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다정함은 범죄다
“어머 벌써 12시 다 됐네. 여러분, 점심 먹으러 가요.”
희경이 코트를 걸치며 말하자 팀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팀장님은요?”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팀장실을 흘끗 보던 아름이 물었다.
“팀장님은 경찰청 외근 가는 길에 드신대.”
그 말에 ‘팀장님 부럽다.’라고 초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아, 난 얼큰한 거 땡기는데⋯.”
어제도 과음한 병훈은 해장이 필요했다.
“백반집 가는 길에 버섯전골 집 새로 생겼던데, 거긴 어떠십니까?”
다나까체를 아직 버리지 못한 으뜸이 묻자 병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버섯전골 괜찮지.”
그 말에 아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 아름 씨 버섯 못 먹는데⋯. 딴 거 먹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현우가 도와주자 아름은 마음속으로 폴짝폴짝 뛰었다.
‘저렇게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고 배려해 주시다니⋯.’
순두부찌개 집으로 가는 길, 아름이 현우와 초원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현우 주임님, 감사해요.”
아름이 현우의 팔꿈치를 살짝 흔들며 생글생글 웃어 보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초원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의미 없는 다정함은 범죄라더니⋯. 무고한 피해자가 하나 더 늘었구나.’
‘팀장님 진짜 부럽다.’
초원은 점심을 먹는 내내 희경의 아들 자랑 겸 육아 푸념을 들으며 생각했다. 자랑하고 싶은 거야 이해하지만, 애를 키워 본 적 없는 팀원들로선 매일같이 맞장구쳐 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 주 타깃은 으뜸이었다.
“이것 좀 봐, 으뜸 씨. 잘 그렸지?”
희경이 핸드폰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노랑, 초록, 갈색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으뜸은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음⋯, 제가 애가 없어서 이런 거 잘 모르는데 잘 그린 것 같습니다.”
“세 살이 이 정도면 엄청 잘 그린 거야.”
“그렇습니까? 하하⋯.”
으뜸의 어깨 너머, 병훈이 눈을 잔뜩 찡그린 채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거 뭐 그린 거예요?”
“기린. 주말에 동물원 갔었거든.”
“하하, 추상화 작가 시키면 되겠다. 재능이 보이네.”
“에이, 이런 건 취미로 하고 공부시켜야지. 아님 아이돌을 시키든가. 우리 우진이가 얼집에서 얼마나 인기 많은 줄 알아?”
평소엔 눈치가 빠르지만 유독 아들 이야기를 할 때만은 병훈의 비아냥을 눈치채지 못하는 희경이었다.
“아, 오늘 저녁 소갈비라 점심 조금만 먹으려 했는데 너무 많이 먹었어.”
그렇게 말하는 희경의 밥공기는 반도 안 비어 있었다.
“별로 안 드셨지 말입니다.”
“으뜸 씨가 이 나이 돼봐. 조금만 먹어도 찐단 말야. 초원 씨도 조심해. 곧 서른인데, 몸이 확 달라지는 게 느껴진다니까?”
얌전히 앉아 서비스로 나온 요구르트를 마시던 초원은 희경이 왜 가만히 있는 자신을 걸고넘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희경은 배부르니 산책을 하자며 팀원들을 끌고 회사 건물 주변을 돌았다. 손에는 토피넛 라테를 쥐고.
건물 뒤편에 있는 휴식 공간에는 비둘기 몇 마리가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쪼고 있었다.
“으뜸 씨 그거 알아? 닭둘기 사실은 외계인이다?”
희경이 비둘기가 들을세라 입을 가리고 소곤거렸다.
“진짭니까?”
으뜸이 안 사무관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초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닭둘기도 저희가 관리하는 겁니까?”
“아니, 외계인은 외교부 소관이고⋯.”
으뜸은 혼란스러웠다. 처음 특관청에 스카우트 됐을 때도 믿기 힘들었는데, 이쯤 되니 이 모든 게 다 자신을 놀리려고 짠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싶었다.
***
초원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푸드가즘이란 게 이런 걸까? 숯불 위에서 자글자글 익어 가는 고소한 소갈비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마블링 봐라, 예술이다.’
초원이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불판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걸 대각선에 앉은 승준은 말없이 응시했다.
‘대체 왜?’
2년 하고도 반. 초원을 볼 때마다 승준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시간이었다.
첫눈에 반한 것도, 서서히 물들어 간 것도 아닌데. 초원을 향한 이 감정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정말 ‘어느 날 갑자기’였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출근해 여느 때처럼 초원의 ‘안녕하세요, 팀장님.’이라는 인사를 받는 순간, 그 순간 그의 세상이 뒤집혔다.
입에서 저도 모르게 ‘초원 씨, 사랑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 했다. 미친 것 아닐까? 아무 감정 없던 부하 직원한테 ‘사랑해’라니.
그 전날 연구소에서 있었던 사고 때문에 머리가 잠시 어떻게 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다음 날도 그다음 달도 그다음 해도 그의 입에서는 ‘초원 씨, 사랑해.’가 튀어나오려 했다.
오래전부터 연애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된 그였다. 가족이 한순간에 떠나고 지독한 상실의 아픔을 알고 난 후로부터 소중한 누군가가 생긴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나 기다리는 걸 핑계 삼아 홀로 살아온 그였다.
그런데 왜 이 여자만 보면 막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다가도 실연한 사람처럼 가슴이 아린 걸까? 초원이 그에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가져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그게 뭔지를 알아야 돌려달라고 할 텐데.
이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결국엔 이성이 감정 앞에서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조승준은 자기 직속 부하인 홍초원 주무관을 사랑한다.
공사 구분 철저한 그로서는 미친 소리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도 모르는 채로.
하지만 인정하는 것 이상은 없었다. 그는 초원의 직속 상사이다. 직속 상사는 부하와 사적인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억누르는 사이 어느샌가부터 초원이 제 파트너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미묘한 변화였지만 2년 반 동안 초원을 주의 깊게 관찰해 온 그로서는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었다.
소맥을 다 말은 으뜸이 한 잔씩 나누어 주기 시작하자 승준은 한 곳에 줄곧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팀장님, 건배사 하시죠.”
“건배사랄 것까진 없고, 다들 올 한 해 다치지 않고 무사히 제 역할 다 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규정 잘 지켜서 내년도 올해처럼 건승하는 한 해 됐으면 합니다.”
팀장의 “규정 잘 지켜서”가 누구를 향한 말인지 아는 현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시끄러운 건배 구호에 이어 잔이 부딪치고 초원은 망설임 없이 잔을 비웠다.
“홍 주임님, 잘 드시지 말입니다.”
맞은편에 앉은 으뜸이 초원의 잔을 가져가 다시 채웠다.
“아, 으뜸 씨, 다나까체 여기선 안 써도 괜찮아요.”
“이게 습관이 돼서⋯.”
으뜸에게 여자 친구가 있는 걸 모르는 승준은 초원이 화사하게 웃는 걸 보고 긴장했다. 현우 하나 견제하는 것도 충분히 피곤한데 견제 대상이 더 느는 건 바라지 않았다.
승준은 현우가 규정을 어기거나 사고를 칠 때마다 자르고 싶었다. 아니면 적어도 다른 팀으로 보내 버리거나. 그렇게 못 하는 데에는 현우의 부친이 법무부 높으신 분이란 이유도 있었지만, 둘을 떨어트려 놓으면 파트너 간 연애 금지 규정이 효력이 없다는 게 가장 컸다.
아무리 초원이 자신을 봐줄 가능성이 없다지만, 남 좋은 일을 시켜 줄 만큼 승준은 통이 큰 사람이 못 됐다.
“이으뜸 씨는 한 달 해 보니까 어때요? 할 만합니까?”
“네, 선배님들이 많이 가르쳐 주셔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승준이 말을 걸자 으뜸은 고기를 자르던 가위를 놓고 정자세로 대답했다.
“으뜸 씨가 빠릿빠릿하고 참 잘해요. 할 줄 아는 것도 많고⋯.”
승준의 맞은편에 앉은 병훈이 파트너를 추켜세웠다.
“감사합니다, 박 주임님.”
비싼 소고기가 타는 이 판국에 같은 테이블에 앉은 남자 셋이 별 알맹이도 없는 대화만 주거니 받거니 하다니. 초원은 기다리지 못하고 으뜸 앞에 놓인 집게를 뺏어 고기를 뒤집었다.
“아,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나 고기 잘 구워요. 고깃집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는걸요.”
으뜸에게 눈웃음을 치는 초원을 보자 승준은 속이 쓰렸다.
승준이 갑자기 손을 내밀자 초원은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집게 줘 보세요.”
초원이 머뭇거리며 넘긴 집게를 받은 승준이 고기를 뒤집기 시작하고 으뜸은 어쩔 줄 몰라 식은땀을 흘렸다.
“어머, 그 테이블은 막내도 있으면서 왜 팀장님이 고기를 굽게 해?”
옆 테이블에 앉은 희경이 그새를 놓치지 않고 한소리를 했다.
“누가 굽든 맛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가끔은 윗사람이 굽는 것도 좋지 않나요, 안희경 사무관?”
팀장의 뼈 있는 말에 무안해진 희경은 입을 다물었다.
“초원 씨는 소고기 어떻게 익힌 게 좋나요?”
승준의 물음에 불판에서 시선을 뗀 초원이 배시시 웃었다.
“아, 저는 소고기는 불판에 찍어 먹습니다.”
“응?”
초원의 엉뚱한 대답에 같은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팀원들 앞에서 크게 웃는 일이 일 년에 손꼽을 정도인 승준도 마찬가지였다.
승준은 적당히 노릇하게 익은 고기 몇 점을 집어 초원의 앞 접시에 놓아 주었다.
“초원 씨, 많이 먹어요.”
“감사합니다.”
초원은 윤기 자르르한 소갈비에 와사비를 조금 얹고 얇게 저민 양파를 한껏 집어 올려 입에 넣었다.
‘아, 이 맛이지.’
달짝지근함과 고소함의 조화에 양파의 상쾌함과 와사비의 톡 쏘는 맛까지. 천국이 진짜로 있다면 거기에도 소갈비집이 있지 않을까? ‘없으면 그건 천국이 아니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초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승준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팀원들이 초원을 핑계로 비싼 소갈비를 먹으려 한 건 괘씸했지만, 초원도 좋아할 걸 알았기에 군말하지 않은 그였다.
한참 갈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초원은 옆 테이블에서 나는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란히 앉은 현우와 아름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초원은 다시 소맥 잔을 비웠다.
“다들 크리스마스 때 뭐 하세요?”
아름이 난데없이 물었다.
“난 우리 아들이랑 뮤지컬 보러 가기로 했어.”
“나는 소개팅 있지롱. 으뜸 씨는 여자 친구랑 보내겠네?”
병훈의 말에 승준은 몰래 안도했다.
“홍 주임은?”
병훈의 물음에 초원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집에서 밀린 드라마나 봐야죠, 뭐.”
“내가 소개팅시켜 줄까? 회계과에 있는 사무관이 홍 주임 남친 있냐고 물어보던데⋯.”
순간 승준은 병훈도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회계과에 싱글인 사무관이 누구더라⋯.’
한편 초원은 멋쩍게 웃으며 거절했다.
“됐어요. 나 연애 안 하는 거 알면서⋯. 팀장님은 뭐 하세요?”
초원은 화제를 승준에게로 돌려 버렸다.
“음⋯, 나도 그냥 집에 있으려고요.”
“현우 주임님은요?”
아름은 사실 현우를 뺀 다른 사람의 크리스마스 계획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저는 그냥 집에서 배달 음식 시켜서 영화나 보려고요. 아름 씨는요?”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아름 씨 좋다는 남자가 널렸을 텐데 크리스마스 계획이 아직 없다고?”
병훈이 놀란 척하며 묻자 아름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좀 다 그냥 그래서요. 그럼 우리 크리스마스 계획 없는 사람들끼리 그날 놀러 갈까요?”
현우와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데 눈이 멀어 아름이 간과한 게 있었으니 ‘크리스마스 계획 없는 사람’에 팀장도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팀장이 와도 어색하고 안 오면 셋이서 어색할 테니 초원은 눈치껏 빠져야 하는 시나리오였다.
‘아님, 아름 씨가 이걸 노린 건가?’
초원은 승부수를 던졌다.
“그날 어딜 가나 사람 많을 텐데⋯. 저는 그냥 집에서 드라마 볼래요.”
“나도 사람 많은 덴 피곤한데⋯. 그냥 그날 늦잠이나 실컷 잘래요.”
현우의 대답은 초원의 예상대로였다.
“피⋯, 자고 일어나서 놀러 가면 되죠.”
일이 뜻대로 안 된 아름이 입을 삐죽 내밀고 꿍얼거렸다.
비싼 고기랑 먹으니 소맥이 쓴 줄도 몰랐다. 취기가 돈 초원은 옆에 앉은 병훈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선배, 팀장님한테 내 이름 팔아서 먹는 소갈비 맛있어요?”
“홍 주임, 왜 이래?”
병훈은 눈이 휘둥그레져 쳐다보는 승준의 눈치를 살피며 초원의 팔을 밀어냈다.
“소갈비 맛있냐고요. 팀장님한테 내 이름 좀 그만 팔아요. 왜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 소갈비 먹고 싶다’고 못하냐고요.”
“홍 주임 취했어. 으뜸 씨, 홍 주임 잔 치워 버려.”
병훈은 앞에 앉은 팀장에게 한 소리 듣진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이제 승준은 재밌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아, 이제 더는 못 먹겠어. 우리 너무 많이 시켰나 봐. 고기 아직 남았는데⋯. 그쪽도 더 안 먹을 거죠?”
희경은 종업원을 부르더니 남은 고기를 싸 달라고 했다.
“2차는 어디로 갈까요, 팀장님?”
팀장이 안 갈 걸 뻔히 알면서도 병훈은 예의상 물었다.
“나는 됐고 여러분들끼리 즐겁게 노세요.”
“아니, 그래도 팀장님 오시면 더 좋은데⋯.”
종업원이 포장한 고기를 들고 다가오자 승준이 손을 들어 건네받았다.
‘팀장님 드시려고 그러시나?’
아까 희경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이렇게 맛있는 걸 혼자 먹으려니까 우리 아들한테 좀 미안하네.”라고 하는 걸 똑똑히 들은 초원은 의아했다.
“오늘 홍 주임이 먹고 싶다 해서 온 거니까 이거 홍 주임이 가져가세요.”
승준의 말에 희경의 얼굴이 잿빛이 됐다. 그걸 보고 우물쭈물하던 초원은 얼떨결에 승준이 넘겨주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바로 이런 걸 두고 고구마 뒤 사이다라고 하는 거지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간에 끼게 된 초원은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피곤했다.
가게 밖으로 나와 팀장이 계산하는 걸 기다리는 동안 초원은 희경에게 다가갔다.
“안 사무관님, 이거 우진이 주세요.”
“어머, 안 그래도 돼.”
“저는 오늘 많이 먹었잖아요. 이거 가져가서 우진이 주세요.”
“진짜? 고마워, 초원 씨.”
계산을 마치고 나오던 승준은 그 모습을 보고 슬며시 웃었다.
“초원 주임님, 현우 주임님이랑 사귀시는 거 아니죠?”
2차로 온 노래방에서 화장실 가자는 아름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가 들은 말이었다.
“네? 아뇨.”
“그럼 혹시 현우 주임님⋯ 좋아하세요?”
“아뇨. 전혀⋯.”
아름이 팀장이 아니라 다행이다. 팀장이라면 귀신같이 거짓말을 알아채니까.
“그럼 현우 주임님이 주임님 좋아하나요?”
“아닐걸요? 그냥 차 주임님 성격이 원래 그래요. 모두한테 다정한⋯.”
“칫⋯. 저한테도 그럼 그냥 잘해 주시는 거겠네요.”
“그건 또 모르죠.”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로 치나?
“주임님,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아아, 학교 졸업하면 이런 부탁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초원은 귀찮게 됐다고 생각했다.
“난 다리 놔 주고 그런 거 잘 못 하는데⋯. 박 주임님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때요?”
“그건 좀 그렇고요. 초원 주임님이 친하시잖아요. 저 좀 도와주세요, 네?”
‘현우 선배 사실은 전 여자 친구를 못 잊어서 아무도 안 만나는 거예요.’라고 솔직히 말해 줄까 하다 말았다. 주제넘은 소리일지도 모르니까. 아름은 여자로 보일지도 모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요.”
기껏 마신 술이 벌써 다 깨 버렸다.
***
모처럼 공휴일이니까 늦잠 좀 자려 했더니 초원은 7시 반에 칼같이 눈이 떠졌다.
‘망할 내 생체시계⋯.’
한 번 눈을 뜨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아 핸드폰을 열었다. 크리스마스 인사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지만 보낸 사람들 이름을 보니 목적이 뻔했다. 초원은 답장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뒹굴뒹굴하며 어른을 위한 웹 소설이나 읽기 시작했다. 늦은 밤도 좋지만, 아침에 막 잠에서 깨어 이렇게 몽롱할 때가 나 홀로 타임을 즐기기엔 제격이니까.
뭘 읽을까 고르고 고르던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헐, 아빠네⋯.’
왜 하필 지금일까? 초원은 한숨을 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아빠. 왜?”
[어, 우리 딸, 메리 크리스마스!]
“푸훗, 교회도 안 다니는데 왜 새삼 크리스마스 인사야.”
[우리 딸 보고 싶어서⋯. 접때 생일날 보고 전화도 한 번 안 하고. 연말인데, 응?]
“미안. 요즘 연말이라 정신없어서⋯. 그래도 내가 문자는 꼬박꼬박 했잖아요.”
[그래도 목소리 듣는 거랑 같나? 별일 없고?]
“어.”
[감기 안 걸리게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 밤길 조심하고 너무 늦게 다니지 마.]
“어.”
[거, 연말이라고 또 막 술 마시고 다니지 말고 건강 잘 챙기고.]
“어, 아빠도⋯.”
[네 엄마가 아침마다 정화수 떠 놓고 빈다. 너 다 잘되라고⋯.]
“안 그래도 되는데. 나 잘 지내고 있는데⋯.”
[그래도 부모 마음이 안 그래. 지금도 좋지만 더 잘됐음 하는 거지. 근데 크리스마슨데 어디 안 가고?]
“그냥 집에서 쉬려고.”
[왜? 데이트하자는 남자 없어?]
“없긴 왜 없어. 내가 얼마나 인기 짱인데⋯. 근데 이런 날 나가면 사람만 많고 피곤해. 날도 추운데⋯.”
[그래도 좀 만나 보고 그래. 너도 이제 시집가야지.]
“시집은 무슨⋯.”
다 알면서 왜 아빠는 아직도 이런 소릴 할까?
[신정 때 떡국 먹으러 올 거지?]
“어.”
[그래, 오늘 혼자 있지 말고 꼭 데이트해. 알았지?]
“어⋯. 엄마랑 아빠도 데이트해요.”
[그럼, 당연하지. 이따가 저녁때⋯.]
그 후로도 초원의 아버지는 데이트 계획 자랑과 복학생인 남동생이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해서 컴퓨터를 갖다 버리고 싶다는 푸념을 끝없이 하다 재차 ‘오늘 밖에 나가라’고 신신당부를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아이고⋯.”
그새 9시가 됐다. 아침 먹을 시간이 지났는데 입맛도 없고 귀찮았다. 초원은 혹시 또 잠이 오진 않을까 싶어 눈을 감았다. 선잠이 들듯 말듯 할 때 또 벨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아, 아빠 또 왜?’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화면에 찍힌 이름은 아빠가 아니었다.
흠흠. 초원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초원 씨, 안녕. 자고 있는데 깨운 건 아니죠?]
막 자다 일어났는지 현우의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었다.
“아뇨, 아침 먹으려고 했어요.”
설마 아침 같이 먹자는 건 아니겠지?
[그렇구나. 오늘 뭐 해요?]
“그냥 집에 있으려고요.”
[그럼 이따가 저녁때 우리 집 올래요? 같이 뭐 시켜 먹고 영화 봐요.]
이게 영상 통화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입꼬리가 미친 듯이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흠, 선배가 사는 거예요?”
[하하하, 내가 살 테니까 고르는 건 초원 씨가 해요.]
“그러죠, 뭐.”
[그럼 다섯 시쯤?]
“네.”
[그럼 이따가 봐요.]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입맛이 확 돌았다. 초원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냉동실에 얼려둔 밥과 엄마표 미역국을 꺼내 데웠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생각했다.
‘다섯 시까지 뭐 하지? 뭐 입고 가지? 쌩얼로 가는 건 좀 그렇겠지? 그렇다고 풀 메이크업도 이상하잖아. 아, 선배 이미 내 쌩얼 봤는데, 뭐⋯.’
‘제모는 안 해?’
숨어 있던 음란마귀가 갑자기 속삭였다.
‘이게 무슨 헛소리야.’
‘또 모르잖아.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는 게 낫지 않아? 해서 손해 볼 것도 없는데⋯.’
‘시끄러워. 그런 사이 아니거든?’
‘그런 사이이고 싶은 거 다 아는데, 후후⋯. 아, 잊지 말고 속옷도 예쁜 거로 위아래 꼭 맞춰 입고 가.’
‘조용히 해. 자꾸 헛소리하면 엄마한테 굿해서 쫓아내 달라고 한다.’
‘히히히, 엄마! 초원이 음란마귀 들렸대요.’
하아⋯. 초원은 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잡생각을 쫓는 덴 집안일이 최고니까.
그렇게 밀린 집안일을 하고 사이사이 뒹굴뒹굴하기도 하면서 황금 같은 크리스마스의 1/3을 보냈다. 노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이 안 가다니.
약속 시간을 한 시간 반 남겨 두고 샤워를 하고 낮에 보풀을 다 떼어 둔 검은 레깅스와 무릎까지 오는 연분홍색 후드 티를 입었다. 한 듯 안 한 듯 가볍게 화장도 한 다음에 웨이브가 살도록 공들여 드라이까지 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이 너무나 싫지만, 제모도 하고 속옷도 아껴 둔 세트로 입었다.
‘그래, 준비해서 손해 볼 건 없지.’
“들어와요.”
현우의 오피스텔에는 몇 번 와 본 적 있었다. 평소보다 정돈된 걸 보니 그도 낮에 청소를 한 모양이었다. 물론, 책상은 언제나 그렇듯 혼돈 그 자체였다.
“이거, 오늘 마시려고 산 거라 들고 왔어요.”
초원은 레드 와인 한 병을 현우의 눈앞에 흔들었다.
“혼술하려고?”
“뭐, 그렇죠.”
초원이 거리낌 없이 침대 옆에 있는 좌식 소파에 앉았다.
“홍 주임은 데이트 신청 많이 받았을 텐데 왜?”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와인 잔과 오프너를 들고 와 옆에 앉은 현우가 핸드폰을 켜고 배달 앱을 열었다.
“레드 와인이랑 뭐가 잘 어울리지? 아, 오늘은 초원 씨가 골라야지.”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한참 메뉴를 고민하다가 족발 세트를 시켰다.
배달까지 1시간. 뭘 해야 하지?
초원은 말라붙는 입술을 핥았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여기가 사무실도 아니고 지극히 사적인 공간 아닌가.
뭘 하는 건지 핸드폰만 내려다보는 현우를 물끄러미 보다 초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 늦잠 잔다더니 늦잠치곤 일찍 일어났네요.”
“그러게요. 9시에 딱 눈이 떠지더라고요.”
‘그럼 거의 일어나자마자 전화한 거네.’
“그러고 카페 들어갔는데 이것 좀 봐요.”
현우는 핸드폰으로 무언가 열심히 찾더니 영상 하나를 틀었다. 너무 어두워서 뭐가 뭔지 분간이 잘 안 가는 영상 가운데로 희끄무레한 뭔가가 휙 스쳐 지나갔다.
‘이것 때문에 부른 거야? 그럼 그렇지.’
초원은 맞춰 입은 속옷이 부끄러웠다.
“너무 빨라서 잘 안 보이는데⋯.”
“그니까 더 맞는 것 같지 않아요?”
“믿을 만한 거예요? 조작일 수도 있잖아요.”
“업로더 찾아서 확인해 보려고요. 근데 뭐하러 이걸 조작하겠어요.”
간만에 장산범 제보를 받은 현우는 신이 나 보였다. 작년에 같이 부산 금정산에서 찾았던 동물 사체가 알려진 생물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판별났을 때도 이렇게 신이 났었지. 하지만 그 후로 딱히 믿을 만한 목격담이 없어서 ‘설마 그게 마지막 개체였나’ 하던 차였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장산범에 집착하는 걸까?
청에서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크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포획해 봤자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래도 현우는 자비를 들이고 휴가까지 내서 장산범이 있는 걸 증명하려 애썼다.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영상을 계속 돌려보는 현우의 속눈썹이 참 길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그가 씨익 웃었다.
“크리스마슨데 이런 얘기 재미없다, 그쵸? 영화나 볼까요?”
현우는 TV를 켰다.
또 한참 둘이서 고민을 하다가 히어로물 영화를 골라 틀었다. 둘은 쉬는 날에도 초능력자가 나오는 영화를 골라 보는 건 직업병이라며 웃었다.
말없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으니 초원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배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듯 멀구나.
‘족발 언제 오나⋯.’
“박 주임님이 소개팅 시켜준다는 거 하지 그랬어요? 나 그 사무관 아는데⋯. 우리 초원 씨가 많이 아깝긴 하지만, 괜찮은 사람인 것 같던데⋯.”
초원은 괜히 족발을 젓가락으로 찌르며 씁쓸하게 웃었다.
“원래 지나간 사람은 새로운 사람으로 잊는 거라던데⋯.”
현우는 초원이 연애를 안 하는 이유가 실연의 상처뿐인 줄 알고 있었다.
“선배, 그 말은 거울 보며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네.”
“올해는 왜 안 왔어요?”
“올해는 연주네 가족들이 독일로 갔거든요.”
현우는 시무룩한 얼굴로 쟁반 국수를 뒤적였다.
띠링.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그분인가? 초원이 궁금해하는 사이 현우는 짧게 답장을 하더니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띠링 띠링.
내려두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초원은 알 만하다는 듯 웃었다.
“아, 연주가 아니고 아름 씨예요.”
“아름 씨?”
“심심하다고 뭐 하냐고 묻네요.”
“아름 씨도 부르지 그랬어요?”
“음, 그건 좀 어색하잖아요. 집에 초대할 만큼 친하진 않은데⋯.”
현우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순간 초원은 아름이 송년회 때 했던 부탁이 떠올랐다.
“나랑 있다곤 안 했죠?”
“네, 그냥 족발 먹는다고 했는데⋯.”
“나랑 있다고 하지 마요. 괜히 이상한 소문 날라.”
그 말에 현우가 피식 웃었다.
“이상한 소문은 벌써 났던데, 하하하. 사람들이 우리 몰래 사귀거나 썸 타는 줄 알아요.”
“네?”
초원도 수없이 들은 소리였지만 처음 듣는 척 눈살을 찌푸렸다.
“그 회계과 사무관, 나보고 초원 씨한테 대시해도 되냐고 묻던데⋯. 나는 왜 그걸 나한테 묻냐고⋯. 어이없다, 그쵸?”
“하하⋯.”
아까는 내가 아깝다더니⋯.
초원은 잔을 들어 쓰디쓴 와인을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까 아름 씨도 우리 사귀냐고 물었는데⋯. 이제 선배랑 덜 친하게 지내야겠네.”
“와, 내가 사 주는 족발 먹으면서 이러기예요? 섭섭하다, 진짜.”
“그럼 선배라도 여자 친구 만들어요. 오해 안 받게.”
“그럼 여자 친구가 홍 주임이랑 무슨 사이냐고 오해할걸?”
초원은 더는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름 씨는 어때요? 귀엽고 애교도 많고⋯.”
“음, 아름 씨는 귀엽지만, 난 어른스러운 타입이 좋더라고요, 홍 주임같이.”
이 어장은 왜 출구가 없는가. 초원은 눈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리며 시큰둥한 척했다.
“흠, 무슨 꿍꿍이예요? 갑자기 아부라니.”
“이것 봐, 홍 주임은 어른이라 이런 거에 안 넘어가잖아.”
눈꼬리까지 휘어가며 생긋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초원은 좋으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둘은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을 비웠고, 현우의 집에 있던 술도 바닥내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돌자 초원은 어지러워졌다. 에라 모르겠다, 쿠션을 베고 바닥에 누워 버렸다.
“침대에 눕지? 바닥에 누우면 허리 아플 텐데⋯.”
“⋯그래도 돼요?”
집주인이 대답 대신 일어서더니 침대를 덮고 있던 이불을 한쪽으로 젖혔다. 초원은 잠시 고민하다 머뭇거리며 침대로 올라갔다. 현우는 걷었던 이불을 덮어 주곤 다시 소파로 가서 앉았다.
남자의 침대에 눕는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이 남자의 침대는 처음.
부끄러워서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 올렸지만, 이불에서 현우의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어쩐지 더 부끄러워졌다.
오피스텔 밖 야경을 배경으로 맥주를 마시는 그의 옆선이 외로워 보였다.
선배는 여기 내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녀가 누워 있길 바라겠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람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는 걸까? 장산범을 쫓는 마음과 같은 걸까?
새드엔딩일 걸 뻔히 알면서도 연애를 하고 싶은 나는 또 무슨 마음인 걸까?
같이 있어도 외로운 크리스마스구나.
답을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질문의 타래가 어느 순간 끊어졌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초원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즐거워 보이네.’
SNS에 오늘 올라온 사진 속 연주는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평상시의 사진보다 조금은 피곤해 보였지만. 간만에 재회한 가족들이 연주에게 갖은 압박을 주었을 거야 뻔한 일이었다.
결혼은 언제 하려고 그러니?
헤어진 지 몇 년째인데 양가에서는 두 사람의 결별을 없는 일처럼 여기고 결혼 타령을 했다. 처음 몇 년은 현우도 부모님들 편이었지만 지금은 연주의 편이었다. 이제는 연주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하니까.
철이 없다. 비단 장산범을 쫓아 산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만을 두고 한 말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연주에게 현우는 양쪽 집안과 세상의 압박을 막아 줄 만큼 튼튼한 방패가 되지 못했다. 그건 나약하고 무기력한 그의 잘못일 수도 아닐 수도.
여튼 그의 지루한 인생에서 탈출구였던 연주는 저만의 탈출구를 찾아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여기서 잡히지 않는 것들이나 쫓고 있다. 그걸 탈출구라고 부르지만 그 끝에는 과연 탈출구가 있을까?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너는 몰라도 돼.
부모님이 늘 했던 말처럼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주어진 길이나 따라가는 건 편하다. 막연히 시키는 대로 정해진 길만 따라 걸으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학교, 전공, 그리고 결국에는 연애도 직장도.
부모님 말마따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등학생 시절 시작한 연주와의 풋풋한 사랑은 그에겐 나름대로 첫 반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못지않게 잘난 집안 딸인 연주를 어머니가 반기면서 반항이 아니게 되어 버렸지만.
특관청도 그랬다. 늘 판검사를 부르짖으며 관심도 없는 법대에 억지로 보낸 어머니를 향한 반항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시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것도 출셋길이라고 명예롭게 생각했고, 아들이 국정원에 취직한 줄 아는 어머니는 동네방네 ‘이거 비밀인데 우리 아들 국정원 다녀.’라고 떠들고 다녔다.
부모님이 정해 둔 길에서 다음 이정표인 결혼을 거부하는 건 소심하지만 효과적인 반항일 수 있을까? 어차피 연주가 아닌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상상은 해 본 적도 없으니 그에게도 아쉬울 것 없는 반항이었다. 다시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한들 결말이 좋을 리도 없고. 형처럼 남의 집 귀한 딸 고생시키고 싶지도 않으니.
현우는 제가 고생시킬 뻔했던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핸드폰에서 시선을 뗐다. 손에 쥔 맥주 캔이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초원이 조용하다. 그제야 침대로 고개를 돌린 현우는 피식 웃었다. 절세미인이 지금 그의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걸 알면 회사가 뒤집힐 거다.
특관청의 절세미인. 혹은 얼음공주.
아니, 절세미인인 얼음공주님이었다. 절세미인이라 부르며 접근했던 남직원들이 초원의 싸늘한 대응에 상처 입고 나면 얼음공주라고 불렀으니.
안타깝다. 가까이서 보는 초원은 예쁜 외모가 다가 아닌데. 그 외모가 다른 장점을 가렸다. 입으로는 귀찮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투덜대면서도 맡은 일은 철저히 해내는 책임감과 성실함하며, 겉으로는 쌀쌀맞게 굴지만 속은 누구보다 정이 많은 구석도. 정말 좋은 파트너였다.
다른 사람들은 불순한 안경을 끼고 그 절세미인이랑 파트너라니 부럽다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그런 건 조금도 없었다. 현우는 아직 연주의 그늘 속이었고 초원은 아직 파혼의 그늘 속인지 연애도 결혼도 않겠다고 하니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솔직히 초원과의 관계가 선을 넘는 상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곧 접었다. 초원이 그에게 관심이 있을 리가. 그의 집, 그의 침대에서 지금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건 그를 조금도 남자로 안 본다는 증거일 텐데. 어째서인지 씁쓸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10년 넘게 함께한 연주만큼은 아니지만, 3년을 함께한 초원과의 관계도 신뢰와 이해가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여 온 관계였다. 그 소중한 관계의 균형을 치기 어린 찰나의 연애감정으로 무너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초원이 받아 줄 리도, 결말이 좋을 리도 없고.
‘그래, 내 주제에 연애는 무슨.’
그저 지금 같은 끈끈한 관계가 잔잔히 이어지면 좋지 않을까? 비혼주의자, 그게 타의든 자의든, 여튼 비혼주의자 둘이서 서로 의지하고 사는 것. 나쁘지 않다.
그런 생각의 끝에서 현우는 웃었다. 초원의 곤히 자는 얼굴만큼이나 잔잔하게.
“홍 주임 어제 되게 잘 자더라. 나 조금 섭섭했어.”
외근 가는 길, 택시 뒷좌석에 앉은 현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흠, 왜요?”
“나는 남자로도 안 보인다는 거잖아요.”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류를 뒤적였다.
‘날 여자로도 안 보는 게 누군데⋯.’
“섭섭한 게 아니라 감동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그 정도로 선배 믿는다는 건데?”
“어, 그러네. 영광입니다, 홍초원 주임님.”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노량진 초등학교 앞에서 내린 두 사람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갔다.
“춘당 리빙텔⋯. 여기 맞죠?”
“네, 310호예요.”
둘은 3층으로 올라가 유리문 안으로 들어갔다.
310호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조금 열렸다. 남색 추리닝을 입은 깡마른 20대 후반의 남자가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선 두 사람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양어진 씨 맞으시죠?”
“네, 맞는데요. 무슨 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 남자의 말투에는 경상도 억양이 묻어 있었다.
“인터넷에 금붕어 훈련시킨 영상 올리셨던데, 맞으시죠?”
“요즘은 피싱을 이런 식으로 합니까?”
현우가 특이현상관리청에서 나왔다고 하자 어진이 못 믿겠다는 투로 물었다.
“여기 명함이요. 못 믿으시겠으면 이 번호로 전화해 보시면 됩니다.”
현우가 내민 명함에는 태극 문양 로고 아래 행정안전부라는 글씨가 찍혀 있었다.
“아, 보안상 행안부 이하 조직명은 안 쓰여 있습니다.”
세 사람은 어진의 고시원 방에 들어와 있었다. 사람 하나 간신히 누울 만한 공간에 어른 셋이 앉아 있자니 초원은 없던 폐소공포증이 생길 지경이었다. 벽 한편을 차지한 책상 위에는 행정학개론 책이며 영어 문제집 따위가 꽂혀 있었다.
“근데 제가 물고기랑 말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조작인 줄 알던데⋯.”
“용궁에 있는 아는 담당자한테 영상을 보여 줬더니 어진 씨가 금붕어랑 텔레파시를 쓰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용궁’이라는 말에 어진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니, 이 남자 미친 거 아이가?’
어진은 남자 옆에 앉은 여자 요원을 쳐다보았다. 표정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게 농담이 아니었다.
‘아님, 내가 공시생을 너무 오래 해서 드디어 미친 긴가?’
어진은 안경을 벗고 마른세수를 했다.
“날 때부터 있었던 능력입니까?”
“아니요, 3년 전에 여기 수산시장에서 전어회를 사 먹었는데, 그게 잘못돼 가지고 엄청나게 앓았거든요. 그다음부터 물고기들 하는 말이 들리더라고요. 마트 갔다가 수산물 코너에 수족관 있죠? 막 거기 있는 생선들 하는 소리 다 들리고⋯.”
“물고기 외에 다른 수산물은요?”
“오징어도 해 봤고. 조개랑 랍스터도 말이 통하고. 아, 미역 같은 건 안 되고요. 원래 부산 사람이라 생선이랑 회도 엄청 좋아하는데 그러고 나서는 멸치볶음도 못 먹습니다.”
역시나 회를 엄청 좋아하는 초원은 남자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고래나 물개는요?”
현우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고래랑 물개는 안 해 봤는데⋯. 서울 한복판에서 고래랑 물개를 어디서 보겠습니까?”
“수족관이나 동물원에 있잖아요.”
현우는 핸드폰을 열고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초원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뺏었다.
“선배, 나중에 퇴근하고 해요. 양어진 씨, 지금 안 바쁘시면 일단 청에 가서 등록부터 하실까요?”
“등록이요?”
“특수 능력이 있으신 분들은 관리청에 등록하셔야 해요. 태어나면 주민센터 가서 출생 신고 하는 것처럼요.”
어진은 번쩍번쩍한 고층 건물을 올려다보며 옷을 갈아입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가끔 서울역을 지나다니긴 했지만 여기 이런 데가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두 요원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 11층에 내리자 리셉션에 직원 둘이 앉아 있었다. 현우가 직원 한 명에게 무언가를 건네받더니 어진에게 주었다.
“이거 옷에 다시고요. 사무실 안에 있는 동안에는 꼭 달고 계셔야 합니다.”
어진은 방문객 배지를 체크무늬 셔츠 주머니에 달고 두 요원을 따라 유리문 안으로 들어갔다.
첩보 영화에서 보던 티타늄 합금 게이트라든지 삼엄한 경비라든지, 뭔가 신기한 게 있을 거라 기대했던 어진은 사무실이 드라마에서 보던 삭막한 사무실과 다를 게 없자 실망했다. 직원들도 그냥 평범하게 찌든 얼굴이구나 싶은 순간, 맞은편에서 검은 입술에 창백한 얼굴을 한 남자가 미끄러지듯 걸어왔다.
“저기 요원님, 저승사자도 여기서 관리합니까?”
“아뇨, 저 사람⋯ 이 아니고, 차사들은 저승 소속 공무원이라 부처 간 협의 같은 거로 외근 온 거예요.”
“와, 대박이다. 그럼 여기서 일하다 과로사하면 바로 저승사자 따라가면 되는 거네요. 말 그대로 산지 직송이네.”
초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상상력이 너무 지나친데⋯.’
“양어진 씨⋯.”
초원은 3팀 사무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혹시, 물고기 어자인가요?”
옆에 앉은 현우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뇨, 언어 할 때 어자인데요.”
초원은 현우가 얼마나 실망했을까 싶어 속으로 웃었다.
“근데 동물성 플랑크톤이랑도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아요?”
현우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네?”
“그건 너무 하등 생물 아닌가요?”
초원은 진지하게 대답하는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혹시 여기도 공채 있습니까?”
“아뇨, 여긴 보안이 중요하다 보니 다 추천 채용이나 특별 채용이에요.”
“그렇구나. 제가 공무원 준비하는 사람이라서⋯. 그럼 두 분도 공무원이신 거죠? 혹시, 몇 급이세요?”
“6급이요.”
“와, 두 분 다 젊으신 것 같은데 6급이면⋯.”
“여긴 다른 부처랑 체계가 좀 달라요.”
“혹시 실례가 안 되면 연봉은⋯.”
“아, 그건 대외비라 좀 그렇네요.”
“하긴, 그렇죠, 하하. 그, 혹시 여기 물고기 말하는 사람은 안 필요합니까?”
초원은 고개를 들어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뜬금없지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현우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용궁 사람들은 육지 말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쪽 말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네요.”
현우가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팀장님한테 한번 말해 보는 건 어때요?”
초원의 제안에 어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저희는 그냥 말만 전해 드릴 거고요. 된다는 보장은 못 하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좀 잘 전해 주십쇼.”
“근데 그 영상에 나온 금붕어는 어떻게 하셨어요? 아까 방에는 없던데⋯.”
현우가 느닷없이 화제를 돌렸다.
“아, 걔는 자꾸 저보고 멸치라고 놀려서 그냥 연못에 풀어 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