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비 재벌의 사소한 나날 -- >
5나의 말이 이어진다.
"우리 회사에 들어와 전부터 관심이 많다던 의류사업 분야의 사업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럼, 별도 회사를 하나 차린다는 것입니까?"
나의 말에 질문은 오히려 정 실장이 한다.
"네, 의류패션 분야로."
"글쎄요. 사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관심은 가지만 아직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서 이렇다 저렇다 답변하기가 곤란하다는 말씀이시겠죠?"
"네, 그렇습니다."
"결단이 서면 우리 사무실로 한번 찾아오십시오. 그러면 내 전폭적으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오늘 제가 술을 안 살 수가 없겠네요. 추후 술값은 전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오늘 물주가 있습니다만........."
"하하하.........!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회장님의 영광스러운 제의를 받고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은데, 그까짓 맥주 몇 잔 값이 대수겠습니까?"
"후회하기 없깁니다."
"아무렴요. 얼마든지 자시십시오."
아무래도 나는 3인방들이 몰려올 것 같은 마음에, 다짐을 둔 말이지만, 안 사장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직은 모르니까, 속이 덜 쓰릴지도.
"헤헤헤, 오늘 술값 굳었는데 다음에 제가 한 번 더 모시죠."
"됐습니다."
정 양의 제안을 내가 손을 들어 사절하자, 정 양이 갑자기 고개를 푹 떨군다. 그리고 작게 말한다.
"내 마음도 몰라주고."
주변의 소음에 이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 아파요?"
표정을 고치고 짐짓 씨익 웃으며 정윤희 양이 말한다.
"지조가 있죠, 한 번 사기로 했으면 끝까지 사야죠."
"저는 이걸로 족합니다만........?"
"안 됩니다. 다음에 제가 조용한 곳에서 한 번 더 모시겠습니다. 아셨죠? 회장님!"
그런데 자세가 과장된 것이 영락없는 술 취한 사람의 모습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까지 말하는데 더 사양하면 예의가 아니죠."
갑자기 정 윤희 양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고마워요. 회장님!"
제 돈 쓰게 했다고 고맙다니 뭔 말인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이렇게 분위기가 피어나는데 갑자기 밖이 왁자지껄하더니 한 팀이 몰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 단골인 3인방에 그동안 못 보던 박헌도 과장까지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다. 그들의 가세에 분위기는 한층 더 왁자해지고, 나는 이를 예상 못했을 안 사장에게 삼가 애도(?)를 표한다.
* * *다음 날 아침.
나는 출근 시간인 8시에 맞추어 회장실에 나타난다. 아침 일찍부터 정 실장과 함께 우르르 한 팀의 경호조가 나를 주택으로 맞으러온 결과다.
거기서 나는 네 명의 경호원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지만, 어제의 과음으로 잠이 덜 깬 나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다.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뉴딜정책으로 유명한 그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원사 하다못해 주방에 일하는 흑인아주머니 하나, 하나 까지, 그 바쁜 와중에도 그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하고, 그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주어 호감을 샀다는데, 이것은 절대 아니다. 영어에 'three shadow cabinet'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삼인의 그림자 내각' 내지는 '그림자 각의'쯤 되겠다. 이것이 뭔 말이냐 하면 이렇다.
대통령의 측근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발사.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 차를 모는 운전수 등 주로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는 업무가 대통령의 목숨과 직결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해서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막말로 이발사가 면도를 하는 도중 그 날카로운 칼로 갑자기 대통령의 목을 칠 수도 있는 것이고, 주방 사람들은 음식에 독을 넣을 수도 있다.
운전수 또한 여기에 속하는데, 운전수가 미친척하고 강물로 뛰어들거나 장애물로 돌진하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상상을 해보라. 경호원은 그래도 지체가 있어 이 범주에 들지는 않지만 경호원 역시 고위험 군에 속하기는 마찬가지다.
항상 총을 휴대하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을 살해하기는 여반장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문고리 권력은 절대 가볍지 않고, 대통령들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한은 여간해서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대체로 그들의 청을 들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그들의 파워가 막강해 생긴 말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측근 경호원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 그들의 충성도를 먼저 헤아려 임명한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좋은 머리로 그들의 이름을 전혀 기억 못하고 있다는 것은 나의 큰 불찰이라 하겠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즉각적으로 바로 은밀히 정 실장을 불러 그들의 이름을 알아내고는 단단히 기억한 바 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다음 부분을 보시게 되면 알게 된다.
아무튼 내가 회장실에 출근하니 정 양이 먼저 출근해 반갑게 나를 맞아주는데 어제 술 먹은 것은 전혀 표시가 나지 않아 좋다. 내 지시에 의해 무엇보다도 먼저 전 새로 뽑힌 전 경호원들이 회장실로 불려 들여진다.
청와대 근무한 경력대로 직급이 주어졌는데, 그 중 으뜸은 아침에도 나를 맞으러 왔던, 과장 강만길 이라는 사람이다. 훤칠한 키에, 마른 체형,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인 삼십대 후반의 남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는 인사를 생략할 걸 그랬습니다. 강만길 과장님!"
아침에는 술에 취해 흐리멍덩한 눈빛이더니 그래도 단단히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자. 눈이 번쩍 뜨여지며 엷은 미소로 다시 한 번 자신을 소개하는 강만길 과장이다.
"과장 강만길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아니 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부동자세로 한 손만 내밀어 결의에 찬 눈빛으로 절도 있게 말하는 그를 보니 왠지 신뢰가 간다.
"다음은 석 대식 계장입니다."
"계장 석 대식입니다. 목숨으로 모시겠습니다."
삼십대 중반으로 썩 잘 생긴 미남에, 간단하나 씩씩하게 말하는데,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다음은 박 영준 계장입니다."
"다음은 김 철용 계장입니다."
다음은 조 만희 주임, 이 춘동 주임........ 다음은 누구, 누구 하며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나와 손을 맞잡는데, 내 속에서는 이런 비명이 터진다.
'하이고, 이름 하나 기억하기도 힘드네!'
그들의 소개가 끝나 그들을 내보내고 다음은 정보 요원 다섯이 들어온다.
사람이 다섯인걸 보아하니 내 지시로 걸러냈던 사람을 다시 채용한 모양이다. 정 실장이 소개하기도 전에 자신부터 소개를 하는 사람이 있다.
"정보 분석 과장 고 민석 입니다."
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 실장에게 향해 입으로만 묻는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오?'
그렇다는 듯이 정 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의 행태에 눈치를 채고 쓴웃음을 짓는 그다. 사람 앞에다 두고 이것은 실례다. 나는 이런 무례를 벗어나기 위해 재빠르게 묻는다.
"그 뿐이오?"
"네?"
내 말뜻을 이해 못하고 즉각 반문하는 그다.
"소개가 왜 이렇게 짧으냐고요?"
"정보원의 첫째 원칙이 입이 무거워야 됩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이제는 습관이 된 모양입니다."
"좋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이거야 원, 눈치 없는 놈은 말뜻도 이해 못하게 짧네.'
내 속 생각과는 아랑곳없이 선례에 따라 자발적으로 저희들이 소개를 해온다.
"계장 성 낙원입니다."
"계장 여 춘필입니다."
"계장 송 준백입니다."
"계장 이 낙청입니다."
"어찌 간부들만 있지?"
"모두 오래된 경력자들입니다. 앞으로 추가 모집을 통해 하위자들을 채워 넣을 생각입니다"
정 실장의 말을 음미하며 내심 중얼거린다.
'경력자들은 그만큼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라....... 그야 그렇지.'
맞는 말이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다. 그들을 내보내고 나는, 이제야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며 다음 업무를 생각한다. * * *그날 오후 퇴근 무렵이다.
뜻밖에 정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윤 정희라는 사람이 누구죠? 바꿔 드릴까요?"
"네, 잠시 받아보죠."
내가 전화를 받으려 전화기를 집는데 정 윤희 양이 혼자 중얼거린다.
"성이 다르니 동생은 아닌데........?"
"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총무과에 친동생이라고 했지롱~!"
혀를 내밀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 한편으로는 총무과의 행태가 괘씸하다. 신분 확인도 제대로 않고 전화번호를 함부로 가르쳐준 꼴이니까. 나는 생각을 접고 그녀에게 몰두한다.
"잘~ 하고 있다. 용건이 뭐야?"
"내일 나 같이, 입학식에 가면 안 될까?"
"회사는 어떻게 하고?"
"모레부터 정식으로 근무한다고 통보했어. 그 바람에 오늘은 괜히 월급산정도 못 받고 헛고생 했지만."
"핑계는 뭐라고 대었는데."
"친 오빠 입학식이라고 둘러댔지, 뭐."
"잘 한다, 잘 해! 그렇게 까지 했는데 못 오게 하면 삐치겠지?"
"당연하지. 나 택시 타고 갈게."
"그러지 말고, 아침 일찍 차를 보낼 테니, 주소 부르고 이모네 집에 기다리고 있어."
"알겠음. 사랑해~! 메~롱.......!"
찰칵 전화를 끊는 그녀의 행태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들어 올리다가 슬그머니 정 양의 눈치를 보며 손을 내린다.
"그 아가씨는 누구예요?"
"잘 아는 동생으로 대원건설에 취직시켜준 아이야."
이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주소를 안 알려주고 끊었네. 할 수 없이 나는 다시 전화를 연결토록 해 그녀 이모네 집의 주소를 받아 적는다.
그곳의 전화번호와 함께.
바로 이어 또 하나의 전화가 걸려와 받아보니 아버지 어머니시다.
내일이 아들의 입학식이라고 미리 상경하신 모양이다.
나는 급히 근처 다방에 계시라 하고 차를 보내 이제 내가 살고 있는 주택으로 모신다. 그리고 나는 이어 바로 집에 전화를 걸어 가정부 아주머니께 특별한 저녁상을 부탁드린다.
* * *그날 저녁 내가 거주하는 집.
내가 막 퇴근하는 길이다.
늦게 내 집에 오실 부모님을 생각해 잔무를 처리하고 일부러 늦게 퇴근하는 길이다. 그 덕분에 정 실장과 정 윤희 양이 퇴근도 못하고 같이 바빠야 했다.
정 실장이야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니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정 윤희 양은 입이 삐죽 나올 줄 알았더니 반대라 내 기분이 썩 괜찮았다.
"이제 오니?"
나의 경호원들과 함께 요란한 등장에 금방 내 퇴근 사실을 아시고 현관 밖까지 마중을 나오신 어머니의 말씀이다. 아버지는 묵묵히 나를 지켜보고만 계신다.
"네, 아직 쌀쌀한데 들어가시죠."
"언제 이 집은 장만했니?"
말도 없이 이런 큰집을 장만했다고 내심 서운해 하시는 모양이다.
"나도 어제야 알았습니다. 회사에서 내 입학식에 맞추어 미리 준비해 놓은 모양입니다."
"알았다. 벌써 저녁준비 다 됐으니 먹으면서 얘기하자."
앞장서시며 하시는 말씀이 내 말을 변명으로 알고 계신 것 같다. 평소 사업에 대해 부모님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없는 나이니 당연히 수용해야지 어쩌겠나. 그런 일로 한편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이렇다.
작년 오월 달에 아버지 명의로 종합소득세가 날아왔는데, 아버지는 너무 깜짝 놀라 기절할 번하셨다 한다. 왜 아니겠는가! 내가 벌여놓은 사업이 모두 아버지 명의로 되었으니, 종합소득세가 엄청 나왔을 것은 기정사실. 이에 부랴부랴 세무서에 알아보고 전문 세무사를 고용해 절세를 한다 해도 아버지가 고물상으로 번 돈으로는 턱도 없어, 땅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 세금을 낸 웃지 못 할 사연도 있다.
각설하고 식탁에 앉으며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
"저 사람들도 함께 식사를 해야 되는데, 자리가 좁으니 어쩌면 좋니?"
"저희들은 드시고 나면 나중에 먹겠습니다. 저희들 상관 말고 편히 드십시오."
대표로 강만길 과장이 말하고 눈짓으로 부하들을 불러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준다.
"아무래도 저 사람들이 너를 지켜주는 것 같은데, 맞니?"
"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터미널에서 깜짝 놀랐다. 웬 덩치 좋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가자니, 영락없이 어디 끌려가는 줄 알고 놀란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전에 자세한 말씀을 드려야 했는데, 미처 거기 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놀라긴 놀랐지만 나중에는 기분이 엄청 좋았다. 웬 큰 차에 듬직한 사람들 셋씩이나 와서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니 마음까지 든든해지는 것 같더라."
"하하하........! 그랬다면 다행이고요."
"사모님! 찬 식습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의 말에 힐끔 그녀를 한 번 쳐다본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어여 먹자. 저 양반 말대로 아까운 음식 다 식겠다. 어서 당신이 먼저 수저 드시구랴. 그런데 쯧쯧........ 저런 고운 인물이 팔자가 그렇게 드셔서야........."
어느새 가정부 아주머니의 신상까지 파악했는지 그녀를 향해 동정을 금치 못하는 오지랖 넓은 어머니시다.
"사업은 잘 되어가는 거지?"
"네, 어머니도요?"
"나야 잘 나가고 있다 만은 자나 깨나 네 걱정이다. 원체 큰 사업을 벌여놨으니, 항상 근심걱정이 떠나지를 않는구나."
"거, 쓸데없는 소리. 큰 아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려고. 그리고 밥 먹으면서 이야기 하면 복 나가. 더는 잔소리 말고 식사나 합시다."
무뚝뚝한 아버지다운 말씀이시다.
"알았어요. 다른 사람도 있는데, 핀잔이 핀잔이야."
쌩 하는 어머니를 달랠 줄도 모르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멀거니 지켜보기만 하시는 아버지시다. 입을 꼭 다문 어머니의 손길이 이제는 분주하다.
꽁치 조림으로 향하는 어머니의 손길에는 어머니의 추억이 묻어 있다. 내륙이라 생선이 귀하고 값도 만만치 않은 가난한 농부의 아내는, 아버지가 오일장에 가시면 일 년에 한 두 번 어쩌다가 사오는 귀한 것이, 꽁치인 까닭이다.
보름달 둥실 떠오른 늦은 밤에, 술에 취해 갈 지(之)자 걸음으로 아버지가
'오동추야 닭이 밝아........'
라는 음정 박자 하나도 안 맞는 곡을, 흥얼거리며 후미진 산길을 걸어오시면, 어린 내손을 꼭 잡고 마중 나가셨던 어머니는, 안도와 더불어 그 손에 들린 새끼에 꿴 꽁치 한 손을 그렇게 반기셨다. 그런 어머니의 젊은 날이 오늘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새삼 밖의 가로등 불빛이 너무 밝아, 마냥 보름달로 착각한 탓만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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