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28)

인사과에 불려가는 지름길

“와, 사무실은 찜통인데 여기만 냉동고네요. 치사해라.”

초원은 소름이 돋은 팔뚝을 연신 문질렀다.

“카디건 가져올걸⋯.”

본청은 전력난이네 뭐네 하며 28도 이하면 에어컨을 못 틀게 하면서 일산 연구소는 펑펑 틀어대고 있었다.

“벗어 줄까요?”

현우가 정장 재킷을 살짝 열며 물었다.

“아뇨, 됐어요. 내가 선배 옷 입고 다니는 것도 웃기잖아요.”

“하긴, 아빠 옷 입은 것 같겠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닌데⋯.’

코너를 돌아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습관적으로 버튼을 누르고 보니 엘리베이터는 6층에 있었다.

‘이거 느린데. 지하 3층까지 오려면 반나절은 걸릴 텐데.’

초원이 줄어들지 않는 숫자 6을 노려보고 있자 현우가 비상계단 쪽을 가리켰다.

“움직이면 덜 춥지 않아요?”

초원은 지하 2층까지 오고서야 실수했단 걸 깨달았다.

‘나 오늘 하이힐 신었는데⋯.’

그냥 지하 2층에서 엘리베이터나 타자고 하려는데 아래에서 우당탕탕 누군가 급하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초원은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았다가 뛰어 올라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헉⋯.’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찬 권총을 꺼내 겨눴다. 놈은 총을 보고 겁을 먹기는커녕 반색하며 초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현우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고 서면서 권총을 쥔 초원의 손을 옆으로 밀었다.

“저 좀 죽여주세요, 제발. 저 이렇겐 못 살겠어요. 그때 그냥 죽었어야 했는데.”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총을 아래로 내렸지만 여차하면 바로 쏠 생각이었다. 일산 연구소에 자주 오는데, 놈이 여기 있었을 줄이야.

“무슨 일인데요?”

“모르세요?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는지?”

“저희는 연구직이 아니라서⋯.”

현우의 말에 4245번 개체는 입고 있던 병원복 소매를 걷어 보란 듯 팔뚝을 내밀었다. 손등부터 팔꿈치 안쪽까지, 생긴 시점이 다른 듯한 정맥 주사 자국이 가득했다.

“피만 아니라 침도 채취해 가요. 종일 무슨 실험실 쥐도 아니고 묶여서⋯. 연구용이라고 하는데 무슨 연구에 그렇게 많이 필요하겠어요. 아무래도 이상한 데 쓰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더니 갑자기 초원이 쥔 권총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어, 진정하세요.”

현우가 잽싸게 남자를 막았다. 초원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총을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놀라 벌떡 일어서더니 현우를 밀치고 계단 위로 뛰어 사라졌다.

따라가야 하는 건가 싶어 초원이 현우를 쳐다보는데, 아래에서 경비 인원 한 명이 올라오더니 두 사람을 보곤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내려갔다.

‘뭐지, 이거⋯.’

‘뭐긴 뭐야⋯.’

초원은 연구소 앞 중국집에서 탕짜면을 먹으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노출된 여자들이 그 효과에 중독된다는 인간 최음제의 체액을 불법으로 채취해 누가 어디에 쓰려는 걸까? 오만가지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자 앞에 앉은 현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선배 생각도 그렇죠?”

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범죄잖아요.”

초원은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냥 팀장님 손에 요단강 건너게 둘걸⋯.”

“그건 팀장님한테 못 할 짓이죠. 그냥 아까 내가 쏴 버릴걸⋯.”

“그건 홍 주임 본인한테 못 할 짓 아니에요?”

그녀는 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둘 순 없잖아요. 뭐라도 해야지.”

“배후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데⋯. 연구소 선이면 내부감찰반에 진정서라도 넣어 볼 텐데⋯.”

“근데 본청도 한통속이면요? 믿을 놈 없는 곳인데.”

“그럼 일단 팀장님한테라도 말해 보죠. 우리보단 내부 사정 잘 아시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보다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실부터 가요.”

초원은 3팀 사무실로 들어오며 현우의 등을 팀장실 쪽으로 밀었다.

“어, 손님 있으신가 본데?”

반투명 유리 너머로 두 개의 실루엣이 움직였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자리로 돌아왔다.

“아, 홍차 주임 왔어? 팀장님이 찾으시던데?”

“왜요?”

“나야 모르지.”

“지금 손님 있으시던데⋯.”

“어, 실장님. 근데 오면 바로 팀장실로 오라고 하셨어.”

실장님이 여기까지 무슨 행차시지?

둘은 꺼림직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팀장실로 향했다.

똑똑.

“네.”

문을 열자 4인용 테이블에 팀장과 실장이 앉아 있었다.

“어, 차현우 주임! 홍 주임도 어서 들어와요.”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어 앉은 실장이 웃으며 손짓했다. 정자세로 앉은 팀장의 얼굴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감이 안 좋았다.

두 사람은 머뭇머뭇 테이블로 다가가 앉았다.

“요즘 어때요? 일은 할 만하고?”

“네.”

현우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홍 주임은 저번에 물에 빠지지 않았나? 몸은 괜찮고?”

실장의 느닷없는 말에 현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초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 진짜.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네, 괜찮습니다.”

“음, 그래. 두 사람이 우리 청을 위해 헌신을 다해 준 덕분에 내가 발 뻗고 잘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응? 뭐, 우리 조승준 팀장이 다 지도 잘한 덕이겠지만⋯.”

“감사합니다.”

얼떨떨하게 굳어 있는 두 요원을 대신해 팀장이 감사 인사를 했다.

“두 사람 일 많아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어요. 오늘은 일산 연구소까지 갔다 왔다면서?”

그렇구나. 본청도 한통속이구나.

초원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별일 없었고?”

“아뇨. 개체는 문제없이 인계했습니다.”

초원은 모르는 척 딴소리를 했다.

“음⋯, 연구소 안에선 별일 없었고?”

“아, 4245번 개체를 마주치긴 했는데 별문제 없었습니다.”

분명 알고 찾아온 걸 텐데 못 봤다고 하면 더 곤란해지겠지. 그래서 초원은 일부러 선수를 쳤다. 그 말을 들은 팀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팀장님은 실장이 왜 왔는지 모르시는구나.’

“무슨⋯.”

“그 사람이 뭐라던가요?”

팀장이 한마디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실장이 본론을 드러냈다.

“음, 그냥 죽고 싶다고 하던데요, 하하.”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웃자 옆에서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 딴소린 안 하고?”

“계속 횡설수설하면서 죽고 싶단 말만 했어요. 그쵸?”

“네. 홍 주임이 총을 들고 있었는데 계속 죽여 달라고 그러더라고요. 아, 물론 저희는 안 쐈고요. 혹시 그 개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저흰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현우가 능청스레 연기를 하며 실장에게 되물었다.

“아니, 별일 없는데 그놈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다음에 또 마주치면 바로 경비대원을 부르세요.”

실장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럼 난 가 봐야겠네. 나도 참 바쁜 사람들 붙잡고 쓸데없는 한담이나 하고⋯.”

실장이 끄응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도 주춤주춤 따라 일어서서 배웅하려는데, 실장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현우의 어깨를 붙들었다.

“내가 조언 하나 하자면, 청 생활 오래 하려면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게 좋아요. 뭐, 잘 알겠지만.”

그래서 두 사람은 알아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차 주임 아버님은 안녕하시고? 요즘 바쁘신지 골프 치러 잘 안 나오시던데? 차 실장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응?”

그렇게 실장은 현우의 빽이자 약점까지 친절히 짚어 주고 사라졌다.

“무슨 일이죠?”

실장이 멀리 사라지는 걸 확인한 팀장이 문을 닫자마자 물었다. 두 요원이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책상으로 향했다.

“두 사람, 앉아요.”

진상을 들은 팀장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 한참 말이 없었다.

“팀장님⋯.”

초원이 불러도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른세수를 했다.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지 않나요?”

“나도 압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우리 선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 퉁명스러운 소리에 초원은 맥이 탁 풀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라면 무슨 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어떤 어려운 일이 팀에 닥쳐도 포기를 모르는 사람. 플랜 A, 플랜 B는 물론 플랜 Z까지 있지만 플랜 C까지 가기도 전에 목표를 완수해 내는 사람. 초원에게 조승준 팀장은 그런 대단한 사람인데 순순히 포기해 버릴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팀장님은 늘 방법이 있으셨잖아요.”

한 번 더 매달려 보았다. 방법을 좀 고민해 보시라고 한 말이었는데 팀장은 눈을 깜빡깜빡하며 초원을 응시하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나온 말은 초원이 기다리던 소리가 아니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한데, 홍 주임. 이번에는 나도 방법이 없습니다. 바쁘니까 나가서 일 보세요.”

귀찮다는 듯 팀장은 손까지 내젓더니 책상 구석에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 알 바 아니라는 듯한 무신경한 태도,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듯한 이기적인 태도. 초원이 우러러보던 그 올곧은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옆에 앉은 현우가 그만하고 나가자는 듯 눈치를 줬지만 초원은 버텼다.

“그게 다인가요? 우린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무고한 사람들이 당하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자고요? 이건 다른 일도 아니고 범죄잖아요.”

“홍 주임, 실장님이 직접 여기까지 찾아와서 입막음을 한 거 보면 감이 오지 않습니까? 이건 그냥 몇몇 말단 연구원들이 비위를 저지르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팀장은 대답도 하지 않고 핸드폰만 바쁘게 만지고 있었다. 그 무성의한 태도에 초원은 실망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꼈다.

“팀장님, 어떻게 아무렇지 않으실 수가 있으세요? 그러고 밤에 두 다리 뻗고 주무실 수 있으세요? 저는 아니거든요.”

“아, 홍 주임⋯.”

점점 격해지는 초원을 현우가 말렸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홍 주임이 원래는 안 이러는데⋯.”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자고 팔을 잡아끌었지만 초원은 요지부동이었다. 도리어 팀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하극상을 벌이고 있는 초원이 아니라 제게 꽂히자 현우는 슬며시 팔을 놓았다. 그제야 팀장은 눈빛을 거두고 다시 핸드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홍 주임은 대체 뭘 하겠다는 겁니까? 실장을 찾아가서 그건 나쁜 일이라고 훈계라도 할 겁니까? 아니면 개체를 빼돌리기라도⋯.”

내내 핸드폰만 보며 중얼거리던 팀장이 불쑥 고개를 들더니 사나운 눈빛을 초원에게 향했다.

“홍 주임, 그 개체한테 가까이 갈 생각 마세요.”

낮디낮은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초원은 조금도 기를 꺾지 않았다.

“어째서요? 그게 낫지 않나요. 양심을 저버리는 것보단.”

“그런 짓 안 하겠다고 지금 당장 약속해요.”

“못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홍 주임은 연구소 출입 금지합니다.”

팀장은 빈말이 아닌지 핸드폰을 놓고 마우스를 잡았다. 당장 초원의 연구소 출입 자격을 정지시키려는 모양이었다.

“네? 왜 그렇게까지⋯. 못 도와주실 거면 방해는 하지 마셔야죠. 범죄를 막겠다는 사람을 막는 건 팀장님도 한패가 되시겠다는 거잖아요.”

“홍 주임, 제발.”

현우는 난감해 미칠 것 같았다. 청에 다닌 몇 년 동안 누가 팀장에게 대드는 건 본 적도 없으며, 눈치 빠르고 영리한 초원이 이러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비난의 눈빛을 마주 응시하는 팀장의 눈은 예상과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시선을 뗀 그가 다시 초원의 눈을 마주했을 때는 예상대로 팀장다운 눈빛이었다. 사나운 맹수의 눈빛.

“홍초원 주임, 잘 들으세요. 그동안 내가 홍 주임 너무 오냐오냐했더니 내가 상사란 걸 잊은 모양인데, 잘리고 싶지 않으면 쓸데없는 짓 할 생각 말고, 그놈한테 가까이 가지도 말고, 나가서 조용히 홍 주임 할 일이나 하세요.”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책상에 손가락을 짚어 가며 소리쳤다. 하나라도 어길 생각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초원은 눈물이 핑 돌아 고개를 숙였다. 입술까지 깨물어가며 애써 참다 고개를 들었더니 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저보고 윗사람들 범죄의 밑거름이 될 일이나 얌전히 하라는 거네요.”

초원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겁 없이 조르고 따지던 기세를 잃고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저는 못 하겠으니 그냥 자르세요.”

초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

“매운 거 먹고 기분 풀어요.”

현우는 초원의 접시에 닭갈비를 잔뜩 떠 주었다.

“이게 내 기분이 걸린 문젠가요?”

초원은 소주잔을 다시 채우자마자 비웠다.

“빈속에 자꾸 그렇게 마시면 안 좋은데⋯.”

“아까 그냥 쏠 걸⋯. 왜 말렸어요?”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걸 잘 아는 현우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샐러드만 뒤적였다.

“내일 미친 척하고 그냥 가서 쏴버릴까요? 어차피 내일 연구소에 김순자 씨 면담하러 가야 하잖아요.”

내일 두 사람이 면담할 개체는 1960년대에 실종됐다가 얼마 전 실종 당시 모습 그대로 서울역 플랫폼에서 발견된 20대 여자였다.

“에이, 못 할 거 다 아는데⋯.”

답답한 마음에 말은 저렇게 해도 의사가 꿈이었던 초원이 생명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건 현우도 잘 알았다.

“그리고 이미 우린 접근도 못 하게 손 써놨겠죠.”

“하긴⋯.”

개체를 빼돌리고 싶어도 주무관급만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초원은 한숨을 쉬며 소주잔을 다시 채웠다.

“진짜 관두고 싶다. 관둔다고 이게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진짜 관두고 싶네요.”

“초원 씨 관두면 작두 타야 하잖아.”

초원이 늘 하는 ‘관두면 작두 타야 한다.’는 말이 현우의 입에서 나오다니. 초원은 저도 모르게 풋, 웃음이 나왔다.

“근데 평소엔 팀장님 눈치 잘 보더니 오늘은 왜 그랬어요? 내가 다 조마조마하더라. 팀장님이 진짜 자를까 봐.”

“자르든지 말든지.”

“사실 팀장님 잘못도 아니잖아요.”

“나도 알아요. 팀장님이 신도 아니고 윗사람 눈치 봐야 하는 입장인 거. 나도 이해는 하는데 답답해서⋯. 내가 여기서 기댈 데라곤 팀장님밖에 없는데⋯.”

“중간 관리자는 참 힘든 자리예요.”

초원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팀장님한테 가서 죄송하다고 해요.”

“흠, 기회 되면 그럴게요.”

“그나저나⋯.”

현우가 소주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웃었다.

“팀장님이 드디어 본인 입으로 초원 씨 오냐오냐했다고 인정하셨네, 하하.”

“뭐야⋯. 그냥 하는 말이죠.”

“초원 씨도 팀장님 되게 편하게 대하잖아요.”

“무슨 소리야⋯. 아니거든요? 불편한데 편한 척하는 거거든요.”

“요즘 팀장님이랑 초원 씨 보면 엄마 고양이랑 아기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아요.”

“선배, 고작 한 잔 먹고 취했어요?”

“왜? 누가 초원 씨 건드릴 때마다 팀장님이 ‘내 새끼 누가 건드렸어!’하고 쫓아가서 패 주잖아요.”

“내가 고양이인 건 그럴듯한데 팀장님은 누가 봐도 범 아닌가요?”

“범도 고양잇과 아닌가?”

초원은 말없이 동치미 그릇만 저었다.

“하, 나도 모르겠네요⋯.”

“응? 초원 씨 이과잖아.”

“아니, 그게 아니고⋯. 팀장님이 왜 나한테 잘해 주는지, 나는 또 왜 거기 기대고 있는지⋯.”

“난 팀장님 마음 알 것 같은데.”

네, 나도 알아요. 팀장님이 나 좋아하는 거.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답인데 왜 물었을까? 취했나 보다. 초원은 현우의 쓸데없이 의미심장한 말을 막으려 술잔을 들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일을 남의 입, 그것도 현우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아, 시끄럽고 그냥 마셔요.”

“들어가서 괜히 이런저런 생각 말고 푹 자요.”

“알았어요.”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면 무슨 수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과연 그럴까 싶었지만 초원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 그리고 내일 팀장님한테 꼭 죄송하다고 해요. 알겠죠?”

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더니 현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해요. 꼭 내일 사과한다고.”

“새끼손가락 건다고 무슨 구속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면서.”

“이게 얼마나 신성한 건데.”

초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팔짱을 끼고 몸을 흔들고 있는데, 그가 오른손을 잡아당겨 억지로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꼭 해요. 안 하면 내가 내일 팀장실로 밀어 넣고 못 나오게 할 거야.”

초원은 눈을 흘기곤 걸고 있던 손가락을 뺐다.

“알았어요. 얼른 가요. 이러다 여기서 밤새우겠네.”

현우의 팔뚝을 붙들고 가란 듯 밀자 그제야 그가 발걸음을 뗐다. 초원은 손을 흔들어 주고 원룸 건물 입구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비밀번호를 누르며 생각했다. 오늘 씻지 말고 잘까? 귀찮고 졸린데. 아냐, 적어도 화장은 지워야지. 아, 그것도 귀찮⋯.

“홍 주임.”

“헉!”

입구 옆 주차장에서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나예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남자가 초원의 손을 덥석 붙들더니 어두컴컴한 주차장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초원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따라갔다.

“이거 받아요.”

남자가 신문 한 부를 내밀었다. 이건 뭘까? 설마 신문 주려고 여기까지 와서 기다린 건 아닐 테고.

“집에 가서 펼쳐 봐요. 안에 보안 2등급용 출입 카드랑 연구소 지하 2, 3층 도면을 끼워 놨어요.”

“팀장님⋯.”

“내 말 잘 들어요. 두 번 설명 안 할 거니까. 내일 낮 12시 22분에 시스템 오류로 지하 2, 3층 CCTV가 전부 17분간 꺼질 겁니다. 내일 홍 주임이 면담할 개체는 지하 2층에 있고 4245번 개체와 145번 물체는 지하 3층에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알죠?”

‘헉,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지?’

초원은 그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팀장님이구나.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마저 핑 돌았다.

“홍 주임은 면담실에 있고 차 주임한테 시키세요. 12시 39분 전까진 끝내고 돌아와야 합니다. 도면은 연구소 가기 전에 소각하고 카드는 다 끝나면 바로 폐기하세요. 지문 안 남기게 조심하고.”

“네.”

“미안해요. 원래는 홍 주임이랑 차 주임 손은 안 빌리고 해결하려 했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아, 아니에요. 왜 미안해하세요. 제가 오히려⋯.”

정말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팀장은 이미 다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조르고 따졌다. 한패 같은 잔인한 소리나 하고 말이다. 이 남자는 그런 초원을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이런 일 시켜서 미안하다고 하다니.

“그리고 안 들키는 게 최선이겠지만, 혹시 들키면 내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하세요.”

“네?”

엄밀히 말해 이 작전을 우긴 건 초원이었다. 그런데 혼자 다 뒤집어쓰겠다고?

‘그러면 청에서 팀장님 가만 안 둘 텐데. 잘리기만 하면 다행이지. 팀장님 커리어도, 인생도 끝일 텐데.’

“홍 주임, 내 말 들었어요?”

초원은 그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며 재빨리 속삭였다.

“그러면 팀장님이 다 뒤집어쓰시는 거잖아요. 위에서 가만 안 있을 텐데, 어쩌시려고요?”

팀장은 잠시 초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좀처럼 웃는 일이 없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초원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초원 씨가 밤에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테니까.”

초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또다시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지만 조금 전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지금 날 위해 희생하겠다는 건가?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대신⋯.”

팀장이 두 손으로 초원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더니 눈을 들여다보며 신신당부했다.

“나랑 약속해요. 홍 주임은 절대 가까이 가지 않겠다고. 차 주임이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혼자 보내세요. 알겠⋯.”

그의 입술은 꿈속에서만큼 부드럽고 따뜻했다.

‘흐음, 면도하셔야겠네⋯.’

양손에 닿는 피부가 약간 까끌했다.

그제야 초원은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팀장에게 입을 맞췄다는걸. 그리고 팀장은 전혀 반응이 없다는 것도.

초원은 천천히 입술을 떼고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구나⋯.’

팀장님, 나 좋아하시는 거 아니구나.

술이 확 깼다. 이제는 술기운이 아니라 망신살이 뻗쳐 얼굴이 활활 타올랐다. 초원은 죄지은 사람처럼 떨어질 말을 기다리며 그의 미동조차 없는 발끝만 내려다봤다.

“홍 주임, 취했네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죄송합니다.”

팀장이 초원의 어깨를 건물 입구 쪽으로 밀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우물쭈물 안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구두를 벗어 던지고 침대로 다이빙했다.

‘아아아악! 홍초원, 진짜 미쳤니? 아니 여기가 할리우드인 줄 알아? 꿈에서 하던 버릇이 툭 튀어나오고!’

이젠 죄 없는 베개를 끌어안고 마구 때렸다.

‘그래, 이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야. 금주해야지. 팀장님도 취했다고 그랬잖아. 하, 얼마나 술 냄새 났으면⋯.’

초원은 또 죄 없는 술 탓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다 보니 침대 위로 널브러진 신문이 보였다. 집어 들자 안에서 흰 플라스틱 카드와 도면 두 장이 떨어졌다. 도면에는 각 지점과 경로는 물론 거리까지 빨간 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팀장님한테 그렇게 대들었으니. 아 진짜, 이 바보야.’

팀장에게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 이렇게 좋으신 분인데 혼자서 온갖 오해를 하고, 게다가 부하 직원 챙기는 걸 저한테 딴마음 품은 거로 착각했으니.

‘으아, 진짜 내일 무슨 낯으로 팀장님을 보지? 헉, 설마 성추행으로 징계받는 건 아니겠지? 팀장님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데⋯. 제대로 사과하러 가야겠지?’

초원은 천장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몸을 일으켰다. 짐을 챙기고는 겨우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었다.

***

승준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잠이 들길 기다렸다. 분명 수면제를 먹은 지 30분도 넘었는데 어째선지 아직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차현우 씨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골목길 초입에서 사이좋게 웃으며 손가락을 걸던 두 사람을 떠올린 그는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지우려는 듯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그래도 아까 차 주임한텐 안 하던데⋯.’

‘취해서 그랬나?’

‘고마워서 그랬나 보지.’

‘근데 초원 씨는 고마우면 아무한테나 그러나?’

‘혹시, 초원 씨가 날⋯.’

‘설마⋯.’

‘그래도 키스하기 거북할 정도는 아닌가 보네.’

‘취한 것만 아니었어도 끌어안고 안 놔주고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홍 주임, 취했네요.’가 뭐냐. 좀 다정하게 말할 것이지⋯.’

승준은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일은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을 테니 멀쩡한 정신으로 출근해야 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자겠다는 결심은 5초도 채 못 갔다. 다시 한숨을 쉬었다. 잠깐 닿은 것뿐인데 입술이 아직도 얼얼했다. 그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을 이대로 평생 자신의 입술에 새길 방법이 있었으면 했다.

이젠 저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뭐가 됐든 기분은 좋았다. 부끄러워하던 것도 귀엽기 그지없었다.

‘무리한 보람이 있네.’

그 찰나의 키스를 곱씹어 보고 또 곱씹어 보던 그는 곁눈질로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다. 이젠 정말로 자야 했다. 승준은 천천히 심호흡을 시작했다. 약 기운이 드는지 서서히 몸이 둥둥 뜨는 기분이 들면서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띵동.

미간을 찌푸렸다. 막 잠이 들려는 찰나에 울린 초인종 소리가 반가울 리 없었다.

‘이 새벽에 누구야? 잘못 눌렀나?’

잘못 들었거나 잘못 눌렀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띵동.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킨 그는 잠옷 바지만 입은 채로 복층 아파트 계단을 내려갔다. 분명 옆집 사람이 술 취해서 잘못 누른 걸 텐데 고작 몇 마디 하자고 티셔츠를 꺼내 입긴 귀찮았다.

하지만 현관문 렌즈 너머로 보이는 건 옆집 사람이 아니었다. 승준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문을 열었다.

“팀장님⋯.”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그게 아니라⋯.”

그의 벗은 상체가 눈에 들어온 듯, 초원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들어와요.”

승준은 문을 활짝 열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현관으로 들어온 초원이 긴장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아침까지 기다릴 순 없었습니까?”

“그게⋯.”

핸드백 어깨끈을 그러쥔 손이 더욱 오므라들었다. 초원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걸 본 승준은 아차 싶었다. 좀 다정하게 말하자고 다짐해 놓곤 항상 이런 식이다.

“앉아서 얘기할래요?”

한층 부드러워진 톤으로 물으며 거실 소파를 가리켰다.

“아뇨, 죄송합니다. 제가 또 실수했네요. 가 보겠습니다.”

초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슨 실수? 아까 그거 그냥 실수였나?”

가녀린 손목을 잡아채 돌렸다. 한 발짝 다가서자 초원이 한 발짝 물러섰다. 승준이 한 발짝 더 다가섰지만 더는 갈 곳이 없는 그녀는 현관문에 등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초원 씨, 아까 왜 그랬어요? 말해 봐요.”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닌데. 왜 그랬어요?”

“저는⋯ 팀장님이 잘해 주셔서⋯ 저한테 관심 있으신 줄 알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던 초원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죄송합니다. 저 혼자 착각해서⋯.”

승준은 초원의 뺨을 감싸고 눈물 자국을 입술로 더듬었다. 입술을 떼고 들여다본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착각 아닌데? 내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 초원 씨 둔하네.”

닿을락 말락 초원의 입술에 대고 속삭이다 코끝이 스쳤다. 그녀의 얼굴은 숨이 멎을 정도로 보드라웠다.

코끝으로 뺨을 간질이다가 입술을 부드럽게 포개었다. 그 파르르 떨리는 작은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혀끝으로 느끼는 초원은 뜨겁고 촉촉하고 달콤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그 감각의 포화에 숨이 가빠져 혀를 뒤로 빼는 순간 초원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그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의 숨결을 섞다 승준이 먼저 입술을 뗐다. 몽롱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초원의 입술이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밤길 위험하니까 나랑 자고 가요.”

초원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이끌었다. 툭 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두 사람의 옷가지가 현관부터 2층까지 궤적을 남겼다.

초원을 침대에 눕히고 위로 몸을 겹쳤다. 이제 둘 사이에는 얇디얇은 속옷 몇 장이 전부였다.

벌써 아래가 잔뜩 성나 있었다. 맞닿은 속옷 너머로 그녀도 느낀 듯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다.

승준은 거칠게 입술을 집어삼켰다. 평소의 자제력은 옷과 함께 벗어 던졌다. 오늘 밤 조승준은 홍 주임의 팀장이 아니라 초원의 남자였다.

곧바로 입술을 내려 목덜미와 쇄골을 탐하던 그는 초원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브라 후크를 당겼다. 툭, 후크가 풀리는 소리에 그의 가슴 아래 눌려 있던 그녀의 상체가 크게 들썩였다. 목을 휘감고 있던 가는 팔을 잡아 든 승준은 흰 레이스 브라를 거침없이 벗기고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가슴을 가리려 내려오는 손을 낚아채 머리맡으로 올리고 한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부끄러운 건지 초원이 곤란한 얼굴로 몸을 꿈틀댔다.

‘귀여워 미치겠네.’

다정하게 입술을 맞춰가며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어 가는 그녀를 달랬다. 손 하나가 초원의 팔 안쪽 여린 곳을 더듬자 몸이 움찔거리더니 옅은 신음이 포개어진 입속으로 퍼졌다.

그제야 승준은 입술을 떼고 초원의 젖가슴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봉긋하게 솟은 뽀얀 가슴 위로 붉은 꽃망울이 떨리고 있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그의 강렬한 눈길에 긴장한 듯 초원이 숨을 몰아쉬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승준은 입술을 벌려 도톰히 솟아오른 꽃망울을 집어삼켰다. 입술 끝에 매달린 몸이 비틀리기 시작하자 그는 손목을 더 단단히 틀어쥐었다.

“하아, 으음⋯.”

손가락 끝이 다른 꽃망울을 희롱하자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아, 하아⋯. 팀장님, 흣⋯.”

탐스러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가득 채우는 그 말캉한 감촉에 승준의 등줄기로 전율이 흘렀다.

“하아⋯.”

가슴을 어루만지던 그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초원의 살결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했다.

‘안쪽은 또 얼마나 부드러울까?’

손목을 쥐었던 손을 풀고 입을 서서히 아래로 가져갔다. 배꼽 주위로 키스를 퍼붓던 승준은 속옷 위로 초원의 골반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살짝 물기 어린 눈망울이 기대감으로 들떠있었다.

승준은 씨익 웃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비칠 듯 말 듯한 얇은 천 위로 입술을 맞추자 진한 코코넛 향기도 감추지 못한 흥분의 체취가 잔뜩 흥분한 그의 분신을 자극했다. 둔덕에 코를 묻는 순간, 초원이 움찔하며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밀었다.

“아, 팀장님⋯. 저기⋯.”

“왜?”

승준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돌기가 파묻힌 곳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입술을 달싹이던 초원이 스르르 손을 거두더니 얼굴을 가렸다.

“벌써 잔뜩 젖었네⋯.”

손가락 하나를 물기 어린 천 조각 위로 휙 스치면서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초원이 몸을 꼬더니 다리를 오므렸다.

승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옷을 망설임 없이 아래로 끌어 내렸다. 초원이 부끄러워하며 무릎을 세우는 바람에 오히려 벗기기 쉬워진 꼴이 됐다.

그도 몸에 걸치고 있던 마지막 천 쪼가리를 벗어 던지고 초원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여전히 다리를 굳게 오므리고 있었다.

무릎을 가만히 쓰다듬다가 물었다.

“부끄러워요?”

초원이 팔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뺨이 흥분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귀여워.”

승준은 그녀의 굳게 닫힌 무릎에 다정하게 쪽쪽 입을 맞췄다. 다리의 긴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스르르 벌어지는 허벅지 사이로 뜨거운 키스를 퍼부으며 점점 위로 올라갔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둔덕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승준은 침을 삼키며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초원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한 그는 촉촉하게 이슬이 맺힌 꽃잎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초원 씨는 안 예쁜 데가 없네.”

꽃잎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자 여전히 눈을 가린 초원이 부풀어 오른 입술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혀로 조심스럽게 젖은 살을 가르자 단단한 살점이 혀끝에 닿았다. 순간 그녀의 몸이 다시 튀어 올랐다.

“앗!”

비틀리는 엉덩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혀끝으로 살점을 간지럽히다 혓바닥으로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승준의 양손에 붙들린 엉덩이가 사정없이 움찔거렸다. 그는 한 손을 풀고 검지로 꽃잎을 훑다가 한껏 젖은 입구를 더듬었다. 아직 손가락을 넣지도 않았는데 안쪽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검지가 미끄러지듯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보드라운 살들이 손가락에 착 달라붙었다. 승준은 그 아찔한 감각에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꼬물거리며 손가락을 조이는 살을 비집고 가장 민감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검지를 두 마디 정도 집어넣고 손끝을 살살 돌리자 속살이 훨씬 강하게 조여들었다.

목표물을 찾은 그는 다시 초원의 둔덕에 입술을 파묻었다.

“흐음⋯. 하아, 아아⋯.”

한 손은 위로 뻗어 말캉한 젖가슴을 주무르고 다른 손은 속살을 재빠르게 헤집었다. 돌기를 굴리는 혀도 점점 빨라졌다.

“아앗!”

벼락이라도 맞은 듯 초원의 허리가 뒤로 젖혀지더니 엉덩이가 위로 불쑥 들렸다. 손가락을 꽉 조여대던 속살이 바르르 떨더니 리듬을 잃고 마구 움찔대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초원은 지친 듯 엉덩이를 침대 위로 풀썩 떨어트렸다.

승준은 여전히 깊숙한 곳에 손가락을 묻은 채로 그 붉게 부푼 입술에 격렬히 키스를 퍼부었다.

긴 시간, 끓어오르는 격정을 애써 삭이며 멀리서만 지켜보던 여자에게 제 손으로 절정을 선사했다는 희열이 온몸을 감돌았다.

초원의 깊은 곳은 여전히 박동하고 있었다. 승준은 눈을 가린 팔을 치우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초원은 주저하며 입술을 달싹이더니 들릴락 말락 속삭였다.

“⋯팀장님 원하시는 대로 해 주세요.”

“내가 원하는 건 초원 씨를 내 여자로 만드는 건데.”

그런 승준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원하는 대답을 들은 승준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몸을 일으켰다. 단단하게 솟은 분신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벌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초원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몸을 숙여 페니스의 끄트머리로 촉촉이 젖은 꽃잎을 훑어 내리자 그녀의 엉덩이가 움찔했다. 끄트머리를 입구에 댄 그는 몸을 숙여 흥분에 젖은 작은 몸을 감쌌다. 부서질 정도로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초원에게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한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했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두 다리가 그의 허리에 감겼다.

승준은 심호흡을 하고 초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하체를 서서히 앞으로 밀었다.

“아!”

초원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젖혔다.

“아파요?”

젖어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처음이라 그래요.”

수줍게 속삭이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예뻐서 미치겠네.”

승준은 천천히 초원의 뜨거운 몸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 짜릿한 마찰이 페니스를 덮치자 입술 사이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겨우 끝까지 밀어 넣고 초원의 반응을 살피는데 페니스를 감싼 그녀의 속살이 꿈틀거렸다.

“괜찮아요?”

초원이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뻐, 정말.”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속삭였다.

“다른 남자한텐 이렇게 웃어 주지 마요.”

진담인데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초원이 작게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분신을 붙들고 있던 속살이 강하게 조여들었다.

“미치겠네.”

승준은 자제력을 놓고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으며 허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 아아⋯.”

그녀의 다리가 승준의 허리를 강하게 조여 오기 시작했다. 손이라도 달린 듯 초원의 속살이 페니스를 꼭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땀에 젖은 그의 가슴 아래로 그녀의 부드러운 젖가슴이 미끄러지듯 스쳤다. 그 황홀한 감각에 승준의 아랫배 깊은 곳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감기는 그녀의 두 팔을 느끼며 승준은 허리를 더 빠르게 놀렸다. 안쪽의 예민한 곳이 어디쯤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허리를 조금 세웠다.

“아앗!”

속살이 분신을 꽉 붙든 채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승준은 몰려오는 절정의 해일을 온몸으로 막으며 좁디좁은 틈을 비집고 파고들었다. 격렬한 감각을 참을 수 없었는지 초원의 두 손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흣⋯. 팀장님⋯.”

절정에 취해 자신을 부르며 가늘게 떠는 초원의 목소리에 승준은 영혼을 팔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그녀와 드디어 하나가 됐다.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초원이 원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승준은 자제력을 잃고 마구 파고들다 그녀의 몸속 깊숙이 모든 것을 쏟아 내었다.

“초원 씨⋯.”

열에 달뜬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사랑해.”

초원은 대답이 없었다.

승준은 눈을 감았다 떴다. 아랫배가 축축했다.

‘망할 수면제⋯.’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약을 끊을 수도 없고⋯. 꿈 주제에 쓸데없이 생생해서는⋯.’

샤워 부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승준은 가만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얼음장 같은 물줄기 아래에서 몸이 차게 식어 갔지만 심장만은 뜨겁게 박동하고 있었다.

‘고작 꿈이 이렇게 생생할 리가⋯.’

오랫동안 잠재의식 속에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서서히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은은한 달빛 속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초원의 앳된 얼굴이 떠올랐다.

‘팀장님이랑 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그다음 말을 기억해 낸 그는 웃었다.

“초원 씨⋯.”

차가운 벽에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이성의 경고에도 초원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고 아려오던 그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사랑해.”

그 키스의 의미가 무엇이었든, 그저 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하던 때는 끝났다.

***

“팀장님 대단하시다. 대체 이걸 어떻게⋯.”

자초지종을 들은 현우가 도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요.”

“머리가 보통 좋으신 게 아닌 건 알았지만 이건 진짜 천잰데요. 우리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윤리적인 방법으로⋯.”

초원은 피식 웃었다. 팀장을 두고 감탄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딴 사람 같았다.

“선배, 언제부터 팀장님 팬이었어요?”

“어? 오늘부터, 하하.”

“혼 한 번 나고 나면 바로 탈덕할 거면서.”

현우가 여전히 도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큭큭 웃었다.

“그나저나 CCTV는 어떻게 끄게 만드시는 거지?”

“그러게요. 본인이 직접 하실 리는 없고 대체 인맥이 얼마나 되길래.”

“그리고 세상은 기브앤테이큰데, 대체 무슨 대가를 치르셨을지 상상도 안 되네요.”

듣고 보니 그랬다. 무슨 희생을 치렀을까?

“그러게요. 난 그것도 모르고⋯.”

초원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팀장님한테 죄송하단 말은 했어요?”

초원은 뻔뻔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홍 주임, 취했네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죄송합니다.’

하긴 했지. 대들어서 죄송하단 의미는 아니었지만. 겨우 잊고 있었는데. 이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또 한숨을 쉰 초원은 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배, 할 수 있죠?”

신이 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현우를 보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영 불안한데⋯. 나도 따라가야 할 것 같은데⋯.”

“팀장님이 나한테 시키셨다면서요? 점수 딸 좋은 기횐데 그걸 홍 주임이 홀랑 먹으려고?”

초원이 눈을 흘기자 현우는 배시시 웃었다.

“팀장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가 되잖아요. 나도 홍 주임이 그냥 면담실에 있는 편이 안심되고⋯. 솔직히 이 일에 둘씩이나 필요도 없고⋯.”

초원이 생각해도 맞는 말이었다.

“격리 반경 안으로 가지 마요. 알겠죠?”

현우는 도면을 넘기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격리 반경 얼마죠?”

현우가 못 미더웠던 초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2미터.”

“안 되겠다. 내가 가야겠네.”

출입 카드를 빼앗으려고 손을 뻗자 현우가 냉큼 카드를 집어 들었다.

“아니, 3미터지. 나도 아는데 그냥 놀리려고⋯.”

초원은 어이가 없었다. 이 심각한 상황에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히죽히죽 웃고 있다니.

“선배, 왜 이렇게 신났어요?”

“재밌지 않아요? 뭔가 첩보 영화 찍는 것 같고, 스파이 느낌 나고⋯.”

머리가 띵했다. 여기에 달린 인생이 몇이나 되는데, 좀 진지하게 임하면 안 되나?

“진짜 걱정된다, 선배⋯.”

현우가 또 생긋 웃었다.

“걱정 마요. 이렇게 규정 어기고 사고 치는 거야말로 내 전공이잖아요.”

“그래서 팀장님한테 맨날 혼나잖아요.”

“이번엔 팀장님이 친히 판까지 깔아 주셨잖아요. 잘할 수 있다니까.”

“근데 혹시 그러다가 들키면⋯.”

‘혹시 들키면 내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하세요.’

초원은 결심했다. 팀장이 그녀를 지키겠다면 초원도 그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빽 있는 사람을 대신 파는 일.

“선배 아버님 힘 좀 있으시다고 그랬죠?”

현우가 피식 웃더니 도면을 접어 테이블에 올렸다.

“걱정 마요. 별일 없겠지만 들켜도 검사 출신 법무부 차모 실장의 철없는 둘째 아들이 사고 친 거로 하면 되니까.”

초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어이쿠, 뭐 이 정도야.”

현우에게 미안하고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씁쓸했다. 누구는 커리어 전체를 걸어야 하고 누구는 아빠한테 한 소리 듣는 정도라니.

‘또 모르지 뭐. 그냥 선배 특유의 낙천성일지도⋯.’

***

“후우⋯.”

초원은 1에서 B1으로 바뀌는 엘리베이터 디스플레이를 보며 심호흡을 했다. 현우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생글생글 웃었다.

“홍 주임, 내 수능 날 우리 엄마 보는 것 같아. 시험은 내가 치는데 긴장은 엄마가 다 하더라고⋯.”

초원은 눈곱만큼도 긴장한 기색이 없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선배 어머님도 선배가 못 미더우셨나 보죠.”

“와, 진짜 정곡을 찌르다 못해 후벼 파네.”

현우가 아픈 척 가슴을 문지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초원은 저도 모르게 엄마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시계 정확하게 맞췄죠?”

“응, 당연하죠.”

지하 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간 둘은 오른쪽으로 돌아 격리2팀 사무실로 향했다.

“4287번 김순자 씨 면담하러 왔는데요.”

멍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던 30대 남자가 두 관리 요원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11시 면담인데 지금 11시 40분 다 됐는데?”

초원은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죄송해요. 길이 많이 막혀서⋯.”

거짓말이었다. 12시 22분에 맞추기 위해 격리팀에는 말도 없이 일부러 늑장을 부렸다. 미안한 척하며 억지로 웃으려니 안면 근육이 떨렸다. 격리팀 주임이 인상을 살짝 풀더니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곧 점심시간인데 점심 같이 먹고 하시는 건 어때요?”

“저희는 점심 나중에 먹어도 괜찮아요. 주임님 느긋하게 식사하시고 돌아오실 때까지 저희가 김순자 씨 붙잡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이게 통했는지 남자는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근데 그 여자 입 안 열 텐데?”

“그러게요. 저도 아는데, 그래도 굳이 면담을 해야 한다네요.”

초원은 일부러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정 그러시다면 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은 격리팀 주임을 따라 4287번 개체가 있는 격리실로 갔다. 가는 길에 비상계단 입구를 지나쳤다. 곧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초원은 입이 마르기 시작했다.

격리실 문을 열고 각종 장비와 책상이 들어찬 관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에는 무릎 아래로 오는 연노랑 원피스를 입은 20대 여자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여자는 세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더니 겁을 먹은 듯 침대 구석으로 몸을 옮겨 웅크려 앉았다.

“면담 여기서 하실래요?”

“네. 혹시 공격성은⋯.”

“아직까지 공격적인 행동은 한 적 없는데, 또 모르니까 조심하시고요. 무슨 일 있으면 알죠?”

남자가 벽에 붙어 있는 비상 버튼을 가리켰다.

“그럼 면담 잘하시고 저는 1시에 올게요.”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남자가 문을 닫고 나가자 둘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직 CCTV가 작동하고 있으니 수상한 행동을 할 순 없었다.

평소처럼 면담을 시작했다. 현우가 벽에 세워져 있던 의자 두 개를 끌고 와 침대 발치에 놓았다. 초원은 핸드폰을 꺼내 녹음 앱을 열었다.

현재 시각은 11시 50분이었다. 10분만 있으면 연구실 인원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1층 구내식당이나 연구소 밖으로 흩어질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예산 부족으로 지하 4층 치명 등급 격리소를 제외하곤 격리부대나 경비 인력이 상주하지 않았다.

“그럼 시작할까요?”

초원의 말에 현우가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원은 핸드폰을 무릎 위에 놓고 녹음 앱의 빨간 버튼을 눌렀다.

“김순자 님, 안녕하세요. 저는 홍초원 주무관이라고 하고 여기 남자분은 차현우 주무관입니다. 오늘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왔는데요. 잠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랑 얘기 좀 나누시겠어요?”

여자는 초원을 흘끗 보더니 다시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현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1962년에 20살의 나이로, 시골에서 올라오시는 할머니를 마중하러 서울역에 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이었다. 당시 실종 기사 하나만을 남긴 채 그렇게 50년 넘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는데 일주일 전 서울역에 실종 당시 차림 그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여자는 사람을 경계하며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여자가 보고 있는 TV에는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옛날 흑백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초원은 뇌물이 통하길 기대하며 쇼퍼 백에서 과자 상자를 꺼냈다. 외할머니가 자주 드시던 딸기 맛 샌드 과자였다.

“이거 좋아하세요? 드시라고 사 왔는데⋯.”

상자를 열어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먹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그러나?’

상자를 침대 발치에 놓고 가운데로 밀었더니 가까이 오는 걸 보고 여자가 움찔했다. 초원은 바로 물러난 다음 의자를 살짝 뒤로 빼서 앉았다.

잠시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여자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과자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띠링.

여자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아, 선배⋯.”

초원은 잔뜩 인상을 썼다. 현우가 황급히 정장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무음 모드로 바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초원은 불현듯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이제 시각은 12시 2분이었다. 20분만 더 있으면 된다. 닫힌 문 너머로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와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드세요. 드시라고 사 온 건데.”

현우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여자가 다시 상자로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이 꼭 겁을 잔뜩 집어먹은 떠돌이 강아지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두 사람은 여자가 과자를 먹으며 영화를 보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다. 경계가 조금 풀렸는지 여자가 먹으라는 듯 상자를 밀었지만, 초원은 도저히 지금 뭘 먹을 기분이 아니어서 고개를 저었다.

12시 15분. 7분 남았다. 초원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옆에서 현우가 슬며시 웃었다.

“이거 맛있죠? 전에도 자주 드셨어요?”

어쨌거나 면담은 해야 했기에 초원은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뇌물이 통했는지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에 먹던 맛이랑 똑같나요? 우리 할머니는 옛날 그 맛이 아니라고 그랬는데.”

여자가 고개를 저었지만 맛이 똑같다는 건지 다르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순자 씨 할머니도 이거 좋아하셨나요?”

현우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할머니랑 사이좋았나 봐요. 할머니 오실 때마다 서울역까지 마중 나갔어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일주일 전에는 할머니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왔네요, 그쵸?”

여자의 눈빛이 먹구름이 낀 듯 흐려지더니 고개가 살짝 아래로 처졌다.

“할머니는 괜찮으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파출소 순경 아저씨가 순자 씨 집까지 모셔다드렸어요.”

초원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실종 기사에 그런 얘기가 있었던가? 어쨌거나 여자는 조금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겠어요. 갑자기 막 눈앞에 큰 건물이 나타나더니 사람들도 막 요상한 옷을 입고 다니고 말이죠. 요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현우가 느닷없이 초원의 정장 스커트를 가리키자 그녀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아니, 내 눈에 짧다는 게 아니라 순자 씨 눈에 짧다는 거죠.”

현우가 손사래를 치며 극구 해명했다. 초원은 녹음 앱을 일시 정지시켰다.

“선배, 22분이에요.”

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가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봤지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초원은 바로 관찰실로 가 라텍스 장갑 두 장을 상자에서 뽑아 현우에게 넘겼다.

“지하 3층부터 선배 출입 카드 쓰면 안 되는 거 알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죠?”

현우가 긴장한 기색이 옅게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39분까지 꼭 와야 해요. 오기 전에 카드 폐기하고요.”

그는 잘 알고 있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폰 줘요. 위치 기록 될 수 있으니까.”

“아, 그렇지.”

초원은 핸드폰을 받아 정장 재킷에 넣었다.

“잘하고 와요.”

문밖을 살피다 밖으로 나가려는 현우의 손을 초원이 꽉 잡았다. 그가 슬며시 웃으며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한 번 쥐더니 비상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12시 24분. 이제 15분 남았다.

초원은 도저히 이 산만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방 안을 돌아다니면 안정이 될까 싶었지만 괜히 김순자 씨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얌전히 자리에 앉아 죄 없는 입술과 펜 끄트머리만 깨물었다.

시간이 너무 느리고도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겨우, 그리고 아직도 7분 남았다.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조금 전 현우가 펼친 허무맹랑한 가설에 조금씩 반응을 보이는 것 같더니 지금은 멍하니 영화만 보고 있었다.

초원도 달리 말을 걸지는 않았다. 혹시나 입을 열기 시작해서 누군가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버리면 끝장이었으니까.

선배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4245번 개체가 격리실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또 혼자 도망 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145번 물체까진 무사히 갔을까? 5분밖에 안 남았는데.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선배, 총은 차고 있었던가? 아, 진짜 미치겠네.

긴 한숨 소리에 여자가 초원을 곁눈질했다. 초원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차라리 직접 뛰는 게 낫지. 얌전히 앉아 기다리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아무리 전적이 있어도 그놈이 다시 나한테 달려들 이유가 없는데, 그리고 내가 저주받은 그림에 가까이 갈 사람도 아니고⋯. 어째서 팀장님은 굳이 나보고 가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신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에는 현우 선배보다 내가 더 믿음직스럽지 않나? 설마 내가 여자라서 그러나?

제게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까지 과보호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대는데 뒤에서 출입 카드 리더기의 삑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12시 36분. 3분 일찍 끝냈네.

초원은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

현우는 복도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장갑을 꼈다. 비상계단 문을 조심스레 열고 다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몰라 발뒤꿈치를 들고 계단을 내려간 그는 B3라고 적힌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조심스레 돌렸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한창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이니까.

문밖으로 발을 성큼 내디뎠다가 흠칫했다. 복도에 구두 소리가 이렇게 크게 울리는지 이제야 알았다. 현우는 속도를 낮추고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비상계단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돌고 복도 끝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돌아 세 번째 문이 남자가 있는 방이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우는 4245번 개체가 있어야 할 방 앞에 서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바늘은 12시 26분을 가리켰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보안 2등급용 출입 카드를 꺼내 출입문 옆 리더기에 갖다 댔다. 빨간 불이 녹색으로 바뀌면서 잠금장치가 철컥 열렸다.

현우는 방 안에 직원은 없길 바라며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 새로 보이는 관찰실은 어두웠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그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망할⋯.”

문이 닫히며 다시 잠기는 순간 낮게 중얼거렸다. 불부터 켜는 걸 깜빡했더니 사방이 깜깜했다. 핸드폰이라도 꺼내서 스위치를 찾으려던 현우의 입에서 다시 ‘망할’ 소리가 튀어나왔다.

더듬더듬 문 옆의 벽을 더듬다 보니 스위치 같은 게 느껴졌다. 누르자 관찰실과 안쪽 방의 불이 켜졌다.

현우는 방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 격리실의 벽은 영화에서 본 정신병원 병실처럼 사방이 하얀 패드로 덮여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자세히 들여다보자 한쪽 구석에서 흰 덩어리가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현우는 안으로 발을 디디려다 멈칫했다.

발자국이 남을 게 분명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갈까 싶었지만 최대한 리스크를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최은재 씨.”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남자가 현우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떨었다.

“최은재 씨, 접니다. 어제 봤죠?”

그제야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가가 벌겠다.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 드릴 테니까 나오세요.”

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반색하며 자리에서 뒤뚱뒤뚱 일어났다. 남자가 방 가운데쯤 왔을 때 현우는 남자가 왜 뒤뚱뒤뚱 걷는지 알 수 있었다. 구속복을 입어서 제대로 중심을 못 잡은 남자가 넘어졌다. 현우는 한숨을 쉬며 시계를 확인했다. 12시 29분이었다.

남자가 구르다시피 관찰실까지 왔을 때 현우는 구속복 버클을 재빠르게 풀며 설명을 시작했다.

“같은 층에 저주받은 그림이라고 있어요. 진짜 저주받은 건 아니고 시골 봄 풍경이 그려진 유화인데 가까이 가면 손이 튀어나와서 끌고 들어가요. 나쁜 덴 아니고 그림 속 낙원 같은 덴데 우리 청 직원들이 자꾸 현실 도피하려고 뛰어들어서 저주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은재 씨 거기로 갈 거예요. 괜찮죠?”

남자가 구속복을 벗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를 향해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은 재빨리 밖으로 나와 문을 조용히 닫았다.

현우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서 비상계단 쪽으로 돌아간 다음에 문 2개를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복도의 맨 끝 방에 그림이 있었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코너를 향해 걸었다. 코너에 멈춰 선 현우가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사히 비상계단 입구를 지나 두 번째 문으로 다가가는데 앞쪽에서 말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달리 피할 곳이 없었던 현우는 그 두 번째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점심시간 면담실에 누가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안을 재빨리 확인한 두 사람은 면담실로 들어와 문을 살며시 닫았다.

현우는 문에 귀를 대고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12시 33분이었다. 성인 남성 둘의 목소리가 오른쪽에서 다가오더니 문 앞을 지나 멈춰 섰다.

‘제발 엘리베이터는 기다리지 말아라.’

속이 타들어 갔다. 일산 연구소의 더럽게 느린 엘리베이터를 저 사람들이 기다린다면 그림이 있는 방에 도착하기도 전에 CCTV가 다시 켜질 게 분명했다.

목소리가 문 근처에서 잠시 웅얼거리더니 끼익, 문 닫히는 소리가 나며 사라졌다. 현우는 살짝 문을 열어 복도를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잽싸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양 갈림길을 확인하고 두 사람은 왼쪽 끝 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복도 끝에 이르자 안주머니에서 출입 카드를 꺼내 리더기에 댔다. 문이 열렸다.

안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던 현우가 문을 활짝 열고 남자를 들여보냈다. 이미 노란 조명이 켜져 있는 격리실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방 가장 안쪽 벽에는 가로, 세로 1.5m 정도 되는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캔버스 위에는 개천과 물레방아, 오두막이 그려져 있고 그 위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림을 막아 둔 유리를 본 현우는 방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저는 가까이 가면 안 돼요. 이걸로 유리를 깨고 들어가세요.”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화기를 받아 들었다.

남자가 앞으로 걸어가더니 소화기를 유리 가운데로 휘둘렀다. 쿵 소리와 함께 유리에 패인 자국이 생겼다. 남자는 소화기를 한 번 더 휘둘렀다. 유리가 강화 유리인지, 아니면 남자의 체력이 쇠한 탓인지 유리는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현우가 달려가 소화기를 빼앗았다. 그림 옆으로 뛰어간 그는 유리 가장자리를 내려쳤다.

순간 유리에 쫘악 금이 가며 유리 조각이 바스스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 속에서 기다란 손이 튀어나오더니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방심하고 있던 현우를 향해서도 손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넥타이를 움켜쥐려 했다.

놀란 그는 뒤로 펄쩍 뛰었다. 몇 걸음 더 물러나자 3m 넘게 거리가 벌어졌는지 손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미 그림 속으로 거의 빨려 들어가 발끝만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

“홍 주임님, 배고프실까 봐.”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검은 비닐봉지와 음료수 두 병을 들고 있었다.

초원은 최선을 다해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평소엔 이런 일 없었는데 왜 하필 오늘⋯.

“안 그러셔도 되는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끼니를 거를 수 있나요.”

‘다 끝나고 먹겠다고 아까 그랬잖아, 이 아저씨야!’

격리팀 주임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봉투와 음료수를 건넸다.

“근데 남자 주임님은 어디 가셨어요?”

“아⋯, 화장실 급하다고 금방 나갔는데 못 보셨어요?”

“아, 그렇구나.”

남자는 갈 생각이 없는지 현우가 앉았던 의자에 떡 하니 앉았다.

“점심 드시고 오시는 길이세요?”

“네, 오늘 구내식당 메뉴가 별로여서 나가서 분식집에서 돈가스 먹고 왔네요. 그러고 홍 주임님 생각나서 김밥 좀 사 왔어요. 참치김밥 좋아하시죠? 참치김밥은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좋아하죠, 당연히.”

주임님이 사 주는 건 빼고요.

“드세요. 배고프실 텐데⋯.”

그 순간 문밖에서 삑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현우는 격리팀 주임을 보고 그 자리에 굳었다.

“화장실 되게 금방 갔다 왔네요, 선배.”

“그러게요. 홍 주임님이랑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는데.”

“다시 나갈까요?”

현우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문을 가리키고 초원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숫자 8이 9로 바뀌고 있었다.

“들어와서 김밥이나 먹어요. 여기 주임님이 사 오셨어요.”

“아, 미친. 왜 느닷없이 친한 척이람?”

초원은 연구소 밖으로 나와 땡볕 속을 걸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아까 홍 주임이 너무 쓸데없이 많이 웃어 줘서 그런 거잖아요. 홍 주임은 스파이 같은 거 못 하겠네. 평소대로 해야 하는 데 너무 오버해 가지고⋯.”

“와, 선배. 그거 한 번 했다고 무슨 세기의 스파이라도 된 줄 아나 봐요. 그냥 이참에 국정원으로 옮기시든가요.”

“아니, 됐어요. 할 짓이 못되더라고요.”

현우는 손사래를 치며 겸연쩍게 웃었다.

“카드는 처리했어요?”

“네, 잘라서 변기에 내렸어요.”

“안 들켰죠?”

현우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 다행이다. 이제 사무실 가서 팀장님 앞에서 실실 웃고 다니는 일만 남았네요. 그럼 아시겠지.”

“그랬다가 팀장님이 참치김밥 사다 주기 시작하면 어쩌려고요?”

“아, 헛소리 좀 작작 해요. 팀장님 나한테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현우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아냐는 말에 속이 뜨끔했던 초원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 그 그림에 어떻게 빨려 들어가는지 봤으니 속 시원해요?”

현우는 신이 난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초조히 팀장실 문만 바라보던 초원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망설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문 앞에서 서성대고 있으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두드려 버렸다.

“네.”

“팀장님.”

팀장실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초원의 얼굴을 본 팀장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화 안 나셨나?’

“앉아요.”

안 바쁘시냐고 묻기도 전에 팀장이 책상 앞 의자를 가리켰다. 초원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아 책상 가장자리를 응시했다. 차마 팀장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낼지 고민하며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러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무리 봐도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온화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오늘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보다. 운이 좋구나.

“저, 팀장님.”

“네?”

“죄송합니다.”

“뭐가?”

‘역시 화나신 건가?’

“제가 어제 예의 없이 굴어서 사과드리려고 왔습니다.”

“낮에? 아니면 밤에? 어제 정확히 언제를 말하는 거죠?”

초원은 생각도 못 한 급습에 놀라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 특대형 쥐구멍 없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초원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못해 비틀면서 겨우 대답했다.

“둘 다요. 징계 내리셔도 아무런 토 달지 않고 달게 받겠습니다.”

“징계는 무슨⋯.”

“징계받아도 할 말 없는 짓을 했는데요.”

“우리끼리 있을 때 그러는 건 아무 문제 없는데.”

초원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우리끼리? 그리고 여기서 팀장님이 말하는 ‘그러는 거’는 둘 중 뭘 말하는 걸까? 헐, 설마 키스는 아니어야 하는데⋯.

“그래도 제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는데요.”

팀장이 삐딱하게 턱을 괸 채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초원 씨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보는 눈이 있어서 혼내는 척한 거고 초원 씨가 위험한 짓 할까 봐 걱정돼서 한 말이지 정말로 화난 건 아니었어요.”

그랬구나. 팀장님은 정말이지 이렇게나 속이 깊고 너그러우신 분이구나.

새삼 제 작은 그릇이 부끄러워진 초원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 신경 써 주시는 것도, 이번 문제도 그렇고⋯. 다 감사해요.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제야 고개를 조금 들어 팀장을 향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갚고 싶으면 초원 씨가 오늘 저녁 사면 되겠네요.”

“네?”

“아, 물론 오늘 한 번으론 다 못 갚겠지만.”

왜 이러시지?

“음⋯.”

초원은 뒤돌아 사무실 쪽을 내다보았다. 다들 퇴근 준비를 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둘이서만.”

속을 읽힌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승준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요. 감성돔 사 달라곤 안 할 테니까.”

그가 씨익 웃었다.

범이 갑자기 여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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