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와 그 남자의 온도차 1
프롤로그
<초원: 이름은 풀밭이요, 인생은 지뢰밭인 여자>
도마 위에 오른 고기가 된 기분이다.
차갑고 낯선 물건이 쑤욱 들어오는 불쾌감에 초원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뜨겁고 끈적한 물건이라면 익숙한데⋯.’
머릿속 음란마귀가 눈치 없이 튀어나왔다.
‘시끄러워. 낄 때 안 낄 때를 모르네. 자꾸 그러면 굿해서 쫓아낼 거야.’
겸연쩍은 시선이 오고 가자 초원은 붉어지는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서 빨리 끝내 줬으면⋯.
‘어, 저게 뭐지?’
커다란 회색빛 덩어리 두 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왜 저런 게 저기 있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사라지기는커녕, 이제 그 미지의 개체는 살아 있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듯 몸부림치고 있었다.
초원은 터지는 눈물을 넘기려 애쓰며 믿을 수 없다는 눈길을 보냈다.
이윽고 심장 소리가 선고를 내리듯 귓속을 쿵쿵 울렸다.
[5년 전]
이게 무슨 아침 드라마 클리셰 같은 상황이람.
초원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나마 여름이라 다행이지 겨울이었으면 뜨거운 커피를 뒤집어썼을지도 모른다.
“초원 씨, 참 나무랄 데 없고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여자란 거 나도 알아요.”
‘하하⋯. 빠지는 게 있으니 이렇게 찾아오신 것 아닌가요?’
초원은 비웃음이 나는 걸 억지로 삼켰다. 삼키는 게 맞는 일이었다. 저를 향한 비웃음이었으니까. 이런 날이 올 줄 어렴풋이 알았으면서 뭘 기대했니, 홍초원?
“직업에 귀천은 없는 세상이니까⋯.”
이어질 말을 예상하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초원 씨 어머니가 무속인이란 것도 큰 흠은 아닌데⋯.”
‘크진 않아도 흠은 흠이란 거군요.’
“흠은 아니지만, 대물림이 된다는 게⋯. 초원 씨 자주 아프다면서? 그거 신병 맞지?”
초원은 대답 대신 싸구려 일회용 커피 컵을 향해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내 손녀가 신병으로 고생하는 거 절대 못 봐.”
‘손녀 보실 일 없을 텐데요. 저 불임이에요.’라는 말이 혀끝을 간지럽혔다. 그 사람이 그것까진 말하지 않았나 보다. 나름의 의리일까?
말이 불쑥 나갈 틈을 주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저 사람에게 초원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뭐하러 무덤도 좀 파 주고 가시라고 구걸할까.
“아휴, 말하는 김에 다 하자면 직업도 좀⋯.”
중년의 여자가 앞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주변이 들을세라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국정원 다닌다며? 그거 위험하지 않아? 쥐도 새도 모르게 자살 당하면 어쩌려고?”
‘사실 국정원 아닌데요.’라는 말은 담뱃재 맛의 커피 한 모금과 함께 삼켰다. 이 말을 내뱉었다간 내부감찰반에서 초원의 무덤을 손수 파 줄지도 몰랐다.
‘뭐, 위험한 건 맞는데 자살은⋯. 자살 위장을 시키는 개체도 있으려나?’
“의대 나왔으면 그냥 의사를 하지 그랬어. 여튼, 초원 씨가 잘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생각하는 엄마 마음 좀 잘 헤아려 줘요. 초원 씨도 언젠가 애를 낳으면 이해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5년의 연애가 끝났다. 가장 반짝인다는 20대의 절반을 함께 보낸 사람.
좋아하던 선배에게 고백을 받고 노란 가로등 빛 아래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던 5년 전의 그녀. 이 결말을 알려 주면 어떤 선택을 할까?
‘과거로 가는 우체통이 어느 방에 있더라.’
초원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메모지를 굴리다가 피식 웃었다.
과거를 바꾼다 한들 지금도, 앞으로도 혼자인 건 똑같은데 뭐 하러. 추억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승준: 불면증과 악몽의 도돌이표>
무언가 잘못됐다.
승준은 문지방을 넘다 말고 얼어붙었다. 목 뒤의 솜털이 하나씩 곤두서기 시작했다. 저격수가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을 때나 느낄 법한 감각이었다.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눈으로 천천히 자신의 방을 훑었다. 잘 정돈된 침대, 침대 옆 협탁에 비스듬히 놓인 책 두 권과 여자 친구가 사 준 양초, 책상 의자에 걸쳐 둔 잠옷, 굳게 닫혀 있는 옷장. 모든 게 아침에 나갈 때 그대로였다.
등 뒤로는 어머니의 칼질 소리와 아버지가 보는 TV 소리, 그리고 자기 방에서 통화를 하며 깔깔대는 여동생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어느 것도 평소와 다른 게 없었다. 그런데도 교감 신경은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었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요즘 너무 스트레스가 많았나?’
어느 직장이나 심신의 안녕을 팔아 돈을 버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국정원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잔뜩 당기던 목덜미가 서서히 느슨해지고, 그는 방 안으로 발을 옮겼다.
훗날 승준은 이날을 기억해 내고 평생을 후회했다. 사실 육감에 귀를 기울였다 한들 그로부터 이틀 뒤 가족에게 찾아온 참극을 막을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그렇게 비참하게 보내진 않았을 텐데. 어쩌면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후로 승준의 침대 협탁 위에는 항상 수면제가 놓였다. 그걸로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지 않아도 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수면제에는 생생한 악몽이라는 부작용이 뒤따랐다.
이따금 그는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흰 양말을 축축이 적시는 검붉은 액체, 그리고 자신을 보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헐떡이다 차갑게 식어 가던 여동생의 마지막 얼굴을 어제 일처럼 겪어야 했다.
<현우: 그 남자의 덕업일치>
“요즘 한국에선 무슨 치킨이 유행이야?”
연주가 냉장고에 붙어 있던 배달 음식 책자를 집어 들며 물었다.
“글쎄⋯. 난 그냥 늘 먹던 거 시키는데?”
“걸그룹 포스터 주는 걸 시키는 게 아니라?”
연주의 손가락이 책상 옆 벽에 붙은 포스터를 가리켰다.
“그냥 주길래⋯.”
책상 앞에 앉은 현우는 핸드폰을 연주에게 내밀었다.
“요즘은 배달 앱으로 다 시키지. 독일엔 이런 거 없어?”
“있긴 한데, 간장 치킨은 없지.”
핸드폰을 받아 든 연주가 현우의 무릎에 앉았다. 현우는 진지하게 치킨집 메뉴를 탐독하는 연주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목덜미에 코끝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반년만인가?’
연주와는 오래 떨어져 있어도 어색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 때부터 10년 넘게 만났으면 10년 차 부부와 다를 게 뭔가. 뭐,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연주는 전 여친이란 사실이었다.
악기를 전공한 연주가 학부를 마치고 독일 유학을 시작했을 때, 그는 당연히 돌아오면 결혼하는 거라고 믿었다. 공부를 다 마친 그녀가 독일에 계속 남겠다고 폭탄선언을 하기 전까진.
‘그럼 우리 결혼은?’이라며 불쌍한 강아지 눈을 글썽이며 울먹이는 현우에게 연주는 딱 한마디뿐이었다.
‘넌 너무 철이 없어.’
현우는 반박하려 입을 뗐다가 도로 붙였다. 왜 철이 없다 하는지 너무나 뻔했으니까.
한참을 고르고 또 고르던 연주는 결국 반반 치킨 세트와 맥주를 주문했다.
“몇 분 걸린대?”
“40분.”
“그럼 우리 40분 동안 뭐 하지?”
현우는 연주의 목덜미부터 쇄골까지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렇게 정해진 답의 힌트를 주고 고개를 들자 그녀가 보드라운 입술을 포개어 왔다.
한동안 현우의 오피스텔에는 두 사람이 입술을 떼었다 붙이는 소리만 울렸다.
연주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허벅지를 거쳐 시폰 원피스의 끝자락으로 향했다. 다른 한 손은 이미 지퍼의 고리를 잡고 있었다.
지이익.
지퍼를 내리는 소리에 흥분한 연주의 키스가 더욱 끈적해졌다. 익숙하디익숙한 반응에 현우는 입술을 내어준 채로 슬며시 웃었다.
연주는 손이 외워 버린 전화번호 같았다. 풋풋하던 그때 엄마의 간섭이 무서워 핸드폰에 저장하지 못하고 손으로 외워 버린 연주의 번호. 이제는 눌러도 울리지 않는데 손은 여전히 그 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연주의 몸 구석구석을 외워 버렸듯이.
현우는 벌어진 원피스 틈새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부드럽게 살갗을 스치며 내려오던 손가락이 브래지어 후크에 닿는 순간 그녀의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
놀리고 싶어졌다. 아니, 사실은 보고 싶었다. 연주도 이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현우는 후크를 풀듯 말듯 손가락을 놀리며 등 한가운데를 간지럽혔다.
갑자기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현우는 모르는 척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짜증 섞인 한숨을 뱉은 연주가 일어서더니 눈을 흘기며 등 뒤로 양손을 가져갔다.
툭.
팽팽했던 밴드가 풀리는 소리에 현우의 그곳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연주는 한 팔로 가슴을 가린 채 천천히 원피스 소매와 브라 어깨끈을 내렸다. 아찔한 가슴골이 서서히 드러나자 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거 알아? 하루에 10분씩 가슴을 보면 수명이 5년 늘어난대.”
“그래? 난 지금 네가 안 보여 줘서 죽을 것 같은데⋯.”
연주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원피스를 붙잡고 있던 손을 치우고 그는 굶주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탐스러운 가슴을 베어 물었다.
혀끝에 닿는 돌기는 이미 단단했다. 한껏 예민해진 젖꼭지를 보드라운 혓바닥이 쓸어 올리고 뜨거운 입김이 간질이자 연주가 그 열기를 못 이긴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현우의 목을 감고 있던 그녀의 두 팔이 힘을 잃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 으음⋯. 하읏⋯.”
연주의 신음에 점점 비음이 섞여 들었다. 그렇다는 건 이제 손을 쓸 차례라는 뜻이었다. 현우는 가는 허리를 붙들고 있던 손을 원피스 자락 속으로 넣었다. 역시나 손끝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연주의 몸을 다 아는 손가락이 알아서 얇은 천 아래로 파고들었다.
젖은 소리와 이젠 비음뿐인 신음 소리가 뒤섞였다. 침대로 갈까? 아니지. 그냥 여기서 해 버려? 그래, 1초가 아깝지. 현우가 손가락을 멈추고 속옷을 끌어 내리려는 찰나 연주가 놀라 소리쳤다.
“헉, 이거 뭐야?”
“어? 뭐?”
연주가 책상에 놓인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사진엔 털과 뼈만 남은 동물 사체가 있었다. 현우는 사진을 급하게 집어 서랍에 넣어 버렸다.
“미안⋯.”
“요즘도 장산범인지 뭔지 하는 거 쫓아다니는 거야?”
“그냥 취미로⋯.”
“어휴, 언제 철들래?”
“너랑 결혼하면. 결혼하면 철든다잖아.”
현우는 씨익 웃으며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기껏 분위기 다 잡아 놨는데 포기할 순 없지.’
한참 반응이 없던 그녀가 서서히 입술을 열고 혀를 받아들였다. 연주의 촉촉한 입술이 그의 혀를 감싸는 감촉이 황홀했다. 눈을 감고 그 느낌을 만끽하던 현우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띵동.
“치킨 왔다!”
연주가 입술을 떼고 얼른 나가 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현우는 마지못해 현관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아직 40분 안 된 것 같은데⋯.”
“한국 치킨은 진짜 세계화해야 해. 진짜 어딜 가도 이런 맛은 없다니까?”
“그렇게 그리웠으면 그냥 한국 돌아와서 살지.”
“근데 먹는 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참, 회사 일은 할 만해?”
“그냥 그렇지 뭐.”
“진짜 재미없겠다.”
그렇다. 진짜 재미없었다. 오늘 아침은 용궁에 보낼 공문 쓰느라 다 보냈고 겨우 써서 냈더니 팀장에게 맞춤법이 이게 뭐냐고 깨졌다.
그저께는 명동에서 염능력자가 사람 많아 짜증 난다고 인파를 홍해 앞에 선 모세처럼 가르고 다녀서 주말인데도 출근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를 시전해야 했다.
물론 좋은 일도 있다. 벽에 걸린 포스터에서 고양이처럼 웃고 있는 저 여 아이돌이 사실은 700살 넘은 구미호라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번 달에 등록증 갱신하러 왔을 때 직접 사인까지 받은 포스터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웃어?”
“어? 아니, 그냥⋯.”
연주가 들으면 재미있어할 일이 많은데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현우가 제약 회사 법무팀에 있는 줄 알았으니.
연주가 그렇게 싫어하는 장산범 덕분에 있는지도 몰랐던 꿈의 직장에서 6급 공무원인 걸 알면 그때도 철이 없다고 그럴까?
뼈만 남은 치킨 박스를 치우고 현우는 침대에서 TV를 보는 연주의 옆에 앉았다.
“오랜만에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그치?”
연주의 어깨를 팔로 감고 목덜미부터 천천히 키스를 시작했다.
“아, 나 배불러서 못 해.”
그날 현우는 치킨집 별점을 평소보다 짜게 줬다. ‘치킨이 너무 일찍 왔습니다.’라는 리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