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려 자치주 -- >
참석자들의 박수소리가 잦아들어 내가 본격적인 각론에 들어가려하자 심각한 안색으로 경청하고 있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제지를 한다.
"강 회장, 잠시 만요."
"............?"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의 말이 이어진다.
"거창한 개발계획도 좋지만, 유독 조차(租借)라는 말이 신경 쓰여서 말이오. 어느 나라든지 일개 기업이 아무리 많은 투자를 한다 해도, 그것도 한 두 해도 아닌 몇 백 년 씩 조차를 해주는 경우는 없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그럼, 향후 수천억 달라가 투입될 사업에 어느 기업가가 안전판도 없이 이런 대단위 투자를 하겠습니까? 나라도 안합니다.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 일거고요."
"흐흠...........!"
나의 말에 답답한지 침음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고르바초프다.
"이런 방법은 어떻겠소? 어느 일정 범위를 경제특구로 지정해 그곳에 한해서는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게끔 법제화해 드리는 것이지. 물론 외교 국방 권은 당연히 소련연방정부가 갖고 있어, 그 지역을 보호는 해주어야겠지요."
"자치주 개념인가요?"
"용어야 아무려면 어떻소? 실질이 중요한 것이지."
"그럼, 중앙시베리아 고원 이동 전체를 주시지요."
"하하하..........!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니오? 그렇게 큰 땅덩어리를 제대로 관리나 할 수 있겠소? 내 생각은 말이오. 옛날 고려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연해주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어떻소?"
"너무 적습니다. 그럼, 이르쿠츠크 이동으로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하하.........! 사업 규모도 범인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크게 구상하더니 땅 욕심도 많소이다. 내 크게 양보하여 하바로브스크 주 전체 그러니까 아무르 강 이동 전체를 특별구로 지정해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하리다.
단 산업개발을 위한 인프라 및 여타 기반조성도 귀 측에서 해야 된다는 점도 알아두어야 할 것이오. 우리 소련 정부로서는 그렇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럴 능력이 미치지를 못하니 어쩌겠소? 필요로 하는 귀측에서 해야지."
'이거 털도 안 뽑고 먹을 생각이군!'
나는 내심 투덜거리며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가 모든 인프라 및 기반시설까지 갖추어야 한다면 추가로 수백억 달러를 쏟아 부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하바로브스크 주 만으로는 농업이나 자원도 그렇고 어렵겠습니다.
아무르 주까지 포함해서 자치주로 인정해주신다면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연방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기는 아무르 주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지하자원 개발이든지 수출입분야는 자치주 개념을 벗어나 전 소련 영토를 상대로 사업을 벌일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처음 연해주 일대를 주장한 내 안 보다는 대폭 커지기는 했지만, 그 정도 선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최대입니다. 이제 경제특구의 범위가 결정되었으니 구체적인 사업 분야로 들어가되, 그 정도는 실무선에서 타결을 짓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서기장 각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르바초프에게 인사를 한다.
이딴 인사 지금의 내 기분으로는 백 번을 하라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바로브스크 주만 해도 한반도 넓이의 4.5배가 되는 드넓은 땅이다.
여기에 아무르 주가 한반도의 1.7배, 여기에 연해주가 속한 프리모르스키주 가 약 0.8배 도합 한반도 면적의 7배 크기의 땅덩이가 졸지에 이 대원그룹 아니 강 태민의 품에 안기는 순간인데, 그깟 인사 백 번 인들 못하랴! 오늘 하루 종일 꾸벅거리라고 해도 해낼 자신이 있는 나다.
'하하하...............!'
마음속으로 대소를 터트리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고르바초프를 아주 정중히 전송한다.
이어 속개된 실무회의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협력 사업을 하나씩 협의하여 결정해나간다. 장장 3일에 걸쳐 주야로 개최된 회의에서 우리가 최종 합의한 사항을 이기(移記)하면 이렇다.
첫째 연해주를 포함한 하바로브스크 주 및 아무르를 합한 주를 앞으로는 '고려자치주'라 명명하며, 전체를 소련연방정부 내의 경제특구로 지정하여 자치를 허용한다. 둘째 대원그룹을 주축으로 하는 자치위원회는 자치주내의 제반 기반시설의 완비는 물론 치안유지까지 책임지되, 외교 국방만은 연방정부가 관장한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모항으로 하는 극동해군사령부다. 우리의 산업 경쟁력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항구가 필요한데, 군사항구라 개방을 하느니 못하느니 설전이 오가다가 최종적으로 고르바초프가 개방을 승낙하여, 자치주에서도 이 항구를 같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위의 사항을 향유하는 대가로 대원그룹은 향후 50년간에 걸쳐 자치주 내의 법인세 분의 50%를 소련연방정부에 지급한다. 넷째 대원그룹이 이르쿠츠크의 코빅타 가스전과 사하공화국의 차얀다 가스전 사할린전체의 원유와 가스전 등을 개발하되, 소련연방정부 또는 정부가 지정하는 기업과 50:50 동일 지분으로 이익금을 분배해야 한다.
단 경영권의 주체는 대원그룹이다. 여기서 1989년도에 등장해야할 '가즈프롬'이라는 국영가스 및 원유전문 개발회사가 소련정부를 대표로하여 등장한다.
이 회사를 통하여 소련은 여타지방의 가스와 원유도 자체적으로 개발할 계획인 것이다. 다섯째 대원그룹은 유나이티드 에어크래프트 코퍼레이션 사의 주식 25%+1주를 취득하되, 양사는 항공기산업의 전 분야에 걸쳐 협력을 확대 강화한다.
에어크래프트 사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군용기 생산업체인 수호이 사와 미그기 생산업체인 미코얀, 일류신, 투폴레프 등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어, 소련 군용기 및 여객기 생산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이다. 이런 이들의 주식을 훗날 이탈리아의 최대 방산 업체인 핀메카니카가 대원그룹의 지분만큼 확보하는 것을 내가 선수를 친 것이다.
여섯째 대원그룹은 향후 50년에 걸쳐 수 천억 달러를 투입하여 농업, 목축업, 임업, 경공업, 중공업은 물론 향락오락 및 관광사업 여타 최첨단 산업까지 골고루 발전시켜 고려자치주를 명실공이 아시아 태평양의 중심 주로 만들 것을 약속한다. 이상이 정식으로 문서로 체결되었고, 고르바초프와 내가 공동기자 회견장에서 발표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 회견내용은 서방의 유명한 통신사인 AP와 AFP, UPI는 물론 소련의 이타르타스통신을 통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타전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다. 나는 이런 것과는 초연하게 에어크래프트사가 제공하는 투폴레프 Tu-144 여객기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향한다.
가스전을 개발할 이곳을 항공편으로 둘러본 우리 일행은 소련 정부에서 제공하는 별장 군에서 하루를 묵는다. 멀리 바다처럼 장대한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를 옆에 끼고 아늑한 언덕에 지어진 별장에서 나는 두 여인과 함께 낙조가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석양 무렵의 하늘은 시시각각 숨 막히게 아름다운 색깔로 변해가면서 잠시도 우리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다.
"아, 정말 아름답네요!"
채운(彩雲)의 황홀경에 빠진 윤희의 말을 받아 라니아가 말한다.
"우리도 이런 곳에 별장을 하나 지어요. 정말 멋질 것 같아요."
"앞으로 극동에서 많은 사업을 하려면 이런 명승에 별장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지. 아주 근사하게 짓자고."
"어마, 좋아라!"
나의 말에 소녀처럼 펄쩍 뛰며 좋아하는 라니아다. 나는 그런 그녀를 살짝 안아주고 페치카에 장작을 더 집어넣는다.
아무래도 온기가 식는 듯해서다.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을 조망하니 새하얀 눈밭에 목조로 지어진 단층 건물들이 점점이 하나 둘 불을 밝히고 있다.
때로 건듯 부는 바람에 눈발이 우수수 날리고 자작나무 숲은 몸살을 앓고 있다. 그 사이 재치 있게 뜨거운 커피를 한 잔 타오는 윤희다.
나는 하얗게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그 맛을 음미한다. 그런 내 곁에 와서 살짝 내 어깨 위에 머리를 얹는 윤희다.
나는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을 하나, 하나 쓸어주며 또 한모금의 커피를 입에 넣는다. 탁 탁, 중앙식 페치카에서는 나무 튀는 소리가 나고 라니아는 벌써부터 새하얀 씨트를 손질하고 있다.
곧 하늘은 거짓말처럼 어두워 오고 켜놓은 촛불의 일렁임이 그 밝기를 더해간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곧 행복 아니겠는가!'전생에서부터의 경험에 의하면 소시민으로 살아도 이렇게 대기업을 운영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크고 작은 고민과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 죽는 것이 인생 아닌가 싶다.
'인생은 등에 한 가득 짐을 지고 비탈길을 오르는 것과 같다'는 이에야스의 말을 요즈음 실감하고 있는 나다.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한 고비가 나타나고, 잘못해서 실족이라도 하는 날이면 밑바닥부터 다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 올라가야 하는, 우리네 인생은 하루도 마음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몇 백 년을 살 것도 아닌데 노심초사로 살다보면 어느 새인가 머리에는 하얗게 백발이 내려앉고, 그때 와서야 인생을 반추해 보면 이것이 아닌데 하는 실망감이랄까 후회감이 물밀듯 엄습해 오는 노년의 쓸쓸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럴 진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무거운 마음을 비워놓고, 여유자적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는 나도 모르게 상의를 뒤져 담배를 하나 입에 문다.
요 근래 들어 일관제철소 문제로 속을 끓이는 과정에서 어느새 담배를 전생에 이어 다시 피우게 된 나다. 가끔 한 대씩 피우는 담배라 짙은 담배연기가 갑작스럽게 폐부로 들어가니 기침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급히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향한다. 밖으로 나오니 찬 공기가 전신을 엄습해온다.
가벼운 옷차림이라 매우 춥다. 이때 재치있게 윤희가 파카를 들고 나와 내게 입혀준다.
싱긋 미소를 짓는 것으로 감사를 표하는 나에게 다정스레 볼에 뽀뽀를 하며 팔짱을 끼는 그녀다. 나는 노란 가로등 불빛이 빛나는 눈밭을 거닐며 윤희에게 묻는다.
"이제 아이 하나 가질 때도 안 됐어?"
"흥, 나를 회사에 출근 못시키게 하려고요?"
"그게 아니고, 더 늦기 전에 아이 하나 쯤 기르며 집에서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저도 요즈음 그 문제로 고민 중이예요. 그러면 이제 당신을 더는 못 도와주는데........."
그 말을 하며 빤히 나를 바라보는 윤희다.
"이제 비서실에도 많은 사람들이 충원됐으니,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 둘이 빠지면 또 예쁜 비서들 들여 관계 맺는 건, 아니 예요?"
"이거 왜 이래, 나는 지금 셋도 벅차다고."
"흥, 어련하시려고요."
내 말을 전혀 수긍하지 않는 그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생각을 강요하는 나다.
"그러지 말고 이제는 아이 하나 갖고, 집에 들어앉아 살림이나 해."
"1년만 더 다니고요."
"너무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그래."
"전혀 아니거든요. 저는 회사에 출근하는 매일이 즐겁거든 요."
"그런데 왜, 내 눈에는........."
"당신이 유독 많이 괴롭힌 날만 그래요."
"하하하..........! 그런가?"
"이제야 아셨어요?"
"그런 생각은 못해 봤는걸.........."
"그러니까, 라니아나 저나 작작 괴롭히시라고요."
"오늘은 그럼, 그냥 잘까?"
내 말에 그것은 싫은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드는 윤희다.
"그러면서 뭘 그래?"
"딱 한 번만.........."
그렇게 말해놓고는 스스로 얼굴을 붉히는 그녀다.
"하하하...........!"
그 나이에도 부끄러움을 타는 그녀가 귀여워 나는 대소를 터트리며 그녀를 꼭 끌어안는다.
나의 이런 행동에 그녀는 더욱 빨개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런 우리 둘을 시샘이라도 하는 지, 때로 건듯 부는 바람이 눈발을 날려 우리 둘의 모습을 시야에서 가린다.
============================ 작품 후기 ============================시야에서 가린다. ============================ 작품 후기 ============================오늘은 많이 늦었지만 즐감하셨기를 바라고, 즐거운 휴일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