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재계 서열 1위에 등극하다 -- >
2기아산업을 인수함으로서 자동차 부문의 외형은 커졌지만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500억 원의 누적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기아는 나에게 골칫거리였다. 외국 진출은 고사하고 국내에서조차 현대와 한국GM(대우자동차)에 치여 판매량은 꼴찌였고, 직원들은 월급조차 받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빠진 상태였다. 그렇지만 기왕 내게 떠맡겨진 이상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에 나는 대대적인 투자를 결심하고, 사장에 김선홍 씨를 내정해 선임 발령했다. 58년에 기아에 입사해 전무이사로 있던 사람으로, 내가 대원 자동차 국내 부문을 설립하면서 사장으로 내정하고 접촉을 시도했으나, 끝내 기아에서 명예롭게 퇴직하고 싶다고 거절한 사람이 이 사람이었다.
봉고와 베스타, 프라이드의 신화를 일구어 기아를 1년 만에 흑자로 전환하고, 2년 만에 100대 상장기업 중 흑자 순위 1위로 등극시킨 경영의 귀재 즉 한국판 아이아코카로 회자되는 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기아가 우리 그룹에 편입되자 '기아'라는 사명(社名)을 버리지 않는다면 사장직을 흔쾌히 맡겠다고 해서, 나는 이에 동의해 그를 사장에 앉힐 수 있었다.
아니 한국 자동차 부문 총괄 사장에 임명된 것이다.
단일 상장기업으로는 종업원 지분율 10%로 종업원들이 최대주주며, 주주 수만도 5만 명에 달해 주식분산이 가장 잘돼 있는 기아(起亞)가, 문자 그대로 아시아에서 일어나 세계로 뻗어가 길 바라면서 나는 '기아 산업(起亞産業)' 그대로 사명을 두었다. 그렇다고 기아가 대원그룹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니, 그의 요구를 승낙 못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나의 흔쾌한 동의와 대대적인 투자 약속에 신바람이 난 그는 소하리공장의 전 종업원을 상대로 연설을 하는 것으로 업무의 시작을 알린다.
"나는 결코 '망한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신명을 바쳐 회사를 지키고 회생시킬 것을 결심했습니다.
밀린 월급은 새로 인수한 대원 그룹 회장님의 적극적인 투자 약속과 함께 오늘 날짜로 전부 지급하겠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까지 기아 인이었고, 자랑스러운 기아 인으로 명예롭게 퇴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자랑스러운 기아 인이고, 또한 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망한 회사에 다닌다는 불명예를 안고 싶지 않으면, 우리 오늘 당장부터라도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신명을 내어 우리의 보금자리를 가꾸고 떨쳐 일어나 봅시다."
이렇게 기아의 꿈은 시작되었다. 공전의 히트를 치는 봉고의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기아의 꿈은 마침내 81년 봉고의 시판을 계기로 사원들은 작업복 상의에 봉고 로고를 붙이고 작업을 하고, 출근 인사조차도
'봉고를 팝시다!'
로 대체하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해, 81년부터 84년까지 근 25만 대의 차량을 판매해 기아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85년도에는 베스타라는 후속 모델마저 출시해 '봉고의 신화'를 이어나갈 즈음 86년 기아는 물론 대원의 자동차 부문 전체가 기로에 서는 한 해가 되었다.
국내에서 기아가 이렇게 선전하고 있는 동안 미국 시장에서도 아이아코카의 K-1 자동차 출시와 더불어, 한국에서 생산하는 K-2 자동차도 상승작용을 일으켜 공전의 선풍적인 인기 속에 미국 시장 부동의 판매 1위라는 선전을 거듭하는 동안, 그동안의 승리에 취한 아이아코카는 점점 교만해져 나와 대립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 마침 기아에 미국의 포드와 일본의 마쓰다가 제휴를 제의해와 나는 이를 신중히 판단한 끝에 승인하였다.
마쓰다가 개발한 '프라이드'를 기아가 생산하고, 이를 포드가 미국 시장에 판매하는 삼국협력 제휴였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프라이드, 미국에서는 수출 명 페스티바(Festiva), 일본에서는 마쯔다121로 불리며 선풍적인 인기 속에 또 한 번 기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이즈음 페스티바의 판매에 고무된 포드에서 기아에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작은 차체에 5명이 탈 수 있으며, 4륜구동 방식일 것, 단 디자인은 부드러운 유선형'일 것' 이라는 조건 하에 신차 개발을 제의해 온 것이다.
위의 조건을 전부 만족시키면 지금까지는 세상에 없던, 세계 최초의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이 탄생하게 되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당시 미국의 지프(Jeep)와 영국의 랜드로버(Landrover)처럼 크고 투박한 차량은 많았으나, 승용차와 별반 다르지 않는 성능과 승차감을 앞세운 차량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기아는 이를 만족시킬만한 기술이 없었다. 그렇지만 대원자동차만은 내 소유의 크라이슬러사에서 한국 대원자동차에 철저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기술을 이전시킨 까닭에, 이를 제작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를 기아와 대원자동차의 합작으로 긴급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제29회 도쿄모터쇼에 콘셉트 카로 공개된, 기아 '스포티지' 1세대의 등장은, 단번에 세계 자동차 전문가들의 이목을 사로잡아버렸다.
이 꿈의 차가 공개되자마자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킴은 물론, 글로벌 완성차 메이커들의 눈을 경악으로 부릅떠지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희한한 차였기 때문이다.
거칠고 투박한 네 바퀴 굴림형 차량은 많았으나, 스포티지처럼 4륜구동에 공간 활용성이 뛰어나고, 승용차처럼 부드러운 유선형의 구조에, 안정적인 승차감을 제공하는 차량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이에 너도 나도 스포티지의 판매대행을 자처했다. 그러나 우리는 애초에 이를 개발 의뢰한 포드에 의리를 지켜 미국 시장의 판권을 주었다.
결과는 허무하게도 완패였다. 미국인들은 소형이 아닌 대형차를 선호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유럽과 한국자동차의 불모지인 일본에서만은 선풍적인 인기 속에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여기서 나는 한발 더 나아가 대형 SUV는 물론 중형마저 개발해 생산판매하기 시작했다.
대신 판권은 지금까지 미국시장에서 저조한 판매실적을 기록한 포드가 아니라, 내 소유의 크라이슬러사의 체인망을 통해 판매하도록 했다.
그 결과는 놀라울 정도의 판매량의 신장으로 이어졌다. 미처 기아에서 만들어 대지 못할 정도로 판매주문이 쇄도했다.
이에 나는 차제에 지금까지 별개 회사였던 기아와 대원자동차를, '기아-대원자동차'로 사명을 단일화 하고, 법인 또한 통합해 버렸다. 그리고 구 대원자동차에서도 스포티지 차량을 생산토록 해, 주문량을 소화해 나가도록 했다. 그리고 프라이드 즉 미국 시장에서의 '페스티바'도 '리오(Rio)'라는 후속 모델로 파워 핸들링을 채택해 새롭게 출시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다시 고유가 시대가 도래한 미국 시장에서 인기리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즈음에는 소련은 물론 동구권까지 자유 시장경제를 채택한 시점이어서, 구소련 권은 물론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시장에 이르기 까지, 전 세계를 상대로 승용차 는 물론 스포티지 차량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면에는 김선홍 사장의 정신교육이 단단히 한몫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술도 중요하지만 '제품을 만들기에 앞서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기에 앞서 자신을 만들라'는 지론이, 직원들에게 먹혀 들어가 기아-대원차를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만든 것이다. 기아 및 전 대원자동차의 한국에서의 생산량 연 400만대, 이는 기아의 소하리 공장을 풀 가동시키고도 용지가 모자라, 당진의 대원자동차용지에, 합쳐서 100만 평을 더 신축, 라인을 늘림으로써 해결 가능한 쾌거였다.
여기에 미국 크라이슬러-대원의 연 생산량 400만 대, 유럽의 3대 메이커에서의 200만대 생산량을 합치면, 95년 현재 연간 1,000만 대 생산량을 자랑하며, 전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부동의 톱 메이커가 되었다. 2위는 연간 830만 대를 생산하는 GM이 차지하고 있다.
아무튼 그즈음 나는 미처 쏟아지는 주문 물량을 소화해 내지 못해, 세계 다른 곳에 공장을 지을 목적으로, 곳곳을 쏘다녀야 하는 애처로운(?)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그즈음은 한국의 인건비도 상당히 올라 나를 더욱 고심케 하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
* * *위의 사항은 95년까지 대원그룹 산하 자동차 부문에 대한 미래의 일이고, 다시 80년도 후반 현지 시점으로 돌아와, 9월의 어느 날이다. 8월 27일 통일주체대의원 선거에 의해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된 전두환은, 9월 1일 대통령에 정식 취임하며 김 재익을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경제 수석비서관으로 발탁한다.
이럴 즈음 경제 수석비서관이 된 김재익이 하루는 나를 보자고 청한다. 그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경제 분야의 막강한 실세로 떠오른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있는 기업인은 아마 대한민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전두환이 김재익을 경제 수석비서관으로 내정하고 그 의사를 타진하는 과정에서 김재익이 대통령에게 묻는다.
"경제 수석으로서 각하를 모시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다보면 인기도 없고 사방에서 극렬한 저항에 부딪칠 것입니다. 그래도 저를 믿어주고 제 말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 말 할 것 없어, 이론에서는 당신이 경제 대통령이고, 실물 경제에서는 대원그룹의 강 회장이 경제 대통령이야!"
이런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석비서관에 취임한 그다.
경기고 2학년에 다니던 중 검정고시를 보아 1년 일찍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한국은행에 재직 중 하와이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한 사람이다.
이 후 경제기획원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경제기획국장을 마지막으로 관계를 떠나 KDI나 서울 대학교 교수로 가려할 즈음,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가 되었다가, 국보위 위원에 위촉되고 이어 수석비서관이 되는 그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의 아들이 전두환 정권에 협력한다고 극렬 항의하자, 이에 김재익은
"경제의 개방화와 국제화는 결국 독재체제를 어렵게 하고, 시장경제가 자리 잡으면 정치의 민주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고 타일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대기업을 위한 차별 금융제도, 세제혜택 철폐를 주장. 대기업의 독과점을 막기 위한 공정거래제도 채택까지 주장했다.
그리곤 중소기업 진흥 재단을 집중 지원했으며, 벤처 기업 육성을 강조했고, 1980년에 이미 20년 뒤에나 가능할 지하철과 버스를 연계하는 대중교통 시스템과, 전자 통신 기술로 발생할 정보 산업 혁명을 주장했다. 자신의 1년 후배인 오명을 자신이 휘하에 두고 전화기의 자급제를 실시를 주도했다.
기계식 전화기에서 전자식 전화기로 전환토록 한 것도 김재익의 노력이고, 세계 최고 수준의 전화 네트워크를 전국에 구축케 한 것도 김재익의 공이다. 이후 컬러TV 송수신을 자유화한 것도 김재익이 주도한 일이다.
이중 곡가제와 같은 농촌 보조 정책 강력히 비판해, 이를 철폐해 농촌의 자생력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기업과 정부의 극렬 반대에 맞서 부가가치세를 채택 유지함으로서 오늘날 정부 예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세목 중 하나를 그가 발굴하게 된 것이다. 또한 금융 실명제를 추진했으나, 당시 대기업과 정치인 등 '비자금'을 다뤄야 하는 이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샀고, 결국 전두환에 의해 최종 좌절되었다. 80년대 초반 자동차 산업의 마이너스 성장으로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국은 내수 시장이 작아 자동차 산업을 포기해야 한다."
고 조언했음에도, 그는 역으로 자동차 산업에 집중 투자할 것 을 주장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결국 1983년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소 테러사건으로 사망하는 경제 분야의 명 참모가 그다. 아무튼 그의 자신의 집으로의 초대에 망설일 필요 없이 내가 방문하니, 그는 나에게 술잔을 권하며 앞으로 실물경제에서 부분에서,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에 많은 협조를 바란다는 요지의 청을 한다.
사실 그가 추진하는 정책 즉 '금리 인하, 긴축정책, 자본과 상품의 개방화'가 당시의 상황과 잘 맞아 떨어지고, 명 처방이므로 나는 전혀 반대할 근거가 없어, 그의 부탁에 적극 응하는 척했다. 아무리 의견이 같아도 그래야만 마음속으로 라도 감사하게 생각할 것 아닌가.
이후 나는 그로부터 또 하나의 커다란 선물을 받는데, 그것은 다음 회에서 밝히도록 하겠다. -------------------------============================ 작품 후기 ============================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됩니다!
보람찬 한 주가 되길 바라면서, 성원에 거듭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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