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도 쓰디쓴 밸런타인데이
띵동. 벨 소리에 원태는 상을 차리다 말고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아이고, 우리 둘째 딸 왔네. 화원이 엄마, 초원이 왔어. 홍정원, 누나 왔는데 나와서 인사해야지.”
그렇다. 초원네 삼 남매의 이름은 순서대로 꽃밭, 풀밭, 마당이었다.
“어, 홍초 왔어?”
정원이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자기 방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이눔 시키가⋯. 누나한테 홍초가 뭐야. 버르장머리 없게.”
정원이 아버지한테 맞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초원과 네 살 터울인 남동생은 할머니가 종손이라고 오냐오냐 키우셔서 누나들을 물로 봤다.
“아빠, 이거.”
초원은 회사 근처 빵집에서 사 온 빵을 내밀었다. 빵 귀신인 원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아이고, 뭐 이런 걸 사 왔어.”
“회사 근처에 새로 생긴 빵집인데, 맛있어서⋯. 아빠 생각나더라. 근데 언니네는?”
“오는 길이래.”
함박웃음을 지으며 빵 봉투 안을 들여다보는 아빠를 지나쳐 초원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어, 배고프지? 좀 이따 언니네 오면 떡국 먹자.”
“와, 잡채도 했네. 맛있겠다.”
“회사는 다닐 만해?”
초원의 어머니, 화영이 말하는 회사는 특관청이었다. 엄마가 아는 박수무당 아저씨가 ‘누님네 둘째가 신병으로 고생하는 게 딱하다.’며 청에 추천해 주신 거라 엄마는 속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아저씨 말대로 초원은 청에 취직하자마자 신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잡귀들이 잡혀서 강제 성불 당할까 봐 특관청 사람들은 안 건드린다나 뭐라나.
“어, 늘 똑같지 뭐.”
“아픈 덴 없고?”
“어.”
“머리는?”
“아무 이상 없어.”
“계속 두통 있고 그러면 바로 병원 가야 해, 알지?”
“알고 있어. 아무 이상 없다니까⋯.”
초등학교 갓 들어간 둘째 딸을 뇌종양으로 잃을 뻔했던 엄마였다. 악몽 같았던 항암 치료와 수술 끝에 완치 판정을 받은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가끔 빡빡머리를 하고 수술실로 들어가던 하얗게 질린 얼굴이 꿈에 보인다고 했다.
걱정이 되는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매번 그 악몽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초원은 아빠가 수저를 놓고 있는 거실로 도망쳤다.
“회사는 다닐 만해?”
여기서 아빠가 말하는 회사는 국정원이었다. 보통 청 사람들은 부모나 배우자에게는 국정원에 다닌다고 둘러댔다. 공무원인 건 밝히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안 알리겠다는 의미였다.
“어. 별일 없어.”
“이상한 일에 안 말려들게 조심해. 나는 뉴스 볼 때마다 걱정되더라.”
‘매일 하는 일 자체가 이상한 일인데⋯.’
언니와 형부, 이제 막 돌 지난 조카가 도착하고 홍씨 집안사람들은 밥상에 둘러앉았다.
“홍초, 회사는 다닐 만해?”
‘아, 또야?’
여기서 언니가 말하는 회사는 제약 회사다. 초원은 공식적으론 제약 회사 메디컬 어드바이저였다.
그러니까 초원의 정체는 제약 회사 다니는 척하는 국정원 요원인 척하는 특이 생물 관리 요원인 것이다.
“응. 별거 없어.”
“처제는 근데 왜 전문의 안 따?”
볼 때마다 하는 질문을 초원의 형부는 오늘도 잊지 않고 했다.
“그냥, 별로 생각 없어서요.”
그리고 초원은 늘 하던 대답을 오늘도 똑같이 했다.
“그래도 회사에서 승진하려면 전문의 자격이 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듣기로는 일반의로는 올라가는 데도 한계가 있다던데?”
“나중에 따고 싶어지면 따죠, 뭐.”
“그래, 초원이가 알아서 하겠지. 최 서방, 요즘 일은 잘되고?”
초원의 사정을 유일하게 아는 화영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고, 초원은 조용히 수저만 놀렸다.
전문의 자격을 안 따고 싶을 리가 있겠나. 어릴 적부터 소아과 의사가 되겠다는 꿈 하나만 보고 달려온 초원이었는데. 어릴 적에는 자신을 치료해 주었던 의사 선생님들이 너무 멋있어서, 그리고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불임 진단을 받은 후로는 남의 아이들이라도 실컷 보고 싶어서 소아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멋이나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온갖 민원인들과 실컷 보고 싶지 않은 정부 기관의 부조리만 보고 있다.
‘하긴 의사여도 다를 바는 없었겠지.’
직장 생활이란 다 그런 거니까. 적어도 아기들은 귀엽다는 걸 빼면.
한숨을 길게 쉰 초원은 식구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말없이 먹는 데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숟가락으로 떡과 고기를 골고루 뜨고 위에 엄마표 파김치를 올려 입에 넣었다.
아, 이 맛에 집에 오는 거지.
“초원아. 떡국만 먹지 말고 파김치도 좀 먹어. 이번에 아주 맛이 잘 들었어.”
“금방 먹었는데⋯.”
화영은 딸의 말은 듣지도 않고 파김치를 집어 그릇에 올렸다.
떡국을 배 터지게 먹고 가족은 거실에 앉아 초원이 사 온 빵을 먹으며 이런저런 근황을 이야기했다.
“이모, 이모, 이모 해 봐. 은찬아, 이모 한 번만 해 봐.”
13개월 된 조카는 초원이 귀찮은지 등을 돌리고 도망가 버렸다. 고개를 들었더니 엄마가 딱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닌데⋯. 이젠 조카한테 친한 척도 못 하겠다.
“맞다. 너 올해 아홉수잖아.”
화영이 가까이 옮겨와 앉으며 말했다.
“어, 그렇네.”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너 올해는 몸 사리고 특히 물 조심하래.”
화영은 모시고 있는 신을 할아버지라 불렀다.
“만나는 사람은 없고?”
“없어.”
“엄마가 알아봐 줄까?”
“됐어. 겨우 스물아홉에 선은 좀 웃기잖아. 그리고 난 못 만나는 게 아니라 안 만나는 거거든.”
“그러게, 왜 안 만나?”
초원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엄마도 다 알 텐데⋯. 굳이 제 입으로 말해서 엄마 속을 후벼 파고 싶진 않았다. 대답 없이 TV나 응시하자 화영이 옆에서 긴 한숨을 쉬더니 초원의 손을 잡았다.
“다 잘될 거야. 넌 초년 운 빼고 사주 좋잖아. 정 안 되면 엄마가 애 없어도 된다는 사람 찾아봐 줄게.”
“아, 됐어.”
초원은 순간 발끈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되는대로 쏘아붙였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귀찮아서 그래. 요즘 비혼족 많은 거 몰라? 고부 갈등이니 육아니 시달릴 시간에 자기 계발하고 돈 모아서 나한테 쓰는 게 최고지.”
“너 그러다 나이 들어서 외로우면 어쩌려고?”
“그럼 그때 가서 마음 맞는 남자 만나면 되는 거지. 뭐, 양로원에 내 취향인 할아버지 하나 없을까 봐.”
“어이구⋯.”
내 취향인 할아버지라니. 제가 말하고도 웃겨서 초원은 키득대는데 엄마는 속이 터지는지 가슴을 쳤다.
“아, 그리고 아홉수라며 왜 자꾸 시집보내려고 그래. 잘 아시는 분이⋯.”
“올해 사귀고 내년에 가면 되지.”
“올해 이제 하루도 안 지났는데, 쫌!”
갑자기 화영이 말이 없어졌다. 초원이 슬쩍 옆을 보니 엄마 얼굴이 점집 병풍에 그려진 장군님처럼 험악했다.
‘아이고, 엄마 화났네.’
화영이 벌떡 일어서더니 주방으로 가 버렸다. 이윽고 주방에서 물소리와 식기가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 불만에 찬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답도 타협도 없는 문제로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초원이 한 수 접고 엄마에게 먼저 다가가 미안하다고 했겠지만, 저도 나름 새해 첫날부터 하자 있는 애 취급을 받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결국 초원은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일찍 본가를 나섰다.
한강 철교를 건너며 보는 붉은 노을이 오늘따라 서러웠다.
***
“남녀칠세부동석이거늘, 낭자는 어찌하여 외간 남자들과 한 방에 이리 앉아 있는 것이오?”
낭자. 현실에서 이런 말투를 듣다니. 초원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수첩에 볼펜을 꾹꾹 눌렀다.
앞에 앉은 남자는 그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염소수염을 쓸어내리며 혀를 끌끌 찼다.
“어르신, 요즘은 남녀칠세부동석도 옛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초원 낭자도 청에서 나온 주무관입니다.”
초원 낭자라니. 여기가 아직도 조선 시대인 줄 아는 남자에게 현우는 일일이 장단을 맞춰 주고 있었다. 초원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감쌌다.
‘아, 녹음 중인데 진짜⋯.’
갑자기 면담실의 전화가 울렸다. 남자는 벽에 걸린 전화기를 보고 눈썹을 잔뜩 추켜세웠다. 저런 해괴한 건 처음 봤다는 얼굴이었다. 전화기와 가까이 앉아 있던 현우가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네, 팀장님. 아뇨, 우는 게 아니라 웃느라⋯. 네. 네.”
초원은 뜨끔했다. 면담실 유리창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팀장 눈에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뒷모습이 우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아, 진정해야지.’
초원은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여기는 일산 연구소 지하 2층의 면담실이었다. 얼마 전에 종영한 사극 세트장에서 조선 시대 선비 차림을 한 수상한 남자가 돌아다니다 잡혔는데, 알고 보니 소품으로 쓰인 족자에서 걸어 나온 것이었다.
족자는 물체고 남자는 생물이니 어느 팀 소관이냐로 양 팀 팀장이 일산까지 와서 싸우다가 결국 족자는 물체팀이 맡고 남자는 생물팀이 맡는 것으로 결론 나 두 주무관은 아침부터 여기로 불려 온 것이었다.
“거 좀 시장한데 주전부리할 거리 좀 없소?”
선비의 말에 현우는 서류 가방에서 손바닥만 한 초콜릿 상자를 꺼냈다.
“밸런타인데이라고 아십니까? 여기선 매년 2월 14일에 여인들이 남자들에게 초콜릿이라는 단 과자를 줍니다.”
그는 초콜릿 세 개를 집어 선비에게 주었다.
“홍 주임도 먹을래요?”
“아뇨, 난 됐어요.”
‘저거 아름 씨가 공들여 만든 걸 텐데⋯.’
“크으⋯. 이렇게 달고 쓴 걸 어찌 먹는단 말이오. 이곳 여인네들은 요상한 걸 만드는구려. 입에서 다 사라져서 간에 기별도 안 가는구먼.”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나머지 두 개도 잘만 입에 집어넣었다.
“낭자는 왜 안 주시오?”
“네?”
“여인들이 사내들에게 이⋯ 뭐라 했소?”
“초콜릿이요.”
“하여간에 그런 걸 주는 날이라 하지 않았소? 낭자는 왜 안 주시오?”
“저는 다 나눠 주고 없습니다.”
초원은 빈손을 선비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이미 마트에서 묶음으로 산 의리 초콜릿을 팀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 준 후였다.
남자는 탐탁지 않은 듯 또 혀를 끌끌 찼다.
“거, 자네는 머리 꼴이 왜 그런가? 신체발부 수지부모인 것을⋯.”
남자가 현우의 머리를 지적했다.
“그런데 조선 시대 때 대머리는 상투를 어떻게 틀었죠?”
현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남자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버럭 했다.
“그걸 내가 어찌 아오?”
조선 시대의 풍속을 잘 모르는 걸 보니 실제 인물이 빙의된 건 아닌 듯했다. 남자는 중세나 근대 한국어가 아니라 사극체를 구사하고 있었다. 남자가 기억하는 한양도 드라마 속의 묘사에 더 가까웠다.
“거, 청에서 나왔다 하더니. 대체 뭐 하는 곳이오?”
“의금부 같은 뎁니다.”
초원의 거짓말에 선비가 흠칫 놀라더니 다소곳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또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면담이 다 끝나니 점심시간이었다. 두 사람이 면담실 밖으로 나왔더니 먼저 사무실로 갔을 거라 생각했던 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면담하다 웃었다고 혼나는 건 아니겠지 싶어 초원은 눈치만 살피는데 팀장은 딱 한마디, 그것도 초원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만 했다.
“점심 먹으러 가죠.”
세 사람은 연구소 근처 중국집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은 팀장님이 법인카드로 사시는 거겠지? 그럼 탕수육도 시켜 주시면 좋은데⋯.’
초원은 메뉴를 보며 팀장의 안색을 살폈다.
“메뉴 정했습니까?”
“네, 저는 간짜장으로⋯.”
“저는 탕볶밥이요.”
“그냥 볶음밥으로 시키고 탕수육은 따로 시키죠.”
초원은 격렬하게 내적 댄스를 췄다. 머리를 굴린 보람이 있구나.
“그럼 새우 볶음밥으로 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팀장은 간짜장 둘과 새우 볶음밥 하나, 탕수육 中자 하나를 시켰다.
주문을 하고 나니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이렇게 셋이 있을 땐 둘이 불려가서 혼날 때뿐이었으니까.
현우와 초원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날씨 이야기부터 요즘 사무실에 도는 흉흉한 소문까지 온갖 주제를 끌어왔다. 오죽하면 초원은 현우가 장산범 이야기를 떠들어도 좋겠다 싶었다.
팀장은 필요한 말만 하는 타입이다. 수다는커녕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적도 없었다. 업무 지시가 군더더기 없어 좋기는 했지만, 이렇게 업무와 관련 없는 대화를 해야 할 때 초원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영겁 같기만 하던 기다림 끝에 시킨 메뉴가 나왔다.
“팀장님은 탕수육 찍먹파세요, 부먹파세요?”
초원이 탕수육 접시를 테이블 가운데로 살짝 밀며 물었다.
“나는 그냥 반은 붓고 반은 찍어 먹는데⋯. 홍 주임은요?”
“저는 주먹파요.”
“주먹?”
“주는 대로 먹어요.”
팀장이 재밌었는지 피식 웃었다. 무조건 찍먹파인 현우는 말없이 소스 그릇을 들어 탕수육 절반에 소스를 부었다. 사회생활이란⋯.
입은 즐거운데 정신은 지치던 점심을 먹은 후 두 사람은 팀장의 차를 얻어 타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현우를 조수석에 앉히고 초원은 뒤에서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앉아 오는 꿈을 꿨으나, 팀장이 친히 이름까지 부르며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바람에 정말 한낱 꿈이 되어 버렸다.
“팀장님, 제가 드린 초콜릿은 드셨어요? 왜 안 드셨어요? 하긴 초콜릿 많이 받으셨죠? 팀장님 인기 많으시잖아요.” 등등, 어색함을 참지 못한 초원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다.
회사 지하 주차장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승준은 초원이 먼저 탈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새삼 좋은 향기가 초원의 코끝을 맴돌았다. 은은한 게 향수는 아닌 것 같고 섬유 유연젠가? 뭐 쓰시는지 물어볼까? 초원이 고민하는 사이 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팀장님, 오늘 면담한 거 녹취록과 보고서는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금요일 퇴근 전까지 주세요.”
“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나눠서 하면 금요일까지 못 할 것도 없었으니까.
엘리베이터가 11층에 멈추고 세 사람은 리셉션 직원들에게 눈인사를 한 후 유리문 안으로 들어왔다.
3팀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데 복도 건너편이 소란스러웠다. 호기심이 일은 초원이 내다보았더니 청장과 몇몇 고위 간부들이 어떤 할머니와 살갑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근사한 은빛 머리에 진주 목걸이와 남색 스웨터, 새빨간 긴 치마를 입은 할머니는 세련됨 그 자체였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고 생각하는 찰나,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초원은 순간 하려던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멈췄다. 할머니는 주변 사람들을 물리더니 초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니가 초원이제?”
어떻게 내 이름을 아시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목이 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손을 덥석 잡더니 복도 구석으로 이끌었다. 초원은 아무런 저항 없이 할머니를 따라갔다. 긴장됐지만 어쩐지 무섭지는 않았다.
손길이 따뜻했다. 분명 손을 쓰다듬는데 마음속 깊은 어딘가를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었다.
할머니는 안타까운 얼굴로 초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가, 참말로 미안하데이. 니 어매가 매일같이 물 떠 놓고 비는구만, 내가 그렇게 도와주고 싶어도 고건 내 능력 밖이라. 어매한테도 미안하다고 좀 전해 주래이.”
초원은 차마 대답을 못 하고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엄마가 정화수 떠놓고 빈다는 게 이거였어?’
신도 들어주지 못할 기도를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했을 엄마를 떠올리니 가슴에서 울컥 쓰라린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할머니는 핏기가 가시는 얼굴을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더니 재차 미안하다고 하곤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호기심 어린 눈길들이 느껴졌다. 초원은 사람들을 제치고 화장실로 숨었다.
어째설까?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자 화장실 한 칸을 차지하고 숨어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도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까,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서서히 다가왔다.
“초원 주임님, 괜찮으세요?”
아름이었다. 그냥 좀 모른 척해 주지. 초원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괜찮아요. 들어가서 일 보세요.”
최대한 울음을 삼키고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문 아래로 베이지색 하이힐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마 팀원들이 보내서 왔겠지.
“아름 씨, 나 좀 혼자 있으면 안 될까?”
“아, 네⋯.”
하이힐 소리가 멀어지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살얼음 같던 자제력이 무너졌다.
거울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지워진 화장이야 고치면 되지만, 빨갛게 충혈된 눈은 어떻게 하나.
“하아⋯.”
찬물로 눈을 씻은 다음 공들여 화장을 고쳤다. 초원은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화장실 문을 열었다.
다행히 복도에선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바닥만 내려다보고 걸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팀 사무실로 돌아온 초원은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초원 씨, 괜찮아요?”
“네.”
현우 쪽은 보지도 않고 하는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자존심 센 초원의 성격을 잘 아는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초원은 노트북을 켜고 가방에서 수첩과 서류철을 꺼내 책상에 놓았다. 바쁜 척이라도 해야 하니까.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에 앉은 병훈이 초원을 흘끗 쳐다보더니 어기적어기적 이쪽으로 건너왔다.
‘아, 제발 좀⋯.’
“홍 주임, 괜찮아?”
“네.”
초원은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째서 그냥 좀 놔두지 않는 걸까.
“이거라도 먹고 기분 풀어.”
병훈이 아름에게서 받은 초콜릿을 책상에 놓았다.
“됐어요. 저는 생각 없으니까 선배 드세요.”
병훈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삼신할매가 뭐래? 대체 무슨 소릴 했길래 그래?”
“아, 박 주임님.”
옆에서 현우가 병훈을 말리기 시작했다. 초원의 눈가가 짓무른 걸 보니 안 좋은 소리인 게 분명했다. 초원은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인 게 빤한데 왜 이렇게 눈치 없이 캐물으려 하는 걸까.
“아니, 난 걱정되니까 그러지.”
종잇장 같은 초원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는 순간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네, 특이생물관리3팀 홍초원입니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홍 주임, 미안한데 아까 면담한 거 녹취록 오늘 중으로 주세요.]
팀장이었다.
“네.”
초원은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병훈은 아직도 옆에 서 있었다.
“박 주임님, 나 팀장님이 시키신 거 급하게 해야 해서 시간 없어요.”
그 말에 병훈은 의자 등받이가 초원의 어깨라도 되는 듯 툭툭 치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사내 메신저 아이콘 위에 새 메시지를 알리는 숫자가 반짝였다. 초원은 메신저를 열지도 않고 바로 종료했다. 급한 업무 건이면 메일이나 전화를 했겠지. 녹음 파일을 노트북으로 옮기기도 전에 이어폰부터 꼈다. 팀장이 갑자기 녹취록 작업을 시켜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어폰을 끼고 나니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초원은 마우스를 아래로 내려 시각을 확인했다. 6시 5분. 이제 슬슬 야근 거리가 없는 팀원들은 자리에서 일어설 시각이었다.
팀장실 쪽을 곁눈질했다. 반투명 유리 너머의 그림자는 미동도 없었다.
‘아, 현우 선배는 왜 이렇게 쓸데없는 소릴 많이 한 거야?’
녹취록 작업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있었다.
“홍 주임, 퇴근 안 해?”
자리에서 일어서던 병훈이 물었다.
“이거 아직 덜 끝나서요. 오늘 중으로 팀장님이 달라고 하셔서⋯.”
“뭔데요?”
현우가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더니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이거 오늘 면담한 거 녹취록 아니에요?”
“네.”
“금요일까지 달라고 하신 거 아니었어요?”
“근데 오늘까지 달라 하시네요.”
“흠⋯.”
현우는 묘한 눈빛으로 팀장실 쪽을 곁눈질했다.
“얼마나 남았는데? 우리 오늘 갈매기살 먹으러 갈 건데 기다려 줄 테니까 같이 가지?”
“음⋯, 안 될 것 같아요. 먼저 퇴근하세요.”
현우와 병훈은 난감해졌다. 오후 내내 술이 고프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초원을 위로하려고 급조한 회식인데 주인공이 없으면 의미가 없지 않나.
“남은 거 나눠서 해요. 그러고 갈매기살 먹으러 가요.”
“그래, 나도 좀 도와줄게. 셋이서 하면 금방 끝나겠지.”
“아, 됐어요. 그거 나누고 합치고 하는 시간에 혼자 다 하고 가겠네.”
“왜? 도와준다는데. 같이 하고 기분 좋게 갈매기살 먹으면 되지.”
“아, 귀찮아요. 방해되니까 얼른 퇴근들 하세요.”
초원이 얼굴을 팍 찡그리더니 이어폰을 고쳐 끼며 키보드 위로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더는 말 걸지 말라는 뜻을 읽은 두 사람은 마지못해 물러나야 했다.
“그럼 우리끼리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끝나고 와.”
두 사람이 팀장실을 지나치며 팀장에게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는 팀장은 딱히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혹시 이거 기다리시느라 집에 못 가시는 건가?’
초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네.”
“팀장님, 혹시 녹취록 기다리시는 중이세요?”
“아뇨, 할 게 있어서.”
“아⋯.”
다행이었다. 그럼 부담 없이 천천히 해 놓고 가면 되는 거였다.
“얼마나 남았죠?”
“한 시간 정도 더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그냥 퇴근하고 내일 아침에 해서 주세요.”
“아뇨,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초원은 빈 사무실로 돌아와 앉았다. 혼자 있으니 어쩐지 더 능률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녹취록을 마무리하고 맞춤법 검사까지 끝낸 다음에 팀장의 메일로 보냈다. 시계를 보니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팀장님.”
다시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네.”
“녹취록 파일,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그래요?”
메일을 확인하는 팀장의 무표정한 얼굴에 모니터 불빛이 어른거렸다. 초원은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서서 기다리며 생각했다. ‘수고했어요.’라는 말이 떨어지면 바로 고개를 꾸벅하고 짐을 챙겨 이불 속으로 직행해야지.
“초원 씨, 아직 저녁 안 먹었죠?”
팀장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저녁 아직 안 먹었냐니⋯. 무슨 질문이 이럴까? 본인이 시킨 일 때문에 오후 내내 사무실에 붙어 있는 걸 봤을 텐데, ‘아뇨, 저녁 먹었습니다.’라고 하면 ‘아, 그래요?’ 하고 집에 보내 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네, 아직⋯.”
“그럼 저녁 먹으러 가죠.”
팀장이 컴퓨터를 끄고 일어서더니 외투를 걸쳤다.
‘둘이서요?’
초원은 하마터면 진짜 물을 뻔했다. 하필 이런 날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니. 아까 혼자 남아서 좋다고 한 거 취소다.
머뭇거리며 팀장실 문 앞에 계속 서 있자 팀장은 나갈 준비는 안 하고 뭐 하냐는 듯 눈짓을 했다. 하는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와 주섬주섬 코트와 가방을 챙겼다. 팀 사무실 입구에서 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따라나서면서 초원은 생각했다.
‘약속 있다고 할 걸⋯. 왜 아깐 그 생각을 못 했지?’
둘이서만 엘리베이터를 타자니 어색했다. 초원은 최대한 멀찍이, 하지만 팀장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섰다.
“초원 씨, 뭐 먹고 싶어요?”
“아, 저는 아⋯.”
“아무거나라고 하면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사 줄 겁니다.”
그거 솔깃한데? 고르는 데 10초, 데우는 데 30초, 먹는 데 30초. 도합 70초 만에 삼각 김밥을 흡입한 다음 ‘팀장님, 잘 먹었습니다.’하고 집으로 냅다 뛰는 상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더니 팀장도 웃고 있었다.
‘왜 웃으시지?’
“가격 생각하지 말고 지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거로 말해요.”
“…⋯.”
‘가격 생각하지 말고’라는 말에 머릿속에 느닷없이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지만, 초원이 생각해도 이건 어이가 없었다.
“뭔데 그래요? 셋 셀 동안 말 안 하면 진짜 삼각 김밥 먹으러 갑니다.”
“감성돔이요.”
“네?”
팀장님도 어이가 없겠지. 초원은 그 이름난 돌부처답지 않게 허를 찔린 듯한 얼굴을 보고 우물쭈물했다.
“그냥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거 말하라 하셔서⋯.”
팀장이 피식 웃더니 물었다.
“감성돔 좋아해요?”
“저는 회는 다 좋아해요.”
“그래요, 그럼 감성돔 먹으러 갑시다.”
‘귀엽네.’
이 여자는 다 귀엽다.
어차피 사 주려던 탕수육인데 깜찍한 수를 쓰며 먹고 싶다는 티를 내는 것도 그렇고. 저녁 먹으러 가자는 그의 느닷없는 말에 허둥지둥하는 것도 그렇고. 반찬이 나오자마자 저 아담한 손으로 메추리알부터 집어 까고 있는 것도, 메추리알을 까다 얇은 흰자도 같이 까였는지 시무룩해지는 것도 귀엽다.
이 여자는 미워 보여야 할 때도 그저 다 귀엽다. 면담실에서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웃는 것, 다른 사람이었으면 한소리 했을 텐데 그저 아쉽기만 했다. 웃는 얼굴 귀여울 텐데 뒷모습만 보여서. 회의 때마다 넋 놓고 종이 뒷면에 바람개비만 그리고 있는 것도 귀엽기만 하다. 그래서 괜히 일찍 끝날 회의를 오래 붙잡고 있는 건 알까?
하지만 우는 건? 오늘 낮 삼신할매의 앞에서 저 귀여운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가며 점점 울상이 되던 잔상이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녹취록 작업을 끝내고 팀장실 문 앞에 섰을 때도 두 눈에 서러움의 흔적이 남은 것이 아팠다. 점심때처럼 먹고 싶은 거라도 사 주면 기분이 풀릴까? 젓가락을 들고 뭐부터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 저 얼굴을 보니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초원 씨는 못 먹는 거 없이 다 잘 먹네요.”
낙지를 청양고추와 잔뜩 집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는 초원에게 그가 말했다.
“저는 없어서 못 먹는 거 빼곤 다 잘 먹어요.”
그 말에 승준이 소리 내 웃었다.
‘오늘 팀장님 두 번 웃겼네. 누가 오늘의 직원으로 안 뽑아 주나?’
초원은 괜히 뿌듯해져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침 빼고 다 팀장님하고 같이 먹네요.”
“그러네⋯.”
‘아침도 같이 먹는 사이면 좋을 것을⋯.’
승준은 상사로서 가지면 안 될 부적절한 속내를 매실주 한 잔과 함께 삼켰다.
초원은 낙지를 한 젓가락 더 입에 넣으며 마주 앉은 상사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점심은 그렇다 쳐도 저녁은 왜 먹자고 하신 걸까? 사실 이유야 뻔하지 싶었다. 팀장도 사람인데, 게다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궁금하겠지. 그래도 그게 이렇게 비싼 밥까지 사면서 캐묻고 싶을 정도인가? 물어보면 뭐라고 해야 하지? 아님 못 물어보게 계속 딴소릴 해야 하나?
낙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어떻게 난감한 질문을 피할 것인가 고민하는데 종업원이 회 접시를 들고 왔다.
‘그래, 일단 먹고 고민하자.’
초원은 감성돔 한 점을 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쫄깃쫄깃하고 고소한 게 제맛이었다. 매실주로 입가심을 하고 한 점을 더 집으려는데 회가 전혀 줄어들어 있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팀장이 수저는 안 들고 초원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팀장님은 안 드세요?”
“먹고 있어요.”
“혹시, 회 별로 안 좋아하세요?”
“아뇨, 좋아하는데. 초원 씨 많이 먹으라고.”
“안 드시면 저 민망해서 못 먹는데요.”
초원은 회 한 점을 집어 팀장의 앞 접시에 놓고 “이 맛있는 걸 왜 안 드시고 보고만 계시냐.”며 웃었다. 승준은 그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회는 거의 다 먹어 가는데 아직도 팀장은 ‘그 난감한 질문’을 건드리지 않았다. 초원은 잠자코 팀장이 운을 떼길 기다리다가 매실주를 세 병째 비웠을 즈음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근데 팀장님, 저 저녁은 왜 사 주시는 거예요?”
“그냥, 초원 씨 맛있는 거 좋아하잖아요.”
‘맛있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인가?’
초원은 뾰로통한 얼굴로 물었다.
“아까 할머니가 무슨 소리 했는지 물어보시려고 저녁 먹자 하신 거 아닌가요?”
“아닌데?”
승준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잘못 짚었나 보다. 초원은 민망함에 죄 없는 풋콩만 열심히 깠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관찰하고만 있던 승준이 초원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뭐, 초원 씨가 얘기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요.”
“딱히⋯, 얘기한다고 기분이 좋아지거나 무슨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닌걸요.”
“그럼 안 해도 되고.”
두 사람은 말없이 두세 번 술잔을 비웠다 채우기만 했다. 초원은 그 침묵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팀장도 딱히 초원의 말을 기다리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는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냥⋯, 아무리 간절히 빌어도 안 되는 일이 있더라고요.”
“음⋯, 그렇죠.”
어떤 의미로 이해한 걸까? 잔을 다시 채우는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이 사람도 간절히 빌었지만 안 된 일이 있을까? 괜히 저 때문에 팀장까지 답지 않게 의기소침해진 것 같아 초원은 미안해졌다.
“오늘 밸런타인데인데. 팀장님 붙잡고 제가 우울한 소리만 하고 있네요.”
“아니, 난 괜찮은데⋯. 초원 씨랑⋯.”
‘초원 씨랑 보낼 수 있으면 최고의 밸런타인데이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적절한 말을 찾으며 머뭇거리는 사이 초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초원이 상 위에 엎어뒀던 핸드폰을 뒤집자 보이는 건 현우의 이름이었다. 퇴근했냐며 문자가 오는 걸 내키지 않아 무시했더니 이젠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초원이 머뭇거리고 있자 팀장이 받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초원 씨, 일 끝났어요?]
“네.”
핸드폰 너머로 “2차는 홍 주임 가고 싶은 데로 간다 그래!”라고 외치는 병훈의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예요? 저녁은 먹었어요?]
“먹고 있는 중이에요.”
차마 누구랑 먹고 있는지는 말 못 하고 앞에 앉은 팀장을 슬쩍 봤더니 메추리알을 정성스럽게 까고 있었다.
[그래요? 우리 2차 갈 건데 올래요?]
“아뇨, 됐어요.”
초원은 어쩐지 팀원들에게 들키면 안 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빨리 전화를 끊고 싶었다.
[괜찮아요? 내가 초원 씨 있는 데로 갈까?]
평소와는 다른 기색을 눈치챈 건지 현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 갑자기 팀장이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더니 곱게 깐 메추리알을 초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팀장님 취하셨나?’
“아뇨, 저 지금 혼자 아니라서⋯. 저는 괜찮으니까 재밌게 노세요.”
[아⋯, 그렇구나. 그래요, 그럼 내일 봐요.]
“네.”
초원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차현우 주임?”
“네.”
“왜?”
“박 주임님이랑 2차 간다고 올 생각 있냐고요.”
“가고 싶으면 가도 되는데⋯.”
“아뇨, 딱히⋯.”
현우를 좋아하는 초원이라 기다렸다는 듯 일어설 줄 알았더니. 예상이 어긋나는 걸 싫어하는 그이지만 이번에는 꽤 마음에 들었다.
“가 봤자 아까 무슨 일이었냐고 캐물을 게 뻔한데요.”
초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손에 든 메추리알을 내려다봤다.
‘근데 뜬금없이 이건 왜 주신 거지?’
“박 주임이 시켜 준다던 소개팅은 했어요?”
“아⋯, 아뇨.”
“왜?”
팀장은 정말 취했는지 갑자기 질문이 많았다.
“그냥 관심 없어서요.”
“근데 초원 씨는 연애를 안 하는 이유가 뭐예요?”
초원은 순간 알고 묻는 건가 싶어 흠칫했다. 삼신할머니도 못 하는 일, 그리고 초원이 연애를 안 하는 이유. 잘 생각해 보면 충분히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왜 물으세요?”
“그냥⋯, 청에 초원 씨 좋아하는 남자들 많던데, 연애를 안 한다니 남자들이 불쌍해서.”
초원은 평소의 팀장답지 않은 말에 쑥스러워져 웃기만 했다.
“우리 청 남자들이 별론가?”
“아니, 그건 아닌데요. 예전에 만나던 사람이랑 안 좋게 끝나서⋯.”
‘안 좋게’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 심각하게 나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래 만났어요. 당연히 그렇게 사귀다 결혼할 줄 알았는데, 그게 서로 좋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또, 처음에는 괜찮다던 것도 시간이 지나니까 사람 마음이 변하는지 안 괜찮다고 그래서⋯.”
초원도 취했나 보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팀장한테 술술 하다니.
“그냥 이젠 사람을 못 믿겠어요. 마음 여는 게 무섭기도 하고⋯. 물론 저도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초원 씨가 뭐가 부족해요?”
딱히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아 초원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근데 그런 말도 있죠.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지만 그게 배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초원이 되물었다.
“그럼 팀장님은 왜 싱글이신데요?”
“어⋯, 나는⋯.”
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던 승준이 피식 웃었다.
‘초원 씨가 연애를 안 해서.’
이렇게 솔직히 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연애를 하면 일상을 공유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오늘 회사에서 뭐 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 상대는 내가 자기한테 애정이 없어서 그런다고 착각하고, 그렇게 벽이 생기고⋯. 뭐 그런 거죠.”
뭐, 그런 건 다 급조한 핑계다.
“그럼 여기 다니는 사람 만나시면 되잖아요.”
승준은 씁쓸하게 웃다 초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왜요?”
“그게 어디 그렇게 쉽나.”
“하긴 여기가 좀 심하게 남초죠.”
“그 와중에 연애 안 한다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
회사에서는 그렇게 눈치 빠르면서 왜 이런 일에는 눈치가 지독히 없는 걸까? 승준의 속뜻을 알아채지 못한 초원은 그와 어울릴 만한 여직원들을 곰곰이 떠올려 봤다.
“법무과에 계신 변호사님 싱글 아닌가요?”
그 법무과 변호사는 여직원들 모임 때 대놓고 조승준 팀장은 자기가 찜했다고 하는 분이었다. 초원은 팀장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는 모른다는 듯 고개만 갸웃했다.
“두 분 잘 어울리시는데⋯.”
“됐어요.”
팀장은 관심이 없는지 시큰둥한 얼굴로 매운탕만 뒤적였다.
“흠, 안 사무관님도 싱글이시긴 하네요.”
불쑥 이 말을 내뱉고 초원은 민망한 듯 웃었다. 제가 한 말이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싶어서.
“안 사무관은 좀⋯.”
아니나 다를까 팀장이 고개를 들더니 무슨 헛소리냐는 듯 인상을 구겼다.
“하긴 팀장님은 총각이신데 안 사무관님은 돌싱에 애기 엄마라 좀 그런가요?”
“아니, 안 사무관은 그게 문제가 아닌데? 초원 씨도 잘 알잖아요.”
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거나 제 윗사람 험담이니까 웃으면 안 될 걸 알면서도 초원은 저도 모르게 깔깔대며 웃었다.
‘그래, 팀장님도 다 아시긴 아시지.’
그렇게 초원은 밸런타인데이에 생각지도 못한 비싼 밥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 얻어먹었다.
집 앞까지 데려다준 팀장이 내일 보자며 돌아섰다. 초원은 술의 힘을 빌려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팀장님, 감사해요.”
“뭐가?”
“그냥, 전부 다요. 팀장님이 저 많이 챙겨 주시는 거 저도 알아요.”
“그래요? 티 난다니 다행이네.”
“네?”
초원은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망할 술. 본심이 불쑥 나와 버린 승준은 당황해 말을 돌렸다.
“들어가요. 늦었는데⋯.”
그가 초원의 어깨를 감싸며 건물 입구 쪽으로 슬쩍 밀었다. 낮에 맡았던 포근한 향기가 초원의 코를 자극했다.
“그럼, 내일 봬요.”
승준은 말없이 손만 흔들었다.
초원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가 아닌 욕실로 들어갔다. 회사에 있을 땐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안 나오고 싶더니, 지금은 어쩐지 마음이 가벼웠다.
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와 침대에 누웠다. 길고 긴 하루였다. 파란만장은 오늘 같은 날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니 어매가 매일같이 물 떠 놓고 비는구만 ⋯⋯ 어매한테도 미안하다고 좀 전해 주래이.’
낮에 삼신할머니가 한 말이 떠오른 초원은 핸드폰을 열었다.
[엄마, 이제 물 떠 놓고 안 빌어도 돼. 삼신할머니도 안 된대.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
전송 버튼에 손가락을 대려다 뗐다. 그렇게 핸드폰을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기껏 쓴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쳤다.
[엄마, 미안해. 그리고 항상 고마워.]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새해 첫날에 싸운 후로 엄마와 계속 냉전 중이었다. 긴말 안 해도 엄마에게 진심이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어, 엄마⋯.”
그날 밤 초원은 엄마와 울고 웃으며 기나긴 통화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