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말 잘 듣는 착한 홍 주임
띠링.
폰이 울렸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던 초원은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초원 씨, 오늘 점심 같이 먹어요. ^^]
초원은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을 열고 답장했다.
[아, 어쩌죠? 팀원들이랑 같이 먹기로 했어요. 이따가 퇴근하고 봐요.]
사실 점심을 따로 먹어서 안 될 건 없었다. 그렇지만 괜히 남들 이목을 사는 것도, 팀원들한테 쓸데없이 놀림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아직 정식으로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
몇 주 전, 초원은 심사숙고 끝에 팀장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지만 그게 배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니다.’
물론, 슬슬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벚꽃이 꽃망울을 맺기 시작했기 때문은 아니다, 절대로⋯.
가벼운 연애만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걱정도 덜고, 자신도 덜 외롭고, 현우에 대한 마음도 정리하고⋯. 그러다 보면 또 모르지, 잘돼서 해피엔딩이 될지도.
그렇게 마음먹은 날 초원은 병훈에게 물었다.
“그 회계과 사무관이랑 소개팅, 아직 가능해요?”
이름도 외모도 나이도 모르는 남자였지만, 자꾸 주변에서 그 남자랑 소개팅했냐고 물어보니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초원은 나이 서른셋의 회계과 오원혁 사무관을 만나 토요일 점심때 파스타를 먹고 장미 꽃다발을 받았다.
원혁은 현우의 말대로 괜찮은 사람 같았다. 초원은 남자의 애프터 신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같은 직장에 다녀서 초원이 하는 일을 이해한다는 건 놓칠 수 없는 장점이었다.
그러다 두 번째 데이트가 세 번째가 된 날, 원혁이 말했다.
“초원 씨, 진지하게 만나 보고 싶습니다.”
초원은 부담스러웠다. “진지하게”라니.
‘이미 결혼은 생각 없다고 소개팅 날 말했는데⋯.’
역시 그런 걸까. 결혼 적령기의 남자와 가벼운 연애라니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
이쯤에서 끝낼까 했지만 초원은 좀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원혁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이제 세 번 만났는데⋯. 좀 이른 것 같아요. 저는 시간이 더 필요해요.”
초원은 직장 사람들에겐 말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이 좁은 청에서 사내 가십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다음 월요일부터 특이생물3팀 홍 주임이 회계과 오 사무관과 썸을 탄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사귄다고 안 난 게 어디야⋯.’
초원은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닫았다.
오늘 점심은 백반집에 모처럼 팀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한 팀이 다 모였다. 한참 식사를 하던 승준이 참다못해 물었다.
“홍 주임, 요즘 연애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
“아, 제가 홍 주임, 회계과 오원혁 사무관이랑 소개팅시켜 줬거든요.”
질문은 초원에게 했는데 엉뚱하게 병훈이 끼어들자 승준은 짜증이 치밀었다.
“아, 그게⋯.”
“아직 사귀는 거 아니래요.”
이번엔 초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현우가 먼저 나섰다. 초원은 왜 자신의 연애사를 당사자는 빼고 남들만 이야기하는지 당황스러웠다.
“중매 잘 서면 술이 석 잔이라는데, 홍 주임 나 술 언제 먹여 줄 거야?”
“뺨 석 대 맞을 준비는 안 하세요?”
초원은 병훈의 뺨을 당장이라도 내려칠 기세로 숟가락을 세워 들었다. 화제를 바꿔야 했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이 집 되게 괜찮지 않아요? 된장찌개에 꽃게도 들어 있네.”
“근데 그거 발라 먹기 되게 번거롭지 않아요? 대게 정도 사이즈면 모를까⋯.”
아무렇게나 던진 말을 다행히 현우가 덥석 받았다. 그리고 그걸 맞은편에 앉은 아름이 덥석 뺏어 또 아무렇게나 던졌다.
“대게 이야기하시니까 먹고 싶다. 친구들이 저번 주에 영덕에 대게 먹으러 갔다 왔는데 엄청 맛있었대요. 현우 주임님, 초원 주임님, 우리 대게 먹으러 가요.”
“어디요? 영덕에?”
현우가 놀라 물었다.
“네!”
“엄청 먼데⋯.”
“4시간 반 정도 걸린대요. 그래도 바다도 보고 맛있는 대게도 먹고 좋잖아요.”
“대게 맛있지⋯.”
초원은 이제 게딱지에 밥 비벼 먹을 생각뿐이었다.
“그럼, 이번 토요일에 어떠세요?”
아름이 신이 나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아⋯, 나 약속 있는데⋯.”
초원의 말에 잠자코 식사를 하던 승준의 미간이 꿈틀댔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어? 나 장산범 때문에 주말에 부산 가려고 했는데⋯. 홍 주임은 그럼 못 가요?”
간만에 그럴듯한 장산범 제보를 받은 현우는 주말에 부산으로 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럴 땐 늘 초원도 함께했기에 이번에도 같이 갈 줄 알았던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미안해요. 선약이 있네요.”
현우가 여느 때처럼 불쌍한 강아지 눈으로 애원했지만 초원은 한숨만 옅게 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원 주임님, 제발요⋯. ㅠ_ㅠ]
점심을 먹고 온 다음부터 아름은 사내 메신저로 초원에게 조르고 있었다. 현우와 데이트를 하려고 별일을 다 꾸며 봤지만, 그는 좀처럼 넘어오지 않았다. 초원과 같이 가자고 하면 넘어올 줄 알았는데, 이번엔 그 망할 장산범이⋯.
[그럼 그냥 다음 주말은 어때요?]
[아아 주임님, 저 진짜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ㅠ_ㅠ 현우 주임님은 장산범 일요일날 찾으러 가시면 되잖아요.]
[그럼 아름 씨가 따라간다고 해 봐요. ㅎㅎㅎ]
[그건 쫌, 무서운데;;;; 초원 주임님, 토요일날 약속 오 사무관님이랑 있는 거죠?]
[네]
[그럼 사무관님도 같이 오시면 넷이서 더블데이트하고 좋잖아요. 그쵸?]
아름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초원과 원혁이 알콩달콩하며 분위기를 잡아 주는 사이 자신은 현우와 가까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글쎄;;]
[아, 주임님 ㅠ_ㅠ 제발요⋯. 현우 주임님한테 장산범은 일요일날 찾으러 가라고 설득 좀 해 주세요.]
[그럼 내가 말해 볼 테니까 잘되면 숙소랑 차편은 아름 씨가 알아서 예약해요. 물론 돈은 나눠 내는 거지만요.]
[아유, 그 정도야 당연하죠! >_<]
초원은 채팅창을 닫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우 선배, 바빠요?”
“응? 왜요?”
“선배 부산 가는 거 일요일에 하면 안 돼요? 월요일에 연가 내면 되잖아요.”
“왜요?”
“대게 먹으러 영덕 가요. 아름 씨랑 회계과 오 사무관님도⋯.”
현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초원은 이게 뭐가 그렇게 기가 찬 건지 알 수가 없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웃어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현우는 잠시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럼 홍 주임도 월요일날 연가 내요. 토요일에 영덕 가서 대게 먹고 일요일은 우리끼리 부산 가면 되겠네요.”
초원은 어쩐지 말려든 기분이 들었지만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식을 들은 아름은 날아갈 것 같았다.
[꺄! 초원 주임님 최고! >_<]
[ㅎㅎㅎ;;]
[주임님, 방은 오 사무관님이랑 같이 쓰실 거예요? *-_-*]
[아뇨. 따로 잡아 주세요. 제발. 아직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 -_-]
“⋯그래서 토요일에 영덕 가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시간 괜찮으면 가실래요?”
“아, 저야 좋죠.”
원혁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설마 1박이라고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초원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아름 씨한테 제가 얘기해 둘게요.”
“오늘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요, 초원 씨?”
“글쎄요. 지금까진 제가 먹고 싶은 거 먹었으니까 오늘은 원혁 씨가 먹고 싶은 거로 먹어요.”
“흠⋯, 내가 먹고 싶은 거라⋯. 초원 씨가 안 좋아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저 안 가리고 다 잘 먹어요. 뭔데요?”
“닭발이요.”
초원은 아직 내숭이 필요한 사이에 닭발은 좀 아니지 않나 싶었지만 닭발은 맛있으니까⋯.
“네, 저 닭발 좋아해요.”
원혁이 활짝 웃으며 차 시동을 걸었다.
닭발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매운 숯불 닭발과 소주를 시켰다. 닭발이 익기 기다리면서 둘은 오늘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초원은 원혁을 만날 때 이 순간이 제일 좋았다. 회사 밖 사람들에겐 못 하는 이야기, 팀원들은 이미 다 알아서 할 필요 없는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이 생겼으니까.
닭발이 다 익자 둘은 소주잔을 부딪쳤다. 초원이 닭발을 주먹밥 위에 올리고 입에 넣는 모습을 보던 원혁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초원 씨 의외네요.”
“네?”
“이런 거 잘 못 드실 것 같이 생기셨는데⋯.”
“왜요?”
“이슬만 먹을 것 같이 생기셔서 이렇게 징그럽게 생긴 것도 잘 드시고⋯.”
‘농담인가?’
농담이라기엔 원혁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초원은 당혹스러웠다. 그럼 이런 거 잘 먹게 생긴 건 어떻게 생긴 건가 묻고 싶었다.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이라니⋯. 그래,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한 소리겠지. 근데 잘 먹고 있는데 징그럽게 생겼단 말은 왜 한담?’
“제가 사실 파스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좋아하시니까 간 거거든요.”
“그렇구나⋯.”
잘 먹어 놓고 이제 와서 안 좋아한다니 조금 당혹스러웠다.
“혹시 알탕은 드세요?”
“음, 국물만 먹어요.”
“잘됐네요. 저는 건더기 좋아하는데. 하하.”
그 후로도 원혁은 ‘닭은 퍽퍽 살과 다리 살 중 뭘 좋아하는지’, ‘냉면은 물냉인지 비냉인지’, ‘고기는 비계가 좋은지 살코기가 좋은지’를 물었다.
눈치가 좀 없지만 그래도 착하고 재밌는 사람. 초원은 신나서 계속 이것저것 묻는 원혁을 보며 생각했다.
둘이서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닭발집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 원혁의 손이 자꾸 스쳐 왔다.
‘뭐, 그래 손쯤이야.’
초원은 모른 척 손을 잡도록 내버려 두었다.
차로 돌아와 원혁은 뒷좌석 문을 열고 초원을 먼저 들여보낸 후 옆에 앉았다. 원혁이 대리운전 기사를 부르는 동안 초원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주차장을 가로등 몇 개만이 듬성듬성 밝히고 있었다.
‘별일 없겠지?’
지금까진 이 남자와 별일 없었지만, 인적 드문 곳, 좁은 차 안에 단둘이 있으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초원은 특수 훈련을 받은 요원이었고 핸드백에는 현장 요원에게 지급되는 권총도 있었다.
“5분 안에 온다네요.”
원혁은 앞좌석으로 몸을 숙여 시동을 켰다. 라디오에서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초원 씨, 벌써 집에 가긴 아쉬운데 한잔 더 하러 갈래요?”
“아뇨. 내일 출근해야죠.”
“에이⋯. 그럼 영화라도 보러 갈까요?”
“지금요? 술 냄새 나는데?”
“나는 초원 씨랑 더 있고 싶은데⋯.”
원혁이 초원의 오른손을 쓰다듬으며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
‘지금? 닭발이랑 마늘이랑 소주를 그렇게 먹고?’
원혁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초원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뒤로 뺐지만 남자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눈치가 좀 많이 없으시네.’
원혁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초원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핸드백 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군진 몰라도 삼대가 복 받을 거예요!’
초원은 냉큼 핸드폰을 꺼내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받았다.
“여보세요.”
[홍 주임.]
이 중저음은 누가 뭐래도 팀장이었다.
[지금 어디죠?]
“네? 공덕입니다.”
[지금 합정에서 4153번 개체가 술 취해서 폭주하고 있다니까 당장 차 주임이랑 가 보세요. 격리팀은 이미 가고 있는 중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초원은 4153번 개체가 혹시 자신의 마음을 읽었나 싶었다. 그녀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원혁 씨, 미안한데 나 지금 일 때문에 가 봐야 해요.”
“아, 그래요? 태워줄까요?”
“아뇨, 차 밀리니까 지하철 타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초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원혁에게 손을 흔들고 지하철역으로 걷는 길, 바깥 공기가 새삼 이렇게 상쾌했나 싶었다.
***
“아, 그게 너무 어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니, 지은 씨⋯.’”
초원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내비게이션을 들여다봤다. 2시간 반이나 더 아름이 끝없이 조잘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꼭 이럴 땐 안 졸리더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초원은 간밤에 누가 머리를 발로 뻥뻥 차고 지나간 건 아닌가 싶었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오늘 날씨가 우중충해서 그런가.’
진통제 한 알을 먹고 침대에 누워 두통이 잦아들길 기다리면서, 오늘 약속을 취소할까 고민했다.
‘대게 되게 먹고 싶었는데⋯.’
다행히도 30분 정도 지나자 머리를 쪼갤 것 같던 통증이 약간 지끈거리는 정도로 나아졌다. 그래서 가는 길에 차에서 쉬면 괜찮겠거니 생각해서 왔는데, 아름이 이렇게 쉴 새 없이 떠들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초원 씨, 머리 아파요?”
운전을 하던 현우가 백미러로 초원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조수석에 앉은 아름이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더니 앵무새처럼 현우의 말을 따라 했다.
“초원 주임님, 머리 아프세요?”
“아, 그냥 두통이 좀⋯. 날씨가 흐려서 그런가 봐요.”
초원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약은 먹었어요?”
현우는 자기가 아프기라도 한 듯 초원을 따라 눈을 찡그렸다.
“네, 집에서 먹고 왔어요.”
“그래도 아파 보이는데, 한 알 더 먹지 그래요?”
“흠, 그게 까먹고 안 가져와서⋯.”
운전석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프면 그냥 집에서 쉬지 그랬어요?”
“괜찮아요. 대게는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한숨 자면 낫겠죠.”
초원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초원 씨, 누워서 갈래요? 제 무릎 베고 누워서 한숨 자요.”
옆에 있던 원혁이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리고 초원은 아직 그건 좀 아니지 싶었다.
“그럼 안전벨트 못 하잖아요. 괜찮아요.”
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젠 좀 조용히 갈 수 있으려나?’
“제가 어디까지 말했죠? 아, 그래서 제가 그다음부터는⋯.”
초원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음악을 최대 볼륨으로 틀었다.
겨우 잠이 들었을 때, 원혁이 어깨를 두드렸다.
“초원 씨, 우리 휴게소 왔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점심 먹고 자요.”
초원은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괜찮아요?”
원혁이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네, 괜찮아요.”
초원은 여전히 눈을 다 못 뜬 채로 웃어 보였다.
“저 오늘 점심 싸 왔는데⋯.”
휴게소로 들어가는 길에 아름이 도시락 가방을 보란 듯 들고 살짝 흔들었다.
“오, 아름 씨 대단하네요. 직접 싼 거예요?”
“네!”
초원은 어쩐지 신나 보이는 원혁과 아름을 보며 이편도 잘 어울리지 않나 싶었다.
“와, 차 주임님, 아름 씨가 도시락 싸 왔다네요.”
초원이 미리 귀띔해 놔, 이 도시락이 누구를 향한 건지 이미 아는 원혁은 현우의 반응을 끌어내려 했다.
“아름 씨 피곤할 텐데, 안 그래도 되는데⋯.”
“아녜요. 이 정도야 뭐. 그냥 맛있게 드셔주시면 돼요.”
아름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대단한 정성이네. 난 이제 나이 드니까 귀찮은데.’
초원은 자신도 저렇게 열정이 넘쳤던 때가 언제였나 싶었다. 그 사람이랑 사귈 땐, 가끔 저렇게 정성 들여 도시락도 싸고 요리도 했었다. 지나고 나니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넷은 우동 세트 하나를 시키고 아름이 싸 온 도시락을 폈다. 도시락에는 갖가지 모양으로 자른 과일과 유부초밥, 미니 샌드위치 같은 게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와, 아름 씨가 이걸 다 만든 거예요?”
원혁이 감탄하자 아름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다. 진짜 힘들었겠는데⋯.”
“아녜요.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죠.”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는데⋯.’
초원이 긴 연애를 끝내고 서른이 가까워져서야 깨달은 건, 연애도 직장 생활처럼 해야 한다는 거였다. 잘해도 못하는 척. 작은 공은 크게 부풀리기, 큰 공은 더 크게, 절대 겸손한 척하지 말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애든 직장 생활이든 호구 신세가 되는 것이다.
‘아름 씨도 언젠간 알게 되겠지.’
초원은 유부초밥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아름 씨, 요리 잘하네.”
초원의 칭찬에 아름은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으쓱했다. 정작 도시락의 주인공인 현우는 잘 먹겠다는 말만 하고 별 반응이 없었다.
‘선배, 이미 알고 있구나.’
적극적으로 대시하면 적극적으로 도망가는 남자. 아름의 마음을 눈치챈 현우는 평소의 다정함은 어디 갔는지 철벽을 치고 있었다.
‘하긴, 괜히 여지를 주느니 저게 낫지⋯.’
“잠깐, 화장실 좀⋯.”
현우가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아름이 울상을 지었다.
“현우 주임님 오늘 기분 안 좋으신가 봐요.”
“그런가?”
초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니 좀 살 것 같았다. 남은 우동 한 가닥을 집어 드는데, 자리로 돌아온 현우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몇 시에 약 먹었어요?”
“7시쯤이요.”
“지금 한 시니까 약효 떨어질 때 됐네요.”
원혁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자신이 챙겨야 할 여자를 딴 남자가 챙기게 내버려 두다니.
“고맙습니다, 차 주임님.”
원혁은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켜보고자 현우에게 뜬금없는 감사 인사를 했다.
원혁과 아름의 묘한 시선을 받고 있으니 약이 아니라 모래를 삼키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불여시라도 된 것 같아 앉은 자리가 불편했다.
“음⋯, 난 좀 한숨 자야겠어요.”
초원은 곧바로 차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가는 길 내내 약 덕분인지 푹 잤다. 어쩐지 아름이 아까보다 조용해진 덕도 있었다. 원혁이 다시 흔들어 깨웠을 때는 이미 해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검푸른 바다가 끝없이 이어지고 바위 위로 부서진 파도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초원은 창문을 열고 진한 바다 내음을 한껏 들이 삼켰다. 본가가 인천이라 바다는 자주 봤지만 동해는 서해와는 다른 멋이 있었다.
다행히 영덕은 화창했다. 그 덕인지 두통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차가 펜션 주차장에 멈추고 밖으로 나온 네 사람은 긴 여행으로 굳은 몸을 가볍게 풀고 펜션으로 향했다.
아름이 예약한 방은 2층으로, 방 두 개에 거실, 주방이 있는 오션 뷰 펜션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들 무언가에 홀린 듯 발코니로 향했다.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푸른 펜션 집 마당이 가파른 계단을 사이에 두고 좁은 모래사장과 이어져 있었다.
“밤에 여기서 파도 소리 들으면 좋겠네요.”
“그렇죠, 초원 주임님? 낭만적일 것 같아요.”
아름이 뿌듯하게 웃으며 초원에게 팔짱을 꼈다.
“저녁까진 시간이 남았는데, 이제 뭐 하죠?”
현우가 세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초원 씨, 좀 누워서 쉬어야 하지 않아요?”
원혁이 걱정스럽다는 듯 초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뇨, 차에서 잤더니 이젠 괜찮네요.”
초원은 오늘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네 사람은 아름이 가 보고 싶다는 해상 산책로로 향했다. 푸른 바다 위로 긴 산책로가 이어진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3월의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경치를 감상하며 데크 위를 걷던 초원은 손이 시려 양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원혁이 초원의 두 손을 자신의 손에 가두더니 더운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다.
‘이 사람 나름 귀엽네.’
초원은 새삼스러운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 따라서 씨익 웃던 그는 초원의 오른손을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을 본 아름이 현우에게 물었다.
“초원 주임님이랑 오 사무관님 잘 어울리지 않아요? 주임님은 계속 사귀는 거 아니라고 그러지만, 곧 사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알아서 하겠죠.”
현우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눈을 돌렸다. 평소와 다른 그의 태도에 아름은 속이 탔다.
“주임님, 피곤하시죠? 운전하시느라⋯.”
“아뇨, 괜찮아요.”
현우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주말에 쉬셔야 하는데 제가 괜히 우겨서 여기까지 오신 거 아닌가 싶네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나도 간만에 바다 보니까 좋은데요. 그냥 내일 계획 생각하느라 그래요.”
그제야 현우는 아름에게 미안해졌다.
“과자봉지 내가 뜯어 줄까요?”
아름이 쥐고 있는 새우과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오는 길에 아름이 갈매기에게 주겠다고 편의점에 들러 사 온 과자였다.
멀찍이 걷던 초원과 원혁은 아름이 꺅꺅 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호기롭게 갈매기한테 과자 줄 거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젠 갈매기가 가까이 오자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하, 아름 씨 귀엽다.”
초원은 진심으로 아름이 귀여웠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좀처럼 넘어오지 않는 현우를 향해 직진하는 그 모습이 귀엽고 그 열정이 부러웠다. 저러다 너무 다쳐서 자신처럼 아픔을 피해 가는 요령만 늘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초원 씨가 더 귀여운데.”
그 말에 초원은 원혁에게 눈을 흘겼다.
“에이, 거짓말.”
“정말이에요. 어떻게 하면 믿어 줄 거예요?”
어릴 땐 어른들에게, 커서는 또래 남자들에게 ‘귀염성 없다’, ‘애교가 없다’는 말을 들었던 초원에게 ‘귀엽다’는 말은 자신과 거리가 먼 표현이었다.
초원은 대답 없이 웃기만 하더니 아름과 현우 쪽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갈매기에게 과자를 주는 모습을 지켜보다 심심해진 초원은 산책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높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엇⋯.’
순간 검푸른 바다가 갑자기 솟아올라 초원을 집어삼키는 모습이 번뜩 머릿속을 스쳤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난간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초원 씨, 괜찮아요?”
이상한 낌새를 어느새 눈치채고 다가온 현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아직도 얼음장 같은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 계속 스쳤다.
‘숨 막혀.’
바닷속에 잠긴 듯 귀도 먹먹했다. 세 사람이 하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기분 나쁘도록 미끈한 것이 발목을 감고 그녀를 심해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숨이 막혀 지를 수가 없었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순간, 뒤에서 구릿빛 손 하나가 나타나더니 초원의 허리를 휘감고 위로 끌어 올렸다.
“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초원은 바다 앞 카페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손에는 반쯤 빈 커피 컵이 들려 있었다. 정말 바다에 빠진 건가 싶어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지만 물기는 전혀 없었다.
고개를 들자 세 사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초원 씨, 병원 갈래요?”
“아뇨.”
초원은 현우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픈 거 아니에요. 그냥 잠깐 내려다봤는데 아찔해서⋯. 그냥 어지러웠던 것뿐이에요.”
“진짜 괜찮겠어요?”
“주임님, 힘드시면 펜션에 가서 쉬어요. 네?”
“아뇨, 진짜 괜찮다니까⋯. 당 떨어져서 그런가 봐요. 배고픈데 우리 대게나 먹으러 가요.”
초원은 세 사람의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사람은 아름의 친구들이 추천했다는 횟집으로 향했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술과 반찬이 먼저 나왔다. 원혁이 소주병을 따기 시작하자 초원은 소주잔을 슬쩍 내밀었다.
“초원 씨는 진통제 먹었으니까 술 마시면 안 되잖아요.”
맞은편에 앉은 현우가 손을 뻗어 술잔을 가로막았다.
“현우 선배, 나랑 다니더니 의사 다 됐네요.”
아직도 등줄기에 흐르는 꺼림직한 느낌을 술로 떨쳐 버리려던 초원은 맥이 빠졌다. 현우가 사이다병을 따더니 초원의 술잔에 따랐다.
“뭐예요, 이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는 초원의 잔을 채운 현우는 운전해야 한다며 자신의 잔에도 사이다를 따랐다. 그렇게 둘은 소주로 둘은 사이다로, 네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대게를 기다리면서 반찬으로 심심한 입을 달래려던 초원은 메추리알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평소의 꼿꼿하고 칼 같던 모습은 어디 가고, 술에 취해 그 커다란 손으로 망가질세라 조심스레 메추리알을 까던 팀장이라니.
“저 이거 못 먹는데⋯.”
아름이 자신 앞에 놓인 번데기 접시를 들고 누가 좀 가져가라는 듯 내밀었다.
“나 줘요.”
초원이 접시를 받아 앞에 놓았다.
“으⋯, 초원 주임님 그거 어떻게 드세요? 벌레잖아요. 징그럽지 않아요?”
“맛있는데⋯. 어릴 땐 이거 벌레란 생각 못 하고 그냥 먹지 않았어요?”
“저는 어릴 때도 이건 못 먹었는데⋯.”
초원은 어쩐지 피곤해져서 더 대답하지 않고 번데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초원 씨는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더라고요. 며칠 전엔 퇴근하고 닭발에 소주도 먹었는데⋯. 가리는 거 없이 맛있게 잘 먹는 여자가 좋지 않나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름이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보신탕이랑 추어탕이랑 알탕은 못 먹지 않아요?”
파전을 집던 현우가 무심하게 물었다.
“알탕은 국물은 먹어요.”
“그건 못 먹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거나 매운탕이나 건더기만 다른데, 매운탕 시키면 건더기도 다 먹잖아요.”
현우는 초원의 빈 잔에 다시 사이다를 채웠다.
“흠, 그건 그러네요.”
초원은 제 잔에도 사이다를 따르는 현우에게 의문 어린 시선을 던졌다.
오늘따라 왜 자꾸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걸까.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닌데, 이쯤이면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닐까?
아름을 밀어내려고 초원을 끌어당기는 거라면 원혁에게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아니, 초원에게도 이건 예의가 아니었다.
“원혁 씨, 번데기 먹어요?”
“네, 그럼요.”
“아-.”
초원은 번데기를 집어 어쩐지 황송한 표정인 원혁의 입으로 가져갔다.
현우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초원이 케이크를 들이밀었을 때 평소답지 않게 당황해 눈을 못 떼던 팀장이 떠올랐다.
‘의미 없는 다정함은 범죄라던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게가 접시 가득 얹어 나오자 다들 말없이 먹기 바빠졌다.
먹기 좋게 껍질에 칼집이 나 있었지만 원혁은 계속 다리 살을 발라 초원에게 주었다. 서로 먹으라고, 괜찮다고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보던 아름은 현우를 곁눈질했다.
“아름 씨도 까 줄까요?”
현우는 속으로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안 해 줘도 나쁜 놈, 해 줘도 나쁜 놈일 테니 그냥 해 주고 나쁜 놈이 되는 편이 마음은 편했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름은 젓가락 끄트머리를 빨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소한 게장에 밥까지 잔뜩 비벼 먹고 가게를 나온 네 사람은 이러다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다며 산책을 하기로 했다. 항구를 따라 걷다 보니 마침 시장이 나왔다.
“시장도 걸어 다닐 수 있으니까 산책로죠.”
초원의 말에 넷은 안으로 들어갔다. 30분 정도 지나 시장 밖으로 나오는 손에는 옛날 과자와 갓 튀긴 어묵이 잔뜩 들려 있었다. 넷은 안주가 있는데 술이 없으면 안 된다며 펜션으로 가는 길에 술도 잔뜩 샀다.
펜션으로 돌아와 술판을 벌였지만 혼자 금주령을 당한 초원은 무알코올 맥주만 홀짝였다.
회사 가십 거리가 다 떨어진 넷은 각자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점점 어릴 적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우의 어릴 적 이야기라 하면 장산범을 본 일화를 빼놓을 수 없었다.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현우는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김해에 있는 한 저수지에서 밤낚시를 하다가 어떻게 장산범과 마주쳤는지, 그다음부터 어떻게 장산범을 찾아다녔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이제는 현우 대신 모든 레퍼토리를 읊을 수 있을 정도가 된 초원은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채로 발코니 밖을 응시했다.
검은 바다 위로 달빛이 조각조각 넘실대고 있었다.
‘아까 그건 뭐였을까?’
초원은 맥주 캔 끄트머리를 물며 생각에 잠겼다. 영을 느끼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생생한 이미지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발목을 잡고 끌어당긴 건 누구고, 허리를 감고 끌어 올린 건 누구의 손이지? 어떤 상징이나 암시 같은 건가?’
“그럼 내일 초원 씨랑 같이 찾으러 가는 겁니까?”
초원은 느닷없이 원혁이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놀라 거실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이번엔 좀 보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위험하지 않아요?”
원혁이 초원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무장하고 가는 걸요, 뭐. 그리고 이날까지 한 번도 못 봤는데⋯.”
초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데 밤에 출몰하는 거면 산에서 밤을 새우는 건가요?”
“텐트랑 야영 장비 다 챙겨 가니까 캠핑이나 마찬가지죠, 뭐.”
늘 있는 일이라 현우는 원혁의 속뜻을 눈치채지 못했다.
“둘이서 말이죠?”
원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제야 원혁이 뭘 걱정하는지 깨달은 두 사람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건, 하하. 걱정 안 해도 돼요, 원혁 씨.”
“정 걱정되면 오 사무관님도 오세요. 뭐, 사람 많으면 안 나타날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현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떨떠름한 투로 말했다.
“아름 씨도 올래요?”
아름의 뾰로통한 표정을 본 초원이 물었다.
“아뇨, 전 됐어요.”
갑자기 귀신이라도 지나간 듯 정적이 흘렀다. 다들 어색하게 맥주만 홀짝이는 가운데 아름이 꾸물꾸물 일어섰다.
“답답한데 저 바닷가에 바람 쐬러 갈래요. 가실 분?”
아름이 우물쭈물하는 걸 본 초원은 눈치를 채고 현우에게 눈짓을 했다.
“현우 선배, 이 밤에 아름 씨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니까 같이 가 줘요.”
“그럼 다 같이 가요.”
“아, 난 됐어요. 피곤해.”
“차 주임님이 눈치가 없으시네, 그쵸?”
술이 들어가자 대담해진 건지 원혁이 초원에게 기대며 말했다. 초원은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현우에게 가라고 눈짓을 했다. 현우는 마음에 안 드는 듯 살짝 눈을 흘기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나가고 초원은 어쩐지 숨이 막혀 발코니로 나갔다. 난간에 기대어 파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두 사람이 모래사장을 향해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차 주임이 아름 씨한테 별로 마음이 없나 봐요.”
“그러게요, 아름 씨 안타깝게⋯.”
“아름 씨 정도면 애교도 많고 예쁜데, 차 주임 타입이 아닌가?”
“글쎄요,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초원은 모래사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두 실루엣을 보며 김빠진 맥주를 들이켰다.
“무슨 생각 해요, 초원 씨?”
“그냥, 달빛이 예쁘다는 생각요.”
“달빛도 예쁘지만 초원 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원혁의 팔이 초원의 어깨를 감싸더니 입술에 단단한 손가락이 와 닿았다. 오랜만에 입술 위로 느껴지는 타인의 감촉이 어색했다. 곧이어 손가락이 떨어지고 원혁의 입술이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시원해라, 그쵸?”
“춥지 않아요?”
현우는 꽃샘추위 시즌의 바닷바람을 시원하다고 하는 아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추운데 감기 걸리기 전에 들어가죠.”
현우가 초원과 원혁이 서 있는 발코니 쪽을 바라보며 재촉했다.
“현우 주임님.”
“네?”
“주임님한테 저는 어떤 사람이에요?”
“어⋯.”
현우는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으면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아름 씨는 직장 동료죠.”
“피, 그것뿐이에요?”
“음, 아름 씨는 착하고 사교성 좋고 일도 열심히 하는 좋은 직장 동료예요.”
“아니, 제 말은요⋯. 현우 주임님, 진짜⋯.”
아름은 답답해서 죄 없는 모래를 발끝으로 찼다.
“그런 것 말고 여자로는 어떻게 생각하시냐고요.”
겨우 마음을 표현한 아름은 부끄러워 현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발끝만 한참 쳐다보는데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아름은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름의 말을 못 들은 건지, 펜션 발코니 쪽을 심각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현우의 시선 끝에는 초원의 어깨를 감고 있는 원혁과 그런 원혁의 가슴팍을 미는 초원이 있었다.
“들어가죠.”
그 단호한 목소리에 아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울상이 된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되니까.
“미안해요.”
초원은 차마 원혁의 눈을 볼 수 없었다. 어깨를 두르고 있던 팔이 서서히 힘을 잃고 떨어져 나갔다.
“안 될 것 같아요.”
“뭐가요?”
“더 좋은 사람 만나실 거예요. 죄송해요.”
원혁은 판에 박힌 거절 멘트를 여기까지 와서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요즘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아뇨, 원혁 씨는 좋은 분이에요. 제가 문제죠.”
“혹시⋯, 차 주임 때문인가요?”
“네?”
“두 사람 그냥 파트너라기엔⋯.”
“우리 아무 사이 아니에요.”
초원은 그 말을 내뱉고 잠시 흠칫했다. 아무 사이 아닌 것 치고 우리라는 말은 너무 가까웠다.
“그런 거면 제가 아름 씨랑 이어 주려고 여기까지 왔겠어요? 그냥 제가 문제라 그래요.”
“무슨 문제요?”
초원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다 내쉬는 숨에 대답을 쏟아 냈다.
“원혁 씨는 진지한 관계를 원하시잖아요. 저는 전에 말했던 것처럼 결혼 생각도 없고요. 원혁 씨한테 못 할 짓 하는 기분이 들어요.”
“그건 사귀다 보면 마음이 바뀔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초원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원혁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 생각이 저는 부담스러워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담스럽다는 여자에게 원혁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늦은 밤 바닷바람이 아렸다. 초원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괜찮아요? 저 사람이 무슨 짓 했어요?”
현우가 발코니로 나오더니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냥 내가 거절했어요. 더 못 만나겠다고⋯.”
현우는 한참 말이 없더니 초원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 사람, 갑자기 왜 이래.’
초원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내가 그랬잖아요. 초원 씨가 아깝다고⋯.”
그녀는 눈을 흘겼다.
“내가 아깝지만 만나 보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현우는 머쓱한 듯 씨익 웃기만 했다.
그날 밤 내내 아름은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던 초원은 아름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하는 걸 보고 생각을 접었다.
현우와 대충 거실을 정리한 초원은 아름이 자는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짓이람⋯.’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서 두 사람은 실연의 상처만 안고 돌아가게 생겼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정말 아무도 몰랐을까? 초원은 어쩐지 다 제 잘못인 것 같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초원 주임님⋯.”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초원은 고개를 휙 돌렸다. 아름은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현우 주임님은 정말 저한테 관심 없으신 것 같아요.”
초원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물었다.
“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현우 주임님이 두 분 발코니에 있는 걸 보더니 바로 들어가시더라고요.”
“아, 그건 그냥⋯.”
“현우 주임님이 주임님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아름 씨⋯.”
“진짜요⋯. 진짜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저한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주임님 잘못도 아니잖아요.”
‘내가 정말 잘못이 없나?’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아름 씨, 미안해요. 선배가 연애 안 하는 이유, 나 알고 있었는데 아름 씨한테 말 못 했어요.”
초원은 몸을 일으켰다.
“네?”
아름이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선배한테 고등학생 때부터 사귄 여자 친구가 있어요. 지금은 여자분이 외국에 있어서 헤어진 상태긴 한데, 선배는 아직도 기다리는 것 같아요.”
잠시 조용하던 아름이 정적을 깼다.
“미리 얘기해 주시지⋯.”
“나도 그럴까 했는데, 안 했어요.”
초원은 잠시 무릎에 턱을 괴고 있다 말을 이었다.
“아름 씨한테 마음을 열 수도 있는 거고, 또 얘길 해 줘도 아름 씨가 바로 포기할 것 같진 않았거든요.”
“⋯하긴, 그렇네요.”
아름이 이해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초원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초원 주임님, 감사했어요.”
초원은 아름에게 씁쓸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았지만 파도 소리가 쓸데없이 쓸쓸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초원은 졸졸 흐르는 샘물에 양손을 모아 대었다. 뼛속까지 시린 그 느낌이 상쾌했다. 손에 모인 샘물을 한 모금 넘긴 후 차디찬 손을 땀에 젖은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등줄기에 기분 좋은 전율이 흘렀다.
중년의 등산객 몇 명이 내려오며 인사를 하자 두 사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격자가 은빛 털을 휘날리는 짐승을 보았다고 한 곳은 금정산 중턱의 외진 곳이었다. 이제 여기서 인적이 드문 산길로 꺾어 들어가야 했다. 초원은 물병에 샘물을 가득 채웠다.
다시 걷기 시작한 둘은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큰 등산로가 아니라 오른쪽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지도를 확인하며 걷는 현우를 말없이 따라가다 보니 문득 마주 오는 등산객과 인사를 한 게 언젠가 싶었다.
‘여기가 정말 외진 곳은 외진 곳이구나.’
또 한참을 걸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냐고 물으려는 찰나 현우가 멈춰 섰다.
“여기예요?”
“그런 것 같아요.”
현우가 확인해 달라는 듯 지도를 내밀자 초원은 그걸 받아 들고 휴대폰을 열었다. 다행히 신호가 잡혔다.
현우는 벌써 주변을 둘러보며 범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고 초원은 지도 앱을 열어 여기가 맞는지 확인했다.
“맞네요.”
초원은 배낭을 내려놓고 현우가 이미 확인을 끝낸 바위에 걸터앉았다. 간만의 산행이라 발이 얼얼했다.
‘이러고 모레 하이힐 신고 출근이라니⋯.’
얼른 신발을 벗고 쉬고 싶었다. 파트너를 보니 어느샌가 배낭도 벗어 놓고 우거진 수풀 사이로 들어가 있었다. 도와주면 빨리 텐트를 치고 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초원은 그저 현우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해가 붉어지고 있었다.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선배, 해 지기 전에 텐트부터 쳐요.”
이미 저 멀리 가 있던 현우가 계속 바닥에 시선을 박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걸어가니 텐트를 칠 만한 작은 공터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텐트를 쳤다. 안에 매트를 깔고 침낭을 펴고 나니 드디어 초원은 신발을 벗고 앉을 수 있었다. 갑갑한 신발 속에서 탈출한 발가락들이 신나게 비명을 질렀다.
그새 적외선 카메라를 텐트 주변에 설치하고 온 현우는 지치지도 않는지 다시 근처를 살피고 있었다. 초원은 텐트 안에 앉아 가방에 넣어 둔 마취 총과 손전등을 꺼내 확인했다.
장비 확인을 끝내고 짐까지 푼 다음에 한참 지는 노을을 내려다보는데 현우가 텐트로 돌아왔다.
“뭐 좀 찾았어요?”
“아뇨, 별거 없네요.”
“그래도 또 모르죠. 오늘 밤은 운이 좋아서 딱 눈앞에 나타날지도⋯.”
초원은 조금 풀이 죽은 듯한 현우에게 웃어 주고 산에 오르기 전에 사 둔 김밥을 내밀었다. 둘은 말없이 붉게 타는 노을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었다.
“내일 점심은 내려가서 석쇠에 구운 염소 고기랑 막걸리 사 줄게요.”
초원은 그의 느닷없는 말에 풋 웃었다.
“장산범 찾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선배도 대단하지만, 염소 고기랑 막걸리 얻어먹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오는 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네요.”
현우는 노을이 붉게 물든 얼굴로 초원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깜깜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산 아래에선 불이 하나둘씩 켜지며 도시의 밤을 밝혔다. 도로를 따라 바삐 움직이는 헤드라이트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산이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보이는 건 산 아래의 휘황찬란한 도시뿐. 발치의 돌멩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초원은 밤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신이 인간 세상을 내려다볼 때 이런 느낌일까? 저 속의 수많은 고뇌가 이렇게 내려다볼 땐 얼마나 하찮아 보일까?
“이제 가요.”
둘은 마취 총과 손전등을 챙겨 일어났다. 초원은 혹시 몰라 허리춤에 찬 권총도 확인했다. 텐트를 단단히 단속하고 왔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갔다. 현우와는 두 발짝 정도 거리를 두고 걸으며 초원은 넘어지지 않게 손전등으로 발밑을 계속 밝혔다.
산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혹시나 물소리나 말소리가 들리지는 않을까 기대하면서. 근처에 사람은 둘뿐이고 계곡이나 샘도 없으니 소리가 나면 장산범일 게 분명했다.
꼭 이럴 때 공포 영화의 클리셰가 떠오른다. 초원은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현우의 뒷모습만 쫓았다.
그렇게 십 분 정도 걸었지만 작은 산짐승이 놀라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아무 수확 없이 다시 텐트로 돌아와야 했다.
“이따 자기 전에 한 번 더 나가 봐요. 혹시 나 잠들면 깨우고요.”
초원은 권총을 넣어 둔 홀스터를 풀고 침낭에 들어가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일러 잠들 것 같진 않았지만, 피곤했던 주말이라 또 모를 일이었다.
둘은 그렇게 나란히 누워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선배, 장산범 잡으면 뭐 할 거예요?”
“글쎄, 생각 안 해 봤는데⋯.”
“선배는 장산범을 잡는 게 아니라 잡는 과정을 즐기는 게 목적인 것 같네요. 안 그래요?”
현우가 갑자기 초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초원 씨, 우리 결혼할래요? 날 너무 잘 아는데?”
이젠 안 속는다. 초원은 순도 1,200% 농담일 게 분명한 그 말에 눈을 흘기며 웃기만 했다.
“초원 씨 말이 맞아요. 사실 안 잡혔으면 싶기도 해요. 어릴 적부터 이게 유일한 탈출구였는데, 물론 연주도 있었지만 이젠 없고⋯.”
이젠 없다는 말이 시렸다.
“흠, 선배가 장산범을 포기하면 돌아오지 않을까요?”
“글쎄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정말 연주를 위하는 길인지는 모르겠어요.”
“어째서요?”
“음⋯, 연주는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 때가 가장 예뻐요. 지금처럼요. 근데 나랑 결혼해서 한국에서 살면 그 반짝반짝한 빛이 다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해요.”
이 남자는 알까? 그녀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도 유난히 반짝거린다는 걸.
초원은 마음 한편이 아리는 걸 애써 무시했다.
“연주가 한국에 있을 땐 위염을 달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독일로 가고 난 다음부턴 멀쩡하대요. 나랑 결혼하면 다시 아프겠죠. 딸, 아내, 며느리, 엄마로서 온갖 의무에 시달리면서⋯.”
“선배가 잘해도요? 잘할 것 같은데⋯.”
“그런가⋯. 흠, 나 이 말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사실 우리 형 결혼한 지 2년 만에 이혼소송 중이에요.”
초원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웃기죠. 그렇게 고르고 골라 마음에 드는 며느릿감을 찾아 놓곤 괴롭히는 게⋯. 형도 그렇게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아내가 그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다니⋯.”
현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연주도 다 알고 있을 거예요. 장산범은 그냥 핑계겠죠.”
“그러니까 선배는 잃음으로써 잃지 않겠다는 거네요.”
“그런가? 그거 되게 철학적인데, 하하.”
몇 년을 안 사이지만 그녀에 대한 현우의 솔직한 생각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이제 내 얘긴 충분히 했으니까 초원 씨 얘길 해 봐요.”
현우가 초원을 향해 돌아누우며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였다.
“네? 무슨 얘기요?”
“그렇게 연애 안 한다고 외칠 땐 언제고 왜 갑자기 소개팅을 했는지.”
“아⋯, 하하하. 뭐 별거 없어요. 내가 연애 안 한다니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초원은 밸런타인데이 때 횟집에서 팀장이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게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니라고.”
“요즘 철학책 읽어요?”
“아뇨, 하하. 누가 해 준 말이라니까요.”
“누가? 남자가? 남자가 그랬으면 그거 초원 씨한테 관심 있어서 한 말 아닌가?”
“에이, 그럴 리가. 여튼 그래서 난 결혼 전제 없이 가벼운 연애만이라도 해 볼까 했죠.”
“가벼운 연애라⋯.”
“나도 알아요. 말도 안 되는 거.”
“아니, 뜻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면 말이 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은 그 뜻이 아니었던 거죠.”
“그건 그렇다 쳐도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꾸역꾸역 만났어요?”
“네?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어젯밤에야 겨우 깨달았는데⋯.”
“다 티 나던데. 그때 데이트하다 합정에 불려왔을 때도 남들 다 귀찮은 얼굴일 때 혼자서만 살았다는 표정이었는데. 나는 마음도 없으면서 왜 억지로 만나나 싶어 가지고⋯.”
현우의 날카로운 관찰력이 저를 향하고 있을 줄 초원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마음은 만나다 보면 생기는 건 줄 알았죠. 그럼 그래서 어제 계속 훼방 놓은 거예요?”
“훼방? 내가 무슨? 내가 뭘 했는데요?”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묻는 현우는 진심으로 모르는 눈치였다.
“모르면 됐어요. 다음에 진짜 좋아하는 남자 생겨도 선배한테는 소개 안 시켜 줄 거예요.”
“왜? 나한테 뺏길까 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작은 텐트를 가득 채웠다.
“근데 초원 씨, 이렇게 사는 것도 좋지 않아요?”
“이게 어떻게 사는 건데요?”
“아무 데도 매이지 않고 특이생물3팀의 저주를 이어 나가면서⋯.”
“하하⋯.”
“우리가 결혼하고 애도 있다고 생각해 봐요. 그럼 여기 이렇게 와서 나란히 앉아 노을이랑 야경도 보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겠냔 말이죠.”
초원은 현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선배도 나랑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이 좋은 걸까?’
같은 마음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선배 돈으로 염소 고기도 먹고요.”
“하하, 그치. 그걸 빼놓으면 안 되지. 근데 진심으로 평생 이렇게 살아도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그렇지, 이것도 나쁘지 않다.
“글쎄요, 꼬부랑 할머니 되면 여기까지 못 올라올 것 같은데.”
“내가 업고 올라오면 되지.”
“선배도 그땐 꼬부랑 할아버지거든요.”
순간 텐트 밖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텐트 입구 쪽에 있던 현우가 벌떡 일어나더니 손전등을 챙겨 나갔다. 초원은 마취 총을 집어 들고 따라나섰다.
“뭐예요?”
현우는 텐트 뒤로 손전등을 비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손전등이 향한 곳에는 푸른 안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장산범인가? 초원은 마취 총을 들어 올려 조준했다.
순간 다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푸른 눈의 짐승이 뒤돌아 껑충껑충 뛰어갔다.
“아, 뭐야. 고라니잖아요.”
“와, 깜놀했네.”
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결국 그날 밤도 장산범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 점심, 초원은 현우의 지갑을 탈탈 털 기세로 염소 고기에 막걸리를 실컷 마시고 돌아오는 내내 차에서 기절한 듯 잤다.
화요일에 출근하자 아름은 단발머리가 되어 있었고 다이어트를 한다며 늘 오던 회식에 오지 않기 시작했다.
특이생물3팀의 홍 주임과 회계과 오 사무관의 썸이 끝났다는 소문은 썸을 탄다는 소문보다 느리게 퍼졌다. 초원은 한동안 사무실 복도로 나갈 때 마주치지 않길 바라며 두리번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그때가 차라리 좋을 때였다는 건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로부터 3주 후에 생긴 사건 때문에 ‘누구든 쓸데없이 말 걸거나 쳐다보면 죽여 버린다.’는 표정으로 복도를 오가야 했기 때문이다.
초원은 아홉수를 온몸으로 치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