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제 대통령-28화 (28/135)

< -- 일약 스타가 되다 -- >

3그 이튿날.

[숨은 대한민국의 효자 기업 - 외환위기 해결의 물고를 트다][재계의 신데릴라 출현 - 재계의 젊은이들 세계를 상대로 일내다][사상 최대의 해외건설공사 수주 3억 달러 - 사업면허 내주지 않은 정부 입이 100개라도 할 말 없다]방송이 하루 종일 나와 대통령 면담 내용과 우리 기업의 이야기로 떠듦은 물론, 이튿날 보도된 조간신문의 헤드라인 기사 내용이다.

* * *사우디의 아파트 건설 건은 현재 착착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처음에 나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정 사장은 너무 좋아 나를 얼싸안는 만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그 짠돌이가 나에게 양주까지 사주는 선심을 베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무수히 많이 투입될 장비 구입문제를 걱정하자, 자신의 이익금 전부를 투자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간 내에 꼭 아파트 5,000채를 지어낼 테니, 걱정 말라고 나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이에 나는 전적으로 건설 인력을 수급해 송출하는 문제로부터 경험이 많은 유수한 하청업체의 계약에 이르기까지 그의 뚝심을 믿고 맡겼다.

물론 본인이 전적으로 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 공사에서 거둘 수 있는 이익금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내가 대충 500원의 환율로 계산했지만, 정확히는 75년도 환율로 485원이다. 그래도 3억 달러면 1455억이나 되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를 세대 당 단가로 나누면, 2천9백만 원 돈으로 한국의 분양가 2천3백만 원에 비하면, 600만 원이 더 많이 책정된 것이다. 물론 중동은 건축자재가 태부족이라 이를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실어 나른다 생각하면 이익금이 많이 줄지만, 최소한 한국의 분양가보다 낮지는 않으리라는 계산이 선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야 이를 대원실업에서 수출할 것이니, 꿩 먹고 알 먹는 결과가 되니, 더 수지타산이 맞는 장사지만, 단순히 건설의 정 사장 입장에서도 물량이 원체 대규모이다 보니 국내 못 지 않은 이익금을 낼 수 있어, 희희낙락하는 것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아무튼 저들의 공사 허락이 지연되어 내가 망신을 당하는 것은 면한 것이 다행이다.

우리가 박 대통령의 지시로 해외건설업 면허를 손에 넣자마자, 계속해서 나는 저들을 몰아붙였다. 빨리 공사를 재개할 수 있게 선수금을 달라고. 그 결과 원 역사와는 달리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부지 조성 및 터파기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연된 만큼 준공 기간이 늦어지는 것을 그들도 당연히 양해한 후였다. 당연히 선수금도 받은 후였다.

* * *소급해 내 개인 신상의 이야기를 좀 하겠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마침내 고대하던(?) 예비고사 시험 날이 왔다. 11월 12일이다.

내가 왜 이날을 정확히 기억하느냐 하면 이 날이 전생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보고나니 예비고사를 안 본 기계공고 다니던 친구가 고사장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알려주는 바람에, 엄청 비통해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현생의 할아버지는 그 후에도 수시로 받은 건강진단 때문에 아직도 정정하시고 약주도 내 잔소리에 많이 줄이셨다. 아무튼 그 결과는 50문항의 국어, 50점 만점에 50점 만점을 받을 것을 시작으로, 300점 만점에서 282점을 받았다.

이제 제법 커진 기업들을 챙겨가면서도, 이 정도 점수를 받았다는데 대해서 나 스스로 강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렇지만 이 시간 전국에는 울고 있을 수많은 젊은 청춘들이 있다. 이 시험을 통해 대학 진학 희망자의 절반을 탈락시키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이 1차 관문에서 고배를 마시고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여파는 당장 내게도 미쳤다. 정희는 1년 내내 퍼부은 나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1, 2차 지망 모두 떨어졌다.

당시의 제도로는 자기가 진학할 대학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1차 지망, 2차 지망을 써내게 되어있었는데, 실제로 예비고사에 합격해도, 두 지방 밖에는 대학에 갈 수가 없었던 현실적 제약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서울을 1지망으로, 충북을 2지망으로 선택하면, 그 지방 소재의 대학만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나는 이 제도에 의해 서울을 1지망, 충북을 2지망으로 내었다. 정희도 나의 권유에 의해 똑같이 내었는데, 문제는 재수 없게도 금년에는 충북이 전국에서 커트라인이 서울 다음으로 두 번째 높았다는 사실이다.

해마다 충북은 강원 제주와 함께 최하위 권을 다투었는데, 올해는 이를 안 수험생들이 대거 2지망으로 충북을 써내는 바람에, 서울의 합격점이 198점, 충북이 192점을 기록해, 자기 채점 기준으로 190점을 받은 정희는 올해는 정규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불운을 맞았다. 물론 전문대학은 경우가 틀리니 열외다.

학교에서 점수를 받아들고 정희를 만난 그날, 한없이 서럽게 우는 정희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달래느라 아주 진땀을 뺐다. 그렇게 공부하래도 안 하더니 기어코 자신의 눈에는 눈물을, 내 가슴에는 비수를 들이대는 그녀의 행태가 미웠지만, 울고 있는 그녀 앞에서 이를 내색할 수도 없는 나는 더 죽을 맛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제 슬슬 본고사가 걱정되었다.

예비고사는 그럭저럭 괜찮게 보았지만 객관식인 예비고사와는 달리 주관식인 본고사는 국, 영, 수 위주로 그야말로 평소 실력이 그대로 나타는 바, 아무래도 회사의 일 때문에 조금은 공부를 등한히 하게 된 나는, 본고사에 솔직히 내가 원하는 상대(商大)에 합격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에도 법대, 상대, 의대는 대학 중에서도 최고의 점수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거기에 서울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대한민국의 수재라는 수재는 다 몰리는 곳이 그곳이니까.

나는 내가 진학할 과를 가지고 담임선생님과도 의논한 결과 담임선생님도 나와 같이 상대는 어렵다는 의견이셨다. 그래서 나는 에라 모르겠다.

재수는 싫고 서울대라는 명문의 타이틀이나 얻고자 비교적 쉬운 자원공학과에 원서를 내었다.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쉽게 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도 과 수석이라는 영예도 안았다.

일단은 기뻤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비록 재수가 싫어 안전하게 하향 지원해서 합격한 것이지만, 일단은 합격한 것이 좋았다.

그것도 과수석이라는 영예로.

내가 기뻐하는 시간에도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 어느덧 운명의 날인 1976년 2월 16일이 점점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흘 전, 그러니까 2월 13일.

나는 부랴 부랴 신 사장과 정 비서실장 그리고 정윤희 비서를 데리고 현지로 날아갔다.

물론 현지에는 공사 때문에 미리 리야드에 가 있는 건설의 정 태수 사장은 물론, 인터내셔날의 이상백 사장, 그리고 현지 지사장 최인준 여타 인접 국가에 있었던 원정남, 신태용 이사까지 모두 리야드로 집결하고 있었다. 운명의 주베일 항만공사 입찰 건의 발표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정부에서 발행해준 2천만 달러짜리 지급보증서가 휴지조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사정은 세계가 다 알고 있었다. 실제로 부도가 안 나서 그렇지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이미 부도가 난 것이나 다름없이 취급하고 있을 때였다.

이 사실을 대한민국 국민만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추측이지만 언론을 통제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판이니, 당연하게도 정부보증을 사우디에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더 울며 겨자 먹기로 파드 왕세자의 신세를 져야 했다. 나의 간청에 사우디 은행에서 지급 보증을 해주어 간신히 입찰 심사의 자격 요건을 갖출 수 있었다.

현대 또한 어렵게 나와 같이 사우디 은행의 보증으로 입찰에 참여했다. ----------------============================ 작품 후기 ============================오늘 선작수가 300분이나 늘어 살펴보았더니 20위에 랭크되어 있더라고요!

^^이게 다, 님들의 성원인바, 감사하고요!

^^늘 행복하세요!

^^4종 세트를 주시면 더욱 행복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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