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제 대통령-47화 (47/135)

< -- 위기를 대비하다 -- >

2이튿날 10시 30분.

나는 아직도 상기된 얼굴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흥분된 상태는 나만이 아니고, 발표 현장에 참여했던 사장단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차에서 속속 내리는 그들 역시 상당히 들떠있는 모습이다. 10시 정각, 발표를 기다리는 침묵의 순간, 두바이 발전소 3기 및 일괄프로젝트 낙찰자로 먼저 대원-싸이펨 엔지니어링이 거명되고, 견적가로 2억4천2백만 달러가 최종 불리어지는 순간, 우리는 모두 감격을 금치 못하고, 서로를 얼싸안았다가, 이내 두 손을 번쩍 치켜든 채 환호성을 지른다.

와.........!

지금도 그 함성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하다. 이 공사의 금액이 기존의 공사에 비해 크지는 않지만, 나로서는 다른 공사보다도 더 큰 기쁨을 느꼈다.

다른 공사와 달리 이 공사에 대해서만은 전혀 전생의 기억이 없어서, 발표 순간 까지 초조하게 현장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들뜬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바로 호텔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산책한다. 다행히 날씨도 나의 편인지 세우(細雨)가 내려 덥지 않고 좋다.

내가 가랑비를 맞으며 호텔 주변을 거닐고 있자, 재치있게 라니아 양이 커다란 우산을 받쳐들고 나를 따른다. 고의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살짝 내게 기대어 그 풍만한 가슴이 내 등에 어필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느껴지는 흥분감 때문에 느낄 수가 없다.

나는 전면에 우뚝 버티고 서있는 야자수의 굵은 밑동을 바라보며 라니아 양에게 말한다.

"잠시 후 11시면 라니아 양은 나를 수행해 싸이펨 사장단과의 회합에 참여해 통역을 해야 합니다. 물론 정식 대화는 사장 본인이 직접 말을 하던, 통역을 통하든 영어일 것이나, 회담도중 회담 내용이 고착되거나 무슨 문제가 있을 경우, 분명 저들은 저희들끼리 이탈리어로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한국어로 그들의 말을 잘 전해주세요."

내 말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때 주의할 것은 나를 바라보지 말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할 것이며, 저들의 말에 표정 변화가 생겨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내 말 뜻을 알아들으셨겠지요?"

"네. 절대 실수 없이 해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대원해운에 파견나가 있을 때와 지금 비서실 근무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어느 일이 더 마음에 드는지요?"

이 말을 끝내고 나는 그녀의 표정 변화를 살피기 위해 그녀를 유심히 쳐다본다. 당연히 전에 그녀의 고개는 들리어져, 그녀의 시선은 내 인중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다.

"저는 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이 순간이 행복하고 더 편안합니다."

"당연히 아부겠지요?"

"네? 무슨 섭섭한 말씀이세요. 이 라니아를 아부나 하는 가벼운 여자로 보셨다면 그것은 회장님의 크나큰 실수예요."

'이런........!'

명백히 이건 내 실수다. 나의 농담을 하고자 한 발언이 그녀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는지 눈물마저 글썽거리며 항의를 하고 있다. 나는 급히 사과를 한다.

"이건 명백한 내 실수입니다. 미안합니다. 농담으로 가볍게 한 이야기가 라니아 양에게는 상처가 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농담도 절대 그런 농담은 하지마세요."

"알겠습니다."

나는 머쓱하여 전면만 바라보고 걷는데, 무엇이 물컹하고 또 내 뒤를 자극한다.

"화나신 것은 아니죠?"

이렇게 되면 내 처신이 더욱 곤란해진다. 나는 계속하여 전면만 바라보며 말한다.

"서로의 문화 차이를 이해 못한 분명한 내 실수인데 화날 일이 뭐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일을 해나가면서 섭섭한 일이 생기면 지금과 같이 즉각 즉각 말씀하세요. 그래야 서로 간에 오해가 없습니다. 오해가 깊어지면 곧 불신이 생기는 법이지요. 이는 결국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단계 까지 몰 수 갈 수도 있는 문제이니, 서슴치 마십시오."

"회장님, 감사해요. 저도 앞으로 좀 더 인내를 갖고 생활 할 것이며, 하루 빨리 한국의 문화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개를 든 그녀의 다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감사하고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앞으로 서로를 이해하는데 인색하지 맙시다."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술만 한 것이 없다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시면 술 한 잔 꼭 사주 세요. 네?"

쌩긋 웃으며 재차 의사를 확인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급히 시선을 돌린다. 확실히 그녀의 웃음은 만인에게 특히 성인 남성들에게는 고혹적이다 못해 아주 치명적인 유혹이다.

"험, 험........! 분명 그럴 기회가 있겠지요."

우리의 대화가 여기 까지 이어지고 있을 때 정윤희 양이 큰 우산을 받쳐들고 나타나 말한다.

"회장님, 회담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알겠습니다. 들어가실 까요?"

"네~!"

말끝이 올라가며 경쾌하게 대답하는 라니아와 나를 위해 한쪽으로 비켜선 정 양의 표정이 대비된다. 어딘가 그늘이 져 보이는 표정이다. 나는 즉흥적으로 그녀에게 말한다.

"우산 접고 안으로 들어와요. 함께 들어갑시다."

"네, 회장님!"

급격히 밝아진 얼굴로 금방 우산을 접고 내 옆으로 뛰어들어 나란히 걷는 정윤희 양이다. * * *장방형의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각각 오인씩 앉아 있다.

우리 측은 나를 기준으로 우측으로 라니아 양과 정 비서실장, 좌측으로는 엔지니어링의 최 사장과 실무자인 김명도 차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저들의 소개로 알게 된 저들의 배치도는 마르조 쿠르치 사장을 중심으로 우측으로는 푸른 눈에 코가 날카롭게 생긴 통역녀와 고문, 좌측으로는 수석 엔지니어와 현장 소장이란다.

양측 인물의 소개가 끝나자 서로 반갑다고 오래도록 손을 잡고 흔들던 우리는 곧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수를 들며 회의에 들어간다. 마르조 쿠르치 사장이 모두 발언을 한다.

"우선 두바이 발전소 건설공사의 수주를 먼저 축하드려야겠군요. 참으로 부럽습니다만 앞으로 우리 역시 더욱 낮은 견적가로 경쟁을 할 것이니 잔뜩 긴장하셔도 좋습니다."

"하하하........!"

양측의 동시 웃음이다. 영어로 이탈리아 사장이 발언을 하는 까닭이다. 나만 조금 뒤늦은 웃음을 가볍게 흘린 상태다.

"농담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저가 공사는 당분간 지양할 예정입니다. 어느 회사라고 수주를 마다할까마는, 당장은 수주해 놓은 물량도 다 소화를 못해낼 판이니,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금번 인도의 파이프라인 공사는 어떻습니까? 해볼 만한 공사로 판명은 되셨는지요?"

내가 답변에 나선다. 물론 한국말이고, 동시통역이 진행된다.

"물론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만, 솔직히 난공사라 들어 견적가가 마음에 드실 라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견적가를 가지고 실랑이이다.

"충분히 공사가 가능하다면야 견적은 얼마든지 절충이 가능한 것이니 계속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나가 봅시다."

그 말을 받아 내가 한 번 찔러본다.

"사장님은 얼마를 예상하고 계십니까?"

"하하하........! 발주자가 먼저 금액을 제시했다는 예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만?"

나의 말이 불쾌했는지 그의 표정이 조금 굳는 것이 보인다. 역시 녹록치 않다.

"불쾌하게 들렸으면 양해하십시오. 금번 우리가 제시한 견적가는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현지답사를 통해 얻은, 즉 현지의 어려운 여건을 감안한 것임을 사전에 알려드립니다. 여하튼 우리가 가능한 공사 금액은 3억5천만 달러로 나왔습니다."

"뭣이?"

사장이 놀라 펄쩍 뛴다. 진짜인지 오버 액션인지는 몰라도 놀라는 표정이 여실하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옆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가 재미있다.

양쪽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저희들끼리 나누는 대화로, 물론 이탈리아어고, 라니아가 내 지시대로 통역을 해줘서 알아들은 말이다.

'예상보다 비싼 금액을 제시하는군.'

'그 인도 놈들이 지금까지 말썽을 안 부리고 무난히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오케이 해도 무난한 금액인데.........'

'그러나저러나 이번 기회에 저 노란 원숭이들에게 그 지긋지긋한 공사를 떠넘기고 빠져나와야 할 텐데, 부르는 금액이 만만치 않네.'

'저 금액에 떼어줘도 남기는 충분히 남잖아?'

'꼭 그렇지만도 않아. 아무래도 우리 모두가 빠져나올 수는 없으니, 저 정도 금액이면 7~8%의 마진 밖에 안 남을 것 같아.'

여기까지의 통역 내용을 듣자 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표정관리에 들어가 외부로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만 흘리고 있다.

아무튼 이때부터 우리가 제시한 견적가를 가지고 서로 밀고 당기는 피 말리는 접전을 벌이는데, 이것이 종당에는 체력 싸움으로 변질 될 정도로 몇 번의 정회를 선포하며, 11시에 시작된 회의가 자정이 다 되도록 가격절충을 벌인다. 결국 3억2천5백만 달러라는 우리 측의 최종 수정제의를, 저들이 마지못해 응낙하는 형식으로, 인도 파이프라인 공사건은 타결되었다.

여기서 우리의 예상 견적보다 좀 더 많은 금액을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마지노선을 대충 예상한 내가 회담을 주도하면서 끝까지 강경 노선을 굽히지 않은 결과다. 외면적으로 우리의 협상대표들에게 내가 매우 뛰어난 협상가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지만, 실제 숨은 공로자요, 1등 공신은 라니아 양이고, 2등 공신은 설마 노란 원숭이들로 얕잡아본 우리가, 이탈리아어에 능통한 통역까지 회담장에 대동할 줄을, 전혀 예상 못하고 자뻑을 벌인 싸이펨의 중역들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로써 하루 사이에 우리는 5억6천7백만 달러라는 경이적인 수주를 이끌어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우리는 그날 밤, 이탈리아인들의 눈을 피해, 내 방에서 조촐한 파티를 개최하며 우리의 작은(?) 승리를 자축했다.

* * *기왕 여기 까지 온 것, 나는 현지에 삼 일을 더 머물며 사우디와 쿠웨이트의 현장에 들러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근로자들을 격려하고, 출국한지 닷새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해서 며칠을 지났는데 신상필벌을 엄격히 적용하는 나로서는 무언가 찜찜하다.

회장실에 조용히 앉아 그때 일을 반추해보니, 라니아 양을 포상하려다 준비해간 돈이 없어서 빈주머니만 만지작거리던 생각이 난다. 물론 현지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다 줄 수도 있는 문제였으나, 그렇게 까지 하기에는 너무 번거로워 추후로 미룬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이다.

'설마 내가 벌써 치매 끼가 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실소를 짓고 있던 내가 비서실장을 슬쩍 불러 금일봉을 준비하도록 한다. 은행 마감 시간에 임박해서야 떨어진 내 지시에 헐레벌떡 달려나갔던 비서실장이 돌아온 것은 잠시 후였다.

내가 거금이 담긴 노란 봉투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뭐를 알고나 있다는 듯이 라니아 양이 다가와 내게 조용히 묻는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커피로 한잔 부탁드립니다."

"네~! 금방 올릴게요."

사실 라니아 양이 스스로 커피 타오기를 자청하기 까지는 비서실장이 지대한 공을 세웠다. 미국 문화에 젖은 라니아 양에게 커피를 타다, 아무리 회장이라지만 갖다 바친다는 것은 굉장한 거부감을 동반한 일이었다.

계속된 정 양의 간접적인 권유에도 이를 마다하고 있는 라니아였다. 아니 마다한 정도가 아니라 공공연히 티격거리고 있었다.

이를 옆에서 계속해서 지켜보던 정 비서실장이 하루는 라니아 양을 불러, 모두가 있는 앞에서 이를 두고 공공연히 혼을 낸다.

"내 라니아 양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죠."

"네, 말씀하세요."

"우리 회사가 어느 나라에 위치하고 있습니까?'너무나 당연한 질문에 의아함을 금치 못한 라니아가 비서실장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답한다는 투로 대답한다.

"당연히 한국이지요."

"그렇다면 라니아 양은 한국 문화와 관습에 익숙해질 필요성과 각오를 갖고 있습니까?"

"당연히 저야 한국문화와 관습에 익숙해지려고 오늘도 노력하고 있는 걸요."

"그렇다면 그게 뭔 수작입니까? 미국과 달리 한국은 비서의 임무 중에 커피심부름도 포함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를 공공연히 거부하다니요? 정말 회사에 근무할 의향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태도는 또 뭡니까? 상관이 지금 훈계를 하고 있는데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태도는, 대체 어디서 배운 버릇입니까? 미국에서도 이 정도면 실례 아닙니까? 앞으로 우리 회사에 근무할 의사가 있다면, 철저한 한국인이 되든지 아니면 당장이라도 사표를 쓰세요!"

단호한 비서실장의 말에 너무 충격을 받은 라니아 양은 울먹임도 잊은 채 계속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야, 정 비서실장의 노여움이 풀려, 그의 면전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고난 후에야 비로소 오늘과 같이 자진해서 커피를 타오겠다고 나온 라니아 양이고, 오늘은 그 연장선상의 한 회에 불과하다.

아무리 상사라도 지금은 여사원들에게 커피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실례고, 못마땅해 하지만 당시는 이것이 공공연한 의무이다시피 한 시절이었다. 아무튼 라니아가 점점 우리 회사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점점 한국인화 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라 하겠다.

그럴수록 나의 회사 생활이 편해지겠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오늘부터는 또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가아겠군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늘 활기차고 쾌활하게 하루를 꾸려나갑시다!

^^오늘도 성원해주신 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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