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제 대통령-49화 (49/135)

< -- 위기를 대비하다 -- >

4나는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대원인터내셔날의 이상백 사장에게 전화를 건다. 위성전화가 현지에 설치되어 있어, 얼마 후 연결이 된다.

"나요."

"네, 회장님!"

"시간을 다투어 귀국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월성1호기 원자력발전소 건설공사 건이요."

"준비가 되는 대로 곧 출발하겠습니다."

"서울에서 뵙죠."

"네."

이상백 박사는 원자력의 권위자다. 그래서 내가 급히 그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물론 그를 통해 건설부 장관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그와 통화를 하고 나니 이제는 심상하게 돌아가는 기존재벌들과 이들과 결탁한 기득권층의 걱정으로 다시 내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나는 곧 정 양을 불러 이 실장을 호출한다.

잠시 후, 미래기획실장 이 주찬이 들어오자 나는 정 비서실장도 함께 불러, 이 문제를 숙의한다.

"저들의 만행이 1회성으로 끝날 일이 아니니 우리 입장에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서 두 분을 청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좋겠습니까?"

나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 실장이 입을 연다.

"정 비서실장님 때부터 정보요원은 물론 경호요원들 까지 꾸준히 섭외와 모집을 통해, 그 수가 많이 늘었지만, 아직 저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또한 회장님의 지시사항인 법무팀도 아직 제대로 된 인선이 이루어지지 않아, 발족도 못한 상태이니,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선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 이야기의 핵심은 정보가 있으면 그만큼 대처하기가 쉬우니, 정보팀을 더욱 보강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맞는 말이니 서두르도록 하세요."

"네!"

정 실장이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제 생각은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기존 재벌들의 비토를 받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존재벌들로부터 질시를 받는 것은 너무나 빠른 성장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이는 회장님이 올해 그룹 발족 시 언명한대로 내실 경영을 하다보면, 당분간은 외적으로 크게 도드라지진 성장을 하진 않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딱 한 가지만 보완하면 됩니다.

우리가 질시를 당하는 이유 중의 또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회장님부터 최상층의 경영진이 모두 젊다는데 그 한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보완하자면 외부에서 긴급 수혈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직함은 부회장 정도가 좋겠고요. 성품은 강직해 어디에서나 소신껏 우리를 대표해 발언할 수 있는 인사, 외풍을 차단할 수 있는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인사를 섭외해, 부 회장 직에 앉히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 아닌가 합니다."

"듣고 보니 가장 좋은 방안이군요. 그런 인사로는 누가 좋겠습니까?"

"그 문제는 신중할 필요성이 있으니, 다음 회합에서 한 사람씩 천거하는 것으로 하죠."

"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날 모임은 파했지만, 다음날 모임에서는 각자 한 사람씩을 천거했는데 거론된 인사는 다음과 같았다.

이 실장은 현 외무부 차관으로 있는 노 신영 씨를, 정 실장은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인 진 의종 씨(훗날 국무총리까지 역임)를, 나는 얼마 전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있다가 잠시 쉬고 있는 신 현확 씨를 천거했다.

우리는 이 세 사람을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다가 결국, 내가 천거한 신 현확 씨를 제1 초빙자로 선정하고, 적극 이 사람과 교섭을 진행하기로 했다. * * *그러나 신 현화(개명) 씨와의 교섭은 쉽지 않았다.

정 비서실장이 백지 위임장을 들고 찾아가 한국 최고의 연봉을 제시해도 그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정 실장이 세 번, 내가 세 번을 찾아가 애원을 해도 그는 여전히 정중하게 고사할 뿐이었다.

난항에 부딪힌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월성1호기 수주 계획도 끝내 난항에 부딪쳐 우리의 수주가 백지화 되고, 원점부터 다시 출발할 상황에 놓였다.

이것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오히려 잘 나갔다.

호출된 원자력공학박사 출신인 이 상백 사장이 그 해박한 지식으로 건설부 장관을 설득하자, 그 깐깐한 건설부 장관도 그의 해박한 지식은 물론 실무적 경험에 의한 충분한 논거에 앞 뒷발 다 들고, 이를 승인하고 대통령의 재가 까지 획득했다. 이로 인해 우리가 환호성을 지르는 찰나에 일은 엉뚱하게도 미국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올 11월에 대통령이 된 지미 카터가, 벡텔사의 원전건설 참여를 원천 봉쇄했기 때문이다. 벡텔사의 참여가 문제화 된 것은 우리 대원인터내셔날의 단독 건설은 건설부 장관은 물론 대통령도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벡텔사의 참여였다. 이 근거로 닉슨 시절 재무장관을 역임하고, 훗날(82년 레이건 정권 시절) 미 국무장관에 취임하는 슐츠 벡텔사 부사장의 급거 내한해, 정부에 확고한 보장을 함으로써 일은 거의 성사되었다.

최종 우리가 견적을 제시하고, 이를 가지고 정부와의 최종 조율만 남은 상태에서, 엉뚱한 미국 발 제재가 우리의 기쁨을 단번에 앗아간 것이다.

미국 측 당선자 진영의 논리는 이랬다.

아니래도 박 대통령의 독재를 마땅치 않게 생각해, 선거공약으로 주한미군 철수 까지 공약한 그다, 그런데, 우리가 착공하려는 중수로 형은 경수로 형과 달리 핵연료 사용 후, 플루투늄을 추출해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제재에 나선 것이다. 물론 경수로 형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조건부 제재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죽겠는데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왜 견적서도 안 들고 오느냐고 성화였다. 나는 사실을 사실대로 대통령에게 보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오히려 우리를 편애하며 시공권은 줄 테니 어떻게 하든 중수로 형으로 건설하되, 확실한 기술적 노하우를 확보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미 이때 대통령은 확고한 결심이 선 상태였다.

카터가 자신의 공약대로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핵무장을 해서라도 국가를 보위하기로. 이런 데에다가 어떻게 경수로로 건설하자고 하겠는가? 나는 더는 입도 벙긋 못하고, 또 그 쪽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슐츠 부 사장은 물론 벡텔사 회장까지 동원해 카터 진영에 총력적인 로비를 펼쳤으나 결국 허사였다이에 나는 수행원 몇 명만 데리고 급거 미국의 벡텔사로 찾아가 회장과 비밀 면담을 요구했다.

그 자리에서 나의 편법이 그의 승낙을 받아 우리 단독으로 원전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내가 벡텔사 회장에게 제시한 편법이란 것은, 미국에서 벡텔사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니, 해당분야 주요 원자력 기술자들만 자진 사임하는 형태로 해서 우리 회사에 재입사 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식이지만, 저들이 어쩔 것인가? 물론 벡텔사에 일정의 불이익이 돌아가겠지만, 이번 원전참여는 향후 계속해서 건설하게 될 한국 원전건설의 계속적 참여를 보장하는 것에 비하면, 그 손실이 적을 것이라는 나의 설득이 먹혀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니, 부사장 슐츠까지 우리 측에 내달라는 것이었다.

난색을 표시하던 벡텔사 회장이었지만 나의 끈질기고도 집요한 요구에 마지못해 응하니, 슐츠 부사장의 전격적인 대원그룹의 부 회장 취임이 그것 이었다. 처음에는 슐츠의 방출(?)에 희희낙락한 나였지만, 막상 슐츠 부사장이 대원으로 오기로 결정이 되자, 이번에는 그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를 인터내셔날의 사장으로 부임시킨다는 것은 지금까지 공이 많은 이 상백 사장을 축출하는 행위이고, 슐츠를 인터내셔날의 부사장으로 임명하는 것 또한 그의 관록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 된다. 할 수 없이 나는 그를 대원그룹의 부회장으로 전격 영입하는 것으로 모양새를 갖추어 그를 예우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월성1호기 공사는 정부와의 최종 조율을 거쳐, 최종 6,428억 원에 대원인터내셔날로 낙찰되었다. 그 후 월성1호기는 착실한 준비를 갖추어, 77년 5월 2일부터 기 조성된 경주시 양남면의 66만 평의 넓은 부지에서 그 첫 삽을 뜰 수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는 와중에도 나는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신현화 씨의 자택 방문을 늦추지 않았다. 나의 지극한 정성과 나의 애원 즉 수출은 물론 막대한 해외수주를 통해 다량의 외국 달러를 벌어들여, 국민 경제에 이바지함은 물론, 삽교천 방조제 공사, 대원중공업의 무모한 사업, 그 외 국내원전 단독건설 등의 실적을 거론하고, 또 15,000명 이상의 국내외 근로자들에게 한국 최고의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해 애국하는 기업이 대원그룹이다.

이런 위대한(?) 기업이 단순히 타인의 음해와 모략에 의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된다면 국가 전체로 보았을 때 얼마만한 손실이냐? 그러니 단지 국내 사업부만 책임지되, 정치적 외풍만 차단해달라는, 나의 간곡하고 정성어린 조아림에, 그렇게 완강하던 신 현화 씨도 결국 마지못해 승낙하고 대원 그룹에 동참하게 되었다. 물론 그 날짜로 대원 그룹의 부회장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77년 전반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의 90%는 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 그룹 부회장에 취임한 신 현화 씨에 대해 소개하면 이렇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원 역사에서 이 사람은 대통령 시해 전 부총리로 기용되어 일하다가, 시해사건 후 자동으로 국무총리가 된 사람으로, 전 두환 세력이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할 것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최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자, 허수아비 국무총리는 할 수 없다고 전격 사임한 강골이다. 아무튼 이로써 나는 두 명의 부 회장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슐츠 부회장은 해외담당, 신 현화 전 보사부 장관은 국내 담당 부회장이 되어 임무를 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76년 11월 30일 수출의 날에는, 1년 간, 총 2억6천5백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한 대원실업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1억불 탑을 연속해서 수상함은 물론, 금탑산업훈장까지 수여받았다. 이 자리에는 공로가 많은 대원실업의 신 선우 사장이 직접 참석해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기도 했다.

그 후, 우리는 바로 종합상사 인가를 정부에 신청했다, 자격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77년에야 100억 불 수출을 달성하는 우리나라에서 2억 불 수출은 2% 이상을 달성한 것이고, 해외지사 수도 지정요건인 30개를 넘어 전 세계에 40개가 넘는 현 실정이다. 그러니 정부로서도 종합상사로 지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 금년(77년) 3월에 재벌의 예비 면허장으로도 불리는 종합상사로 대원실업이 지정을 받아, 그룹 내의 대대적인 포상은 물론 포상에 따른 인사 개편을 단행해, 기존 재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질시가 두려워 사내 유공자들을 표창하지 않을 수는 없잖은가! 참고로 우리가 12번째 지정을 받은 것이니, 그룹의 위상을 알만할 것이다.

아무튼 포상 인사의 대표적인 수혜자로는 새벽까지 일을 하다가 해장국 사건(?)에 연루된 최병열 전 과장(수상 당시는 진급이 되어 부장)이, 후에도 열심히 일을 하여 수출에 큰 공헌을 한 관계로, 전격 이사급인 수출본부장에 기용되기도 했다. 그 외 전략 기획실에는 내 명대로 장순필 이라는 검사출신의 거물을 영입해 법무팀을 발족시킴은 물론, 이 실장의 건의로 세무 전담팀도 꾸려졌다. 그리고 경호과도 팀제로 변경되어 1팀 2팀 체제를 갖추었는데, 1팀은 나의 전담 경호를, 2팀은 부회장 및 여타 VIP나 VIP급 해외 바이어를 경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 정보팀은 더욱 보강이 되어 3팀 체제를 갖추고, 국내외는 물론 기밀공작까지 할 정도로 역량과 인원이 대폭 증강되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어느덧 7월도 하순에 접어들어 나는 방학을 맞았다. 방학을 맞고 보니 새삼 나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군대 문제다. 회귀 후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이놈의 군대만은 어떻게 하든지 피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전생에서도 군 제대 후 몇 번에 걸쳐 군대를 갔다 왔는데도, 또 군대를 가라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만큼 남자에게는 제일 피하고 싶은 1순위 대상이 군 문제일 것이다.

내 현재의 여건이나 지위로 보아, 피하려면 어떻게 하든 방법은 있을 것 같다. 하다못해 방위산업체로의 위장취업을 한다든가, 정 뭣하면 대통령과 독대를 해서라도, 지금까지 나의 국가에 대한 헌신과 국위선양을 이유로, 면제해달라고 간청을 한다면, 어쩌면 획득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엄연히 작년에 병무청의 신체검사에서 현역1급대상자 판정을 받은 내가, 이 임무를 회피한 다는 것은 앞으로 나의 인생 항로에 있어서,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방학 내내 나는 많은 번민과 고민을 했지만 결국, 이제는 대한민국 누구나 알아주는 공인인 이상 떳떳하게 군복무를 마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홀연히 학교를 찾아가 휴학계를 제출하고 나니, 바로 입영통지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1977년 9월 23일 자, 논산 훈련소로의 입영 통지서였다.

입영통지서를 받자마자 나는 외국에 체류중인 사장들 까지 귀국시켜, 긴급 간부확대회의를 주재했다. 여기서는 내가 없는 공백기간 동안의 업무 분담과 만약 비상상황 발생 시 적용할 시나리오를 3단계로 만들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함은 물론, 평소에는 비서실장이 최소 한 달에 한 번 나를 면회하여, 회사 상황을 브리핑해, 나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물론 상황이 아주 급박하게 돌아갈 때는 군의 내부 통신을 이용하거나, 면회를 통해 나의 지시를 받는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이렇게 어느 정도 회사에 대한 대비가 끝나자 비로소 나는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겨 비서진과 경호팀은 물론 정희와도 송별연을 했다. 그리고 청주로 내려가 가족들과도 하룻밤을 보낸 후 나는 결국 9월 23일 아침 논산행 기차에 몸을 싣는 몸이 되었다.

---------------------============================ 작품 후기 ============================오늘은 댓글을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 해보렵니다. 댓글 중 상대의 댓글을 읽고 비방하는 행위는 문화인으로서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하렘 문제니 선정적인 글을 원하시는 분은 이 글보다는 제 작품인 려한삼국지나 강한 남자를 한 번 봐주시길 권합니다.

이 글에는 그런 부분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전혀는 아니고, 필요한 부분에 가서는 과감한(?) 묘사로 당시의 분위기를 제대로 전할 예정입니다!

^^좋은 날들 되시고, 많은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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