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28)

팀장님, 제발 꿈에서 나가주세요

4월 23일 04:21

울릉도 동북방 43km 해상

종덕은 연신 주름진 손을 비볐다. 4월 말 새벽 바다의 바람이 매서워서가 아니었다. 평생 어부로 살아온 그에게 이쯤은 산들바람이었다.

“아, 거 김 씨 빨랑빨랑 쫌 안 하고⋯.”

선원을 재촉하던 종덕은 남쪽으로 멀어지는 오징어잡이 배 두 척을 흘끗 쳐다봤다.

그물 인양기 돌아가는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이윽고 바닷속에 잠겨 있던 그물이 그 묵직한 모습을 드러냈다.

4월 말에 이 정도라니⋯. 겨울에야 잘 잡힐까 말까 하던 오징어가 갑자기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한 건 2주 전 즈음부터였다.

울릉도 어부들 사이에선 중국 어선이 들어와 씨를 말리기 전에 철모르는 오징어를 낚기 위한 몸부림이 격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법 없이 사는 남자였던 종덕은 해경이 단속을 하건 말건 오징어잡이 배와 손을 잡고 자신의 트롤 어선으로 오징어를 싹쓸이하고 있었다.

선원 하나가 배 위로 끌어 올린 그물 끝의 끈을 당기자 갑작스레 열린 틈으로 오징어와 온갖 생선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아이고, 오늘도 만선이네.”

“거, 빨리빨리 정리들 하소. 해 뜨기 전에 들어가야지.”

선원들은 갑판 위로 흩어진 어획물을 분주하게 보관 탱크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어라, 저게 뭐꼬?”

종덕은 김 씨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오징어 더미 사이로 창백한 팔다리가 뻗어 나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검은 머리카락도 미역 줄기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종덕은 장화로 걸리적거리는 오징어를 툭툭 밀치며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 재수 좋은 날인 줄 알았드만 시체가 걸리고 난리고. 바다에 도로 던지삐야지.’

종덕은 장갑을 낀 손으로 창백한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때 시체가 꼬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이익, 이게 뭐꼬?”

60해 넘게 살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봐서 더는 놀랄 게 없을 줄 알았던 종덕도 소리를 질렀다.

시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선의 불빛 아래로 연분홍빛 피부가 번들거렸다. 앙증맞게 솟아오른 젖가슴과 둥그런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머리. ‘여자구나.’라고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노란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종덕은 어릴 적 할배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느 날 그물에 인어가 딸려 올라왔다는 이야기. 종덕은 술주정뱅이 노인네의 헛소리라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인어 고기가 불로장생약으로 비싸게 팔린다는 건 한 번 들어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암컷 인어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재수 좋은 날 맞고만.’

***

“팀장님⋯.”

초원은 대리기사를 부르려 핸드폰을 꺼내는 그의 손을 슬쩍 잡았다.

“우리 잠깐만 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요?”

간절한 눈빛을 본 팀장이 핸드폰을 다시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린 채로 무언가 고민하는 듯 아랫입술을 물었다.

어두운 주차장에 귀뚜라미만 가늘게 울고 있었다.

초원은 가죽 시트를 짚고 있는 팀장의 구릿빛 왼손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 그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짧게 자른 손톱부터 은빛 시계를 찬 손목까지, 초원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마디 하나하나 움찔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시트를 굳게 짚고 있던 손의 힘이 풀리자 초원은 그 손을 끌어당겨 두 손으로 감싸듯 쥐었다. 커다란 손바닥을 손끝만으로 원을 그리듯이 간질이자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의 반응을 본 초원은 대담해졌다.

옆으로 바짝 다가가 붙들고 있던 손을 제 허리에 감았다. 망설이는 듯하던 손이 허리께를 천천히 더듬기 시작하고, 초원은 오른손을 그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올렸다. 사타구니에 닿을락 말락 정장 바지 위로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팀장이 드디어 얼굴을 돌려 초원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의 굳은 표정 그대로였지만, 초원은 똑똑히 보았다. 두 눈 속에서 이글거리는 욕망을.

애타는 얼굴로 팀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들어 초원의 뺨을 쓰다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손길은 입술 위를 떠날 줄 몰랐다.

이 뜨거운 손길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이 남자는 알까? 초원은 눈물 글썽글썽한 눈으로 입술을 벌렸다.

“팀장님, 저⋯.”

미처 두 번째 단어를 제대로 뱉기도 전에 팀장의 뜨거운 입술이 초원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단어는 신음이 되어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입술을 부드럽게 빨던 그가 아슬아슬하게 닫힌 입술 사이를 혀로 살짝 핥았다. 애가 탄 초원은 망설임 없이 입술을 벌렸다. 입술 너머로 들어온 혀가 초원의 혀에 부드럽게 얽혀 들고 그 짜릿한 전율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야릇했다.

‘팀장님은 키스도 잘하시네. 이 남자 대체 못하는 게 뭘까?’

그 야릇함에 몽롱하게 취해 밭은 숨만 뱉는 그녀에게 그의 입술이 두 번 더 살포시 와 닿았다. 욕정이 아니라 애정처럼 느껴지는 그 키스가 의아했다. 멍하니 가쁜 숨을 고르는 사이 그 뜨거운 입술은 초원의 목덜미에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내일 회사 사람들이 볼 텐데⋯.”

팀장이 입술을 떼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내가 남겼다고 해요. 초원 씨가 누구 건지 똑똑히 알게.”

아찔한 그 말에 초원이 숨을 격하게 들이쉬고, 그는 다시 영역 표시에 몰두했다.

초원은 그런 그의 목덜미를 간질이듯 손끝으로 쓰다듬다가 너른 어깨를 덮고 있는 정장 재킷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그가 고개를 불쑥 들더니 재킷을 휙 벗어 앞좌석으로 던졌다. 거칠게 넥타이도 풀어 던진 그는 초원이 입은 라운드넥 셔츠의 끄트머리를 잡고 위로 거침없이 끌어 올렸다.

속살이 드러나자 부끄러웠다. 가슴골을 가리려던 두 손을 팀장이 한 손으로 휙 낚아채더니, 다른 손으론 엉덩이를 감싸 올렸다.

초원은 순식간에 양손이 묶인 채로 팀장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꼴이 됐다.

툭-

팀장의 능숙한 손길에 브라마저 힘없이 풀렸다. 그제야 그는 손을 놓았다. 손목이 얼얼하다고 느끼는 순간, 커다란 손이 어깨끈을 아래로 젖혔다.

팀장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의 적나라한 시선에 초원은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그가 다시 초원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왜? 이렇게 예쁜데⋯.”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요?”

초원은 말없이 수줍게 고개만 끄덕였다.

팀장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초원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더니 입술에 끈적한 키스를 퍼부었다. 커다란 손이 작은 어깨와 등줄기를 집어삼킬 듯 어루만지더니 서서히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뜨거운 손이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 초원은 입술을 떼고 신음을 내질렀다.

“아앗⋯.”

허리를 젖히는 동시에 팀장의 입술이 젖꼭지를 감쌌다. 민감한 돌기가 뜨거운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부드럽고 촉촉한 혀가 그 위를 스치자 초원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아, 아흣⋯.”

그의 손과 입이 주는 강렬한 자극에 이성을 잃고 신음하던 그녀는 다리 사이가 젖어 드는 걸 느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엉덩이를 들어 올려 스타킹과 팬티를 아래로 내렸다. 그 모습을 본 팀장이 손을 내려 벨트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 와중에도 뜨거운 혀가 초원의 살을 빨고 맛보고 있었다.

A라인 스커트 하나만 입은 채로 다시 팀장의 무릎 위에 앉았다. 이제 두 사람의 사이에는 그의 단단한 그곳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그녀를 원하는 상사의 분신을 내려다보던 초원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다 스커트 아래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아흣⋯.”

스커트 속에서 꼬물거리는 손을 지켜보는 그의 눈빛이 점점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끈적히 젖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분신을 손에 쥐자 그의 입술 사이로 기분 좋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초원은 손이 델 듯 뜨거운 물건을 잡고 천천히 위아래로 손을 움직였다.

팀장이 눈을 감더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초원은 제 손길을 따라 움찔거리는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팀장은 정신이 없는지 조금 전보다 입술이 느렸다. 초원은 아래와는 달리 점점 힘을 잃는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기분 좋아요?”

그는 몽롱한 눈을 겨우 뜨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손을 멈추자 팀장의 얼굴에 아쉬움이 진하게 새겨졌다.

초원은 살짝 웃어 보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분신을 세워 잡고 천천히 엉덩이를 내렸다. 마주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가 긴장한 얼굴로 꿀꺽 침을 삼켰다. 초원의 허리를 잡은 두 손이 살짝 떨리는 것 같은 건 그녀만의 착각일까?

“흣⋯.”

앙다문 작은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갔다. 잔뜩 젖어 있어서 쉽게 들어갈 거란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머리 굵은 팀장에게 초원은 너무 속 좁은 여자였다.

아픔은 곧 쾌락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리를 한껏 벌리고 엉덩이를 천천히 내렸다. 머리가 겨우 들어오자 초원은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괜찮아요?”

두 손을 내려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초원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고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어루만졌다.

“곧 익숙해지겠죠.”

그 말에 그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초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초원은 두 팔로 그의 목을 감고 서서히 몸을 아래로 내렸다. 이 남자의 뜨거운 분신이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속살을 가르고 들어왔다.

그제야 초원은 그가 아직도 셔츠를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굳게 여며진 옷깃 사이에 손가락을 걸고 이게 뭐냐는 듯 당겼다.

급하게 단추를 풀어 내리는 팀장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평소의 평정심은 어디로 갔는지 안달이 나 서두르는 모습을 보자 괜히 짓궂게 굴고 싶어졌다. 굵은 페니스를 감싼 속살을 강하게 조였다 풀었다.

팀장이 셔츠를 벗다 말고 고개를 들더니 진짜 그럴 거냐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초원은 생긋 웃으며 이너 셔츠를 그의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둘 사이에 좁은 틈 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기세로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맨살에 맞닿는 그의 단단한 몸이 한 여름철 태양처럼 뜨거웠다. 굵은 팔뚝이 초원을 다시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감싸 안았다.

그렇게 팀장의 단단한 분신에 매달린 채로 초원은 허리를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꽉 맞물린 몸이 마찰열로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 야릇한 느낌에 몸을 내맡기며 눈을 감았다.

띠띠띠띠, 띠띠띠띠.

눈을 떴다. 보이는 건 팀장의 쾌락에 취한 얼굴이 아니라 익숙한 천장이었다.

“아아아악!”

초원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러다 정말 대머리가 될 지경이었다.

어쩜 하루걸러 한 번씩 이럴까? 그날 이후로 팀장이 나오는 꿈을 수도 없이 꿨다. 매번 장소도, 시간대도 달랐지만, 결말은 항상 똑같았다.

조 팀장과 홍 주임의 번식 활동.

정말 왜 이럴까? 나 홀로 타임도 자주 가지고, 안 하던 요가와 명상도 하고, 지쳐 쓰러질 정도로 한강을 따라 달려보기도 했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 오죽하면 정신과 약이라도 먹어 성욕을 감퇴시켜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 역효과 나서 더 생생한 꿈을 꿀까 봐 단념했지만.

‘혹시 팀장님이 인큐버스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팀장이 이렇게 초원의 꿈속을 자꾸 벗고 들락날락하는 게 설명이 안 됐다. 아무리 그놈의 페로몬이 강력해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몸에서 다 씻겨 나갔을 거다. 연구소의 보고서에서도 페로몬의 반감기는 5시간밖에 안 된다고 했고. 하지만 초원은 보름 가까이 이 상태였다.

‘이 망할 몸뚱이. 왜 하필 팀장님일까?’

보고서에 따르면 애초에 그 페로몬은 각인 효과도 없단다. 그저 그 압도적인 효과에 집착하게 될 뿐이지.

그럼 대체 초원이 겪는 이 현상은 뭘까? 팀장의 손이 닿는 순간 느낀 그 절정이 그렇게 좋았나 보다. 그걸 또 느끼고 싶었으면 그 망할 개체를 찾아갈 생각이 들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그놈은 생각할수록 역겹기만 하고 팀장은 생각할수록 몸만 달아올랐다. 마음은 여전히 미적지근했지만 말이다.

‘생리 전 주도 아닌데 이게 뭐야.’

초원은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옷을 벗어 던지고 찬물을 틀었다. 벗은 몸을 내려다보자 꿈속의 팀장이 한 이런 야한 짓 저런 야한 짓이 떠올랐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머릿속에서 아주 HD로 재방송되고 있었다.

“아아아아, 제발!”

원래 꿈이란 의식이 돌아오면 올수록 흐릿해져야 정상인데, 이건 어째선지 하루 종일 생생했다.

회사에 가서 팀장의 얼굴을 보는 게 민망하고 미안해 죽을 것만 같았다. 부하 직원이 본인을 두고 이런 부적절한 상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경멸할까?

이마가 얼얼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초원은 욕실 벽에 이마를 콩콩 박고 있었다.

초원은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요즘 회사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하는 의식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특관청 직원 몇 명이 곁눈질하는 게 느껴졌다. 평소에 안면을 트고 지내던 남직원 하나가 고개를 까딱했다. 초원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평소였다면 ‘어, 홍 주임님!’, ‘아, 강 주임님!’하고 인사했을 사이였지만, 그 사건 이후로 초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출근해서 마주한 건 사람들의 불순한 호기심이었다. 모두가 팀장과 현우의 수준으로 매너가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이상한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는 사람, 뒤에서 키득대는 사람, 평소에 말 한 번 섞어 보지 않아 놓고 괜히 말 거는 사람 등등⋯.

그러고 며칠 뒤에는 연구소에서 메일이 왔다.

4245번 개체 연구의 일환으로 개체에 노출된 초원을 조사하려고 하니 응해 달라는 메일이었다. 심지어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장소와 일시까지 적혀 있었다.

초원은 책상을 뒤집어엎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고 조용히 전달 버튼을 눌렀다. 받는 사람에는 팀장의 메일 주소를 쓰고.

팀장은 메일을 보낸 연구원의 상사의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불같이 화냈다. 그다음 날 초원은 그 연구원의 상사의 상사에게서 정중한 사과 메일을 받았다.

칼 같고 무서운 팀장이지만 자기편일 땐 또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그 든든한⋯, 단단한⋯. 하⋯, 왜 또 이러니.

초원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뭐 해요?”

어깨를 두드리는 손의 저 끝에는 현우의 얼굴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차례를 기다려 안으로 들어갔다. 이 비좁은 공간에 어색하게 껴 있으려니 통조림 속의 꽁치가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아 홍 주임, 오늘 회의 몇 시라 그랬죠?”

“11시요.”

“아, 그 전에 PPT 마무리해야 하는데⋯.”

“아직 다 안 했어요?”

“그냥 마지막 세 장 정도?”

“아, 맞다. 참고 자료 복사해야 하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둘은 사무실로 걸어 나갔다. 현우와 잡담을 하며 걸으니 초원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그래서 홍 주임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 팀장님 안녕하세요.”

복도를 걷다가 커피를 들고 탕비실에서 나오던 팀장과 마주쳤다. 그 마른 손등 위로 튀어나온 핏줄이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었다. 또 몸이 제멋대로 군다. 초원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홍 주임, 무슨 일 있습니까?”

“네? 아뇨.”

고개를 번쩍 들었더니 팀장이 걱정 어린 얼굴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초원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마에 이거 멍 아닌가요? 약간 푸르스름한데⋯.”

“아⋯.”

초원은 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졌다. 아침에 욕실 벽에 박았던 데가 멍이 들었나? 화장할 땐 없었는데⋯.

“어? 진짜네?”

현우가 초원의 손가락을 떼고 이마를 확인했다.

“어쩌다 다친 거예요?”

팀장의 손끝이 이마에 살며시 닿는 순간 초원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 미안. 아픈가 본데⋯. 어쩌다 다쳤어요?”

“아, 아침에 샤워하다 넘어져서⋯.”

“큰일 날 뻔했네. 딴 덴 다친 곳 없습니까?”

초원은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위험한데. 미끄럼 방지 스티커라도 사서 붙여야겠네.”

현우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초원은 화장실 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저는 화장실 가서 확인 좀 해 보고 들어갈게요.”

두 남자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돌아섰다.

마음은 화장실로 당장 뛰어들고 싶은데 발이 그 자리에서 안 떨어졌다. 팀장의 딱 벌어진 어깨 때문에 하얀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팀장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빳빳한 셔츠 아래로 단단한 등 근육이 불거졌다. 그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순간 초원은 살짝 울상을 지었다.

‘팀장님, 원래 저렇게 멋있었나?’

‘야, 팀장님 원래 멋있었어.’

요즘 따라 말이 많아진 음란마귀가 불쑥 끼어들었다.

‘밸런타인데이 때 테이블에 쌓여 있는 초콜릿 못 봤어? 그게 그냥 땅에서 솟아났겠니?’

‘아니, 연예인 뺨치게 잘생긴 건 맞는데 차도남은 내 취향이 아니란 말이야.’

‘얘가 뭘 모르네. 철벽이 만리장성 급인 게 멋있는 거야. 그게 내 앞에서만 와르르 무너지고 뜨거운 속살을 드러내면, 후후후.’

‘아우, 좀 조용히 해. 이 음란마귀야.’

저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더니 지나가던 직원 하나가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제야 화들짝 정신이 든 초원은 도망치듯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연한 멍 자국 위로 퍼프를 두드리는데 귓가에 아직도 심장 소리가 울렸다.

‘정말 나 미쳤구나, 미쳤어.’

초원은 복사기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종이를 한 부씩 나눠 쌓았다. 이렇게 따끈따끈한 종이를 안고 있으면 이불 속처럼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한 부를 집어 앞뒤로 커버를 놓고 제본기에 넣어 레버를 내렸다. 스프링을 제본기 위쪽에 놓고 연 다음, 한 줄로 구멍이 뚫린 종이 묶음을 걸치고 레버를 올렸다.

이렇게 자료 한 부가 완성됐다.

초원은 이 단순 작업이 너무나 좋았다.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홍초원 씨 요즘 무서워.”

복사실 밖에서 갑자기 제 이름이 들려왔다. 듣고 싶지 않아도 얇은 벽 너머로 생생하게 다 들렸다.

“그 얼음공주님, 원래도 애교는 없었지만 요즘은 아주 찬 바람이 쌩쌩 분다니까.”

하⋯, 어떤 놈이냐 정말.

“욕구불만인가?”

남자들이 와하하 웃는 소리가 좁은 복사실을 울렸다.

초원은 문틀에 기대어 섰다. 복사실 옆 정수기 앞에서 수다를 떨던 남자들 중 하나가 그 얼굴을 보고 흠칫 굳었다.

“지금 하신 말씀 우리 팀장님한테 그대로 전해도 되죠? 물론 인사과도요.”

초원을 등지고 있던 남자들이 돌아서더니 사색이 됐다.

“아니, 홍 주임님. 그게 아니고⋯.”

“뭐가 아닌데요?”

초원은 팔짱을 단단히 끼고 남자를 노려봤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신데요? 들켜서? 안 들켰으면 더한 소리도 마음껏 하시는 건데, 그쵸?”

남자들은 연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듯 목청 높여 개소리를 할 땐 언제고 사과할 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는 것 봐라.

“안 바쁘세요? 이렇게 한가하게 정수기 옆에 모여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 험담할 정도로?”

“험담이 아니고⋯.”

“그럼 뭔데요? 성희롱?”

남자들이 갑자기 벙어리가 됐다.

“됐어요. 그쪽이랑 제가 말 섞어서 뭐 하겠어요.”

복사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쾅 닫았다. 얇은 간이 벽이 흔들렸다.

초원은 이를 갈며 나머지 다섯 부를 제본했다. 놈들 주둥아리를 스프링으로 꿰매면 속이 시원할 텐데.

남자들 중에는 초원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도 있었지만, 알 게 뭐냐. 자를 테면 잘라라. 이럴 바엔 선녀님 소리 들으며 작두 타는 게 낫지.

솔직히 말하면 믿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요즘 팀장이 그녀를 과보호하고 있었으니까.

제본한 자료를 가지고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하던 초원은 ‘팀장님, 바쁘신데 제가 요즘 계속 물의를 일으키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하는 메일을 썼다.

메일을 보낸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팀장의 메일이 왔다. 초원과 그놈들을 참조로 넣고 관련 팀 팀장과 인사과 담당자를 받는 사람으로 한 메일은 언뜻 정중해 보이지만 꾹꾹 억눌린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팀장님, 최고!’

초원은 팀장실 쪽을 보며 생긋 웃었다.

“1132번 개체 같은 경우에는⋯.”

초원이 봐야 하는 건 스크린에 비친 현우의 PPT인데, 자꾸만 뒤에 앉은 팀장 쪽을 힐끔대고 있었다.

‘회의실이 더운가?’

몸이 이상하게 후끈했다.

‘그래, 회의실이 더운 걸 거야.’

팀장도 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어붙이고 있으니까.

회의 시작할 때, 팀장이 소매 단추를 풀어 걷어 올리는 걸 넋 놓고 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얼굴이 활활 달아오르는데 발표를 시작한다고 으뜸이 불을 꺼서 다행이었다.

팀장은 정말 와이셔츠 입는 걸 금지해야 한다. 그럼 상체를 다 벗고⋯. 하, 진짜 미쳤구나.

‘이것 봐. 너 팀장이랑 자고 싶잖아.’

‘제발! 근무시간에는 좀 닥쳐 줘.’

‘히히, 아니라고는 안 하네.’

‘⋯나 팀장한테 마음 없는 거 알잖아.’

‘누가 마음 있냐고 물었니? 자고 싶냐고 물었지.’

‘나 원나잇 안 한다.’

‘그럼 두 번 자. 투나잇! 오, 투나잇. 오늘 밤 어때? 아까 그놈들 때문에 속상하다고 술 사달라고 해 봐.’

‘어후, 너 때문에 선배 발표가 안 들리잖아.’

‘재미도 없는데.’

‘그건 그래.’

‘술 사 달라 그래. 왜 소설 보면 알잖아. 취해서 속상하다고 매달리다가 눈 떠보니 낯선 천장에, 알몸으로 역시 알몸인 팀장에게 안겨 있는 장면. 크으, 벌써 좋다.’

망할 음란마귀. 이제 사내 연애물은 못 읽겠다.

길게 한숨을 쉬었다가 하필이면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초원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자료를 보는 척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현우의 지루한 발표가 계속되고 무료함에 못 이긴 그녀는 다시 팀장 쪽을 힐끔거렸다.

탄탄한 팔뚝 위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한 번만이라도 만져 봤으면⋯.’

이건 음란마귀가 한 소리가 아니었다.

‘오늘 아침에 저 팔뚝이 내 알몸을 끌어안고⋯. 아, 정말 왜 이러니.’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약이라도 먹어야 하나.

초원은 멍하니 자료 뒷장에 바람개비를 그리기 시작했다. 무념무상엔 이게 최고지. 하지만 텅텅 빈 머릿속으로 아침에 꾼 꿈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제론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꿈에선 저 남자의 감촉이나 모습을 그렇게 생생하게 느끼고 보는 걸까? 설마 몽유병이 생겨서 진짜로 팀장이랑 그⋯.

“⋯원 주임? 홍초원 주임?”

초원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현우가 의아한 눈으로 초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네?”

“홍 주임 차례예요.”

“아, 네.”

초원은 주춤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원들이 눈치를 보는 가운데, 팀장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팀장님 화나셨나?’

정신을 가다듬고 발표를 시작했다. 앞에 나와 서 있으니 잡생각이 사라져서 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팀장이 자꾸 중요한 부분만 짚고 넘어가라며 슬라이드를 넘겼다.

‘팀장님 진짜 화나신 건가?’

결국 열심히 준비한 자료의 반도 다루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마음이 콩밭에 가 있던 회의가 끝나고 초원은 짐을 챙겨 일어났다.

“홍 주임, 잠깐 나 좀 보죠.”

팀장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초원을 불렀다. 다른 팀원들이 홍 주임 큰일 났다는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 밖으로 하나둘씩 사라졌다.

초원은 쭈뼛쭈뼛 다가가 팀장 앞에 섰다. 차마 눈을 볼 수가 없어 시선은 팀장의 넥타이 무늬에 고정했다.

“홍 주임, 몸 안 좋아요?”

“네?”

예상을 벗어난 소리에 초원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회의하는 내내 얼굴이 빨갛던데. 지금도 그렇고⋯. 아프면 조퇴하고 쉬세요.”

“아, 아뇨. 안 아픈데요.”

“그럼 아까 그 일 때문에 그래요?”

“아뇨. 저는 얼굴 빨간 줄도 몰랐는데⋯.”

팀장이 오른손을 초원의 이마 위에 조심스레 얹었다. 손이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 걸 보면 얼굴에 열이 오르긴 했나 보다. 그런데 왜 심장은 이렇게 콩닥콩닥 난리가 난 걸까?

“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아침에 머리 부딪힌 게 잘못된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닐 거예요.”

손이 떨어져 나가고 초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홍 주임이 의사니까 잘 알겠지.”

“저⋯, 팀장님. 아까 그 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그런 거 하라고 팀장이 있는 거니까.”

머쓱한 미소가 내내 덤덤하던 그의 얼굴에 번졌다.

“그래도 제가 요즘 많이 번거롭게 해 드려서⋯.”

“아뇨. 홍 주임 잘못 아니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팀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더니 당부했다.

“혹시 누가 이 문제로 나 안 거치고 홍 주임이랑 얘길 하려 하면 나한테 얘기하라고 하세요.”

“네.”

“그리고 이거⋯.”

팀장이 손가락 사이즈의 상자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내밀었다.

“타박상 연고니까 생각날 때마다 바르세요.”

기분이 얼떨떨했다. 마치 꿈속에서 두 번의 애정 어린 키스를 받았을 때처럼. 초원은 머뭇머뭇 손을 내밀어 연고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침에 바쁘셨을 텐데 언제 나가서 사 오신 걸까? 초원은 작은 상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근데 진짜 조퇴 안 해도 괜찮겠어요?”

“네. 저 멀쩡합니다.”

그제야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더니 팀장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그 얼굴 위로 꿈속에서 초원의 머리칼을 넘기며 은근하게 웃던 얼굴이 겹쳐졌다. 초원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고문이 따로 없네⋯.’

***

<울릉도 해상서 트롤 어선 침몰⋯ 7명 실종>

<금수그룹 조선소 화재로 건조 중이던 화물선 전소>

<금수그룹 조선소, 연이은 사고로 2명 중태, 1명 사망>

“어휴, 인간의 욕심이란⋯.”

초원은 포털 사이트의 뉴스 헤드라인을 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다 늙은 노인네가 인생 즐길 거 다 즐겼으면 갈 때를 알아야지. 불로장생은 무슨⋯.”

옆에 서서 헤드라인을 읽던 병훈이 혀를 쯧쯧 찼다.

“그렇게 해서 오래 사는 게 무슨 의민지 모르겠네요. 앞으론 민물이든 바닷물이든 발가락 하나만 들여도 죽은 목숨일 텐데.”

옆자리에 앉은 현우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후후 불며 말했다.

“근데 그 인어는 살아 있대요?”

걱정이 된 초원이 병훈에게 물었다.

“몰라. 팀장님한테 물어봐. 팀장님은 아시겠지.”

“팀장님 요즘 톡 하고 건드리면 펑 하고 폭발하실 것 같은데⋯.”

요즘 인어 납치 사건 때문에 청 전체가 살얼음판이었다. 그 인어가 동해에서 가장 큰 인어 무리 소속에, 우두머리가 제일 아끼는 딸인지라 동해 용궁이 발칵 뒤집혔고 특관청도 따라 발칵 뒤집혔다.

목격자, 아니 목격 인어의 증언에 따라 용궁에서 그 인어 공주님을 납치해 간 트롤 어선을 찾았지만 이미 선장이 고액의 대가를 받고 금수그룹에 넘긴 후였다. 금수그룹이라 하면 그 회장이 몇 년 전부터 투병 중으로, 후계 문제로 자주 뉴스에 오르내렸다.

소식을 들은 특관청의 높으신 분들이 갖은 당근과 채찍을 동원해 인어의 신병을 확보하려 애썼지만, 그룹은 모르쇠로 일관했고 인어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동해 용궁이 남해 용궁까지 끌어들여 가며 금수그룹에 전면전을 펼치기 시작한 게 3일 전이었다.

“어, 팀장님 오신다.”

병훈이 재빨리 자리로 가 앉자마자 팀장이 잔뜩 인상을 쓰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팀원들의 인사에 이쪽을 보지도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인 그가 팀장실로 들어가려다 멈춰 섰다.

“아, 홍 주임. 잠깐 나 좀 보죠.”

‘헐, 어째서?’

팀원들의 의아한 눈빛이 초원의 얼굴에 꽂혔지만 본인도 알 턱이 없었다.

“홍 주임, 언제 팀장님 톡 하고 건드렸어?”

병훈이 속삭이자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고 일어나 팀장실로 향했다.

팀장은 한숨을 쉬며 넥타이 매듭을 거칠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쩐지 보지 말아야 할 걸 본 기분이었다.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억누르며 초원은 고개를 돌렸다.

“아, 홍 주임. 갑작스러운 건 알지만 내일 새벽부터 1박 2일로 출장을 좀 가야 할 것 같은데⋯.”

“네? 저요?”

“응. 그 동해 인어 사건 알죠?”

“네.”

“내일 울릉도로 가서 인계해야 하는데 인어가 여자라서 여자 요원이 한 명 따라가야 할 것 같아요. 혹시 모르니까⋯.”

“아, 네.”

청에서 드디어 인어를 확보한 모양이다.

“참, 양어진 씨 알죠?”

초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물고기랑 대화하는 남자. 홍 주임이 작년 말에 채용 추천했었잖아요.”

“아, 네.”

그제야 금붕어에게조차 멸치로 불린 남자가 떠올랐다.

“그 사람 지금 부산지청에서 일하는데, 서울로 와서 내일 같이 울릉도로 갈 겁니다. 통역으로.”

“아,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새벽 세 시에 홍 주임 집으로 데리러 가면 될까요?”

‘그렇게 일찍?!’이라고 외치는 속마음과는 달리 몸은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바로 퇴근하세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초원은 반쯤 혼이 나간 채로 팀장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느닷없이 1박 2일 울릉도 출장이라니⋯. 그것도 인어를 데리고, 팀장이랑⋯.

“무슨 일이야, 홍 주임?”

멍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오자 병훈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인어요. 내일 울릉도 가서 넘겨주는데 여자 요원도 따라가야 한대요. 새벽 세 시 출발이래요, 하하.”

초원은 우는 얼굴로 웃으며 노트북을 끄고 짐을 챙겼다.

“뭐? 인어 확보했대?”

“그런가 보죠.”

“홍 주임 보고 따라오래요? 새벽 세 시는 너무 했다.”

옆에서 현우가 안쓰럽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휴⋯, 그러게요. 그래도 난 지금 퇴근한다는 거⋯. 금요일에 봐요.”

초원은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둔 재킷을 집어 들고 사무실 복도로 향했다.

“반건조 오징어 사 와! 호박엿도!”

몸을 휙 돌린 초원은 팀장실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목 긋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본인의 헛소리가 팀장실까지 들렸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친 병훈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새벽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발끝을 내려다봤다.

‘빨간 리본 펌프스는 이런 출장에 신기에 너무 귀여운가? 편해서 신긴 했는데⋯.’

5월 초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검은 슬랙스와 빨간 펌프스 사이로 드러난 발목과 발등이 살짝 시렸다.

‘갈아입을까?’

시계를 봤다. 새벽 2시 58분. 바로 앞이지만 올라가서 갈아입고 오긴 너무 늦었다. 자취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고민하는데 자동차 엔진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팀장님, 칼 같으시네.’

검정 세단이 초원의 앞에 서더니 팀장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위험한데 안에서 기다리지⋯.”

“괜찮아요. 나온 지 1분 정도밖에 안 됐어요.”

초원이 들고 있던 토트백을 향해 팀장이 손을 내밀었다. 가방에는 하룻밤 자는 데 필요한 짐이 들어 있었다. 팀장이 트렁크 문을 열더니 건네받은 토트백을 넣었다.

트렁크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갈 줄 알았던 그가 조수석까지 와 문을 열어 주었다. 초원은 생각지도 못한 공주님 대접이 어색해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히터를 틀어 둔 건지 시트가 따뜻했다.

“이제 양어진 씨 서울역에서 픽업하고 성남에 있는 안가로 가서 인어를 태울 겁니다.”

운전석으로 와 앉은 그가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네.”

시동이 걸리고 차가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핸들을 잡고 있는 구릿빛 손을 초원은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늘은 꿈을 안 꿨다. 일찍 일어난 탓인가? 이제는 너무 자주 꾸니까 감흥이 덜하기도 했다.

“잘 잤어요? 평소 리듬대로 못 자서 피곤할 텐데.”

“아뇨, 저녁 일찍 먹고 9시부터 푹 잤더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6시간도 채 못 잔 거네.”

“팀장님은 잘 주무셨어요?”

“난 대충 눈 좀 붙였어요.”

“일이 많으셨나 봐요. 운전하셔야 하는데 피곤하시겠다.”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그나저나 아침은 먹었어요?”

“아뇨. 입맛이 없어서⋯.”

“그럼 이따가 휴게소에서 맛있는 거 사 줄게요. 소고기국밥 좋아해요? 맛있는 데 아는데⋯.”

“네!”

따끈한 소고기국밥을 생각하자 초원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팀장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차는 서울역에서 어진을, 성남 모처에서 인어를 태우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인어는 옷을 입고 있으니 20대 인간 여자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유독 창백한 피부와 노란 눈동자, 손가락을 벌리면 보이는 작은 물갈퀴만 빼고.

처음에는 세 사람을 경계하던 인어는 어진이 말이 통한다는 걸 알고 화색이 됐다. 하지만 그 화색은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자 정색으로 바뀌었다.

‘차멀미라도 하나?’

초원은 뒷좌석에 앉은 어진에게 물었다.

“어디 불편하시대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진이 인어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아픈 데 없다 하시는데요.”

‘그런데 왜 그러지? 인어는 우리랑 표정이 다른가?’

어진이 다시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인어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 해요?”

“아, 그냥 제가 어떻게 여기 취직했는지 말씀드리고 있었어요.”

아⋯. 왜 인어가 정색하고 창밖을 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진 씨, 인어 아가씨 좀 쉬시게 조용히 가는 게 좋겠네요.”

“아, 네.”

운전하던 팀장이 뭐가 웃긴 건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초원은 머쓱해져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어 아가씨라니⋯. 어색했지만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어진이 인어의 이름을 말해 줬지만 초원으로선 도저히 발음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뻥 뚫린 새벽 고속도로를 막힘없이 달리던 차가 휴게소로 진입했다. 차가 멈추자 인어가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꼈다. 넷은 차에서 내려 휴게소 푸드 코트로 들어갔다. 새벽 5시라 휴게소는 한산하다 못해 스산했다.

초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인어는 잡식성인가?’

인어가 소고기국밥을 후루룩 들이마시는 진귀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뜨끈한 국밥이 들어가자 졸렸다. 피로를 참고 운전하는 팀장을 생각해서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자면 안 되는데 말이다.

‘차라리 여기 수다쟁이 어진 씨를 앉힐 걸 그랬나?’

초원은 운전하는 팀장의 옆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피곤하면 자요.”

팀장이 시선을 도로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졸린지 어떻게 알았을까?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가?

“아뇨, 저 안 피곤한데요.”

“눈이 반쯤 감겨 있는데?”

팀장이 초원의 얼굴을 흘끗 보더니 말했다.

“이거 다 뜬 건데요.”

“아닌 거 다 아는데?”

“원래 새벽엔 이 사이즈예요.”

도로 저 먼 곳을 바라보던 팀장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어진 씨, 거기 담요 안 쓰면 홍 주임 주세요.”

“아, 네.”

초원은 군소리 없이 어진이 주는 담요를 받아 덮었다. 포근하니까 졸음이 절로 몰려왔다. 무거워서 내려오는 눈꺼풀을 깜빡깜빡하는데 팀장이 조수석 시트 히터를 틀었다.

“팀장님, 안 피곤하십니까? 이렇게 새벽같이 포항까지 운전하시려면 피곤하실 텐데⋯.”

초원은 선잠이 들었다가 어진의 목소리에 살짝 눈을 떴다.

“괜찮습니다.”

“장거리 운전 자주 하십니까? 차는 되게 새 차 같고 좋네요. 몇 년 식입니까?”

초원이 창가로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웅크렸다.

“양어진 씨. 홍 주임 자게 조용히 가죠. 어진 씨도 피곤하면 눈 좀 붙이세요.”

“아, 예. 저는 괜찮습니다.”

초원은 눈을 감은 채로 풋 웃었다.

정말 기묘하고 기분 좋은 꿈을 꿨다.

사막 한가운데 숨겨진 오아시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선 마을과 야자수.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잠들었던 마을이 화려하게 눈을 떴다.

이국적인 음악 소리와 낯설지만 입에 침을 고이게 하는 음식 냄새, 아름다운 여인들의 향수 내음이 길거리를 가득 채웠다.

지나가는 누구나 고개를 돌아보게 만드는 미인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이 남자의 눈은 오로지 초원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이끌려 어느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아늑한 침실 안에는 폭신한 비단 쿠션이 잔뜩 놓여 있었고 계피와 오렌지 향이 알싸하게 감돌았다.

아치형 창문 밖으로 그림처럼 펼쳐진 오아시스를 등불을 밝힌 조각배가 점점이 수놓고 있었다.

“초원 씨⋯.”

등 뒤에 선 팀장이 두 손으로 초원의 허리를 감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겨우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온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얇은 천 너머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몸이 느껴졌다. 초원은 뒤로 손을 뻗어 부드러운 천 위로 그곳을 어루만졌다.

“하아⋯.”

그의 낮은 신음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허리를 잡고 있던 두 손이 점점 위로 올라오더니 봉긋한 가슴을 스쳤다. 초원은 숨이 턱 막혔다.

긴 손가락이 드레스 앞섶의 단추를 하나씩 풀자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구릿빛 두 손이 보드라운 젖가슴 위로 착 감겼다. 익숙한 손길로 옷을 하나씩 벗긴 그는 초원을 두 팔로 안고 쿠션이 잔뜩 깔린 침상에 눕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아니면 이 남자의 열기에 취한 걸까?

팀장의 열렬한 애무를 받고 있자니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괜찮아요?”

“네⋯.”

그가 열에 달뜬 눈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다 촉촉한 입술을 포개었다. 그 순간 다리 사이로 굵은 무언가가 파고들어 왔다.

침상이 어지러이 흔들리고 끄트머리에 위태로이 걸쳐 있던 쿠션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초원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남자의 뜨거운 두 눈만을 황홀하게 들여다볼 뿐이었다.

“초원 씨⋯.”

가쁜 숨 사이로 그가 이름을 불렀다. 이 세상에서 이 남자만이 아는 그녀의 이름을.

“네⋯.”

“사랑해.”

“으음, 팀장님⋯.”

“네?”

초원은 눈을 번쩍 떴다.

빨간 펌프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울릉도 가는 길, 팀장의 차에서 잠들었다는 게 생각났다.

“왜 불렀어요?”

팀장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꿈에서만큼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여기 어딘가요?”

“포항이요. 거의 다 왔어요.”

“그렇구나⋯.”

초원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팀장님. 혹시⋯, 제가 잠꼬대 같은 거라도 했나요?”

속으로 ‘제발 아니라고 해 주세요!’를 외치며 물었다.

“아뇨. 코도 안 골고 조용히 잘 자던데⋯.”

“아, 그렇구나⋯.”

안도한 그녀는 다시 시트에 기대고 담요를 턱까지 끌어 올렸다.

“아, 자다가 웃긴 하던데⋯. 무슨 좋은 꿈 꿨어요?”

팀장이 초원을 흘깃 바라보며 슬며시 웃었다.

‘울릉도는 왜 울릉도일까? 울렁대서 울릉도일까?’

멀미약을 먹었는데도 효과가 없었다. 아니, 약을 먹어서 이 정도인 걸까?

통로 너머에 앉은 경북지청장과 초자연적개체관리실장은 멀미를 안 하는지 아까부터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른쪽 끝에 앉은 어진은 TV를 보고 있었고, 어진과 초원 사이에 앉은 인어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었다.

‘멀미는 나만 하네⋯.’

초원의 왼쪽에 앉은 팀장은 피곤했는지 배가 출발하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그녀도 억지로 눈을 붙일까 하다가 이번에는 ‘팀장님⋯.’으로 안 끝나고 ‘팀장님, 거긴 안 돼요.’로 끝날까 봐 자는 걸 포기했다.

‘‘사랑해.’라니 내 잠재의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 그렇게 외로운가? 마음 없는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을 정도로?’

초원은 곤히 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엿봤다.

‘난 이 남자랑 연애라도 하고 싶은 걸까?’

조승준 팀장이 그녀에게 어떤 사람인가 묻는다면 초원은 주저 없이 ‘존경하는 상사’라고 했을 것이다. 팀장이 일하는 걸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셨지?’라는 감탄을 할 때가 많았다. 언젠가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언젠가 팀장과 사귀고 싶다’, ‘사랑에 빠지고 싶다’ 이런 생각은 요즘도 해 본 적 없었다. 마음은 한결같이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그가 주인공인 야릇한 판타지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 사건의 부작용일 뿐이겠지.

몸과 마음이 이렇게 따로 노는데 ‘사랑해.’라니.

잠재의식은 뭘 말하려는 걸까?

드디어 울릉도에 도착했다. 겨우 네 시간이었을 뿐인데 흔들리지 않는 땅에 발을 딛는 느낌이 어색했다. 초원은 시원한 공기를 잔뜩 들이마셨다.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일행은 지청장과 실장을 따라 고급 요트가 늘어선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이건가?”

“어, 이거네.”

두 간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요트에는 멋들어진 글씨체로 ‘Dragon Palace IV’라고 적혀 있었다.

‘드래곤 팰리스라니⋯. 말 그대로 용궁 4호네.’

요트 안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내다보더니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청에서 왔습니까?”

“네.”

“들어 오이소.”

겨우 배에서 내렸는데 또 배라니⋯.

요트가 항구를 빠져나가 거친 파도를 가르고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초원의 속이 또 울렁거렸다.

“아이고, 요트가 참 좋네요.”

지청장이 요트를 모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뽑은 지 한 2년 됐나? 그것밖에 안 됐습니다.”

“4호라 돼 있던데. 몇 척이나 더 있습니까?”

“요런 크루즈 요트는 지금 5척 있네예.”

“아이고야, 이거 꽤나 값 나갈낀데⋯.”

“마, 우리 용왕님이 장비병이 좀 있으셔가지고요. 잘 타시지도 않는데⋯.”

“거, 덕분에 우린 이렇게 좋은 배도 타보고 안 좋십니까?”

‘좋긴 뭐가 좋아⋯.’

초원은 멀미를 참으며 속으로 말대꾸를 했다.

“홍 주임, 괜찮아요?”

맞은편에 앉은 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초원은 입을 열었다가 토할 것 같아 고개만 가로저었다.

“멀미 때문이면 누워서 가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선실에 누울 데 있습니까? 우리 요원이 멀미를 하는 것 같은데⋯.”

“저짝에 문으로 들어가서 계단 내려가면 누울 데 있어요.”

초원은 팀장의 부축을 받고 선실로 내려가 소파에 누웠다. 그가 어디선가 담요를 하나 찾아오더니 덮어 줬다. 고마운데 여전히 입을 열면 토할 것 같아서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그렇게 누워서 한 시간쯤 더 갔을까? 요트가 천천히 멈춰 섰다. 초원은 요트가 다시 움직이지 않을까 싶어 잠시 기다리다가 밖에서 나는 낯선 목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선실 밖으로 나가자 못 보던 중년의 남자와 젊은 남자 하나가 물에 흠뻑 젖은 채로 검은 옷을 입고 갑판에 서 있었다. 초원은 젊은 남자에게 눈인사를 했다. 코가 유난히 긴 남자는 예전에 청에서 본적이 있었다. 본 모습은 천년 묵은 자라라고 했던가.

초원은 보트 뒤쪽에 서 있는 팀장 옆으로 갔다. 여기가 어디길래 인계 장소로 잡았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망망대해뿐이었다.

“아이고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특관청 실장이 중년의 남자와 악수를 했다. 남자들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긴, 바닷속에 사는데⋯.’

인어는 젊은 남자와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더니, 신나게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초원은 민망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민망해서 고개를 돌린 모양이었다. 하필 이럴 때 눈이 마주친 게 더 민망해 초원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순간 요트 옆으로 희끄무레한 게 휙 지나갔다. 자세히 보니 바닷속에서 사람을 닮은 허연 동물 여러 마리가 요트 주변을 둥글게 돌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풍덩 소리가 들려 앞쪽을 보니 인어는 이미 바닷속에서 세상 편한 표정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무사히 일을 마쳤단 생각에 긴장이 풀린 초원은 인어를 향해 미소 지었다.

“참,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로 뵙게 돼서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청 쪽에선 최선을 다해 해결했으니까 용왕님께도 잘 좀 전해 주십쇼.”

실장이 부장이라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순간 미끄덩한 게 초원의 발목을 감았다.

“앗!”

초원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다의 냉기가 날카롭게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다. 팔다리를 허우적댔지만 조금도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무언가 육중한 게 그녀를 당기는 느낌이 들어 시린 눈을 억지로 떴다. 아래를 내려다보다 놀란 초원의 입가로 아까운 숨이 터져 나왔다.

수컷 인어였다. 초원의 발목을 꽉 붙들고 있는 수컷 인어 하나. 그 얼굴에 새겨진 비열한 웃음을 보자 겁이 덜컥 났다. 제 식구가 당한 만큼 갚아 주겠다는 뜻인가?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난 도와주러 왔다고요!’

말이 통하지 않는 초원의 속마음이 인어에게 들릴 리 없었다. 숨이 점점 막혔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무슨 수를 써서든 위로 올라가야 했다.

놈의 팔뚝을 다른 발로 밀어 떨어트리려는 순간, 뒤에서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초원의 허리를 감고 끌어 올렸다. 아래에선 코가 긴 자라가 나타나더니 인어의 귀를 깨물었다. 그 고통에 몸부림을 치던 놈의 손아귀가 느슨해졌다.

“하아, 하아.”

초원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마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허리를 감았던 팔은 이제 훨씬 위로 올라와 있었다. 당장 요트 위로 돌아가는 게 더 중요했던 그녀는 힘을 빼고 팔뚝의 주인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잔뜩 젖은 셔츠 아래로 은색 시계가 비쳤다.

‘팀장님 시계 다 망가졌겠네.’

팀장의 걱정 어린 눈길을 내려다보았다. 감사하다고, 죄송하다고 하고 싶은데 초원은 이가 달달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담요를 있는 대로 둘렀는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추워서 떠는 게 아니었으니까.

“초원 씨⋯.”

초원을 선실 소파에 앉혀 놓고 그 앞에 쪼그려 앉은 팀장에게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초원은 담요 하나를 걷어 그에게 내밀었다.

“아니, 난 괜찮으니까 초원 씨 덮어요.”

그렇게 말하며 담요를 다시 덮어 주는 팀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거라도 좀 쓰면 나을라나?”

선장이 등유 난로를 어디선가 꺼내와 켰다.

“감사합니다.”

입이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초원을 대신해 팀장이 인사를 했다.

“가방에 갈아입을 옷 있죠?”

고개를 끄덕이자 팀장이 몸을 일으키더니 선실 밖으로 나갔다.

초원은 바닥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제야 제가 맨발이란 걸 눈치챘다.

‘구두 큰맘 먹고 산 건데⋯. 아직 할부도 남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주인 없이 외로이 바닷속을 헤맬 빨간 구두 생각에 눈물이 터졌다.

눈물을 훔치다가 가방을 들고 선실로 돌아오던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초원의 옆으로 와 앉았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던 팀장은 우두커니 앉아만 있더니 두꺼운 담요 위로 초원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초원은 진정이 되기는커녕 더 눈물이 터졌다.

등을 쓰다듬던 손이 어깨에 감기고 초원의 몸을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밀어낼 기운이 없었던 그녀를 안고 그는 아이를 어르듯 몸을 흔들었다.

초원은 소금기에 젖은 옷을 벗어 호텔 침대 위로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안으로 들어가 샤워기를 최대한 뜨겁게 틀자 욕실 안에 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며 욕조에 웅크리고 앉았다.

자꾸 무겁게 눈앞으로 늘어지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던 왼손가락 끝에 울퉁불퉁한 흉터가 닿았다. 20년 가까이 지나도 흉터의 무뎌진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 또 한 번 죽음의 문턱 가까이 다가갔구나.

화가 났다. 왜 나는지도 모르고, 받아 줄 사람도 없는데 초원은 욕조에 홀로 앉아 벽을 보고 화를 냈다.

이내 스스로 한심하단 생각이 들어 샤워기를 끄고 욕조 밖으로 나왔다. 타월로 대충 물기를 닦는데 이마가 아렸다. 김이 서린 거울을 문지르고 들여다봤더니 이마에 작은 혹이 나 있었다. 요트에서 떨어질 때 부딪혔나 보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나와 잠옷을 꺼내 입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웠다. 유리창 너머로 검은 바다가 거칠게 출렁이고 있었다. 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자 초원은 등을 돌리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려 했지만 속에서 출렁이는 온갖 감정에 휩쓸리기만 했다. 짜증스럽게 이불을 뒤집어쓰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하⋯.”

초원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문을 열자 팀장이 하얀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초원은 표정을 풀었지만 가라앉은 기분이 자꾸만 입꼬리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배 안 고파요? 새벽에 밥 먹고 거의 먹은 게 없을 텐데.”

“별로 입맛이 없어서요.”

“그럴까 봐 전복죽 사 왔는데 한술이라도 떠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내미는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초원은 방문을 조금 더 열었다.

“들어오실래요?”

초원은 팀장이 사다 준 연고를 혹 위에 얇게 바르고 욕실을 나왔다. 그는 창문가 테이블에 음식을 펼쳐 놓고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고 있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자리에 앉으며 빈 종이컵을 내밀었다. 전복죽에 소주라니 생각도 못 해 본 조합이다. 곧바로 컵을 비우고 죽을 한술 떠 입에 넣었다.

“아, 맞다. 잘 먹겠습니다.”

아직도 넋이 나갔는지 염치없이 감사 인사도 까먹었다.

“뭘⋯. 먹을 만해요?”

“맛있네요.”

사실 여전히 입맛이 없었다.

“나는 물회 사 왔는데. 덜어 줄까요?”

“아뇨. 괜찮아요. 오늘은 회가 별로 안 땡기네요.”

씁쓸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역시나 씁쓸하지만 웃음기 없는 표정의 그가 마주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요?”

“근처 횟집에 있다던데⋯.”

“팀장님은 안 가세요?”

“별로⋯. 지금 윗사람 비위 맞춰 줄 기분도 아니라서⋯.”

초원에겐 하늘 같은 윗사람인 팀장도 누군가에겐 아랫사람이긴 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사람은 여기서 아랫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그냥 팀장님이 누군가의 아랫사람이란 게 안 와 닿네요.”

팀장이 피식 웃더니 소주를 들이켰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니 새삼 어색했다.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날 때부터 슈트를 입고 태어났을 것 같은데.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팀장이 당황한 듯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초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얇은 잠옷 아래로 속옷은 하나도 입지 않았다는걸.

평소 같으면 부끄러워서 당장 뭐라도 더 걸쳐 입었겠지만, 오늘은 모든 게 의미 없었다.

‘알 게 뭐야. 팀장님도 성인인데 여자 가슴 이렇게 생긴 거 모를까 봐.’

초원은 전복죽이나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두 사람은 별말 없이 계속 소주를 마셨다. 술기운이 오르니까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울적해져 초원은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을 쉬었다.

“뭍이나 바다나 다 똑같나 봐요. 제일 만만해 보이는 상대한테 분풀이하는 건⋯.”

팀장은 말없이 종이컵만 만지작거렸다. 하긴, 여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안해요, 초원 씨. 내가 옆에 있었는데 막지도 못하고⋯.”

문득 기시감이 든 초원은 풋 하고 웃었다.

“차 주임님도 전에 그 소리 했는데.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팀장은 말이 없었다.

“팀장님도 그렇고, 차 주임님도 그렇고 왜 본인 잘못이라고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제게 일어난 불행에 타인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싫었다. 그런 사람은 하나로도 버거웠다. 다 내 잘못이어서 네가 아픈 것도 모자라 꿈도, 평범한 행복도 포기해야 했다며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지고 사는 엄마만으로도 버거웠다.

“그게 팀장과 파트너의 의무니까. 초원 씨도 차 주임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책하지 않겠어요?”

“그거야 그렇겠죠. 하아, 제 말은⋯. 제가 너무 까칠하게 말했는데, 여튼 제 말은 팀장님 잘못 아니니까 미안해하실 필요 없다는 거였어요.”

이 말마저 까칠했다. 사실은 구해 줘서 고맙다고, 힘들 때마다 이렇게 챙겨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밖에 못할까?

‘나 진짜 못났다.’

은인 앞에서 쓸데없이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객기나 부리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초원은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초원 씨 피곤한 것 같은데 쉬어요. 난 가 볼게요.”

‘이것 봐. 팀장님도 내가 얼마나 한심하시겠어.’

대답도 못 하고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 그런데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초원의 손이 제멋대로 그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가지 마세요⋯.”

또 바보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

“안전 교육 아직 안 받은 사람들은 상반기 끝나기 전까지 완료해 주세요.”

팀장이 회의실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네.”

초원도 교육 아직 안 받은 사람이지만 팀장의 왼손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하는 걸 까먹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목 위의 시계를 바라보다가.

팀장을 처음 만난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손목을 차지하고 있던, 그래서 팀장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던 은색 시계가 울릉도에서의 그날 이후로 자취를 감췄다.

초원은 손목 위의 갈색 가죽 밴드를 언짢은 마음으로 응시했다. 다른 시계를 차고 있으니 팀장이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못 고친 건가?’

어두운 호텔 방,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창밖의 검은 바다를 응시하던 그의 실루엣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따금 서로 말이 없어지면 옆에 누운 초원의 머리를 쓰다듬던 다정한 손도.

“팀장님⋯.”

“네?”

“죄송해요. 시계 못 쓰게 됐겠네요.”

초원은 허전해 보이는 그의 손목에 손을 조심스레 얹었다.

“괜찮아요. 고치면 되니까.”

그 손을 커다란 손이 덮더니 어르듯 토닥였다.

“수리비는⋯.”

“됐어요. 비싼 것도 아니고.”

초원을 내려다보며 슬며시 웃은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넘기기 시작했다.

‘비싸 보이던데⋯.’

평소의 그녀라면 타인의 손길이 사적인 부위에 와 닿는 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마음에 균열이 간 그녀는 작고 나약한 동물처럼 웅크리고 팀장의 따뜻한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내일이면 타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을 후회하게 될 걸 알면서도.

그의 손길이 왼쪽 귀 뒤편에 닿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파요?”

“아뇨, 그냥⋯.”

“울퉁불퉁한데, 아까 다친 거예요?”

초원을 내려다보는 두 눈에 진심 어린 걱정이 새겨져 있었다. 어쩐지 그게 마음에 들어 괜히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어릴 때 수술한 자국이에요.”

“수술?”

“뇌종양 때문에⋯.”

“그랬구나. 몰랐네.”

팀장의 입꼬리가 더욱 처졌다. 수술 자국을 덮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더없이 부드러웠다.

“지금은 괜찮아요?”

초원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동정이 아니라 아픔을 느끼는 얼굴이었다. 남들과는 다른 반응에 초원은 울컥했다.

힘들었다. 암에 걸린 후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인생을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려 아등바등 살아왔다. 그 20년을 두고 한마디 소감을 밝히라면 ‘힘들었다.’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까지 ‘힘내.’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힘들었겠다.’라는 말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그랬다 할지라도 누가 ‘힘내.’라고 하면 채찍으로 후려쳐진 느낌이었다. 지금도 젖먹던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데 겨우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듯.

그 속을 들여다본 듯한 “많이 힘들었겠구나.”라는 말에 초원은 또 바보같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 오늘 정말 왜 이러니.’

들썩이는 어깨에 단단한 팔이 감기더니 흉터 위에 살포시 입술이 닿았다.

‘헉, 팀장님 왜 이러시지?’

오늘 평소 같지 않은 사람은 초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 이건 좀 위험한데⋯.’

빨간 불이 깜빡이는 머릿속과는 달리 몸은 쨍쨍한 그린 라이트였다. 고개를 돌려 입술을 포개고 싶어 하는 몸과 이건 아니라며 팀장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팀장은 얼굴을 감싼 초원의 손에 입술을 지그시 누르더니 등을 쓰다듬었다.

묘한 행동이 계속 이어지자 놀라 눈물이 쏙 들어갔다. 얼굴을 묻었던 손을 천천히 떼고 눈물을 훔쳤다. 겨우 한 뼘 떨어진 거리에서 팀장이 턱을 괸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일 것 같아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죄송해요. 저 오늘 좀 제정신이 아니네요.”

“괜찮아요. 힘든 하루였잖아요.”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뜨거운 손가락이 쓸어 넘기더니 물기 어린 뺨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초원 씨 잠들 때까지 있어 줄게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귓속을 울렸다. 등을 애틋하게 쓰다듬고 있는 저 손까지 그 울림이 퍼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아, 팀장님!”

느닷없는 아름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초원은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회의실을 조심스레 훑어보았지만, 다행히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곧 생일이신데 케이크는 어떤 거로 사드릴까요?”

3팀은 생일인 사람이 원하는 케이크를 사서 다 같이 축하하는 식으로 생일을 챙겼다.

“난 상관없으니까 여러분 먹고 싶은 거로 사세요.”

팀장은 아름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도 차 장난 아니다⋯.’

그날 밤과 오늘의 팀장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이 집 잘하네.”

갓 튀겨 나온 돈가스를 한입 베어 문 현우가 감탄했다. 돈가스 귀신인 그가 근처 백화점에 새로 생긴 집에 가 보고 싶다고 해 오늘 저녁은 돈가스였다.

“새우튀김 한 입 먹을래요?”

현우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새우튀김을 집어 내밀었다. 귀하디 귀한 새우튀김의 첫입을 허락하다니.

‘이거, 사랑인가?’

그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풋 웃으며 초원은 튀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새우튀김을 현우가 망설임 없이 입에 무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초원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또 사소한 행동에 의미 부여하기는⋯.’

초원은 고개를 숙이고 눈앞의 돈가스에나 집중하기 시작했다.

“근데 아까 회의 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했어요?”

초원이 회의 때 멍 때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물어보는 이유가 뭘까? 가끔 이 남자는 이상하게 촉이 좋을 때가 있었다.

“시계요.”

“시계?”

“손목시계.”

“지름신 강림했구나, 하하.”

여기까진 촉이 발달 안 해서 다행이네.

돈가스를 다 먹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길, 현우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시계 있는데.”

초원은 그가 가리킨 쇼윈도로 향했다. 진열장 조명 아래로 은빛 손목시계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거 좀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건 남자 시계고 여자 시계는 이쪽인데.”

진열장 반대편을 가리키는 현우에게 초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선물하려고요.”

“아, 초원 씨 아버님 사 드리려고?”

초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속에서 올라오는 웃음을 참았다.

‘오피스 대디도 아빠는 아빠지.’

몸은 딴소리를 하겠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챙겨 주고 보살펴 주는 팀장은 듬직한 아빠 같은 느낌이었다. 차가워 보여도 부하 직원을 아껴야 할 땐 또 철저히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날 밤 팀장이 초원에게 묘한 행동을 한 건 다 팀의 리더로서 부하 직원을 보듬어 준 것뿐일 거다. 그래야만 했다. 그 잘난 팀장이 말단 직원인 데다 가진 것 없는 제게 사적인 흥미를 품고 있을 리가 있나. 규정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분인데 본인의 커리어에 흠만 될 일을 그 완벽하신 분이 할 리가 없지. 초원은 확실한 근거와 논리로 뒷받침된 가장 쉬운 답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만 했다.

‘그러니까 사 드려도 오해는 안 하실 거야.’

마침 팀장의 생일도 다가오니 괜찮을 것 같았다.

‘이걸로 사 드릴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초원은 노란 조명 아래 반짝이는 은빛 시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근데 취향에 안 맞으면 어쩌지? 쓰시던 거에 비하면 싸구련데⋯.’

초원의 자그마하고 귀여운 통장 잔고로는 그가 원래 쓰던 브랜드는 시곗줄도 못 살 게 분명했다.

“가요.”

초원은 제 속내를 모른 채 쓸데없이 이 시계 저 시계 비교해 주던 현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초원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상자에 담긴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히 샀나?’

며칠을 고민하다 팀장의 생일 하루 전인 오늘 ‘에라, 모르겠다.’하고 지른 시계였다. 과감하게 카드를 긁긴 했는데 사는 것보다 주는 게 더 어려운 일일 줄이야.

‘안 좋아하시면 어쩌지? 내가 마음 있다고 생각하셔도 곤란한데.’

초원은 머릿속으로 10,328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려 보았다.

[경우의 수 #1,046]

똑똑, 팀장실 문을 두드리고 살짝 열었다.

“팀장님.”

“네.”

“바쁘세요?”

“네, 지금 좀 바쁜데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오세요.”

“⋯네.”

‘흠, 이거 좀 가능성 있지.’

[경우의 수 #4,391]

똑똑, 팀장실 문을 두드리고 살짝 열었다.

“팀장님.”

“네.”

“바쁘세요?”

“아뇨, 무슨 일이죠?”

초원은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선물 상자가 담긴 종이 백을 내밀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아, 안 그래도 괜찮은데.”

“저 때문에 시계 망가진 게 죄송해서요.”

팀장은 말없이 종이 백에 찍힌 브랜드명을 응시하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흠, 뭐 일단 생각해서 사 준 거니까 고맙게 받을게요. 그런데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아⋯, 역시 팀장님 수준에 안 맞게 너무 싸구려였구나.’

초원은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으아아아, 이거 최악이다.’

[경우의 수 #9,390]

똑똑, 팀장실 문을 두드리고 살짝 열었다.

“팀장님.”

“네.”

“바쁘세요?”

“아뇨, 들어와요.”

팀장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종이 백을 내밀었다.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나 주는 거예요?”

예상외로 들뜬 반응에 초원은 얼떨떨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종이 백을 받아 든 팀장은 바로 선물을 풀어 보더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시계를 어루만졌다.

“고마워요.”

“마음에 드세요?”

“초원 씨가 사 준 건데 당연하죠.”

애틋한 눈빛으로 초원을 바라보던 팀장이 책상 서랍을 열고 뒤지기 시작했다.

“초원 씨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네.”

서랍 밖으로 나온 손에는 민트색 반지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헐⋯.’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초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초원 씨⋯.”

“자, 잠시만요, 팀장님.”

말리려고 손을 내저었는데 왼손이 덥석 잡혔다.

“초원 씨, 이렇게 회사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어요. 김 차사가 따라오라고 하는 그날까지 하루의 시작과 마지막을 초원 씨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아, 저기 팀장님⋯.”

“저와 결혼해 주세요.”

반지 케이스가 열리고 거대한 에메랄드 컷 다이아몬드가 그 눈부신 위용을 드러냈다. 초원은 그 반짝임에 눈이 멀어 2캐럿 다이아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약을 했길래 이런 생각을 하냐, 홍초원?’

[경우의 수 #10,328]

똑똑, 팀장실 문을 두드리고 살짝 열었다.

“팀장님.”

“네.”

“바쁘세요?”

“아뇨, 들어와요.”

초원은 종이 백을 내밀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팀장이 얼떨떨하지만 기쁜 얼굴로 선물을 받아 들었다.

“이런 거 안 해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상자를 연 팀장이 가만히 시계를 어루만졌다.

“저 때문에 시계 못 쓰게 됐잖아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팔짱을 꼈다.

“이거 못 받겠는데?”

“왜요? 김영란법 때문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혹시 마음에 안 드세요? 다른 거로 바꿔 드릴 수도 있는데.”

“그러죠, 그럼. 사실 내가 받고 싶은 건 따로 있거든.”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초원의 허리를 휘감고 끌어당겼다.

“앗, 팀장님.”

맞닿은 아랫배를 단단한 무언가가 짓눌렀다.

“시계 대신 홍 주임 몸을 가져도 될까?”

“아, 저기⋯.”

“대답은 필요 없어.”

예고 없이 저돌적으로 변한 팀장의 태도에 덜컥 겁이 난 그녀는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썼다. 그는 놔주기는커녕 초원의 몸부림이 더 자극이 되는지 점점 눈빛이 야수의 그것으로 변해 갔다.

“팀장님, 제⋯.”

‘발’은 팀장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모든 게 거칠었다. 초원의 여린 입술을 집어삼키는 입도, 블라우스와 브라를 잡아 뜯고 연한 젖가슴을 움켜쥔 오른손도, 스커트 속을 파고 들어가 스타킹을 찢고 팬티를 아래로 끌어 내리는 왼손도⋯.

도저히 공무원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없는 꼴이 된 그녀를 팀장이 책상 끄트머리에 앉히더니 무릎을 꿇었다. 곧 일어날 일이 두려웠던 초원은 허벅지를 힘주어 닫았다.

“벌려요, 홍 주임.”

그의 위압적인 명령에 초원은 숨을 몰아쉬며 애원하듯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팀장 말이 우습나?”

팀장의 두 손이 그녀의 종아리를 우악스럽게 틀어잡고 억지로 벌렸다. 은밀한 치부를 상사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수치심에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곳을 눈빛으로 희롱하던 팀장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젖었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뜨거운 입술이 계곡의 초입을 베어 물듯 삼키더니 축축한 혀가 부풀어 오른 살점을 훑었다. 팀장의 어깨에 걸쳐진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이렇게 맛있는 걸 왜 보고만 있었을까?”

얼굴을 든 그가 번들번들하게 젖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틈에 잠시 숨을 고르던 초원은 굵고 긴 손가락 하나가 예고도 없이 숨겨진 속살을 찌르고 들어오자 놀라 허리를 비틀었다.

“하아, 읍⋯.”

입술 사이로 신음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초원은 자취방 침대에 멍하니 걸터앉아 눈치 없이 가빠진 숨을 골랐다.

‘음란마귀야 썩 물럿거라!’

언행 불일치의 아이콘인 그녀는 서랍을 열고 검은 천 주머니를 꺼냈다. 결국 선물 상자는 서랍 깊숙이 봉인된 신세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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