작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건 아까보다 더한 고문이었다. 겨우 두세 뼘 거리에서 얼굴에 내리꽂히는 시선을 메뉴로 막았더니 낮은 웃음소리가 두꺼운 종이를 타고 넘어왔다.

“뭐 마실 거예요?”

승준이 검지를 메뉴 위로 걸고 아래로 당기더니 물었다. 와인은 이미 실컷 마셨고 맥주는 배부르고 칵테일 같이 달달한 걸 마실 기분은 아니었다.

“테킬라요.”

“테킬라? 좋아해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으로?”

“아뇨, 샷으로요.”

“그냥 병으로 시켜서 같이 마시지?”

초원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병으로 시키면 오늘 제 발로 집에 못 갈 것 같아서⋯.”

“안 가면 되지.”라고 중얼거린 승준이 고개를 뒤로 돌려 직원을 불렀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초원은 분명 천천히 마셔야지라고 다짐했는데 샷으로 마시는 술을 시킨 게 잘못이었다. 비울 때마다 승준이 잽싸게 다음 잔을 주문해 버리는 바람에 지금 비운 게 벌써 네 번째 샷이었다.

‘내가 취해서 또 실수하길 기다리기라도 하는 건가.’

승준이 또 주문하려고 손을 드는 찰나 초원은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덥석 잡아 버렸다. 그걸 엉뚱하게 해석했는지 그는 초원의 손을 꼭 쥐더니 놓아주질 않았다.

“왜?”

승준이 씨익 웃으며 두 손으로 그 작은 손을 쥐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초원의 이성은 손을 빼야 한다고 외치는데 이놈의 몸이 말을 안 들었다.

“아, 그게⋯. 테킬라는 이제 그만 마실래요.”

“그럼 칵테일 같은 거로 시켜 줄까요?”

그냥 집에 가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더니 승준이 한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여전히 다른 손에는 초원의 손을 쥐고.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랑 위스키 니트 한 잔 주세요.”

초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승준을 쏘아보았다. 진짜 속 보인다.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면 한 잔이 소주 반병이었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자리를 뜨고 그 따가운 시선을 눈치챈 승준이 멋쩍게 웃었다.

“초원 씨 술 세잖아.”

역시 알고 시킨 거네. 초원은 기분이 상해 붙들려 있던 손을 뺐다.

“걱정 마요. 집에 무사히 데려다줄 테니까. 정 걱정되면 차 주임한테 문자하든가.”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느닷없이 현우가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 걸까.

“나랑 마시고 있는데 혹시 모르니까 30분마다 문자로 확인해 달라고 하든지.”

그러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 팀장님이랑 왜 단둘이 이러고 있냐고.

“됐어요.”

퉁명스럽게 대답했더니 턱을 괴고 초원을 응시하던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참, 오늘 별일 없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낮에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은 아직 한마디도 안 했다.

“연구소 쪽이 시끄러운 거 보니까 차 주임이 제대로 한 모양이던데?”

초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불현듯 들킬 뻔했던 순간이 생각났다.

“근데 좀 걱정되는 게 있는데요.”

“뭔데요?”

“차 주임님 돌아오기 직전에 격리팀 주임님이 방에 들어왔거든요.”

“뭐 때문에?”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 점심 먹으라고 김밥 사 왔더라고요.”

승준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더니 물잔을 기울였다.

“그 사람이 초원 씨한테 관심 있나 보네.”

“아니에요. 평소에는 그런 일 없었단 말이죠. 근데 왜 하필 오늘⋯.”

그러고 보니 현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사실 제 잘못인 것 같긴 해요. 평소처럼 굴어야 하는 데 제가 긴장해서 일부러 더 웃었거든요.”

“초원 씨 잘못 맞네.”

승준마저 그렇게 말하자 초원은 살짝 풀이 죽었다.

“아무 남자한테나 웃어 주면 안 되지. 그럼 설레잖아.”

도저히 그 돌부처 조승준 팀장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직원이 가져온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이 남자 갑자기 오글거리게 왜 이럴까?

“여튼 차 주임님이 저 보고 스파이는 못 하겠대요.”

“그러게, 초원 씨는 스파이 못 하겠네.”

“칫, 애초에 될 생각도 없었거든요?”

입술을 비죽였더니 마주 앉은 남자가 또 그 아빠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실력이 안 된다는 게 아니고⋯. 스파이는 평범한 외모가 필수거든.”

“왜요?”

“남들 눈에 띄면 안 되니까.”

“아⋯.”

“그러기엔 초원 씨는 너무 예쁘지.”

초원을 바라보는 승준의 눈빛이 부드럽다 못해 꿀처럼 녹아내릴 것 같았다.

‘진짜 오늘 이 남자 왜 이러지? 내가 알던 팀장님 맞나? 변신 능력자가 팀장님으로 변신한 거 아니고?’

“팀장님 술 그만 드셔야 할 것 같네요.”

위스키 잔을 뺏었더니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괜찮을까요?”

이렇게 태연하게 웃으며 실없는 농담이나 할 일이 아니지 않나.

“응?”

“연구소요.”

들키지는 않았지만 연구소 쪽이 시끄럽다는 걸 보니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꽁꽁 묶어 둔 개체가 탈출해 내부인이 아니면 모를 물체를 이용해 달아났는데 이건 누가 봐도 내부자 소행이 아닌가. 그렇다면 의심의 화살은 어제 실장이 직접 입막음을 한 세 사람에게 향할 게 분명했다.

“괜찮을 수밖에.”

불안한 기색은 조금도 없이 자신만만하기만 한 얼굴을 보니 초원은 더 아리송해지기만 했다.

“근데 어제 실장님도 찾아오셨고, 우리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 아닌가요?”

“뭐, 이 일에 엮인 사람이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저렇게 태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초원의 걱정 어린 시선에 승준이 피식 웃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초원의 고집은 못 당하겠다는 듯.

“이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 보안 2등급 출입 카드, 누구 이름으로 되어 있는지 알아요?”

승준이 몸을 바짝 앞으로 기울이더니 속삭였다. 키스라도 하려는 줄 착각하고 커졌던 초원의 눈이 이어지는 말에 또 한 번 커졌다.

“격리3팀 팀장.”

격리3팀이라면 현우가 오늘 ‘사고’를 친 위험 등급 격리소를 담당하는 팀이었다.

“그럼 그분이 다 뒤집어쓰시는 건⋯.”

그렇지 않아도 그 팀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격으로 문책을 당할 텐데. 하필이면 그 팀 팀장의 신원으로 개체를 탈출시킨 건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괜찮아요. 그 사람도 한패니까.”

그렇다니 입속에서 돌던 쓴맛이 순식간에 고소한 맛이 되었다.

“근데 같은 편이면서 개체를 구해 준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그것도 걱정 안 해도 돼요. 출입 기록에서 그 사람 이름 보면 그쪽에서 사건 덮을 거예요.”

“어째서요?”

“누구도 못 건드리는 사람이니까. 모 국회의원의 아들이자 청장이 아끼는 조카거든.”

“아⋯, 그 사람이구나.”

능력도 안 되는데 낙하산으로 격리팀 팀장 자리를 꿰찬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몇 년 전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독 위험 등급 격리소 보안이 허술했던 게 이제야 이해가 됐다.

초원은 마주 앉은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모든 수를 다 읽을 줄 아는 사람답지 않게 어리둥절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새겨졌다. 다른 건 다 알아도 눈앞의 여자만은 모르겠다는 듯.

‘팀장님, 진짜 똑똑하고 미련하시네요.’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다 뒤집어쓰겠다는 미련한 소리를 했을까? 누구도 못 건드릴 사람까지 함정에 빠트리려 했던 걸 들켰더라면 본인의 무덤만 더 깊어졌을 텐데. 하긴, 이 똑똑한 분이 그걸 몰랐을까? 다 알고도 했겠지. 그러니까 왜 미련하게 그런 짓을⋯.

‘그래도 초원 씨가 밤에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테니까.’

‘아니야, 설마.’

초원을 좋아해서 그런 미련한 짓을 했더라면 키스를 안 받아 줬을 리가. 근데 키스는 안 받아 줘 놓고 왜 갑자기 오늘은 딴 사람으로 돌변한 걸까? 귀엽다는 둥, 예쁘다는 둥 헛소리까지 하면서.

팀장으로서의 조승준은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속을 헤아릴 수 없어도 그게 당연한 사람이었고. 하지만 가까이서 보는 지금, 남자로서의 조승준은 더더욱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 무슨 생각 해요?”

승준도 초원의 속을 알 수 없긴 매한가지였다.

어제 먼저 입술을 덮칠 땐 언제고 오늘은 왜 선을 긋는지. 유머 감각 있고 다정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니까 애써 쑥스러움을 참고 말로 표현해 주고 있는데 왜 뚱한 반응인지 말이다.

‘하긴, 그때도 속을 모를 여자였으니까.’

집에 가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온 초원은 승준이 카드 영수증에 사인을 하고 있는 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제가 사기로 했는데요.”

“다음번은 초원 씨가 사요.”

직원에게 영수증을 넘겨주며 그가 씨익 웃었다. 다음번이라니. 바보같이 음흉한 계략에 단단히 말려들었구나.

초원은 차 뒷좌석에 앉아 옆에 앉은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대리기사를 부르는 그를 보자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인데⋯.’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미치겠네.’

집으로 가는 길, 초원은 몸과 마음의 2차 대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리기사가 오고 차가 출발하자 긴장을 놓은 것도 잠시, 아무렇게나 늘어뜨려 놨던 오른손을 승준이 덥석 쥐더니 깍지를 꼈다. 단단한 엄지가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초원은 이성을 놓을 것 같아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속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진짜 미치겠네. 오늘은 술 마시고 폭주하는 개체 없나?’

1절밖에 기억이 안 나 이것만 다섯 번쯤 불렀을 때 집 앞에 무사히 도착했다. 차에서 도망치듯 내린 그녀는 대충 인사를 하고 건물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초원 씨.”

아, 진짜 그냥 좀 보내 주지.

“네?”

마지못해 몸을 돌렸더니 승준이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선 채로 아쉬운 듯 웃었다.

“이번 주말에 뭐 해요? 이번엔 초원 씨가 밥 사야지.”

“아, 친구 애기 돌잔치 가기로 했는데요.”

상상 속의 친구도 친구지.

“언제?”

아, 진짜⋯.

“토요일이요.”

“그럼 일요일은?”

“엄마 생신이라 집에 가려고요.”

내년 3월에요.

승준이 피식 웃더니 초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엽네.”

역시나 거짓말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남자였다. 초원은 속이 뜨끔해서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내일 뵐게요.”

그대로 뒤 돌아 건물 입구에 서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어째선지 승준은 등 뒤로 바짝 따라와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침에 힘들 거 없으니까 내일 정시 출근하세요, 홍 주임.”

온몸을 더듬는 듯한 그의 낮은 웃음소리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는 누가 이렇게 눈치 없이 썼나.

“@#%^&하는 아름 씨, 생일 축하합니다.”

다들 ‘사랑’은 얼버무리고 민망한 듯 웃었다. 작은 고깔모자를 쓴 아름이 손뼉을 치더니 촛불을 후 불어 껐다.

“소원 안 까먹고 빌었어, 아름 씨? ‘박 주임님 로또 1등 돼서 다음 주부터 출근 안 하게 해 주세요.’하고.”

“그런 건 박 주임님이 직접 비셔야죠.”

아름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고깔모자를 벗었다.

“그래서 되면 내가 좀 떼 준다니까?”

“거짓말.”

“선배, 꼭 로또 1등이 돼야 회사를 때려치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초원은 숫자 2와 6 모양의 초를 뽑으며 보란 듯 얄밉게 웃었다.

“그래, 박 주임. 오기 싫으면 그냥 내일부터 쭉 쉬어. 팀장님, 박 주임 오늘 중으로 퇴사 처리 가능하실까요?”

초원은 신이 희경을 만들다가 손이 미끄러져서 얄미움을 드럼통째로 들이붓는 장면을 상상했다.

뒤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서 있던 승준은 무심한 얼굴로 주머니에 꽂혀 있던 펜을 집어 들었다.

“안 될 거 있나요. 어디 사인하면 되죠?”

얼른 사인 못 해 안달 난 듯 볼펜이 딸깍거리고 초원은 저도 모르게 풋 웃고 말았다.

‘아, 이런 거에 웃어 주면 안 되는데⋯.’

으뜸이 케이크를 하나씩 잘라 나눠 주었다. 원래 팀원들 생일 축하는 아름이 챙기지만, 본인 생일을 직접 챙기게 할 수 없으니 오늘은 초원이 맡았다. 아름이 요즘 다이어트를 한다며 글루텐 프리 비건 케이크를 사 달라고 해서 좀 귀찮긴 했지만 멀리까지 가서 사 온 케이크였다.

초원은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흠⋯.’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맛은 있는데⋯. 그래, 글루텐 프리 비건 케이크지 슈가 프리가 아니니까. 근데 이게 다이어트랑 무슨 상관이지?’

“홍 주임, 뷔페 예약은 했지?”

케이크를 한 입만 먹고 내려놓은 병훈이 물었다.

“네, 6시 반이요.”

“아, 팀장님. 저희 오늘 퇴근하고 아름 씨 생일 축하 겸 용산에 있는 뷔페로 가기로 했는데 혹시 안 바쁘시면⋯.”

병훈이 이렇게 예의상 물으면 이쯤에서 승준이 “아니, 난 됐으니까 여러분들끼리 재밌게 노세요.”라고 하는 게 정해진 시나리오였다.

“그러죠.”

틀을 벗어난 대답에 초원은 승준에게서 등을 돌리고 몰래 한숨을 쉬었다.

‘왜 저래, 진짜.’

“한 조각 남았는데 더 드실 분 있으신가요?”

으뜸이 테이블 위를 정리하며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달다, 그치? 왜 이렇게 단 걸 사 왔어?”

희경이 인상을 쓰며 초원에게 핀잔을 줬다.

“생일인 사람 먹고 싶은 거로 사는 거니까요.”

초원은 일회용 접시가 희경의 척추라고 상상하며 꼭꼭 접었다.

“아름 씨 생일인데, 아름 씨 먹어요. 집에 가져가든가.”

초원의 말에 아름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이어트 중이라서⋯. 주임님이 멀리까지 가서 사 오셨는데 드세요.”

“어머, 홍 주임도 다이어트해야지.”

갑자기 희경이 초원의 팔뚝을 붙잡더니 이 살 좀 보란 듯 흔들자 초원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진짜 상사만 아니었어도⋯.’

“여기서 홍 주임만큼 다이어트 필요 없는 사람도 없지 않나?”

초원의 바로 뒤에서 중저음이 울렸다.

‘너무 가까운데⋯.’

초원은 반 발자국 앞으로 옮겼다.

[박병훈: 팀장님 갑자기 왜 그러시지? -_-]

주무관급 이하 단체 채팅방에 불이 붙었다.

[이으뜸: 심심하신가 봅니다.]

[박병훈: 아니, 심심하시면 여자를 만나시든가 하면 되지.]

[차현우: ㅎㅎㅎ]

[박병훈: 여튼 팀장님 오시면 팀장님이 사시는 거네? 돈 굳어서 좋다만⋯.]

[정아름: 오+_+]

[박병훈: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비싼 데로 갈걸⋯.]

[홍초원: -_-]

[박병훈: 취소하고 딴 데로 예약 안 되나?]

[홍초원: 안 됩니다.]

[박병훈: 그냥 취소하고 소고기나 소곱창 같은 거 먹으러 가지?]

[홍초원: -_-]

[정아름: 그냥 가요. 나 다이어트 중이라 뷔페 가는 건데⋯.]

[박병훈: 이건가? 아름 씨 요즘 살 빠지고 예뻐져서 팀장님이 그러시나?]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다고 초원은 속으로 푸념했다.

[정아름: 뭐예요⋯. 기분 나빠. 글고 저 원래부터 예뻤거든요?]

[박병훈: 내 말은 ‘더’ 예뻐졌단 거지. 아니, 왜? 팀장님 잘생기셨잖아. 키도 크고⋯. 여자들이 좋아하는 타입 아닌가?]

[정아름: 팀장님이랑 내 나이 차가 얼만데⋯.]

[차현우: 홍 주임도 있잖아요.]

[홍초원: -_-]

[박병훈: 에이, 홍 주임은 뭐랄까 팀장이 키우는 후계자 같은 느낌이지. 남자들은 아름 씨처럼 사근사근한 여자를 좋아한다니까.]

[홍초원: 내가 진짜로 팀장님 뒤를 이으면 선배부터 자르려고요.]

[박병훈: 아이고 왜 그러세요, 우리 홍 팀장님.]

[홍초원: 만년 주임 박 주임님, 진급은 언제 하실 생각입니까?]

[차현우: ㅋㅋㅋㅋㅋㅋ]

[박병훈: 와 진짜 너무한다. -_-]

초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그잔을 들었다. 상처받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병훈에게 목 긋는 시늉을 하고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 머신 버튼을 누르고 카운터에 허리를 기댔다. 생각할수록 숨이 막히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우 앞의 토끼가 이런 기분일까?

초원은 갑자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세상에 잡아먹히고 싶어 하는 토끼도 있을까? 마음은 ‘안 돼!’라고 외치는데 몸은 ‘돼’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다 내 잘못이지. 키스는 왜 해 가지고⋯.’

대체 그 짧은 입맞춤이 뭐가 그리 대단했길래 그 돌부처가 이러는 걸까?

요즘 팀장은 어떻게든 초원과 단둘이 있으려고 기를 썼다. 평소엔 혼자 가던 외근에 초원을 데리고 가는가 하면 팀장실에서 종일 자료 정리를 시키지 않나. 또 저번 토요일에는 그녀가 사 주는 닭갈비가 먹고 싶다고 불러내더니 느닷없이 춘천으로 차를 몰았다.

승준은 초원이 그어 놓은 굵은 선을 넘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굴고 있었다.

‘차라리 대놓고 사귀자든지, 자자든지 말이나 하면 거절이라도 할 텐데. 상사니까 눈치껏 잘 거절해야겠지만⋯.’

이 남자가 원하는 게 어느 쪽이든 받아 준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가벼운 흥미라면 실망이고 진지한 감정이라면 곤란하니까.

곤란한 것보다는 실망이 낫다. 진지한 관계를 원한다면, 그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이 부담스러웠다. 사실, 가지지 못한 것이 훨씬 부담스러웠다. 하필이면 가족이 없는 남자니까.

토요일에는 어쩌다 조카 사진을 보여 주게 되었는데 한참을 부럽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입매가 초원 씨를 닮았네.’

‘제가 낳은 거 아닌데요.’

승준이 조용히 웃더니 초원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초원 씨 아기는 훨씬 예쁘겠지.’

지나가는 말로 하는 투도 아니고 기대감이 담긴 말투. 하지만 초원에게 그런 것 기대해 봤자다.

그러니 안 될 관계, 괜한 여지를 주지 말아야 했다. 차라리 가정을 꾸리는 데 관심이 없어 보이는 현우와 장산범이나 쫓아다니는 게 덜 아픈 거다.

팔짱을 끼고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탕비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심장 소리가 귓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초원을 보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라도 본 듯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안녕, 초원 씨.”

오늘 종일 봐 놓고 왜 인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초원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는 머그잔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승준이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

그는 초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오른손을 서서히 그녀의 뺨으로 가져갔다.

‘사람들 왔다 갔다 하는 곳인데⋯.’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건가 싶어 손이 닿기 직전에 고개를 살짝 반대쪽으로 틀었더니 이젠 왼손이 덥석 얼굴을 감쌌다.

“가만히 좀 있어요.”

초원은 지금 후다닥 도망가고 싶은 건지 와락 안기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승준은 엄지로 뺨을 살짝 매만지더니 눈앞으로 내밀었다.

“속눈썹 붙어 있어서⋯.”

“아⋯.”

초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탕비실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아름의 접시를 보는 초원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회만 홀라당 발라 먹고 남은 밥이 접시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쌀 아깝게⋯.’

이 광경이 기분 나쁜 건 초원만이 아니었나 보다.

“정아름 씨는 그럴 거면 횟집으로 가지 그랬어요?”

무뚝뚝하게 뱉은 승준의 말에 아름이 민망한 듯 배시시 웃었다.

“제가 다이어트 중이라서⋯.”

“그러니까 횟집으로⋯.”

승준은 말하다 말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말이 통해야 말이지.’

“아름 씨, 다이어트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너무 비쩍 말라도 그래.”

병훈이 분위기 바꾸기에 나섰다.

“맞아요. 아름 씨는 토끼 같은 귀여움이 생명인데 세상에 뼈밖에 없어서 귀여운 토끼는 없지 않습니까?”

옆에서 으뜸까지 거드니 아름은 기분이 한결 좋아져 생글생글 웃었다.

“진짜요?”

“그러네, 아름 씨 진짜 토끼 같긴 하다.”

초원은 아름의 머리에서 토끼 귀가 솟아오르는 상상을 했다. 꽤 잘 어울렸다.

“헤헤, 그럼 초원 주임님은 무슨 동물이지? 음⋯.”

“고양이 아닌가?”

말없이 식사를 하던 현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니지. 말티즈지.”

병훈이 고양이는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저으며 말했다.

“말티즈? 너무 앙증맞은 거 아니에요?”

초원은 그럴 리가 없는 병훈이 귀여운 강아지에 자신을 빗댄 게 어리둥절했다.

“앙증맞게 생겨서 앙칼지잖아. 나는 개 중에서 말티즈랑 치와와가 그렇게 무섭더라고.”

‘그럼 그렇지.’

초원은 병훈을 앙칼지게 쏘아보았다.

“시끄러워요, 이 나무늘보.”

“햄스터 아닌가?”

승준이 불쑥 내뱉었다.

“네?”

모두가 이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말은 초원 씨 뭐 먹을 때 오물오물 먹는 게 햄스터 같지 않나?”

은근히 입꼬리를 올리고 저를 쳐다보는 승준의 시선이 불편해진 초원은 오물오물 씹던 칠리새우를 그냥 꿀꺽 넘겼다.

“팀장님, 팀장님 앞에선 홍 주임이 햄스터처럼 구는진 몰라도 저희 앞에선 사나운 맹수입니다.”

별생각 없이 병훈이 던진 말에 승준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웃었다.

‘햄스터라니⋯.’

자신이 그렇게 작고 깜찍한 동물일 리가 없다며 초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체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일까? 앞으론 불편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겠네.’

초원은 최대한 오물오물하지 않고 밥을 먹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무슨 동물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현우 선배는 강아지과. 포슬포슬하게 생긴 시바견이려나? 으뜸 씨는 근육질에 몸집이 큰 게 캥거루 닮았네.’

캥거루라니. 혼자서 풋 웃다가 고개를 드는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승준과 눈이 마주쳤다.

초원은 그 눈빛이 먹잇감을 노리는 흑표범 같다고 생각했다.

먹을 만큼 먹은 3팀 사람들은 마지막 코스로 후식을 먹기 시작했다.

“나 이거 무슨 맛인지 궁금한데. 한 입만 먹어 봐도 돼요?”

초원이 먹고 있던 인절미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며 현우가 물었다. 초원은 먹던 숟가락으로 한술 크게 떠 현우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승준은 심장에 바늘이 파고드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제 어디로 가죠? 팀장님, 어디로 갈까요?”

“글쎄요. 여러분 가고 싶은 데로 가죠.”

“글쎄요, 저는 됐으니 여러분 재밌게 노세요.”를 기대했던 병훈은 오늘따라 팀장이 왜 이럴까 싶었다.

“맨정신으로 노래방 가기는 그렇고⋯. 홍차 주임 이 근처에 마실 만한 데 있어?”

병훈은 여기서 집이 멀지 않은 두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초원은 어깨를 으쓱하곤 옆에 앉은 현우를 바라봤다. 현우는 열심히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구?”

현우가 고개를 들더니 말없이 활짝 웃었다.

‘아⋯.’

“어제 한국 왔는데 오늘 바쁘다더니 보자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저는 2차 못 갈 것 같은데요.”

“에이, 차 주임 어딜 가려고. 아름 씨 생일 축하 아직 안 끝났는데.”

“저는 못 가지만 여기 근처에 괜찮은 이자카야 있는데. 가는 길 알려 드릴게요.”

승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초원의 어두워진 표정을 어째서 현우는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아름의 생일 축하를 핑계로 온 2차인데 정작 주인공인 아름은 피곤하다며 집에 가 버렸다. 그렇게 남은 네 사람은 현우가 추천한 이자카야에서 맥주와 하이볼을 마시기 시작했다.

초원은 오늘따라 술이 술술 들어갔다. 안주가 좋아서도, 술맛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그냥 잔뜩 취해서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잊고 싶을 뿐이었다.

‘선배는 지금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겠지⋯.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자신보다 어린 아름은 금세 발을 뺐는데 초원은 어장 안에서 아직도 출구를 못 찾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것도 바보같이 제 발로 들어간 어장에서⋯.

평생을 함께하자던 현우는 평생 초원을 여자로 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자신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도 못 하고 초원은 비겁하게 취하는 길을 택했다.

“초원 씨, 너무 급하게 마시는데⋯.”

옆에 앉은 승준이 물잔을 채워 초원의 앞에 놓았다.

“홍 주임님, 안주도 좀 같이 드시면서 마시시죠.”

으뜸이 테이블에 놓인 모둠꼬치와 연어회를 가리켰다.

“홍 주임이 오늘 술이 좀 받는가 본데, 속도 조절해.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나 홍 주임 집 어딘지도 몰라.”

“그럼 버리고 가시든가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술 취한 여자를 버리고 가냐?”

“내가 초원 씨 집 아니까 이따가 데려다주면 되지.”

그 말에 초원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도 잊고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승준은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남자 셋이 데드리프트며 야구며 초원은 관심 없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계속 술잔을 기울이면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팀장님, 그럼 저번 토요일 경기는 보셨어요?”

“아뇨, 약속이 있어서.”

초원은 속으로 ‘약속은 무슨⋯. 느닷없이 불러내 놓고⋯.’라고 중얼거렸다.

“장난 아니었는데.”

“생중계는 못 보고 나중에 하이라이트만 챙겨 봤죠.”

“그걸 포기하시고 가실 정도면⋯. 아아, 이거 감이 온다. 여자네요.”

병훈이 요란스럽게 손을 비비며 말하자 승준은 쑥스럽게 웃었다.

“웃으시는 것 보니까 맞네. 팀장님, 그럼 꼭 대답하셔야 하는 질문이 있지 않습니까?”

뜸을 들이는 병훈을 보고 승준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예쁩니까?”

승준이 웃기도 전에 옆에 있던 초원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들이란⋯. 어이가 없어서 정말.’

“당연하지. 숨 막히게 예쁘지.”

초원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 술 탓이라고 생각했다.

“오오, 누구 닮았어요?”

“글쎄⋯.”

“사진 없으세요?”

“아, 그러고 보니 없네.”

“그럼, 옆에 있는 홍 주임이랑 비교하면요?”

병훈도 취할 대로 취한 모양이었다. 생각 없이 한 말에 괜히 찔린 초원은 벌컥 짜증을 냈다.

“그만 좀 해요. 왜 거기서 내가 나와요?”

“아니, 으뜸 씨랑 비교해 달라고 할 순 없잖아.”

“아, 나 집에 갈래요.”

벽 쪽에 앉아 있던 초원이 벌떡 일어서면서 비키라는 듯 승준을 노려봤다. 그는 놀란 듯 초원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하고 갑시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걸어서 10분 거리밖에 안 되니까 알아서 가겠다는데 승준은 취해서 안 된다며 굳이 여기까지 따라왔다.

집 앞에 도착한 초원은 이제 됐으니 가라며 등을 돌리고 건물 입구로 향했다. 텅 빈 골목길에 들리는 건 초원의 발소리뿐이었다. 비밀번호 패드에 손가락을 뻗던 초원은 갑자기 화가 났다.

가라는 데 가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남자가 이유 없이 미웠다.

초원은 몸을 휙 돌려 다시 승준에게 다가갔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양팔을 매달리다시피 붙들고 따지듯 물었다.

“조승준 씨,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예요?”

가로등 불 아래에서 떨리는 눈으로 초원을 내려다보던 승준은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놀란 초원은 그의 가슴팍을 양손으로 밀었지만, 승준은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밀어내기를 포기한 초원이 자포자기한 듯 물었다.

“저랑 자고 싶으신 거예요?”

그제야 팔이 스르륵 풀렸다. 초원은 술기운에 젖어 풀리는 눈을 부릅뜨고 그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자고 싶으신 거면 자 드릴 수 있어요. 그게 뭐라고요, 그쵸?”

이제 승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근데 혹시 제 마음을 원하시는 거라면 그건 못 드려요.”

“차현우 씨 때문인가?”

초원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자 놀라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떻게 아신 거지?’

그러다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다시금 깨달았다. 실소가 절로 나왔다. 초원은 어리석은 자신을 향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저 되게 미련하죠?”

“아니. 그럼 나도 미련한 건가?”

단호하게 묻는 그의 눈빛에 초원은 어쩐지 숨이 가빴다. 눈앞이 빙빙 도는 것 같아 그의 가슴팍에 손을 짚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것뿐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나한테 얘기해 봐요.”

승준이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초원은 모든 걸 털어놓고 매달려 울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며 입을 뗐다.

“팀장님, 결혼 생각 있으세요?”

승준은 잠자코 초원을 내려다보다가 되물었다.

“초원 씨는?”

“저는 없어요.”

“그럼 나도 없어요.”

77억이 사는 이 세상에 여자라고는 초원밖에 없는 듯, 승준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 왜 이러지, 정말.’

초원은 울 것 같아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녀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손 하나가 점점 위로 올라오더니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손길에 얌전히 몸을 내맡기고 있다 보니 초원은 어느새 승준의 품속에 있었다.

그의 향기는 포근했다. 이성과의 치열한 싸움도 잊을 정도로. 이 남자의 품속이라면 어떤 일이든 괜찮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초원은 그의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묻고 그 향기를 깊이 들이켰다. 그런 그녀를 애틋하게 내려다보던 승준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초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입술을 덮는 부드러운 감촉에 몸을 떨었다.

늦은 밤 고요한 골목길, 두 입술이 서로를 탐하는 소리만 가득했다.

부드럽게 감기는 혀와 포근하게 자신을 감싸는 입술,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는 따뜻한 숨결에 초원은 점점 마음의 빗장이 풀려 가는 걸 느꼈다. 그때 불현듯 정신을 차린 이성이 속삭였다.

‘안 돼.’

초원은 아쉬움을 참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 부드러운 혀에 날카롭게 베여 피를 흘리게 될 날이 오는 게 무서웠다.

“팀장님, 저한테 잘해 주지 마세요.”

“어째서?”

희열에 달뜬 눈을 미처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자신을 밀어내는 말을 들은 승준이 물었다.

“새드엔딩일 게 뻔하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초원은 셔츠를 붙들고 있던 손을 풀고 뒤돌아 걸었다. 텅 빈 골목길, 들리는 건 여전히 초원의 발소리뿐이었다.

***

초원은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그렇게 비 오라고 빌었는데 날씨가 이렇게 화창할 수가 있을까.

청계산은 울긋불긋한 단풍이 한창인 만큼 금요일 낮에도 사람이 많았다. 이런데 여기서 본청 전체 가을 산행이라니⋯.

애초에 정상까지 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데 동의한 3팀은 적당히 경치 구경이나 하며 올라가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청에서 나눠 준 도시락을 폈다.

“아, 여기서 막걸리 마시면 딱인데.”

병훈이 반찬으로 들어 있던 무말랭이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이따 내려가서 코 삐뚤어지게 마실 텐데요, 뭐.”

현우의 말에 병훈이 그건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흔들었다.

“난 오리고기엔 소맥이 낫더라고.”

“오리고기는 뭔들⋯.”

초원은 억지로 끌려가는 가을 산행은 싫었지만 끝나고 먹는 오리고기 때문에 회사를 용서할 수 있었다.

“앗! 안 돼!”

젓가락이 엇갈리면서 들고 있던 김밥이 땅에 떨어졌다.

‘아까워라⋯.’

초원은 뱃살이 될 기회를 놓치고 사망한 김밥을 아쉬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얼른 주워서 먹어.”

병훈이 김밥을 가리키며 줍는 시늉을 했다.

“뭐야, 땅거지도 아니고 저걸 왜 주워 먹어.”

희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흙 좀 묻은 거 털고 먹으면 되죠. 저거 좀 먹는다고 죽나.”

“그럼 박 주임이 주워 먹으면 되겠네.”

흙바닥에 얌전히 잠든 김밥을 애도하며 희경과 병훈이 티격태격하는 걸 구경하던 초원은 맞은편에 앉은 승준과 눈이 마주쳤다. 몇 주 전만 해도 자신을 노리는 범 같았던 눈빛이었는데, 요즘은 슬픈 강아지 눈이었다.

초원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김밥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내 거 하나 줄까요?”

옆에 앉은 현우가 도시락을 내밀었다.

“아뇨, 됐어요.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근데 왜 그렇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요?”

“내가 언제요?”

“금방. 나는 또 김밥 때문에 속상해서 그러는 줄 알았네, 하하.”

‘차라리 김밥 때문에 속상한 거면 좋겠네.’

그날 밤 이후로 승준은 별말이 없었다.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그저 가끔 저렇게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냥 자신을 미워하고 힐난하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이럴 거면 그때 키스는 왜 했냐고. 왜 사람을 가지고 두 번씩이나 장난을 치냐고.

“또 한숨 쉬었어. 홍 주임 요즘 무슨 고민 있어요?”

현우가 걱정 어린 눈길로 물었다.

“역시 김밥 한 개가 모자라네요.”

초원은 현우의 도시락에서 김밥을 훔쳐 입에 넣었다. 승준의 착잡한 눈길을 받으며 먹는 김밥이 모래처럼 까끌했다.

“참, 나 또 제보받은 거 있는데.”

“그래요?”

초원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3월에 갔던 데랑 같은 장소예요.”

“저번에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근데 다른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봤다니까. 좀 자주 가 볼까 싶어요.”

“흐음⋯.”

초원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도 남 일인 척 무심하게 넘겼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남 일이었다.

“다음 토요일에 시간 돼요?”

“안 되는데⋯. 친구 결혼식 가야 해요.”

친구 결혼식 같은 거 있지도 않았다.

“그럼 월요일 연가 내고 일요일에 가는 건?”

“나 연가 아껴 써야 해요.”

“그럼 내일은 어때요? 너무 갑작스럽나?”

“내일? 오늘 등산하고 술 마시면 내일 근육통이랑 숙취 장난 아닐 텐데?”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알았어요. 그럼 다음 주에 혼자 가야지, 뭐.”

이젠 그런 슬픈 강아지 눈을 해도 안 통한다고 초원은 굳게 마음먹었다.

점심을 먹고도 팀원들은 움직일 줄 몰랐다. 희경의 아들 이야기며 으뜸의 결혼 준비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는데, 승준이 일어서더니 저 멀리 있는 나무 밑으로 가 무언가를 줍기 시작했다.

“팀장님 뭐 하시는 거죠?”

아름이 갸우뚱하며 팀원들에게 물었다.

“뭐 주우시는 것 같은데. 밤이나 도토리 같은 거 아닐까요?”

“팀장님이랑 진짜 안 어울린다. 산에서 도토리 줍는 건 보통 아줌마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요?”

아름이 키득거리자 희경이 발끈했다.

“나도 가끔 도토리 줍는데, 우리 우진이가 좋아해서. 그럼 나도 아줌마야?”

“애 있으면 아줌마 아닌가?”

거기에다 병훈이 불을 지폈다. 이제 팀원들은 아줌마의 정의가 무엇인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홍 주임.”

아줌마가 왜 기분 나쁜 호칭인가로 주제가 바뀔 즈음 승준이 갑자기 초원을 불렀다.

“가방 들고 이리 와 보세요.”

초원은 팀원들과 어리둥절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 일어섰다. 가까이 다가갔더니 승준은 손에 알밤을 잔뜩 쥐고 있었다.

“지퍼 열어 봐요.”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채로 초원은 배낭 지퍼를 열었다. 승준이 손에 쥐고 있던 밤을 배낭에 넣더니 등산용 재킷 주머니에 든 것도 비우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초원에게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밤 좋아하니까.”

그 말에 초원은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 생겼다.

‘군밤 킬러인 건 맞지만 팀장님에게 말한 기억은 없는데⋯.’

나를 잊은 그대에게

울긋불긋한 단풍이 예쁘다. 그대는 더 예쁘고.

내 기억 속에만 남은 그해 가을만큼이나.

그 가을에도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질투심을 불태웠다. 그러다 너에게 상처를 줬지. 이번에는 그럴 일 없을 거다. 이번 가을, 네가 원하는 건 내 마음이 아니니까.

그 시절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우린 서로의 유일한 등불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른 남자와 도시락을 나눠 먹는 그대의 기억에는 없는 일이다.

더는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괜스레 관심도 없는 나무나 구경하다 보니 밤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멍청한 짓이라고 욕하면서도 나는 일어나 밤을 주울 수밖에 없었다.

너는 군밤을 참 좋아했었는데. 지금도 좋아할까?

그때 나는 한시가 급했는데 너는 오솔길에 떨어진 밤이나 한가롭게 줍길래 핀잔을 주곤 했다. 돌이켜 보면 그럴 필요 없었는데 그때의 난 왜 그랬을까.

그 시절의 너는 참 용감했고 생기가 넘쳤다. 하늘에서 떨어진 거북이로 트롤을 잡고, 그 거북이 하나로 수프를 끓여 먹은 일은 지금 되돌아봐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때의 넌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잘 웃지를 않는구나. 다 내 탓인 것만 같다.

내가 없는 3년 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묻고 싶다.

‘네? 저 거의 매일 보셨잖아요.’

넌 이렇게 대답하겠지.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잘 잊었는지. 가끔 아픈 기억이 꿈으로 찾아와 괴롭지는 않았는지. 이유 모를 외로움과 슬픔에 시달리지는 않았는지. 내가 그랬듯이.

넌 그래서 내가 없는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저 남자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걸까?

널 탓할 자격은 없지만 비참하다. 하필이면 네가 말했던 취향을 그대로 빚어 놓은 듯한 남자라서. 나는 네 취향과 거리가 먼 주제에 그저 운이 좋아 네 마음을 얻었던 것뿐인데. 이제는 운명이 내 편이 아니니 이길 자신이 없다.

저놈이 밉다. 네 마음의 가치를 휴지 조각처럼 여기고 널 아프게 하는 것이. 나는 가진 걸 다 바쳐서라도 얻고 싶은 게 네 마음인데. 차라리 저놈이 네 마음을 받아 주었다면 나는 기꺼이 행복을 빌어 주며 단념했을 것이다. 네가 행복하지 않아 내가 불행할 바에야 네가 행복해서 내가 불행한 게 낫다.

그날 밤 잘해 주지 말라는 절망스러운 소리를 하는 널 붙잡고 털어놓고 싶었다.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 아느냐고. 나는 네가 없이 너의 기억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고. 그러니 마지막 약속, 꼭 지켜야 한다고.

네가 새드엔딩일 게 뻔하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놀랐다. 설마 다 기억하는 건가? 그래서 나를 계속 밀어냈던 건가?

하지만 그랬다면 네가 내게 미안한 눈을 했을 리가 없지. 우리의 새드엔딩은 내가 저지른 것이니까.

네게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빼앗은 죄인인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용서받지 못할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걸 알아주면 안 될까? 그 보물은 너만의 보물이 아닌 우리의 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후회는 않는다.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언제나 너였고, 너는 여기 이렇게 가을 풍경을 눈에 담으며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나는 두 손 가득 쥔 알밤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밤을 모아 주면 넌 기억을 찾을까?

네가 기억을 영영 찾지 못하면 좋겠다. 아프니까. 그렇지만 나는, 나만은 기억해 주면 안 될까? 아픈 건 나 혼자 할 테니까.

너 나 사랑했었잖아. 한 번 사랑했으면 두 번도 할 수 있잖아.

나 이젠 계란말이 잘해. 연습 많이 했어. 네가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떡볶이도 언제든 해 줄 수 있어. 그러니 제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몰아닥치는 감정에 나를 내던지는 미련한 짓을 할 뻔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너를 불렀다.

“홍 주임.”

홍 주임은 무슨. 이 거리감이 지독한 호칭이 싫다. 네가 날 팀장님이라고 부르는 건 더 싫다.

영문을 몰라 동그랗게 뜬 너의 눈이 참 예쁘다. 그대는 예쁘니까 예쁜 것만 먹어. 고르고 고른 알밤을 네 가방에 쏟아 넣었다. 그리고 여전히 동그란 그 눈을 향해 난 웃었다.

“밤 좋아하니까.”

난 널 좋아하고. 아니, 사랑하고.

어리둥절한 네 얼굴. 넌 기억 못 하는구나.

나는 웃고 싶은 걸까, 울고 싶은 걸까.

나를 잊은 그대에게 간절히 묻고 싶다.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는 없느냐고. 이번에는 반드시 해피엔딩을 안겨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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